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소녀
이른 아침, 나는 원해서든 원해서가 아니든 하루하루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집어삼켰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니?"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누군지 알았다면 나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 새하얗고 답답한 천장과 덩그러니 놓여있는 침대 두 개 하나는 나의 것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작은 냉장고와 서랍, 텔레비전 이곳은 그저 지극히 평범한 병실이다.
또 아까부터 내 손을 잡고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느냐고 묻는 여자는 나의 어머니다. 몇 시간 전부터 이러고 있었으니 결국 귀찮아진 나는 생각이 없다는 듯 차가운 시선을 꽃병에 담긴 꽃잎을 응시했고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는 꽉 쥐던 내 손을 놓아버리곤 병실을 나갔다.
누군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기억에 없는 척일뿐 나는 어머니와 우리의 집 그리고 그 남자까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 없는 척일뿐이라니, 누군가 들으면 불효 자식이구나! 라며 타박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은 내 모든 이야기를 아는 게 아니니깐. 서랍 제일 위쪽 칸을 열어 가위를 꺼내 들어 어머니가 사 온 꽃의 줄기를 뚝 하고 잘랐다.
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더니 긴 머리의 소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희한한 취미를 가지고 있네?"
가위를 든 내 오른손을 주시하던 소녀는 싱긋 웃으며 예상치 못한 대사를 쳤다. 그에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 침착하게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소녀를 자연스럽게 무시하곤 가위를 다시 서랍 속으로 집어넣었다.
"무시당하는 거 내 취미는 아닌데"
소녀의 구시렁거림마저 무시하자 소녀는 머쓱한 듯 재빨리 자신의 짐이 담긴 것 같은 작은 캐리어를 끌고는 내 바로 옆 침대에 조심히 앉았다. 딱히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지만, 소녀는 아마 앞으로 나와 병실을 같이 쓰게 될 환자인 듯하다. 눈동자를 요리조리 돌리며 병실을 둘러보던 소녀는 머지않아 심심한 듯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가 커지자 나는 주의를 시키는 듯한 투로 말을 걸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닐 텐데 콧노래가 너무 큰 거 아닌가?"
"어머, 귀가 안 들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환자가 아니라면 나가지그래"
"환자인데?"
작은 캐리어를 발로 툭툭 차며 다시 한 번 정말 자신이 나와 같은 병실을 쓸 환자라는 것을 증명시켜주었다. 딱히 현실을 직시 당하고는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소녀가 나를 귀를 듣지 못 하는 환자로 생각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쳐서 넘어갔으나 대화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그 콧노래 소리는 넘어갈 수 없었기에 다시 한 번 주의를 시켰다.
“혼자 있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앞으로 우리 같이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텐데 뭘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소녀가 하는 말의 의미는 몰랐지만, 일단은 내 기분대로 눈살을 찡그렸다. 그러자 소녀는 농담이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웃음조차도 이제는 기분이 나빠 찡그린 눈살을 필 수는 없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한 소녀는 눈치 없이 나의 어머니에 관해 물어봤다.
“밖에 저분 너희 어머니시니?”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낄 때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내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아주 잘 활용하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소녀는 나를 보던 시선을 줄기와 꽃이 분리된 나의 작품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눈치 없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까 나의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했다는 둥 너무 재밌었다는 둥 저 꽃이랑 꽃병 어머니가 주신 거라는 걸 다 안다는 둥 전부 아는 척하며 평소 나와 어머니 사이가 좋을 것 같이 만드는 근본도 없는 이야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계속 들어주자니 역겨워 소녀의 말을 뚝 자르고는 이야기했다.
“밖에 저 여자가 누군지 나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나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며 혹시 왜 이 병실에 있느냐며 물어오는 소녀에게도 살면서 있었던 모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하였다. 내가 스스로 만든 기억상실증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을 거니깐. 그렇다면 이 병실에 영원히 있지는 않겠네? 라며 물어오는 소녀에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소녀 말대로 단순한 기억상실이니 퇴원하여 차차 회복해도 괜찮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의사 선생님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안정을 취하고 싶다고 이야기해뒀다. 소녀에게도 간단히 잘 구슬려 이야기를 해주자 그때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소녀의 부모로 보이는 두 분이 들어와 소녀를 데리고 나갔다. 소녀가 나가자마자 다시 조용해진 병실에는 소녀의 캐리어만이 소녀가 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소녀가 다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병원복을 입은 걸 보니 제법 환자 느낌이 물씬 났다. 사실상 소녀의 혈색 좋은 얼굴과 끝에만 파마가 들어간 머릿결 좋은 긴 머리는 환자라고 믿어지지는 않는 인상이었다.
병원복을 입은 소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는 자신의 침대에 앉자마자 다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얼마나 있었어?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응, 가고 싶지 않아”
“어째서?”
“난 우리 집 기억 못 해”
그러자 ‘아’하고 이해를 한 소녀는 갑자기 자기 집 자랑을 해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강아지도 있고 고양이도! 물론 넓은 마당에는 연못에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2층에는 별을 볼 수 있는 관측기도 있어서 그리고…’ 계속 조잘거리며 집 자랑을 하는 소녀의 말을 100중에 70 정도는 흘려들었다. 대충 들어보니 소녀는 얼굴과 잘 어울리게 잘 사는 집안의 소녀였다. 꽤 귀중하게 보살펴 키워주셨는데 병을 앓아버린 불효 자식이라며 머쓱한 듯 말하는 소녀의 말에 나의 양심이 찔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양심이 찔렸다고 하면 그렇게 조잘거리는 소녀에 비해 나는 소녀의 말을 대충 듣기만 할 뿐 말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계속 소녀를 조잘거리게 내버려 둔다면 내 양심이 조금 더 찔려 할까 봐 조심스레 소녀의 말을 끊어 먹고는 소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병은 왜 걸렸어?”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이 병실과 어울릴 법한 대화 주제였다. 그 물음에 소녀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 또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내가 날 너무 괴롭혔대”
“괴롭혔다니?”
“안 좋은 쪽의 약?”
“쓸데없는 걸 물어본 기분이네”
“그렇담 너도 그 쓸데없는 기억상실에 걸린 이유 좀 알려줄래?”
마치 자기의 병을 내가 무시라도 했다는 듯의 투로 나에게 물어오는 소녀에게 싫다고 단칼에 거절하자 심술 난 얼굴을 하고는 왜 자기만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따지듯 나에게 말했고 나는 ‘넌 저기 저 여자랑 친하니까’라며 아직도 병실 밖에 있는 나의 어머니를 지목하듯 병실 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소녀는 이해가 안 된다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기에 소녀의 눈초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나는 잠시 피곤한 눈을 감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뜨자 밤이라는 걸 알리는 창밖의 어두컴컴한 배경이 눈에 띄었다. 눈을 돌려보니 옆 침대에서 소녀가 열심히 뜨개질하며 오르골 하나를 틀어놓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고 슬쩍 뒤척이는 척 몸을 소녀 쪽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소녀는 내가 깬 걸 눈치채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열심히 뜨개질에 집중하는 소녀를 실눈을 뜨고 지켜보던 나는 눈을 천천히 뜨고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자는 줄 알던 내가 말을 걸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망하기 전에 그만둬”
“뭐야!”
“그거, 받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안쓰럽다”
‘혹시 나라면 미리 사양할게’라며 농담을 함께 끼얹어주자 ‘꿈 깨’라며 틀어놓은 오르골을 끄고는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는 소녀의 얼굴을 무시하곤 고개를 돌려 꽃병을 쳐다보았다. 꽃병엔 내가 만들어 놨던 작품은 사라지고 새로운 꽃이 꽂혀있었다. 순간 의아한 듯이 소녀에게 꽃에 관해 물어보자 소녀는 나의 어머니가 다녀갔다며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보고는 꽃을 바꿔주고 나가셨다고 했다. 물론 꽃이 잘려져 있었던 건 자기가 잘 포장해 거짓말하였다고 하는 말과 함께.
충동적으로 다시 꽃을 자르려 가위를 찾는 나에게 소녀는 그런 취미는 좋지 않다며 가위는 자기가 다른 곳으로 치워놨다고 말하였다. 침착하게 말을 하는 소녀와 달리 나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로 조급한 듯이 소녀에게 자르지 못하게 할 거면 내 눈앞에서 꽃을 치워버리라 말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소녀는 그 상황에서 나에게 제안을 했다.
“그렇담 네가 숨기는 게 무엇인지 나한테 말해”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 소녀에게 화를 내봤자 쓸데없이 내 감정만 소모할 것이란 걸 잘 알았기에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꽃병을 손에 쥐고 소녀는 잠시 병실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다시 병실에 들어온 소녀에게 나는 물었다.
“어디다 버렸어?”
“버리기엔 꽃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간호사분에게 최대한 우리 병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잘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쓸데없는 짓을…”
소녀는 나에게 꽃은 잘못이 없다며 타박하였고 곧장 숨기는 게 무엇인지 알려달라며 생각보단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기에는 소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그러질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다시 사탕을 뺏어 먹는 느낌이랄까.
나는 결국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길고 긴 이야기를 꺼내었다. 먼저 제일 처음으로 내가 기억이 없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지를 것 같은 소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제발 조용히 들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노력해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소녀의 입에서 손을 떼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랑 친한 그 여자는 우리 어머니가 맞아, 그러나 아버지는 본래 아버지가 아니고 뻔한 줄거리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가정폭력 상의 이야기가 맞아”
말이 길어지기 전에 간단한 설명으로 끝나버린 나의 이야기에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소녀의 표정에는 불쌍함, 동정 따위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표정도 아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소녀는 나를 계속 주시하였고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소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나약한 이야기지?, 그거 하나 버티지 못해서 일부러 사고를 내고 일부러 기억이 없는 척을 하다니 말이야.”
고개를 돌린 시선이 창밖의 달을 향하고 있을 때쯤 소녀는 인기척 없이 나에게로 다가와 자신의 팔로 나를 감싸 안았고 자연스레 나의 상체가 소녀의 쪽으로 기울 때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녀의 시선과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동정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체온이 말해주었다. 신기했던 것인지 그리웠던 것인지 그 따스한 체온을 밀어낼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말없이 한동안 소녀의 품에 잠겨있었다. 어쩌면 이 밤에 우리는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은 눈을 떠 보니 창밖은 다시 환하였고 쌀쌀한 날씨가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잠들어버렸었구나’라며 나는 작게 중얼거린 뒤 시선을 소녀에게로 옮겼고 소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히 숨소리를 내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일어나 조금 흐트러진 소녀의 이불을 바로잡아주고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 후 머지않아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깨어있었네”
정신을 차리곤 먼저 말을 거는 소녀에게 ‘응’이라며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간단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사실 어제는 내가 사람 위로하는 걸 잘 못 해서 충동적으로…’라며 말을 더듬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면 소녀는 어색함을 예상했겠지만 나는 소녀의 위로가 받고 싶어 한 소리도 아니었고 사실상 그녀의 이상한 거래에 말려들어 한 이야기였기에 어쩜 그 거래에서 뭔가를 더 받아버린 느낌이라고 치면 되는 것이었다.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렸으니 오늘 밤은 내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
명랑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끊기자 나의 시선은 바로 소녀에게로 향했고 소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소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놀란 나는 병실을 뛰쳐나가 의사 선생님을 찾아다녔고 그 모습을 보던 간호사분이 의사 선생님을 데려왔고 나는 재빨리 앞장서 병실로 향해 다시 뛰었다.
나는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병실 문을 세게 열었고 영문을 모르겠지만, 소녀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얼빠져있는 나를 뒤로한 채 소녀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들에 의해서 응급실로 옮겨졌다.
나의 간절한 기도와는 달리 소녀는 생각보다 늦게 깨어났다. 왜냐하면, 소녀가 쓰러진 이후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어쨌든 잠 못 드는 새벽에 소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나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왔구나!”
한껏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반기는 소녀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야위어 보였다. ‘난리 피우지 말고 가만히 누워있어’라며 일어나려는 소녀를 타박하자 소녀는 미안은 했던 것인지 얌전히 다시 침대에 등을 붙여 누웠다. 그 순수하고 기쁜 표정은 소녀의 얼굴에서 감출 새 없이 묻어났지만 말이다.
“미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말해줄 걸 그랬나 봐. 많이 놀랐어?”
“뭘 빨리 말해줘? 네가 달고 사는 그 이상한 병?”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자 소녀의 미소가 잠시 줄어들었다. 말투는 그랬지만 소녀에게 화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어쩌면 이틀간 내 옆자리가 비었다는 쓸쓸함의 투정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녀의 병도 이미 의사 선생님과 소녀의 부모님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부모님은 바쁜 관계로 항상 오셔도 일찍 가시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전해 들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있었던 소녀의 아픔을 잘 나타냈고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새롭게 알았던 것은 그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너 그렇게 따뜻하고도 잘난 집에서 살면서 대체 왜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병을 자초해서 만든 거야?”
소녀는 누워있던 몸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웃음기 사라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병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이미 1년 반 정도가 지났어. 그리고 난 그때 당시 더 일찍 입원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어겼고 반년 정도 남은 지금에서야 입원한 거야 그런데 이제 와 보니 하늘은 내 시간을 늘려주기는커녕 더 뺏어가고 있는 것 같네”
“그래서 대체 이유가 뭐냐는 말이야.”
“외로웠어, 네 말대로 따뜻하고 잘 사는 집안이 맞아 그런데 그 속에서 나는 항상 바쁜 부모님들을 봐야 했고 나도 다른 친구들과 놀고 싶었어. 하지만 어쩌면 그 아이들의 세계에서 나는 장난감이었는지도 몰라…”
소녀가 작은 소리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소녀의 아픔의 이제 와서 터진 것이라 생각하고는 나는 내가 소녀에게 모든 걸 털어놨던 그때를 생각하며 그를 보답이라도 하듯이 소녀를 조심히 감싸 안았다. 어쩌면 소녀가 느낀 학교의 세계는 내가 느낀 우리 집의 환경과 비슷할 것이다. 나는 그때야 소녀가 나를 감싸 안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역시 단순한 동정심이 아닌 나의 그때 그 아픔을 알아서가 맞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눈에는 네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겠지. 그 아이들은 널 자기들보다 잘나고 멋진 집안에서 자란 부잣집 소녀로밖에 안 봤을 테니까”
그렇다. 그 어린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나 따뜻하고도 활발하고 명랑한 소녀의 모습을 그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라는 꼬리표로 가려놓고 봐도 못 본 척했을 테니 말이다.
소녀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 때쯤 나는 소녀를 감싸던 손을 제자리로 해 내 품에서 소녀를 떼어내 줬고 소녀는 고개를 들어 조금은 진정된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로 비추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마지막 소원을 네가 들어줬으면 해”
“마지막 소원?”
“가장 밝은 별이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가 줘”
소녀의 말끝으로 소녀의 부모님이 병원으로 도착하셨고 나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로 돌아온 후 소녀가 말 한 ‘가장 밝은 별이 있는 곳’을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소녀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기에 급한 마음에 병실 한쪽에 배치된 비상용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갑자기 네가 전화라니…, 그것도 이런 늦은 시각에…”
“필요한 게 생겨서요. 저번에 알려주신 번호로 걸었는데, 그분 맞으신가요?”
“…그래그래, 말해보렴”
“제가 쓰던 노트북이요. 그것만 가져와 주세요.”
“그래, 알겠다. 늦었으니 얼른 눈 붙이렴”
“네, 전 기억도 못 하는 분인데 항상 챙겨주시느라 수고하시네요.”
“……”
삭막한 대화 속 그 여자는 어머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어머니와의 통화는 짧고 간단하고 거짓말투성이였지만,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 남자의 나를 향한 말투와 욕설은 여전하였다. ‘전화 한 번 하는데 헛구역질이 나오려 하는군.’이라며 나는 상황에 알맞은 대사를 혼자 중얼거리고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다.
다음 날 점심, 늦게 잠든 탓인지 역시 조금은 늦게 깨어났다. 옆 침대는 여전히 비어있었지만, 오늘부터는 저녁마다 소녀를 찾아가 이곳을 탈출할 계획을 짜봐야겠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만들며 소녀를 보러 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소녀도 그것이 마지막 일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커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발견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정말 이른 아침 다녀가셨던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을 황급히 접어둔 뒤 나는 노트북을 켜고는 재빨리 검색에 집중하였다.
“가장 밝은 별이 있는 곳…”
역시 바보처럼 검색창에 ‘가장 밝은 별이 있는 곳’이라고 그대로 검색한 덕분에 나는 딱히 나와 상관없는 우주에 관한 지식만 잔뜩 읽게 되었다. 장소를 찾고 싶었던 것인데 역시 직접 나서서 찾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
병실의 긴 정적과 나의 복잡한 생각을 깨고 들어온 것은 명랑한 말투의 소녀도 아닌 근무하시던 간호사분이셨다. 지나치며 한 번씩은 본 것 같은 얼굴의 간호사,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꽃병과 꽃이 들려져 있었다. ‘그 꽃은…’이라며 떨리는 눈으로 입을 열자 그녀는 소녀의 부탁이 있었다며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다행히도 소녀라는 말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그녀에게 선뜻 먼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다시 이 꽃을 너에게 전해 주라고 했어. 아, 그리고 숨겨놓은 가위의 위치도 알려주라고…”
“이유는요?”
“…자신이 죽는 날 이 꽃을 잘라주길 원한다고 했어.”
나는 그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듯 차가운 본래의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 다 안다는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꽃병을 서랍 위에 올려놓은 후 다시 병실을 나갔고 여전한 듯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나는 소녀의 명랑한 말투를 상상하다 얼마 되지 않아 생각보다는 일찍 소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녀는 여전히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내 생각과 딱 맞는 명랑한 말투로 나를 반겨왔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는 것인지 어제보다는 덜 야윈 소녀의 얼굴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소녀의 앞에서 입꼬리를 올려 소녀의 미소를 따라 라도 하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소녀가 화들짝 놀라 커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람들은 바보야, 이렇게 예쁜 미소를 짓는 소년의 얼굴을 한 번도 보려고 노력을 안 했으니 말이야.”
“너는 마치 노력한 것처럼 말하네?”
“그거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될 만한 농담인걸”
누군가 본다면 정말 놀라울 정도의 광경인 것이 사실이다. 사실 나도 조금은 놀랍다. 내가 다른 사람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다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지금까지의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연 것이겠지 싶다.
그렇게 서로 신기할 정도로 조잘거리던 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을 지던 밖은 이미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때야 나는 본론을 꺼내어 이야기하였다.
“네가 말했던 마지막 소원…”
“응”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나 자신도 감탄사를 연발했던 그 한순간의 생각은 나에게도 비밀로 하고 싶을 정도로 근사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냐고 연신 물어오는 그녀에게 지금은 비밀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척을 하였고 이내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치사하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일 거야”
“그래서 그게 대체 뭐야?”
“음, 근사한 선물이니 비밀리에 줄 거야. 기대나 해”
“치사해”
계속해서 물어오는 소녀에게 ‘힌트를 주자면 별은 그 별만 있는 게 아니야’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자 소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고 나는 그런 소녀의 반응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소녀는 약 오른다며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가 생각보다는 귀여워 살짝 웃어 보인 나였지만 소녀는 그것마저 놀린다는 거로 인식했는지 평소보다 더 삐지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보기에도 이런 우리는 그저 평범한 소년과 소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나와의 대화 속에서 곤히 잠이 들었고 나도 그런 소녀에게 가보겠다는 인사를 하듯 흐트러진 소녀의 이불을 다시 정리해주고는 병실로 돌아와서는 소녀에게 보여 줄 그 근사하고도 멋있을 별들의 풍경을 상상했다. 그러다 문득 소녀가 다시 전해 준 꽃과 가위의 의미를 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조금의 아쉬움을 가지고 나서야 나는 오지 않는 잠을 겨우겨우 청할 수 있었다.
조금은 뒤척였던 탓일까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버린 나는 해가 뜨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방이 유리창이었다면 더 멋진 풍경일 텐데 말이다. 조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려는 찰나 나는 옆 침대에서 곤히 잠든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놀란 나는 소녀를 흔들어보았다. 그러자 ‘아, 왜 그래…“라며 뒤척이며 말하는 소녀, 나는 소녀에게 왜 여기 있느냐며 계속해서 물었다.
“상태가 괜찮아져서…”
“정말 괜찮대?”
“그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졸린 듯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소녀에게 계속해 물은 것이 미안해진 나는 소녀를 토닥여주었고 소녀는 언제 잠에서 깨어났느냐는 듯 다시 잠에 빠졌다. 몇 분간 환자 같지 않은 소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소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라도 소녀의 흔적을 익숙히 새겨둔다면 어쩜 꿈에서라도 만날까 하는 어린아이의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일까 어느덧 해는 떴고 창밖은 언제나처럼 환했다. 소녀 또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힘껏 펴고 있었다. 하품까지 하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코웃음을 쳤더니 그 소리를 재빠르게 들은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나를 향해 따가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손을 뻗어 소녀의 볼을 꾹 눌렀고 소녀의 볼에 있던 바람은 빠지기 시작했다.
“볼에 바람 빼”
“무슨 상관이람”
“오늘 스타일은 새침인가?”
“흥, 별이나 보여 달란 말이야.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는”
“음…, 그럼 오늘 밤에 갈까?”
“정말?”
우리의 대화에는 여전히 마지막이란 단어는 없었지만, 우리는 짐작 할 수 있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밤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밤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만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서로를 동정과 슬픔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늘 밤 탈출을 위한 방법만을 서로 이야기 할 뿐.
우리는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점심까지 한마디의 말을 더 하면 더 하였지 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고 긴 대화 속에서 서로의 감정과 표현을 더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온전히 계속 우리만의 시간을 가졌다.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었는데”
“뭔데?”
“그 꽃…, 왜 나한테 잘라달라고 부탁했어?”
“아, 그거 말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를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잠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은 뒤에 그 꽃을 자르면 이제 영원히 너희 집안사람들과 안녕이라는 의미야”
“그게 무슨 소리야?”
“부탁이야, 내가 죽은 뒤 우리 집안에서 자라줘. 널 동정해서도 널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야…. 단지 난 네가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손길을 느꼈으면 해”
“그래서 나보고 너희 집안에 들어가 살라는 거야?”
“맞아”
“…미안,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네가 떠나면 이 병실에 머물 거야”
“…왜?”
이유는 간단했다. 소녀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소녀의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나는 소녀를 타이르며 우리 집안과 연을 끊는 것까지는 합의를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부모님이 가끔 병실에 들려 나를 챙겨 주시겠다는 것까지 말이다.
“벌써 해가 지려고 하네, 나갈 준비 해야겠다”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말고 옷이나 단단히 껴입어 밖에 추워”
나는 마지막으로 소녀의 겉옷을 정리해주고는 조용히 병실 문을 열어 주위를 살피고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는 선에서의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를 이용해 우리는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허술한 경비에 놀랐지만, 오늘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고 소녀는 기분이 좋은 듯 그 차디찬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바람이 상쾌한 바람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따사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나는 넋을 놓고 보았다. 소녀가 싱긋 웃으며 내 쪽을 바라보기 전까지 말이다.
“얼른 날 근사하고 멋진 그곳으로 데려가 줘”
“…가자”
“추워?, 얼굴이 아주 붉은데?”
소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나는 앞장서 길을 걸어나갔다. 자신을 앞질러 먼저 가는 나를 소녀는 재빠르게 뒤쫓아 오더니 차가운 내 손을 꼭 쥐었다. 조금은 놀란 듯 소녀를 보았더니 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고 나는 그런 소녀의 손을 더 꽉 잡고는 걸음을 조금 빨리하였다. 혹여나 이 시간을 즐기겠다는 욕심으로 천천히 간다면 소녀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었기 때문이다.
“이 근처 잔디밭이야.”
“얼마나 멋있는 풍경이면 그렇게 자신만만해?”
“보면 알 거야, 이 나무를 지나가면…”
“…우와!”
커다랗고도 늙은 나무를 지나쳐 넓디넓은 잔디밭 위에 우리는 우두커니 섰다. 도착한 시간을 맞춰 해를 삼켜 어둡고 파랗게 변한 하늘에는 선명하고도 반짝이는 별들이, 잔디밭의 땅과 우리의 주변에는 예쁜 빛을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같은 그 아름답고도 근사하고 멋진 풍경에 우리는 감탄사와 함께 넋을 놓았고 이내 소녀는 잔디밭에 앉아 그 풍경들은 눈에 담고 있었다. 소녀의 뜻을 따라 나 역시 소녀의 옆에 앉아 그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평소보다 더 환한 소녀의 미소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있던 소녀가 갑자기 일어나서는 여전히도 명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고마워!’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소녀에 맞춰 잔디를 털고 일어나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두 눈동자는 흔들렸다.
“……”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데”
멋쩍은 웃음의 뒤로 이미 식은땀에 젖어있는 소녀의 얼굴에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렸고, 소녀는 안간힘을 써가며 균형을 유지하고 미소를 숨기지 않고 목소리를 더 명랑하게 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앞에서 소녀는 나를 보며 혼자서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은 힘겨운 목소리가 섞인 소녀의 말들에 나는 멍하니 서서 소녀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처음의 너는 무섭고 어두컴컴한 어둠 같았고 냉정한 소년이었는데”
“……”
“지금의 너는…”
“……”
“너는… 내 하나뿐인 빛이야….”
“…좋아해”
‘마지막은 너의 품이라 다행이야’라는 말의 끝으로 소녀는 힘겹게 두 팔을 활짝 벌렸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듯 나에게로 쓰러져 나를 감싸 안았다. 나 역시 두 팔로 소녀를 꽉 감싸 안았고 소녀는 마지막 나의 말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조용하게 아주 조용하게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미소를 보이며 나의 품에서 천천히 식어갔다.
짐작한 이별은 생각보다 빨랐고 너무나도 슬펐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힘없는 소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소녀의 체온이라도 빼앗기기 싫었던 나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녀가 떠난 뒤 마치 소녀를 배웅이라도 해주는 듯 하늘의 별과 반딧불이들은 더 아름답고 선명하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 소녀라는 듯 여전히 고운 소녀의 얼굴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별보다 더 반짝이던 소녀의 눈을,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던 소녀의 그 얼굴을, 항상 밝았던 소녀의 그 예쁜 미소를 조금 더 눈에 담을 걸 그랬다. 그 명랑하고 활기차고도 어여쁜 목소리를 귀에 더 담을 걸 그랬다.’ 나는 조금은 늦은 후회를 하며 그렇게 소녀를 별들의 품으로 보냈다.
그렇게 소녀를 보내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때 소녀와 약속했던 것처럼 소녀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가며 아직도 홀로 병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 꽃은 소녀의 부탁대로 잘라내었고 그 이후로 나는 우리 가족과의 볼 일이 없어졌다. 다만 조금 슬펐던 건 자르고 난 후 꽃의 모습이 소녀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려왔었다. 차라리 시들어서 꺾였더라면 살건 다 살고 가는 것이지만 활짝 피어 아름다울 때 꺾였다는 것은 아직 못 살아 본 인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기에 자꾸만 그때의 아름다웠던 소녀를 생각나게 하였다.
병실은 소녀가 떠난 이후로 누가 있었느냐는 듯 한적하고 조용하고 평온하였다. 그러나 소녀가 있었던 흔적들은 아직도 이 병실에 남아있다. 소녀의 부모님이 날 위해 일부러 치우시지 않았던 것이었고, 이곳에는 소녀가 뜨던 목도리와 소녀가 듣던 오르골 등등…. 소녀의 흔적들은 그대로였다.
소녀는 그 날 이후 내 꿈에도 자주 나타났다. 그것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의 소녀는 그 날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꿈속에서 나와 장난치기는 물론 대화하기 바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면 비어있는 옆 침대의 공허함과 소녀를 볼 수 없는 슬픔에 젖어 가끔 울기도 한다. 이제는 그 꿈속의 소녀도 차차 사라져 간다. 당연히 소녀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될 테니 가지 말라는 투정은 부릴 수 없었다. 나라는 이유로 소녀를 떠나지 못하게 잡기도 싫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생각은 아니다. 차차 조용히 이곳을 떠날 준비도 해야겠고 사회에 홀로서기도 해봐야 한다. 물론 그 홀로서기의 지원도 자신들이 해주겠다고 강력히 밀어붙이시는 소녀의 부모님을 막을 순 없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소녀는 내 일상을 바꿔 준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장본인에게 떳떳할 방법은 더 노력하여 밝은 사람이 되는 것과 소녀를 잊지 않는 것이겠다. 생각한다.
나를 두고 떠난 소녀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했다면 내가 나쁜 것이다. 힘들다면 힘들지만 그래도 소녀가 함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더 노력해야 하고 더 힘을 내야 한다. 이별을 짐작했기에 덜 아팠다면 덜 아팠고 더 아팠다면 더 아팠던 우리의 시간이 헛되이 되지 않게 나는 영원히 소녀를 마음에 품고 살 것이다. 이제 꿈에서도 사라질 소녀를 먼 훗날 만난다면 웃으면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말이다.
부디 그 날에는 이별이란 단어를 끌어안은 채 보았던 그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이란 단어를 끌어안은 채 볼 수 있기를 나는 항상 바란다.
‘안녕, 소녀’
어색한 인사를 미소로 대신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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