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by 헤현 posted Dec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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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1.

지은아, 나 서울 갈 거야.”

?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설마 서울에서 자리 잡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서울로 올라 갈 거라고. 앞으로 거기서 살겠다고.”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몰라. 근데 나는 서울로 갈 거야. 지방에서 자리잡을 수는 없잖아. 나는 갈 거야. 너는 맘대로 해.”

이게 무슨 청천 벽력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준석이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럼 나는 어떡하지?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 아니지. 이게 어떻게 그렇게 들려?”

나는 지금 너의 모든 말이 변명으로 들린다. 사실 일 년전쯤부터 너가 정말 많이 이상했다. 내 전화를 피하고 데이트를 해도 전같이 행복해하지도 나를 예뻐 해주지도 않았다. 나를 떼어놓기 위해 가려는 것일까? 내가 취업한 이후로 너의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 둘이 함께 광고 기획 회사에 취업하기를 원해 준비했지만 나와 달리 너는 불합격통보를 받았다. 그 뒤로도 꾸준히 취업준비를 했지만 아직 어느 곳도 너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나만 일을 하고 있어서? 아니야. 내가 분명히 잘못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그저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싶다는 말. 그 말을 나는 믿는다. 그와 나는 헤어질 수 없다.


밤새 이 고민으로 뒤척였다. 출근길이 힘들다고 말하는 나에게 너는 바쁜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건지 너는 몰라.”라고 말하곤 했다. 너와 싸우고 회사에 가는길은 전혀 즐겁지 않지만 너의 말이 생각나 애써 힘차게 출근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은 씨! 어제 몇 시에 퇴근했어?”

오자마자 늙은이가 치는 소리에 또 힘이 빠진다.

“8시에 했는데, 왜요?”

어제 사장님이 9시에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난리였어! 10시까진 지켰어야지 뭐하는 거야!”

6시에 칼퇴한 늙은이, 저 팀장이 하는 소리에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나려 하지만 삼키고 애써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준석이 생각으로 가득차 오전시간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2시까지 중요한 서류를 보내야하지만 그마저도 끝내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너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언제와 같이.

 

[아직 자는 거야?]

아직 자고 있어서 연락이 안 온거겠지? 우리는 정말 예뻤다. 8년 전 MT때 처음 본 너는 정말 멋있엇다. 낯을 가려 선배들, 동기들에게 인사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너에게는 그 힘든걸 꼭 하고 싶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내려 우물쭈물 하다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준석아, 잘 가!”

다급하게 건넨 한마디였지만 너는 나를 쓱 쳐다보고

아 어.”

차가운 두 글자로 대답하고 뛰어가 버렸다. 모두에게 생글생글 웃던 너인데 나에게는 차갑게 말하고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내 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문자가 왔다.

[집 잘 들어갔어?]

씻느냐 늦게 봐버린 나는 미안하단 소리와 함께 답장을 했고 우리는 급격하게 친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너는 나를 OT때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런 내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니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급히 뛰어갔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날 보고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넓은 초원에 있는 강아지 같다고 했다. 어딘지도 모르지만 신나 보이는게 어리둥절한 강아지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런 엉뚱한 소리가 어딧냐고 웃어댓지만 그 엉뚱한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우리는 8년을 연애했다. 너는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을 요구했지만 나를 사랑해서 그런것이기에 네가 원하는대로 행동했다. 자신이 군대가 나 혼자 학교에 남는게 불안하다 하여 나는 그동안 너를 따라 휴학을 했고 그동안 자격증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름 꿀 같은 시간이었으며 그렇게 남들이 말리는 군대도 잘 견뎌냈다. 나는 무엇보다 대학을 4년 모두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8년이나 함께했다. 싸웠어도 금새 화해했다. 다툼의 문제는 대부분 나였다. 나만 잘하면 괜찮았다. 너가 요구하는 것들을 내가 들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지만 네가 나를 굉장히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다 괜찮았다.

 

[응 어제 늦게까지 자소서 써서 지금 일어났어.]

그렇다. 너는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는 지금도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과민반응 한 것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방에서 자리 잡고 사는 것 보다 서울에서 자리잡고 평생을 하는게 우리 미래에도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따 저녁에 잠깐 갈게.]

[알았어.]

나는 오늘도 내가 미안하다고 말 할 것이다. 이번일 역시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취업준비에 지친 그를 또 응원할 것이다. 서울로 가는 그를 나는 응원해 주어야만 한다.

 

2.

그가 서울로 간지 반년이 지났다. 우려와 다르게 금방 취직을 했다. 정말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울하다. 그가 취직하고 4개월 동안 얼굴도 보지 못했다. 일이 많이 바쁠까?

[신입사원이 어떻게 나와. 나중에 보자.]

[그냥 좀 기다려줘.]

두통의 문자가 연달아 왔다. 내가 간다고 해도 말린다. 어차피 자는 모습밖에 못 볼 거라면서, 내가 오면 더 피곤하다고 했다. 주말조차 불러내는 회사지만 네가 좋다면 나는 괜찮다. 나는 오늘 우리를 위한 큰 결심을 했다.

? 지은 씨 이거 뭐야?”

사표에요. 저 서울로 가려고 합니다.”

어리둥절한 과장님을 등지고 자리에 와서 앉았다. 무모한 것 같지만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컸다. 우리는 결혼해서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괜찮다. 어차피 언젠가는 나도 올라가야 했었겠지? 조금 빠른 선택일 뿐이다. 사표는 곧 처리된다고 했다. 짐을 싸고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것이 완벽한 것만 같다. 집도 빨리 구했고 곧 올라갈 수 있다. 회사역시 생각보다 빠르게 구해졌다.

 

서울에 올라온 지 2달이 넘었다. 우리는 1주일에 한두 번 연락한다. 요즘 너무 바쁘다고 한다. 오늘은 그의 자취방에 몰래 찾아가보려고 한다. 설레는 마음에 반차를 내고 네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했다. 손은 무겁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다. 나를 보고 웃어줄 네 생각을 하니 너무 행복하다. 서울의 바쁜 거리가 평소와 달리 행복해 보이고 지나가는 커플들의 모습을 보니 네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 회사 언제 끝나?]

[9.]

너무 빨리 나왔나보다. 3시간. 카페에서 바닐라라떼를 시키니 곧 크리스마스니 케이크를 서비스로 준단다. 옷을 하나씩 벗을 때 떨어져 다시 껴입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달달한 커피가 꼭 준석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추운 날 카페에 가면 너는 꼭 바닐라라떼를 마셨다. 제일 달달해 좋다고 하며 너랑 나도 달달하게 항상 함께 하자 고백하곤 했다.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달달한 사람이었다.

?”

준석이가 집으로 들어간다. 고작 7시인데? 뭐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뭐지? 집으로 가볼까?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야겠다.

. 진짜 예쁘다. ?”

뭐지? 준석이랑 같은 빌라에 사는 건가? 진짜 예쁘다. 괜히 움츠러든다. 누가 봐도 당당한 발걸음이다. 저렇게 예쁘니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나도 한때는 그랬던 것 같은데. 몇 살일까? 준석이도 저 여자를 만났을까? 만났다고 해서 흔들릴리 없는 너이지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준석이는 왜 연락이 없지?

전원이 꺼져있어

배터리가 없나? 그냥 가봐야겠다. 바람이 매섭지만 너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라 그런지 상쾌하다.


딩동-.

누구세요?”

뭐야? 누구야?”

? 여자목소리와 네 목소리가 들린다. 이게 뭐지? 손잡이를 돌렸더니 문이 그냥 열린다. 아까 그 여자다. 왜 속옷만 입고 있는 거지? 뭐지?

! 미쳤나봐! 오빠, 저 여자 미친 거 아니야? 남의 집 문을 왜 열어?”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설마 네가. 아니다. 뭐가 있을 것이다.

아 민지야. 잠깐만 기다려봐. 아는 사람인데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 뭐지? 아는 사람? 준석아, 내가 지금 잘못본 거겠지? 그냥 그렇게 말한 거겠지? 저 여자는 뭐지?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하겠다. 이게 다 뭘까…….?

뭐야. 내가 바쁘다고 했잖아. 왜 찾아 온 거야?”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너랑 떨어져 있는 게 너무 슬퍼 직장도 때려치고 올라왔다고 말해야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왜 꿀 먹은 벙어리야?”

네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내가 본건 뭐지? 왜 지금 너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지?

저 여자 뭐야?”

간신히 한마디 던졌다. 네 얼굴이 너무 무섭다. 너무 차갑다. 아니다. 네가 그럴 리 없다.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다.

. 네가 본 게 맞아. 나 바람났어. 회사에서 만난 동생이고. 24살이래. 너같이 답답하지도 않고 움츠러들어 있지도 않아. 항상 당당하고 쾌활한게 이뻐보여서 잘해줬는데, 내가 이제 너무 많이 좋아해. 우리 헤어지자. 돌아가. 다시는 연락하지 말고,”

이게 무슨 상황일까. 이렇게 우리 8년간의 연애가 끝나는 거야? 나는 어제까지 너에게 줄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아니다 이건.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그냥 흔들리는 거야. 우리가 헤어진다고?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8년을 같이 했는데 어떻게 헤어져.”

헤어질 수 있어. 이제 너와 있으면 행복하지 않아. 난 그런 사람과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어. 너랑 있으면 숨이 막혀.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 너 서울 싫다며. 다시 내려가. 거기서 행복해. 안녕.”

 

나는 너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가 나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소리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차갑게 돌아선 너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헤어지다니. 네가 전과 다른 건 진작에 느끼고 있었지만 우리가 헤어지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8년이나 사겼던 우리니까 권태기일 뿐 내가 더 잘하면 너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 때문에 서울까지 왔는데 어떻게 헤어져? 네가 있어서 왔던 서울인데, 네가 내 옆에서 사라졌다. 서울에는 내가 알던 네가 없다.

 

3.

딩동-.

누구세요?”

혹시 준석일까 하는 마음에 다급히 문을 열었다.

저 재민입니다.”

.

네가 아니다. 그가 문자를 보여준다.

[나 몸이 너무 힘들어. 나한테 와줘. 제발]

이럴 수가. 미쳤나보다. 술 먹고 준석이한테 보낸다는걸 재민 씨한테 보내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제 문자를 잘못 보낸 것 같습니다.”

아 그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몸만 좋지 않은건 아닌 것 같아서요. 여기까지 왔는데 소주한잔 사주시죠.”

별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지.

지은씨 문자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내실 겁니까?”

그의 계속되는 말로 결국 나오고 말았다. 그는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봤을 땐 전혀 몰랐다.

 

근데 잘못 보낸 문자인줄 알면서 왜 오신거에요?”

술이 좀 들어가자 정말 궁금했던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재민씨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웃으며 좀 더 마시면 얘기해 준다는 소리만 했다. 술을 계속마시니 준석이 생각이 더더욱 난다. 나도 모르게 재민 씨한테 다 털어놓게 된다. 이사람 믿어도 되는 걸까? 조용히 들어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모든 걸 털어놓아 버렸다. 내일이 되면 후회하겠지. 하지만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 방금 웃으신 거죠?”

?”

내가 웃었나? 내가 웃었다고 좋아하는 재민씨 모습이 웃겨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제 술도 많이 마셨으니까 왜 오셨는지 나 얘기해 주세요!”

그냥 요즘 지은 씨가 회사에서도 계속 우울해보여서 이유나 듣자 하고 왔어요.”

뭐지? 참 싱거운 사람이다. 내일이 되면 후회하겠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만에 사람과 대화하고 웃어본 것일까? 내일 초콜릿이라도 선물해야겠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헤어지고 두 달. 준석이에게 정말 많은 문자와 전화를 했지만 그 중에 답이 온건 단 하나도 없었다. 집 앞에도 가봤지만 나를 피한것인지 마주칠 수 없었다. 회사로 찾아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나는 그의 회사를 모른다. 어쩌면 아는 것이 하나 없을까. 지금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위해 서울에 온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무생각 하지 않고 잠들고 싶다. 나아진 기분을 준석이 생각으로 다시 우울해지고 싶지 않다.

 

따르르릉.

여보세요.”

일어나셨습니까?”

누구지? 뭐지? 재민 씨다.

어제 과음하신 것 같아 출근 못하실까봐 전화했습니다. 30분 뒤, 지은 씨 집앞으로 가겠습니다.”

? 벌써 8시다. 재민 씨 전화가 없었으면 분명히 지각했을 것이다. 급히 준비를 하l고 나가니 재민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였다.

감사합니다.”

회사에 도착하고, 우리의 어색한 시간이 끝났다. 재민 씨의 얼굴을 보니 어제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나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그를 믿어도 될까? 부끄럽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조금 뻔뻔해 지기로 했다.

대머리 독수리 진짜 짜증나지 않습니까?”

?”

과장님 말입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바로 재민 씨다. 재민 씨는 과장님을 대머리독수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머리는 벗겨져서 항상 찡그린 얼굴로 짜증만 내는 것이 대머리 독수리를 닮았다고 했다. 그 덕분에 조금 어색함이 풀렸다.

 

그는 그 후로 나를 계속 데리러 왔다. 나랑 가면 출근하는 길이 심심하지 않아 좋다고 했다. 회식에서 빠져나올 때도 꼭 나를 데리고 갔다. 혼자는 안보내 주는데 나를 데려다 준다고 하면 그냥 보내줘서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함께하면서 꽤 가까워졌다. 회사얘기를 하면서 웃고 농담도 많이 했다. 나보다 3살이 많기에 이제 오빠, 동생하며 지내자고 해서 그렇게도 지내고 있다. 아직 준석이를 잊은 건 아니다. 어떻게 금방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잊을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재민오빠와 친해지고 난 이후에도 준석이에게 연락을 했다. 수십 번의 연락 끝에 답장을 하나 받기는 했다.

[연락하지 말라고.]

이 답장을 뒤로 두어 번 더 문자를 하긴 했지만 맨 정신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를 잊어야만한다. 그래도 준석이를 욕하지 않을 것이다. 준석이도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4.

[오늘 몸살 나서 회사 못가. 못 데리러가서 미안해.]

아침 일찍 재민오빠한테 문자가 왔다. 괜찮다는 문자를 하고 바삐 나갔다. 오랜만에 대중교통 출근도 나쁘지 않았다. 바쁜 발걸음을 한 사람들 속에 섞여 나까지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

죄송합니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이마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습니.”

아니다. 괜찮지 않은 것같다. 나와 부딪힌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쳐 버렸다. 하루 종일 나와 부딪힌 사람 생각으로 복잡했다.

 

지은 씨 오늘 왜 그래? 하루종일 실수투성이야. 그냥 오늘 빨리 퇴근하고 쉬어.”

죄송합니다.”

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와 마주쳤다. 준석이와 마주쳐버렸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준석이와 마주쳤다. 집에와서 그와 함께한 추억들이 보고싶어 추억을 담아온 상자를 열어봤다. 거기에 담긴 우리는 참 예뻤다. 웃음이 난다. 네가 나빴다는 생각도 든다. 근데 이상하다 눈물이 나지 않는다. 너만 생각하면 미친 듯이 흘렀던 눈물인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추억만 생각날 뿐이다. 생각해보니 네 생각을 하고 지내지 않은지 꽤 된 것 같다. 나는 너를 잊은 것일까? 기분이 이상하다.

 

[오늘은 데리러 갑니다.]

눈을 뜨니 문자가 와있었다. 재민오빠다. ! 어제 죽을 사서 들린다는 것을 깜박했다. 다 준석이 때문이다. 길에서 마주친 준석이가 괜히 원망스러워 진다. ? 원망스럽다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건지 잘 모르겠다. 이제 진짜 준석이를 잊은 것일까? 오늘 퇴근길에 재민오빠와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 오늘 퇴근하고 술 마셔요.”

? 퇴근하고? 알았어!”

퇴근하고 소주한잔을 하며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준석이를 생각하지 않고 여태 지낸 게 조금 서글퍼 지기도 했다고 했다. 오빠는 웃으며 이제 준석이를 잊은 거라고, 다른 사람 만나볼 생각 없냐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어떤 남자를 만나든 준석이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 또 버림받을게 두렵다. 오빠는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충분히 사랑받을 만 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오빠와 말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집에 가서 준석이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버리려 한다.

이제 가자. 내일 또 출근 해야지.”

오늘 따라 집에 가기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마음이 가벼워서 집에 가기 싫은 것일까? 그런 거겠지? 오늘 하루를 생각하니 참 가볍다.

 

지은 씨. 재민팀장님이랑 같이 과장실로 오래요.”

무슨 일이지? 설마 대머리독수리라고 한걸 들켰나? 웃음이 난다.

지은 씨 뭐해요? 왜 혼자 웃어요? 과장실로 오라는 거 들었어요? 어서 갑시다.”

회사라고 존칭을 쓰는 오빠가 어색해 당황했지만 얼른 일어나 과장실로 갔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

다다음주에 부산에서 피칭있는거 알지? 그거 둘이 다녀오게.”

?”

이게 무슨 소리지?

지은 씨가 쓴 기획안이 매우 괜찮더군. 그쪽에서도 맘에 들어 했어. 혼자가기는 무리니 팀장인 재민 씨와 함께 다녀오게. 경비와 숙박비는 회사에서 지급하니 영수증만 가져오고 준비해서 다녀오게.”

이럴 수가. 대머리독수리에게 칭찬을 듣다니. 오늘은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같다. 같이 가는 사람도 오빠라니. 편한 일정이 될것같아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 이제 다시 가서 일 보게. 망치고 오면 알아서 하라고.”

!”

괜스레 힘이나 힘차게 대답을 하고 오빠와 나왔다.

오늘 기념으로 술 한 잔?”

좋아요!”

집에 가는 길에 오빠와 술을 마시고 들어갔다. 준석이를 정리하고 모든 일이 슬슬 풀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아예 안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울하지 않다. 바람핀 남자 뭐가 좋다고 데리고 있을까? 부산이라니. 설렌다. 가장 하고 싶었던 피칭을 내가 하게됐다.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서울살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서울에 올라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5.

[나오세요.]

오늘 드디어 부산에 가는 날이다. 노트북, 파일, , 칫솔. 모든 게 완벽하다. 과장님이 무슨일인지 편하게 피칭하고 쉬다 오라고 3일 휴가까지 주셨다. 피칭하고 쉬다 올 예정이다. 오빠와 여행이라니 기분이 이상하지만 회사일이니까! 피칭하러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반갑습니다. AEU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들어와서 대기해주세요.”

대기하는 동안 긴장이 조금 됐지만, 잠을 푹 자서 그런지 괜찮았다. 우리의 피칭을 들은 KAV는 우리의 기획안을 채택하겠다고 했다. 과장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여행 경비까지 지원해주겠다고 편히 쉬고 영수증을 첨부하라고 했다.

 

밤이 되고 숙소에서 짐을 풀고 쉬고 있는데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창밖을 보라고.”

뭐지?

. 별이 진짜 많아요!”

서울에서 절대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머리위로 쏟아질 것만 같다.

옷 입고 나와. 맥주한잔 하자.”

날이 쌀쌀해 조금 춥지만 맥주 한 캔씩 들고 바닷가를 걸었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다. 준석이와 헤어지고 이렇게 즐거운 날이 있었을까? 내가 문자를 잘못 보냈던 날, 재민오빠가 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을까? 갑자기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 고마워요.”

뭐가?”

문자 잘못 보낸 날 와줘서요. 그래서 지금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오빠는 내 말에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날이 정말 좋다. 바닷가의 차갑고 짭짤한 바람이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쉼이기 때문에 그럴까?

저기서 앉았다 가자.”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다 뱉은 오빠의 말에 알았다고 했다. 바다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지은아.”

?”

그날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 이게 무슨 소릴까. 그날?

네가 문자를 잘못 보낸 날. 기회라고 생각했어. 너 계속 좋아하고 있었거든.”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오빠가 하는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내가 입사하고 오빠는 당찬 시골 소녀라고 생각했단다. 소녀라기엔 나이가 조금 있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리를 잡고 시작하려는 모습이 당차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긍정적인 웃음을 보여주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모습에 눈길이 갔고, 어느새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꼈단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됐다고 했다. 그러던 내가 2달 뒤, 급격히 우울해지기 시작하더니 그 전 같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오빠가 걱정하는 와중에 나에게 그런 문자가 왔고 기회라 생가하여 우리집에 왔다고 했다.

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지?

그게 저는 지금.”

지금 답을 달라는 건 아니야. 당황스럽지. 일단 들어가자! 춥다!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근데 오빠가 싫지 않다. 오히려 두근거린다. 나도 오빠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준석이를 잊고 오빠랑 사귈 수 있을까? 혹시 그러고 헤어지면 어떡하지? 준석이처럼 내가 질려버리면? 준석이는 내가 집착이 심하다고 했고 사람을 화나게 한다고 했다. 또 피곤하게 한다고 했다.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또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내가 사랑받아도 괜찮은 것일까? 오빠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지은아 가자!]

. 깜박 잠들어 버렸다. 내가 오빠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일단 나가기나 해야겠다.

오늘 춥지! 돌아다닐 수 있을까? 일단 밥부터 먹자!”

오빠는 하루 종일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내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나도 답을 줘야 할텐데. 그냥 오늘 말해야겠다.

오빠 이따 술 한 잔 해요!”

하루 종일 정말 즐겁게 돌아다녔다. 추위는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웃고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아줌마의 말에 커플인척 하기도 했다. 오빠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지만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괜히 자신감이 생겨나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오빠. 할 말 있어요.”

감자튀김을 입에 넣던 오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저는 오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에요.”

어제 내가 생각했던 모든 걸 말했다. 중간에 오빠가 화나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빠는 그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나의 말을 다 들어 주었다. 중간에 끊는 법도 없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말을 끊고 화내는 준석이와는 참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과연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준석이는 8년 동안 내가 답답하며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화나게 한다고 했다. 좋아하지만 내가 너무 많은 잘못을 한다고, 그럼에도 자기가 거두어 주는 거니까 잘하라고 했다. 내가 모든 걸 털어 놓았다.

이래도 제가 좋아요? 제가 괜찮은 사람 같아요?”

응 좋아.”

너무 단호한 오빠의 말에 당황했다.

그 남자가 이상한거야. 과거의 남자 때문에 나도 그렇게 생각할거라고 생각하지 마.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 하지마. 나는 널 정말 사랑해줄거야.”

단호한 오빠의 말에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내가 울자 오빠가 당황했다.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자존감 낮은 저라도 좋으면 우리 사겨요.”

내 말에 오빠의 눈이 또 동그래졌다. 토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말에 오빠는 아무 소리 없이 끄덕였다.

이제 들어갈까요?”

오빠는 오빠의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밤을 보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오빠에게 기대자니 상쾌했다. 남은 하루도 최고의 여행이 될 것 같다.

 

6.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 무슨 말이야?”

사실 한달 전부터 고향 친구들이 놀자고 했다. 당장 내일인데 나는 아직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준석이랑 8년 동안 사귀는 동안 친구들을 만난 날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물론 몇 번 몰래 만나기도 했다. 준석이는 내가 친구와 만나는 걸 싫어했다. 당연한거라고 했다. 여자애들이 술집에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남자 만나러 가냐고 싫어했다. 오빠도 역시 싫어하겠지?

나 내일 고향친구들이 술 마시자는데. 다녀와도 괜찮을까...?”

정말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2년 넘게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기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어봤다.

! 당연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다녀 오는거지!”

..? 이렇게 쉽게?”

뭔가 이상하다. 화가 난건가? 왜 이렇게 쉽게 허락하지?

허락해 주는거야?”

허락한다니. 나한테 왜 허락을 맡아. 지은이가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나도 친구들 만나잖아.”

. 그렇구나. 또 한번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친구를 만나는 건 잘못 된게 아니다. 오빠랑 사귀는 동안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옷을 입을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항상 준석이 눈치를 봤었다. 밥 먹는 자세까지 준석이는 눈치를 줬다. 준석이는 친구들 앞에서 내 욕을 많이 했다. 남자친구 기 세워주는 거라며 가만히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이게 맞는 건 줄 알았다. 첫 남자친구였기에.

 

하지만 오빠는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예쁘다고 해주었고 하고 싶은건 다 하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승진했을 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으며 내가 오빠 생일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하면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지나가며 예쁘다고 한 것들을 기억해 선물해 주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 나를 욕하기보다 칭찬하고 오히려 존중해 주었다. 오빠와 연애하면서 준석이가 틀렸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8년의 세뇌된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해주었다. 그때 겪었던 것들이 데이트폭력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빠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빠, 내가 사랑해!”

 

7.

[잘 지내?]

미드를 한편보고 잠들려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누구지?

[누구세요.]

[내 번호도 지운거야? 나야. 준석이.]

준석이다. 잊고 지냈다. 딱히 답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다

♩♪♬♪♬♬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 . 준석이다. 별로 통화하고 싶지 않은데. 받아줄까?

여보세요.”

답장 어디갔어?.”

안하고 싶어서. 왜 연락했어?”

요즘 네 생각이 계속 나. 나 그 여자랑 헤어졌어. 나 지금 네 집 앞이야 나와.”

미쳤어? 내가 왜 나가, 싫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 내가 자기 때문에 꿈에 그리던 직장까지 때려 치고 올라왔는데 딴 여자랑 바람피워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너 지금 김재민? 그 남자 때문에 그러는 거야? 미쳤어? 그 남자도 널 버릴 거야. 너 같은 여자 받아줄 남자는 나밖에 없다고. 당장 나와. 그 남자까지 죽여 버리기 전에.”

드디어 미친 것 같다. 너라는 인간 더러울 줄 알았다. 아쉽게도 나는 2년 전 그 최지은이 아니다.

미친놈은 너야. 내 인생에서 꺼져. 너 같은 인간은 수백억을 준다고 해도 안만나. 어디서 쓰레기 같은 게 와서 지랄이야?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계속 이러면 신고 할거야.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내 말에 또다시 지랄을 한다. 이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내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쏘아버리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재민오빠. 보고 싶으니까 와줘.]

새벽 2시지만 오빠한테 문자를 보냈다.

지은아 무슨 일 있어? 내가 갈게 10분이면 도착해.”

창밖을 보니 준석이가 아직도 서 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화를 내는 듯 하지만 상관없다. 오빠 차가 보인다. 내려가야겠다.

지은아! 네가 나올줄 알았어. 그래 너는 나밖에 없다고! 집에 들어가자. 네 집에 들어갈래.”

준석이가 역시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날 보며 말한다. 아쉽지만 나는 아니다.

무슨 소리야? 내 남자친구가 내가 보고 싶다더니 이 새벽에 달려와서 마중 나가는 거야. 보고 싶다고 해도 몇 달 동안 피하던 누구랑은 다르더라고.”

지은아 무슨 일이야?”

타이밍도 좋다. 재민오빠다.

오빠. 내가 그때 말했던 쓰레기야. 준석아. 똑똑히 잘 들어. 너는 이제 내 인생에 한번 스쳤던 쓰레기야. 나 오빠랑 내년에 결혼하니까 내 인생에서 꺼져.”

결혼한다고 한 소리에 오빠가 살짝 당황한 것 같지만 맞장구 쳐주며 집에 가라고 이야기한다. 준석이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욕하지만 곧 돌아갔다.

정말 나랑 내년에 결혼할거야?”

! 하자!”

준석이 때문에 급히 뱉어버린 말이지만 오빠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해왔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때문일까. 오늘 따라 하늘이 예쁘다. 저 구름처럼 내 마음도 가벼워진 기분이다.

 

처음 서울에 올라 왔을 땐 너무나도 막막했다. 준석이를 따라 무작정 올라와 자리잡기 까지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올라와 철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고, 신세지기 싫었다. 그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려 노력했다. 그렇게 어렵게 자리를 잡자 준석이가 날 떠나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눈치가 없어서 알지 못했다. 첫 남자 친구를 제대로 잘못만나 버렸다. 하지만 8년간의 시간이 아깝지도 준석이를 따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것이 후회되지도 않는다. 준석이랑 연애하지 않았으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남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준석이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재민오빠를 더더욱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혼자 자리잡으려 애쓰지 않고 준석이를 무작정 만나러 갔다면 바람난 그를 보고 난 다시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 덕에 재민오빠를 만났다. 지금 내가 있는 서울에는 재민오빠가 있다. 내 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