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윤

by 원스 posted Jan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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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슨 일이 있는지, 집에 있기는 한지 등의 생각을 하며 정현 씨의 집 근처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406호의 문 앞에서 멈춰 선 것은 밖에서 찬바람을 한참이나 쐬고 난 후였다. 초인종은 카메라가 달린 전자식이 아닌 오래된 버튼으로 되어 있었다. 문 가운데에 달린 작은 유리 구멍에서는 미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초인종을 누르자 초인종 소리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초인종 버튼 속에서 녹이 슬었는지 기분 나쁜 진동도 함께 손가락을 타고 나에게 넘어왔다. 연달아 두 번을 더 눌렀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철문을 약간 세게 두드려 보았다. 정현 씨의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기운이 들었다. 여태 내가 무엇을 한 거지,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아무 이유도 없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열렸다. 집 안은 어두웠다.

  “정현 씨?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침대 겸용으로 보이는 소파에서 자고 있는 정현 씨가 보였다. 오른손은 얇은 이불을 힘없이 안고 있었고 왼손은 바닥을 향해 축 처져 있었다. 나는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정현 씨의 손을 잡았다. 길가에 쌓이고 있는 눈만큼 차가웠다. 바닥에서 약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에 적혀 있기로 처방 날짜는 오늘이었는데 봉투 속 약병은 텅 비어 있었다. 자살. 정현 씨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싶었지만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손은 덜덜 떨렸다. 소파 위를 벗어나 늘어져 있는 차디찬 손가락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겨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빨리 잠에서 깨어나 웃어주면 좋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따뜻해지기는커녕 그녀의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과 손톱이 내 심장을 후벼 팔 뿐이었다. 정현 씨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숨소리, 심장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30분쯤 전에 마신 커피 가격이 자그마치 6000원이었다. 누군가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한다면 거의 한 시간 동안 일해야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몇 개월 전에는 나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취직에는 성공했는데, 가끔 최저임금을 받으며 편의점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날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다 똑같아 보이는 문서들을 처리하고 커피를 타면서 돈을 번다. 유일한 낙이라면 퇴근 후에 집에서 맥주 한 캔과 함께 영화를 보는 정도.

  “윤아, 이것들 과장님한테 보내고 커피 한 잔만.”

  잡생각을 할 시간은 별로 주어지지 않는다. 말단 사원은 언제나 잡역부이다. 저 강 차장이 나를 가장 많이 부려먹는다. 커피를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돼지처럼 찐 살에 숨이 막혀 쓰러지는 날은 언제 올지 참 궁금하다.

  “알겠습니다.”

  “아 참, 축하해. 신입사원 한 명 새로 뽑았다는데, 막내 탈출이네?”

  그래봐야 같은 사원 아닌가. 어제 누군가 텅 빈 옆자리에 새 컴퓨터를 놓았기 때문에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강 차장에게 대충 웃어준 후 별로 무겁지도 않은 서류철들을 들었다.

  “인사부에서 연락 왔어. 이제 올 거야.”

  “뭐 해야 하는지는 제가 알려줘야겠죠?”

  “당연하지. 그럼 내가 하냐?”

  과장에게 서류철을 넘기고 자리에 앉을 즈음에 신입사원이 도착했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주먹을 꽉 쥐고 팔은 허리춤에 딱 붙인 모습이 누가 봐도 긴장한 모양새였다.

  “안녕하십니까, 기획팀에 새로 들어온 한정현이라고 합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기억은 없는데 무언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유를 생각해낼 수는 없었다. 그냥 받은 느낌이 그랬다. 그렇다고 한 눈에 반한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알고 있었다가 까먹은 기분. 그냥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인가보다. 잊고 있던 동창이라거나. 60평 언저리의 사무실에서 작은 박수소리와 반갑다, 나는 누구다 정도의 반응이 나왔다. 앞에서 무언가를 하길 좋아하는 강 차장은 내가 안내를 해줄 거라며 의자에 엉거주춤 앉은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커피를 외쳤다. 조용히 한숨을 쉬고 나서, 나는 복합기 두어 대와 기둥 하나를 지나 정수기와 커피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자리는 제 옆자리고요. 무슨 일 하는 지는 과장님이 알려주실 거예요. 커피는 여기서 정수기로 타면 되는데.”

  “커피 타는 방법은 저도 알아요. 몇 살이세요?”

  “스물여덟인데요.”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네. 잘 지내 봐요.”

  그녀는 손을 뻗었고 얼떨결에 악수를 한 다음 같이 자리로 돌아갔다. 커피 타는 것을 깜빡했다고 자각했을 때엔 이미 의자에 앉은 후였다. 알아서 마시겠지. 상사 이름과 직함, 얼굴 외우기나 사내 메신저 사용법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잘했다, 이 나이에 출판 분야에서는 당당히 명함 내밀고 웃을 수 있는 회사의 기획팀에 입사했다면 우등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열심히 한다는 소리는 듣고 자랐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우등생이라는 타이틀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잃어버렸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반 1등을 놓치자 어찌나 서운하던지, 다음 시험기간에는 매일 밤 11시까지 공부하고는 했다. 그 나이엔 정말 늦은 시간이었다.

  이후 넉 달 동안 기획팀에서 하는 온갖 자잘한 일들은 나와 정현 씨가 모두 처리했다. 며칠 전부터 기획팀은 새 시리즈를 대비하기 위해 철야근무를 시작했다.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와 정현 씨,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이 대리였다. 우리 셋은 그간 조금씩 친해져 점심시간에 커피도 같이 마시러 가고 근무시간 동안 메신저로 강차장의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정현 씨와는 특히 친해져 가끔 퇴근 후 맥주를 같이 마시는 시간도 생겼다. 한 번은 상사에게 일주일치 욕을 듣고 퇴근하자마자 회사 앞 편의점에서 나와 정현 씨 둘이서만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마지막 야근을 하던 날이었다.

  “그러게요. 아침 일찍부터 해질녘, 툭하면 심야까지 일하는데 월급이 너무 짜요. 우린 보너스도 딱히 없잖아요.”

  졍현 씨는 한탄하듯 한 마디 하고는 맥주를 홀짝였다.

  “그래도 취업 준비하고 있었을 때 생각하면 지금이 나은 것 같기도 해요.”

  “그땐 목표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목표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달린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가끔은 너무 힘들어요. 버틸 수 없을 만큼. 상사도 진짜 없었으면 좋겠고. 가끔은 콱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정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던 도중 맥주 캔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고개를 푹 숙인 정현 씨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꽤 많이 남아 있어 보이는 맥주 캔은 흔들리고 찌그러져서 밖으로 넘쳤다. 안 그래도 차갑던 맥주는 12월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정현 씨의 손을 적셨다.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5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정현 씨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힘내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정말 추웠다. 모든 것이 싸늘하게 식은 느낌이었다. 정현 씨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구름처럼 나왔다.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아요?”

  정현 씨는 고개를 그대로 둔 채로 말했다. 나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네온사인 불빛에 가려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이죠?”

  나는 고개를 돌려 정현 씨를 쳐다보았다. 정현 씨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눈가가 반짝였다. 눈물의 유무는 알 수 없었다.

  “죽게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기 별처럼 되려나.”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요.”

  나도 괜히 상상해보았다. 지하철역에서 파라솔 펼치고 천국 간다, 지옥 간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환생한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사라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맘에 드는 이론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사라지는 게 가장 과학적인 답변이라 생각했다.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처음으로 눈이 쌓일 정도로 많이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은 거세게 내리다가 회사에 도착할 무렵 잠잠해졌다. 정현 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1주일 휴직을 신청했다. 팀의 커피를 혼자 타니 죽을 맛이었다. 오늘만 여섯 번째 커피를 탔다. 2주하고도 며칠만 더 커피를 마시면 170개가 들어 있는 믹스커피 박스가 동났다. 정말 그 많은 커피를, 사원들이 전부 탔다.

  “윤 사원, 프린터에 종이가 다 떨어져서 그런데 한 박스만 들고 와 줄래?”

  정현 씨와 이 대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사담을 나누는 사이인 김 팀장님이 복합기 밑 부분을 가볍게 차며 말했다. 두 살짜리 아이가 있고 육아는 남편이 도맡아 하는 분이다. 나는 일곱 번째로 정수기 앞에 선 후 밑 선반에서 A4용지 한 뭉텅이를 꺼내 복사기로 향했다.

  “, 정현 씨 이야기 들었어?”

  “아뇨. 들은 이야기가 아무 것도 없어요. 전화도 안 받아서요,”

  김 팀장님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정현 씨가 나한테만 알려줬는데 네가 정현 씨랑 제일 가깝잖아. 모르는 것 같으니 말해줄게.”

  집에 무슨 일이 있거나 몸이 아픈 줄로만 일고 있었다. 어제 자정이 지나도록 편의점 테라스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시지 않았던가. 감기에 걸려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라면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직장 내 성희롱 때문이래. 윗선에 신고도 해 봤는데 귓전으로 흘린 모양이야.”

  “뭐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팀 내에 쓰레기가 있다고. 한둘이 아닐지도 몰라. 나야 직급이 높으니까 괜찮았던 것 같은데 팀에 여자가 나랑 정현 씨뿐이잖아.”

  머리가 띵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불려나간 다음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온 정현 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또 깨졌구나 하고 말았는데 몹쓸 짓을 당한 것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 말을 하다 말고 테이블을 내려치던 모습도 떠올랐다.

  “너는 아니라고 하더라. 덕분에 너 말고는 전부 다 의심하고 있어. 아무튼 정현 씨 돌아오면 잘 해줘. 돌아올지 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생각이 좀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먼 이야기인줄만 알았는데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 일이 끝나면 정현 씨 집에 들러야겠다. 뭘 사가야 할지 모르겠다. 여태 몰랐던 것이 미안했다. 누가 저지른 건지도 모르겠다. 김 팀장님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부터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 곧장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에 편의점에서도 이벤트와 관련된 여러 물건들을 팔았다. 예쁘게 포장된 사탕, 초콜릿, 꽃 등등. 나는 꽃을 사갈까 했지만 무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비싼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초콜릿이었는데 4천원이나 했다. 두 개를 더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정현 씨의 집 근처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회사에서 40분 정도 걷다 보면 나오는 골목이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응답기로 넘어갔다. 나는 택시를 불렀다. 날씨가 춥기도 했지만 자동응답기로 넘어간 것이 영 찜찜했다. 보낸 메시지는 읽었다고 표시가 되어 있으니 전화만 받지 않은 것이다. 아침부터 방금을 포함해 네 번은 건 것 같은데. 택시는 곧 도착했고 잠시 후 정현 씨가 사는 빌라의 앞 골목에 도착했다. 정현 씨는 빌라의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 불은 어스름하게 켜져 있었다.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405호였나, 406호였나. 몇 달 전 같이 맥주를 마시며 주소를 이야기했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골목 끝에 있는 빌라의 맨 끝에 있는 동 중에서도 꼭대기 층에 살아요. 뭔가 웃기죠?”

  나는 406호의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초인종은 카메라가 달린 전자식이 아닌 오래된 버튼으로 되어 있었다. 문 가운데에 달린 작은 유리 구멍에서는 미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초인종을 누르자 초인종 소리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초인종 버튼 속에서 녹이 슬었는지 기분 나쁜 진동도 함께 손가락을 타고 나에게 넘어왔다. 연달아 두 번을 더 눌렀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철문을 약간 세게 두드려 보았다. 정현 씨의 이름을 부르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다기보다는 그냥 느껴졌다.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열렸다. 집 안은 어두웠다.

  “정현 씨?”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침대 겸용으로 보이는 소파에서 자고 있는 정현 씨가 보였다. 오른손은 얇은 이불을 힘없이 안고 있었고 왼손은 바닥을 향해 축 처져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바닥에서 약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봉투에 적혀 있기로 처방 날짜는 오늘이었는데 약은 포장만 남아 있었다.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빠르게 소파에 누워 있는 정현 씨의 얼굴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움직이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 이제 보니 얼굴도 생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전력질주라도 하고 온 마냥 빠르게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 정현 씨의 어깨를 잡고 흔들려고 했지만 손을 뻗은 직후 뇌에서는 신고를 해야 한다는 명령을 전신으로 보냈다.

  119 구조대는 4분 만에 도착했다. 4분 동안 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따라 행동했다. 기도를 확보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지옥이었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정현 씨를 따라가 구급차에 같이 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모든 소리는 동굴 안에서 퍼지는 것처럼 들렸다. 또렷하게 들렸던 것은 삑, , 삑 하는 소리 말고는 없었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때문에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소매로 눈물을 걷어내도 온 세상이 흐릿해 보였다. 이전까지는 내가 여태 몰랐던 것이 미안했고 쓰레기와 같은 곳에서 일했던 것이 화났다. 두려움과 격분, 그리고 후회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회가 내 몸 구석구석을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댔다. 다친 곳은 하나 없었지만 병원으로 가는 동안이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회사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성희롱을 했던 사람은 강 차장과 박 부장, 그리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이 대리로 밝혀졌다. 그 세 사람은 당연히 직장에서 잘렸고 정현 씨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의 직원 두 명도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해 그들은 형사처벌 또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현 씨는 회사에 돌아오지 못했다. 다행히 의사가 말하길 건강은 거의 회복됐다고 한다. 1주에서 2주 정도 입원해서 푹 쉬기만 하면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끝이라고 했다. 나와 팀장님은 입원 후 사흘간 빠짐없이 병문안을 갔다. 병실 앞에 한정현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언가 쓸쓸해 보였다. 정현 씨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무표정으로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나는 옆에 놓여 있던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정현 씨, 저 왔는데요. 시간이 좀 늦었지만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정현 씨는 대답은커녕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태 힘들었던 거 이제 다 알아요. 여기 전복죽 사왔고.”

  팀장님은 사온 음료수 세트를 냉장고에 넣은 후 정현 씨에게 다가왔다.

  “정현 씨. 나 왔어. 나쁜 놈들 다 회사 잘렸고 지금 고소 먹게 생겼어. 정말 힘들었던 거 여태 몰라서 미안해.”

  팀장님이 정현 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현 씨는 처음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서로 잡은 손을 쳐다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 말해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사흘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잠긴 목소리는 나와 팀장님을 잠시나마 기쁘게 해주었지만 다시 엄청난 걱정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병실을 나왔다. 그간 해왔던 걱정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내 첫 직장에서 얻은 첫 번째 동기이자 친구가 남 생각할 줄 모르는 치한들 때문에 저렇게 망가졌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돌아온 후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예상대로 잘 자지는 못했다.

  내일은 월차를 내기로 했다. 월요일이 크리스마스였기에 금요일이나 화요일에 붙여 4일을 연달아 쉴 예정이었지만 정현 씨가 걱정되기도 했고 그 걱정 때문에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맘 편하게 늦잠을 잔 다음 정현 씨에게 찾아갈 계획이었다. 병원에서 점심밥을 주는 시간은 대충 정오쯤일 것이다. 식사 후 두 시간쯤 지난 시간이면 적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더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회사는 정현 씨 사건 후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조금 더 빨리 정리해야 했다. 팀 내에서 나름 고위급 인사가 그렇게 잘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회사 앞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와 가장 싼 크로아상을 주문하고 창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혹시라도 들키면 장문의 글을 쓴 후에 욕을 좀 먹어야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유리에서 한기가 넘어왔다. 밖에서는 함박눈이 내렸다. 버스와 자가용, 택시,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나는 한참동안 밖을 쳐다봤다. 내 가족이 정현 씨와 같은 짓을 당하면 어떡할지, 혹시 이미 당했으나 일상에 치여 넘어갔을지, 편하게 지내자며 했던 내 행동이 누군가에겐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을지.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진동 벨이 울렸다. 나는 폐 속까지 들인 공기를 전부 빼낸 후 진동 벨을 들고 커피를 받으러 갔다. 그리고 크로아상을 커피와 함께 먹어치운 후 한 시간 가까이 반쯤 남아 식은 커피를 들고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쌓이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오전 11시에 병원을 찾았다. 잠은 정확히 다섯 시간 잤다. 딱히 챙겨간 것은 없었다. 정현 씨는 내가 병실에 들어오자 내 이름을 부르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자 결국 자지 못해 생긴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불편한 데는?”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대요. 위장이랑 식도가 조금 약해졌다고 하네요.”

  정현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을 끝마치자 위장과 식도가 왜 아픈지를 떠올린 듯 잠시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바보 같죠? 나름 흔한 일인데 이런 소동까지 벌이고.”

  “아니에요. 전부 이해해요.”

  “윤이 씨는 저 이해 못하고 있어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저 어릴 때 말예요. 학대당했었어요. 중학생 때까지. 아빠가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꼭 육포를 사 들고 왔어요하나 입에 물어서 질겅질겅 씹으면서 절 때렸어요. 이유는 그때마다 달랐는데 언제는 인사를 안 해서, 언제는 집에 불이 꺼져 있어서, 성적이 나빠서, 자기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아서, 쳐다봐서, 예뻐서, 못나서.”

  정현 씨는 이불을 꽉 잡았다. 정현 씨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가출도 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책가방에 옷 한 벌이랑 돼지 저금통 하나 넣고 무작정 뛰쳐나왔어요. 밤까지 옆 동네 놀이터에서 혼자 놀다가 내 또래 아이들과 만났어요. 몸집 큰 남자애가 왜 이 밤까지 혼자 놀이터에 있냐고 했어요. 걘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겠지만 그 물음 하나도 발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무서웠어요. 그 남자애 옆에 있는 애가 제 눈치를 보더니 경찰서에 가면 도와줄 거라고 한 다음 큰 남자애한테 빨리 편의점이나 가자고 밀더라고요. 무리가 안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경찰서에 갔어요. 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들어갔는데 가방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아빠한테 전화를 거는 거예요. 난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고 얼마 안 지나서 아빠가 왔어요. 술 냄새랑 담배 냄새 위에 집에서 쓰는 샴푸 냄새가 났어요. 너무 무서워서 울며불며 경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경찰은 아빠한테 애 관리 잘하라고, 아빠는 연신 허리 숙이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집까지 끌려가는 동안 아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집에 도착한 후에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허리띠를 풀더라고요. 그거로 절 때리더니 울 힘마저 남아있지 않았을 때 제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정현 씨는 울고 있지 않았다. 이불을 꽉 잡던 손의 힘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 오히려 내 속이 먹먹해졌다.

  “아무튼, 오래전 일이고 그 다음부터는 정말 조용히 살았어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비위에 맞춰 기계적인 대답만 하다 보니 아빠는 망할 년이라고 외치고 그날로 집을 떠났어요. 이맘때였는데. 아마 중학교 2학년 크리스마스 전전날 밤이었을 거예요. 두어 달 후에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경찰이랑 아줌마 하나가 집에 찾아왔어요. 경찰이 사진 한 장을 보여주더니 아버지가 맞니?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사실대로 아빠라고 했어요. 그러자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기뻤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어요. 아줌마는 우리가 도와줄 테니 하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제 다리가 풀리고 울음이 나왔어요. 정말 대성통곡을 했어요. 슬퍼서가 아니라 화나서 난 눈물이었죠. 이후로는 상담도 받고, 친구 하나 없는 학교를 떠나 새로 전학도 가고. 정말 악착같이 공부했어요. 고등학교 때에는 전액 장학금에 기숙사까지 합격했고요. 잘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서 보란 듯이 성공해야지. 윤이 씨도 알다시피 그렇게 내가 원하던 출판 쪽 회사에 취직도 했어요. 그런데 박 부장 그 새끼가 나를 불러놓고 내 몸에 손을 댔을 때 온갖 감정이 떠올랐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도 지르지 못했어요. 그날은 집에 가서 펑펑 울기만 했고요.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느새 회사만 들어가면 몇몇 인간들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이제 막 성공하려던 참에 아빠가 내 앞길을 막은 것만 같았어요,”

  나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정현 씨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이 닿자 정현 씨는 움찔했지만 이내 내 손을 마주잡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몇 분을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정현 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음 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글쎄요. 회사엔 돌아가고 싶어요. 솔직히 대기업 입사도 승산이 있었지만 출판업계로 가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 거거든요. 면접 볼 때 제가 면접관이 된 기분 아세요?”

  “전혀요. 전 그냥 전공 살릴 수 있는 분야로 골랐다가 겨우 붙었거든요. 느껴보고 싶네요. 그런 경험.”

  “윤이 씨가 저 두 번 살린 거예요. 집에서 한 번, 방금 전에 한 번.”

  정현 씨가 다시 밝아진 모습을 보자 마약이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방금 그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받는 느낌이었다.

  정현 씨의 퇴원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의사가 말하길 앞으로 약만 잘 챙겨먹고 상담은 언제든지 가능하니 불러만 달라고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퇴원 후 거의 바로 회사에도 복귀하기로 했다. 기획팀 인원은 나와 정현 씨, 팀장님과 정말 조용한 차장님 한 분,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과장님 한 분밖에 남지 않았다. 인사팀에서는 곧 다른 부서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고 했다. 인사팀에서는 무언가 생각을 많이 했는지 새로 온 사람이 여자 셋에 남자 하나였다. 그런데 전원이 신입이었다. 다른 부서 사람이 아니었다. 김 팀장님은 과장으로 특진했다. 남아 있던 두 분도 하나씩 올라갔다. 왜인지 나와 정현 씨는 사원 그대로였다. 사원만 다섯 명이 된 것이다. 정현 씨가 회사에 복귀하던 날, 우리 부서는 환영 파티를 벌였다. 1221, 목요일이었다. 다음날도 출근해야 했지만 2차까지만 마시고 헤어졌다. 출근해야 했으니 2차까지만 마신건가? 함박눈이 분위기를 더해서인지 여태 참가한 회식 중에서 가장 즐거웠다. 나와 정현 씨는 집에 걸어가기로 했다.

  “회사 돌아오니 어때요? 한 달은 쉰 것 같은데요.”

  “완전 신나요. 팀장님도 회사에서 만나니 훨씬 더 반갑고.”

  할 말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둘만 남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어야 할 것 같았다.

  “내일 금요일인데 내일도 놀래요?”

  “그래요. 좋네요. 대신에 저녁은 윤이 씨가 사줘요. 맥주 같은 탄산은 마시면 목 상하니까 건전하게.”

  나는 그냥 소리 내어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흔쾌히 수락하는 웃음.

  “주말에도 보는 건 어때요?”

  “토요일에 병원 갔다 와야 하는데 그거 기다려줄 거예요?”

  “당연하죠.”

  “크리스마스 때엔 바쁜가보네요? 월요일까지 연휴인데 주말까지만 놀자고 하는 걸 보니.”

  “바쁘면 좋겠는데. 바쁘게 만들어 줘요.”

  이번에는 정현 씨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저렇게 밝게 웃는 표정은 처음 보았다. 정현 씨를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손도 잡았다. 병원에서 잡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친했던 친구 이야기, 선생님께 혼난 이야기, 대학교 MT때 고생한 이야기 등등. 군대 이야기는 시작과 동시에 제지당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예요?”

  나는 별도 달도 보이지 않고 눈만 펑펑 내리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회사 다니고 놀러 다녀야죠. 돈 모으는 건 제 성격에 안 맞아요. 윤이 씨는요?”

  “전 별 생각 없어요. 목표는 다 달성한 것 같아요. 사람을 구했는데 뭘 더 하겠어요?”

  정현 씨는 날 째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 횡단보도 건너야 하는데, 깜빡여요.”

  나와 정현 씨는 언제 빨간 불로 바뀔지 모를 횡단보도를 향해 뛰어갔다. 신호등은 우리가 중앙선에 가까워질 순간에 빨간 불빛을 띄웠다. 정현 씨는 잡던 손도 놓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나도 뒤따라 뛰어갔다. 근소하게 내 앞에 있던 정현 씨가 소리를 지르며 중심을 잃었다. 아마 눈 때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부분이 미끄러웠을 것이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정현 씨를 양팔로 받아주었다.

  “고마.”

  오른쪽 시야가 갑자기 밝아졌다. 묵직한 경적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볼보 트럭이 횡단보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정현 씨를 밀쳤다.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찰나의 시간이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듯 아주 천천히 흘렀다. 정현 씨는 나와 겨우 시선이 맞닿을 정도로 잘 밀려나갔다. 중심을 잡기 위해 양팔을 휘두르며 안전한 방향으로 휘청거리며 달려가는 정현 씨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엔 눈이 내리는 도로가 아닌 자동차 번호판이 내 시야를 꽉 채웠다. 정현 씨는 아마 엎어지겠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온몸이 밀려나갔다. 허리춤부터 팔 끝까지 황소가 들이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날아갔다. 날아간 다음에는 몇 바퀴를 굴렀는지 모르겠지만 두세 바퀴정도 구른 것은 확실하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프지도 않았다. 내 눈 위로 함박눈이 떨어졌다. 동공에 함박눈이 내려앉았다. 깜빡이지 않아도 되었는데, 눈송이는 천천히 녹으면서 흐릿하게 바뀌었다.

 

 

 

  나와 정현 씨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 커피 잔으로 보아 회사 앞 카페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아주 넓었다.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내가 차지한 의자와 테이블이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사람은 오로지 나와 앞에 앉아 있는 정현 씨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전 상황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정현 씨와 손을 잡고 있었는데. 한겨울이었고, 뛰고 있었던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윤이 씨가 절 밀쳐서 저는 손을 쓸렸어요. 얼마나 따가운지 알아요?”

  갑자기 모두 떠올랐다. 어안이 벙벙했다. 죽은 건가?

  “아뇨, 아직 안 죽었어요. 뭐랄까, 가사상태라고 해야 하나? 조금 더 심하니 혼수상태에 더 가깝겠네요. 죽기 직전이랍니다.”

  “정현 씨는 무사한 거예요?”

  “방금 말했잖아요. 손을 쓸렸어요. 당신은 온몸 뼈가 부러졌고. 갈비뼈 수가 두 배는 늘었으니 감각도 잃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 구급차가 오겠지만 아무리 빨리 와도 죽었을 거예요.”

  내가 죽는다니. 근데 내 앞에 있는 정현 씨는 누구일까. 신의 다른 모습이기라도 한 걸까.

  “그냥 윤이 씨가 직접 만든 가상의 인물이에요. 사실 자문자답 중이라는 거죠.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게요. 당신, 방금 죽었어요. . 이제 슬슬 기억날 시간인데.”

  “기억이 난다니요? 사고 난 것까지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런데 왜 이리 편한지 모르겠네요.”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살았던 삶과 비슷했는데, 결말이 조금 달랐다. 나는 그 날 정현 씨를 구하지 못 했다. 정현 씨가 수십 알의 수면제를 한 번에 먹은 그 날. 나는 택시를 타고 황급히 간 게 아니라 한 시간 정도를 쓸데없는 고민을 하면서 터무니없는 산책을 했다. 그리고 그 한 시간 때문에 정현 씨는 죽었다. 정현 씨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 시간이었다. 나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이후로는 무단결근을 밥 먹듯 했으므로 회사도 당연히 나를 잘랐다. 집 안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냈다. 매일 그 한 시간을 저주하고 후회하며 미쳐가다가 몇 년 후 나도 죽었다. 달리는 기차에 몸을 맡겼다. 죽은 다음 하게 된 것이 방금 교통사고로 일찍 끝난 삶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구하지 못한 삶의 저번 삶, 그 땐 집에 찾아오지도 않았거든요. 김 팀장님이 제가 죽었다는 걸 알려줬어요. 결말도 알려드릴게요. 제 회사 물건 정리하다가 제가 쓴 편지를 읽고 사직서를 냈어요. 아내도 생겼지만 오랫동안 괴로워하다 늙어 죽었죠. 편지 내용이 뭐였더라.”

  “편지 내용은 기억이 안 나네요. 오래전 삶이라 그런지 흐릿한가 봐요.”

  기운이 쭉 빠졌다. 다음 삶에서는 정현 씨를 구하고 나도 살 수 있을까.

  “그 편지가 유서 같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것 말고는 모르겠어요. 다음 생 때 다시 확인해 보자고요. 이거 분명 기억해야 할 텐데. 이번엔 어디로 갈까요?”

  “죽기 직전으로 가서 다 끝나가는 파란불 지나가게 두고 새 신호 기다리면 좋겠네요.”

  “그것도 좋네요. 군대 가기 전에 로또 번호 아슬아슬하게 빗겨난 건 어떨까요?”

  내 눈 앞에 있는 그녀도, 이 상황도 모두 허상이었지만 웃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차츰 좋아졌다. 죽고 나면 있던 미련도 다 사라진다는 게 정말인가보다. 하지만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어느새 답답함은 목까지 차올랐고 말을 이어가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제일 후회되는 일 중 하나긴 하네요. 전생에 안간 걸 보니 이번에도 가망 없겠지만.”

  나 혼자 주고받는 농담이지만 즐거웠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이 삐져나왔다. 정현 씨도 같이 울고 있었다.

  “자살한 후에, 정현 씨는 어떤 시간대로 돌아갔을까요?”

  “당신이랑 똑같이 가장 후회했던 사건 직전으로 돌아가겠죠. 자살한다고 지옥에 간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 똑같은 죽음일 뿐이죠.”

  나보고 당신이라고 하는 정현 씨의 말이 웃겼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화할 수 있는 한도는 당연히 내가 아는 한도 내일 것이다. 지나간 삶의 기억을 떠올리는 용도 말고는 쓸 데가 없었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이 모두를 다시 잊어버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후회됐던 사건으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앞이 아주 밝게 빛났다.

 

 

 

  학원이 끝나고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길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학원 친구가 많아서 밤마다 놀이터를 점령해 놀고는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날씨이므로 놀기에는 딱 좋았다. 오늘은 아이스크림 내기로 신발 멀리 날리기를 할 예정이었다. 놀이터 근처에 가보니 오늘의 종목에 꼭 필요한 그네가 천천히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에이, 오늘은 사람 있네. 다음에 놀자.”

  누나는 친구 두세 명과 함께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와 상훈이, 동민이는 놀이터에서 놀다 갈 심산으로 계속 길을 걸었다. 천천히 흔들거리던 그네에는 담배를 피우는 동네 형이 아니라 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7시가 다되어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고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어두컴컴했다. 이런 시간대에 내 또래의 아이가 혼자 놀이터에 있다는 것은 곧 같이 놀 친구가 없다는 뜻이었다. 혹은 학원을 기다리고 있거나. 나는 셋밖에 한 명이 추가되면 22로 팀을 나눌 수 있겠다 싶어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툭 치자 그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나 또한 눈물콧물에 범벅이 되어 훌쩍이고 있는 모습에 뒷걸음질을 칠 만큼 놀랐다. 잠깐 낯익은 얼굴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다가갔지만 아닌 듯 했다.

  “무슨 일 있어?”

  “너 나 알아?”

  그 아이는 훌쩍거리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혼난 건지, 친구들이 따돌림을 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아 사정을 물어봤다.

  “아빠가 술 마시고 들어와서는 자꾸 때려. 욕도 막 해.”

  아이는 이제 엉엉 울며 말했다.

  “엄마는?”

  “없어.”

  아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 집에 갈래? 우리 집에는 엄마 있다. 지금 밥 먹을 거야.”

  “그래도 돼?”

  “. 우리 부모님은 친구 데려오는 거 좋아해.”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깜짝 놀라며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냥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라고 대답했더니 부모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일단 밥부터 먹자.”

  나가기 전 확인한 바로는 그냥 있는 반찬으로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토마토 케첩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멋진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주셨다. 그 다음날은 엄마와 아빠가 아이의 손을 잡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 아이는 하루 더 우리 집에서 더 머물었지만 그 이후로는 만나볼 수 없었다.

  “엄마, 그 애 어디 갔어요?”

  “집에 갔어. 그 애 정말 불쌍한 애였던 거 알고 있었니? 네가 그 애를 살려준 거야.”

  “정말요?”

  나는 그 친구가 집에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무지 기뻤다.

  “. 새 집에 갔어. 깨끗한 집이야. 친구도 많고. 공부도 무지 잘하던데. 옆 학교 전교 1등이었대.”

  “저 걔 이름도 몰라요. 만나서 놀고 싶은데.”

  “못 만나. 의사선생님이랑 이야기도 하고 이사도 가고 해서. 윤이가 사람 하나 살렸다.”

  갑자기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조금은 슬펐지만 칭찬을 받아서인지 기분이 정말 좋았다. 집 안에서 어색하게 있다 보니 이름 한 번 물어보지 못한 것이 퍽 아쉬웠다.



김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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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671-6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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