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이미 이름인 이름

by 성재 posted Feb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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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름인 이름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일어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 위로 젖은 흙냄새가 풍겼다. 엄마가 빠르게 손짓을 하며 침대 옆을 가리켰다. 바닥에 깨진 화분의 파편이 젖은 흙과 뒤엉켜있었다. 질펀한 진한 갈색의 흙이 하얀 바닥을 점점 덮어갔다. 침대 위에서 흙이 잔뜩 묻은 당신이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아니다. 나를 보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눈을 마주보고 있는데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당신이 손을 천천히 내밀어 허공을 휘적거렸다. 엄마는 그 손을 잡아채고 청소 용구함을 가리켰다. 얼른 쓸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 더럽혀진 바닥을 쓸었다. 파편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엄마는 커다란 가방에서 수건과 옷을 꺼내어 당신을 화장실로 데려갔다. 물소리와 엄마의 투덜대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바닥의 흙까지 전부 닦아낸 뒤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창문 앞 의자에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바깥으로 불어나갔다. 흔들리는 머리칼의 끝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한참을 그대로 멈춰 귓가에 신경을 집중했다.

 

다 그렇지 뭐. 소리가 입 안까지 차올라 입술을 다물었다. 다물린 이가 작은 소리를 내며 갈렸다. 그제야 통화를 오래 했다는 게 생각났다. 팔이 아파 손을 내렸다. 흐릿하던 집 안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할머니는 한쪽 다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굽힌 채로 TV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몸이 더 작아보였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고 있니? 허벅지 부근에서 전자음이 덧입혀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엄마랑 통화. 핸드폰을 살짝 들어 흔들어보이곤 다시 얼굴로 가져댔다. 이상한 거 있으면 다시 연락주고. 말해도 지금처럼 달라질게 없는데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건성으로 몇 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레인지가 틱틱틱 불을 붙였다. 냄비를 타고 열기가 올랐다. 환풍기를 켜고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굴로 몰렸던 열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식사 준비가 끝나 할머니와 마주보고 앉았다. 염색이 풀려 머리카락의 뿌리 부분이 희게 변해있었다. 수세미같이 뽀글대던 둥근 머리도 파마기가 빠져 찰랑거렸다. 주름도 조금 깊어진 것 같다. 연희야? 할머니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숟가락을 들려다 그대로 멈추었다. 할머니는 느슨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전화였어? 할머니가 들고 있는 숟가락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여러 번 불러 답하기를 기다린 듯 보였다. 간만에 엄마한테 전화했지. 별말 안했어. 된장이 들어있는 뚝배기로 수저를 가져갔다. 아직도 김이 나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전화 좀 자주 해라. 입 앞에서 숟가락이 멈칫했다. 헛웃음이 샜다. 된장을 입에 넣었다. 혀에 진흙의 식감을 닮은 것이 닿았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뜨거운 느낌이 사라지기도 전에 급하게 휴지를 찾았다. 두어 장 빠르게 뽑아 된장을 뱉어냈다.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너무 짜. 할머니도 된장을 떠 넣었다. 잠시 오물거리다 나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괜찮지 않아? 주변에 거대한 물건이 떨어져 몸이 들썩이듯 몸이 약간 떨렸다. 황급히 뚝배기의 뚜껑을 닫고 식탁 아래로 내렸다.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머니에게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아주머니들이 장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서있었다. 체인이 달린 잠금 쇠를 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체격이 있는 아주머니가 장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교회 이름이 쓰여 있는 전단지였다. 괜찮습니다. 문을 닫는 도중 아주머니의 발이 문틈을 비집었다. 학생, 어른이 말하는데 그러는 거 아니야. 작은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빨리 발 빼세요. 문을 슬쩍 열어주니 손이 들어와 문을 밀었다. 할머니가 일어났다. 문을 연 할머니는 소리를 질러대며 저들을 쫓아냈다. 내가 저길 다니나봐라. 웃으며 물었다. 과연 그분은 저들의 이름을 알고나 있을까. 아마 모두 나의 자식이라 불리며 자신을 잃어가겠지. 할머니는 혀를 차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너무 무섭게 한 거 아니야? 할머니는 대답을 툭툭 내뱉었다. 연희야, 저런 것들은 확실하게 거절 안 하면 더 찾아오고 그래. 할머니의 툴툴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 꼬리가 올라갔다.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왜 멍하게 광고 보고 있어. 리모컨을 가져와 버튼을 눌렀다. 몇 번 누르지 않아 한 프로그램이 나왔다. 할머니가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유일한 프로그램의 재방송이었다. 할머니가 흠칫 떨더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아이고, 지난주에 까먹고 못 봤나보네. 소파 뒤에 몸을 붙이며 핸드폰을 만졌다. 들리는 소리의 중간 중간이 낯익었다. 연희 씨는.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같은 연예인이 화면에 비춰져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찍혔던 사진을 보듯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거 지난주에 같이 봤잖아. 할머니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할머니? 몸을 앞으로 일으켰다. 척추 부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할머니. 조금 힘주어 불렀다. ? . 그제야 대답해주었다. 이거 같이 봤었다고. 입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아아, 그래. 멈춘 화면을 볼 때처럼 답답했다. 둑이 터지듯 많은 생각이 떠밀려와 차올랐다. 머리 안쪽에 풍선이 부풀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할머니. 나랑 이거 봤다니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을 아주 조금 오물거리는 게 다였다. , .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랬나. 아니야. 저건 본 적이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최대한 떠올려보았다. 할머니는 분명 나와 함께 이것을 봤었다. 다시 전화를 해야 하나. 엄마의 번호를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제 기억이 나네. 짧은 감탄사 뒤로 따라붙은 말이었다. 할머니와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다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이름이 아닌 사물을 지칭하듯 부를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방으로 들어온 날카로운 소리에 부엌으로 뛰쳐나갔다. 바닥에 부서진 접시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있었다. 어쩌지. 할머니가 바닥을 바라보며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웅얼거렸다. 치워야겠다. 발을 디뎌 한 발짝 걸었다. 놀라 소리치며 달려갔다. 할머니가 내게 걸어올 때 마다 바닥에 붉은 발자국이 선명해져갔다. 재빨리 뛰어가 할머니를 깨끗한 바닥에 앉혔다. 치워야. 할머니는 내 손을 밀어내며 움직이려 했다. 왜 그래? 좀 가만히 있어! 할머니의 말을 끊으며 발바닥을 확인했다. 붉어진 뒤꿈치 부분에서 박힌 파편이 반짝거렸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머지않아 구급차가 도착했다.

 

너는. 핸드폰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몸 구석구석이 간지러워왔다. 한마디 한마디를 못 먹는 음식처럼 힘겹게 씹어 삼켰다. 그 정도로 심했으면 얘기를 했어야지. 몸속에서 달아오른 열이 입 밖으로 뱉어졌다. 내가 안 했어? 통화 종료를 빠르게 연타했다. 의자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연희야. 붕대를 감은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화장실 가게 도와줄 수 있니?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 미안하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화장실 안에서 울리다시피 들려왔다. 미안하다 연희야.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할머니는 계속 사과를 했다. 괜찮다고 말해도 늘 처음 사과하는 것 같은 침울한 목소리였다. 심장부근이 저릿해지더니 온탕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편안해졌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 잠깐 잠에 들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잠에서 깨니 할머니가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가? 할머니는 말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흐릿하게 남아있던 졸음기가 단번에 달아났다. 할머니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내게 잡혔다. . 종이가 펄럭이듯 약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멀쩡하다. 나 멀쩡해. . 집으로 가자. 복도의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하고 검게 좁혀져갔다. 몸살에 걸린 듯 힘이 쭉 빠졌다. 할머니의 팔을 잡아채 나를 보게 만들었다. 얼굴에 빛이 비춰 피부가 투명하게 비췄다. 주름과 점이 흐릿해졌다. 어려지는 게 아닐까.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 손을 붙잡고 가까스로 시선을 맞췄다. 눈 주변이 붉어져 있었다. 입을 몇 번 열었다 닫았다. 낮게 신음소리를 내다 말했다. 집으로 가자 아가. 순간 모든 행동이 멈췄다. 아주 가까웠던 할머니와의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꼈다. 내가 불린 게 맞나.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정신이 들었다. 할머니를 잘 다독여 병실로 들어가자 진동이 멈추었다. 할머니의 침대 쪽에서 통화 종료 소리가 났다. 어디 갔다 왔어? 정장 차림의 엄마가 달빛을 등지고 서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할머니를 침대에 눕혔다. 할머니가 눈가를 찌푸리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흐릿하게 불린 엄마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조심했어야지. 할머니의 발로 손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그 손이 닿기도 전에 할머니가 발을 뺐다. 낯가리는 어린 아이처럼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뒤쪽으로 움직였다. 엄마의 손이 멈췄다. 왜 그래?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가 숨을 단번에 들이켰다. 다가온 엄마의 얼굴에 달빛이 드리워졌다. 할머니의 몸이 멈췄다. 눈을 멀뚱히 뜨고 눈을 깜빡였다. 몸이 축 처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누웠다. 밤눈이 어두워서 그래. 그림자가 주름에 녹아들어 더욱 깊어졌다. 나와 엄마의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표정이 천천히 종이를 꾸기듯 찌그러지고 있었다. 반대편 빈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등이 평소보다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방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적막한 집안에 나무 울리는 소리만 계속해서 쌓여갔다. 이제 안 가도 된다. 실밥을 확인해야 할 때가 며칠이나 지났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방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밥 먹어야지. 가스레인지가 틱틱거렸다.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찻장이 열리고 여러 가지 조미료가 꺼내졌다. 혹시 놓치지 않을까 싶어 계속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이제까지의 모든 걱정이 괜한 기우로 변해갔다. , 수저 좀 놔줄래. 걸음이 멈췄다. 입안에 수분이 없었다. 바싹 말라있는 침샘에서 간신히 침을 꺼내 삼켰다. 내 이름이 뭐야? 할머니가 국자를 도마 위에 세게 내려놨다. 연희야. 내가 설마 네 이름을 잊겠니? 화난 목소리로 말하곤 냄비 뚜껑을 열었다. 국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 근육이 움직여 웃음 짓는 것이 느껴졌다. 수저를 놓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냄비 안에 들어있는 국물을 바라보았다. 숟가락을 가져다대기 겁났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마쳤다. 할머니가 TV를 틀었다. 또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병원에 있느라 못 봤었지. 할머니는 프로그램의 오프닝을 흥얼거리며 등을 기대고 앉았다. 순간 소파가 나를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따스함이 온 몸을 감쌌다. 눈꺼풀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TV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나 확인해야 하는데. 간만에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 같아. 몸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적막함의 눈치를 보다 잠에 들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가위가 눌린 듯 무거웠다.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겠지. 몸을 고쳐 누웠다. 현관에서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 개로 들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할머니의 소리도 들렸다. 눈을 떴을 때 적막함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 심장 부근에 손을 넣어 휘적거렸다. 심장이 더 깊은 곳에 내려앉으며 큰 소리를 냈다. 반동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없었다. 전화기를 들어 할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쭉 달다가 그대로 고꾸라지며 멈췄다. 핸드폰을 뒤적거리다 엄마의 번호를 발견했다. 통화 버튼 위에 손을 놓고 망설였다. 잠들기 전 TV를 보고나와 함께 웃던, 집을 안전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동네서 할머니가 다닐만한 곳은 전부 돌아다녔다.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노인정에서 장 할머니에게 묻자 고개를 저은 뒤 나를 불렀다. 연희야. 요즘 그 양반 이상하던데, 병원 좀 데려갔다 오지 그래? 굉장히 조심스럽게 권해왔다.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에 쥐가 났다. 아니에요. 저희 할머니 멀쩡하세요. 떨리는 손을 맞잡아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며 시선을 한발 앞에 고정시키고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생각들을 떠올렸다. 뉴스에서 보았던 안 좋은 소식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으로 나타났다. 숨 쉬는 것이 불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코가 찡 하는 가 싶더니 눈앞이 흐릿해졌다.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었다. 엄마의 번호 위로 손을 가져갔다. 엄마의 목소리가 불편하게 떠올랐다. 그 뒤로 흐릿하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중 영화의 한 쓸데없는 장면처럼 교회 전단지를 나눠주던 아줌마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반대로 돌렸다. 교회 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하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문 안에 암울한 세계가 들어서 있는 듯 했다. 오묘한 오르간 소리의 잔여물이 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별일 없지? 그것이 나를 떠밀었다. 문을 열었다. 미지근한 공기와 페인트의 사나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서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누군가의 등이 움직였다. 목소리가 뒤늦게 따라 들어왔다. 중얼거리는 것이 언어의 형태 같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있던 것을 그대로 내뱉는 것 같았다. 할머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내게로 돌려졌다. 눈망울이 교회의 찬란한 빛을 비춰 맑았다. . 목소리에 힘이 풀려 가녀렸다. 왜 여기 있어. 집에 가자. 당신의 팔을 잡고 들어올렸다. 저기요. 저는 괜찮아요. 어두운 방에 갇힌 것처럼 숨쉬기 어려웠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처럼 아득한 거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다시 손을 모으고 기도 중이었다. 교회에 놀러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엄마를 따라 기도드리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의사가 알츠하이머를 선언했을 때, 엄마는 오열을 터뜨렸다. 의사 책상에 놓인 거울에 내 표정이 비췄다. 안 좋은 감정을 한데 버무려 얼굴에 펴 바른 듯 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정신이 들 때마다 울었다. 처음에는 방 밖으로 소리가 전부 새어나올 정도였다. 갈수록 체념한 듯 소리가 작아지더니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이전과 같이 행동했다. 할머니의 큰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다가가기 어려웠다. 편하게 나누던 대화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집에 세 명의 사람이 있는데 두 명이 있을 때 보다 조용해졌다. 집안 곳곳에 새겨져있던 이름이 점점 작아지다 사라져갔다.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저기. 흠칫 놀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내 소매를 당기는 모습에 그대로 멈춰 섰다. 입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려지던 시선이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멈췄다. 묶지 못해 풀어진 단발 머리칼과 작아진 몸. 굽은 등은 초등학생의 책가방으로 바뀌어 보였다. 평소 뿜어내고 있던 분위기도 바뀌어있었다. 다리를 배배꼬며 두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화장실 어디 있어요? 목에 힘을 주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라는 단어가 도저히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할머니라는 말이 점점 흐려졌다.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화장실로 천천히 데려갔다. 숙이고 있는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엄마, 엄마. 점점 소리를 키워갔다. 평소 목소리와 비명의 중간정도에 다다라서야 방에서 엄마가 달려 나왔다. 뭐야, ? 왜 그래? 어깨가 끊어질 듯 꾹 누르고 흔들어댔다. 화장실에서 물건들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투박했다. 엄마가 황급히 문을 열자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당신이 보였다. 바닥에는 비누, 샴푸 통, 칫솔, 양치 컵 등 욕실 용품이 널브러져있었다. 당신의 무릎이 까져있었다. 핏방울이 무릎에 서서히 고이더니 떨어질 듯 매달렸다. 결국 바닥에 떨어져 바둑알 같은 모양이 되었다. 표면에 비춘 주변이 일렁거렸다. 울음이 번졌고, 소리는 점점 커졌다.

 

내 이름이 뭐야?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내게로 향한다. 표정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조금씩 좌우로 흔든다. 여기 싫어.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안는다. 벌벌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불을 머리 끝가지 끌어올린다. 괜찮아.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있다는 걸 느꼈다. 이불을 슬쩍 내리며 꼭 안았다. 엄마가 안으로 들어와 내 뒤로 왔다. 편하게 쉬게 해드려. 할머니의 몸이 더 경직됐다. 누구세요? 느릿한 질문이 엄마에게 닿았다. 엄마는 잠시 할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잠시 멈췄다.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러주다 눈을 크게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할머니를 보았다. 눈꼬리에 물기가 촉촉했다. 나는 엄마 딸. 내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얘는 엄마 손녀. 할머니는 신기한 얘기를 듣는 듯 엄마와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 부근까지 물에 잠긴 듯 먹먹했다. , 집에 가서 짐 좀 챙겨와. 그 말이 내게 향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한참 걸렸다. 친구 대신 일어나는 것 같았다. 동네에 도착하기 전 까지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망원경을 눈에 대고 낯선 장소를 발견하곤, 그 장소를 거니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내가 있는 곳과 내가 보는 곳의 장소 중간을 도려내 그곳에 TV화면을 끼워 넣어 바라보았다. 동네서부터 모든 것이 지근거리에서 가깝게 다가왔다. 어려서부터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라 거리를 좁혀왔다.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수면에서 물장구를 치듯 깨졌다. 앞에 서있던 기억도 깨진 파편을 맞아 점점 부서져갔다.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잡생각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을 그만 두고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에도 약간의 거리감이 생겨있었다. 미세하게 늘어나는 것 같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현관에 도착하니 허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밀린 숨이 가쁘게 쉬어졌다. 우리 집이 맞나. 생각을 깊게 할수록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어두운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온다면. 그는 이 집의 주인으로 보인다. 내게 물어온다. 누구세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버스와 함께 들고 있는 쇼핑백이 움직인다. 생필품과 옷가지만 들어있는데도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 팔이 당겼다. 아직 열 정거장 이상 남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자리가 나지 않았다. 일곱 정거장으로 줄어들었을 때 누군가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숙이니 한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짐 이리 줘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있는 상태로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웃으며 괜찮다고 했지만 빼앗듯 짐을 맡아주었다. 감사인사를 하니 말문이 트였다. 노인은 내게 자식들 자랑을 했다. 어릴 적 이야기부터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쉴 틈 없이 들었다. 자신의 손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겹쳐보였다.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입에서 나왔을 내 이름을 상상해보았다. 연희는. 그 부분만 계속해서 반복해 되뇌었다. 할머니와 지내던 집에서의 풍경이 뒤따라 떠올랐다. 둘이서 차려먹던 밥. 다 먹고 보던 TV프로그램. 모든 것이 내 이름 안으로 녹아들었다. 순간 그것을 떠올리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발이 엇갈린 듯 버벅거렸다. 글자의 모양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흘러나갔다. 무겁던 이름이 가벼워져 살짝 불어온 바람에도 흔들렸다. 내 머리 위에 떠있던 이름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가씨? 노인이 괜찮은가 물었다. 아가씨, 아가씨. 그게 아닌데. 제 이름은 연희에요. 조용히 말했다. 노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쁜 이름이네. 연희라고? 칠판 긁는 소리를 들은 듯 몸이 경직됐다. 남의 물건을 쥐고 그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그것에 불린 이름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깃털로 볼을 간지럽혀 내려가는 느낌에 손을 가져다 대니 물기가 묻어났다. 아니에요. 짐을 돌려받아 하차 벨을 눌렀다. 병원까지 한 정거장이 남아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곧바로 들어갔다. 엄마가 울며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은 잔뜩 겁먹은 채로 침을 흘리며 울었다. 손에는 반쯤 쏟아낸 죽 용기가 들려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퍼먹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뭘 보고만 있어. 나를 발견한 엄마가 한 말이었다. 왜 나를 보고 혼잣말을 할까. 그것을 흘겨보고 당신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손이 서서히 멈춰갔다. 주변의 소리가 사라지고 나와 당신만이 남았다. 내 이름이 뭐야? 당신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야. 가슴이 턱 막혔다. 말하려고 연 입에서 공기만 수차례 새어나갔다. 할머니 손녀 연희.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계속해서 반복했다. 당신의 눈이 점차 할머니의 눈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내 이름을 따라 말했다. 아주 일부분, 녹았던 것들이 다시금 단어 안으로 들어와 굳었다. 당신도 할머니의 모습을 조금씩 내보였다. , 비켜봐. 누군가 나를 밀쳐냈다. 내 이름이 들어설 자리에 다른 단어가 들어섰다. 뒤로 살짝 밀쳐지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엄마가 당신의 몸에 묻은 죽을 닦아내었다. 나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은 내가 눈을 마주치지 않자 엄마의 팔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향긋한 빨래 향기가 맡아졌다. 가방이 흔들릴 때마다 향기가 퍼져 나와 택시 안에 차올랐다. 병실 앞에 다다랐을 때 남의 병실이 아닐까 싶어 앞을 서성였다. 앞에 붙어있는 이름표도,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바라보고 떠올렸다. 앞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안 들어가세요? 병실로 들어가던 간호사였다. 할 게 있어서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스치듯 지나간 간호사의 하얀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텅 비어있는 이름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빈껍데기 같은 연희라는 이름. 내 가슴에 차고 있는 이름표에 집어넣을 수 없었다.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왔다.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간호사가 나가고 한참 뒤, 안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 왔으면 빨리 들어와. 가득 쌓아뒀던 화를 터치는 듯 큰 목소리였다. 이름표에 얘 라는 단어가 묻었다. 제 자리처럼 보여 내버려 두었다.

 

집 좀 다녀올게. 얼굴에 그림자가 진 엄마가 자신의 짐을 챙겼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병실에서 나가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따듯한 계열의 색깔들이 창문을 넘어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당신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멍하니 TV를 보는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이름이 뭐야? 당신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당신의 소매를 툭툭 잡아 끌었다. 내 이름이 뭐냐니까. 당신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감흥 없는, 그저 보는 것이 전부인 눈.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 하면 기억해 줄 거야. 나는. 물기 가득한 목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입을 벌린 상태에서 움찔거렸다. 당신은 벌려진 나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배어나와 고개와 함께 아래로 향했다. 머릿속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나의 이름을 찾았다. 머릿속은 잔뜩 어질러져 있어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담지 못한 입이 바닥을 향해 뻐끔거렸다. 당신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 이름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당신이 보인다. 입을 다물고 단어를 삼켰다. 아니다. 역시 이건 내 이름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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