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다

by 닉네임1 posted Jan 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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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사랑해

그녀의 상태 메세지는 어제와 달랐다. 그제까지 근 한 달 사랑해였던 것이 어제 갑자기 텅 빈걸 보고 딱, 감이 왔었는데. 아마 C가 고비였던 어젯밤을 잘 넘긴 모양이다. 하긴, 이 둘은 자주 싸우고 자주 화해하는 커플이지만.

그녀와의 개인 연락 방을 열어본다. 수십 번, 수백 번 자그마한 스크린에 펼쳐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게 생겨난 조잡한 문장들을 다시 지우고, 지우고, 지운다. 그래서 이 방은 깨끗하다. 마치 그녀와 나의 관계처럼.

 

강의가 끝나고, 내 친구 C를 보러 온 그녀는 C의 손을 잡고 좋다는 듯 배시시 웃고 있다. 조금 멀찍이 있던 나는 일부로 C에게 다가가 조금 큰 목소리로 아는 체를 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걸, 난 알았다.

C는 강의 시간에도 자주 핸드폰을 확인했다. 옆에 앉아 있으면 그녀에게서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연락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계속, 강의 날에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연락을 C와 함께 기다렸다. 물론 C는 내 마음을 모를 터다.

 

세 달 전의 일이다. 집에서 주구장창 뒹굴 거리는 내 몸이 바닥에 붙어가려던 때, 대학 친구이자 커플인 AB에게서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 왔다. 한 번에 수락한 나는 홍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그곳이었다. B의 친구인데, 나와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어 놀러 왔다는 모양이었다.

이지은 이라고 해.”

뚜렷한 이목구비에 존재감이 분명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녀는 미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에서는 이유 모를 무력감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술은 그녀의 진심을 점점 더 보여주었고,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술과 함께 잊었다. 그리고 어느새 난 그녀에게 점점 빨려들었다.

남자친구 있어?”

아니, 헤어졌어.”

그녀는 울었다. 사랑했었는데.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안에서 뭉쳐진 응어리들은 끝간 곳 없이 깊었고, 그 깊음을 메워 보려고 마신 술이었다.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녀와 나는 잤다. 위로해 달라며 나에게 안겼었다. 하지만 그건 술 때문이었다.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할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 수도. 그녀는 C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까? 무수한 의문이 희망의 편린들과 충돌했다.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이틀, C에게 자신이 여자 소개를 받았다던 연락이 왔다.

얘 진짜 예쁘다니까.’

그렇게 C가 자랑해서 보낸 그녀의 얼굴을, 난 알았다. C가 모를 깊숙한 부분까지도.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그 날 이후로 3년이 지났다.

C가 군대에 간 사이, 그녀의 상태 메시지는 몇 번이가 꽤 바뀌었다. 그러고는 삭제되었다. 3년 전 사랑한다는 상태 메시지만을 남겨 놓은 채로.

그녀와의 채팅방을 열었다 그녀는, 이 방의 존재를 모른다.

여전히, 아직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