추락하는 계절

by 율구 posted Dec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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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계절




가볍게 던진 말에 걔는 표정이 굳었다. 사랑일 필요는 없는데. 걔는 그게 마냥 미안한 모양이다. 딱 그 정도의 온도에 내가 울었다. 아마도 우리는, 친구 조차 아니었나보다.




-




내 사랑에 대한 정의는 그랬다.

"장난치지마."

<장난>이라고 했다. 그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미래가 무너졌는지, 얼마나 많은 과거가 나를 깔아뭉갰는지 아마 걔는 평생 모르고 살거다.


"우리 친구잖냐."

"...."

"네가 그러면 어떡해."


다음 말은 '미안해'였다. 곧 울 것 같은 내게 한 말이 고작, 우리는 친구조차 아니었다는 사과였다. 내 사랑이 너의 죄책감이 된다면 너랑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던거지.






다른 친구는 거꾸로 생각해보라고 했다. 18년동안 가족처럼 자라온 친구의 고백이 어떻겠냐고? 소용없었다. 아마 걔라면 나는 뭐든 좋았을테니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해본적이 있다. 걔가 이름을 물어봐서, 걔가 넘어진 날 일으켜줘서, 걔가 항상 웃어줘서, 걔가 나를 기다리길래. 아득한 초등생 시절의 기억이다. 아마 그때쯤이었겠지.
아니면 걔를 좋아하지 않았던 순간들조차 좋아져버렸거나.

애초에 결과를 얻고자 시작한 감정이 아니기에 후련함에 가까웠다. 적어도 걔가 나를 위해 울기 전까지는 그랬다.






"춥지 않아?"

함께 12년을 걸었던 하굣길이 캄캄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 걔는 자꾸만 불안해했다.
지금도 그래? 아직도 이 길이 불안해?

"난 별로. 패딩 입었잖아."

걔는 멋들어지는 점장 차림이었다. 내가 발갛게 오른 뺨에 핫팩을 가져다대자 걔가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있지,"

"없는데?"

"아니, 좀.. 그냥 들어봐."


솔직히 말하면 도망치고 싶었다. 너는 두려워 닿지 못할 그 길의 끝이면 적당할거라 생각했다.


"착각일 수도 있는거잖아."


아마 나를 무너뜨릴 말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분명 도망쳤을거다.



"우리가 너무 오래 친구여서.. 네가 헷갈린 걸 수도 있잖아."

"..아니야."

"더.. 더 잘 생각해봐. 나 너랑 멀어지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



너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 들, 아마도 결국 너일텐데. 걔가 불안해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몰라 방황했다.
'친구'라는 이름의 18년인가, '사랑해'하고 말하던 나인가, 내게는 등진지 오래던 세상인가.


말해봐, 네 길은 어디로 가고있는데?
너는 뭐가 두려워 망설이는데? 걔도 답을 알고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웃어버렸다.



"나도 그게 어려워."

"..뭐가?"

"고백하는 거 말야. 그게 어떻게 쉬워? 나도 그거 어려워. 나도 네가 어려워. 네 표정이, 반응이 너무 어려워."



그래서 나도 분명 두려웠는데, 걔는 항상 그걸 몰랐다.



"장난일리 없잖아. 착각일리가 없잖아."



내가 너무 쉽게 걸어서, 내가 너무 덥썩 손을 잡아서. 아마 걔는 그게 나의 용기인걸 몰랐던 모양이다.
오랜 시간, 너를 잡고자 망설였던 수많은 계절이 되돌아온다. 아주아주 추운 겨울뿐이었는데.



"너한테 많은거 바라는거 아냐."

"그치만, 나는.."

"..."

"네가 그러는게 부담스러워."



그 말에 결국 내가 울었다. 딱 그 정도의 온도에 내가 울었다.










안녕. 식은 온도에 걸맞게 적당히 식은 인사가 건내져온다. 나는 내 이기심에 울었다. 내가 너무 아프길래, 네가 너무 모질길래. 너의 고민따위는 한참 뒷전이었다. 아마도 그게 우리를 '친구조차 아닌 사이' 쯤으로 정의했을텐데. 나는 그것조차 몰랐다.



십수년을 함께한 친구는 다르다. 내가 '배고프네' 하면 걔는 편의점을 몽땅 챙겨왔고, 걔가 '힘들다'하면 나는 세 시 전까지 완성해야 하는 서류를 던지고 뛰쳐나갔다. 오분도 채 안남았을텐데.


고작 네가 이름을 물어봤을 뿐인데,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줬을 뿐인데.
사람의 아주 특별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삐걱였다. 내가 울면 적어도 너는 울지 말아야 해. 만약 네가 무너지면 나는 계속 여기 서있을게.


우리는 그렇게 삐걱이도록 반대여야했다. 최악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된다는건 그런 일이었다.



힘들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너는 그걸 어떻게 적었을까. 나는 그게, 봄인줄만 알았다.
너를 위해 십수년은 더 기다리던, 봄인 줄 알고 섣부르게 웃고야 말았다.









"어머니는 어떠셔?"

"그럭저럭."

"좀 더 신경써. 가끔 내려가기도 하고, 전화 매일 드리고."

"내가 알아서 해."



걔는 가끔 그렇게 굴었다. 아, 이걸 어떻게 표현하더라.. 선생님같이? 엄마마냥?

걔에 대한 건 전부 포장된 지 오래라 <다정하게>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저번주에 뵜을땐 많이 안좋아지셨던데."



언제 또 갔대. 아마 걔는 나랑 저가 가족인 줄 알았던 것 같다. 나는 너희 가족을 잘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아득하다.

나만 줬구나. 걔의 세상에 나는 이름밖에 없는데, 나의 세상에 걔는 전부였다.


"바빠서 자주 못가. 요즘 회사 상황 안좋아."

"알아, 그래서 내가 가잖아. 가끔은 생각하라는 소리야."


걔가 어른인 척 굴때, 나는 늘 무너졌다. 내가 여전히 학생이고 네가 어엿한 어른이 되었을때. 캠퍼스로 걸어가는 내 운동화와, 자취하는 원룸에서 삼십분거리의 회사로 걸어가는 너의 구두 사이 간극이 자꾸만 그렇게 만들었다. 거의 벼랑 끝과 같았다. 아무리 발악해도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말하는 것이 걔 다웠다.









어느 여름날을 떠올린다. 아마도 나는 넘어졌고, 걔는 평소처럼 집에 가던 중이었다. 학교에 익숙치 않아서, 동네가 낯설어서, 노을지는 하늘이 아침에 본 만화 속 대마왕같아서. 나는 그맘때쯤의 아이들이 그렇듯 자꾸만 넘어졌다.


그걸 걔가 일으켜줘서는 안됬는데.


"만약에 말이야."


내가 운을 띄우는 동안 걔는 아무말도 없었다. 그게 표정으로 다 드러나서 그만 웃어버렸다. 지금 걔가 두려워하는게 뭔지 알 것만 같아서.


"네가 '가자'라고 하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네가 '먹자'라고 하면 아마 너네집 강아지 똥이라도 먹을껄?"

"야 그건 억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단 들어, 나는 그래."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아마도 우리에겐 새로운 시작이 될 것만 같았다.

시작을 여는 일은 설레면서도 무거운 법이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길래.
적어도 온 몸 바쳐 세상을 비추는 태양 정도는 되야하길래, 홀로 밤을 비추는 달 정도는 되야하길래. 나는 미루고 미뤘다. 내가 지금 이별을 말하고 있는데, 네가 어디쯤인지를 모르겠어. 나는 그게 두려워.

내 오랜 친구야, 너한테 나는 그냥 친구야?
아마 나는 아닐텐데. 이미 너무 멀텐데.




"근데 그거 정말 너때문이거든."

의아한 표정이 나를 마주했다. 나는 두려웠다. 항상 너를 위해 용기있는 사람인 척 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두려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어디로 향할 지 몰라 한발 한발 내딛을때마다 울어야했다.



"네가 나를 일으켜줘서, 이름을 물어봐줘서, 잘가라고 손 흔들어줘서. 다 너때문인데.. 너는 아니잖아."




어떤 표정일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그저 어두운 먼 곳만 응시했다. 그게 너를 잊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마 네가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면. 그때 손 내밀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 나 그런 생각 자주 해. 만약 내가 너를 보지 않았다면, 네가 나를 보지 않았다면.."



말을 잇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에이길래.




"우리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그제서야 네가 보였다. 어두운 공기에 말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싶더라니. 짧게 탄식을 뱉은 걔는 울었다.
미안하다면서, 결국 울고야 마는구나.
결국 내가 너를 울리고야 마는구나. 네가 나를 원인으로 무너지고야 마는구나.







우리는 이게 이별인 걸 알았다. '친구'로써의, 또는 '사랑'으로의. 나는 그것이 불가항력임을 깨닫는다. 결국 내가 졌어.




"나 이제 네가 없으면 일어날 수도 없게 돼버렸잖아. 근데 너는 나를 잡아줄 수 없다면서.. 그럼 어떡해? 내가 넘어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돼?"




불가해한 연민이 사랑일거라 착각한 것은 나다. 멋대로 뻗은 착각이니 걔는 상관없었다. 어쩌면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수많은 겨울 중 유난히 추웠다. 얼굴이고 마음이고 지나치게 추워서 숨길 수 조차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지 않았는데, 새벽 3시까지 나를 찾기에 못이기는척 휴대폰을 들어주었다. 수화기 너머의 의사는 엄마의 병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위급한 상황입니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지금 출발해도 해가 뜬 후일텐데.. 뭉그적대며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나를 찾지않았다. 정말 기다리던 순간이라는 듯 나로부터 멀어졌다. 아픈 엄마는 필연적으로 나를 만나야 한다는 걸 알았겠지만, 나는 적어도 엄마가 나를 위해 피해줄거라 생각했다. 온갖 불행으로 부터 도망치기 위해 미련없이 나를 버리고서도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것도 '용기'로 쳐도 되나.



내 주제와 한계가 거기까지임을 깨달은 지 오래다. 어짜피 내 앞에 놓여진 불행은 거기서 거기고 나는 저항 한번 없이 그 불행이 바라는대로 무너져내릴테니. 최소한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17년 9월 28일 오전 7시 48분, 이미향 환자분 사망하셨습니다."



무미건조한 의사의 말이 가슴으로 꽂혔다. 나를 옮아매던 엄마로부터의 해방이 이유는 아닌 듯했다.




"좀 자. 내가 있을테니까."



나는 끝이길 바랬는데,
세상에 하나 남은 가족을 잃은 내게 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가왔다. 꼭 자기가 더 슬픈 얼굴을 하고선, 어제의 이별은 잊어버린듯이.











관계란 건 보이는 것의 곱절은 복잡해 함부로 잡으려 하면 되려 해를 입을 수 있다. 관계에도 속도가 있고, 높이가 있는 법인데 항상 나는 너무 빨랐고, 너보다 컸다.
나는 우리가 그때 '완전한 이별' 앞에 선 줄로만 알았다.



내가 안녕, 하자 너도 안녕, 했고 그게 끝이었다.

너 없이 일어서는 방법에 대해 알려달라던 나의 터무니없는 부탁에 걔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웃었는데, 그 웃음이 내가 짓던 웃음이랑 다를 것 없어 내가 더 비참해졌다. 걔는 눈이 휘휘한게 몇번이고 버려진 새끼강아지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게 정말로, 이별이겠구나 했다.





"생각해봤는데."

"..뭘?"

"네가 말한거 전부. 나는 아마 너랑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좋아."



고맙다는 인사는 생략해도 됐다.



"만약 네가 일으켜달라고한다면..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라도 갈 수 있어."




나 대신 엄마의 아들이 되어줘서, 나를 위해 달려와줘서••



"지구 반바퀴는 무슨.. 너 일본도 안가봤잖아."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아는데 너는 모르잖아. 지구 반바퀴를 돌려면 비행기에서 꼬리뼈를 혹사시켜야만 하는데, 너는 그게 우정이야?"

"그거야 모르지."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섣불리 '사랑해'하고 외치던 나를. 너야말로 착각일지도 모른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내게 오겠단 감정이 정말로 우정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결국 네 이름을 불러버리면 내가 지고 말걸 아니까. 더 이상의 추락이 두려워 그저 보고만 있었다.




너는 항상 내 이름을 불렀다.

나의 오랜 친구야, 나는 이게 사랑이야.











엄마의 식이 끝나고, 꽤 값을 하는 수목원에 뼛가루를 묻어준 것은 걔였다. 어짜피 너 혼자 찾을 일은 없을테니 제 돈내고 알아서 관리하겠단 말과 함께였다. 나는 그냥 수긍했다. 그 사람의 자식이었던건 걔였으니.


엄마를 태우던 날에는 눈이 빨갰다. 내가 아니라 걔가. 그래서 "혹시 울어?" 하고 물으니 걔는 내가 왜 울어, 대답하며 눈물을 흘렸다. 걔는 정말로 나의 가족이었을까.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답이 명확히 나오지 않아 또 한참을 방황했다. 꽃이 핀 것을 보니 봄이 왔는데, 바람이 자꾸만 향기를 샘내는 바람에 첫걸음이 늦어졌다.


조금 따듯해지면, 다시 말하기로 했다.
'사랑해'라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어짜피 겨울은 돌아오겠지만, 봄을 앞에 두고 겨울을 원망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이번에도 그냥 웃어버렸다.







이름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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