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탈피하며 추락하다

by 김건우 posted Jan 30,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탈피하며 추락하다

 

 와르르.

 

 자갈 섞인 흙먼지가 굴러 떨어진다.

 

 한 남자도 그것과 같이 구른다. 남자의 온 몸은 엉망진창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남자는 산의 중턱부터 아래까지 막힘없이 구른다. 배열 없는 칼날 같은 나뭇가지들에 무참히 피부를 베인 남자는 자신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뚜벅이며 걸어간다.

 

 다리를 절던 남자는 믿기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김준태. 잠깐, 나는 이 씨던가? 아니다. 김준태가 맞다. 나는 김준태다. 산을 지나 아래 늘여 있는 작은 집들 사이를 달려 남자는 빈 건물 하나를 찾아낸다. 그는 몸을 날리듯 그곳에 안착해 자신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주위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헐레벌떡 달린 게 실수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고 대처법도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 기본적인 지식을 살려 주위의 천 같은 것으로 발목을 감싼다.

 

 비바람 같이 어수선한 자신의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남자는 조금의 안정을 되찾았다. 주위는 놀랍도록 조용했다. 이때만큼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거미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를 기어가고 있었으나, 그가 신경쓰지 않았으니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상식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사랑하는 안젤라. 사랑하는 도희.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부인 안젤라와 딸 도희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잡곡밥에 갈치, 된장찌개가 차려진 저녁밥을 꼭꼭 씹어 먹던 그 느낌이, 밥을 먹은 뒤에 마시던 커피의 따뜻함이 정말 생생히 느껴졌다. 그는 생각했다. 그건 분명 어제 일어난 사실이며 지금 그에겐 서리도록 되돌리고픈 기억이라고. 잠을 자기 전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예능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전부 등장해 배꼽 빠질 정도로 웃긴 몸 개그를 한 아주 기가 막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다. 그래, 그는 강조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어제 일어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오늘 일어난 믿지 못할 사실을 아주 차분히 생각했다. 그래. 눈을 떠 보니 나는 수술대 같은 흰 침대 위에 구속되어 묶여 있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그저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었더니,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위로 무언가 열렸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 위에 또 다른 유리 덮개가 덮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흰 가운을 입은 남녀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하나는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투여했고, 가죽 같은 것들로 강하게 구속되어 있던 나는 별다른 반항을 할 수도 없이 내 몸에 어떤 약물을 받아들였다. 나는 즉각 몸부림을 쳐야 마땅했지만, 그들이 내 구속을 풀어줬기에 일단은 진정했다. 그들이 투여한 게 진정제였을까?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들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신의 가족은 어떻게 된 거냐고. 더 좋은 질문이 있었을 테지만 당시엔 그 질문뿐이 머리에 생각나지 않았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손을 뿌리치고, 한껏 난리를 치며 달렸고 빠져나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믿기 힘든 오늘 일어난 사실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계속해 같은 문장을 읊조렸다.

 

 그때 무언가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온 몸의 털을 세우는 고양이 마냥 예민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바람 소리였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재개했다. 그는 그 수많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뿌리치고, 뒤도 보지 않고 달려 그 건물을 빠져나왔다. 곁눈질해봤을 때 어쩌고 연구소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연구소를 빠져 나온 그는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계속 지나쳐 달렸다. 도로엔 차가 빠르게 지나다녔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그는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신호등을 발견한 그는 교통 법률 따위는 무시한 채 달려 건넜고 차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그렇게 고층 건물들과 주상 복합 등의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달려갔는데 그는 뭔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대충 봤을 땐 보통의 도시였지만. 왜인지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가 살던 도시에서 지극히 불필요한 요소만 골라내 만든 건물들 같았다.

 

 아무튼 간에 쉬지 않고 한참을 달리자 조금씩 풀밭이 나오기 시작했고, 산을 넘자 비교적 작은 건물들이 등장하며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도대체 그곳은 어디야? 그놈들은 누구지? 남자는 의문만이 쌓여갔다. 그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혹시 그들은 사람을 납치해 연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버리는 미친 과학자들이 아닐까? 아니면 국가의 명령을 받고 쓸모없는 사람을 치우는 공작원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몇 년간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잠깐만. 그의 뇌리에 어마 무시한, 너무도 무서운 상상이 엄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자연스러운 도시들과 본 적도 없는 연구소.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 달려오며 건물들에 부착된 대형스크린에서 본 연예인은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연예인이었다. 여기는 내가 알던 지구가 아냐. 그가 생각했다. 모르겠는 건물들과 모르겠는 연예인. 영화 주인공에게나 나올 법한 상황. 점차 그는 자신의 추리에 대한 확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무섭고도 깊은 공포가 그에게 자리 잡았다. 그는 차가운 피가 역류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고 숨죽여 울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보, 우리 딸…….

 

 한참을 울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거칠거칠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턱과 인중도 문질렀다. 매끈매끈했다. 아무래도 놈들이 내 멋진 수염과 머리를 밀어 버린 모양이군. 그가 생각했다. 그는 눈물을 털어 내고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안타깝지만 그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똑똑한 편이 아니었다. 물론 재능을 인정 받아 몇 년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만한 재능은 없었다. 그는 가족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부인 아멜라. 그는 4년 전 유럽 여행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서로의 열정에 반해 금세 친해지게 되었고. 삐걱대는 베네치아의 돛단배 위에서 아멜라에게 고백한 뒤 한국으로 가 결혼. 딸을 낳았다.

 

 이번엔 가족들이 아닌 자신에 대한 생각을 했다. 2003년 생. 초등학교 까진 순탄했지만 중학교 1학년 시절 부모님 두 분을 여읜 뒤 험난한 생활이 시작. 그의 가장 끔찍한 기억 중 가장 깊숙하고 오래 자리 잡은 기억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그에게 물건을 던져댄 아이들이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저녁엔 고아원 아이들에게 맞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머리를 피해 몸만 때리는 지독한 새끼들, 폭력뿐만 아니라 성희롱까지 해대던 그 끔찍한 기억 또한 그는 잊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잔인무도한 그곳들을 졸업한 뒤에도 시궁창 같은 생활은 계속됐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주인공이 인생 역전한 소설을 본 그는 자신감을 되찾고 이곳저곳 들쑤시며 일거리를 찾았지만, 뭣도 없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하물며 간단한 아르바이트에서도 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절망한 그는 자신을 이루는 단어들이 무엇무엇 있는지 중얼댔다. 따돌림, 냄새, 떠돌이, 고독, 외톨이, 피해자, 사막, 공허, 분노. 부정적인 단어들만이 한참 머리를 감싸고 있을 즈음 그는 그 사이에서 살날 같은 희망의 단어 하나를 끄집어낸다. 그림. 당시의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것. 그는 갓 사회에 나왔을 때의 자신감을 되찾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떤 짓이든 했다. 종이, 이면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버린 영수증이나 휴지. , 전봇대의 전단지, 박스. 심지어는 정말 그릴만한 곳이 없을 땐 자신의 신체에도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갈고 닦은 그림 실력으로 완성한 몇 백 장의 그림들을 그는 신문사나 디자인 업체 등에 보냈다.

 

 하루 한 끼, 수면은 여덟 시간. 나머지는 전부 그림에 투자하며 계속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에게 드디어 연락이 오게 된다. 한 디자인 업체에서 그의 그림이 개성 있다고 콜을 보내온 것이다. 그림자 짙던 그의 인생에 비친 한 줄기 빛. 빛과 함께 다가 온 손. 그는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취직한 디자인 업체에서 실력을 뽐냈고 능력을 인정받는다. 현실성 없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고속 승진으로 그는 승승장구하고 빛은 점차 밝아졌다. 허나 강렬한 빛만을 계속 쬐면 섬광에 눈이 아픈 법. 비유적 표현으로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초심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 그는 아이디어고 뭐고 다 떨어져, 의욕도 사라지고 열정도 없어진다. 결국엔 초심 좋고 열정도 불타오르는 신입들에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뺏겨 버린 그는 상사에게 휴직 권고를 받는다. 어떡하지? 인생의 진행이 막혀버려 고민하던 그는 유럽 여행을 택했고, 자신의 선택은 지극히 옳았다고 자화자찬했다. 색다른 세상을 보자 막혀 있던 그의 눈도 점차 뜨여졌다. 그곳은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그곳에서 아멜라를 만났고 한국에 돌아온 뒤 되찾은 실력으로 그는 엄청난 일을 하나 해내었고, 그 보상금으로 한동안을 일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지냈었다.

 

 그는 과거와 대조하며 자신을 이루는 단어들을 읊조렸다. 아멜라, 도희, 그림, 회사, 동료들과 상사, 프로젝트, 유럽. 부정적인 개념들만 먼저 떠올랐던 시궁창이었던 전과는 달리 인생의 주요 키워드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추상적인 개념으로 넘어갔다. 사랑, 희망, 감사, 아름다움 등. 그는 과거에 비해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인생, 그는 생각을 중단했다.

 

 미지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인생을 떠올렸지만 두려움과 허탈함만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이 지금까지 성취해 온 것을 이런 영문도 모를 상황에 빼앗겨버린다 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남자는 축 쳐져 희망을 잃었다.

 

 느낄 수 있어. 나는 어차피 죽을 거야.

 

 그들은 결국 날 찾아낼 거야. 난 죽게 되겠지. 그들이 내게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놨을 거야. 어쩌면 주입했던 약물에 그런 성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 자력 같은 거 말야. 그는 바닥을 쳤다. 통증이 완화됐던 발목이 다시 부어올랐다.

 

 순간 그는 기묘함을 느꼈다. 그것은 아까 도망쳐 나오며 그가 뱉었던 말이었다.

 

 ‘그만 망쳐놔!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 이상하다. 그만 망쳐놓으라니. 뭔가 부자연스러워. 난 이런 미스터리한 상황에서 처음 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그만 망쳐놓으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들을 알고 있나?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나무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작은 뇌손상이 있었다. , 그래. 그렇다면 희망이 있어.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나를 치료해준 의사들인거야. 난 뇌손상 때문에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거고. . 일리 있어.

 

 또각.

 

 그의 몸이 다시 한 번 예민하게 반응했다. 잔뜩 경직된 그의 목이 사방으로 돌아갔다. 난 왜 이렇게 놀라는 거람? 이건 아까와 같은 단순한 바람 소리야. 워낙 날씨가 추워 칼바람이 부는 것뿐이라고.

 

 한번 더 또각.

 

 …….

 

 미칠 듯이 또각. 이건 장난이 아니다. 누군가 이 근처에 있다, 흙바닥을 밟았을 때의 소리가 아닌, 시멘트 바닥을 밟을 때의 소리가 나는 걸 보아 상당히 가깝다. 그는 경계하며 숨죽여 일어섰다.

 

 허리를 숙인 뒤 다리는 벌리고 걷는 보폭은 최대한 작게. 숨어야 한다. 그는 장소를 물색했지만 있는 거라곤 먼지와 거미줄밖에 없는 폐가에서, 숨을 장소는커녕 들어갈 장롱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헛바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는 것 뿐. 그는 긴장해 코와 입을 틀어막고, 지금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까지 틀어막기 위해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뭔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지만,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남자는 그 이질적인 어떠한 느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또각.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스며드는 바람 없이 점차 차단되어 가는 소리, 냄새, 시각,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모든 것이 정지된 이 순간 모든 게 구둣발 소리에 묻히고 그도 함께 정지되어버린다. 밀물처럼 스며들어오는 안도감에 썰물처럼 큰 숨을 내뱉었을 때는 이미 모든 걸 들킨 후였다.

 

 “찾았다!” 순식간에 발소리는 몇 십 배로 불어나며 남자를 포위했다. 당황한 남자는 침을 꼴깍 삼킨다. 잔뜩 곤두선 핏줄과 진동하는 온 몸이 그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의 앞, 흰 가운을 걸친 대머리가 평화의 제스처를 취하며 서서히 다가왔다.

 

 “당신들 누구야, 다가오지 마!” 남자는 강렬하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움찔했다. 대머리가 말했다.

 

 “이봐, 진정해. 진정하라고. 우린 너를 구해주려는 거야.”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아멜라와 딸은 어떻게 됐어?”

 

 “아멜라? ?”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남자는 핏줄이 곤두선 채로 한 번 더 윽박지른다.

 

 “다가오지 마!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여긴 어디지?”

 

 남자 앞의 사람들은 이제야 뭔가 이해가 된다는 아리송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대머리는 여전히 의문이라는 표정이다. 대머리가 뒤의 중년 여성에게 묻는다.

 

 “실패인건가? 아니면 이걸 성공이라고 봐도 좋을까?”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울적해진 그가 으르렁댄다.

 

 “역시 당신들 이상한 연구원인 것 같아. 나한테 뭔가 실험을 한 거지? 그런 거지? 어쩐지 뭔가 이상했어, 처음 보는 사람들에 이상한 건물들. 혹시나 내게 환각을 보이게 한다던가.” 잠깐. 그럼 이것도 환각이야? 그는 생각했다.

 

 “나도 대략 상황은 이해했어. 이봐! 이해는 되지 않을 테지만 내 이야기를 잘 들어!” 대머리가 소리친다. 그는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아 버렸다. 대머리가 어떤 얘기를 하려는 건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남자는 도저히 그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도 막고. 두 손바닥으로 힘을 줘 막은 귓속 신발 끄는 소리가 슬그머니 들어온다. 저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는 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뜨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서서히 손을 내린다.

 

 이야기 해 봐. 남자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경계는 풀지 않은 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태도를 표했다는 것에서 대머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대머리가 말했다.

 

 “일단 네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에 대해 말해 봐. 어떤 인생이었지?” 그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정확히는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자신이 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듣고 싶었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그의 입은 술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그 자신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의 대다수는 실패와 성공,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가 끝나자 대머리가 박수를 쳤다. 그 뒤에 선 다른 사람들 전부 그를 따라 박수를 쳤다. 남자는 이해불능이었다. 갑자기 쫓기고,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박수를 받고. 분명 정상적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정말 감동적인 삶을 살았군. 진짜 훌륭해.”

 

 남자는 얼굴에 조금의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 미소는 즉각 1초도 안 되어 사라졌지만 잠시나마 기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빠르게 지나가는 감성들도, 대머리가 뱉은 다음 말에 전부 깨져 버렸다.

 

 “일단 자네가 살아온 그 인생은 전부 거짓일세.”

 

 “?”

 

 남자는 말을 더듬었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문장보다도 아까 대머리가 주의했던 이해는 되지 않을 테지만이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가짜라기보다는, 가상현실이지. 자넨 대략 삼십, 아니 35년 정도의 인생을 가상으로 겪어본 거라네. 그런데 젠장할! 문제가 생긴 거지. 가상현실에서 깨어나면서 본래의 기억이 묻혀 버리다니.”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난 정말 애통한 기분을 느낀다네, 이건 진심이야. 원래의 기억이 그대로라면 모를까, 35년 동안의 가상현실 체험 기억이 뇌를 덮어 버리다니. 35년간 자네가 구축해 온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는 기분.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 대머리가 얼굴을 찡그린다. 연민을 표하는 듯 고개도 마구 휘젓는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따위 무의미한 동작들은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는 것 같다. 그는 단지 머리로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안 돼!” 대머리가 윽박지른다. 남자는 움찔함과 동시에 다리가 풀려 풀썩 쓰러져 버린다.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머리가 그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오자 남자는 엉덩이를 들어 뒤로 두발자국 물러났다.

 

 “부정해선 안 되네. 부정하고 싶겠지만! 자네의 아내와 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자네가 거기서 어떤 삶을 살아 왔던 간에 이곳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란 말일세! 가상현실은 자네의 내적인 소망을 구현해내지. 아까 이상한 건물이라 했던가? 이곳의 건물은 지극히 정상적이야. 자네가 가상현실에서 보았던 그 건물들이 오히려 비정상이란 걸세. 말해 보게, 이곳의 건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이상했지?”

 

 남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딱히 없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걸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미세한 차이밖에 없었던가? 남자는 정신이 분열하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 자넨 세상에 강한 불만을 느꼈던 거야. 불만이 크면 클수록 현실과는 대조되고, 반대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지. 도피하고 싶었나? 안타깝지만 그건 다 무리일세!”

 

 “내가 세상에 강한 불만을, ?” 남자가 물었다. 대머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안타깝군. 자네는 심각한 망상증 환자야. 중학교 1학년 때 정신병원에 들어왔지.”

 

 남자는 그 말에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고, 동시에 점차 납득되는 듯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어쩐지 납득되는 것만 같아. 나는 망상증 환자였다. 우리 부모님은 멀쩡히 살아 계셔, 일찍 여의긴 개뿔. 단지 그들이 날 정신병원에 쳐 넣었을 뿐이지. 하루 종일 현실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누구도 신경 쓰지도 않는 망상에 빠져 사는 내게 그들이 가상현실 실험에 대해 제안했다. 그들은 이 진척 없는 연구에 내가 어떤 모르모트보다도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난 들어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현실에서도 망상에 빠져 사는데, 가상현실에서 내 망상이 현실이 된다면 오죽 좋겠는가. 미쳐버리겠지.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아니, 저들은 35년이라고 주장하지만 40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현실에서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 흘렀을 것이다.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어!

 

 그 순간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던 그의 이미지의 유리창이 깨진다. 남자는 고개를 가로젓고 괴성을 지르고, 주위에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전부 병신 같은 소리! 가상현실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믿을까봐! , 진짜. 장난을 쳐도. 정도껏 쳐야 되는 거지. 내 불우했던 어린 시절도, 죽어라 연습했던 그림들도, 내 행복감도, 사랑했던 가족과 느꼈던 그 기분들도 전부 현실이 아니었다고?”

 

 “괴롭겠군. 불우한 어린 시절은 진짜라네.”

 

 “닥쳐! 소설 쓰느라 고생하셨겠네. 여기 극작가가 한 분 계시나? 대머리 당신이 전부 이런 일을 꾸민 건가? 하하하! 진짜 거짓말 잘하네, 허언 대회에 나가면 우승이겠어! 어때? 아예 그냥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도 해보시지! 그럼 더 믿음직하겠네, 하하!”

 

 그 순간 대머리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 전부가 벙 찐다. 그들은 허공을 좇듯 꿈뻑거릴 뿐이었다, 갑작스런 침묵의 기류에 남자는 긴장한다.

 

 “, 왜 그래? 반박거리가 없어서 그런가?”

 

 “진짜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도 해보시지라니. 이 봐…… 많은 건 바라지 않을테니 조금만 현실을 봐줘. 자넨 남자가 아니야.”

 

 뭐? 그는 자신의 손을, 가슴을, 허벅지를 바라본다. 튀어나온 골반에 젖가슴이 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엄청난 혐오감과 공포가 그를 뒤덮는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거울이 없었으니 신체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그는 여자였다. 정확히는 그녀는 여자였다.

 

 그는 한순간에 자신의 삶을 우롱당하고 부정당했지만, 정신이 견딜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35년 간 직시하고 너무나도 당연히 여겼던 것이 바로다가 뒤집힌 순간 그녀는 오싹한 비명을 질렀고, 도망쳤다.

 

 또다시 소란이 일어났고 그녀는 되돌아 왔던 길을 달려 산을 올랐다. 아까 그녀와 함께 굴러 떨어졌던 흙먼지들은 그녀의 맨발바닥 상처를 벌어지게 만들었고, 부어 오른 발목은 지독히도 그녀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그녀는 잡히지 않기 위해 산 위를 올랐다, 근엄한 태양이 조금 먼 산 중턱 고개를 내밀었고 강렬한 햇빛은 그녀를 가리켰다. 여자는 태양을 따라 올라갔다, 의식하고 보니 철렁이는 가슴 때문에 뛰기가 조금 불편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 없이 그저 거세게 숨을 쉬며, 발목과 폐의 통증도 참고 한참을 달리자 막다른길이 나왔다. 더 이상의 길이라곤 올라왔던 길밖에 없는, 여자는 꼭대기라고 생각하는 그곳에 올랐다. 그곳은 바위 하나와 태양이 준비되어 있는 레스토랑 같았다. 그곳의 주최자는 그녀. 초대자는 아멜라와 딸 도희였다. 거짓이라 생각했던 가족들이 햇빛과 함께 등장한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퐁당 맺혔다. 아멜라, 도희는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이제 평생 헤어지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역시 너희는 가상현실 따위 가짜가 아니야. 사랑하는 아멜라, 도희.

 

 그리고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졌다.

 

- -

 

 

 

 

 

 

 

 

 

응모자 성명 : 김건우

이메일 : ks2614w@naver.com

연락처 : 010 - 3165 - 8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