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의 표정

by gksghdqnl posted Dec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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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의 표정.

 

취향에 맞는 음악, 새까매진 연필 소리, 홀딱 벗은 사람 그리고 그를 대상으로 그리는 너. 이들로 인해 이 빠듯한 공간이 채워진다.

 

너는 한참 늦어버린 15시 예약 손님을 기다린다.

띵동.”

문이 열리고 의외의 정장 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들어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

 

나체의 그가 소파에 정자세로 앉는다.

편하게 누우세요.”

너의 말에 그는 쭈뼛거리며 비스듬히 눕는다. 너는 눈을 감은 그의 몸에 구도를 잡는다. 때마침 영국 가수 샘 스미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의외의 중년과 어울리는 의외의 취향이다.

이상하죠?”

음악과 묘하게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정장 입은 중년이라니 아이러니하죠?”

사연 없는 손님은 극히 드물죠.”

너는 감긴 그의 눈을 내다보며 말했다.

 

가끔씩 너의 까매진 손끝 너머로 벌거벗은 손님이 가수와 하나가 되어 목소리를 내곤 한다. 그들은 몸의 여러 수술자국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늙어 축 쳐진 몸에 담긴 사연을 털어내기도 했다. 15시에 예약된 중년 남성은 꽤나 다부진 몸의 근육을 피며 엊그제 직장에서 해고된 사연을 털어냈다.

시간 개념이 없어졌어요. 겨우 이틀이 지났는데.”

정장, 불편하셨겠어요.”

너의 눈에 중년 남성을 대변하듯 반듯이 서있는 정장이 들어왔다.

그래서 벗었어요. 조이고 답답해서. 그래서 왔어요. 여기.”

뜸들이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절제된 기교를 뽐내던 영국 가수도 입을 다물었다.

다됐습니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너의 말에 그는 뭉툭해진 연필처럼 긴 다리를 구부리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잘 그려주셨어요.”

그림을 받은 그는 멋쩍은 표정을 띠며 너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전 보이는 그대로 그린 거예요.”

너의 작업실을 채웠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과소평가한다. 수술자국 위로 보이는 진한 타투를 지닌 이도 누가 봐도 경탄할 몸의 소유자도 동일했다. ‘그림 같아요.’ 그들이 너의 그림을 앞에 두고 주로 하는 말이었다.

 

*

 

B가 너를 찾아온 건 그 후로 2주 뒤였다. 몰아치고 간 하루에 넋을 잃고 떨어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초인종이 아닌 두터운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 두들김으로 하여금 너는 왠지 모를 반감이 들었다.

 

반감의 주인공은 너의 시야에서 한참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들어오세요.”

너는 예약된 명단을 훑으며 문 앞 여자를 위해 길을 터주었다. 여자는 벗은 신발에 드러난 맨발이 부끄러운지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여기가 탈의실이에요.”

그런 여자를 앞에 두고 너는 손가락으로 탈의실을 가리키는 것이 마치 죄라도 진 마냥 민망했다.

 

나체의 여인은 옷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능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어떤 곡으로 시작할까요?”

너는 문득 여인의 예술적 취향이 궁금해졌다.

아무것도요.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손님의 취향에 맞춰 무의 상태에서 드로잉을 시작했다. 정적을 뚫고 너에게 시선이 꽂힌 여인을 향해 프로다운 태연함을 보이려 했지만, 당혹스러움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너의 움직임에 따라 흐르는 연필 소리만이 공간의 소음이 되었다. 연필을 쥔 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너의 감각은 여인의 몸을 따라 선을 이어 나갔다. 여인의 몸은 작고 초라해 뼈마디가 드러나 있어 소리 없는 음악과 어울렸다.

어때요?”

?”

갑작스런 여인의 질문에 선을 놓친 넌 한숨을 쉬며 서랍 속 지우개를 찾기 위해 일어섰다.

저 말이에요.”

작고 소심한 줄로만 알았던 여인이 전한 뜻밖의 고백 같았다. 아이러니한 손님들은 대화도 아이러니하다.

제 선이 거짓말을 못 하네요.”

네 말이 시발점이라도 된 듯 여인은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았다.

 

여인은 네 대답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을 받은 뒤에도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조용히 바르게 가방 속에 넣을 뿐이었다.

또 오세요. B.”

인사치레뿐이었던 말을 여인에게 뱉은 순간, 혹여나 진심이 될까 너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

 

이틀 뒤 B는 다시 너의 작업실 현관문을 두드려왔다. 당황한 너의 표정에 B는 부끄러운 듯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꼼지락댔다.

또 오라고 하셔서요.”

예약 명단은 볼 필요조차 없었지만, 너는 B를 위해 옆으로 비켜주었다.

 

휴대폰을 집으려던 너의 손이 멈칫했다. 심이 선 연필 너머 나체의 B는 소파와 마주하고 누웠다. B의 뒤태는 앞태보다 더 고단해 보였다. 마치 척추뼈의 마디마디가 튀어나올 듯 위태로웠다. 때문인지 너는 선의 흐름에 신중을 가해야만 했다.

 

즐거워요.”

B의 한마디는 계속해 기피해오던 인물을 우연찮은 장소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은 감정에 들게 했다.

평범해야 하는데 특별해지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어요.”

소파와 B의 연결점을 그리던 너는 표현 그대로 꽉 쥔 B의 손을 발견했다.

 

B는 항상 함축했다. 그 작은 문장 하나로 세상에 대한 모든 의미를 함축해 너에게 안기었다.

 

“B였으면 좋겠어요.”

B는 너의 말을 삼켰는지 건네받은 그림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엉덩이가 좀 짝짝인가?”

한참이나 대답 없던 B가 혼자 중얼댔다. 너는 B의 무색한 반응에 한 발짝 더 용기 낼 수 있었다.

뮤즈 되어줄래요?”

 

 

*

 

너의 뮤즈 B.

B는 너의 제안 이후로 금요일 밤마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어느 날은 19시가 되기도 했고, 어느 날은 22시가 다 되어서야 나타났다. 핼쑥한 모습은 여전했지만, 낯빛은 갈수록 생기를 띠었다.

 

B의 문장 끝에는 항상 물음표가 좇아왔다.

여긴 어디야?”

B는 너의 뒤에 붙은 사진을 보며 물었다.

“LA. 천문대래. 나도 가본적은 없어.”

작년 가을 평소라면 무시했을 설문조사에 참여해 받은 브로마이드였다. 막 감상하고 나온 영화가 남긴 여운에 젖어 있었는지 줄을 서 개인 정보에 동의하는 것쯤 당시엔 별 게 아니었다. 사진은 별이 쏟아지는 천문대를 배경으로 영화 속 남녀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장소이기도 했다.

“LA?”

끝을 올리며 재확인하던 B는 매작업마다 허공 속 브로마이드를 들여다보았다. 간혹 B의 눈에 담긴 천문대를 통해 그 위를 향해 날아오르는 그녀가 보이는 듯 했다.

 

된장찌개? 알리오 올리오?”

뮤즈가 되어준 B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모델 비였지만, B는 거절했다. 작업 첫 날, 흰 봉투를 건넨 너의 손을 쳐내던 B는 처음으로 단호함을 비추었다. 하릴없이 넌 무정한 봉투는 접어두고 함께 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문득 혼자 먹는 밥이 지겨운 날이었던 거 같다.

 

*

 

딸랑.”

금요일마다 의식처럼 행하는 버릇이다. B는 매번 작업실로 들어올 때 마다 발끝만 쳐다봤다. 넌 뮤즈에게 작업실이 휴식의 공간처럼 여겨지길 바랐다. 때문에 순간의 무안한 정적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무음에 길들어진 B에게 맞춰 아담한 소리를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관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처음 듣곤, B는 인상을 찌푸렸던 거 같다.

 

왜 누드화야?”

매번 소리 없이 밀고 들어오는 B의 물음표다.

이번엔 무슨 생각이신건가?”

호기심 어린 눈의 B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왜 하필 누드화 그려? 그것도 새까맣기만 하잖아.”

너는 머리 옆에 위치한 B의 팔에 시선을 둔 채 답했다.

몸을 보면 알 수 있어.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고단했는지. 불안했는지. 혹은 근사했는지.”

? 난 어때 보여?”

외로워 보여.”

너의 말에 B는 현관문에 달린 방울을 처음 봤을 때와 같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머리 위로 올린 팔을 반으로 접었다.

힘들면 내려도 돼.”

오늘은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

B는 너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

 

B는 늘 갑자기 찾아왔다. 평일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것도 매번 다른 시간대에 온 것도 전부 갑작스러운 B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횟수론 겨우 4번뿐이었지만, 무려 한 달째였다. 첫 번째 금요일엔 갑작스런 사정이 생겼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두 번째 금요일이 다가왔을 땐, 흔한 관계의 시작인 연락처조차 모르는 너의 무지함을 탓했다. 이에 아랑곳 않고 금요일은 돌아왔다.

 

얼굴은 왜 안 그리세요?”

오전 10시 예약 손님이 장엄한 클래식의 클라이맥스를 뚫고 물었다.

제가 얼굴에는 자신이 없어서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하는 너에게 30대로 보이는 몸을 가진 여성이 의아해했다.

 

*

 

매일 TV에서 똑같은 장면들이 이어졌다. 어린 너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뒷날 자막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너에겐 터무니없는 속도였다. 결국 어린 너는 화면만 뚫어져라 보았다. TV 앞에 집중해 있던 너를 엄마는 매번 자신의 옆으로 끌어왔다. 엄마는 대부분 장면을 차지하던 여자를 참으로 부러워했다. 특히나 나체의 여자가 오로지 목걸이 하나만 걸친 채로 소파에 누워 있는 장면이 시작되면 매번 리모컨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는 누워있는 여자의 고귀한 몸을 부러워했다.

내 몸이 멀쩡했으면

엄마는 여자의 몸을 바라보며 매번 같은 대사를 쳤다. 그러곤 TV 속 여자보다 우아했던 자신의 시절을 동화를 읊듯 너에게 이야기했다. 정지가 풀린 영화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면 엄마의 독백 또한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어느 날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온 너는 잠든 엄마를 바라봤다. 전보다 파리해진 엄마가 가련했다. 책가방 속 노트를 꺼내 펼쳤다. 너는 엄마를 바라보면서도 영화 속 여자를 상상했다. 소파 위 누워있는 나체의 여자를 상상하며 선을 뻗어나갔다. 그림이라곤 교과서에서 본 명화들이 전부였지만, 무의 상태로 시작한 드로잉은 더욱 거침없었다. 침대 위 죽은 듯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영화 속 비스듬히 누워있던 나체의 여자가 오버랩 됐다.

완성된 그림 속 소파와 몸은 영화 속 여자의 것이었지만, 꽉 감은 눈의 얼굴만은 엄마의 것이었다. 엄마의 독백 속 건강한 여인이라면 이러한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돌연 눈물이 차올랐다. 완성된 그림을 보며 흘렸던 눈물이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너의 뮤즈가 되었다.

 

완성된 그림을 받아든 엄마는 갑작스레 고통을 호소했다. 어린 너는 낯선 괴로움이 무서워 엄마의 손에 쥐어 준 그림을 도로 빼앗았지만, 이내 곧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엄마는 아파하면서도 너의 그림을 아꼈다.

*

 

B도 물었다. 그녀 또한 일반 손님들과 같이 눈, , 입의 공백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못 그려.”

?”

B는 어두워진 너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물었다.

첫 뮤즈한테만 그려주기로 약속했어.”

치사해.”

너는 가끔씩 B에게서 엄마의 향기를 느꼈다. 후각적으로 맡아지는 향이 아닌 B의 본연에서 뿜어져 나와 느껴지는 향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영화는 정상적으로 재생됐다. 유독 조용하던 엄마는 너를 자신의 곁으로 끌지도 아끼던 장면을 일시적으로 멈추지도 않았다. TV 앞에 구부리고 앉아 있던 너는 일어나 엄마의 곁으로 갔다. 잠든 엄마는 잠잠했다. 너는 엄마의 독백 없이 오로지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결국 까만 화면이 방 안을 덮치고도 한참이나 너는 엄마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영화는 위기와 절정에 이르다 결말을 암시하고는 엔딩 크레딧을 통해 관객들에게 끝을 알린다. 엔딩 크레딧이 스쳐가는 짧은 시간동안 관객들은 각자 영화가 남긴 여운을 정리한다. 그러나 엄마는 어떠한 단계도 없이 너에게서 갑자기 떠나갔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너의 영화 속 뮤즈는 갈 길을 잃었다.

 

*

 

공백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손님으로 인해 B가 생각났다. 갑자기 사라진 B 때문에 엄마가 생각났다. 새로이 시작한 영화 속 뮤즈가 또 다시 떠나갔다.

 

B가 떠난 뒤에도 남겨둔 종은 너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조건적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딸랑.”

청량하게 울리는 소리에도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내면의 종이 울렸고, 그럴 때 마다 눌려있던 일시정지 버튼이 임의로 재생되곤 했다.

안녕?”

B는 너에게 고단한 밤을 선사한 대신 토요일 낮, 갑작스레 나타났다. 이전보다 더 파리해진 형상의 그녀는 한결같은 종소리를 듣곤 웃어 보였다.

장난해?”

걱정이 도를 넘어서는 순간, 격앙된 진심이 표출되기도 한다.

내 작업이 네가 무시할 만큼 우스운 줄 알아?”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B는 자신의 손에 들린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우리 저녁.”

 

*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그대로 B의 몸으로 채색됐다. B는 멀리 있던 의자를 창문에 밀착시켰다.

별이 쏟아지는 천문대에서 온통 다 벗고 다니는 날 상상해.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잃을게 없어. 그러면 괜찮아.”

만날 묻기만 하던 B가 시린 노을빛에 눈썹을 찡그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작업이 끝나고, 노을이 진 뒤에도 한참을 내다보던 B는 간혹 눈물을 훔치는 듯 보였다. 돌아온 뮤즈에게 작업의 중대함에 대해 소리쳤던 넌, 긴 가운을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줄 뿐이었다.

가운에 스며든 B의 속내와 그녀가 놓치고 간 금요일 저녁, 너는 B가 예고 없이 사라졌던 긴 한 달 보다 더 외로웠다.

 

*

 

나가자.”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는 B에게 무작정 말했다.

어딜?”
은근한 기대를 품은 B의 표정을 통해 너는 확신을 얻었다.

별 보러.”

창문에 기대어 울던 B를 보며 날게 해주고 싶었다. 작업실을 벗어나 자연과 결부된 눈부신 그녀를 너는 보고 싶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건물에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B는 이정표를 통해 우리의 도착지를 알 수 있었다.

천문대?”

B는 날아갈 기세로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까맣기만 했던 하늘이 실은 온통 별투성이였다. 망원경을 통해 B의 눈으로 우주가 펼쳐졌다. 너는 별 속에 묻힌 B를 그리기 시작했다. 너의 작업실에 놓인 브로마이드 속 여자가 B와 오버랩 됐다. 하지만 이번엔 천문대의 배경도 별을 관측하는 여인의 몸도 전부 B의 것이었다.

다 알잖아, 내 몸. 믿고, 그려.”

B가 움직이던 자세를 고정시키며 말했다. 옷을 걸친 B의 몸에서 멈추었던 너의 손이 그제야 선을 따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익숙한 뮤즈의 몸을 너의 몸이 기억했다.

외로운 거 진짜야.”

다시 움직이는 너의 손을 흘깃 본 B가 흘리듯 말했다.

엄마가 수녀님이래. 이상하지?”

늘 나체였지만 옷을 껴입은 듯 감추기 급급하던 B가 옷을 입고도 맨몸을 드러냈다.

 

*

 

천문대 이후로 작업실 밖의 장소에서 진행하는 드로잉 횟수가 잦아졌다.

“LA까지 얼마나 걸릴까?”

억새풀 위에 누워 지나가던 비행기를 구경하던 B가 물었다.

“11시간 이상은 꼬박 걸리지.”

어떤 이야기였어?”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뭐가?”

브로마이드 말이야. 영화라고 했잖아.”

너는 작년 이맘때를 회상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각자 꿈을 쫒다 끝내 이뤄.”

간단명료한 줄거리였지만, 명확한 한 줄 플롯이었다.

사랑은?”

못 이뤄.”

B는 자신에게 친숙하지 않은 단어까지 내뱉으며 새로운 감정을 향한 호기심을 표출했다. ‘주인공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주인공을 시험하는 장해물을 멸시했다. 그러나 도피처였던 영화마저도 B에겐 냉혹했다.

 

*

 

그림 속 뮤즈는 눈이 와도 여전히 나체였으나 그에 비례하게 근사했다.

눈 쌓인 산은 낭만적이네.”

함박눈이 흩날리는 날, 작업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B가 중얼댔다.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 연식을 뽐내는 와이퍼 소리, 그리고 너를 안정시켜주는 익숙한 B의 목소리를 만끽했다. 매주 금요일은 돌아왔고, 마찬가지로 B도 돌아왔다. 너는 즐겨보던 영화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듯 익숙한 설렘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작업실 앞에 도착했을 때 B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너는 흘러내린 B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온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든 B는 잠잠했다. 너는 작업했던 그림을 꺼내 들어 얼굴을 그려나갔다.

 

뭐해?”

갑자기 들리는 연필 소리에 깨어난 B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뮤즈 그리지.”

자는걸 뭐 하러 그려.”

B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얼굴까지 그려보려고.”

B는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왜 그래?”

여전히 날리는 함박눈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B에게 다가갔다.

완성된 그림은 싫어.”

내팽개쳐진 그림이 쌓인 눈 위로 스며들었다. B가 놓치고 간 눈 내리던 금요일 저녁, 너는 공허했다.

 

*

 

내가 그려볼게.”

마무리 작업에 도달한 시점, B가 갑작스레 제안했다.

?”

너를.”

옷도 걸치지 않은 채로 너만의 공간으로 넘어온 B는 의자에 앉아 네가 되었다.

날 그려주는 보답이야.”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너에게 B가 드로잉의 의미를 부여했다.

넌 내 뮤즈니까.”

너도 해 그럼. 내 뮤즈.”

너는 망설이다 겉옷을 벗으며 소파에 앉아 B가 되었다.

 

여행지 중 어디가 제일 좋았어?”

연필을 집어든 B가 너를 향해 어설픈 구도를 잡으며 물었다.

러시아. 백야 보러 갔었거든.”

너는 대학 시절, 러시아 교수님의 강의를 떠올렸다. 한밤의 태양. 너는 백야를 느끼기 위해 종강 후 곧장 러시아로 떠났었다.

백야?”

. 밤이 되도 태양이 떠 있어. 하얀 밤이래.”

보여줘.”

집중하여 튀어나온 입으로 B가 요구했다. 너는 현관문에 붙은 사진을 떼어내 B에게 내밀었다.

, 여기가 러시아였구나.”

해가 지면 밤이 오는 게 싫었거든. 집 안에 있는 불을 전부 켜도 도통 밝아지지가 않더라고. 근데 한밤에 태양이 뜨니까 참 밝더라.”

소파에 앉아 B의 시선에 서니 속마음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밤이 없는 밤은 외롭지 않았겠네.”

B는 사진 속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드로잉의 배경으로 그리며 그 안에 머물렀던 널 상상했다. 동시에 그 안에 B, 자신의 밝은 밤을 담았다.

같이 가자, 드로잉 하러.”

대답 대신 엉망진창의 드로잉을 건넨 B는 밝은 부엌에서 묵묵히 저녁식사를 한 뒤, 현관문을 열고 너의 공간에서 벗어났다.

 

*

 

평생 남의 몸에 얹혀 살 듯 그렇게 살아. 혼자서.”

너는 늘 바래왔다. 너의 대표작은 ‘B’ 자체이기를.

 

얼굴도 없는 누드화를 누가 좋아해줄까?”

뮤즈를 되찾고, 너는 줄곧 전시회를 꿈꿨다.

네가 좋잖아.”

B는 늘 너의 관점에서 응원했다. 그리고 너 또한 B에게 그러하리라 믿었다.

 

작업 도중 갑작스레 화두에 오른 주제였지만, 너를 달래며 지지를 표하던 B가 돌연 달라졌다.

“B, 부탁이야.”

네가 원하는 전시회의 주제는 B, 뮤즈였다. 그러나 B는 새로이 재생되던 음악을 완전히 정지시키며 치를 떨었다.

넌 내 뮤즈잖아.”

그럼 뮤즈 그만둘게.”

엄마를 닮아 야위었던 B의 날갯죽지가 모질게 곤두섰다.

 

이제껏 왜 내 옆에 있었는데?”

숨겨뒀던 속내가 짓물러 터져 나왔다.

매춘부 같아. 나를 뺏기는 거 같다고!”

이어 B의 내막마저 드러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뒷면을 송두리째 드러냈다.

평생 남의 몸에 얹혀 살 듯 그렇게 살아. 혼자서.”

뱉다 못 해 게워낸 말은 B가 사라진 후에야 홀로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뮤즈와 드로잉으로 채운 우리의 공간에서 다시 네 소유의 공간이 되어버린 작업실에 들통 난 뒷면이 벽면을 치고 처량함을 돋우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엄마는 여운에 잠겨 홀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일무이한 작품을 남긴 비운의 뮤즈였다. 너는 비운의 뮤즈를 손 안에 담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B를 그렸다.

 

*

 

B는 우리의 공간에서 퇴장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뮤즈가 떠난 네 삶은 너무도 처참했다. B의 나체로 가득 찼던 작업실마저 텅 비었다. 내막이 밝혀진 날, B는 저녁 식사 대신 양 손을 무겁게 채워 나갔다.

 

작업실이 휑하네요.”

손님이 작업실에 들어서며 느끼는 쓸쓸함은 매섭게 찼다. 이전에 텅 빈 공간이 지녔던 예술적인 면모와는 달리 타인의 손길이 떠나 공허해진 공간은 고독이 전부였다. 뮤즈가 떠난 너의 공간은 늘 그랬다.

 

샤워 직후 거울 앞에 선 너와 마주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기를 띠기는커녕 마치 숨을 거둔 지 오래된 시신마냥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몸에 밴 고독함은 오로지 너의 것이었다. 추한 감정의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

 

딸랑.”

B의 부재에도 종은 울렸다. 종이 울릴 적마다 스치는 그녀의 아지랑이에 가끔은 문을 열고, 가끔은 그대로 받아들이곤 했다. 내면의 종이 울리고, 흐릿한 아지랑이 속 너의 앞에 그림 속 B가 나타났다. 여전히 야윈 선에 의지했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B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상자에 우리의 작품이 담겨왔다. 그림 속 B는 대체로 표정 없는 나체로 일관했지만, 때론 웃고 때론 울고 있었다. 천문대 배경의 작품 공백은 B의 엽서로 대체되어 있었다.

 

너와 하는 대화에서 늘 내 마지막 말을 후회해. 주체가 되는 나는 여전히 불편해. 그렇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천문대 속 그 날은 우리 둘만 간직하기로 했으면 해. 그 그림 속엔 외로운 허물에서 벗어난 내가 보여. 물론 네가 그린 허상의 나체였지만.

무기한 여행이 될 거 같아.

네가 허락할 때 까진 영원히 난 너의 뮤즈야. 우리의 순간에 후회는 더 이상 남기지 말기로 하자.

 

*

 

비록 몸이 기억하는 B였지만, BB였다. 너의 작품 속 뮤즈는 상상 속 인물인 동시에 실존했다. 무수한 배경 속 B는 나체로 날아올랐다. 후회 없는 드로잉이 계속됐다.

 

작품 속 얼굴에 담긴 물음표는 후회의 결정체였다. 너는 B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림 속 나체의 몸은 자신이 B임을 분명히 표명했지만,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침내 물음표를 지운 자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워진 자리에 물음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오래 머문 자리에 남은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았다.

따스한 물음표의 흔적을 담은 채 그림을 완성했다. 너는 외로운 허물에서 벗어난 뮤즈를 손 안에 담았다.

 

매순간을 채운 고독이 여전히 불편했지만. B가 허락할 때 까진 너는 영원히 B를 담기로 했다.

마침표로 끝맺은 자리엔 나체의 네가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응모자 성명 : 한 홍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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