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오후

by 평강공주 posted Dec 09,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무채색 오후

 

사랑하는 나의 성아. 내가 영혼의 한 귀퉁이를 찢어놓은 나의 지난 연인. 그녀와의 추억이 통증이 되어 추억을 파고드는데도 내가 여태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자꾸만 돌아보게 하는 사람, 언젠가 내가 죽어 땅에 묻힐 때 반드시 한 번은 다시 생각날 관계, 실수로 마신 수은처럼 내 핏속에 영원히 머무를 존재, 그런 사람이 성아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정신병의 일환일거라 생각했다. 아빠의 부재로 남자에 대한 공포증이 심어졌다거나, 아니면 내 증오의 표적이 되어버린 엄마에게서 맛 볼 수 없었던 여성으로부터의 애정이 결핍으로 남아 무의식적으로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라든가 말이다.

하지만 성아도 나도 남들에 비해 애정의 어느 특정 부분이 굶주렸다던가, 아니면 보통 사람들과 세계관이 다른 것도 전혀 아니었다. 여자와 교제한 경험이 둘 다 서로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맹목적으로 여자만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둘 모두 남자 경험도 더러 있던 걸로 보아 취향의 문제로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빠지는 데엔 과학적 인과보단 심리 테스트처럼 때려 맞추기식인 오컬트 적인 요소로 설명하는 게 더 매력적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왜 그녀에게 끌렸냐 했을 때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고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그건 그녀가 전적으로 내 삶의 단편을, 그것도 지나치게 닮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여자였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성아였다는 것뿐이고 성아를 그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사실만이 있었다.

성아나 나나 둘 모두에게 삶은 살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아의 삶과 나의 삶은 차이가 있었다. 생의 들판 위에서 똑같이 별을 향해 살을 쏘았다고 해도 서로의 살은 각자 다른 궤적을 그렸다. 나이도, 성별도 같았지만 그녀와 알고 지낸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내가 성아와 지나치게 달랐던 단편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가령 주먹 크기만 한 지구 위에서 화살을 쏜다면, 화살은 손을 떠나기 무섭게 쏜 사람의 등 뒤로 날아가 꽂힐 것이다. 하나 나는 그런 법칙을 무시했다. 나의 화살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성아의 화살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늘 이탈의 욕망을 꿈꾸던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중력을 무시하여 지구를 떠나 머나먼 은하계까지 날아갔지만, 반면 성아가 쏜 화살은 무언가가 발목을 붙잡고 땅으로 늘어지는, 제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무력한 화살이었다. 그렇게 성아는 화살을 생일 케이크 위의 초처럼 시간 따라 제 몸에 차곡차곡 꽂아 온 것이었다.

불붙은 관계가 절정에 다다라 우린 하나가 되고픈 욕망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한 이불에서 나신으로 뒤엉킨 우리가 서로의 날개 뼈를 할퀴며 서로를 보듬는 순간에도, 내가 그녀의 허벅지 위에 내 다리를 얹고 살을 가까이 붙여 그녀에게 더 들어가려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처럼, 내가 그녀와 하나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내게 여자로서의 여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 삶의 색깔이 빈 여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아네 집 대문을 열 때 나는, 그녀가 꽁꽁 감추어 둔 그 검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나는 그 문을 연 것이 후회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문을 조금 더 일찍, 좀 더 부드럽게, 그리고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열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 것이다.

 

성아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성아네 집은 제법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지 꽤 헤매야 했다. 비포장인 바닥은 울퉁불퉁 엉망이었고 힐을 신은 발목이 여러 번 접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오를 한 시간 넘긴 햇볕은 지상을 잔뜩 달구어 놓았다. 마스카라가 번져 눈이 시큰거렸다. 끈적한 뺨에 들러붙는 머리카락을 쓸어 머리를 올려 묶어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목덜미까지 따가워졌다. 머릿속이 비워졌다. 기력도 의욕도 사라져 벽에 녹아 흐르는 페인트처럼 널브러져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있던 캔버스를 잠시 내려놓았다. 밤색 블라우스가 겨드랑이부터 허리춤까지 흥건히 젖어있었다. 하늘은 진한 파랑으로 오후 기온은 삼십 도를 웃돌고 있었다. 골목은 낡은 벽돌로 지어진 집들과 방범용 유리파편이 박힌 담들이 늘어서 있었고 구석에 성아와 닮은 지치고 시든 빛의 앙상한 나무가 서 있었다. 성아가 떠올라 나는 그 나무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는 와중에 전화벨이 갑자기 울렸다. 엄마였다. 그 전화를, 나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입원하자 주치의가 내린 진단은 혈소판 감소였다. 하나 딸로서 인생 전체를 지켜 봤을 때 엄마의 삶이 곯아가는 이유는 단지 옆구리 살이 한 덩이 씩 듬성듬성 비어가는 것 때문이다. 늙어가는 여자 곁엔 단지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내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세상 중에서도 하필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처음엔 운명을 미워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미워지기 마련인 것은 부모란 존재였다. 언젠가 두 남녀가 그들의 교미를 통해 낳은 아이를 서로에게 떠넘기는 더러운 추억은 아직까지 기억에 박힌 채 잊히지 않는다. 그건 조선시대 노비의 이마에 찍힌 낙인처럼 내겐 고통과 수치로만 남은 기억이다. 이혼 후엔 결국 엄마가 마지못해 날 떠맡았다. 사실 엄마든 아빠든 어느 쪽이었든 형태만 달랐을 뿐이지 그때를 기점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뒤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빠 쪽은 언제부터인지 얼굴조차 잊어 그 남자에게 향할 증오까지 엄마 쪽으로 더해 쏟아졌다. 나는 원망을 새총의 고무줄을 당기는 힘쯤으로 삼아 거기에 앞날을 살아갈 내 포부를 탄알처럼 쏘아 날리기로 했다. 합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대학에 입학한 후 파리로 유학을 가서 미술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더는 무가치한 당신과의 인연을 끊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의 최종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발목을 붙드는 중력을 걷어 차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인생이 만약 하룻밤의 꿈이라면 엄마는 석류처럼 붉어지다 시들어버리는 늦저녁일 뿐이지만, 나는 맺혀가는 레몬 빛의 오후이니까. 설령 빛이 들지 않는 다리 밑에서 살게 될지언정 에펠탑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고 싶었다. 인생이 단 하룻밤의 꿈이라 한들 그것은 기껏해야 하나뿐이니까 말이다.

파란 하늘에선 해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캔버스를 다시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대 그늘을 드리웠다. 얼굴의 열이 식으면서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 문득 캔버스와 아주 가까이 맞닿자 성아가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과 허름한 벽, 지쳐 보이는 나무와, 그리고 사람 없이 그림자와 오후의 시간만이 남아 있는 풍경. 나는 그 그림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묘사는 둘째치더라도 가장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성아가 그린 그림이 아무런 색깔도 빛깔도 없는 무채색의 오후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가 그린 오후의 색깔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게 된 건, 그녀와의 추억에 슬픔과 후회가 들어서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애틋함이 찌그러진 채로 처박혀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성아는 지금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것을 멀리서나마 느끼고나 있을까. 평소처럼 눈곱이랑 말라붙은 샴푸 덩어리를 제대로 씻어내지도 않은 엉망인 꼴로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애정 속에 자란 흔하게 널린 잡초 같은 요즘 여자 아이들과는 다른, 정수리부터 먼지 덩어리를 뒤집어 쓴 잿빛 풍성한 강아지풀의 성아. 아름답진 않더라도 손길을 한 번 닿아 보고픈 모순적인 여자. 그녀는 그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이대로 내 삶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걸까.

 

성아와 처음 만난 건 드로잉 수업 시간 때였다. 회화과인 나는 전공 수업이라 별 생각 없이 신청한 수업이었지만, 성아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만 명칭만 비슷한 화학과 학생으로서 일선 학점이나 채우려고 신청한 것 같아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인사 다음으로 건넨 첫 마디는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신선하고 멍청한 말이었다.

화학과에선 폭탄 같은 것도 실습으로 만들 수 있니?”

그 말에 성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교수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자 성아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성아가 웃은 이유는 내 말이 터무니없어서가 아니었다.

너 되게 반갑다.”

말의 뜻은 자기가 입학할 때 기대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내가 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나 나나 세상에 쌓인 게 많았는지 직접 만들 수 있는 수제 폭탄을 하나 쯤 가방에 넣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대화가 즐겁게 이어졌다. 우린 그림 이야기를 하다가 내 미래의 관심사인 프랑스에 관해 화제가 흘러갔다. 성아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고흐와 고갱은 어디 고 씨야? 둘이 친척인 거야?”

에이 전혀 안 닮았는걸. 혹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란 작품은 알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인데.”

그거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 아냐?”

서머싯 몸이 쓴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모델도 고흐였는데.”

“6펜스면 영국 돈이네. 6펜스면 한국 돈으로 얼마야?”

글쎄. 영국돈은 모르겠고 프랑스 돈 파운드라면 아는데. 나 프랑스 갈 거 거든.”

프랑스?”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은 달랐어도 기괴하고 엉뚱한 상상력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나이였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 잠시 다른 세계를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교수가 소리가 나게 박수를 한 번 짝 치지 않았다면 더 오래 그 세계에 머물렀을 것이다. 시선을 주목시킨 교수는 수업의 시작을 정감 있는 말로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 그 속뜻은 다소 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어울린다는 건 참 반가운 인연입니다. 우린 지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같다는 점은 그것 말고도 정말 많죠. 같은 나이, 그리고 같은 성별. 굳이 서로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거나 살아온 삶에 대해 해명하지 않아도 타인을 공감하고 또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이,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교감이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오히려 그런 같다는 부분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맹점을 만드는 법이니까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있습니다. 각양각색이란 소리죠. 내가 보는 세상과 바로 옆에 앉아있는 친구가 보는 세상은 확연히 다를 겁니다. 이 강의는 먼저 그걸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캔버스는 우주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라본 세상을 그려보도록 하세요.”

캔버스가 우주라는 말을 듣자 나는 그 말이 내 지난 삶을 한 번에 뚫고 관통하는 바늘 같다고 생각했다. 딱 숨 쉴 만큼의 공간만 있던 좁아터진 지난 삶 속에 그 바늘은 용케 억압과 원망의 나날들을 뚫고 지금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나는 이제 뾰족한 바늘의 끝으로 미래를 콕 찌르기만 하면 된다. 내겐 내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내 작은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 현실이 빌어먹을 주어진 우주였다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내 두 손으로 번듯한 우주를 창조해야할 때인 것이다. 나는 이 땅을 떠나 언젠간 지구의 중력도 잡아끌어 내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으로 향할 것이다. 나는 코스모스를 횡단하는 캡슐 우주선처럼 공상의 한계점까지 나아가 아득하고도 다채로운 세상을 캔버스 위에 그릴 참이었다.

그러나 성아의 그림은 달랐다. 밑그림의 윤곽만 봐도 얼추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어느 곳의 풍경화였을까? 어딘가 진부하고 보잘 것 없는 이미지였다. 성아는 기초 소묘를 하다가 느닷없이 진한 검은색 점 하나를 찍었다. 벽을 그린 듯 보이는 두 줄의 라인 한 가운데 찍은 걸로 보아 문이 있을 법한 위치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건 마치 출구인 화이트홀이 없는 암흑의 웜홀 같이 보였고 끝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복도의 입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런 무기력하고 암울한 몽고반점 같은 검은 점 하나를 성아는 거기에 그려 넣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그 순간 보았던 모든 것들이 정말로 성아 그림의 전부였다. 성아의 그림은 그것으로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로도 성아와 나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성아는 내 자취방에 나와 함께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면 슬금슬금 일어나 귀가했다. 우리 만남의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하지만 하루의 모든 시간을 그녀와 함께 할 순 없었어도, 하루의 모든 의미를 그녀와 함께 했다.

어떤 날은 성아에게 고흐와 고갱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우린 나란히 나체로 함께 누워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팝송을 주로 들었다. 성아가 제일 좋아하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가 몇 곡 흘렀고 나는 Lately가 끝나자마자 노래 하나를 골랐다. 뮤직 플레이어에서 돈 맥클린의 빈센트가 재생되었다. 그 곡은 화가에게 바치는 헌정 곡이다. 그때 성아는 내가 미리 권해 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서른 페이지 가량 읽고 있었는데 흥미가 있는지 꽤 몰두한 듯 보였다. 그 순간 성아는 귓가에 울리는 노랫말 속에 담긴 고흐가 그린 푸른 밤의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가수의 음조는 쓸쓸했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던 한 화가의 그림과 그의 삶에 대한 찬송가가 흐르는 동안 나는 귀가 잘린 고흐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살아생전 후대에 누릴 영광의 발끝 만치조차 누리지 못한 사람,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한고 정신 분열로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린 사람. 누군가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엄마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자신의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과연 어떻게 떠올릴까.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여자 친구와 침대에 함께 누워 있었는데 딱 그 광경을 엄마에게 발각되고 말았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의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나가 죽어 이 년아, 그것이 두 번째 말이었다. 차라리 언제부터였느냐, 어쩌다 그 길로 빠지게 되었느냐 같은 걸 물었더라면 대화라도 되었을 것을, 엄마는 결코 나를 이해하지도, 앞으로도 할 생각도 없으리라는 단정을 기어이 짓고야 말았다. 그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딸을 저주하며 휘둘렀던 폭력을 엄마는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한창 독서에 빠져있는 성아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성아의 귓불은 참 보드랍고 말랑말랑했다. 그때 성아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고흐는 사실 귀 전체를 자른 게 아니라 귓불만 자른 거라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

책 뒤에 해설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

벌써 다 읽은 거야?”

아니, 난 해설 먼저 읽고 보는 편이거든.”

그럼 무슨 재미로 보냐. 결말까지 다 나오는데.”

내 생각은 생각보다 별로 생각 같지가 않더라고. 교수가 말했던 맹점이 투성이로 있는 인간인 거지.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을 해야 했거든. 책을 보더라도 무슨 세상이든 나한테 달린 눈으로만 그대로 바라보게 되니까 뭐, 책을 읽더라도 어째 좀 그냥 일기 검사를 하는 기분인 거 있지.”

성아의 말을 듣고 나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을 하나 일러주고 싶었다. 책을 읽을 때나, 그림을 그릴 때나, 혹은 살아갈 때나 품어야할 중요한 사고를.

독서란 건 자기 주체적인 생각이 중요한 거야. 그거 말고도 살아가는 주체적으로 사는 게 필요해. 이미 만들어진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무중력의 유희를 즐기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거고 말이야.”

혼자 괜히 오버해 복잡한 생각을 했는지 그만 머리가 피곤해졌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에 뺨을 묻었다. 여전히 진하게 남아있는 몽고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음악은 기타 소리로 끝났다. 한동안 기타 소리의 공명이 귓가에 이명으로 맴돌았다. 잠시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성아와 나는 잠이 들었다.

 

기초 드로잉 수업이 계속 되도록 성아의 그림은 여전히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내가 캔버스에 뿌릴 노란색 유화 물감을 팔레트에 짜는 동안 성아는 다 쓴 목탄을 내려놓고 콩테를 집어 이젤 가까이로 의자를 당기고 있었다. 내 그림은 일사천리로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성아에 대한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성아의 칙칙한 그림 속에 숨은 매력을 들추어 내보려했다. 하지만 그림은 역시 채색을 끝마쳤을 때야말로 진정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차마 그런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림이란 색감의 미학인 것이다.

나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작은 땅에 안주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흔해 빠진 인간들처럼, 내 유년의 칙칙한 색깔처럼 그녀의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거대한 목성이 되어 거부할 수 없는 인력으로 그녀를 지구 밖으로 끌어당겨오고 싶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잿빛 화약을 끼얹은 그녀가 내 안으로 깊이 들어왔을 때, 사랑의 열기를 촉매 삼아 수소나 헬륨을 뿌려 폭발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눈을 떠 둘이 유채색의 세상에서 함께 살 수만 있다면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돈 맥클린의 빈센트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나는 급하게 빠져 나와 소리를 죽이느라 번호도 확인 않고 전화를 받았다.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엄마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첫 마디는 바로, 엄마가 죽는다면 어쩔래? 였다. 엄마는 정말로 대답을 원했었던 걸까. 나는 내 목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도 내 피는 당신에게 빚을 진거였으니 적정선에서 양보하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 내가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키자 상대편에서 애써 참다가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듯한 찢어진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자기가 또 괜한 걸 물어봤다며 전화한 건 그런 걸 물어 보려던 게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나는 그거면 됐다며 말을 잘랐다. 수업 중이라 들어가 봐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아무 말 없는 침묵이 더 잔인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다시 연락이 오거든 못 들었다고, 요즘 귀가 안 좋아져서 듣지 못했다고 잡아떼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겐 고흐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나는 정신에 감기가 들어 잠시 귀가 먼 고흐였을 뿐이라고. 강의실로 다시 돌아왔을 땐 성아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성아는 내 캔버스를 보고는 예쁘다, 라고 해주었다. 나는 답례로 네 그림도 예뻐, 라는 말을 할까 했으나 하지 못했다. 성아의 그림은 나갈 때보다 더 명암이 짙어져 있었다.

 

엄마와의 통화 이후 나는 알게 모르게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성아의 그림이 더 빛을 잃어간다는 관념이 커진 것도 거들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로부터 벗어났지만 아직 과제가 남아있었다. 파리로 떠나 우리 혈육의 관계를 영영 내 삶으로부터 격리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그 길에 성아도 데려갈 것이다. 그녀 역시 더 넓고 화려한 세계로 가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의 삶이 성아에겐 어울릴 것이다. 분명 성아는 파리의 야경 아래에서 더 아름다울 게 틀림없었다. 분명히 전에 없던 생기를 내면에서 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아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 그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을. 나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지언정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나는 라 트라비아타, 그녀는 파탈리테 이니까.

하지만 성아가 가진 문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게 부담스럽다거나 혹은 자존심이 구긴다는 것 따위의 단순한 고민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성아를 여백과 그림자뿐인 색깔 없는 세상에서 빼내어 주겠다며 정열적으로 유혹하던 날, 성아는 말했다.

난 못 가.”

성아는 주춤거리며 말끝을 떨어뜨렸지만 단호한 의사만큼은 분명히 전해졌다. 내가 무엇보다 슬펐던 점은 그녀가 안 가, 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좌절은 했어도 단념은 하지 않았다. 성아를 붙잡고 있는 운명의 힘이 성아의 의지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문에 나는 내가 더욱 표독해 질 것을 예견한 것이다. 원인은 모르지만 아마 땅 속 깊은 내핵에서부터 그녀의 뿌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거대한 힘이 성아를 어디에도 멀어질 수 없도록 가로 막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만일 그녀의 뿌리를 들어 올릴 수가 없다면, 대신 그녀의 줄기부분이라도 자르면 됐다.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면 뿌리는 다시 땅을 붙잡고 돋아날 것이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막바지 무렵이었다. 늘 그러하듯 성아와 함께 모든 걸 내 놓은 채 드러누워 있었지만 모든 것이 똑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관계가 외나무다리 위에 위태롭게 누워있다는 것을 서로가 인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평소처럼 수다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침묵은 더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을 자아내고 있을 때, 내가 성아의 귀에 이어폰 한 쪽을 끼워 주었다. 몇몇 노래들이 흘러가는 동안 성아와 나는 말없이 노래를 듣기만 했다. 이따금 성아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콧노래로 따라 부르고 나는 여느 때처럼 그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성아는 스티비 원더를 좋아했다. 특히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가장 아꼈으며 흐르는 원곡을 따라 흥얼거릴 땐 박자 하나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그 노래에 익숙해있었다. 때로는 한국어로 가사를 번역해 선율에 끼워 넣어 부르기도 했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 했어요, 라는 가사 같이. 그렇게 노래가 흐르는 중간에 나는 재생을 끊고 성아에게 들려주고픈 노래로 바꿨다. 그 곡은 내가 얼마 전 새로 넣어둔 카를라 부르니의 샹송이었다.

이 가수 있잖아, 프랑스 대통령하고 결혼했대.”

엘리제궁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를 꼬셨네.”

성아는 자기가 던진 농담에 쿡쿡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풀릴 거라 기대한 모양이다. 하지만 평소였다면 나도 그녀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같이 웃고 싶었겠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 앞에선 웃음도 내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소와 유분기가 없이 나누는 대화는 건조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결국 관계의 이음새가 부르트면서 결과적으로 건드리면 상처가 될 게 뻔한 균열을 벌리는 일이 된다. 거친 생각으로 뛰어든 대화는 부드러울 수 없었다. 이야기의 맥락도 없이 나는 덜컥 그녀가 그린 그림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볕이 안 드는 풍경 따윈 볼품없다고, 우리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게 정말 한심하다고 솔직히 말했다. 별이 없는 밤일지라도 램브란트 질감을 흉내 내서라도 무거운 유화를 흘려 쓸쓸함을 가릴 수도 있었다. 해가 없는 낮일지라도 르누아르 풍으로 감미로운 파스텔 가루를 뿌려 인생의 그늘진 풍경에 대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아, 너의 오후엔 왜 아무런 색깔도 없는 거니, 우리 젊은 피부는 아쉬워할 새도 없이 금세 주름져 시들어 탄력을 잃어갈 텐데 너는 여자의 몸매와 외모가 가장 예쁘게 빛나는 청춘 시절을 이렇게 보낼 생각이니, 라며 호소했고 급기야 나는 우선 얼마만이라도 나와 같이 파리에 있어보자며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때 내 눈물에 감정적으로 흔들린 성아를 보면 나를 정말 사랑하긴 했던 것이 분명하다. 성아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다.

보여줄게내 오후 말이야.”

성아는 보여준다고 했지만 사실 이미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떨리고 불안했으며 비밀을 담고 있지만 꺼내 놓고 싶지 않은, 숨긴 물건을 갑자기 들이닥친 강탈자들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가슴을 졸이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눈뜬장님과도 같았다. 나는 책의 해설 페이지를 코앞에 두고도 읽지 않는 버릇처럼 성아의 암시를 외면했다. 그리고 내 주체적으로 독서하듯 그렇게 성아의 인생과 세상을 멋대로 읽어 버렸던 것이다.

빈 강의실에 들어서자 물감 냄새가 확 풍겼다. 오래된 형광등 아래에 젖은 반딧불 같은 빛을 내는 캔버스들 가운데 유독 진한 흑연의 어두운 색을 풍기는 그림이 있었다. 창밖엔 밤이 가득했고 그 틈을 비집고 언뜻 비가 올 것 같은 젖은 냄새도 살포시 풍기고 있었다.

나는 캔버스 앞에 서서 성아를 돌아봤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표정 위로 드러나는 감정을 잠시 거둬두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려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다시 돌려 그림을 보았다. 검은 몽고반점. 애기의 엉덩이에 주로 있으며 간혹 어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몽고반점 같은 커다란 점 하나가 그림 속 벽 한 가운데에 박힌 듯 그려져 있었다. 다만 그 점을 보았을 때 단순히 그냥 멈춰있는 점 같지가 않았다. 그 검은 덩어리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폭발력이 깃든 화학 원자들로 잔뜩 응어리진 거대한 어떤 힘처럼 보였다. 그게 벽에 붙은 문이었다는 것은 좀 지나서야 알았지만 마치 정말 거대한 폭발물질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중압감은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압박했다.

한데 정말 저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나는 생각했다. 바로 그거다. 성아의 삶이 180도로 뒤바뀔 것이다. 성아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중력의 힘은 저것이고 저 부풀어 오른 고름을 터뜨리는 것이 바로 성아가 거부할 수 없던 운명의 봉인을 푸는 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성아 혼자서는 절대 저 문을 파괴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나만이, 오직 나만이 그녀를 도울 수가 있다.

파괴와 파멸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묶인 목줄을 끊고 앞을 가로막은 벽을 무너뜨려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인 반면, 후자는 그저 모든 것이 부서질 뿐이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감들을 집어 성아의 캔버스 위로 흩뿌렸다. 처음 손짓이 지나가자마자 아주 조금 뿌려졌을 뿐인데도 그림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성아의 무채색 오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은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고 조각난 가루만 바닥에 떨어지던 파멸의 밤이었다. 그 뒤로 성아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나는, 성아의 그림을 그녀의 집으로 가져다주는 길 위에 섰다.

 

성아의 집을 찾아다니는 오후 볕의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또 몇 걸음 못 가 벽에 퍼지고 말았다.

거 누구 있수?”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내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향해 돌아다보니 옆엔 한 중년 여성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한데 어딘가 거동 외에도 불편한 곳이 있는 듯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등산용 지팡이를 은근슬쩍 땅에 툭툭 짚는 걸로 봐서도 그렇고 눈의 초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빗겨나간 점으로도 보아 앞을 못 보는 사람 같았다.

내가 원래 안 이러는데 날이 더워서 그런지 집 방향을 못 찾겠네 그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잠시만 도와줄라우?”

원래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성격이 친절한 편은 아닌데다 더군다나 중년 여자면 더욱이 꺼려졌다.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이는 폼이 위태롭다 못해 나중에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괜히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날까봐 얼떨결에 말려들고 말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여자는 느닷없이 캔버스를 끼지 않은 내 나머지 한 쪽 팔을 덥석 잡았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펴졌다. 살에 닿는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파충류가 훑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반사적으로 표정이 엉망이 됐지만 보이지도 않을 테니 그냥 얼굴을 구긴 채 걸어갔다.

동행해 가는 동안 여자는 지팡이 끝으로 땅과 벽 이음새를 툭툭 건드리면서 여긴 누구네 담이로군, 여긴 어디로군 하면서 나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녀가 대문 앞에서 고맙다며 머리를 숙이는 동안 나는 땀이 흥건한 팔뚝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마실 거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는 말에 목이나 축이고 빨리 내 갈 길이나 갈 생각만 했다. 그런데 이 검정색 철대문, 어딘가 낯이 익었다.

문 열어라!”

지팡이 끝이 낡은 철대문을 두드리자 칠이 벗겨진 녹슨 껍질이 위에서 한 꺼풀 떨어졌다. 잠시 뒤 안에서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소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추더니 잘 안 열리는지 한참을 삐걱대다가 문 잠금이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풀렸다. 하지만 문 이음새 자체가 뻑뻑해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문을 힘껏 당기자 묵직한 저음으로 울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삐그덕 거렸다. 내가 다가가 힘을 보태어 문을 밀자 문은 더 깊고 우울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내가 있는 힘껏 문을 억지로 밀자 문이 벌컥 열어 젖혀졌다. 한바탕 소란 후의 문 너머에 있는 건,

그녀였다.

우린 서로를 마주봤다. 아무 표정도, 숨소리도 없이. 마치 서로 눈이 먼 사람처럼 앞에 무슨 광경이 펼쳐졌는지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 순간을 여자가 끼어들었다.

인사 드려라. 애미 도와주신 분이다.”

그녀가,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허리를 깊이 꺾어 인사했다. 그리고 그 자세로 멈춰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잠시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그녀의 턱 근육에 긴장이 들어간 것을. 목 근육이 움찔거리며 무언가를 억누르며 견디는 듯 뺨 근육이 팽팽해지는 것을 보았다. 여자가 괜히 또 채근을 했다.

뭐 하고 있어. 말을 해 이년아.”

고맙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지난 시간이고 지금은 되돌리고 싶어도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여자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철대문이 가루가 될 만큼 파멸되는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잠겼다. 나는 한참을 제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서있었다. 대문 안에서 간간히 높고 낮은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살림들이 마당으로 내팽겨 쳐져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원자가 부딪치는 폭발음처럼 쇠로 된 대야가 땅에 튕겼다가 다시 떨어져 요란하게 바닥을 긁어댔다. 여자는 쇳소리를 내며 악을 질렀고, 젊은 여자의 목소리는 울분과 체념이 담긴 목소리였는데 그 속엔 마치 이제 이런 다툼이 권태롭게 느껴지며 그저 대강 정리하고 막을 내리는 게 상책이라는 듯 어미를 까칠한 다정함으로 달래는 투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음성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려, 나는 이제껏 그녀의 그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으면서도 그게 그녀 목에서 가장 많이 터져 나왔던 익숙한 소리란 걸 알 것 같았다.

나는 얼마 걷다가 문득,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깼다. 그리고 그제야 옆구리에 끼고 있던 그림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기를 봤다. 엄마였다. 나는 언덕 아래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집을 내려다봤다. 덜 여문 붉은 빛이 감도는 살색 광채가 생기 있게 내리면서 그녀의 집에도 쬐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펼쳐보니 그녀가 그린 집은 여전히 아무런 색깔이 없었고 여기저기 흩뿌려진 물감에 내 땀이 배어 엉망진창으로 얼룩져 있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끊이지 않고 계속, 계속 울리고 있었다. <마침>

 

 e-mail : kim34351@naver.com

Who's 평강공주

?

바보 온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