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지고 어두운데

by 애니 posted Jan 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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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는 지고 어두운데.

이름(본명)

이기정

주소

경남 거제시 제산로 86 거제더샾 105101

이메일

tesstess37@naver.com

휴대폰 번호

010 5152 5462

 

 

 

 

 

 

 

 

 

 

 

 

 

 

 

 

 

 

 

 

 

 

 

 

 

 

해는 지고 어두운데.

 

재희는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매끄럽게 그녀를 지나쳐 사라졌다. 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정류소마다 있는 대여섯 명 앉을 만한 규모의 대기실 양쪽 유리가 깨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재희는 깨진 유리를 흘긋 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친구를 떠올렸다. 일 년의 반은 일을 하고 나머지 반은 그 돈으로 오지를 돌아다니는 친구였다. 재희는 왜 그렇게 오지를 돌아다니며 힘들게 살아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이곳이 내겐 더 힘든 오지야. 그곳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주지.’ 친구가 떠오른 것은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고향 마을이 오지마을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와 지금 그녀의 마음이 사막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5년 만에 찾은 집은 보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벽면은 깨끗하게 다시 페인트칠이 되어있었고 잔디도 잘 관리되어 있었다. 가시오가피, 감나무, 보리수는 얌전하게 가지치기 되어 있었다. 몇몇 못 보던 나무들까지 울타리를 따라 심겨져 있었으며 나무와 나무사이에 키 작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재희는 집을 아버지 친구인 영술에게 거의 무료로 빌려준 한 이후 통장에 찍히는 돈만 확인했을 뿐 단 한 번을 찾지 않았다. 영술은 5년 세월 동안 월세를 미룬 적 없이 제 날짜에 돈을 보내왔기 때문에 재희는 전화할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한 번 해 볼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한 달이라도 집세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저씨 잘 지내시죠? 이번 달 집세를 깜박 하신 것 같아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느끼는 이상할 정도의 편안함과는 별개로 용건 없이 전화를 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재희는 제영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는 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그가 부산으로 나갔고 명절 때 가끔 아버지를 찾아왔었다는 것 뿐 다른 것은 모른다.

영술이 아저씨가 세를 놓을 수 없겠냐고 물었을 때 큰 동네에서도 한참을 벗어나 그녀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사람도 살지 않는 이제는 빈집만 군데군데 남게 된 사람도 살고 있지 외진 곳에 누가 들어와 살겠는가 싶어 얼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제 그의 제안을 선 듯 받아들인 데는 그가 주는 편안함이 컸다. 어린 시절 수줍게 인사를 건넸던 것밖엔 특별히 얘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그에게서 흘렀으며 낯가림이 심해 가족 외에 사람에겐 눈 맞추는 것도 어려워했지만 영술에겐 아무런 경계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과도한 관심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다른 어른들처럼 화제의 빈곤이나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그녀를 화제에 올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라고 낮춰보지도 않았다. 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집을 그에게 선뜻 세 주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부모님의 묘소가 바로 집 뒤 산에 있었지만 명절이 되어도 내려가지 않았다. 일부러 내려가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꼭 명절마다 일이 생겼다. 시댁 어른이 아팠던지 아니면 아이가 아팠고 그도 아니면 회사에 일이 생겼다.

 

세를 이제 그만 놓겠다고 전화로 얘기를 해도 되는 일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고맙네. 제영술찍힌 통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달 같은 날짜에 통장을 확인했다. 돈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보다 실은 고맙네 제영술 이라는 글자를 보고 싶어 매달 확인했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뭔가 자신을 생각해 주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잘 관리된 집을 보자 차라리 전화로 말할 걸 후회했다. 영술이 아저씨가 그 집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눈으로 확인하자 그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 남 걱정은? 지금 남의 입장을 생각해 줄 처지가 아니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 어차피 5년 동안 한 번의 통화도 왕래도 없었는데 그냥 전화로 이제 그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능한 빨리 집을 비워 주셔야 해요. 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지.’ 그녀는 자신이 잘 지어 놓은 농산물을 착취해 가는 악덕 지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실제 선택이 없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밀려온다고. 그녀에게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체념하는 것이었으며 그나마 그녀의 엄마가 그녀 앞으로 남겨 놓은 집과 조그만 밭이 그녀에게 위안이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것 또한 다행이었다.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안도감을 주었다. 세상을 피해 있을 수 있는 지금 이 집이 없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있을 때면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서서히 퍼져나가 욕조 전체가 피로 물드는 영상이 떠올랐다. 머리를 털어 지워버리려 했지만 생각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왔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산을 오를 때면 눈앞에 보이는 큰 나무가 보이면 대롱대롱 목이 매달려 있는 상상에 몸서리가 쳤다. 온힘을 다해 자기를 지키려 했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을 끝내고 싶은 충동 또한 거세게 올라와 그녀의 머릿속은 팽팽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고통을 무표정 속에 감추고 억지로 삶을 이어가는 노력도 그녀의 두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이 남편에게로 가고 나서는 그녀는 억지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그녀에게서 자살충동을 막아주었다. 그녀는 홀가분했다.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그녀 곁에 있음으로 불행의 그림자를 아이들에게도 씌워지는 것 같아 그녀는 더 고통스러웠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맞고 오기 일쑤였고 그녀에게 전염된 무표정한 아이들의 얼굴, 위축된 모습은 그녀를 더욱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겉으로 아무리 밝게 표정을 짓는다 해도 속에서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어두운 그림자는 아이들을 병들게 했던 것이다. 그녀도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죄책감으로 더욱 쪼그라들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안도했다.

남편은 아이들에겐 자상한 남자였고 좋은 아버지가 되려했다. 아이들에게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았으며 존댓말을 썼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났다. 직장을 잃었고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고 이혼을 하게 되고 아이들이 떠났다. 그것이 불과 반 년 동안 차례로 일어난 일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고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나친 무수한 작은 사건들이 말들이 불행의 씨앗들을 심었을 것이다. 그녀도 어렴풋이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자신에게 닥친 잇단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이제 사라진 존재라 여겼다.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한 회사의 과장,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그녀의 선택으로 만들었던 모든 세계에 종말을 고했고 이제 그녀를 잉태한 자궁과도 같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숨죽인 듯이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그마저도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면 석양이 아름다운 바다에 조용히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죽음이 이토록 많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준다는 것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여차하면 죽겠다는 생각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살게 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전화 한 통 없이 그냥 무작정 내려 온 것이 떠올랐다. 미리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골이라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농사짓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고 영술은 보이지 않았다.

 

트렁크를 대문 앞에 세워두고 둥그렇게 쳐진 담장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았다.

고향은 정말 어머니 뱃속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에 대해서 고향에 대해서 애틋한 마음을 부정하고 살았지만 그녀 속에 살아있었을까. 사춘기 시절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했고 그 속에서 절절 매는 엄마는 더 싫었다.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었으며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증오했던 곳인데 이상하리마치 그녀의 마음이 평화로웠다. 생각해보면 끔찍한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봄이면 엄마를 따라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고 밥상 위에 향긋한 산나물 무침이 올라와 그 반찬 한가지만으로 그날 저녁이 배부르고 행복했다.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살았다.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까만 콩이라고 불렀다. 집을 떠날 때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기억만 끌어안고 떠났다가 우습게도 돌아온 지금은 그녀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따듯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밭, 바다의 공기가 그녀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생전처음인 것 같은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흙을 밟았다. 차갑고 폭삭한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따듯하게 번졌다. 무표정하게 쳐져 있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밝아진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나이를 열 살쯤 어려 보이게 했다. 원래부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무채색의 옷은 갸름하고 예쁜 얼굴이지만 나이보다 늙어보이게 했다.

재희 왔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 혹은 오랜간만이구나? 라든지 아니면 놀라기라도 해야 했지만 영술의 얼굴은 분명 반가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제 본 이웃 오늘 다시 보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네 연락도 없이 죄송해요.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연락없이 내려온 것에 대한 개운치 못한 마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변명이 나왔다.

 

자기 집 오면서 연락은 무신? 얼른 들어가자.”

재희 집이라고 못 박아 얘기하면서도 얼른 들어가자라는 문장은 주인이 명확히 자신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렸다.

 

물을 열고 들어선 집 안 풍경에 재희는 놀라고 말았다. 엄마가 살 때와 거의 바뀐 것이 없었지만 훨씬 더 깨끗하고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모든 것이 반짝 거렸다. 아마도 벽지를 새로 하고 나무 식탁을 사포질하고 반질반질 니스 칠을 했는지 윤이 났다. 집안 구조도 가구도 달라진 것은 하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생명력이 더 입혀져 있었다.

 

밥은 묵고 왔나? ”

아 네. 먹었습니다.” 영술의 다정한 말에 목이 메었지만 오히려 목소리는 이를 감추려 사무적이게 나갔다.

밥 묵어도 열무 김치가 맛좋게 익었는데 국수 한 그릇 말아 줄테니 먹어봐라. 맛 나다.”

아니, 아니요. 저 밥 먹고 왔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국수는 간식이다. 함 묵어 보거라. 사람이 왔는데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서 뭐라도 내놓고 싶은 맴에서 그러니께 사양말고.”

 

영술은 성큼성큼 걸어가 부엌으로 갔다. 또각또각 써는 소리가 들리고 물이 끓는 하얀 김이 올라왔다. 얼마 후 동그란 밥상 위에 열무로 빨갛게 버무려진 국수와 총총 썬 김치를 다시 양념했는지 참기름 빛이 돌과 김과 깨가 솔솔 뿌려진 반찬이 나왔다.

재희는 점심은커녕 아침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적도 있었다. 현기증이 나 쓰러질 것 같아 할 수 없이 우유 몇 모금을 살기 위해 마셨다. 그녀의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눈은 쾡 하게 들어가 있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때문인지 재희는 입맛이 돋았다. 영술은 밥상을 놓고 재희를 향해 먹으라는 눈짓을 한 번 보내고는 먼저 한 입 가득 국수를 입에 넣었다. 재희는 입 안 가득 국수를 씹어 삼키는 영술의 모습에 허기를 느꼈다. 예의상 먹는 시늉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영술은 자신의 그릇을 비우고 그녀의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고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실제 그녀의 아버지는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술로 도망쳤다.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엄마의 삶은 힘들어졌다.

 

여기서 살아야 해요. 집이 없어졌거든요.”

 

그러냐. 집을 비워달라는 말이냐?”

 

. 그것도 가능한 빨리요. 갈 곳이 없거든요.” 너무도 솔직하게 그러나 듣는 사람에 따라 공격적으로 들릴 수게 말이 나왔다. 그녀는 뱉어놓고 후회했지만 솔직한 것이 최선이라 약해지는 마음을 설득했다.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것이 더 심해졌다. 가족의 파탄과 직장의 상실로 인한 공격성은 주로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방향이 지금처럼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외부로 나가기도 했다.

 

그렇구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각자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자책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국수를 얻어먹고 집을 비워달라니, 먹지나 말걸.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다른 집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말했어도 분명 아저씨는 선 듯 최대한 빨리 집을 비워주려 했을 텐데

영술 역시 생각이 복잡했다. 이미 칠십대 중반이 넘은 그는 그 집은 자신의 집이라 여기진 않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이미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사는 재희가 돌아올 리 없다 여겼고 죽는 날까지 집과 나무들 밭을 잘 가꾸며 살아갈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나도 당장은 갈 곳이 없고 여기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너만 괜찮다면 같이 살아보는 것은 어떻겠냐? 지금은 창고처럼 쓰고 있지만 이층을 깨끗하게 치우고 벽지도 바르면 쓸만할 거고 2층으로 내가 올라가고 1층으로 네가 들어오면... 왜 싫으냐?”

재희는 뜻밖의 제안에 뭐라 답해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과 같은 집을 쓴다는 것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유모를 안도감이 몸으로 흘렀다.

 

그럼 집세는 어떡하죠?” ‘좋은 생각인데요. 그러시죠라는 말 대신 집세라는 말이 재희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던 대로 내야제. 집세는 항상 미안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밭이며 집이며 그 돈으로 어림도 없지.”

 

그런 말은 아니에요. 아저씨. 그대로 비워뒀다면 집은 폐허가 됐을지 몰라요. 그것만 해도..”

 

재희는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는 거 같아 중간에 입을 닫았다. 거의 1년 가까운 시간동안 편안하게 마주앉아 일상이나 자신의 얘기를 하지 못했다. 관성적으로 자신의 얘기가 나올 것 같자 입을 다문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마트에서 계산대 점원, 식당 주인, 아이들 학교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고, 남편과 이혼과 아이들 문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태풍처럼 밀어닥친 불행 앞에서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얘기하는 것이 싫어서도 그녀는 가까운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다.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저 그날그날을 버텼다. 그녀 앞에 놓인 시간들이 무거웠다.

 

그럼 당장 2층부터 치워야겠다. 두 세 시간이면 금방 치울 거다. 오늘부터 당장 들어와도 되겠다. 아직도 해가 지려면 한참이다.”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

 

재희는 낮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고작 세 채가 전부이고 그것도 한 집은 빈 집이고 나머지 한 집은 외지 사람에게 팔렸는데 여름에만 와서 지내기 때문에 외안개(안개낀 외딴 곳) 동네에 사람이라고는 영술과 재희 둘 뿐이다. 그런데도 재희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피해서라기보다는 웅크리고 있고 싶었다. 재희는 웅크리고 있을 수 있어도 되는 것에 안도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땐 거실까지 나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억지로 움직여야 했고 마트를 가고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녀는 방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플 때는 부엌으로 가서 눈에 보이는 것 아무거나 입으로 밀어 넣거나 갈증이 가실 때까지 음료수를 들이키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밤과 낮이 바뀌는 것만 느낄 뿐 며칠이 지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시간이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음식을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부엌에 따듯한 음식이 있고 냉장고가 채워져 있는 것에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방안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커튼을 사이로 들어온 햇볕에 눈을 떴다. 빛나는 녹색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 집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커튼을 열었다. 눈부신 햇빛과 녹색이 한꺼번에 몸 속으로 들어왔다. 약간의 현기증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일어났냐?” 영술은 입가로 굵은 주름을 만들며 빙긋이 웃었다. 그는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가위로 툭툭 잘르고 있었다. 햇볕 아래서 바싹 말리려는 것이다. 보통은 큰 동네에서 고추 말리는 기계로 말렸지만 영술은 말리는 기계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햇볕 아래 빨갛게 말리는 것을 좋아했다.

재희도 전염된 듯 미소 지었다.

배고픈데 같이 밥 먹을 테냐?” 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허기가 진 것 같기도 했지만 먹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영 혼자 먹고 싶지가 않아서 말이지.”

알았어요.”

좀 있다 2층으로 올라오너라.” 영술은 말을 마치고 초록과 붉은 색이 섞여 있는 고추 몇 개를 골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첫날 가져나왔던 동그란 양철 밥상에 고추가 총총 썰어 들어간 강된장, 삶은 호박잎과 새콤하게 익은 냄새가 향긋한 깍두기가 올라왔다. 재희도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엄마가 만들어주던 강된장과 호박잎. 맛있는 줄 모르고 먹었는데. 며칠을 굶다시피 한 때문인지 강된장의 구수한 냄새 때문인지 재희는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영술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밥상을 자기 앞으로 끌어와 호박잎에 밥을 얹고 강된장에 싸서 한 입 먹고 다 삼키기도 전에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어 입에 밀어 넣고 그 동작을 쉼 없이 반복했다. 밥공기는 비었지만 여전히 입맛을 다셨다. 영술은 일어나 밥솥에서 밥을 퍼고 휴대용 가스버너에 강된장을 다시 데워서 펐다. 재희는 이미 채면은 잊은 것 같았다. 된장이 데워지고 있는 동안에도 재희는 밥과 깍두기를 계속 입으로 밀어 넣었다. 된장이 밥상에 올려 지고 다시 먹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밥공기는 비웠다. 재희는 밥상에서 물러앉아 벽에 기댔다. 그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재희는 2층 방을 둘러봤다. 욕실도 있고 방 한 칸에 거실도 있었지만 부엌은 없다. 재희의 눈은 휴대용 가스버너에 멈췄다.

 

어차피 저는 부엌에서 거의 음식을 해 먹지 않아요. 지금 냉장고도 살림살이도 어차피 아저씨 꺼니까 1층 부엌을 쓰세요. 다니시기 불편하면 거실로 통하지 말고 뒷문으로 왔다갔다 하시면 될 거예요.”

 

안 그래도 불편해서 너 자는 동안 부엌을 사용했다. 허허허

 

정말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은 거 같아요.”

 

강된장은 너 엄마가 잘 만드셨지?”

어떻게 아세요?”

어릴 적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는데.”

아버지하고 엄마도 이 동네에서 친구로 자랐다고 들었어요.”

지금이사 다 떠나고 없지만 옛날에 여긴 제법 사람이 많이 살았제. 저기 농바위있는 거기도 두 집이나 안 살았고. 아마 한 열 댓 가구 살았을 거로. 그 때는 아를 많이 낳을 때라 한 집에 보통 너 다섯. 그 때 너 아부지하고 엄마, 나 젤로 친했다. 동네에 별난 짓은 너 아부지가 제일 많이 하고 다녔다. 독사 새끼를 잡아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놀라게 한적도 있고 여름에는 동네 아들 다 끌고 나가 수영 시합한다고 하다가 너무 멀리까지 나가 죽을 뻔 한 적도 있고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나는 너 아부지 따라다니다 무단이 욕도 많이 묵것다.” 영술은 옛날 이야기를 하자 사투리가 줄줄 나왔다.

아버지 엄마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재희에게 부모는 무표정하고 생활에 쫒기는 무뚝뚝한 표정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영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는 개구쟁이 소년 얘기라 상상되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할매 할배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있노? 어린 시절 없는 사람 어디있고? 나는 내 인생에서 그 때가 젤 좋았구만. 좋은 거 찾아 온 사방을 다 헤메고 젊을 때 돈 벌러 외국도 오가고 했지만 여 맨치로 좋은 데는 없더구나.”

 

재희는 영술이 기억하는 그녀의 부모는 그들이 가장 좋았을 때였겠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술 먹고 소리치고 부수고 였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에게 절절 매며 자신의 인생이라고는 없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

 

재희는 영술의 뒤를 따랐다. 유자를 따 주기로 한 일꾼이 못 온다고 하여 영술은 재희에게 일손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재희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어지간한 농사일은 보고 자라서 할 수 있지만 농사일은 하는 것은 싫었다. 싫은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면 농사꾼은 못 배운 사람들이 하는 무시 받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의식 저 밑에 깔려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도 부모의 삶에서 멀어지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영술이 그녀에게 유자 따는 것을 제안했을 때 저항이 순간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유자 밭도 예전 그대로였다. 나무가 좀 더 굵어지고 키가 커졌을 뿐 누렇게 매달린 유자와 유자의 향기 밭의 풀로 덮인 밭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재희는 고개를 들어 가위의 두 다리에 긴 막대를 연장하여 만들어 놓은 가위로 높은 곳에 있는 유자를 툭툭 끊어 닸다. 처음엔 팔과 목이 아프다가 나중에는 등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누렇게 익은 유자를 커다란 고무 대야에 담았다. 영술은 일하는 중에 눈을 돌려 재희를 바라보았지만 힘들어하는 재희를 보고서도 그만 쉬어라든가 좀 쉬었다 하자.’ 는 말을 하지 않았다.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일을 했다. 재희 또한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손목에까지 통증이 왔지만 그만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후 두시가 되어서야 그들은 점심을 먹었다. 재희가 바닥에 털석 주저앉자 그때서야 영술은 점심 먹어야지.’ 하고는 언제 준비해왔는지 초등학생 실내화 가방 같은 작은 천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찹쌀, 피망, 갉은 쇠고기까지 들어간 동그랗게 말린 주먹밥이었다.

아무 말 없이 주먹밥을 씹었다. 가을 햇살이 노랗게 쌓인 유자 위로 떨어져 눈부셨고 재희의 지친 육체에도 햇살은 쏟아져 들어왔다.

 

고생했다. 이런 일 안 해 보던 사람이라 더 힘들었을긴데.”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일 도우러 여러 번 왔었어요. 물론 좋아하진 않았지만요.”

그래 니 아부지 유자농사로 너 대학 보냈제. 여기 내려올 때마다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이런 시골구석에서 일류대학 다니는 자식 가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캄시로. 너 아부지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더라.”

 

재희는 유자 밭 여기저기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가위로 유자를 따던 모습, 막걸리를 마시던 모습, 경운기에 유자를 실어 나르던 모습이 낚시 줄에 꿰인 것처럼 기억들이 여기저기 끌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일하다가 힘들면 고함을 내지르거나 엄마와 자신을 윽박지르던 모습에 숨죽였고 술이 더 들어가면 밥상이 날아가거나 엄마가 그만하라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사정없이 따귀를 치던 모습이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로 그녀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아저씨는 여기 왜 내려와 계세요. 서울에 집도 있고 가족도 있다고 들었는데.” 재희는 과거의 기억들이 자꾸 끌려져 나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화제를 영술에게 던졌다.

 

가족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 아들 하나 있는 것은 결혼해서 캐나다 갔고 아 엄마도 내 여기 내려올 적에 결혼했다. 소식이야 한 번씩 듣기야 듣지만

 

담담히 말하는 영술의 초연한 눈은 도인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실은 끝을 모를 공허함이 바닥까지 이르러 생의 집착을 놓아버린 자포자기의 심정의 끝 지점에서 만들어 낸 빛이었다. 영술은 중학교를 입학할 무렵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시골에서 농사꾼이나 만들 수 없다며 서울로 올라갔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처음의 포부와는 달리 서울은 시골에서 보다 몇 배로 팍팍하고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보낼 줄 거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술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고 가방공장에서 일을 했다. 땅 팔고 소 팔아 마련한 전셋집도 변변한 직업을 찾지 못하고 세월이 가면서 월세로 옮겨 근근이 살아갔다. 그래도 가방 만드는 기술이 그의 가족을 지탱해 주었다. 그의 꼼꼼한 손길은 시장에서 인정을 받았고 가방공장을 열어 그의 가세는 급속히 불었으며 그의 인생에서 황금기였다. 인생에는 오르막과 평지 내리막이 다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의 내리막은 너무도 가팔랐다. 공장의 난 불은 이미 만들어 놓은 가방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웠다. 영술의 아버지와 엄마도 그 때 난 불로 죽었다. 눈앞에서 가방들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인부들이 모두 공장을 빠져나왔지만 욕심인지 어리석음인지 가방을 지키겠다고 제 때에 나오지 못했다. 영술은 정말 죽으려 했다. 부모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 있을 시간과 자유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재료를 납품한 회사들이 자신들의 돈을 받지 못할 까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왔고 집과 자동차를 모두 압류했다. 죽음만이 그에게 유일한 길이라 느꼈다. 그러나 죽을 자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시집가서 살고 있는 두 동생들에게까지 빚 독촉이 이어졌다.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가방 공장에 취직을 했다. 빚만 갚고 죽으리라. 5년 세월동안 가방을 만들었고 월급은 오롯이 빚을 갚는데 썼다. 가방을 만드는 그 시간동안 그는 부모가 죽은 고통도 빚에 대한 압박도 잊고 몰입했다. 그것이 그를 살렸다. 함께 오랫동안 일했던 다니던 공장의 경리와 결혼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하루 평화로운 일상의 행복을 누렸다. 그에게 다시 공장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을지. 아이에게 더 좋은 집과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공장을 다시 시작했고 바빠졌다. 예전보다 더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경영했다. 모든 것에 신중했으며 예민하게 따졌다. 그의 온 정신은 공장에 있었다. 전과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신경이 곤두섰다. 공장도 그의 집도 점점 커졌고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아졌다. 그는 비싼 선물로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을 채웠다. 그의 아내에게 걸려오는 전화도 나중에’, ‘집에서 얘기하자라는 말로 끊었다.

 

그의 아내는 둘째 아이가 유학을 가자마자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그 때도 영술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났나 보군.’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선물을 사주고 달래면 언제나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으로 여겼다. 그의 아내가 좀 속물적인 여자였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영술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나 지금 그를 떠나는 이유가 모두 같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낮에 있었던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그런 삶을 원했다. 함께 손잡고 인생을 걸어갈 사람을 원했다. 영술은 그런 사람이라 여겨 결혼을 결심했고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 떠난 것이다.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온다. 영술은 아내가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해왔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질 않았으며 선물을 보내고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곧 데리러 갈게 라는 말로 일관했다.

아내가 나 남자 있어. 당신에게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혼만 해줘.’ 할 때까지 그녀가 친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자신이 데리러 가면 언제라도 돌아올 거라 여겼으며 그의 머릿속은 가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동정하는 듯 바라보는 어떤 분노나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이는 아내의 평화로운 눈빛에서 아내는 자신의 손에서 흘러 나가버린 물이며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토록 반짝거리고 자신의 가슴을 꽉 채우고 있던 가방은 한 순간에 빛을 잃었다.

 

재희는 모든 것에 초연한 것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과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인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불쌍한 노인네라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이 내 인생의 그 어느 순간 보다 만족스러우니까, 사람들은 행복을 뭔가를 원하는 것을 얻거나 성취했을 때 기쁨이 넘치는 상태로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길가에 핀 작은 풀꽃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지극히 평화로운 지금이 좋다. 아내가 떠난 것에 대한 고독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 역시 내가 주지 못했던 것을 지금의 남편에게 받으며 행복해 하니 그것으로 족하고 계속 행복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영술은 재희가 빤히 바라보는 눈에 대고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 생각을 한 게 아니고 제 생각을 했어요. 짐작하셨겠지만 이혼했거든요. 남편한테 여자가 생겼어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결혼하고 아이들과 직장이 내 전부였는데 내 부모보다 그의 부모를 더 챙기며 살았어요. 생각해보면 부모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남편에게 더 집착하여 살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전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나 한이 많거든요. 두 분이 제 인생을 꼬아놓은 근본원인이라는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밧줄로 꽁꽁 묶어놓은 것 같은 그 어두운 마음의 뿌리가 나약하고 감정적이며 모든 어려움을 술로 피해버리는 아버지, 그 아버지 눈치나 보며 자식들의 마음은 제대로 들여다 봐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미움, 부모라는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리지 못한 나는 언제나 불안하고 부족하게 느꼈어요. 남편이라는 든든한 땅이라 믿었던 곳에 뿌리 내리고 싶었어요.

직장 생활이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네 번의 제사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남편의 생일 시댁 어른들의 생일도 다 챙겼어요. 아이들한테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어요. 잠을 못 자는 한이 있어도 먹는 거 입는 거 직접 다 챙겼어요.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그럼 나는 뭐냐고? 했더니, 넌 나를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롭게 했어. 죽을 것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의 그 여자가 자신을 살려주었다고. 그 때 이혼을 결심 했어요. 남편의 죽을 것 같았다는 그 말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때까지 쏟아내었던 남편의 대한 원망과 악담 미움들이 한꺼번에 쑥 쓸려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 말을 하는 남편의 얼굴이 너무 절실해 보였고 외로워 죽을 것 같았다는 말에... 저 역시 죽을 것 같이 외로웠거든요. 남편이 바라봐 주기를 내 마음을 들여다 봐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그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돈을 벌고 가족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에만 몰두했죠. 그러면 남편이 좋아할 거라 여겼거든요. 그러나 그는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내게서 더 멀어져만 갔어요. 죽을 것 같이 외로웠어요. 그럴수록 그에 대한 원망이 커졌고 내 안에 생명이 다 죽어버려 가랑잎처럼 바스락 거리는 그 마음 때문에 또 부모님을 원망했어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나서야 제 속에 생명이라고는 자랄 수 없는 사막 같은 마음만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남편은... 남편 말이 맞았어요. 내 속엔 물이 없었어요. 생명이 자랄 수 있는 물이 없었던 거죠. 내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었던 엄마가 미웠어요. 아버지가 미웠어요. 존재만으로 당당한 친구들. 그들은 돈을 벌지도 않아도 시댁에 헌신적이지 않아도 사랑받았어요. 그들은 자기가 가진 그릇 가득 아니 넘치도록 사랑으로 채워졌고 반면 나는 꺼내 쓸게 하나도 없었어요. 항상 허기졌고 바깥에 작은 날씨 변화에도 속까지 떨리도록 살이 아리는 것처럼 추웠어요. 이젠...”

 

재희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고는 말을 멈추었다. 흥분으로 인한 열기와 부끄럼으로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띄고 있었다. 말을 쏟아내 놓고서 당황했다. 꺼내놓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살 던 곳을 떠났고 꺼내놓을 필요가 없는 지금 이곳이 좋아 돌아오기로 작정했었다.

말을 멈춘 재희와 영술은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을 등지고 앉아 지고 있는 해를 마주한 두 사람은 풍경이 되어있었다. 길게 뻗은 햇살이 따 놓은 유자와 초록 잎사귀와 달려 있는 유자에 빛을 쏟아 넣었고 머리를 질끈 묶고 갈색의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와 일 바지 차림의 재희에게 쏟아져 은은한 빛을 더해 주어 성스런 느낌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수문이 열린 것처럼 맹렬히 자신의 얘기를 쏟아낼 때 갖가지 감정이 섞여 혼란스럽게 흔들리던 눈동자는 서서히 안정을 찾고 있었다.

 

010-5152-5462

경남 거제시 제산로 86 거제 더샵 105101.

이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