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싫었다. 직장상사가 이유 없이 갈구는 게. 유독 내게만 일을 시키는 게 싫었다. 담배 태우는 시간마저 자유롭지 못 하게 잔소리 하는 직장상사가 싫었다. 담배를 끊던가 해야지.
나는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고 자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직장상사 죽이는 법’을 검색했다. ‘직장상사 엿 먹이기’ ‘직장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직장상사 엿 먹이는 퇴사 방법.’ 등 연관 검색어만 떴다. 죽이는 방법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 봐야 하나. 아니다. 은행 대출. 카드 대금. 공과금. 월세 등 갚아야 할게 산더미인데. 더러워도 참아야 하는 시국이다.
직장상사. 조 과장이 노란 서류철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조 과장을 발견하고 황급히 인터넷 창을 껐다.
“김 대리.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뭐하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 과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설마 걸린 건 아니겠지?
“오늘 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김 대리가 해줬으면 해서.”
조 과장이 노란 서류철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조 과장이 건네는 서류철을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회사 벽면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6시... 퇴근 할 시간이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 퇴근 시간 다 돼서 주는 건 무슨 막돼먹은 심보인 걸까.
한 숨을 내쉬었다. 서류철만 봐도 갑갑했다. 시계 바늘이 째깍거리는 소리마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나는 서류철을 펼쳤다. 4/4 분기 예산 집행과 관련 서류들이 꽂아져 있었다. 나한테 지금 재무팀에서 해야 할 일들을 떠넘긴 거야?
서류철을 들고 조 과장 자리로 갔다. 조 과장은 자리에 없었다. 옆에 퇴근 준비하는 허 대리에게 물었다.
“허 대리님. 조 과장님 어디 가셨어요?”
허 대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없으면 퇴근 했겠죠?”
나는 자리로 돌아와 조 과장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두 번. 세 번 흘렀지만 받지 않았다. 지 멋대로야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 전화는 왜 또 안 받아!
띠링.
모니터에 ‘새로운 메일 1개’ 알림창이 떴다. 다 퇴근한 시간에 무슨 메일인가. 메일함을 열었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괴로우신가요? 올해 금연 계획을 세웠는데 실패 하셨나요? 그게 다 직장 상사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요? 이거 참. 안타깝네요. 네? 직장 상사가 이유 없이 갈구고 욕하기 까지? 유독 나한테만 과업을 시키고 야근은 무조건이시라고요? 아. 담배 태우는 시간까지 침범 당하셨다고요? 그럼 저희한테 맡겨주세요. 확실한 서비스로 직장 상사의 갈등과 스트레스를 해소 시켜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당신의 직장 상사를 죽여 드리겠습니다.
이상한 내용의 메일이었다. 신종 스팸 메일인가? 누르면 바이러스에 공격당하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메일을 삭제 해버렸다. 모니터 화면을 끄고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덧 해는 저물고 어둠이 낮게 내려앉아있었다. 주머니에서 다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들고 살폈다.
올해 금연 선언을 했지만 몇 달 가지 못해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금연을 시작 하고 나서 몰려오는 스트레스들을 없애려고 별의 별짓을 다 해봤지만 담배만 한 것은 없었다.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댔다. 옥상 밑에 보이는 거리는 조용했다. 가로등 불빛만 비치고 있었고 화려하게 빛나던 빌딩들은 하나 둘 꺼지고 몇 개 남지 않았다.
나는 다 태운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불똥이 바닥에 떨어졌고 다 타고 남은 꽁초는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옥상에서 내려와 모니터를 켜고 엑셀 파일을 열었다. 조 과장이 주고 간 서류철을 펼치고 엑셀에 입력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깨가 결려오고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가 커피를 타고 자리로 돌아왔다.
얼추 끝나갔다. 기지개를 켜고 회사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2시다. 한 숨만 나왔다.
띠링.
모니터에 ‘새로운 메일 1개’ 알림창이 떴다. 나는 메일함을 확인했다.
프롬 : 조 의찬 과장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메일을 확인하기도 전에 조 과장한테서 온 메일인 걸 알고 소리를 질렀다.
김 대리. 오늘 맡겼던 서류는 다 처리 했겠지?
오늘 야근 했다고 내일 아침 회의 때 늦지 말고 일찍 도착해서 각 한 부씩 프린트 해놓고 회의실에서 회의 바로 진행 할 수 있게 준비 좀 해 놓게나.
혼자 남아 있어서 그런지 텅 빈 회사 안에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 걸어놓은 겉옷을 챙겨 회사 밖으로 나갔다. 나는 회사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에 올라탔다. 도로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속도를 높였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전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씻기를 포기하고 옷을 대충 옷걸이에 걸어 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다음 날. 아침 머리맡에 놓인 시계가 시끄럽게 울었다. 한껏 짜증을 부리며 손바닥으로 시계를 때렸다. 입에선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요즘 욕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힘들었다.
화장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볼품없었다.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 눈 밑으로 생겨난 다크서클이 짙었다. 수염은 하루만 지나도 거칠게 자랐다. 양치 할 땐 잇몸에선 피가 났다.
나는 연일 야근으로 두통이 잦았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타고 골목길을 지났다. 골목길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 때문에 차를 급하게 세웠다. 차에서 내려 아이를 살폈다. 다행이다. 아이는 다친 곳 없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운전을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골목길에서 아이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하며 명함을 건네고 차에 올라탔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고 나서 차를 몰 수 있었다.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길가에 차를 세우고 눈앞에 보이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약국 문에서 종소리가 들려왔고 머리를 더 아프게 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두통약 주세요. 효과 제일 빠른 걸로요.”
“편두통 있으신 가 봐요. 두 알 복용하시고 한 시간 뒤에도 계속 아프면 한 알 더 드셔보세요. 3000원입니다.”
나는 카드를 건네고 약 상자를 개봉했다. 어린 아이들이 쉽게 약을 먹을 수 없게 밀봉된 약을 꺼내는데 애를 먹었다. 약사가 나를 보더니 대신 까주겠다고 한다. 약사에게 약을 건넸다. 약사는 능숙하게 포장지를 벗겼다. 약사가 건네준 약 두 알을 받아들고 옆에 놓인 정수기에 물을 받아 약과 같이 삼켰다. 약사는 비타민 음료를 꺼내오며 서비스라고 내게 건넸다.
나는 이마를 짚고 약국을 나와 도로를 확인했다. 잠깐 약국에 간다고 세워놓는 다고 한 곳이 견인 구역이라 찜찜했지만 다행이도 차는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속력을 냈다. 아침에 출근할 때 마다 듣는 라디오에서 현재 시각을 알렸다. 8시 30분. 빠듯했다. 앞으로 회의까지 30분 정도 남았지만 할 게 많았다. 어제 퇴근하기 전에 프린트 해 놓고 갔다면 넉넉했겠지만 짜증내고 그냥 나와 버렸다. 어쩔 수 없지. 다 내가 자초한 일인데...
신호등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려 하지 않았다. 회사까지 가는데 신호등은 총 6개. 6개 모두 빨간 불이었다. 미치겠네.
나는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는 건물 끝 층에 멈춰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함에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옆에 보이는 비상계단을 통해 회사까지 뛰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나는 주변을 살피고 넥타이를 고쳐 매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매만졌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 과장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다. 조 과장은 자리에 없었고 가방과 옷도 없었다. 아직 출근 전인가 보다. 내 자리로 갔다.
아뿔싸... 조 과장이 옷도 안 벗고 가방을 손에 든 채 내 자리에 서있었다. 다른 손에는 어제 늦게까지 정리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조 과장이 서류철을 덮으며 말했다.
“이제 오는 건가?”
“죄송합니다.”
“지금 몇 시지?”
옆에 있던 동료가 눈치 없이 대답했다.
“8시 45분입니다.”
“들었지? 프린트는 다 해놨어?”
“죄송합니다...”
“오늘 중요한 회의인데 준비도 안 되고 그렇다고 회의실이 깨끗한 것도 아니고. 어제 야근 하면서 뭐했어?”
“죄송합니다.”
“자네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 하나?”
“아닙니다.”
“주변을 좀 둘러보게. 지금 다들 뭐 하고 있는지 보이나?”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9시 까지 출근인 회사에는 아직 출근 전인 사람들도 있었고 도착해서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며 인터넷 신문을 읽고 있는 직원들도 있었다. 딱히 바쁘게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조 과장한테 있는 그대로 얘기 했다가는 저 개 같은 녀석이 물어버릴 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또 죄송합니다. 자넨 사과를 입에 달고 사는 군. 평생 사과만 하다가 해고당하고 싶어?”
조 과장이 서류철을 집어 던졌다. 나는 몸에 맞고 떨어진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복도에 놓인 복사기 앞에 서서 서류를 복사했다. 머리가 더 아파왔다. 나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의자에 걸어놓은 양복 주머니에서 두통약을 꺼냈다.
“저기. 조 과장한테 뭐 책잡힌 거 있어?”
눈치 없는 동료 녀석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나는 저리가라고 손짓했다. 분명 조 과장이 보면 옳다구나 하며 나를 갈구로 나탈날게 뻔했다.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게 아니라고. 이 눈치 없는 녀석아. 뒤에 조 과장이 날 쳐다보고 있잖아. 제발. 네 자리로 꺼져버려. 눈치 없는 동료 녀석을 째려봤다.
“김 대리. 늦게 왔으면 노닥거릴 시간이 있나봐. 복사는 다 했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치 없는 동료 녀석이 어디 가서 콱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아닙니다. 빨리 하겠습니다.”
“말로만. 빨리 빨리. 행동도 좀 그렇게 하면 안 되겠나?”
“죄송...”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 과장이 혀를 차며 사라졌다. 꺼내놓은 두통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띠링.
모니터 하단에 ‘새로운 메일 1개’ 알림창이 떴다. 스팸이겠지. 메일을 열지 않았다.
띠링.
모니터 하단에 ‘새로운 메일 2개’ 알림창이 또 떴다. 무시했다.
띠링. 띠링. 띠링.
메시지를 확인 하지 않자 누군가 계속해서 보냈다. 나는 조 과장 자리를 한 번 살피고 메일함을 열었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머리 아프신가요? 아침에 두통약을 사먹었는데 전혀 효과를 보지 못 했나요? 두통의 근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직장 상사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 하지 않으셨나요...
다 읽어 보지 않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오늘도 어김없이 직장상사한테 까이는 당신. 옆에 있는 동료는 눈치가 없군요. 무조건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짜증만 내는 직장상사가 꼴 보기 싫죠?
다음 메일도 확인했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눈치 없는 동료가 말을 걸었군요? 그것 때문에 또 직장상사한테 한 소리 들으셨나요? 저희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시면 직장상사간의 마찰과 스트레스를 없애 드리겠습니다. 어떻게요? 당신의 직장상사를 죽여 드리겠습니다.
내용은 이렇게 끝나고 밑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 중 한 명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휴대폰 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해봤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하긴. 내가 장난을 쳤다고 해도 자신의 번호를 적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없는 번호 이거나 모르는 사람의 번호 일거다. 더 생각할 가치도 없어. 메일함을 닫아 버렸다.
띠링.
메일함을 닫자 다시 알림창이 떴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믿지 않으실 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회사 동료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희는 거짓말과 장난 둘 다 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당신의 상황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요? 저희는 당신 옆에서 숨을 쉬고 잠을 자고 행동을 합니다. 저희는 당신입니다. 당신 마음속에 품은 살의.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자랍니다.
장난의 도가 지나쳤다. 나는 메일 밑에 적힌 번호를 휴대폰에 옮겨 적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담뱃갑에서 꺼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휴대폰에 적어 놓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의 통화 연결 음이 들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김 현수 대리님. 편의상 김 대리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나는 통화 메뉴 화면에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
“당신들 누구야. 누군데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장난 아닙니다. 김 대리님. 메일로 설명 드렸다 시피...”
더 들을 필요 없었다.
“당신들. 적당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인가 본데요. 이 통화 지금 녹음 중입니다. 오늘 중으로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저기... 경찰서 가셔서 신고 접수를 하셔도 저희는 잡히지 않아요. 번호 추적도 안 될 겁니다.”
“대포 폰 이런 거 사용하시나 본데. 저한테 보내신 메일. 지금 통화 녹음. 다 증거물로 제출 할 겁니다.”
“뭐. 김 대리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전화를 끊고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휴대폰에 저장된 녹음 파일을 확인했다. 분명 녹음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했고 녹음이 되어 있어야 했는데 녹음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메일함을 확인했다. 메일들이 사라졌다. 메일을 지운 적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나는 휴대폰에 적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은 들려오지만 받지 않았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안내 메시지가 들렸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전화를 끊었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니 무서워서 그 짧은 시간에 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다. 녹음파일은 전화 도중에 잘 못 눌려 취소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일은? 메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래. 내가 메일을 삭제하고 까먹었던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맞아 떨어졌지만 뭔가 찝찝했다.
나는 복사가 다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복사기 앞에 섰다. 복사는 끝나고 이제 내용별로 나눠 스테이플러로 찍기만 하면 됐다. 빨리 끝내야 했다. 안 그러면 저 개 같은 조과장이 언제 물어뜯을지 몰랐다.
“김 대리 아직 멀었어?”
조 과장이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 조 과장은 책상에 쌓인 복사용지를 들춰보며 말했다.
“이제 스테이플러로만 찍으면 끝납니다.”
“아직도 못 끝낸 거야? 회의까지 5분 남았네.”
“네. 금방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끝내 도록? 아깐 끝난다며.”
“죄송합니다. 끝내겠습니다.”
“김 대리. 무능하다고 판단이 되면 인정 할 줄 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나는 조 과장이 하는 말뜻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무능하다는 게 아니라 일을 시키고 업무를 과중 시켜가며 일처리를 더디게 만들어 무능하게 만들어 보이기 위한 심산이었다. 스테이플러 작업을 마치고 회의실 의자 앞에 마다 복사용지를 올려놓았다. 프로젝트 빔의 전원을 켜고 노트북과 연결해 관련 PPT 자료를 띄었다.
회의시간이 다가왔고 회의실 안은 사람들로 꽉 찼다. 가운데 자리에 부장님이 앉았고 그 옆으로 조 과장. 허 대리 순으로 앉았다. 회의는 순조로웠다. 프로젝트 빔이 쏘는 PPT 자료들은 복사용지와 비슷한 속도로 넘어갔고 설명도 완벽 했다.
“조 과장. 이걸 누가 준비했지?”
가운데에 앉아 있던 부장님이 복사용지를 훑어보고 덧붙여 말했다.
“막힘없는 설명. 깔끔한 정리.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어?”
회의실 분위기가 좋았다. 부장님이 하는 말들은 다 나를 칭찬하는 말 뿐이었다. 어깨가 절로 올라간다.
“어제 야근하면서 준비 한 것들입니다.”
“조 과장 자네가?”
조 과장이 내 눈치를 보더니 주위 사람들이 듣지 못 하게 귓속말로 부장님에게 말했다. 부장님의 표정이 한 층 밝아지고 회의는 여기서 끝났다. 어이가 없었다. 준비한 건 난데. 재주는 곰이 부르고 돈은 되놈이 번다더니...
나는 회의실을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점심 까지 10분 남았다. 모니터에 띄워진 엑셀 파일을 끄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들을 정리했다.
“점심시간이네. 밥 먹고 일합시다.”
조 과장이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회사 밖으로 나갔다. 회의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담배 한 대 태우기 위해 옥상 위로 올라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김 대리님 어떻게 하실래요? 진행 하실 건가요?”
아침에 통화한 스팸메일을 보냈던 녀석들이다.
“당신들 정말 할 짓 없나 보네. 다시는 전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 대리님. 오늘 조 과장한테 공을 가로채기 당하셨잖아요. 그러고도 가만히 계실 건가요? 그래서 몸에 좋지도 않는 담배만 피고 계시는 건가요?”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해 나는 주변을 살폈다. 옥상에는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당신들이 그걸 어떻게 알지?”
“저희는 당신입니다. 당신은 저희고요. 우린 때어낼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나는 휴대폰에 대고 소리쳤다.
“헛소리 하지 마!”
“당신은 아직도 장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당신에게 일어날 일 하나 얘기 해드리죠. 오늘 점심시간 끝 무렵 옥상에서 조 과장과 다른 직원이 담배를 태우러 올 겁니다. 당신은 뒤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세요. 그리고 결정하세요. 전화는 이...”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옥상에서 내려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머릿속에서 통화 내용이 떠나지 않았다. 만약 그 사실이 맞는다면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점심시간 끝 무렵...
나는 회사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앞으로 5분 뒤 면 점심시간 끝 무렵이 된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다행이 조 과장은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개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조 과장...
옥상 문이 열렸다.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성을 살폈다. 조 과장이었다. 그 뒤로 허 대리. 민 대리와 같이 올라왔다. 조 과장과 나머지 사람들이 문을 닫고 들어와 문 옆에 위치한 난간 앞에 서서 담뱃불을 붙였다. 나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다가갔다.
“허 대리.”
조 과장이 담배를 입에 문채 말했다.
“네.”
“김 대리 어떻게 생각하나?”
“김 대리요?”
“그래. 김 현수 대리.”
“뭐... 능력 있는 친구죠.”
“그래? 그럼 민 대리는?”
“그럼 과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데요?”
민 대리가 의아 하다는 듯이 물었다.
“난 김 대리가 싫어. 그냥 싫은 것도 있고 능력. 그래 능력 있는 친구지 그래서 더 싫어. 지 능력 믿고 치고 올라오는 녀석들. 기본이 안 된 녀석들이야. 고생도 해보고 좌절도 맛보고 그렇게 쌓은 경험으로 올라와야지.”
“그렇다고 그게 김 대리를 미워할만한 이유가 될까요?”
“싫어하는 이유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 내가 싫으면 그게 이유가 되는 거야. 어느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 사람이 싫은 이유가 될 수 있지.”
옆에서 가만히 듣던 민 대리가 끼어들었다.
“과장님도 고 부장님 돌아가시고 운 좋게 치고 올라오신 거 아닙니까?”
“줄을 잘 섰다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고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지.”
허 대리와 민 대리가 조 과장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과장님한테 밉보이면 큰일 나겠어요. 저희도 조심해야겠네요.”
“걱정하지 마. 민 대리, 허 대리는 제외니까. 난 가끔 생각해 김 대리 부모가 저런 자식을 낳고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을 까 하고.”
“과장님 말이 심하시네요.”
민 대리와 허 대리가 동시에 말했다.
“그랬나? 그럼 못 들은 걸로 해주게나.”
나는 그들이 자리를 뜨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모니터를 확인했다.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프롬 : 알 수 없음
투 : 김 현수 대리
제목 : 제목 없음.
어때요. 죽일 마음이 생기셨나요? 그럼 전화 주세요.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지난 통화 목록에 고스란히 찍혀있는 번호.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님. 다시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요.”
“음. 별거 없어요. 오늘은 정시 퇴근이 가능할 겁니다. 그때 조 과장 뒤를 밟기만 해주세요. 그 다음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회사가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조 과장이 내렸다. 조 과장은 집 근처로 운행하는 버스를 탔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앉을 곳도 없었고 사람도 많아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교통체증도 말이 아니었다. 버스 바퀴가 굴러가고는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로에서 움직이지 못 했다.
조 과장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조 과장의 딸이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다.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한 딸은 치킨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그는 딸에게 밤늦게 먹는 건 좋지 않다고 말했지만 딸은 막무가내였다.
조 과장이 전화를 끊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 보이는 치킨 집에 들어갔다.
“프라이드 한 마리 포장 해주세요.”
조 과장은 주문을 끝내고 맥주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맥주 사가면 아내한테 혼나겠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주문한 치킨이 하얀색 비닐봉지에 담겨져 나왔다. 조 과장이 비닐봉지를 들고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조 과장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딸아이였다. 휴대폰 너머로 딸아이가 아빠라고 외쳤다.
“어이구 우리 딸.”
“아빠. 언제와요?”
“금방 가지요. 아빠가 치킨 식지 않도록 금방 갈게요.”
횡단보도 보행자 지시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조 과장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하얀 비닐봉지를 열어 치킨을 확인했다. 고소한 튀김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조 과장은 빨리 집에 들어가 기뻐하는 딸아이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횡단보도를 건넌 조 과장은 옆길에 세워진 검은색 승합차를 쳐다봤다. 번호 표시판이 이상했지만 개의치 않고 걸었다. 뒤에서 승합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승합차는 천천히 갓길을 따라 걷는 조 과장 옆에 따라 붙었다.
조 과장은 옆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검은색 승합차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검은색 승합차도 덩달아 멈춰 섰다. 조 과장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멈춰 섰던 검은색 승합차가 조 과장의 걸음걸이에 맞춰 따라왔다.
조 과장이 뒤 따라오는 검은색 승합차를 따돌리기 위해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길. 가로등 불빛도 찾아보기 힘든 그런 골목이었다. 조 과장은 골목길 안에서 도로변을 확인 했다. 뒤 따라 오지 않았다. 오히려 속력을 내 멀리 사라졌다.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밖으로 나온 조 과장이 주변을 살폈다. 검은색 승합차는 없었다. 조 과장이 옆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맥주 한 잔 하고 자면 소원이 없겠는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조 과장이 맥주 진열장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계산하고 나왔다.
‘혼날 땐 혼나더라도 마셔야지.’
맥주가 담긴 봉투를 들여다보곤 집에 가서 혼날 생각에 시무룩해졌다가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엔 미소가 띄었다.
“조 현성 과장님?”
편의점 앞에 멈춰 서있던 조 과장 앞에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나타났다.
“누구세요?”
“조 현성 과장. 나이 39. 생각보다 빠른 나이에 과장을 다셨네요.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 하나가 있군요.”
조 과장이 뒷걸음질 쳤다.
“당신 누구야!”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조 과장이 물러난 걸음만큼 앞으로 걸어갔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직장상사 죽이기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라고 해두죠.”
“그게... 무슨 소리...”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조 과장의 말을 끊고 덧 붙여 말했다.
“뭐 그건. 죽고 난 뒤에 생각 해보셔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나를 죽이겠다고?”
길을 걷던 사람들이 놀라 조 과장을 쳐다봤다. 어느 커플은 조 과장을 보며 ‘혼자 허공에 소리 지르는데?’ ‘정신이상자 인가?’ 또 어린 아이와 아이의 부모들은 조 과장의 행동에 아이의 눈을 가리고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조 과장은 그들의 시선을 인식하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조 과장이 모자를 눌러쓴 사내를 피해 왔던 길을 되돌아 골목길 안 까지 도망쳤다. 골목길 안에는 횡단보도에서부터 쫓아오던 검은색 승합차가 서있는 걸 발견했다. 조 과장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뒤에서는 검은색 승합차가 천천히 올라왔고 앞에서는 모자를 눌러쓴 남성이 내려왔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조 과장이 자리에 멈춰 서서 112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가 가지 않았다. 검은색 승합차 뒤에서 양복을 입고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든 사내가 걸어왔다. 김 대리였다.
“김 대리! 나 좀 도와줘 대신 경찰에 신고 좀 해줘.”
김 대리가 골목길 한 가운데 서서 소리치는 조 과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누가. 누가 날 죽이려고 해.”
“조 과장님을요?”
“그래. 빨리 신고 좀 해줘. 아무도 날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제발.”
조 과장이 무릎 꿇고 김 대리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도움을 청했다. 김 대리는 주변을 둘러 봤다.
“조 과장님. 혹시 모자 눌러쓴 남성이랑 저 뒤에 서있는 검은색 승합차를 보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아. 맞으니까 빨리 하란 말이야!”
“그러니까. 저기 서있는 모자 쓴...”
꾸물거리는 김 대리의 모습에 조 과장이 소리쳤다.
“내 목숨이 위험한 게 안 보여? 빨리 하란 말이야!”
모자 쓴 사내가 조 과장과 김 대리가 서있는 곳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조 과장은 모자 쓴 사내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 대리를 모자 쓴 사내 쪽으로 밀치고 검은색 승합차 쪽으로 도망쳤다.
“거 봐. 원래 저런 사람이야. 잘 봤지?”
모자 쓴 사내가 넘어져 있는 김 대리에게 조용히 말했다. 김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자 쓴 사내가 왔던 길을 따라 올라갔다.
검은색 승합차가 골목길을 꽉 채우고 서있었다. 조 과장은 승합차 옆으로 나 있는 길로 도망쳤다. 막 다른 골목길이었다. 조 과장이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기는 담장을 넘어 가려고 제자리에서 점프도 해보고 뒤에서 달려와 점프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조 과장이 담벼락을 등지고 섰다. 모자를 쓴 사내가 어느새 한 척도 안 되는 거리에 서있었다. 조 과장은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주변에 쌓인 쓰레기 봉지를 다가오는 모자 쓴 사내에게 던졌지만 사내는 맞지 않았다.
“한 번만 살려주게. 이제 8살 된 딸아이가 있어. 제발.”
모자를 쓴 사내의 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 과장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모자 쓴 사내의 손에 들린 칼이 조 과장의 목을 깊게 파고 들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비닐봉지가 놓쳤고 안에 들어있던 치킨 조각이 바닥에 뒹굴었다.
모자 쓴 사내가 피 묻은 칼을 닦았고 치킨 조각을 집어 들어 바닥에 누워있는 조 과장 머리맡에 놓으며 말했다.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하신다면 다른 사람들도 끔찍하게 생각 해 주셨어야죠.”
※
회사에 출근 했을 땐 분위기가 어수선 했다. 직원들의 표정이 암울해 보였고 주변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렸다.
“어제 조 과장님 괴한한테 습격당해서 죽었다며?”
“CCTV 확인했는데 골목에서 쓰레기봉투를 막 집어 던지더래. 아무도 없는데...”
“무섭다.”
나는 자리에 가방과 옷을 놓았다. 옆에 있던 동료가 말을 걸었다.
“세상 무서워서 원...”
경리과 여 직원이 이 국화 꽃 한 송이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여직원이 들고 있는 국화 꽃 한 송이를 받아들고 조 과장 책상 앞에 섰다. 알 수 없는 감정. 복잡 미묘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입 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국화 꽃 한 송이를 조 과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