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그리고 봄

by 규모찌 posted Dec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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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그리고 봄


프롤로그.


육체가 없는 상태가 되고 아무도 날 볼 수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벚나무가 흩날리는 거리의 반대편에서 한 여자가 다가온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손을 뻗으려 하자 걸음을 멈춘다.

내가.. 보이는거에요?”  여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손을 뻗는다.

저와 같이 살아가 주시겠어요?”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바람에 벚꽃이 흩날린다


.

1. “저와 같이 살아가 주시겠어요?”라고 말한 남자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인다.

그 뒤로 여자는 조심스레 거절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남자는 조용히 뒤를 쫓아온다.

왜 따라오시는 거에요?” 여자가 조심스레 묻자 남자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한다.

제가 보인다고 하셨죠?” 남자가 손을 뻗어 벽을 관통한다.

보시는것처럼..지금 이런 상태라서요.”

“..귀신?”

 “맞아요 귀신, 그래서 아무도 절 볼 수 도, 들을 수 도 없어요. 근데 그쪽은 제가 보이는거죠?”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드릴게요, 돌아가기 전 까지 같이 있게 해주세요라며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부탁을 한다.


 진솔하면서도 간절한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을 할 수 없던 여자는 결국 집을 허락한다.

집으로 들어오자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입을 연다.

저는 이시온이라고 해요

, 전 서예나입니다.”

서로 짧은 자기소개를 하고 예나는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의 전원을 킨다.

어느새 예나의 침대 앞에 앉아 멀뚱거리던 시온이 예나에게 물어본다.

지금 하시는게 뭐에요?” 예나가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의자에 돌아 앉는다.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 소설. 작가인거에요?”

예나가 약간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연다.

작가까지는 아니고... 아직 지망생이라고 할까요?”

, 멋진데요?”

 예나가 시온을 쳐다본다.

방금 저 엄청 놀란거 알아요?”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도 없던 집에서 굉장히 오랜만에 사람소리가 들렸거든요예나가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뭔가 사람이 산다는 느낌이랄까예나가 의자를 끌고 시온의 앞으로 간다.

시온씨는 죽기 전에 뭘하고 있었어요?” 예나의 말을 들은 시온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미안해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시온을 보고 예나가 아니라며 미소를 짓는다.


그냥 사고라는 것 밖에 모르겠어요.. 아마 죽은 것 같지도 않고시온의 말에 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궁금한게 있는데, 먼저 부탁드려 놓고 묻기도 그런데 어째서 저를 받아준거에요?”

시온의 질문의 예나가 눈을 굴린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는 미친 사람인줄 알았어요.”

솔직하고 담백한 예나의 말에 시온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인다.

근데 귀신이란 걸 알고 조금 달라졌죠, 그동안 혼자였잖아요. 엄청 무서웠을 것 같아요..”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고 생각해주는 예나에게 무의식적으로 예나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다 이내 손을 내린다.

일주일이에요.” “?”

일주일 동안 방황했어요. 근데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았어요. 아무도 저의 존재를 몰랐어요

일주일의 방황.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아무도 잡지 못한 채 벚나무 가로수 길에서 예나를 만나게 된거다.

그래도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시온이 예나를 보며 웃는다.“읏차,난 하던거 해야지. 시온씨는요?”

전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잠시 나갔다 올게요.”시온이 신경쓰지 말라며 창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간다.

 예나는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고 간다. 기지개를 한번 키고 노트북으로 쓰던 글을 이어나간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을까, 만개했던 벚꽃들이 하나 둘씩 진다.

 초반의 예나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것에 가끔 놀라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온이 집에 머무는 걸 익숙해 하는 것 같았다.

아까 집 앞에 못 보던 고양이가 있었는데 제가 보이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더라고요

- 동물들은 귀신을 볼수 있다고 들은적이 있어요.” 시온과 예나가 대화를 나누며 웃는다.

둘이 처음보다 꽤 많이 가까워진게 느껴진다.

 시온과 대화를 나누던중 울리는 벨소리에 예나가 전화를 받는다.

, 서예나입니다. , 오빠?번호 바뀐거야?”전화를 건 사람은 예나의 오빠인 것 같았다.

 안부를 묻던 예나의 말이 끊기고 표정이 점차 어두워 진다.

..지금 바로 갈수있어요.”


 전화를 끊은 예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다.

 손으로 고인 눈물을 닦는 예나가 겉옷을 챙겨입는다.

무슨 일 있어요?” “,잠시 급한일로 집을 비우게 됐어요.. 미안해요,편하게 있어요

예나가 바쁘게 집을 나서고 방에는 시온 혼자 덩그러니 남는다.

 집을 나온 예나는 급히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예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조용하진 않지만 무거운 분위기의 실내온통 어두운 색의 옷과 죽음을 애도하는 화환들이 가득이다.

예나는 먼저 온 가족들에게 안부를 물을 틈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예나야

 예나의 오빠로 보이는 남자가 예나를 부른다.

오빠..”

 예나가 장례식 안쪽에 세워진 자신의 엄마의 영정사진을 본다.

엄마 아직 괜찮은거 아니었어요..?”

예나가 울먹이며 말하자 오빠가 어깨를 토닥인다.

 “조금만 참자예나가 끄덕이며 눈물을 닦는다.

조금 진정한 듯한 예나는 바로 찾아와준 친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내러 간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3일장이지만 금요일 오후에 시작하고 일요일 오전에 발인하는 짧은 장이었기에 다들 한번에 몰려서왔다.

손님 받기 급급했던 첫번째 밤이 지나고 둘째날이 밝자 어제 오지 못했던 몇몇 친척들이 와주었다.

날이 저물수록 들리는 사람의 수가 적어지고 발인을 기다리는 가까운 친척들만이 남아있다.

밤이 어두워지자 예나가 불이 꺼진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그 안쪽에는 예나의 엄마 영정사진이 작게 붙어있다.

엄마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울고 있는 거에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예나가 뒤돌아보니 시온이 서있다.

..여기 있어요?” “미안해요, 처음에 걱정되서 쫓아왔어요. 괜찮아요?”

 괜찮냐는 시온의 말에 눈물이 고인 채로 고개를 젓는다.

마음껏 울었어요?”

예나가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흘린다.

으아아..”

 “아까 예나씨 어머니가 부탁하신 말이 있어요.”

 시온이 울고 있는 예나의 옆으로 간다.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네가 쓴 책 가장 먼저 읽어주기로 해놓고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사랑해 예나야,라고.”

뭐가 그리 미안한건데.. ,엄마..”


짧은 3일장. 실질적인 장례시간은 하루하고 반, 갑작스러운 이별을 정리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2. 3일 동안 낮엔 찾아와 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하고, 밤엔 혼자 숨어서 울었다.

울고 있는 예나의 옆자린 시온이 묵묵히 지켜주었다.

 발인 후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예나는 3일 동안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시온에게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엄마의 말을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 뒤로 평소의 예나로 돌아왔다.작은 몸집의 순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예나는 강했다.

오늘 잠깐 나갈까요?”예나가 말을 이었다.

바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갑작스러운 예나의 제안에 서울에서 2시간 조금 넘게 걸려 바다로 간다.

아직 여름의 시작이기에 사람이 별로 없다. “바다다.” 예나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쉰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사람은 서너명 정도였다.

아직 날이 차구나..

예나가 웃으며 해변가를 걷는다.

감기 걸려요

그래도 좋아요

그렇게 두어시간 바다를 걸었다.


예나는 해가 지려고 할 때 쯤 그제야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한다.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창밖을 한참을 바라보던 예나의 눈이 감긴다.

시온이 창가에 기대 잠이든 예나를 살핀다. 장례식 후 예나는 평소와 같이 굴었다.

하지만 최근 오늘처럼 기분에 따라 이곳저곳을 다니는 일이 잦아 졌다.

많이 힘든 상태겠지. 예나가 내릴곳이 가까워져오자 시온이 예나를 부른다.

다 왔어요

 예나와 함께 간곳은 바다 말고도 많았다.

산이나 아쿠아리움도 갔었고 별을 보러도 갔었다.

예나는 다녀오고 나면 꼭 다이어리어 느낀점과 본 것들을 적었다.

그 다이어리를 보고 있던 예나가 시온에게 보여준다.

우리 생각보다 많이 다니지 않았어요?”

시온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로 글을 써도 재밌을 것 같아요

 다이어리를 보고 웃는 예나를 보자 시온의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물리적인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예나가 표현해 줬으면 좋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픔을 감추려 지은 표정이 오히려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더 슬퍼 보였다.

괜찮아요?”라고, 분명 말했다. 예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돌아보지 않았다.

 예나 뿐 아니라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목을 잡고 다시한번 소리치지만 들리지 않았다.

몸이 없는 귀신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건 없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시온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예나가 무슨일 있냐고 물어보지만, 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목소리는 다시 돌아 왔지만,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귀신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목소리가 돌아온 후로도 짧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적이 두 번정도 있었다.

 예나에게 말할까 했지만, 일단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시온이 집 근처 공원쪽으로 가자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가 보인다.

귀신인 건가? 살아 계신걸까?’

할아버지가 시온을 보더니 자신이 앉은 의자 옆을 두드리며 부른다.

자신을 부르는 행위인건진 잘 모르겠지만, 시온은 일단 할아버지 옆으로 갔다.


새로 온 건가?”

할아버지는 제가 보이시는 거에요?”

할아버지는 웃으시더니 자신도 귀신이라 칭한다.

전 봄에 왔어요봄에 오고 벌써 여름의 끝자락이다.

시온이 할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안나온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

난 없지,난 죽은 몸이거든.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단건 곧 몸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증조란다.”

몸으로 돌아간다..그러면 전 예나씨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요할아버지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기억이 나지 않을게다.”

할아버지는 여지껏 만나왔던 귀신들의 이야기를 해주신다.

예전에 한명, 언제나 나랑 같이 이곳에서 있어주던 사람이 있었어. 한동안 말을 못하는 일이 반복되다 어느 순간 사라지더구나.

그러더니 사람의 몸으로 돌아가 지내는 모습을 보게되었어. 귀신인 내가 여기있다는걸 기억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는 몸으로 돌아간 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말고도 더 있었다는 말을 하셨다.

 할아버지께 알려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를 드리고 예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태 작업을 한 것인지 예나가 기지개를 키며 인사한다.

늦었네요?”

, 오늘은 하루종일 글쓴거에요?”

시온이 당연하게 예나의 옆으로 간다.

,아마도요. 밥 먹어야 겠다

오늘 있었던 일을 예나에게 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예나는 시온이 돌아간다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줄 여자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면, 둘의 시간이 없어진다고 하면 이 시간을 기억 할 수도 얘기 할 수도 없다.

잊고 싶지 않아.’

 “시온씨?” 예나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또 어디 안좋냐고 묻는다.

아니에요.잠깐 생각좀 하느라..”

아 맞아,전에 제 노트북 만진거에요?”

아 저도 놀랐어요..”

이틀 전 쯤이였다.벽을 통해 들어오다가 노트북을 건드렸을 때 노트북이 움직였다.

그때 놀라 잠깐 멍 때리다 여러 가지를 눌러 봤었다.

..제 노트북을요?”

 “

 예나가 책상에서 노트북을 갖고와 시온 앞에 펼친다.

쓰실래요?”

예나가 시온에게 물었지만 시온이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치만 시온씨 심심하잖아요.. 그러면 저 밥먹을 때나 잘때는 마음것 쓰는건 어떨까요? 제 파일만 멀쩡하면 괜찮아요.”

예나가 웃으며 제안하자 시온도 결국 미소를 짓는다.

그럴까요?”예나가 노트북을 책상에 올려놓고 잠자리를 준비한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잘자요

미안해요 시온씨 저 잘게요.” 시온이 노트북 앞으로 향한다.



3. 그 뒤로 노트북에 시온이란 파일을 만들어 매일매일을 기록해 나갔다.

 예나가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보게될까 비밀번호 설정을 해놓기도 하였다.

아직 예나에게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과 돌아가는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오늘도 열심히 쓰네요?”

예나가 방으로 들어오며 말한다. “언젠간 꼭 보여줄게요.”

시온이 노트북 앞 자리를 비켜준다.

, 더 있어도 괜찮아요.”시온의 움직임이 멈춘다.

소설 안 써요?”예나가 침대에 눕는다.“요즘 잘 안 써지네요..”

보고싶은데, 예나씨 소설예나가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럼..제일먼저 시온씨가 봐줄래요?”

원래 예나의 엄마가 제일 먼저 봐준다는 한 말이 생각났다.

저야 영광이죠시온이 웃어보이자 예나도 웃어보인다.

예나가 다시 침대에 바로 눕는다. “시온씨는 돌아가고 싶어요?”예나가 물었다.

?”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그립지도 생각나지도 않아요.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꽤 만족스러운 걸요. ”

 시온이 쓴 미소를 보인다.

전 시온씨가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이 비수처럼 시온의 뇌리에 꽂힌다.



저도 지금이 좋아요, 하지만 이름밖에 모르잖아요. , 시온씨의 진짜모습을 알고싶어요.”

몸으로 돌아가면 당신을 기억 할 수 없다라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온이 입술을 깨문다. 아프지 않았다.

제가..몸으로 돌아갔을 때, 기억을 못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요?”

예나가 뜸을 들이다 말을 잇는다.

어쩔 수 없죠 슬프겠지만, 그럼.. 못 만나겠죠?”

 예나가 방에 불을 끈다.

잘자요.”

시온이 인사하자 오늘도 자서 미안하다고 한다.

사람이 자는건 당연한건데 오히려 미안해하는 예나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예나씨가 없었으면 내가 웃을 수 있었을까?’

오늘밤도 혼자 지샌다. 아침이 밝자 예나가 서서히 일어난다.

 “시온씨..?”예나가 방에 없는 시온을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방에서 나가자 부엌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시온을 부른다.

시온? 뭐하고 있었어요?”

시온이 깜짝 놀라 일어서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지난 밤 예나가 잠들고 얼마 후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장시간 말이 나오지 않은적은 이번니 처음이다.

예나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고 시온이 목을 잡으며 계속 소리친다.

나와..나와..좀 나와라!’


!”


 나왔다. 악을 쓰며 소리치자 그제야 목소리가 돌아온다.

 여지껏 있었던 일 중 가장 길었던 침묵이 끝이 났다.

예나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시온이 황급히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는다.

근데 오늘 어디 가는 거에요?”

예나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웃어보인다.

출판사요!”

 예나가 얼마 전에 참가한 공모전에서 정식으로 출판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며 연락이 왔다고 한다.

 “오늘 미팅이에요! ..! 떨린다

 시온이 예나 머리위에 손을 올린다. “축하해요

 “..? 뭐지? 방금 진짜로 느낌이 난 것 같아요

설마요, 얼른 준비해야 할걸요?”

시계를 보자 8시가 다 되간다.

, 빨리 해야겠다급하게 준비를 끝낸 예나가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다.

 “.. 떨린다 

잘 다녀와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웃어요. 웃는게 예뻐요.”

웃는 얼굴이 에쁘단 말에 살짝 붉어진 볼로 환하게 웃어보인다. “갔다와서 내 글 읽어줄거죠?”

시온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다릴게요

 시온의 대답을 들은 예나가 문을 닫고 나선다.



4. 출판사와의 첫 미팅은 꽤 좋은 성과를 주었다.

 출판사 직원이 원고를 받으며 꼭 편집장에게 전달 해보겠다고 했다.

성사가 될 진 모르겠지만 좋은 분위기 속에 미팅이 끝나고 예나가 집으로 향한다.

저 왔어요! 조금 늦었죠?”

불이 꺼진 방, 켜져 있는 노트북의 화면 빛만이 예나를 반긴다.

시온씨?”

 불을 키며 불러봐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집안 어느 곳에도 시온이 없다.


분명 기다린다고..”

예나가 이상하단 표정을 지으며 현관으로 향한다.

 시온이 기다린다 해놓고 밖으로 나간적은 한번도 없었다.

예나가 다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시온씨..”

 ‘기다린다며.. 읽어준다며!

예나가 달려간 곳은 항상 시온이 간다했던 공원이었다.

 “없어..” 공원을 아무리 둘러봐도 시온으로 보이는 형태는 없었다.

예나가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시온이 사라졌다는 걸 인지함과 동시에 얼마 전 시온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제가 몸으로 돌아갔을 때 기억을 못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요?’

 .. 돌아갔다. 시온이 돌아갔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좋은 일이다.


 좋다,


 좋은 일인데,

 좋아야 하는데 예나의 마음엔 응어리가 있듯 답답했다.

 “으으.. 으아아..”

 쪼그려 앉아있는 예나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어쩔 수 없잖아..원래대로 돌아온 것 뿐이잖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하나 없이 목 놓아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뉘엿뉘엿 지고 있던 해가 어디가고 까만 하늘에 달이 올랐다.

해이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예나는 불도 키지 않은 채 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나마 청한 잠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눈이 떠졌다.

익숙한 천장이 보이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무도 없다.

시온씨..”

 눈에 눈물이 고인 예나의 시선이 노트북으로 향했다.

노트북..?”

 ‘오늘도 열심히 쓰네요-?’

 ‘언젠간 꼭 보여줄게요

 예나가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향한다.

노트북을 키자 바탕화면에 시온이란 이름의 폴더가 있다.


 “비밀번호..모르는데"



예나가 마우스 커서로 폴더를 열자 비밀번호 없이 열린다

열렸다..”

안에는 여러개의 글들이 들어있었다.

이글들은 시온이 매일 매일을 일기 형태로 기록해온 글이었다.

‘2017912일 얼떨결에 예나씨의 노트북을 만질수 있다는 걸 예나씨에게 말했다.

 예나씨가 노트북을 빌려주기로 하여 오늘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로 했다.’

 ‘오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요즘 꽤 자주있다. 진짜 돌아가게 되는걸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니..에나는 처음 알았다.

시온 혼자 숨기며 왔었다.

오늘 예나씨에게 내가 돌아가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예상대로 예나씨는 좋아하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난 뜸을 들이다 기억을 잃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나씨도 뜸을 들이며 어쩔 수 없다며 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예나씨에겐 차마 기억을 잃는다고 말을 못할 것 같다.’

혼자서..”

시온의 글을 읽고 있는 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예나가 어제 일기를 누른다.

오늘은 밤새 목소리가 나오지 않다.

예나씨가 일어날 때 까지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예나가 이어서 읽는다.

예나씨에겐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예나씨는 오늘 출판사와 미팅을 하러간다 했다. 꼭 잘 됐으면 좋겠다.

아 머리가 아픈것같다.

 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좀 있으면 예나씨가 올텐데..서예나


이를 마지막으로 다음 파일이 없다.

예나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무것도 몰랐어..아무것도 알아주지 못했어..”

 언젠간 시온이 몸으로 돌아갈거란건 예나도 알고있었다.

너무나도 잘알고 있었다.

잊고싶었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온은 이제 기억조차 못한다.

그래도 같이 두계절을 보냈다.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외롭게 했다.

지막까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예나가 시온의 파일을 나간다.

 바탕화면이 평소와는 아주살짝 달라졌다는걸 예나는 인지하지 못한채 노트북의 전원을 끈다.

어느새 창밖엔 날이 밝았다.



5. 시온이 없어지고 며칠 동안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때 한 미팅은 성공적으로 작은 출판사지만 정식으로 계약을 했다.

올해 초여름에는 작업이 모두 끝날 것 같다.

 그리고 얼마전 노트북 바탕화면의 바뀐 점이 뭔지 알아냈다.

항상 비워 뒀던 휴지통 아이콘에 파일이 들어있다는 표시가 되어있던 것이다.

휴지통에 들어있던 파일은 제목없음으로 저장된 시온의 글이었다.

예나는 파일을 복원하고 읽은 후 한참을 울었다.

예나씨가 이걸 안봤으면..

예나씨가 이걸 본다는 건 지금 내가 예나씨 곁에 없다는 거니까.

갑자기 이걸 쓰는 이유는 제가 예나씨 옆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에요.

일단 말 안 해줘서 미안해요.

말을 하면 울까봐, 남은 날 웃으며 보내지 못할까봐 마지막까지 감추고 싶었어요.

예나씨가 나 때문에 울지 모르겠지만 안 울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아침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어요.

으면서 지내요 그 모습에 내가 반한거니까.

 그리고 기억을 잃는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파일 비밀번호도 해제했으니까, 솔직히 진짜인지 아닌지는 장담 못해요.

그런데 만약 기억을 잃고 길에서 만나게 되면 저를 잡아주세요.

기억은 없어도 다시 반할테니까.

혼자서도 잘 챙겨먹고 잘지내요. 많이 좋아해요 처음 본 그때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예나는 복원한 파일을 시온의 파일에 넣고 보관하고 있다.

차마 시온과 있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시온과 처음 만났던 벚나무 거리를 자주 지난다.

벌써 1년 전, 햇수가 바뀌고 세번의 계절이 지나고 있다.

 예나가 아직 못다 핀 벚나무 아래를 지난다.

아직 그를 만나고 싶다.

벚나무길을 지나며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가로수 길을 반 정도 걸은 예나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이내 멈춰 선다.

예나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가로수길 반대편에선 익숙했던 모습의 사람이 걸어온다.


시온..”

시온이다.


내가 찾는 그 시온이 걸어오고 있다.

기억을 잃고 길에서 만나면 저를 잡아주세요

잡아 달라 했다.

잡아야 한다. 머리로는 잡으려고 하고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예나의 눈에는 또 다시 눈물이 고이고 시온은 예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옆을 스쳐지나간다.

잡지 못했다.

 예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자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흐른다.


...”

최근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만나면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온과 마주한 순간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서예나라는 기억이 없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쪼그려앉아 울고있는 예나의 어깨에 겉옷이 둘러진다.

..?”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시온이었다.

이 남자는 또 바보같이 착해서 스쳤던 나를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시온이 쪼그려 앉아 예나의 눈물을 닦아준다.

하아..”

눈물을 닦아주는 시온에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예나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시온의 손을 잡는다.

따뜻해눈 앞에 있는 시온이 만져지고 온기가 느껴지자 예나가 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 왜 그래요, 울지 말아요


그렇게 몇 분을 옆에 있어주자 예나가 진정을 한듯하다.

다 울었어요?”

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자국을 닦는다.


전 이시온이라고 해요

처음과 똑같은 인사,

저는.. 서예나입니다

 처음과 똑같은 답.

그리고 시온이 처음과 똑같은 미소로 답해준다.



이제 곧 봄이 온다.

네가 없는 겨울은 사무치게 추웠다.


시온(時溫)이란 이름처럼 너는 어느 봄에 찾아왔다.

너와 같이 보낸 세 계절보다 혼자 지낸 한 계절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네가 옆에 있어 좋았던 만큼 아팠고, 곁에 없어 아팠던 만큼 너를 만난 지금이 행복하다.

나만의 봄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길었던 프롤로그가 끝나고 기다리던 너와 본편의 첫 장을 써내려간다.



에필로그.


그때 그 만남의 계기로 시온과 예나는 정식으로 교재를 시작했다

아직도 시온은 우리가 처음만난 날 왜 운건지, 왜 그리도 서러웠던 건지 모른다.

예나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려 주고 있다.

시온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변함없이 순수하고 착한걸 보면 이 사람이 진짜 그 귀신이 맞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예나는 과거 시온과 있었던 일을 말할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시온에겐 아주 잠시동안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 혼자 기억하고 있는 추억보단 지금 내 옆에 있어주는 시온이란 남자에게 집중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고 싶다.


공원에 가볼래요?”


시온과 예나가 같이 간 공원은 귀신이었던 시온이 그당시 거의 매일을 찾아갔던 그 공원이었다.

벚꽃이다.”

 공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만개한 벚꽃들이 두사람을 반기듯 흩날린다.

그리고 공원의 벤치에선 두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한명이 두 사람의 만남을 지켜본다.

시온에게 기억을 잃는다는 걸 알려준 그 할아버지다.


 “만났구만..”


할아버지는 오늘도 같은 장소, 같은 벤치에 앉아 자신을 잊은채 살아가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시온과 예나가 벚꽃을 보며 걷는 사이 공원 앞쪽에 허리를 짚으며 걸어가는 할머니가 보인다.


오늘도 잘 잤는가? 임자.”

 오늘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내본다.


시야에서 할머니가 사라지고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다시 시온과 예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처음부터 지켜봐왔기에,

시온이 힘들었다는 걸, 예나가 많이 아팠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그렇게 각자 자신만의 봄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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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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