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명의 용의자

by 유지 posted Dec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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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1.

김형수, 18살. 피해자와 초등학생때부터 친구로, 피해자와 유일하게 사건 당일까지 연락한 친구.

 "아, 전 진짜 몰랐어요. 민수가 워낙 어두운 애긴 했지만 그냥 괜찮을거라 생각한게 다였죠. 아 어제 왜 연락했냐구요? 어제 오버워치 같이하자고요. 민수를 마지막으로 본건, 한달 전이였어요. 중간 고사 끝나고 PC방에서 같이 서든했거든요."


*

I고등학교 2학년, 18살 김민수는 학교 뒤 공터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사망 원인은 흉기로 인한 과다 출혈 사망. 김민수는 복부와 심장 부근을 칼로 13차례 찔린 뒤, 살해당했으며, 몸 곳곳엔 저항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I고등학교는 ㄷ자 구조로 된 건물로 중앙에 운동장이 있고, 그 주변을 건물들이 감싸고 있었다. ㄷ자 건물을 둘러싼 담을 넘어가면, 커다란 공터가 하나 나오는데, 재개발 지역으로 포함되었을 당시, 주변 건물들을 싹 밀어버렸지만, 실제로 재개발이 이루어지진 않아 텅빈채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사체는 발견될 당시, 정확히 공터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동장 바닥과 비슷한 흙바닥엔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찍혀있었으며, 사체 주변으로 동그란 원이 하나 그려져있었다. 원은 발로 그린 것처럼 삐뚤빼뚤했고, 사체가 사망하던 당시에 생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이미, 뒤 공터로 학생들이 많이 출입하고 있던 탓이었다.

용의자는 총 7명으로, 김민수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던 사람들만 모은 뒤, 취조를 진행했다. 특이점은 없었으나, 김민수가 살해당하기 전, 몇명의 친구들로 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는 소문이 학교 내에 퍼다하게 퍼져있던 상태였기에 쉽게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번 사건을 맡은 김형사는 또 다시 학교를 찾았다. 범인은 분명 학교에 있을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학교 뒤의 공터는 웬만한 학생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4년간 일한 교사도 모르는 곳이였으니, 학교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일게 확실했다.

김민수 몸에선 저항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손목과 발목엔 밧줄 같은 단단한 것으로 묶인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그것을 힘으로 풀려고 한건지 밧줄이 감겨있던 주변의 살들 모두 깊게 패여있었다. 경찰들은 김민수가 발과 팔이 묶인상태로 그곳까지 끌려갔을거라고 짐작했다.

슬프게도, 밧줄과 흉기는 발견 되지 않았다. 그저, 김민수의 등 부근이 벽돌에 쓸린 듯한 자국이 있는걸로 봐선, 공터까지 끌려가는 내내 수없이 발악을 했을거라고. 김형사는 추측했다. 

사건현장에 남아있는거라곤, 희미한 발자국과 깨진 라이터 조각 뿐이었다. 피해자의 몸에선 그 어떤 지문과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발자국은 이미, 수없이 많은 학생들이 오고 간 뒤라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거라곤 라이터 조각뿐이였지만, 그곳에서도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김형사는 그 라이터 조각에 단서가 남아있을거라고 추측했다. 라이터 조각이 있다는건, 담배를 피는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한 탓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담배를 피는 사람을 곁에 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김형사는, 학교에서 흔히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모아 조사를 진행했고, 김민수의 과거를 조사했으며, 추리고 추린 결과, 총 7명의 용의자를 꾸릴 수 있었다.

학교측의 배려로, 교실을 취조실로 사용할 수가 있었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였다고 김형사는 생각했다. 교실에서 용의자를 만나는게 더 껄끄러워진 탓이었다. 가뜩이나, 용의자들이 학생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학교에서 까지 취조를 진행하게 되니, 이것저것 신경쓰이는 것이 많았다.

7명의 용의자는 모두 학생이었다. 김민수 주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던 탓에 용의자를 찾는 것도 한참이었다. 용의자들은 김민수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최근까지 연락을 했거나, 살해 동기가 있음직한 사람들을 뽑아 추렸다. 취조를 시작하기 전, 김곽선 형사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해도, 그들은 용의자였으니까.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김형사가 부른 것은, 김민수를 가장 처철하게 괴롭혔다는 가해자 박만준이었다. 만준은 귀찮은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이었다.
 
 "자, 앉아."

김형사는 턱짓으로 맞은편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김만준에게선 희미한 담배냄새가 풍겼다.


용의자2

박만준, 18살. 피해자를 괴롭혔던 가해자. 반 친구들의 증언으론 매일 피해자를 괴롭혔다고 전해짐.

 "아씨, 전 아니에요. 아 물론 그새끼가 좀 꼴보기 싫긴 했는데, 죽일 정도는 아니였어요. 전 걔 때린적도 없다고요. 마지막으로 본거요? 주말이였나? 그때, 제가 돈 좀 꿔달라고 해서 걔네 집 앞에서 잠깐 만나긴 했어요. 아 물론 오랜 안있었고요. 한 10분정도 만났다가 헤어졌어요. 그게 다에요."

박만준은 말을 하는 내내,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 다리를 떨거나, 입술을 물어뜯거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보이는 행동들을 수없이 반복했다. 

김형사는 박만준에게 한소리 하는 것 대신, 그 행동들을 살피는 것을 택했다. 책상이 덜컹 거릴 정도로 떠는 다리는 원래부터 습관인 것처럼 보였고, 입술 주변의 살들이 많이 뜯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습관인 듯했다. 

그런데 딱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손을 감추는 행동. 박만준은 양손을 포갠채로,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게 왜 이상한일이냐 하겠지만, 적어도 베테랑 형사인 김형사가 보기엔 아니였다. 불안한 행동을 보이는 애들의 특징은, 손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색하게도 손을 무릎에 딱 붙여놓은 것이 뭔가 이상했다.

 "손 좀 보여줄래?"
 "네?"
 "손 좀 보여줘봐."
 "왜, 왜요?"
 "확인할게 있어서."

잠시 멈칫하던 박만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손등이 보이게 내민 탓에 김형사는 직접 박만준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꽤 많이 박혀있었다. 뭘하는 애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손바닥 중앙 부분에는 살색의 밴드를 길게 붙여놓은 뒤였다. 

김형사는, 밴드를 손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밴드는 붙인지 얼마 안된것인지, 때가 타거나, 접착력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은 상태였다. 아마, 이곳에 오기전 붙인 것 같다고. 김형사는 추측했다. 

 "손 치워도 되죠?"
 "그래."

밴드를 떼오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더 이상의 취조는 위험했다. 아직 확실한 것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을 몰아갈 수는 없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박만준은 곧장 손을 빼, 다시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형사가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웃어보였다. 박만준에게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김형사는 뭔가를 쓰는 척하며 박만준을 힐끔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박만준은 양 손을 포갠 상태로 입술을 한껏 물어뜯고 있었다. 김형사는 그런 것 까지 모두, 수첩에 기록해두었다.



-

 "김형사, 뭐 좀 알아낸거 있나?"
 "아, 아직입니다."
 "참, 세상 말세야 말세. 그 고등학생을 누가 그렇게 죽였는지 원."

쯧쯧, 혀를 찬 반장이 지친 기색으로 담배를 물었다.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치고는 놀랄만큼 사건이 처참했던 탓이었다. 사체를 그자리에 그대로 두고 간것도 그렇고, 몸 이곳저곳을 칼로 찔러놓은 것도 그렇고, 범인은 살인에 익숙하지 않은 초범일거라고. 반장은 추측했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반장이 반쯤 남은 담배를 바닥에 툭 떨어트린뒤, 발로 힘껏 지지 밟았다. 이 놈의 담배는 끊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끊을 수가 없었다.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는 탓에 이런거라도 없으면 버틸 수가 없던 탓이었다. 김형사는 옆에 가만히 선채로, 반장이 담배를 다 피울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늘 말이 없는 놈인걸 알았지만, 이럴때보면 참, 특이한 놈 같기도 했다.

 "아무튼 수고해."

꾸벅, 반장을 향해 인사를 건넨 김형사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1주일째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추린 용의자들은 다들 아니라고 내빼기 바쁘고, 알리바이도 확실한 탓에 누구라도 잡아떼기가 참 쉽지 않았다. 김형사는 벅벅 마른 세수를 한 뒤에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배곽을 꺼내들었다. 담배라도 피워야, 이 답답한 속이 좀 풀릴 듯했다.




용의자3

민준희, 19살. 박만준의 여자친구.

 "아, 걔요? 걔는 가끔 봤어요. 얘가 워낙 찐따같아야죠. 맨날 말도 못하고 징징 우는 탓에 우리학교에서 걔 모르는 애는 없을걸요? 마지막으로 본거요? 음, 언제였더라. 시내에서 봤는데, 그 명동 앞에 있는 김밥나라있죠? 거기서 봤어요. 어떤 애들이랑 무리져서 서있더라구요. 그 무리는 처음보는 무리였는데, 교복을 봐선 P고등학교 인거 같았어요."


민준희는 김민수가 살해된 사건 당일, 철물점에서 밧줄을 구매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본인 말로는, 며칠 뒤에 캠핑을 갈 계획이 있어 미리 구매해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이상했다. 캠핑을 간다고 말한 것 치고는, 얼마전 박형사가 찾아간 집에 캠핑 장비가 너무 없던 탓이었다.

민준희는 김형사의 그 질문에 캠핑 장비는 모두 빌리기로 했다며 헤헤 웃어보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김형사가 확인해본 결과, 민준희는 실제로 이번주 주말 캠핑장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밧줄만으로는 딱히,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기에 김형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사건은 길어지고 있었다.

민준희는 짧게 줄인 치마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 것 처럼 보였지만, 김형사는 그 모습에 흠칫 몸을 떨어야만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민준희는 교복 셔츠 단추까지 3개쯤 풀어헤친채로, 어깨를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벌떡 몸을 일으킨 김형사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민준희의 어깨에 덮어주고는, 뒷주머니에 꽂아놓았던 손수건을 꺼내 준희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덮으라고."

나름대로 태연하게 건넨 말임에도, 민준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눈치로 봐선,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남자를 꼬시는 법을 잘 아는 학생이라고, 김형사는 수첩에 기록해두었다. 

어느새 민준희는 손수건을 펼쳐 다리 위에 덮은 뒤, 빙긋 웃어보였다. 삐죽 솟은 눈꼬리가 자꾸만 시선을 붙들자, 이상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김형사는 난감한 기색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김형사를 찾은건, 다름 아닌 박희민 형사였다. 희민 형사는 며칠간의 휴가를 끝내고, 급히 현장으로 투입된 상황이였다. 사건에 대해 얼추 듣고 온 박형사는 끔찍한 일이라며 탄식을 뱉어냈다. 김형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달싹이던 입가엔 한숨만이 피어올랐다.

박형사는 김형사와 함께 P고등학교로 향했다. 용의자 민준희의 말을 들어봐서는, 그곳에 김민수의 친구들이 있을거라고 추측한 탓이었다. 

 "김민수요? 아 걔 중학교때 친구였어요."
 "중학교때?"
 "네, 같이 다녔는데, 고등학교땐 학교가 갈라지면서 자연스레 멀어졌어요."

자신을 중학교 친구라고 소개한 번중은 형사들 앞에서도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눈썹 부근에 뚫어놓은 피어싱이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번중은 잠시 쉬었다 하자는 박형사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팍을 만지작거렸다. 뭔가를 찾는 듯한 행동이었다. 김형사는 서류를 작성하다 말고, 조심스레 번중을 살폈다. 번중은 입을 오물락거리며, 후, 하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2화


용의자4

권승관, 18살. 중학교 동창생.

"누구요? 아, 김민수요? 걔 중학교때 노는애였는데, 걔 중학생때 애들 많이 괴롭혔어요. 돈도 뺏고, 때리기도 하고, 그런데, 걔네 패거리가 있었거든요, 걔네한테 버림받더니 금세 왕따가 되더라고요. 중학교 얘들은 다 인과응보라고 좋아하고 그랬어요. 아, 김민수가 죽은 날 뭐했냐고요? 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학원갔어요. 학원이 밤 12시쯤에 끝나거든요. 학원 끝나고 오는길에 I고등학교 근처를 지나가긴 했지만, 밤이라서 무섭고 그래서 빨리 지나쳐온게 다에요."


-

승관의 말처럼 승관은 사건 당일 학원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었다. 12시 정도에 김민수가 살해당한 I고등학교 근처를 지나간 모습이 근처 CCTV에 포착된 탓이었다. 김민수의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2시로, 12시 정도에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승관은 자신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김형사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까지 사건에 대해 나온 것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푹푹 한숨만 내쉬던 승관은 잠시 쉬었다 하자는 김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관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힐끗 보인 양 손목엔 희미한 고무줄 자국이 남아있었다.


-


박형사와 김형사는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김민수가 중학교때 노는 아이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기껏 쌓아놓았던 틀이 깨져버린 탓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다니, 생각보다 사건이 길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뒤덮었다.

권승관의 말을 조합해본 결과, 김민수가 괴롭혔던 아이들 중에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박형사는 급히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김민수에게 당한 피해자들을 찾아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각, 김형사는 잠시 사무실에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벌써 며칠째 소득이 없는 사건에 헛웃음 만이 튀어나왔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김형사가 라이터를 꺼내려다말고,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라이터를 새로 사야한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니, 저절로 욕지기가 새어나왔다.

 "하, 진짜."

김형사는 불도 붙이지 못한 새담배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한껏 짜증을 쏟아냈다. 모든 게 다 열받는 것들 뿐이었다.


-


용의자 5

최선조, 18살. 중학교때 김민수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피해자.

 "저, 저는 몰라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걔 떄문에 진짜, 얼마나 죽고싶었는데요. 하루가 지옥같았어요. 걔랑 다른 고등학교 가게 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새 친구도 사귀고, 이제야 숨좀 쉬고 살까하는데, 또 다시 걔랑 엮이기 싫어요. 무섭다고요."


최선조는 작은 키에 짙은 눈썹을 가진 학생이었다. 취조를 시작하자마자, 최선조는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젓기에 급급했다. 어떻게든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게 눈에 보여 안타까움이 더했다. 

박형사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선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선조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네 맘 다 이해해, 그냥 물어보는거 뿐이야."

고개를 푹 숙인 선조는 푹푹 한숨만을 내쉬었다. 사실 선조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중학교때 심한 괴롭힘을 당한 이유로, 김민수의 김자만 들어도 온 몸에 치가 떨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욕설, 그리고, 폭행까지. 매일을 죽고 싶었고, 매일을 죽이고 싶었다. 매번 바지 뒷주머니에 커터칼을 가지고 다녔지만, 단 한번도 그것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혹시나, 이것을 사용했을때 진짜로 죽게 될까봐 무서웠으니까.

최선조의 낯은 점점 더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개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만 같아, 박형사는 취조를 진행하는 틈틈히 선조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딱 보기에도 범인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사건 당일 선조는 라이터를 구매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고작 라이터 가지고 어떻게 범인으로 몰아가냐하겠지만, 떨어진 라이터 조각의 색과 선조가 구매한 라이터의 색이 일치했기에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동일한 라이터와 같은 색까지. 아니라고 말하기엔, 뭔가 미심쩍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괜찮아."

박형사는 두 손으로, 선조의 손을 감싸안았다. 긴장한 탓인지는 몰라도, 손이 생각보다 많이 찼다. 조금 진정이 된 선조를 바라보던 박형사가 조심스레 선조의 손을 놓았다. 

순간, 스치듯 바라본 선조의 손에 깊은 상흔이 보였다. 뭔가에 긁힌 듯한 상처라고. 박형사는 생각했다. 상처는 손가락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박형사가 보기엔 충분히 시야를 사로잡을만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상처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형사는 상처를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선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연히 말했다.

 "조금 쉬었다할까?"










-

 "김형사님 아들은 집에 혼자 있습니까?"
 "아니, 어머니 집에 데려다놓았어."
 "고생이네요, 집에도 못들어가고. 아들이 보고 싶어하겠어요."
 "그러게."

박형사의 말에 씁쓸하게 웃어보인 김형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박형사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큰 상관이 없었지만, 문제는 아이가 있는 김형사였다. 김형사의 아내는 몇년 전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뒤였기에 김형사가 없으면, 아들은 언제나 혼자였다. 김형사는 그 사실을 생각하다가, 괜히 말을 돌렸다.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 탓이었다.

 "용의자에게서 나온 것 없지?"
 "네, 별거 없더라고요."

기껏 피해자를 찾았건만, 말을 하기 싫다는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다. 겁이 많고, 김민수를 보는 것도 싫어하는걸로 봐선,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시켜야할 것 같다고. 박형사는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딱 보기에도 사람을 죽일만큼의 배짱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형사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김민수의 사체를 들여다보던 김형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 사체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딱히 나오는 것들은 없었다. 심지어 사체가 발견된 공터에서도 발견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경찰들은 점점 더 깊은 절망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김민수는 흉기에 찔려 사망했지만, 피의 양이 적었다. 바로 그것을 경찰들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칼로 13차례 찔렸다면, 현장에서 발견된 피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발견되어야 정상이였기 때문이었다. 김형사는 그 것을 보고, 이미 그 곳에 오기전 몇차례 찔린 뒤, 사건 현장까지 끌려왔을거라고 단언했다. 그 후, 사건현장에서 몇번 더 찔린 뒤 사망했을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왜 하필 공터로 끌고와서 죽인걸까."

사실 김형사는 그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공터는 학생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였다. 아무리 새벽에 사건을 일으켰다고 해도,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사체는 유기할 마음도 없었는지, 공터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상태였다. 일부러 보게 해놓은 것이 아닌 이상, 말이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인건가? 왜 그걸 보여주려고 한거지? 자신의 범행이 들킬 수도 있을텐데?'

한참을 고민하던 김형사가 한숨 끝에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일단 용의자들을 살펴보고 뭐라도 얻는게 더 나을 듯했다. 애꿏은 머리만 벅벅 헝클이며, 김형사는 형사과를 나섰다. 어느새, 하늘은 잔뜩 어두워진 뒤였다.







용의자 6

김원수, 18살. 중학교때 김민수와 같이 놀던 친구.

 "너무 놀랐어요, 민수가 살해당했다고 했을때 진짜 잘못들은 줄 알고 계속 물어봤을 정도였거든요. 민수는 저희랑 같이 놀았어요. 중학교 3학년 초반까지는 사이가 좋았는데, 3학년 후반부터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거든요. 아, 이유요? 이유는, 그냥 성격 차이였던 것 같아요. 서로 싸우는 일들이 많아졌거든요."


김원수는 복싱선수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과 손 등에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다. 대충 듣기론 얼마뒤에 경기가 있다고 했다. 매일 밤 늦게까지 복싱을 하고 난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서 잔다며, 투덜거리는 입가에도 작은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원수는 사건 당일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던 상태였다. 심지어, 원수가 다니는 복싱장도 I고등학교의 근처였고, 새벽쯤 원수가 학교주변을 맴도는걸 봤다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했다.

원수는 새벽 운동을 하느라 주변을 맴돌았다고 했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김민수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말을 하는 내내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것도 그랬다. 박형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원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힐끗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상처는 많았지만,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상처는 없었다.

 "저 이제 가봐도 되죠?"
 "어, 그래."

분명, 얼마뒤에 복싱 대회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몸이 너무 깨끗했다. 적어도 시합을 앞둔 상태이면 훈련을 받느라 많이 다치치 않나? 그런데, 몸에 남은 상처들은 시간이 꽤 오래지난 듯해 보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박형사는 생각했다.


-

어느날 불쑥 형사들을 찾아온 번중은 뜻밖의 얘기를 건넸다. 김민수가 중학교때 괴롭히던 아이가 자살을 택했다는 말이였다. 김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조차 튀어나오질 않았다. 모든 게 다, 이상한 것들 투성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됐네요."
 "그러게."

박형사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 탑승했다. 곧이어 조수석에 탄 김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겨운 숨을 토해냈다. 용의자를 만날때마다 왜이렇게 기분이 안좋아지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피해자 가족들은 하루빨리 범죄자를 잡아내라 난리인데, 딱히 얻는 소득은 없었다. 박형사는 시동을 걸었다.

 "참,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자살한 피해자 찾아볼게요."
 "아니."
 "네?"
 "내가 찾아볼게."

김형사는 창밖을 내다보며 태연히 답했다. 아, 하는 탄성을 낸 박형사가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자료조사는 박형사가 했기에 이런적은 처음이였던 탓이었다. 박형사는 정면으로 시선을 옮긴 뒤 차선을 변경했다. 그저, 김형사가 제 일을 덜어주려고 그런가보다. 태연히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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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준은 숨을 죽인채 걸어와 뒤에서 와락 준희를 끌어안았다. 화들짝 몸을 떤 준희가 뒤를 돌아보더니, 안도의 숨을 터트렸다.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만준 밖에 없다는걸 알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이 오면 늘 식겁했다. 혹시나, 다른 놈일 지도 몰랐으니까. 준희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틀었다. 

 "오늘은 뭐해?"
 "아, 아마 친구들 만날 듯."

준희는 귀찮은 투로 대답하며, 허리에 감긴 만준의 손을 떼내었다. 학교에선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영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했다. 예상보다 순순히 물러난 만준이 씩씩대는 숨을 흘렸다. 뒤통수로 닿는 콧김이 꽤 뜨거울텐데도, 준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야,"

준희의 어깨를 붙잡은 만준이 신경질적으로 준희를 돌려세웠다. 얼굴엔 짜증난 기색이 가득했다.

 "어?"
 "넌 맨날 친구만 만나냐? 그럴거면 날 왜사귀냐?"

늘 투정부리는 만준이란걸 알지만, 이번엔 좀 정도를 지나친 듯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벌써 아이들의 시선을 다 모은 뒤였으니까. 준희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만준의 손을 툭 쳐냈다. 왜이렇게 질척거리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내가 남자 만난다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만난다는데 지가 뭔 상관이야?

 "왜그러는데 또?"
 "넌 늘 그런식이잖아! 매번 친구만나느라 바쁘다 하고 그럼 난 언제만나는데?"

종이 울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만준을 흘겨보던 준희가 아무말 없이 휙 뒤를 돌았다. 도도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으로 차가운 시선이 꽂혀들었다. 만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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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7

부전선, 18살. 김민수와 중학교 3년때 같은 반으로, 반장.

 "김민수 걔는 진짜 불량아였어요, 숙제도 안내고, 진짜 할 수만 있다면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었다니까요. 아, 왜 그날 I고등학교에 갔냐고요? 그건, 제 남자친구가 그 고등학교 다니거든요. 그래서 남자친구 보러 간거였어요. 저, 진짜 겁많아요, 사람 죽일만큼 안된다고요. 차라리, 누군가를 죽인다면 김민수가 더 그러겠다. 걔는 진짜 악독했어요, 걔때문에 자살한애봐요. 그런데도, 걔는 태연하게 학교 다녔다니까요? 얼마나 뻔뻔하던지. 걔가 쟤 필통도 가져가서 안돌려준적 있긴한데, 그것때문에 죽이는건 웃기잖아요. 아무튼 다신 엉키고 싶지 않은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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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사는 탄식을 뱉어냈다. 용의자들을 잘 못 짚은 것 같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몇명의 용의자들은 살해동기가 분명하긴 했지만, 살인을 할 만큼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살인범이 나 살인범이다. 써놓고 다니는건 아니였지만, 그냥 제 직감이 그랬다.

하지만, 김형사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용의자들 중에 분명 범인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거짓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며, 김형사는 용의자들을 다시 샅샅히 살펴볼 것을 지시했다. 박형사는 그 의견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한참 선배인 김형사의 의견을 모른척 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엔 없었다.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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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2

박만준, 18살. 피해자를 괴롭혔던 가해자. 반 친구들의 증언으론 매일 피해자를 괴롭혔다고 전해짐.

 "아, 또 왜요! 저 그날 진짜 여자친구네 집 갔다니까요. 뭐했냐고요? 뭐 그런것 까지 말해야해요? 그냥, 같이 밥먹고 자고 했어요. 김민수를 왜 괴롭혔냐고요? 전 진짜 괴롭힌 것도 아니에요. 친구 사이에 돈꿔달라고도 못해요? 그냥 돈 빌린게 다에요. 전 진짜 아니라니까요. 예? 담배 피냐고요? 아, 아뇨. 아씨, 진짜. 네, 사실 펴요. 근데 저만 피는게 아니라, 대부분 애들 다펴요. 거기에 라이터 조각 있었다면서요? 근데 전 라이터 안쓰고 성냥써요. 라이터 쓰면 혹시라도 학주한테 걸릴 수 있단 말이에요."


박만준은 꽤 억울해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 것이 이상해, 김형사는 그 모습을 녹화해 두었다. 정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학생을 경찰서 안까지 데려갈 수는 없던 탓이었다. 

박만준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성냥을 꺼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했다. 성냥은 꽤 오래전부터 사용한건지, 사용감이 많이 남아있었다. 김형사는 성냥을 이리저리로 살펴보다가, 한숨과 함께 성냥을 다시 돌려주었다. 담배를 피는 것만으로, 범인으로 칭하기엔 부족함이 많았으니까.

 "끝난거죠?"

씩씩 거친 숨을 흘리던 만준은 머지않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히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성이 나 밖으로 향하는 만준의 모습을 보며, 김형사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요즘 애들은 왜저러는지 몰라, 쾅, 닫히는 문에도 짜증난 기색이 가득했다. 점점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가 귓가를 웅웅 울렸다. 김형사는 기가차다는 듯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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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6

김원수, 18살. 중학교때 김민수와 같이 놀던 친구.


 "저 말 다 끝난거 아니였어요? 아, 저희 무리요? 저희는 5명이서 함께 다녔어요. 저도 같이다니긴 했지만, 부모님이 워낙 엄하셔서 공부랑 학원다니느라, 매번 같이 못놀았어요. 성적떨어지면 부모님께 혼났거든요. 누구요? 순호? 아, 순호는 글쎄요. 워낙 조용한 애라서 잘 기억이 안나요. 그저 자살한 애라는 거? 그게 다인거 같아요. 근데 그게 민수랑 뭔 상관이에요? 예? 민수가 걔를 괴롭혔다고요? 말도안돼. 저희 패거리 좀 놀긴했지만, 사람 죽일만큼 괴롭히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아, 뭐 가끔 민수가 애들 괴롭힌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저희는 그거 다 소문인줄 만 알았는데요?"


김원수는 입을 떡하니 벌린채, 좀처럼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박형사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아는 대로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들을 해달라고 했지만, 김원수는 워낙 부모님이 엄했고, 늘 교실에 쳐박혀 공부를 하는것을 택했기에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 

이번에도, 용의자를 잘못 짚은 듯했다.





-


만준의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김민수가 죽게 되고 나서, 귀찮은 일들이 지겨울 정도로 많이 생긴 탓이었다. 그 새끼는 왜이리 쉽게 죽고선 난리야, 잔뜩 이를 부득부득 갈던 만준이 신경질적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절대 타지 말라며 당부했던 어머니의 말이 귓전을 맴돌았지만, 지금 만준의 귀에 그런게 들릴리 만무했다.

만준은 오토바이의 속력을 올렸다. 지금 무슨일이있어도 준희를 만나야지만, 이 화가 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당연한 듯이 준희의 집으로 향하던 만준은 준희의 집 근처에서 그대로 멈추어섰다. 생각해보니, 준희가 집에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남자들과 노는건 아니겠지?"

생각하기도 싫은 말을 내뱉고나자, 입에선 저절로 욕지기가 샜다. 절대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며 약속한 준희를 알지만, 도통 믿을 수가 없던 탓이었다. 워낙 남자들에게 잘 흘리고 다니던 준희였으니, 자신이 안만난다고 해도 남자가 알아서 꼬일 수도 있었다. 만준은 핸드폰을 꺼내, 준희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지 얼마되지않아, 준희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야?"

어느새, 만준의 얼굴엔 어둠이 내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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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4

권승관, 18살. 중학교 동창생.


 "순, 순호요? 김순호 말하시는거 맞죠? 진짜 걔 민수때문에 자살한거 맞아요. 민수가 매일 같이 순호 불러서 때리고, 돈뺏고, 막, 아무튼 장난 아니였거든요. 매일 온 몸에 피멍들어서오고. 저 진짜 걔보는데 마음 아파 죽는 줄 알았어요. 아, 순호에 대해서 왜이렇게 잘아냐고요? 저랑 걔랑 짝이였거든요. 제가 듣기론 걔네 아빠가 형사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라고 했더니,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아빠가 알면 속상해한다고. 그러더니, 학교 축제날인가? 그때, 김민수가 교실문 다 잠그고 순호 교실안에 가뒀거든요. 그때 막 뭔가 부숴지는 소리 이런거 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재빨리 선생님 불러왔거든요? 근데 그 사이 김민수는 튀었더라고요, 순호는 의자에 묶인채로, 피 질질 흘리고 있고. 아무튼 장난 아니였어요."


승관은 그때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충 승관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김민수가 중학교때 아이들을 심하게 괴롭힌 듯 했다. 김형사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뜨거워진 이마를 붙잡았다. 금방 범인을 잡을 수 있을거라는, 김형사의 예상과 달리 사건은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제길스럽게도.

승관이 말한 순호에 대해선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딱히 좋은 자료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마음이 바짝 타들어갔다. 김민수에 의해 자살한 학생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김형사는 애꿏은 머리만 벅벅 헝클였다. 어떻게 된게 용의자를 만날 수록 더 절망스러워지기만 했다. 

물끄러미 김형사를 바라보던 승관이 힐끔 교실밖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걸 알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승관은 어떻게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죄짓고는 못산다고, 김민수에 대해 얘기하는 내내 마음이 따끔거린 탓이었다.

 "일단, 나가봐."

승관의 마음을 알아챈건지, 김형사는 승관을 향해 휘휘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잠시 멈칫하던 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승관은 교실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곤, 멈칫. 문 손잡이를 잡은채 한참을 망설이던 승관이 김형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푹 숙여진 머리통이 승관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승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교실 밖을 나선 승관의 발걸음은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진 뒤였다.

쾅, 문이 닫히자, 바닥을 향하고 있던 김형사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느라, 김형사는 승관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


준희는 만준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무슨 제 부모도 아니고 어디가면 어디간다고 꼭 말해야하는 것이, 답답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오늘도 역시, 이곳으로 오겠다는 만준의 말에 준희는 한껏 짜증을 쏟아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또 자신을 못믿은 듯했다.

준희는 사실,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기도 했고, 이곳 케이크가 워낙 맛있다고 소문이 난 터라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집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바로, 만준에 의해서.

 "민준희, 나와!"

카페 문을 열자마자,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치가 떨렸다. 준희는 한껏 얼굴을 일그러트린채,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여간 마음에 드는거라곤 단한개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


 "아빠가 형사라니, 누굴까요?"
 "글쎄, 아마 지금쯤 사퇴한 형사겠지."
 "예? 왜요?"
 "아들이 자살을 했는데,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형사 아빠라면 아직 남아있을리 없잖아."

김형사는 씁쓸하게 덧붙이며, 앞장 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형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애꿏은 머리만 마구잡이로 잡아뜯었다. 며칠간 죽어라, 용의자들을 수색하고 있지만, 딱히 나오는 것들은 없었다. 사체를 부검해봐도,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 탓에 애가타는건 경찰들 뿐인듯했다.

차에 탄 김형사는 익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곤, 저 멀리 서있는 박형사를 바라보다가, 잠바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는 일부러, 개피로만 가지고 다녔다. 곽으로 가지고 다니면 자꾸만 더 피우고 싶은 탓이었다. 김형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 후, 담배에 가져다대었다. 고작, 몇시간 만에 피우게 된 담배임에도, 한없이 달기만했다.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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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3

민준희, 19살. 박만준의 여자친구.

"근데 저는 진짜 여기 왜 와있는거에요, 아니, 솔직히 말이 안되잖아요. 제가 무슨 수로 김민수 같은 남자아이를 제압하냐고요. 이 얇은 손목 보이세요? 저 39kg밖에 안나가요. 어떻게 70kg 다되어가는 남자아이를 이기겠어요? 그리고 저는 걔한테 악감정이 없어요. 뭐, 굳이 따지자면 걔가 내 치마속을 몰래 들여다본거? 그거 말고는 없어요. 웬만해서는 만나는 일도 없었다고요."



민준희는 또 다시 짧은 치마 아래로 들어난 제 다리를 쓱쓱 매만지며 말했다.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처럼 보였지만, 그럴때마다 곤혹을 치른건 김형사뿐이었다. 김형사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준희의 뒷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취조를 할때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걸 알았지만, 이번엔 다리를 가려줄만한 것도 없었기에 시선을 팔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준희가 휙 뒤를 돌았다. 그러더니, 묘한 미소와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켜 김형사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김형사는 곧장 준희를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준희는 김형사의 양 손목까지 붙든 뒤였다. 코끝을 스치는 향수의 냄새가 꽤 독했다. 학생 치고는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린 듯해, 김형사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경험을 했다.

 "아저씨도 그런거에요?"
 "뭐?"
 "남자들은 다, 나만 보면 그러더라고요. 놀라고, 따라오고, 좋아하고."

민준희는 우쭐거리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김형사는 준희가 잡은 양 손목을 놓으려고 했지만, 그럴때마다 민준희가 다리를 바짝 붙여오는 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있었다. 준희는 어깨를 구부려 김형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곤, 제 코끝을 김형사의 코끝으로 가져다대었다.

 "아저씨도 그런거죠?"

물끄러미, 준희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김형사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준희를 힘껏 밀쳐냈다. 휘청거린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뒤에있던 의자를 넘어트렸다. 김형사는 벌떡 일어나, 손으로 옷을 탁탁 털어냈다. 준희는 바닥에 넘어진채로, 김형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넌 사람을 잘못봤어." 

빙긋 웃으며 말한 김형사가 곧장 교실을 나섰다. 쾅 닫히는 문뒤로, 희미하게 웃어보인 준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든게 다, 생각한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

박형사는 민준희를 용의자 선상에서 아예 제외시켜버리자고, 김형사에게 권유했다. 잠시 멈칫하던 김형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실을 벗어나는 내내, 민준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뻐했다. 쿵, 닫히는 문뒤로 후다닥 뛰어가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민준희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글쎄, 증거 나온거 없지?"
 "네, 아무것도요."

박형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너무 안풀린 탓에 김형사와 박형사 모두 학교 옥상위에 올라와있었다. 옥상 난간에 기댄채로, 김형사는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하교 시간이 지난 탓인지, 아이들은 한명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 얼마전에 일어난 김민수 살인사건때문에 아무도 학교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라고. 김형사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박형사 역시, 옥상 난간에 기댄채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가 한없이 길고 고단하기만 했다. 뭐라도 나오면 좀 나으련만, 아무리 용의자를 취조해봐도 나오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형사는 벅벅 마른 세수를 하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아무말이 없었다. 묵직하게 흐르는 정적도 어색하다고 느끼지 못할만큼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탓이었다. 박형사는 별 생각 없이, 재킷 가슴팍 주위를 더듬거리다가, 흠칫 놀라 김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김형사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탓에 그 행동을 보지 못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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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1.

김형수, 18살. 피해자와 초등학생때부터 친구로, 피해자와 유일하게 사건 당일까지 연락한 친구.

"민, 민수가 죽은날 뭘했냐고요? 아, 친구들이랑 PC방 가려다가, 돈이 없어서 저 혼자만 집에 왔어요. 집에 와서 라면 끓여먹고, 숙제 좀 하다가, 새벽까지 게임한게 다에요. 부모님은 늘 늦게 들어오시거든요. 일이 많으셔서 매번 새벽에 들어오세요. 저는 그냥, 그 시간에 집에서 혼자 뒹굴거리고 있었어요. 민수에게 답장 왔냐고요? 아뇨. 오버워치하자고 했는데, 답이 없더라고요. 그냥, 뭔일 있겠거니 했어요. 잠든 시간이요? 한, 새벽 1시정도? 그 정도에 혼자 잠들었어요."

형수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드문드문 끊기는 말로 봐서는 민수의 죽음을 인정하기가 힘든 듯 보였다. 대충 듣기론, 민수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파리해진 낯이 안타까워보이기만 해, 박형사는 형수에게 따뜻한 음료를 한잔 건넸다. 새벽에 일어난 아내가 직접 싸준 율무차였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건네며 김이 모락모락나는 종이 컵을 받아든 민수가 손을 파르르 떨었다. 소매로 살짝 가려진 손등엔 생긴지 얼마 안된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순간, 박형사는 형수의 손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디에 긁히기라도 한건지, 손등 위에 상처가 꽤 깊어보인 탓이었다. 

형수는 조심스레 종이컵을 입에다가 가져다대었다. 민수가 죽었다는게 아직도 안믿겨요. 작게 중얼거린 형수가 깊은 한숨과 함께 종이컵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박형사의 시선은 아직도, 형수의 손등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박형사는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박형사의 시선을 알아챈 형수가 다급히 소매로 손등의 상처를 가려버린 탓이었다.

취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고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너무 오랫동안 수사를 진행하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꾸벅, 인사를 건넨 형수가 터덜터덜 교실을 벗어났다. 형수가 채 다 마시지 못한 율무차가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


 "김민수는 새벽 2시정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요."

서류더미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온 박형사가 김형사에게 말했다. 김형사는 어두워진 얼굴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새벽 2시라면,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질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김민수가 학교에 간 것도 이상했고, 왜 하필 학교 공터에서 살인이 일어났는지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었다. 살인을 계획했다면, 보통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는게 대부분이니까.

 '근데 왜, 하필 학교였을까? 새벽이라고 안심한걸까?'

김형사는 도무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멈칫하던 박형사가 주머니에 넣어놓은 손을 계속해서 조물락 거렸다. 그의 손 안엔 작은 라이터가 쥐어진 뒤였다.


-


준희는 만준이 싫었다. 제 곁을 빙빙 맴돌며, 미친 사람 처럼 집착하는 것이 소름끼친 탓이었다. 어떻게든 떨쳐내려고 했지만, 그럴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쫓아오는 만준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준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준을 떼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 좀 도와줘."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김민수였다. 김민수는 바보 같지만, 영리한 구석이 있는 놈이였다. 김민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쯤은 준희도 이미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바보같지만, 저를 지켜줄 사람. 준희는 김민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곤, 김민수를 제 손에 넣기 위해 애를썼다.

 "네 도움이 필요해."

그 말을 꺼내자마자, 김민수는 다소 놀란 눈으로 준희를 응시했다. 준희의 말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준희가 민수에게로 먼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를 도와줄래? 아니면……, 

 "좋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수는 내밀어진 준희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이 생각보다 차게 식어있었다. 빙긋 웃어보인 준희가 고마워, 라는 말을 덧붙이며, 민수의 볼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금세 빳빳하게 굳은 몸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보같은 놈. 준희는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남자들은 시시할 정도로 똑같았으니까.

민수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준희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체온이 새삼 어색했다. 준희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민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제 니꺼야."

고개를 끄덕거린 민수가 빙긋 웃어보였다. 그게, 준희가 기억하는 민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6화


용의자 7

부전선, 18살. 김민수와 중학교 3년때 같은 반으로, 반장.

"김민수의 주변 사람들이요? 그건 잘 모르는데. 저는 걔랑 안친했거든요. 그냥 반장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아는것 정도? 아는 것이라고 하면, 아, 걔 친구! 걔 친구중에 늘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하교하는애 있었어요. 김민수랑 집 방향이 같아서 몇번 봤거든요. 이름이요? 그건 모르겠어요. 그냥 얼굴 넙대대 하고, 키 작고, 음, 아, 맞다. 눈썹 위에 늘 밴드를 붙이고 다녔어요. 처음엔 어디 다쳐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밴드를 몇달간 붙이고 다니더라고요. 이상한 애였다는것만 기억해요."


김형사는 급히 자신을 김민수의 중학교 친구라고 소개했던 번중을 찾았다. 전선이 민수에 대해서 말하자마자, 순간, 머릿속으로 눈썹위에 피어싱을 했던 번중이 떠오른 탓이었다. 김형사는 김민수와 같이 하교를 하던 친구가 번중이였을거라고 단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썹위에 그렇게 오랫동안 밴드를 붙이고 다닐리 없을테니까.

번중은, 김민수가 살해 당한 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입증된 상태였다. 그 탓에 용의자 선상으로 넣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김민수가 살해당하던 시각까지 번중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CCTV에 찍혀있기 때문이었다.

벌컥, 교실 문이 열렸다. 번중은 터덜터덜 교실 안으로 들어서며 하품을 쩍 했다. 김형사가 앉으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의자를 끌어다가 김형사 맞은편에 앉은 번중이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어디서 자다 오기라도 한건지, 머리 위엔 까치집이 삐죽 솟아있었다.

 "왜요?"
 "김민수랑 중학교때 하교 같이 했다며?"
 "네, 그런데요?"
 "그때, 이상한 낌새 느낀 적 없었니?"

김형사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건이 이렇게 된 이상,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던 탓이었다. 후, 한숨을 내쉰 번중이 애꿏은 머리만 벅벅 헝클였다. 오랜만에 잠 좀 자나했더니, 별의 별게 다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괜한 오해만 살게 뻔하기에 번중은 결국 입을 여는 것을 택했다.

 "글쎄요, 이상한 낌새같은건 없었고. 그냥 늘 교복에 피가 묻어있긴 했어요. 처음엔 피인줄 모르고, 그저 급식먹다가 음식 흘린건줄 알았는데, 어느날 자세히 보니 피더라고요. 제가 워낙 코피를 잘 흘려봐서 알거든요. 그게 피인지 아닌지. 뭐, 아무튼, 그 이후로 김민수가 반에 있던 어떤 애를 괴롭힌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때리고, 거의 반 죽여놨다고요. 이유는, 잘 모르는데. 괴롭힘 당하는 애가 김민수 여자를 뺏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괴롭혔다고. 왜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었냐고요? 그럼 뭘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선생님들에게 말해봤자,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만 말하고. 딱히 달라질게 없잖아요. 경찰에 신고하면 강제 전학밖에 더 가요? 근데 뭐하러 말해요. 어차피 소문 다퍼질거."

번중은 쉴새없이 과거의 일들을 쏟아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김형사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져가기 시작했다. 김민수의 행동은 잘못되었던 것이 확실했지만, 그 주변인물들도 따지고보면 잘 한 것이 없었다. 순호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때, 누군가라도 순호에게 손을 내밀어줬다면, 그랬다면,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지는 않았을텐데. 모든게 다 절망스러워졌다.

결국, 번중은 돌아갔다. 용의자도 아닌 사람을 더 이상 붙잡아놓을만한 이유가 없던 탓이었다. 어느새, 심부름을 다녀온 박형사가 알아낸게 있는거냐고. 김형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김형사는 고개를 저으며,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마음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민수의 시체를 살펴보던 부검의 선아가 한껏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벌써 며칠째 시체 부검에 힘쓰고 있었지만, 좀처럼 나오는 증거가 없던 탓이었다. 다시 한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체를 부검하던 선아가 사체의 목 뒤 부근에서 그대로 멈칫했다. 목뒤에 남은 희미한 상흔이 시선을 붙들었다. 선아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그 자국을 짚어보았다. 아주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만큼의 상처이긴 했지만, 돋보기로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상처이기도 했다.

선아는 숨을 죽인채, 그 상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상처가 두번 세번 보고 나니, 서서히 감이 잡히길 시작했다. 점보다도 작지만, 깊게 페인 듯한 상처. 대충 낌새를 보아하니, 뭔가에 데인 듯한 자국임에 틀림없었다. 제감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건 분명 범인이 만들어낸 상처일 가능성이 컸다.

 '데였다? 데였다는건 불이 근처에 있었다는건데, 그렇다면.'

선아는 급히, 박형사를 찾았다.



-

박만준은 신경질적으로 교복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벌써 며칠째, 여자친구인 준희와 연락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분명,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고 있을거라고. 만준은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여자친구인 준희는 늘 이렇게 연락이 되지 않는 날마다, 다른 남자를 끼고 놀기에 급급했으니까.

교복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만준이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싫어하는 준희를 알기에 당분간은 끊으려고 했던 담배였다. 그런데, 준희 덕분에 또 다시 피우게 된 담배이기도 했다. 참 웃기다고. 만준은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목을 멘적이 있었나 싶을정도로, 준희는 만준에게 쉽게 내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짜증나네 진짜."

만준은 교복 재킷 앞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꺼내들었다.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 담배 끝에 가져다대었다. 불이 붙기가 무섭게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덮었다. 순간,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만준의 얼굴이 차게 식어갔다. 자꾸만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



김민수가 죽게 된 이후로, 준희는 또 다시 만준에게 갇혀살게 되었다. 그를 벗어날 수도, 그를 버릴 수도 없었다. 저번에 한번, 만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가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경찰에 신고한다면 다 해결될거라고 믿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만준의 아버지가 경찰서장이란걸, 그때 알게 되었으니까.

만준은 빽과 힘을 다 가진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준희가 혼자서 이긴다는건 좀처럼 말이 되질 않았다. 준희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집 안을 빙빙 맴돌았다. 부모님은 출장때문에 집을 비웠고, 죽어라 쫓아오는 만준때문에 친구들은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면, 난 어디로 도망가야하는걸까?

 "민서도 싫다할거고, 병권이도 그럴거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은 많았지만, 딱히 괜찮은 이름은 없었다. 일단 만준의 눈을 피해서 일주일간 도망가있을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학교에서 만나긴 할테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떨어져있는 시간을 만들고만 싶었다. 퉁퉁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던 준희가, 우연히 딱 한사람을 떠올렸다.

 "김민수."

이미, 죽어버린 민수를 말이다.













용의자3

민준희, 19살. 박만준의 여자친구.

"아아 맞다, 그거 있었다. 진짜 신기한게 김민수한테도 친구가 있더라고요. 전에 몇번 학교에 찾아왔었는데, 얼굴이 좀 특이하게 생긴 탓에 애들사이에서 난리난적 있었어요. 끼리끼리 논다고요. 근데 더 신기한건, 김민수 친구라는 애가 김민수 눈치를 엄청보더라고요. 뭘 못구해왔는지, 김민수가 막 짜증냈거든요. 그때 처음봤어요. 걔가 그렇게 화내는거. 아, 그리고, 근데 저는 왜 용의자가 된거에요?"


쉴새 없이 조잘거리던 민준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맴돌았다. 김형사는 녹음한 파일들을 들어보고 또 들어보는 것을 반복했다. 계속해서 듣다보면 뭔가 작은 단서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건에 대한 증거는 커녕, 김민수에 대한 것들도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민준희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차마, 답을 건네지 못했다. 그저, 박만준의 여자친구였고. 민준희도 김민수를 괴롭힌적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용의자 선상에 넣은 게 다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말을 굳이 해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제 못난 부분을 훤히 드러내는 것 같았으니까.

김형사는 민준희가 말한 친구가 김형수 일거라고 추정했다. 대충 김민수의 주위를 파악해본 결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뽑을 만한 사람이 김형수밖에는 없던 탓이었다.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김형사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일 친한 친구 끼리 눈치를 본다?'

뭔가 이상했다.




7화



 "데인 듯한 상처요?"
 "네, 희미하긴 하지만 불에 데인 상처가 맞았어요."

박형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뜨거워진 이마를 짚었다. 아무것도 발견될리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김민수의 몸에서 예상밖의 증거가 나온 탓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박형사가 선아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선아가 이상 말을 붙일새도 없이 뒤를 돌았다. 점점 더 멀어지는 발걸음 뒤로, 선아의 부름이 들려왔지만 박형사는 그것을 애써 모르는척 했다. 초조함에 잔뜩 물어뜯은 입술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


용의자3

민준희, 19살. 박만준의 여자친구.

"사실 전 이런게 너무 재밌어요, 막 짜릿하잖아요! 김민수가 살해당했다고 소문 났을때부터 전 되게 가슴이 떨렸어요, 살인사건 현장 실제로 본적이 없었거든요. 저 사실 꿈이 형사에요, 그래서 아저씨 같은 분들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건 해결 딱 하고 얼마나 멋있어요! 아 김민수 걔 아빠도 형사라고 했어요, 그래서 걔 사건에 대해 잘 알더라고요. 아버지가 살인사건만 10건 넘게 해결했데요! 짱이죠? 걔랑 잠깐 사귀었을때, 걔가 사건현장 데려가준다고 했는데, 그때는 이미."

민준희는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형사를 찾았다.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드는걸 좋아하는 듯 해, 박형사는 그것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민준희는 지나치게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형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민준희의 말을 듣다가, 잠시 멈칫했다. 민준희의 입에서 놀랄만한 말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박형사는 손짓으로 민준희의 입을 막았다. 조잘조잘 떠들던 목소리가 멎자, 둘 사이엔 날이 선 정적이 찾아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준희가 왜요? 하고 되물었다. 박형사는 민준희의 말을 다시 확인하려는 말투로 물었다.

 "너, 김민수랑 사귀었다고 그랬지?"
 "네?"
 "그랬잖아 방금, 김민수랑 중학교때 잠깐 만났다고."

민준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듯, 파리하게 질려버린 얼굴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순간, 박형사는 여태까지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준희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뒤를 돌았다. 그리곤, 

 "저, 저 갈래요."

망설임 없이, 교실을 나섰다. 박형사는 준희를 잡으려다가, 금세 마음을 접었다. 이미, 생각보다 큰 소득을 얻은 듯했으니까.




-


 "권순호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다고 나오는데요?"
 "사망이요?"
 "네, 10년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직업은 단순 노동자인 걸로 나오고요. 가족 중 그 누구도 형사는 존재하지 않아요."


김형사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분명, 듣기론 형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찾아보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김형사가 박형사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금세 마음을 접었다. 괜히 이곳 저곳에 떠들고 다니기가 싫은 탓이었다. 

권순호에 대해 알아본 결과,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혼자 남았던 어머니 역시, 순호가 자살을 한뒤 얼마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순호에 대해 남은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고보자면, 순호를 조사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일 수도 있었다. 김형사는 형사과 사무실을 벗어나, 옥상으로 향했다. 

끼익, 녹슨 옥상 문을 열자, 찬 바람이 훅 끼쳤다. 김형사는 당연한 듯이 옥상 난간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피는 담배만큼 달콤한 것이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옥상 난간에 서있던 김형사가 담배를 꺼내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발끝에 채인 담배꽁초의 수가 총 4개인 탓이었다. 

옥상은 형사들 빼고는 왠만해서는 올라오지 않는 곳이었다. 분위기도 워낙 섬뜩하고, 더러운 오물들도 많아서 사람들이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3개였던 꽁초가 한개 더 늘어있었다. 발끝에 채인 3개의 꽁초는 모두, 김형사가 피운 것이었다. 그건, 3개의 담배가 정확하게 반 줄어있던 탓이었다. 김형사는 담배를 딱 반 피우고 버리니까.

김형사는 조심스레 담배를 집어올렸다. 담배 끝부분엔 이빨로 잘근잘근 씹은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김형사는 담배를 이렇게 피우지 않았다. 많이 피우면 담배 맛이 없어진다며, 담배도 딱 반만 피고 버리는 것이 김형사 였기 때문이었다. 

형사과에서 담배를 피우는 형사들은 총 3명이였고, 그 3명은 조직 소탕작전이다 뭐다해서, 일산으로 내려가있을게 뻔했다. 그 말은 이곳에서 담배를 필래도 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김형사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몰래 이곳에서 담배를 피고간 사람을 추리고, 또 추려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옥상에 자주 오고, 이곳에 남아있는 형사는 딱 한명.

 "박형사?"

희민 뿐이었다.

Who's 유지

?

유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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