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yBoy

by 아스커 posted Jan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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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yBoy]



이력서를 백 번은 넣었을 거다. 아니 수백 번은 이렇다 할 이력도 없는 글을 이력서에 집필해 왔다. 그런데 취업이 죽어라고 안 된다. 이유는 단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이유다. 보너스로 군대도 면제됐다는 것과 면제사유가 사생아라는 덤터기도 썼다.

 

여기는 외판원이라면 꼭 거쳐야만 하는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신설동은 인간 하나를 외판원으로 제대로 키워내기로 유명한 곳이고 외판에 뜻이 있다면 이곳에서 외판일을 걸음마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외판에 군면제? 예상고객 앞에서 엠 씩스틴 들고 외판하지 않는다. 나이가 너무 어려? 이왕이면 하루라도 이른 나이에 제대로 외판을 배워야지. 사생아? 일찍부터 쓴맛을 봤군. 잡초처럼 자랐겠어. 근성이 좀 있겠는데? 오히려 외판영업에 플러스알파다.

 

어서 오시게. 여기 신설동 외판사원들의 요람으로 어서! 어서!

 

신설동 공중전화박스에서 공중전화기 본체를 여자의 몸뚱이를 끌어안듯. 부둥켜안고 입사면접을 보러 간다고 자판기 외판회사의 위치를 묻는다. 공중전화기 본체가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이 녀석의 점퍼 안으로 쏘옥 들어온다. 그리고 가슴을 내어 준 이 친구의 속을 탐한다. 애꿎은 공중전화기를 지 애인의 머리인 듯, 가슴을 바싹 붙이고 턱을 공중전화기 위에 괴고는 그걸 점퍼로 휘감아 싸아 뜨겁게 포옹을 하면서 한 손으론 수화기를 잡고 헤벌쭉 눈웃음을 지으며 면접 보러 갈 회사의 위치를 묻고 있는 이 녀석은 지금 여자에 목마른 청년.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친구는 이른바 ShyBoy.

 

"혹시라도 교활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내가 교활한 놈이기도 하지만, 내가 어리니까 면접관에게 최대한 풋풋하고 떼 묻지 않고 순수한 거처럼 보여야지. 면접에 도움이 될 거야."

 

오늘 이 친구는 요망스럽게 나이가 어린 티를 내면서 풋풋하게 면접을 지 딴엔 봤다고 생각은 했으나,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은 보통 30대부터 마흔이 넘은 사람도 세 명이나 있었다. 이 친구는 이제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면접 볼 때 사장한테 실적 외에 기본급이 50만 원이 맞는지. 보너스가 400%가 맞는지도 잊지 않고 물어봤다.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이 총 여섯 명이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합격을 했고, 면접 본 당일 날 그 회사의 사원들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앉아서 입을 쩍쩍 벌리고 하품을 몰래몰래 하면서 사장으로부터 방문판매의 노하우 대해서 들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입사한 사람들과 상우가 대화를 하는데 봉급 얘기가 물론 나왔다. 상우가 대뜸 그런다.


“보름치 깔고..”


“생산직이냐아??”


같이 입사한 키가 아주 작고 딴엔 멋을 부린다고 머리를 헤어스프레이로 넘겨 다른 쪽이 스르르 자연스럽게 내려진 머리칼은 살짝 한쪽 눈을 가린 듯하게 잔뜩 못생긴 남자가 짜증나게 상우를 쏘아보며 말한다.

 

북쪽으로 4시 방향으로 사무실 한복판에 제록스 복사기가 있었다. 이곳에 여직원은 세 명이 있었는데 모두 일반사무직이고 외판은 하지 않았다. 제록스 복사기에 자주 가서 무언가를 손보거나 출력을 자주 하는 유방이 탐스럽게 크고, 탱탱한 엉덩이에 꽉 끼는 짙은 갈색 가죽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열대어'라고 불린다. 다들 모여서 담배 한 까치씩 피우면서 같이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이 그녀를 열대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친구는 그녀가 열대어든 피라니아든 아무런 느낌이 없다. 제발 이 회사가 실적 외에 기본급 50만 원에 보너스 400%가 맞게 지급되는 회사였으면 기원하고 있었다. 1990년 '박상우'의 사월 그리고 그의 셋째 주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점심시간까지 사장의 잘난 체 플러스 지루한 외판영업 노하우에 대해서 듣고 모두들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식당에 가게 되었다. 면접이 끝나고 전원 그 자리에서 합격한 직원들은 봄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신설동 한복판 구름다리 아래 하천을 따라 졸졸 흐르는 냇물과 화사한 봄꽃들이 만발한 풍경들과 따사로운 봄볕을 만끽하며 바쁜 비즈니스맨답지 않게 점심시간만큼은 한가로이 거닐었다. 여직원들의 따뜻하고 예쁜 재잘거림과 여유가 상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차비와 점심값 외엔 무수한 취업사기로 도난당한 이들의 낭중이 빤한 지갑형편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사월의 봄은 이들을 걸어가게 하는듯하다. 이들은 식당에 가서 날도 좋은 이런 날에 또 누군가가 아마 사장이 그럴 테지만 소주를 시킬 것이고 밥상마다 소주병 두세 개는 널브러져있을 것이다. 그럼 이 소주들은 한 사람 당, 한 병씩은 대낮부터 직장에서 마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회사의 사장이 대낮부터 퍼 먹이는 소주를 말이다.

 

밥보다 소주가 제일 먼저 밥상에 놓여 졌고, 안주와 밥은 나중에 나온다. 그러나 상우는 소주병을 따서 김치 하나를 안주로 병나발을 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술이 세고 화끈한 남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어휴! 술 이렇게 마시면 안 돼요."

 

"아니요. 난 원래 이렇게 병째로 마셔요."

 

사장도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우는 사장한테 자기가 화끈한 남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더욱 홀짝홀짝 병나발을 분다. 그러나 사장은 상우가 아직 사회에 한참 햇병아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박상우에 대해서는 눈밖에 내놓았다. 즉, 사장의 눈밖에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일하다가 외판일을 못하고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사장은 박상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장은 면접 온 사람들 중 누가 제일 쓸 만한 물건인지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박상우는 시작도 전부터 "나는 햇병아리요."-라고 사장한테 어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열대어' 옆에 앉은 얌전하고 내숭쟁이인 그리고 열대어보다 사실 훨씬 더 미인인 나이 어린 여직원이 박상우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박상우와 사귀고 싶어 했다. 그녀도 박상우만큼 어리고 사회엔 신출내기다. 반면 '열대어'는 사장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박상우 같은 애송이는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또한 영업실적이 없으면 기본급 50만 원 보장도 다 헛것인 이런 회사에나 면접 보러 온 남자들 모두 그 '열대어'의 관심분야 밖에 있는 남자들이었다. 주점에 자리를 잡고 모두들 앉았는데 상우가 오른쪽 허공에 대고 박수를 짝! 짝! 치며 소리친다.


“웨잇타아!! 웨잇타아!!!”


같이 입사한 사원들이 옆에서 서둘러 조용히 말한다.


“웨이타라고 그러지 마요오! 아저씨라고 그래요오!!”

 

아직 안주와 밥도 나오기 전인데 열대어 옆에 그녀 또한 소주를 잔에 따라서 한잔을 나 보란 듯이 시원스럽게 원샷을 했다. 그리고 상우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했다. 상우는 당장에라도 그녀와 같이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하고 싶었으나 무언가 강한 것. 그러니까 ShyBoy의 기질이 여지없이 그를 제어하였다. 그리고 좀 지나자 밥과 안주가 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술잔을 들었다. 사장이 그래도 어수룩한 상우가 귀여웠던지 박상우한테 술잔을 들고 대표로 '브라보'를 하라고 했다. 상우는 술잔을 들고 자기도 모르게 '열대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술잔으로 '열대어'를 가리키며 "위하여"도 아닌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열대어 옆에 그녀를 겨냥한 것인데 번지수도 빗나간 브라보였고 열대어의 공주병 증세만 자극한 것이었다. 열대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술로 눈이 벌써 시뻘게진 박상우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괄괄하기도 한 열대어는 상우를 데리고 놀고도 싶어서 상우한테 왔다. 상우 맞은 편 자리에 방석을 깔고 비집고 앉아 상우를 쳐다보았다. 빨간 립스틱으로 빛나는 입술로 야릇하게 웃으며 그녀 또한 마음에도 전혀 없는 말을 했다.

 

"애인 있어?"

 

"그럼"

 

"많이 있어?"

 

"그럼"

 

"연애 많이 해봤어?"

 

"그럼"

 

“얼마나 많이?”

 

상우는 이미 얼큰하게 올라온 술기운에 점퍼를 벗고 삐쩍 마른 상체에 애덤스애플이 묵직하게 툭 튀어나온 목까지 올라오는 검정 터틀넥스웨터를 입은 상태에서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꽂고 그 손과 더불어 양손으로 허공에 액션을 취하며 진지하게 그리고 자분자분 말했다. 마치 무언극에 푹 빠진 연기자처럼 혼신을 다하여 섬세한 모션으로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비오는 날, 원인 모를 분노가 휩싸는 날, 그날 나는 뛰었어. 그날은 비가 억세게 내렸어. 그날 청바지가 비에 질펀히 젖는지도 모르고 뛰었어. 목적지도 모르고 뛰었어. 그냥 뛰었어. 무작정 배를 탔어. 조타수도 없는 배를 탔어. 덜컹···덜커덩··· 배는 영등포를 표류했고, 나도 거기서 표류했어. 그날은 비가 쏟아져버렸어. 내 멀릴 흠뻑 적시고, 내 심장은 격렬하게 박동했어. 지금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창녀에게 화대를 주고 타이머가 돌아가는 사랑을 했어. 그날은 비가 왔고, 그날은 여름이었던 것 같아. 내 젊은 날의 사랑을 먹을 여자는 기계적인 섹스를 하는 여자뿐이었어. 비오는 날, 내 젊은 날의 스케치는 그렇게 빗속으로 달려갔어.”

 

이번에도 열대어 옆에 여자한테 해야 할 말이었는데 또 열대어에게 발포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는 전혀 원하지도 않았던 열대어와의 연애였다. 열대어는 상우를 계속 데리고 놀았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알지?"

 

"응. 그런데?"

 

"오늘 날도 죽이게 좋은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좀 해봤어?"

 

상우도 이젠 제법 취했다. 그리고 대꾸했다.

 

"헛소리 아니야. 혼자 있고 싶어. 바람 좀 쐬고 올게."

 

열대어는 상우한테 너무 지나치게 장난을 쳐서 미안하기도 했고 상우가 자기 옆자리에 있었던 최창숙이라는 여자한테 관심이 있었다는 걸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상우가 식당을 나가려는데 최창숙한테 말한다. 그리고 식당을 나가려던 상우는 주춤하고 서있었다.

 

"창숙아! 같이 바람 좀 쐬고 들어와. 그리고 여기 나하고 자주 가는 분식집에서 내 앞으로 외상 걸고 둘이 오뎅에 쫄면이라도 먹고 사무실로 같이 들어가."

 

상우는 바로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뒤따라 최창숙이 식당 밖으로 나오자, 최창숙이 마치 상우의 오랜 연인인 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터프하게 그리고 애써 담담하게 쳐다보면서 무턱대고 “갑시다.” 이런다. 이것에 최창숙은 수줍게 웃고만 있다. 사실 최창숙은 내숭도 있지만 상우의 제법 묵직하면서 이런 과묵한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사실 상우는 과묵한 남자라기 보단 여자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샤이보이다. 물론 남자들한테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은 아니고 주로 들어주는 입장이다. 사무실에서 곱상한 얼굴과 숫기 없는 행동과는 다소 어긋나게 어떤 면에서는 무게감 있는 기사(knight) 같은 상우를 쭈욱 지켜본 최창숙의 눈엔 상우가 그녀의 이상형에 근접한 남자였다. 그리고 최창숙은 그를 호감형의 남자로 단정 지은 것이다. 최창숙은 말 많은 남자들을 가장 싫어했다. 그리고 낭만적인 부분도 은근히 많은 남자를 꽤나 좋아했고, 그런 남자는 바로 박상우였다.

 

상우와 최창숙은 같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상우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건들건들 걸었는데, 상우가 주머니에 넣은 한 쪽 팔에 최창숙은 자기의 팔을 쓰윽 껴 넣었고 그러자 마치 둘이 팔짱을 낀 모양새가 되었다. 둘은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리고 30분 정도 둘은 걷다가 걷다가 동대문이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상우는 "어! 동대문이네!" 이 말을 했다. 그녀에게 터프하게 "갑시다" 이후 상우에게서 이제야 언어로 된 단어가 처음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아니 이 둘 사이에 언어가 처음 튀어나온 것이다. 최창숙도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안 했다. 박상우도 말이 없지만 최창숙은 더 말이 없는 여자였다. 최창숙은 팔짱을 낀 상태에서 상우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대어 걸었다. 최창숙은 거기다 상당한 미인이다. 창숙은 상우의 어깨에 머리를 대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며 상우한테 굳게 팔짱을 하고 사뿐사뿐 걸었다. 상우는 아까 최창숙이 팔짱을 꼈을 때부터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최창숙이 자신의 어깨까지 빌리자 이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회전 우회전도 모르고 인도를 따라 직진만 하였다. 무작정 아무 생각도 없이 이 둘은 걸었다. 이 둘은 서울 시내를 표류하였다. 조타수는 상우가 되어주어야 하거늘 상우는 눈앞이 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상태였다.

 

또 걷다가 걷다가 경복궁 정문까지 왔다. 다들 연인들을 만나고자 이 경복궁이 만남의 장소로 많이들 쓰이는데 이 둘은 신설동에서 종각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창숙이 여전히 상우한테 팔짱을 끼고 있어서 경복궁에서의 이 둘은 누가 봐도 연인사이였다. 그것도 아주 다정한 연인. 하늘도 어슴푸레 해졌다. 이미 점심시간은 한참 지났다. 상우는 창숙한테 말했다. 아마 창숙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말한 첫마디였을 것이다.

 

"전철 타고 사무실로 들어갑시다."

 

최창숙은 이번에도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수줍게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둘은 신설동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퇴근시간대라 사람들이 전철에 꽤 많았다. 만원 전철에서 이 둘의 스킨십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전철이 급정차를 하였고 최창숙은 상우 쪽으로 밀려나왔다. 그리고 창숙은 입때껏 기다리다 절호의 기회다 싶어 상우의 가슴에 안기며 포옹을 하였다. 작고 하얀 얼굴이 상우의 눈 아래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최창숙은 수줍은 얼굴로 립스틱 안 바른 옅은 입술에 짙은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그때 상우는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전철이 지금 막 신설동이라고 쓰인 푯말을 지나치며 질주하고 있는 것을..

 

전철은 이미 신설동을 지나치고 상우는 어서 내려서 신설동 방향인 인천행 열차를 타려고 하였다. "신설동을 지나쳤어" 이 말을 하곤 최창숙과 같이 내리려고 밀집된 사람들 사이에서 최창숙의 손목을 불끈 잡았다. 그러자 최창숙은 이때만을 기다렸노라 하고는 상우의 손을 다시 잡아 손깍지를 꽉 끼었다. 그러나 승객들은 계속 밀려들어왔으며 상우와 창숙은 열차 안쪽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인파들 속에서 이 둘은 몸이 정면으로 바짝 붙어서 밀착됐으며 최창숙의 크고 탐스러운 젖가슴이 물컹거리며 상우의 상체에 터질듯이 붙게 되었고 한창 나이인 상우는 음흉하게도 최창숙의 엉덩이에 손을 바짝 갖다붙여 자기 쪽으로 창숙의 하복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최창숙은 고개를 숙이고 약간의 통증이 온 듯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것에 아무런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용기가 붙은 상우의 음험한 손은 창숙의 사타구니도 만지작거렸으나 되레 최창숙은 상우의 그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것에 더해서 최창숙도 상우의 발기된 아랫도리를 매만졌다. 이 둘의 밀착된 몸과 손은 전동차의 흔들림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서로의 얼굴 아래부터 무르팍 위까지 샅샅이 탐색하였다. 상우는 최창숙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최창숙은 상우의 품에 안긴 채 심각한 표정으로 중요한 무언가에 골몰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청량리역에 전철이 정차하자 승객들이 거의 다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헐거워진 열차 안에서 이 둘은 멋쩍어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상우가 창숙한테 손을 내밀자 이 둘은 다시 손깍지를 굳게 하고 청량리에서 같이 내렸다.

 

상우는 창숙한테 사무실에 전화 걸어서 청량리에서 집까지 전철로 네 정거장인데 집까지 걸어가면서 상점마다마다 들어가서 자판기 영업을 할 것이며, 한 대라도 팔면 내일 출근을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퇴사한 걸로 알라고 그렇게 전화하라고 한다. 최창숙은 다급하게 말한다.

 

"한 대도 못 팔아요. 나하고 같이 사무실에 들어가요. 아님 지금까지 점심까지 쫄쫄 굶고 걷기만 했고, 저녁도 못 먹었으니까 어디 들어가서 식사라도 같이 해요."

 

"창숙 씨까지 밥 사 줄 돈도 없어요. 그렇다구 니 꺼니, 내 꺼니 더치페이 하기도 싫구요."

 

"그럼 제가 살게요. 오늘 많이 걸었으니까 맥주도 마셔요. 네?"

 

"창숙 씨하곤 계속 연락도 하면서 사귀고 싶어요.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내 사타구니가 그게 얼마짜린데 말이야 같이 맥주도 안 마시기에요?"

 

박상우는 한바탕 웃었다.

 

"하하하! 창숙 씨 대단합니다. 오늘은 내가 얻어먹지만 다음엔 제가 섭하지 않게 삽니다. 그럼 갑시다. 하하하!"

 

상우가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어제 신입사원으로 그 자리에서 합격된 사람들 중 세 명이 보이지 않았다. 40대 남자 둘, 그리고 30대 남자 한 명이 8시 반 출근시간에, 오전 10시 반이 넘도록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온다간다 말도 없이 관둔 것이다. 어제 신입사원들 중, 상우와 다른 남자 둘, 이렇게 세 명만 오늘까지 출근한 것이다. 내일은 상우마저 온다간다 말도 없이 회사에 안 나올지도 모른다. 상우도 그러한 사람이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갔고 이미 사장의 타켓에 들어온 남자이며, 오늘 출근한 세 명 모두 사장이 제거해야 할 타켓로 지정됐다. 아니면 셋 다, 이 회사에서 훌륭한 세일즈맨이 될 수도 있다. 이젠 신입사원들한테도 책상과 의자가 주어졌다. 상우의 자리는 여직원 셋이 있는 자리와 제일 가까웠다. 그런데 뚱딴지같이 사장이 상우한테 아이소용지와 샤프 한 자루를 주고 밸브 볼트를 설계하라고 한다. 지 딴엔 유식해 보이려고 영어도 섞어가며 상우한테 "여기에 바텀(bottom)을 맞추고 말이야." 이렇게 주문한다. 그때 상우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사장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계속 상우한테 말하고 있는데 여전히 박상우는 책상에 편안하게 걸터앉아서 사장의 야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때 열대어가 빙긋이 웃으며 책상에 걸터앉아있는 상우를 일으켜 세운다.


풀과 지우개, 자는 여직원들한테 빌리라고 하였다. 드라코타도 없이 아이소용지와 샤프만 주고 설계를 하라고 하니 상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여기는 세일즈회사인데 웬 설계도면을 그리라는지 상우는 이해가 안 갔다. 아이소용지는 드라코타가 없이도 그리는 설계용지지만 이런 것들까지 있는데 드라코타 하나 없는 회사라고 생각하니 상우는 이 자판기 외판회사를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상우는 바로 옆자리에 여직원들이 가장 눈엣가시였다. 의식적으로 여직원들이 있는 곳은 시선을 단 한번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풀과 자. 지우개를 빌리기 위해 여직원들 중 상우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열대어한테 갔다. 정말 모기소리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식적으로 열대어와 시선도 애써 피하면서 말이다.

 

"저기.. 풀하고 자 좀 빌려주실래요?"

 

"어머! 상우 씨! 어제 창숙이하고 재미 좋았어요? 둘이 데이트했나 보다. 하하하! 사무실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둘이서 퇴근하고"

 

같이 입사한 남자들도 킥킥대며 웃었다.

 

상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열대어와의 어려운 시선을 피하고 겨우 풀과 자를 빌렸다. 그리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았으나 이런! 지우개를 또 빌려야 한다. 지우개를 빌리러 열대어한테 또 갔으나 열대어는 지우개가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남자 사원들 중에 대머리가 까진 남자가 열대어한테 그런다.

 

"어이! 여기 지우개 좀 줘 봐."

 

열대어는 그 남자의 말을 무시했고 최창숙이 서둘러 상우한테 지우개를 주었다. 최창숙은 서류철을 정리하고 있었다. 의외로 담담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최창숙은 상우한테 같이 자판기커피나 마시자며 잠시 나가자고 했으나 상우는 점잖게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지우개를 가지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상우는 한참 밸브 볼트를 설계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너무 열심히 하니까 사장이 웃는 소리로 "박상우 씨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이런다. 그건 상우가 여직원들 자리에 눈길을 일부러 전혀 주지 않고, 한 쪽만 보면서 설계도면을 그리니 모가지가 뻐근하게 일한 걸 두고 사장이 빗대어 조롱한 것이었다. 사장의 우스갯소리에 열대어가 히죽거리며 웃었고, 같이 입사한 남자들도 웃었다. 어쨌든 상우는 화장실에 가려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대머리 까진 남자 사원 셋이 상우 등 바로 뒤에서 일렬로 서서 같이 따라 걸어오며 어깨들을 들썩이고 리드미컬하게 율동하며 수줍어서 고개 숙이고 느릿느릿 천천히 걸어가는 상우의 걸음걸이에 스텝까지 코믹하게 맞추며 가수 '남진' 노래를 했다.

 

"불타는 이 마음을 믿어주세요오! 말 못 하는 이 마음을 알아주세욧! 와뚜와리와리!"

 

상우 꽁무니 바로 뒤에서 이런 건데도 상우는 수줍어서 모른 체 무시했다. 그러나 심적으로는 상당히 괴로웠다. 그 남자 직원들은 복도 소파에 앉아서 자판기 커필 마셨고 상우는 화장실을 갔다 와서 제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심신으로 괴로운 설계도면을 그렸다.

 

사실 이 자판기 외판회사는 지금까지 팔아먹은 자판기가 수백, 수천 대는 될 것이다. 그 자판기 하나하나마다 수입의 몇 퍼센트를 이 자판기 외판회사에서 가진다. 즉 일반 회사원 월급이 30만 원이면 꽤 많은 건데, 보통 자판기 한 대가 월 100만 원의 동전을 먹는다. 그 100만 원 중에 절반이나 되는 50만 원 정도의 돈을 매월 한 번씩 자판기재료비와 AS명목으로 이 자판기 외판회사에서 갖는다. 원래 그 돈은 여기서 자판기를 판 세일즈맨들이 매월 그 50만 원의 일부라도 가져야 된다. 그러나 세일즈맨들에겐 한 대 팔면 성과급만 후하게 봉급날 주고 그거로 끝이었다. 때문에 이 자판기 회사에선 수시로 외판사원을 모집했고 영업을 해서 실적을 하나만 올려도 이 회사는 막대한 이득을 본다. 현재 이 회사는 언뜻 보면 상우한테 뜬금없이 설계용지를 주고,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이 회사하고 별로 관계없는 일을 상우한테 주면서 상우를 데리고 놀아나보려고 하고자 이렇게 회사를 운영해도 한 달에 이 회사가 자판기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은 엄청났다.

 

상우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직원들을 모가지가 아프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안 보다가 이제야 설계도면을 다 그리고 옆자리에 여직원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들 중 누구도 상우를 쳐다보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단 한 여자 최창숙만이 박상우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때마침 박상우에게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우도 같이 빙긋이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설계도면을 사장한테 제출하려고 얌전히 일어나면서 최창숙한테 '나는 너가 귀엽다'라는 표정으로 윙크를 했다. 상우의 윙크를 받은 최창숙은 수줍은 소녀의 모습으로 바로 고개를 숙이고 서류철들을 매만지고 있었다.

 

상우는 설계도면을 다 그리고 사장한테 제출하려고 갔으나 사장은 설계도면을 보는 둥 마는 둥,

 

"응 거기다 놔둬. 그리고 지금 최창숙 씨하고 본사에 좀 갔다 와."

 

원래 본사에는 그나마 인물이 가장 괜찮은 사람만 보낸다. 나이가 가장 어린 최창숙하고 박상우가 사장한테 낙점이 됐던 거다.

 

최창숙과 박상우는 이번엔 처음부터 둘이 손을 꼭 잡고 본사에 갔다.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 아무런 쓰잘떼기 없는 이야기들 그러나 그들에겐 가장 흥미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본사에 간다. 본사에 도착하니 회사는 꽤 컸다. 안국동에 있는 회사였는데 인근에서 빌딩이 제일 컸다. 이 회사는 원래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런데 자투리로 자판기사업에도 손을 댄 것이었다. 본사에선 최창숙한테 서류철 다섯 개를 주었다. 혼자서 들기엔 무리가 있었고, 두 개는 최창숙이 나머지 세 개는 박상우가 들었다.

 

다시 회사로 가면서 둘은 전철을 타고 갈아타기 위해서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있었는데 사람들이 조금 많이 줄을 서 있다. 최창숙은 '까짓 거' 하면서 박상우한테 시원스러운 여자로 보이기 위해서 일반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 제일 아래까지는 높이와 거리가 꽤 되었다. 박상우는 바로 최창숙한테 다가가서.

 

"좋은 데 두고 왜 일루 내려가요?"

 

이러자 최창숙은 무안해서 입을 가리고 풋풋하게 웃었다.

 

그리고 전철 안에서도 상우가 보라고 전철 철봉기둥에 서서 철봉에 입맞추는 포즈로 서있는 최창숙이 너무 농염해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상우는 좀 이따 그곳으로 가서 자기도 철봉에 입맞추고 서있자니 최창숙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상우는 거들었다.

 

"왜 그래? 전철의 입술맛은 어떤가 나도 궁금해서 그랬는데."

 

3호선 안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곳은 특이한 게, 표를 끊고 들어간 전철 역사 내에 커다란 카페가 있다는 것이다. 둘은 그 카페로 들어갔다. 상우는 커피와 가벼운 식사를 시켰다. 최창숙도 오므라이스에 커피를 시켰다. 그리고 맥주 1000cc정도는 괜찮다며 식후에 마른오징어와 생맥주도 시켰다. 상우는 최창숙한테 집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주었고 최창숙도 그랬다. 최창숙은 만 18세에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이곳에 아버지 소개로 입사를 하였고 입사한지 일 년이 되었다고 한다. 상우도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그 분이 기업체에 아는 분들이 많아서 대기업체에 시다바리로 입사를 곧잘 시켜준다는 말도 했다. 상우가 외판원으론 자질이 없다고 하자 최창숙은 잘나가고 있는 박상우의 말곁을 채었다.

 

"상우 씨는 낯가림이 심해서 그렇지 사람의 호감을 잘 사고, 나도 상우 씨가 생각하는 거완 전혀 다르게 와일드한 여잔데 나를 잘 구슬리고, 허물없이 친한 거 하며, 상우 씨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한텐 더 없이 사교적이에요. 조금만 더 배우면 외판원으로도 성공할 거예요."

 

둘은 점심까지 먹고 회사 빌딩 바로 앞까지 왔다. 상우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최창숙한테 주고 어디론가 그냥 걸어갔다. 최창숙이 말했다.

 

"어디에 가는 거야?"

 

"집에"

 

"왜?"

 

"아무래도 외판원은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

 

최창숙은 매사에 무책임한 듯한 박상우한테 화가 단단히 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야! 내가 너의 아기를 갖는다면!"

 

박상우는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어!!"

 

박상우는 웃는 것도 아니고 화난 얼굴도 아닌 얼떨떨한 표정으로 최창숙한테 한발짝 한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최창숙 얼굴 바로 앞까지 왔다.

 

사무실에선 열대어와 사장과 직원들은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어머머 그 친구하고 창숙이 벌써부터 손잡고 다니는 거 봐봐"

 

"요즘 애들 빠르다니까"

 

그러던 중 상우와 창숙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둘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사장한테 말했다.

 

"우리 결혼할 거예요"

 

"!!.............................!!"

 

"................................."

 

"빠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