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지는 아침

by 니나니뇨 posted Dec 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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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는 아침>



사내는 병든 여인을 찾았다.

파리한 안색과 움푹 들어간 눈은 여인의 임종이 머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사내는 여인 앞에 캔버스를 펼쳤고 대강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윤곽을 잡아가는 그림은 분명  여인의 얼굴이었으나 마치 다른 이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사진을 찍으시지요”

사내는 연필 끝을 다듬는 척하며 넌지시 말했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진은 싫어요”

사내는 등받이에 기대며 벽을 장식한 액자들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남자와 어린 아이가 보였다. 둘의 시간은 그들이 죽은 날에 멈춰있었지만 여인의 시간만은 계속 흘렀다. 

 

 

 여인은 사진사였다. 작은 동네를 다니며 돈 없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대가없이 찍어줬고 그들의 마지막을 위해 봉사했다. 그러다 마지막 집에서 걷지 못하는 남자를 만났다. 젊은 남자는 사고와 죽음을 미리 준비했다. 상체만 옷을 갈아입은 그를 프레임안에 담는 순간 플래쉬가 터졌다. 남자의 미소에서 눈을 뗄 수 없던 여인은 그 미소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그를 찾아왔고 어느덧 함께 아침을 맞았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여인은 행복한 순간마다 셔터를 눌렀고 그들의 벽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남자는 여인과 처음 만났던 날의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남편과 아이가 산책길에 올라 주검으로 돌아오자 여인은 그 날 이후 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더 이상의 액자는 필요 없었기에 카메라는 사라졌다. 세상의 시간은 흘렀지만 여인의 시간은 늘 같은 날에 멈춰 돌아오지 않는 둘을 기다렸다. 하지만 부여잡고 있던 시간도 흘러 이제는 여인의 죽음을 데려왔다.   



 “정 그렇게 힘들면 사진이라도 보고 그려주세요”

여인은 닫힌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내는 사진들을 살폈다. 웃고 있던 여인은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따라 사진의 온도가 달랐다. 뜨거운 사진들에 비해 사내의 캔버스는 차가웠다. 그것이 사내가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는 이유였다. 

 “카메라는 어딨습니까?”

여인이 사내를 쳐다봤다.

 “왜요?”

 “저도 좀 찍어주세요”

여인은 힘없이 웃었다. 

 “나가는 문이 어디있는지는 아시죠?”

사내는 도구들을 챙겨 현관 앞에 섰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봤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사내는 갈대 사이를 걸었다. 바람이 불어 출렁이는 갈대에 몸을 숨긴 채 뒤돌아 여인의 집을 바라봤다. 커튼이 쳐진 창문들은 모조리 굳게 잠겨있었다. 사내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사내는 열쇠로 잠긴 또 하나의 화실을 열었다. 벽에 걸린 그림도, 비스듬히 놓여있는 그림도, 크고 작은 여러 종이 속 그림도 모두 여인이었다. 이 십년만에 다시 만난 얼굴이었다. 화실 속 여인은 여전히 젊고 빛이 났으나 손에 있던 캔버스 위의 여인은 늙고 병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기를 쓰고 잠재워 놓았던 가슴 속 파도가 거세게 일었고 사내는 무너졌다. 그는 찬 바닥에 몸을 뉘인 채 창문을 쏟아지는 달빛으로 반짝이는 여인의 얼굴을 쓸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의 눈가를 사랑해왔던 모든 것을 잃을 남자가 어루만졌다. 



 이십년 전 사내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과 수더분한 머리칼에 파묻혀있던 그는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그려냈다. 그 해 졸업 전시회 사진전을 홀로 거닐던 사내는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봤다. 연필을 들고 생각에 잠긴 사내의 모습을 담아낸 카메라의 프레임은 여인의 것이었다. 여인은 졸업했지만 사내는 삼년간 여인의 프레임 속 자신을 떠올리며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볼 수 없던 것을 그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캔버스에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간간이 여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새롭게 그림을 그렸고 어느덧 화실 하나를 온전히 그녀의 것으로 내어주었다. 어리숙한 사내는 사랑인 줄도 모르고 첫사랑을 시작했다. 사내의 소소한 마음은 수년의 시간을 거듭하며 두껍게 쌓이기 시작했고 그제야 여인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내의 화실 속 늘 같은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녀의 살아있는 삶을 마주한 그는 도망쳤고 화실 문을 닫았다.



다음 날 사내는 꽃을 꺾어 여인의 집으로 갔다. 문을 두드렸고,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 사진을 찍어줘요”

사내는 이십 년 전 여인의 사진 속에 묶여있던 자신의 시간을 풀어주고 싶었다. 여인은 웃으며 사내를 집으로 들였고 꽃을 화병에 옮겼다. 

 “내 그림은 언제 그려줄건데요?”

사내는 화실 속 수십개의 그림을 되새기며 말했다.

 “내 사진은 언제 찍어줄건데요?”

여인은 난감하게 웃었다. 

 “당신만큼. 나도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사내의 말에 여인의 미소가 멈췄다. 아무 대화 없는 정적이 한참동안 흘렀고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인은 두려웠다. 사내를 만나면 거울 속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사내는 늘 두 눈으로 무언가를 말해왔지만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잔잔한 사내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깊은 무언가가 요동쳤다. 여인은 식은 차를 들어 목을 축이고 그의 다리를 봤다. 사내 또한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딘가에 발이 묶여 앞으로 나아갈수도 뒤로 도망갈수도 없는 사내의 다리는 어떤 시간에 한참을 멈춰있는 듯 보였다. 늪에 빠져 끝없이 추락하는 그의 다리 때문에 사내의 시간은 부족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하로 내려갔다. 구석진 곳에 놓인 상자를 수년만에 마주한 여인은 그 위에 덮인 먼지를 부드럽게 쓸었다. 카메라를 들고 사내 앞에 선 그녀는 프레임에 갇힌 남자를 봤다.  그 남자는 남편이었다가 사내였다가 아이였다가 자신이 되었다. 떨리는 여자의 손은 프레임 속의 남자가 사내였을 때를 맞춰 셔터를 눌렀다. 플래쉬가 터졌다. 

 

 여인은 인화된 사내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사내가 갇힌 늪은 사랑이었다.

여인은 수년만에 집을 나왔다. 인화된 사진을 사내의 집 앞에 두고는 소리없이 사라진 여인은 그날 밤 숨이 멎었다. 사내는 다음 날 아침, 곤히 자고 있는 여인의 침대 맡에 앉았다. 늘 굳게 닫혀있던 창문이 열려있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부드럽게 떠올랐다. 멀리 떠오는 햇빛이 눈이 부셨다. 여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내는 캔버스를 꺼내 그녀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걷지 못하는 사내와 작은 아이가 갈대 숲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내는 그 길 옆 갈대 사이에 숨어 그들을 바라봤다. 사내의 등 뒤에 떠오르는 태양은 여인의 얼굴에 보드라운 햇빛을 내리쬐었고 여인의 미소는 빛났다. 걷지 못하는 사내와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의 얼굴도 점점 희미해졌다. 아주 오랜 산책이 끝났다. 사내와 아이는 여인의 품으로 돌아왔고 사내는 이 십년간 묶여있던 깊은 늪에서 발을 뺐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사내의 화실 속 뜨거운 그림들의 불씨를 집 전체로 번지게 했다. 마침내 그 불씨가 온 집을 태우고 사내를 태우고 마지막 남은 그의 사진까지 태웠을 때 비로소 사내는 자유롭게 날 수 있었다. 그것이 사내가 바라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