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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격화소양 posted Dec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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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이면 대 여섯 개 맞춰놓은 알람의 세 번째 벨이 울릴 때인 것 같아 손을 휘저으며 휴대폰을 찾는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도록 나를 깨워주신 어머니가 원망스럽고 그립다가, 건조한 슬픔이 찾아온다. 슬픔은 내 몸을 움직이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바로 일에 몰두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 오늘 신정이구나. 괜히 화장실에 들어왔다 싶어 소변만 대충 보며 뒤통수를 긁는다. 오늘따라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탓인가 안 오던 아침허기에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텅 비어있다. 무엇처럼. 안 그래도 시린 발에 냉기만 더한다. 익숙해진 배달음식과 냉동식품의 억지스러운 맛이 지겹다 싶어 오늘만큼은 실력발휘를 제대로 해 새 해 기념 된장찌개를 끓여먹겠다. 문을 벌컥 열지만 단열은 물론 방음조차 잘 안 되는 오피스텔의 지겨운 복도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춥다. 어우.. 잠바 잠바. 여름옷을 정리할까 할까 하다가 어느 새 가장 두꺼운 외투를 찾고 있는 나. 내 나태함과 게으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며, 일단 나갔다 와서 싹 하자. 이 역시 뒤엔 묻힐 것을 알며 문을 열었다. 아 돈. 덤벙댐 또한 둘 째 가라면 서러웠지. 다시 돈을 챙겨 문을 연다.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제대로 등교한 적을 찾기 힘든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니 왜 학교에 실내화를 두고 다니게 못한거야. 아직도 이해가 안가. 그 조그만 애들 조금이라도 편하게 다니게 해줘야지. 주말엔 늦잠에, 평일엔 항상 뛰어다니던 아침 길을 이렇게 여유롭게 걷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마트에서 대충 장을 본 후 돌아오는 길에 짝짝이인 내 슬리퍼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꼭 이런 날은 아는 사람 만나더라. 초점 없이 잡생각을 하던 새에 집에 다 와버렸다. 옆집 여자다.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는 여자인데 매일 밤 화가 가득 찬 상태로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소리치는 사람은 싫지만 자꾸 마주치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달그락 거리는 플라스틱의 물건을 박스로 대충 싸서 복도에 내놓았다. 뭐 버리시나봐요. 아 네. 말이 항상 짧더라. 나는 사온 음식을 냉장고에 정리한다. 잔뜩 산 것 같았는데 집에 오면 뭐 없어. 아 호박 안 샀다. 급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쪼그려 앉아있던 다리가 풀리고 뒤로 드러누웠다.

찌그러진 큰 박스에 여름옷을 정리 해 창고로 간다. 몇 년째 이 박스네. 높이 있던 가습기가 눈에 들어온다. 어후 먼지. 먼지가 너무 싫다. 이참에 싹 정리하자. 엄마, 보고 있지. 아들이 이렇게 부지런해졌어. 창고와 집안 청소가 모두 끝났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니 볼록 나온 배가 조금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인가. 집 한 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가습기 박스. 이야 이건 대체 몇 년이 되었지. 푸른색 손잡이가 달린 물통을 거꾸로 꼽아 커다란 플라스틱 뚜껑으로 덮는 방식의 구식 가습기. 물통 안을 닦을 때는 왜 고려를 안 하고 만들었지. 하여튼 뭘 하던 뭘 만들던 배려가 있어야지. 물통 내부를 닦는 데만 10분이 흘렀다. 물을 채우고 재빠르게 뒤로 뒤집어 작동을 시켰다. 코드를 안 꼽았나. 꼽혀있다. 사용 설명서조차 버리지 않은 어머니. 다 정상인데, 왜 안 되는 거지. 그냥 버리자.

가습기 박스를 들고 복도에 서있다. 옆집 여자가 내놓은 것도 같이 버려줄까. 지난번 쓰레기 묶음을 복도에 쌓아두어 같은 층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던 여자를 발견하고 달려가 제가 앞으로 이 집 쓰레기 버리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 이렇게 귀찮을 줄이야. 어느덧 세 달이 흘렀다. 더군다나 고마워는 하는 건지 이젠 당연한지 복도에 덩그러니 내놓는다. 뭐 가끔 배달우유를 주더라. 유산균 어쩌구에 쥐똥만큼 들어있는 다이어트 유제품. 내게 우유를 주는 날과 복도에 짜장면 그릇은 겹치는 것 같다. 혹시나 궁금하여 박스를 살짝 열어보니 내 것과 아예 똑같은 가습기이다. 이것도 인연인가. 뒤숭숭한 마음에 둘 다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여자의 박스 안에는 물통이 없다. 근데 생수 페트병은 왜 들어 있는 거지. 귀여움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내 물통을 휙 돌려 꼽았다. 역시 맞다. 코드를 꼽고 전원을 누르자 기억속의 소리와 장면이 펼쳐진다.

어릴 때는 가습기 꺼내는 날이 신났다. 입을 벌려 가져다 대고 연기를 모아 허공에 푸 뱉었다. 담배놀이라 했지만 지금 내 주머니의 담배는 전혀 다른 맛이더라. 얼굴에 쐬고 눈에 쐬고 코에 방울방울 물방울도 맺히고. 들이쉬면 나오는 기침과 더럽다며 가습기로 장난치는 것을 부드러운 말로 말리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아 아침에 생각 했습니다요 어머니. 그만 나타나세요 엄마. 어머니는 나를 혼낸 적이 단 한 번이었다. 없는 아버지를 큰소리로 욕하며 원망하던 중학교 시절 어느 날. 화가 난 어머니도 처음 보았고 그 어머니에게 처음 맞아보았다. 아 아버지란 꺼내면 안 되는 말이구나. 공부도 못하고 게으른 저를 왜 크게 타이르지 않으셨나요. 왜 매질을 해서라도 바른길로 걷게 하지 않으신건가요. 항상 똑같던 어머니의 머리와 옷이 생각난다. 아마 힘드셔서 그러셨겠지. 내게 말 한마디 할 힘조차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고기집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내 기억에는 고기집에 가끔 들려도 우리 엄마만 일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좋아해준 내 갈색머리와 큰 코와 키 덕분에 학교는 물론이고 고기집은 너무 즐거운 공간이었다. 어머님은 아니셨겠지. 점점 내게 엄마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남에게 항상 사과하고, 밤마다 팔과 등에 파스를 붙여달라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피부가 항상 건조했다. 그 덕에 학창시절 여드름도 많이 났고 튼 입술에 거친 볼과 손 또한 익숙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쉬는 날, 주말도 아니고 화요일이었다. 그 때 마다 우리 모자는 손을 잡고 장을 보았다. 안가기 시작 했던 것이 내가 중학교부터였나. 후회된다. 나는 항상 가전제품을 파는 가게만 지나치면 가습기를 쐬었다. 미로야 얼른 와. 조금만 더하고요. 입 주변과 코끝이 시원해지면서, 어느새 젖게 되고, 깨끗한 먼지를 뒤집어 쓴 신비한 이 기분. 이 때 마다 주인아저씨는 적당한 때에 나를 대충 쫒아내셨고 어머니는 별것도 아닌데 진지하게 사과를 하셨다. 가습기가 점점 저렴해졌는지, 가습기 살 돈을 그때 쯤 다 모으셨는지, 우리 집에서 가습기 박스를 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매일 가습기를 만졌다. 어머니는 혹여 고장이 날까 애지중지하셨다. 밤이 되면 그게 보약이라도 되는 마냥 내 얼굴에 연기가 그대로 떨어지게 정성스레 맞추셨다. 나는 가을과 겨울엔 항상 젖은 얼굴로 깨었고 이불을 말렸다.

가습기 입구에 얼굴을 슬그머니 대보고 눈에도 대보고 코와 입에도 대본다. 볼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을 슥 닦으며 배달음식 전단지를 뒤적인다. 옆집 여자 어제 짜장면 먹었던데. 눈에 들어오는 중국집 전단지를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옆집 문을 두드린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시죠. 전화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 .. ? 아 잠시만요. 당황하는 여자. 왜 그러지. 휴대폰 주세요. 찍어드릴게요. 아 네. 02로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준 여자. 아차. 긴장해서 말이 덜 나왔다. 알 수 없는 미소를 흘기는 여자.

그 때 이후로 그대로인 것은 건조한 내 얼굴과 사진처럼 박혀버린 어머니의 미소, 가습기의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