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항아리

by 윤회웅 posted Jan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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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의 항아리



저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항아리입니다.

제 안에 손을 넣어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게 담겨있답니다.
금을 원하신다면, 여기 있습니다.
행복하신가요?
그 대신 저도 소원이 있습니다.
저를 만들었던 사람에게 데려가주셔요.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제겐 수많은 주인님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제 소원을 들어주려다 포기하고 결국엔 저를 팔아넘겼죠.
아시나요?
백 년이 넘은 세월 동안 저도 지쳤습니다. 백 번을 베풀고 한 번을 보답받지 못했습니다. 저를 만든 사람은 이미 죽었을 겁니다.
지금의 주인님은 어느 골동품 가게의 할아버님입니다. 주인님은 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다른 주인님들처럼 지쳐버렸나 봅니다. 어린 손자에게 저를 선물한 것입니다.
소년은 제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항아리라는 걸 모릅니다. 단지 꽃을 심는 걸 좋아하는 순수한 아이죠.
소년이 모종삽으로 흙을 담고 있을 때 저는 말을 걸었습니다.

ㅣ제 안에 손을 넣어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게 담겨있답니다.

ㅣ그래? 그럼 꽃이 예쁘게 자라나도록 도와줘.


저는 소년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밤낮으로 꽃을 돌보았습니다. 마침내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여물었을 때 저는 소년에게 오래된 소원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ㅣ당신의 소원대로 꽃을 예쁘게 키웠습니다. 이제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ㅣ부탁이 뭔데?

ㅣ저를 만들었던 사람에게 데려가주셔요.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ㅣ그 사람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할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소년의 가슴 아픈 한마디에도 저는 덤덤했습니다. 이미 그럴 거라고, 이젠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ㅣ그럼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ㅣ뭐야?

ㅣ저를 깨트려주세요.

 

더 이상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ㅣ그건 안 돼.

 

하지만 소년은 저의 마지막 부탁마저 거절했습니다.

ㅣ어째서죠?

ㅣ네 안에 꽃이 있잖아.

ㅣ다른 곳에 심으면 돼요.

ㅣ안 돼. 꽃을 키운 건 너야. 네가 부모라고.

ㅣ저의 부모는 저를 버리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ㅣ그럼 꽃이 너처럼 슬퍼할 거야.

소년의 한마디에 문득 저는 백 년간의 길었던 세월이 스쳐갔습니다. 이 꽃도 그런 세월을 살게 될까. 고작 몇 달을 못 살고 시들게 될 운명 속에서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까.

ㅣ...조금만 더 이 아이를 지켜봐도 될까요?

ㅣ물론이지.

소년이 웃으며 방에서 나갔습니다.
창밖으로 맑은 햇빛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따사로운 느낌을 받으며 눈을 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