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 (Warning)

by 임선규 posted Dec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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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月人)>/<WARNING>

Prologue

달이 밝지 않았다. 슬픈 밤이었다. 밤은 어두웠고 어두움은 고요했다. 고요함 속에는 외로움이 깃들어있었다. 외로운 밤이었다. 외로움은 길었다. 길고도 길었다.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사내의 어깨가 떨렸다. 깊고 처연한 흐느낌이었다. 떨림은 이내 잦아들었다.

흙 냄새가 낮게 퍼졌다. 흙 냄새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왔다. 나무들이 비 맞을 채비를 했다. 나무들이 서로 부딪혔다. 나무들은 울었고, 울음은 적막을 깼다. 나뭇잎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고요의 바다. 이글호 착륙 완료. 달 착륙선에서 이제 내립니다.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입니다.]

1969 7 17,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날이었다.

Chapter 1. 전화

달이 유난히도 밝은 날이었다. 달빛에 별빛이 가려졌다. 달빛이 창틀 너머로 들어왔다. 창틀 아래에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작가였다.

타자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내는 달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사내는 무명이었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꿈을 접을 생각이었다. 간절하고 절실했다. 절실한 만큼 단어들은 정갈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절실했다.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밝았다. 신비로웠다. 사내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달을 바라보았다.

달 표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분명히 보았다.

그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그 쪽에선 제가 보이나요?

Chapter 2. 여인

-그 쪽에선 제가 보이나요?

여인은 거듭 물었다.

-누구시죠?

-그쪽에선 제가 보이시냐고요?

딸깍.

사내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타자기 소리가 다시 요란했다. 고요의 정적을 깨는 유일한 소리였다. 이윽고 타자기 소리가 멈췄다.

사내는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다시 한번 달 표면이 반짝였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사내가 물었다.

-그 쪽에선 제가 보이나요?

그 여인이었다.

-어디신데요?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요.

사내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Chapter 3. 대화

그 날 이후 달은 계속 밝았다. 외로운 밤하늘에 위로를 건네듯 달은 밝았다. 사내는 언제나 타자기를 두드렸다. 타자기 소리가 멎으면 사내는 어김없이 달을 보고 있었다. 사내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매번 전화가 울리곤 했다.

-여보세요?

-그쪽에선 제가 보입니까?

여인은 언제나 같은 말로 시작했다.

-보이지 않습니다. 달에 계십니까?

사내는 분명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질문을 하는 사내의 얼굴엔 실소가 걸렸다.

-네 달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인의 말에 사내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가 이어 물었다.

-달에서는 제가 보이나요?

-아니요볼 수 없어요.

사내의 물음에 여인이 답했다. 슬픈 목소리였다. 여인은 한 마디를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꼭 저를 봐주세요, .

Chapter 4. 기다림

태풍이 찾아왔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고, 비는 멈출 줄 몰랐다. 구름은 넓었고 넓은 만큼 두터웠다. 달이 가려졌다. 달빛이 새어나올 틈이 없었다. 외로운 밤을 어루만져주던 달빛이 사라졌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사내는 타자기를 두드렸다. 타자기 소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쏟아져 내렸다. 달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전화는 오지 않았다. 타자기는 멈춰있었다.

빗소리가 적막을 달래주었다.

기다림은 길었다. 사내는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 타자기 소리도 멈췄다.

비가 그친 날에도 구름은 가득했다. 기다림은 외로웠다.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달이 떴다.

Chapter 5. 골동품 가게

전화가 울렸다.

-제가 보이나요?

여인이 물었다. 사내는 내심 여인이 며칠간 전화를 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주길 바랬지만, 여인은 그저 같은 말을 할 뿐이었다. 사내는 서운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아직 볼 수 없어요. 하지만 곧 볼 수 있을 거에요.

사내가 말했다. 기대감이 서린 목소리였다.

여인이 답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사내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타자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사내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다. 사내는 골동품 가게로 향했다. 사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골동품 가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한 가게였다. 물건 하나 하나 먼지 쌓인 곳 없는 가게였다.

늙은 노파가 나와 맞이했다.

-어떤 물건을 보러오셨수?

Chapter 6. 망원경

-망원경 하나를 좀 보러 왔는데요. 달을 볼 수 있는 걸로 말입니다.

사내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봐야만 했다. 그 여인의 부탁을 무시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늙은 노파가 오래된 망원경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망원경은 왜 찾수?

노파가 물었다.

-볼게 좀 있어서요.

사내가 얼버무리며 답했다. 그러자 노파가 웃으며 물었다.

-볼 사람이 아니고? 끌끌끌.

사내는 당황스러웠다. 노파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노파는 물건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말했다.

-그냥 가져가슈. 선물이유.

사내는 손에 들린 망원경을 바라보았다. 먼지 하나 묻어있진 않았지만 새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손때가 정갈하게 묻어있었다.

사내의 입가에 괜한 미소가 걸렸다. 사내는 여인을 꼭 보고 싶었다. 사내는 집으로 돌아갔다.

Chapter 7. 얼굴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혹시나 비가 올까. 혹시나 달이 안 뜨지 않을까, 사내는 걱정했다. 그러나 밤이 오자 걱정은 눈 씻기듯 녹아 내렸다.

달은 그 어떤 날보다 밝았다.

사내는 전화를 기다렸다. 이윽고 전화가 왔다.

-오늘은 제가 보이나요?

여인이 물었다.

사내는 망원경으로 달을 보았다. 빛이 반짝이는 곳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책상에 앉아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손거울이 놓여져 있었다. 손거울에 달빛이 반짝였다.

사내가 답했다.

-, 오늘은 보여요.

사내의 눈은 줄곧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웃었다. 미소는 신비로웠다. 애석하게도 여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사내를 볼 수 없는 이유였다. 여인의 얼굴은 희었다. 초겨울 새벽녘의 싸리눈과 같이 흩날렸다. 사내는 그 얼굴 하나하나를 가슴속에 새겨놓았다.

사내는 사랑에 빠졌다.

Chapter 8. 이기심

그 후로 달이 뜨는 날 밤이면 사내는 전화를 기다렸다. 타자기 소리가 높게 울리면 전화기 소리는 낮게 퍼졌다.

1969 7 17일 이었다.

사내의 타자기 소리가 멈췄다. 낮고 묵직히 울리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어김없이 하늘에 달이 떴다. 낮고 흐린 달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사내는 망원경으로 여인을 보았다. 평소와는 달랐다.

여인의 등 뒤로 성조기를 든 우주인이 서있었다. 여인은 눈치채지 못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수화기로 말을 했다.

우주인은 달에 자신보다 먼저 온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믿기 싫었다. 우주인은 성조기의 깃대를 높게 들었다. 깃대의 끝이 섬뜩했다.

-피해! 피하라고!!

사내는 흐느꼈다. 목소리는 떨렸고 소리는 낮았다. 소리는 달에 닿을 수 없었다.

창 밖에선 환호성이 들렸다. 이기심은 높고 환하게 울렸다.

달 표면에 발자국이 찍혔다.

Epilogue.

사내가 쓰던 이야기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달을 너무나도 사랑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에 대한 소문은 천천히 퍼졌다.

사내는 달이 뜨는 날마다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망원경에는 성조기만 펄럭였다. 성조기는 높았다.

사내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적막을 깨는 타자기 소리도 더 이상 없었다. 적막은 빨간 벽돌을 타고, 담벼락을 타고, 전봇대를 타고, 창틀을 타고 퍼져나갔다. 높고 좁은 울림으로 퍼졌다.

달이 밝은 어느 날부터 사내는 전화를 기다리지 않았다.

사내의 책은 불티난 듯 팔려갔다. 사내는 문학계의 새로운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내의 책은 전국 각지의 서점에서 매번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달이 유난히도 밝던 어느 날, 사내는 여인을 만나러 갔다. 차분한 죽음이었다.

사내는 여인을, 아니 달을 사랑했다.

END.

2017.10.10/2017.10.11/2017.10.16

임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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