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마거리트

by 오혁 posted Feb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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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혁의 상태는 위중했다. 고열이 나고 패혈증으로 산소수치가 떨어졌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느라 눈가가 벌게졌다. 김 박사도 진땀을 뺐다. 오랜 진료 경험이 이번엔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1993년 여름, 소식을 들은 소영과 김 박사는 경황없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발칸에 날아갔다. 입국도 쉽지 않아 허탕치고 돌아올 뻔 했다. 곳곳에 검문이 많았고 차에서 내릴 때도 포탄이 날아올까 봐 몹시 겁이 났다. 혁은 군 병원에 누워 있었다. 중환자실엔 퀴퀴한 냄새가 물씬 났다. 며칠째 혁의 의식은 진전이 없다고 했다. 머리에 붕대를 잔뜩 감은 혁의 몰골을 본 소영이 울컥 화를 냈다.

우기고 떠나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멀고멀었다. 도착즉시 뇌수술을 받았다.

축구도 잘하고 사람 좋은 오 선생 말이야. 왜 그런 화약고에 일부러 찾아가서 화를 당했는지. 거참 안됐어!”

병원 직원들은 소식을 날랐다.

혁은 지옥 불에 있었다.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건물들이 소리치며 쓰러졌다. 시뻘건 불이 혀처럼 핥으며 쫓아왔다. 산이 쏟아져 덮치자 도망치던 혁은 암흑 속으로 내팽개쳐 졌다.

2주 후 간호사가 꼬집자 눈을 떠 보이더니 기적처럼 혁은 고비를 넘겼다. 두 달 후엔 친구들이 휠체어에 태워 한강변에 데리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혁의 눈앞엔 큰 물결이 넘실거렸고, 물새들의 군락이 장관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중국집에 들렸다. 요리사가 불을 확 질러 천장까지 올라가게 해 손님들이 탄성을 지를 때였다. 혁이 갑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곤 바들바들 떨었다.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김 박사가 얼른 그의 어깨를 힘주어 안았다. 병실에 돌아오자마자 혁은 상자의 물건들을 바닥에 펼쳐놓았다. 불에 탄 지갑과 나무 십자가, 탄피가 매달린 목걸이가 나왔다. 탄피엔 &이반이란 글씨가 새겨 있었다.

 

월문리

퇴원한 혁은 달이 뜨고 진다는 월문리로 갔다. 아침에 물안개가 잠기는 북한강을 산 너머에 두고, 갑산과 고래산이 중첩된 산골이었다. 부모님이 살던 집의 대문 위론 소나무 두 그루가 아취를 하고 혁을 맞았다. 혁은 종일 무언가를 기다리며 지붕위에 앉아있었다. 멀리 아래로 굽이굽이 국도가 보이고, 드물게 골짜기를 울리며 차량이 올라오는 것 말곤 오랜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면 딱새가 쏙닥거리는 소리, 개가 옹알이하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작은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하루는 홀딱 벗고 새인 검은 등뻐꾸기가 종일 야하게 울어 젖혔다. 김박사가 찾아왔다. 혁을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고 놀렸다. 며칠이 멀다하고 어머니가 보따리를 이고 버스를 타고 다리를 절며 올라오셨다.

소영도 주말마다 찾아왔다. 둘은 한동네에서 자랐었다. 교복이 헐렁했던 소영은 연두색 머리띠를 묶은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여름날 원두막에서 함께 찍은 사진에는 기타와 함께 푸른 젊음이 있었다. 그녀는 집적대는 깡패를 피해 대전으로 내려갔었다. 얼마 후에 엽서가 왔다. 혁은 OO동까지만 쓰여 있는 주소만 가지고 겨울날 무작정 내려갔다. 눈을 맞으며 마냥 돌아다니다가 연탄을 들이던 집을 지나갈 때였다. 거짓말처럼 마루에 서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러나 둘은 오랫동안 그렇게 세월에 남아있었다.

붉은 가을이 깊어갔다. 낙엽을 발만 디딜 정도로 치우고 의자에 앉은 혁의 뺨도 붉어졌다. 하늘은 초저녁의 밝은 블루에서 검정 블루로 짙어지고 그걸 배경으로 방금 나온 달은 눈부셨다. 그림 같은 보름달이 뜨자 혁은 안절부절못했다. 친구가 진돗개새끼 두 마리를 보내왔다. 아침에 방문을 여니 두 놈이 문가에 위아래로 포개어 누워있었다. 조금이라도 주인에게 가까이 오려고 기를 쓴 결과였다. 그들에게 혁은 삶의 이유 전부였다. 금세 추운 겨울이 오더니 폭설로 화이트아웃이 되었다. 의식만 허공에서 맴돌았다. 정원에 눈삽으로 겨우 한사람 다닐 길을 열며 나아갔다. 혁이 눈에 벌렁 누웠다가 옆에 또 눕자 눈밭에 두 사람이 다정히 손을 잡은 작품이 탄생했다. 똬리를 틀고 눈을 뒤집어쓴 개들이 일어나 껑충껑충 뛰면서 눈을 먹는 시늉을 했다. 한 놈이 혁의 입술을 핥자 딴 놈이 뒤에서 엉덩이로 툭 치며 자기 존재를 알렸다. 혁은 들어와 활활 타는 벽난로에 발을 녹였다. 정말 고립된 마을이다. 그래도 장작이 쌓여있고, 청국장과 고추장, 라면, 꽁치 통조림이 넘치니 마음이 부자다. 노란 정원등이 눈밭을 비추는 밤이 왔다.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목안으로 행복의 후각을 일으킬 때였다. 혁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또 불티가 타고 올라왔다.

 

보경사

이른 봄, 세찬 바람이 불며 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마구 난리였다. 전에도 이런 밤이 있었음을 혁의 몸은 기억했다.

자긴 그 좋아하는 축구도 못하고 어떡해!”

혁이 왼발을 절룩거리는 걸 보고 한 여인이 울었다. 벌떡 잠에서 깼다. 아랫마을에서 짙은 안개가 올라오는 새벽에 혁은 무작정 길을 나섰다. 울산바위가 기지개를 켜는 아침 설악을 조심스레 넘었다. 쪽빛 동해에서는 그물을 비집고 기어 나오려고 애쓰는 난장이를 햇살 속에서 바라보았다. 잔설의 소금강 계곡을 혁은 조심스럽게 다녀왔다. 그런데 한쪽 구두 밑창이 떨어져 나간 걸 늦게 알아챘다. 되짚어 올라간 혁은 암자의 툇마루부터 뒤졌다.

, 상념을 두고 가셨는가?”

스님이 웃고 있었다. 남은 한쪽마저 떼어내니 걸음이 편해졌다.

그러게 버릴 것은 훌훌 버리시게.”

혁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내려왔다. 혁은 보경사에서 천수 물과 함께 저녁상을 받았다. 11시경 스님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힘차게 두드리는 북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스님들이 일렬로 법당으로 올라가는 모습은 바로 구도자들의 행렬이었다.

혁은 또 꿈을 꿨다. 괴롭히는 깡패를 두들겨 패 죽이고 말았다. 형사들이 쫓아오자 다락방으로 숨었다. 친구들이 와도 꿈쩍도 안했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여인이 찾아왔다. 혁은 손잡고 나와 땅에 입 맞추고 자수했다.

혁은 갈증으로 잠에서 깼다. 방바닥이 펄펄 끓고 있었다. 문밖은 눈이 소복이 내려 딴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혁은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발자국 하나 없는 새벽을 밟으며 올라갔다. 발목까지 빠졌으나 따스했다. 9폭에 올랐을 때 굉음이 혁을 맞았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워우-. 기지개 켜는 소리로 산을 깨워보았다. 갑자기 눈부신 아침 햇살이 눈꽃위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구름다리 너머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그때였다. 한 여인이 색채를 입고 발칸의 짙푸른 하늘과 성채를 배경으로 혁 앞에 섰다.

 

이방인

혁은 키 큰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있는 성당의 둥근 돔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으론 석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도시가 자리 잡고, 멀리 중봉을 중심으로 구릉과 골짜기엔 들꽃이 가득했다. 불어오는 아드리아 해의 미풍은 과일을 익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웅들이 신탁을 받고 말달려가던 신화의 바람이었다. 아니, 할퀴듯 스쳐대는 약소국의 블루의 바람이었다. 오래전 이 나라에서 아랍제국으로 조공과 함께 수천의 기마병들을 보냈었다. 그런데 서방 동족의 콘스탄티노플 성을 전면에서 공격하게 되었다. 뒤엔 도망가면 목을 베려는 아랍 군대가 버티고서 말이다. 공성 50일째 쓸모가 없어진 자기 애마들을 명령에 따라 죽이는 장면은 가장 슬픈 대목이었다. 성은 함락되었다. 여세를 몰아 제국은 이곳까지 쳐들어오는데 그때 앞장선 이들이 파송했던 바로 그 장수들이었다.

닥터 오!”

통통한 수간호사 코뱌닉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응급실은 한 부상 군인을 둘러싼 군인들로 소란스러웠다.

의사를 기다리다 지쳐 죽겠소!”

베레모를 쓴 소대장이 얼굴을 붉히며 따졌다. 여자였다. 순간 낯익은 눈매에 놀랐으나 혁은 얼떨결에 소리쳤다.

소란하니 다들 나가주시오!”

그녀는 군인들을 인솔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혁은 인파가 붐비는 이국 거리를 거닐었다. 전쟁의 발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커피숍을 찾아 우체국을 막 지날 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여러 발의 포탄들이 떨어져 작렬했다. 달리던 버스가 처박히고 화염이 치솟았다. 건물 지붕이 주저앉고 길엔 커다란 구멍들이 패였다. 순식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매일 수천 개의 포탄이 터졌습니다. 피아노는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막심 므라비차)

앰뷸런스와 군인들이 도착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혁은 허벅지에 출혈이 심한 부인을 묶어 지혈을 했다. 이때 그 소대장이 달려왔다. 목을 다친 한 환자를 받치게 시키고 청진기를 댔다. 순간 기도로 피가 흘러 환자가 괴로워하자 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낮춰요. 응급처치도 몰라요!”

부상자들로 병원은 만원이었다. 이틀째 혁은 졸음과 싸우느라 커피를 더블로 마셨다. 척추를 다친 젊은 환자가 나빠졌다. 혁은 땀을 뒤집어쓰며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환자는 돌아오지 못했다. 허탈감으로 나서는 혁에게 소대장의 원망의 눈길이 부딪쳐왔다. 환자는 소대장의 친구였다. 혁이 겨우 말했다.

정말 안됐습니다. 미안합니다.”

 

자유인

혁은 '국경없는 의사회'를 통해 이곳에 왔다혁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누가 널 데릴사위로 데려가 교육시켜주면 좋을 텐데.’

어머니는 이 말을 자주 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되었지만 한창 놀고 자랄 나이의 혁은 바빴다. 신문을 돌리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혁은 지갑에 사진 한 장을 지니고 다니며 사춘기를 견뎌냈다. 잡지에서 오려낸 검은 머리의 이스라엘인가 알바니아인가 이국의 소녀 사진이었다. 이것이 발칸의 혁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또 혁은 딱 책 한권 읽고선 인생은 고통과 사랑이라고 재단했다. 이 명제는 의사를 시작할 때도 옳았다. 그러나 점차 의사의 책임감이 타성으로 바뀌고, 경영을 중시하는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아무개 교수가 명의로 TV에 나왔대요.’라는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이제 타성과 경쟁이 인생을 달리는 두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홍이 입원했다. 주먹보다 큰 덩어리를 배 안에 가지고 있었다니 무척 둔한 친구였다. 그는 얼마 못가 혁의 곁을 훌쩍 떠나버렸다. 며칠 후 퇴근길 차안에서 커다란 붉은 석양이 한강다리 위로 저무는 정경을 바라보다가 혁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날 TV에서 발칸반도가 보도되었고, 한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혁의 의식을 때렸다. 그날 밤 꿈속에서 홍이 말했다.

어이 친구,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 봐.’

대학생 때 만난 그를 혁은 자유인이라고 놀렸다. 그는 과 행사를 무시했고 주관이 뚜렷해서 늘 혼자 지냈다. 방학 때 둘은 장발에다가 하루 종일 기타 치는 베짱이 신세가 되었다. 가슴응어리가 터지는 시원한 여름날이었다. 그 뒤로 혁은 의사생활로 바빠도 자연인의 여유를 찾으려고 기를 썼다. 찾아가면 그는 특유의 미소로 말했다.

, 대화가 마려우냐?”

혁은 휴직계를 냈다. ‘신은 여행자의 인생길에서 돌부리처럼 전환점을 준비해둔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첫걸음

수간호사 코뱌닉의 도움으로 병원일이 처음부터 잘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민족과 종교에 따라 갈라지고 각각 독립을 선언하면서 통합을 주장하는 측에서 그 빌미로 침공해온 것이었다. 게다가 민병대들까지 합세해서 내전에 들어가는 극심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간호사들은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대신 간호학생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초짜지만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베스나는 정말 희고 아름다웠다. 외모보다도 열정어린 눈동자로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얼굴이 발그레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혁을 감탄시켰다. 혁은 첫사랑이란 애칭을 수여했다. 그녀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덕분에 병원 분위기는 연두색 톤처럼 밝아졌다.

혁이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틀면, 치아가 듬성한 노인 안드렉이 '하이 닥'하며 빗자루로 쓸고 지나가는 것으로 하루가 열렸다. 아침 직원조회에선 오늘도 행복하세요.’라며 뺨을 대며 포옹하는데, 여성들의 향수 냄새로 혁은 그 시간이 기다릴 수 없이 좋았다.

 

헬로, 닥터.”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가 혁을 깨웠다. 진료실 문에 낯선 여인이 서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다름 아닌 소대장이었다. 그녀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부하를 면회하러 왔습니다.”

우윳빛 목소리와 라벤더향이 갑자기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다가오는 그녀의 갈색 눈매를 바라보다가 혁은 그 낯익음에 또 놀랐다. 혁은 눈도 못 맞추고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이름은 알레비치였다. 실내에 헤이즐넛 커피향이 가득 찼다. 붉은 해를 뒤로 이국 여인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미안하고 또 고마웠습니다.”

그녀의 인사말에 혁이 떠듬거렸다.

이곳의 - 언덕들과 - 화려하지 않은 들꽃들이 - 아름답습니다.”

볼이 발그레한 그녀가 화답했다.

서울올림픽 때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꼬마아이들이 너무 예뻤어요.”

얼마 후 눈이 움푹 들어간 키 큰 군인이 문을 열고 돌아가자고 손짓했다. 그의 이름은 쿠세라였다. 그는 묘하고 어두운 인상이었다. 헤어질 때 혁이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이며 윙크를 했다. 그녀는 목젖이 다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그 뒤로 그녀는 풀어 내린 검은 머리의 사복 차림으로 병원을 방문했다. 간혹 몸매를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 혁을 설레게 했다. ‘닥터 오!’ 그녀는 상체를 구부리고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공격적인 인사를 했다. 둘은 양 볼에 가벼운 키스로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라는 커다랗고 새까만 양치기 개를 데리고 다녔다. 앞발을 들고 일어서면 영락없는 곰이었으나 아주 순둥이였다. 녀석은 항상 주인을 스토커처럼 따라 다녔다.

, 나는 당신의 눈매가 너무 친숙해서 꼭 잘 알고 지내온 친구 같아.”

진담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 지었다. 둘은 이틀이 멀다 하고 성당 언덕에 올라가 함께 지냈다. 거기엔 산이 거꾸로 비치는 작은 호수와 나무의자가 풍경화처럼 있었다. 건장한 남자와 코를 벌렁대는 검은 사냥개가 지나가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어느 날, 혁은 알의 무릎을 베고 세상에서 가장 개운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성채

여름 문턱인 어느 날 저녁, 알이 지프를 몰고 왔다. 검정 정장을 빼입은 그녀가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는 포도 농장들이 늘어선 시골길을 달려갔다. 얼마 후 언덕위로 회색빛의 성이 나타났다. 중앙의 아담한 성채는 신기하게도 호텔로 꾸며져 있었다. 둘은 서늘한 중세의 냄새를 맡으며 반들반들하게 꺼진 대리석 바닥을 밟고 계단을 올라갔다.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뒤태에 혁은 눈을 떼지 못했다. 이층 홀에는 난리 통인데도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모차르트 탄생 기념으로 독일 협주단이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놀라는 혁의 얼굴을 훔치며 알은 마냥 흐뭇해했다. 구운 소시지와 와인을 들고 창가로 갔다. 사방이 넓게 펼쳐져 있고 노란 들꽃이 만발했다. 어디에도 전쟁의 음흉한 눈길 하나 없었다. 단장이 뺨을 실룩거리며 악센트 있는 독일말로 설명하는 바람에 혁은 웃음이 터질 뻔 했다. 현악이 실내에 울려 퍼지자, 천장 유화의 소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고 선율이 홀 안을 날아 다녔다. 연주회가 끝나자 알은 팔짱을 끼고 사람들에게 혁을 소개했다. 알이 자리를 뜬 사이에 갑자기 쿠세라가 나타났다.

이방인 친구, 내 여자니까 조심해!”

가시방석 분위기가 채 가시기전, 나풀거리는 전통의상에 탬버린 같은 빨간 모자를 쓴 한 무리의 남녀들이 나섰다. 바이올린 박자에 맞춰 어깨동무를 하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구르며 춤사위를 한바탕 뽐냈다. 이어서 왈츠가 연주되자 노인 한 쌍이 미끄러져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이 얼굴을 붉히고 손을 내밀었다. 혁은 빙글빙글 어깨를 대며 돌다가 뒤로 젖혀진 그녀의 아름다운 상체에 깊이 빨려 들어갔다. 낭만의 밤은 그렇게 혁을 한없이 기쁘게 했다. 병원 건물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알이 갑자기 지프를 세웠다.

나의 밸런타인님, 좋은 밤 되세요.”

혁에게 달려들어 짧은 입맞춤을 던졌다. 혁은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향기로운 땀 냄새가 났다. 혁은 그 입맞춤과 가슴의 탄력을 눈감고 계속 연상하다가 잠이 들었다.

지금 이 감정은 사랑일까? 사랑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첫눈에 반하거나 나중에 정들어서 변하는 건가. 아니면 예뻐서인가? 예쁘다는 기준은 상대적이지 않은가. 옛 벽화에선 미인의 얼굴을 크고 둥글게 그렸는데, 지금은 작은 달걀형이 되고 싶어 난리다. 자라면서 형성된 상과 닮은 여인이 나타나면 사랑으로 느껴지는 걸까? 동물처럼 홀딱 반하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 때문인가? 혁은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산 마을

알이 오지 마을로 통신 시설을 점검하러 간다며 찾아왔다. 혁도 약품을 챙겨 따라나섰다. 차에 실린 기다란 바게트와 케밥이 눈에 들어왔다. 지프는 몇 시간을 달려갔다. 높은 산을 넘는데 전날 내린 폭우로 차가 오르다가 풀썩거리더니 서고 말았다. 혁이 뒤에서 밀어 주다가 그만 진흙들이 튀어 점박이가 되어버렸다. 전망대에서 알이 지프를 세웠다. 그녀가 혁의 얼굴에 묻은 진흙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낯익은 그 알이 있었다. 평원은 반으로 갈라서 한 쪽은 해가 나고 다른 쪽은 장엄한 흑 구름으로 시꺼멓게 덮여 있었다. 이어서 마른번개와 천둥이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앞뒤론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온 수도 쥐죽은 듯 가만히 눈만 맞추고 있었다.

이반! 당신 이름이야. 신의 은총.”

알과 이반은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도착한 마을은 정말 하늘 아래 첫 동네였다. 혁은 지붕이 낮고 컴컴한 집에 들어갔다. 두 아이가 뼈만 앙상한 채 소리도 없이 누워있었다. 엄마는 정신이상으로 집을 나갔다고 했다. 알은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콧소리를 냈다. 혁은 진통제와 함께 수액을 놓았다. 알은 혁의 손이 큰데 놀랐다.

저녁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난 비가 특히 소낙비가 너무 좋아.”

혁이 말했다. 알도 맞장구쳤다.

둘은 그날 밤 그 마을에 머물렀다. 주민들이 차려준 감자 샐러드와 빵, 치킨 수프를 혁은 다 먹어 치웠다. 알이 또 놀랐다. 비 그친 후 밤공기는 상쾌했다. 밤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혁이 하늘에 지도를 그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 당신네 조상은 카스피해 서쪽에서 발원했을 거야. 내 종족은 그 동쪽 이쯤에서 시작해서 이동했을 거고.”

알이 어둠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반, 실은 내 아버지가 아기 때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온 고려인이야. 유고연방 시절 직장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가 어머니와 결혼했대.”

혁이 깜짝 놀랐다.

어쩐지 눈매가 친숙하더라니!”

비밀 하나 더 말해줄까? 내 마음이 쿠세라로부터 옮겨진 게 언젠지 알아? 응급실에서 이반이 소리칠 때야.”

, 그때 일. 제발 잊어줘!”

알은 전날 쿠세라가 탈영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는 민족이 달랐다. 얼마 전 쿠세라에게 멱살까지 잡힌 일을 혁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밤늦도록 알은 혁에게 기대어 있었다.

알은 고집이 센 아이였다. 어려서 그만 어머니를 잃고 친척집에 맡겨진 그녀는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통의 시절을 다 이겨내고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녀는 수를 껴안았다.

그 힘들 때 이 녀석을 만났어. 유기견이었지. 나와 어찌나 똑 같은 처지인지. 정말 큰 힘이 되었어.”

혁이 둘 다를 힘껏 안아 주었다.

다음날 마을 입구의 개울은 잔뜩 불어 있었다. 혁이 수와 함께 잽싸게 개울을 건너갔다. 뒤따라 알도 젖은 바위를 탈 때였다. 순간, 미끄러지더니 급류로 떨어져 가슴까지 빠져들고 있지 않은가. 혁이 빠지다시피 하며 잡아 올린 건 눈 깜박할 새였다. 정말 손가락 세 개만 잡힌 채였다. 돌들이 딱 딱 소리 내며 바위에 부딪치고 있었다. 생쥐가 된 둘은 포옹했다.

생명의 은인이네. 정말 고마워!”

, 내가 순발력이 좀 있지.”

으쓱거리는 혁이 알은 마냥 좋았다.

 

이별

전쟁은 미쳐가고 있었다. 수도에 다녀온 알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적의 저격수들이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쓰러뜨렸다고 했다. 끔찍한 인종청소였다.

어린애와 부녀자들까지 살해하는 놈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이 반도의 역사를 보면 민족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죄악을 행했어. 분노와 보복만으로는 반복되는 이 비극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울부짖듯이 쏘아 붙였다.

무슨 말이야? 이반은 이 나라와 관계없으니 마음이 아주 편하겠어!”

알은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 버렸다. 혁은 항상 그렇게 서툴렀다. 본질이 어떻고 하며 생각을 하는 습성이 문제였다. 이제 이들에겐 생존의 문제였다.

며칠 째 TV에선 힘찬 군가가 흘러나오고, 실려 오는 부상병들의 수는 늘어났다. 새벽에 혁은 멀리서 들리는 포탄소리에 잠에서 깼다. 전쟁이라는 괴물이 눈앞에 실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알이 완전무장한 채로 나타났다.

이반, 나 오늘 전선으로 떠나.”

둘은 성당 언덕에 올라갔다. 자작나무에 투명한 달이 걸린 모습은 을씨년스러웠다. 알이 탄피와 나무 십자가 장식을 매단 목걸이 두 개를 내밀었다. 탄피엔 &이반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자작나무숲 한가운데서 그녀는 한참동안 혁의 가슴에 깊이 파묻혀있었다.

몸조심해.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게!”

아니,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 전쟁이 끝나고 꼭 다시 만나.”

그녀는 군복과 권총집을 매만지고 차에 올라탔다. 혁이 엄지를 치켜들어 건승을 빌었다. 언덕을 넘어 달리던 지프에서 알이 손을 높이 흔들었다. 그 뒤로 스카이라인만 휑하니 남겨졌다.

혁과 안드렉은 병원에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짐을 꾸리고 피난을 떠났다. 방치된 낡은 자동차들 때문에 유령 마을 그대로였다. 가끔 나타나던 걸인 알렉산더가 입 냄새를 풍기며 들어섰다.

난 대왕의 자손이야. 발칸에 내 씨가 다 퍼져야 평화가 올 것이다!”

혁은 거품을 물며 지껄이는 그를 토닥거리며 안았다. 불안감이 덜해졌다.

스산하고 황량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큰 나무들이 잠 못 이루고 들꽃들이 죄다 깨어 난리였다.

다음날 마침내 탱크들을 앞세우고 적군이 진주해 왔다. 혁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부상병들까지 치료해야하는 볼모가 되었다. 지뢰로 다친 탱크병 다섯이 들어왔다. 며칠 뒤 혁이 병원 뒷마당으로 걸어 나갈 때였다. 연못에 쪼그리고 있던 그들이 웃통을 벗고 벌떡 일어섰다. 놀란 혁 앞에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줬다. 제목은 나는 고향에 꼭 돌아올 테니까라고 했다. 그중엔 머리가 희끗한 음악가도 있었다.

 

운명

나토의 강권으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일진일퇴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알은 부하 둘을 데리고 혁의 마을까지 정찰을 나왔다. 그런데 귀환하다가 안면이 있는 양조장 주인과 마주쳤다. 일행은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났으나 곧 그물망에 걸리고 말았다. 적의 화력이 사정없이 퍼부어졌다. 알이 AK소총으로 응사하는 동안 부하들은 즉사하고 말았다. 알은 정신없이 기고 구르면서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몇 시간 후 시야에 낯익은 건물이 들어왔다. 혁의 병원이었다.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혁의 모습을 발견하자 알은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적군이 잠입했다가 도망쳤대요.”

안드렉이 말했다.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와인을 걸친 혁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택 문을 열었다. 순간 누군가 떠밀며 들어와 얼른 문을 닫았다.

, 나야, . 놀라지 말아요!”

잠시 후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고 끌어안았다. 지친 알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에 통증이 몰려왔다. 혁이 서둘러 따뜻한 수프와 빵을 내놓았다. 부하들 생각으로 목이 메었으나 알은 죄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밖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알의 머리는 짧게 잘려있고, 얼굴은 말라깽이가 되어있었다. 그녀 목엔 눈에 익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날 찾아줘서 고마워.’ 혁이 속삭였다. 잠결의 알이 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 감미로움으로 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녀 품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꽃봉오리를 혁이 입술로 애무하자 둘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녀가 혁의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반, 사랑해!”

비는 폭우로 변해 요란하게 지붕과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둘은 세상과 완전히 그리고 안전하게 단절되었다. 마을은 오랜만에 은총의 밤을 맞았다.

알은 꼼짝 못하고 방에 숨어 지냈다. 그녀는 혁이 안아 줄 때마다 새롭게 충전되었다. 알이 찡그리며 말했다.

나 수영복은 이제 다 입었어.”

혁은 알의 허벅지에 난 총격 자국에 입 맞추며 얘기했다.

나만 볼 건데 잘 됐지 뭐.”

혁은 그녀의 눈빛에서 한없는 믿음을 보는 것이 사내로서 그렇게 좋았다.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인 것 같아. 이대로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이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이제 알은 혁의 여자였다. 혁은 이제 남녀의 사랑이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신혼과 같은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그녀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내 사랑,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 평화가 오면 다시 찾아줘. 영원한 당신의 알.’

혁은 가슴한가운데가 찢어질듯이 아파왔다.

 

전투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쌍방은 마지막 필사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알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혁의 마을로 전진했다. 혁은 수시로 터지는 포성으로 어찌해야할지 막막했다. 우선 남아있는 중환자들을 지하로 옮겼다. 안드렉과 함께 입구와 창문마다 침대 시트와 의자들을 높이 쌓았다. 마을 일부가 화염에 휩싸였다. 알은 병원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혁이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갑자기 건너편 언덕에 소련제 T-34 전차가 나타났다. 동시에 대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날아와 건물 하나가 주저앉았다. 전차 뒤에는 쿠세라의 부대원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측면 언덕에 전개한 알의 부대원들이 기관총탄을 퍼붓자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쿠세라가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당기는 순간, 조준경에 적 소대장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알이었다. 총신이 자신도 모르게 젖혀졌다. 몸을 피했던 알은 서둘러 바주카포를 장전하고 한 발을 발사했다. 묵직하게 날아간 직격탄은 전차의 궤도에 명중했다. 옆의 보병들이 낙엽처럼 날아갔다. 궤도를 상실한 전차가 그들을 향해 포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황급히 병원 마당을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혁이었다.

이반, 엎드려!”

알이 고함을 쳤다. 순간 혁이 그녀를 발견하고 놀라서 한가운데 그냥 서 버리는 게 아닌가. 알이 정신없이 달려가며 다시 소리 질렀다. 동시에 고막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알이 쓰러졌다. 혁은 피투성이가 된 알을 안았다.

이반 어서 피해, 제발 피하라고!”

알이 애원했다. 다음 순간 엄청난 굉음에 혁도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폐허

혁은 잔인한 사월을 끝으로 산골에서 내려왔다. 기다림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환자들의 고통과 씨름하는 것이란 걸 알았다. 마침내 지루하고 처절하게 끌던 발칸의 전쟁이 끝났다. 기어코 평화가 온 것이었다. 혁은 한 달 후에야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온 지역이 포격으로 불에 타고 총알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가족을 잃은 부녀자들은 비통함을 검은 상복 속에 가리고 있었다. 주인을 되찾은 병원 지역은 폐허로 변해있었다.

알은 아무데도 없었다. 수소문했으나 허탕이었다. 혁은 매일 군부대에 들렸다가 성당 언덕에 올라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열흘 후에야 한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투박한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다. 알레비치 중위 실종(전사 추정). 혁의 행복은 그날 거기까지였다.

 

진료소

다시 평화를 찾은 발칸의 들녘은 매년 오는 봄과 가는 가을을 맞았다. 병원 터에 벽돌색 지붕의 아담한 석조 건물로 진료소가 다시 태어났다. 코뱌닉과 안드렉, 그리고 명품 미소를 잃지 않은 베스나까지 OB팀이 정확히 다시 모였다. 진료소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마을의 지킴이가 되었다. 처음에 원색이던 데크가 5년여의 때가 묻어 제법 고색으로 바랬다. 몇 개의 진료 과목이 더 갖춰지고 새 수술실도 꾸려졌다.

혁은 진료를 마치고 그만의 휴게실에 들어왔다. '막심 므라비차'의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다. 들녘의 중봉이 모진 세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롱하게 솟아있었다. 지난 일들이 전혀 상상되지 않는 평화 그 자체다. 순간 들녘에 생명들이 찬란하게 풀빛으로 꿈틀대고 있음을 혁은 분명히 보았다. 내일은 한국에서 김 박사와 의료팀이 도착할 예정이다. 소영은 얼마 전 시집을 갔다. 혁은 그동안 불면증으로 약을 달고 살았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몇 달도 못 가서 다시 짐을 싸서 돌아오고 말았다. 매일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낸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아노곡 벌들의 비행에 이어 탈출이 웅장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 민족의 과거의 아픔이 아니, 혁의 아픔이 고동치며 되살아났다. 혁은 그녀의 채취를 느끼는 이곳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천둥치는 여름날 요란하게 울어재끼는 매미처럼 이 세월을 앓다 가고 싶었다. 혁의 목에는 그 탄피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혁은 한국에서 공수해 온 진돗개들을 데리고 나섰다. 한 놈이 발을 다쳐서 붕대로 동여맸는데 죽어라고 혁을 따라나섰다. 절룩거리는 게 영락없는 상이군인이다. 혁이 목을 긁어주며 말했다.

,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는 게 인생이란다. 아니 견생이란다.”

혁은 성당 옆을 지나 들판을 건너 중봉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마거리트 꽃들이 일제히 휘날리며 구릉과 들판이 하양 노랑으로 뒤덮였다. 달려 나가는 이방 진돗개들의 컹컹 짓는 합창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광장

혁과 김 박사 일행은 모퉁이의 카페를 찾았다. 시간은 게으른 오후를 가리키고 돌바닥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광장을 성당 탑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혁은 시원한 생맥주잔을 마주했다. 나른함이 가시는 듯 크림 같은 거품 한모금은 정말 맛있었다. 각양각색의 여행객들이 광장을 수놓고 있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여행을 온 남미 가족, 청바지 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흘러가는 키 큰 연인들, 작은 깃발을 든 사람을 따라서 줄지어 나타나는 일본 단체 여행팀. 갑자기 광장이 북치는 소리로 요란해졌다. 얼굴을 광대처럼 하얗게 칠한 거리의 악사였다.

그때 카페 구석의 돌담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성의 옆모습이 눈에 잡혔다. 카키색 복장을 한 여군이었다. 순간 혁은 그녀의 뺨에서 목까지 내려가는 얼굴 라인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바로 영락없는 알이었다.

혁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 그녀 자리엔 잔만 놓여있었다. 혁이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성당의 종소리가 요란하게 광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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