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바다 사이에서

by 문솔 posted Feb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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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사이에서


 

  그곳에 가게 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계절을 만나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사계절이 여름인 그 섬에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가득하고 열대어가 잔뜩 산답니다. 이 도시와는 아주 다르지요.” 여행사 직원은 팸플릿을 앞에 둔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얼어붙은 거리에는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지겹다.” “?” 문득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어버린 모양이다. 한창 떠들던 직원은 당황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얼음 만지는 것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오랜 시간 동안 얼음을 다뤄왔다. 이제는 잠시 멈추고 따뜻한 곳에 가고 싶다.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한 곳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고 마침내 어느 순간 끊임없이 움직이던 톱날이 멈췄다. 사방으로 튀던 얼음 잔해는 책상 위에 앉아 녹았다. 곧 물이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떨어진 물이 모인 곳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어느 지역에서는 녹은 물이 미지근하게 데워지기도 한다던데. 나는 그런 곳에 사는 이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워서 옷을 땀으로 잔뜩 적신다 하더라도 더위를 느끼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손가락질 몇 번이면 이뤄질 것도 소망이라 불러? 이민 가라는 것도 아니고 잠시 몇 주 쉬다 오라는 거잖아. 누가 보면 다시 오지 말라는 줄 알겠어.” 친구의 말에 움직이던 팔을 멈추었다. 손에 들려있던 톱은 너무 오래 사용해 끝이 뭉툭하게 달았다. 지나왔던 시간을 떠올렸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나의 파노라마는 암전된 상태였고 나는 뒤섞인 이정표 앞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어디가 길인지는 알았지만 가기는 어려웠다. 무엇이 나의 발걸음을 몰래 잡아먹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평생 얼음을 만졌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할아버지는 조각을 위해 며칠이고 얼음에 매달렸다. 조각에 매달려 며칠이고 작업실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적도 많았다. 물론 끼니를 거르는 것 역시 일상다반사였다. 완성된 조각물들을 보면 마치 거대한 시간 그 자체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오랜 시간 공들이며 다듬는 것보다는 빠른 것을 좋아했다. 무조건 빠르고 정확하게 얼음을 잘라 곧바로 시장으로 옮겼다. 그 얼음은 대부분 식품의 신선도를 위해 쓰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얼음을 보며 주문하자마자 곧장 오는데도 자로 잰듯하다고 칭찬했다. 나는 사람들의 기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처 돌아볼 새도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그 작업에 박수를 칠 이유가 없었다. 굳이 공로를 따지자면 아버지가 아니라 기계가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았다. 가게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하던 방식을 따랐다. 주변에서는 시대를 역행한다고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내키지 않은 표를 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의 말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눈길을 주기 마련이었다. 가만히 멈춰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내 손에서 깎여 나간 얼음은 시장으로 운반되는 대신 파티나 결혼식에서 전시되었다. 아버지보다 느리게 돈을 모았지만 나름 뜻깊었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분명 기억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했지만 나의 얼음 조각에는 시간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할아버지의 것에서는 멈춤의 미학이 보였는데. 나는 광경을 되돌리고 싶어 몇 주를 한 얼음에 매달렸다. 시간이 지나자 나의 체온까지 얼어버려 모든 것이 차가웠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한창 펜팔이 유행했다. 그 때는 나를 포함 주변 친구들 모두 편지지를 항상 들고 다녔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친구라 칭하며 안부를 물었다. 우편집배원이 전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지만 나는 유독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과 편지를 나누었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갈망은 늘 내 곁을 맴돌았다. 내 주변은 항상 차가워서 뜨겁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내게 열기란 단지 일터의 추위를 잠시 녹일 수 있는 정도의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나는 입버릇처럼 어른이 되면 다른 나라에 갈 것이라고 되뇌이곤 했다.

  가게 정문에 한 달 정도 문을 닫는다는 메시지를 적어 붙였다. 그 시간 내내 여행을 갈 것은 아니었지만 준비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흐를 것이다. 냉장창고에 가득 차 있던 얼음은 주인을 찾아갔다. 텅 빈 창고를 둘러보다 문을 닫았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주 옛날부터 한 번도 텅 빈 적이 없던 곳이었다. 이제 추위에도 무감해져 더는 차가움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창고 불을 껐다.

  마시던 물을 밖으로 버리자 포물선 그대로 물이 얼었다. 허공에서 얼어 바닥으로 추락한 얼음을 집어 들었다. 갈수록 더 두꺼워지는 옷은 점점 더 극심해지는 기온 변화를 나타냈다. 매년 옷을 샀는데 그러지 않고서는 거리를 다니기 어려웠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펭귄 같기도 했고, 소시지 같기도 했다. 항상 일정한 위치를 유지하던 그래프는 요새 들어 급격한 상승세였다. 과학계에서는 흥미롭다고 입을 모았지만 막상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짜증나는 일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까지 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이곳의 사람들은 잘 알았다.

  여행 준비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것저것 예약하는 것은 침대에 누워서도 금방 끝이 났지만 다른 것이 문제였다. 짐 가방을 꾸리려 가방을 꺼내고 보니 가서 입을 수 있는 옷이 한 벌도 없었다. 모두 다 두꺼운 옷들이었고, 얇다고 해도 소매가 길어서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쇼핑센터로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바로 다시 앉았다.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얇고 입을 만한 것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필요할 때 사기로 했다. 짐이 덜 찬 경력은 잡아당길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비행기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몇 번이고 창고를 여닫기를 반복했다.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전날에는 날씨가 좋더니 하필이면 지금 골치를 썩였다. 오늘 내로 뜨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 본 횟수가 몇 번 안 되는 나로서는 연착도 새로운 경험으로 느껴졌다. 일단 수화물을 붙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장 처음에는 면세점에 들러 선크림을 샀다. 그동안 나는 선크림을 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꺼운 옷들이 언제나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가려주기에 바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 섬에서는 필요할 것이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지만 피부가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면 벗겨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 번 바르기로 했다.

  어느새 그 넓은 공항을 몇 바퀴나 돌았건만 비행기는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처럼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많은 수가 바닥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 옆에 앉았다. 처음에는 의자를 찾아 헤맸지만 지친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어째서 날씨가 안 좋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먹을 하늘에 쏟아 부은 것처럼 어두웠고 한 치 앞을 보는 것이 어려웠다. 조금 전보다는 옅어지고 있었지만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당황스러웠다. 지구온난화로 이곳저곳에서 기현상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뉴스에서 몇 번 보았다. 이 일도 그것 중 하나인 것일까. 생각이 늘어갈수록 시간은 밤을 향해 달렸다.

  승무원이 표를 보여 달라며 웃었다. 나는 땀에 젖은 표를 내밀었다. 승무원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친구가 촌스럽게 굴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그 꼴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어쨌든 자리에 앉으니 떠난다는 실감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말로만 떠나겠다고 그랬지 실천에 옮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도 이제 땀을 흘리게 되는구나. 누구에게는 일상인 것들도 나에게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곧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그만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번 경유지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를 꼬박 하늘에서 보냈다. 멀미에 약한 나지만 다행히 편한 비행이었다. 처음에는 창가에 앉은 것을 행운이라 여기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자 지루해져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얼마 자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금세 경유지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눈을 떴다. 다행히 하늘은 파랬던 원래 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언제 연착이 되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꽤 많은 사람이 하늘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금방 수그러들었다. 관심은 양은냄비와도 같아서 펄펄 끓어오르더라도 곧 식고 만다.

 

  곧 도착한다는 안내와 함께 벨트를 착용해달라는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벨트를 확인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로는 건들지도 않았지만 몇 번이고 확인하는 것을 반복한 뒤에야 행동을 멈추었다. 이제 드디어 상상만으로 가보던 곳에 발을 들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몇 배로 빨리 뛰었다.

  내리자마자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긴 소매이긴 하지만 얇은 천으로 되어 있어 덥지 않을 거라는 판단은 실수였다. 땀이 금방 나고 그 땀이 옷을 잡아당겼다. 피부와 천이 한 몸이 되어 몇 번이고 펄럭였지만 소용없었다. 공항에서 얼마 안 가니 길거리 가판대에서 옷을 팔았다. 지역 지도가 크게 프린팅 된 옷이었지만 선택지가 없어 바로 구매했다. 화장실에서 갈아입으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옷가게라고 중얼거렸다. 편의점에서 산 물은 금방 녹아내렸다. 분명 냉동실에서 꺼내 얼었던 것이었다. 계산하고 밖에 나와 노선도를 보는 새에 물을 떨어트려 나의 바지를 적셨다.

  숙소는 오래된 호텔이었다. 바다의 가장 가에 있는 곳이라 인적이 드물다는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본 투숙객들의 평은 좋지 않았다. 손질하지 않은 꽃이 잡초와 뒤섞여 외관이 엉망이고 카펫은 오래되어 색이 변질되어 있으며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나 굉장한 게으름의 소유자라는 등 온갖 불평이 가득했다.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호화스럽고 편한 것은 따분할 뿐이다. 나는 고향에서도 포크나 빵칼 같이 새로운 것들을 가지고 얼음 조각을 작업한 적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런 방법이 성공의 길이라고 믿었다. 아스팔트가 잘 깔린 도로를 걷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돌멩이와 잡초들로 잔뜩 뒤덮인 길을 걸으려고 하면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는다. 아무도 걷지 않았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오니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책임을 전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벌어진 일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찾아올 고통을 잘 알기에 계속 누군가를 찾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꼭꼭 숨자고 말하지만, 술래는 없다. 술래가 없으니 끝도 없어 계속 숨을 뿐이다. 평생 숨바꼭질을 할 바에는 술래를 하게 되더라도 나와 돌아다니는 편이 낫다.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한참 동안 문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을 때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긴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여자가 서 있었다. 내가 대답도 않고 계속 서 있기만 하자 답답한 것인지 나를 앞으로 살짝 밀며 걸었다. 혼자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예약 없이 찾아온 손님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곳에는 손님이 많지 않은 데다 비수기라 텅 비었다며 자랑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쏟아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여자는 그 의미를 잘 못 알아들은 듯싶었다. “허름해 보이지만 우리 호텔 가격으로 다른 곳 못 구해요. 이래 봐도 조식도 있답니다.” 여자는 무척이나 활발하고 경쾌한 사람인 듯 보였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남의 이야기를 놓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끊임없는 말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자가 열쇠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느라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내가 여러 번 책상을 두드리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내가 예약을 하고 온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자기가 혼잣말을 잔뜩 늘어놓았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손장난을 쳤다.

  로비에서 여자에게 빼앗긴 많은 시간에 비해 열쇠를 건네받고 방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팔을 얹어 놓고 밖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는 창문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방에 있는 창문을 모두 열고 경치를 감상했다. 사방이 바다니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아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해 방에서 나왔다. 근처 가게에 들러 옷을 여러 벌 사고 바다에 입수했다. 한참을 바다와 백사장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햇빛이 달궈놓은 백사장은 너무 뜨거워 맨발로 오래 걷기 어려웠다. 추워서 발을 떼 본 적은 있어도 더워서는 없었던지라 괜히 신기해 바닷물로 식힌 발을 모래에 파묻었다. 물도 미지근해서 큰 효과는 없었다. 주변에 꽤 많은 사람이 서핑을 탔다. 몇몇 장사치들은 나에게 다가와 보드를 대여하라고 꾀었지만, 물에 몸을 담근 것으로도 큰 경험이었기에 손을 내저었다. 바다에서 노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다.

  싸우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제 그 여자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의견 충돌이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자에게 호소하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거칠었다. 여자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사람들을 밀어낼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옷이 땀으로 흠뻑 적시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로비로 내려가자 여자는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랐고 옷이 가리지 못한 피부 역시 그랬다. 나의 기척을 느낀 여자가 물을 내려놓으며 사과를 했다. 찾아온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이라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여기가 골칫거리래요. 관광객을 한 명이라도 더 불러 모아야 하는데 여기가 귀신 나올 것 같다나 뭐라나. 무슨 게임도 아니고 동네를 구미에 맞게 바꾼다는 게 말이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벽에 걸린 사진 대부분은 여자와 할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 주변에서 찍은 것 같았지만, 너무 많이 변해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이 호텔과 바다만이 그대로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변덕쟁이 미술가의 컨버스 안에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만들고 지우고 계속 반복하다 결국 너덜너덜해지는 그럼 그림.

  이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은 기껏 해봐야 빵과 치즈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였다. 여자가 들고 온 큰 쟁반에는 여러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방금 만든 듯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나는 그것에 정신을 빼앗겨 받아 들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나를 몇 번이고 부른 후에야 쟁반을 건네받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여자는 이 호텔에 얽힌 몇 가지 소소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본래 이 호텔은 할머니의 소유였지만 얼마 전부터 자신이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식사를 다 하고 내려오면 좋은 것을 보여 주겠다길래 고개를 끄덕거렸다. 팔꿈치까지 끌어올린 소매가 정신없이 굴러가는 여자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빈 접시와 함께 로비에 내려가니 여자가 보드를 닦고 있었다. 아까 말한 좋은 것이 보드였는지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서핑하기 딱 이에요. 내가 알려 줄 테니 보드 들고 나와요.” 나는 앞장서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이곳쯤이 좋을 것 같다며 보드를 내려놓았다. 우리는 준비운동 몇 가지를 끝내고 몸에 물을 묻혔다. 햇빛이 너무 강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어설프게 움직였다. 여자가 바다에 발을 밀어 넣으려는 찰나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연착되었던 그 날의 하늘처럼 새까맸다. 가장 끝자락부터 물들었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괴현상인지 자연의 경이로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때였다. 가만히 서 있던 여자가 하늘이 물들어 가는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도 그제야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뛰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검푸른 바다의 끝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놀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다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케이크를 날카로운 칼로 정확히 반 나눈 모양새였다. 애초에 인간이 바다를 두 갈래로 나눌 수도 없겠지만, 혹시나 하고 다가가 어떠한 장치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바다가 아닌 거대한 젤리라고 말해도 믿을 법한 자태였다. 바다가 나뉜 사이는 너무 어두워 밑에 무엇이 있고 얼마나 내려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뭘까요? 하늘도, 바다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점점 더 뜨거워지던 것도 이거랑 관계가 있을까요?” 여자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많은 질문을 나에게 던졌지만, 답해 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그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이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나를 잡아챘다. 바다의 단면에 손을 넣으니 평범한 바다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래는 어두웠지만 분명 바닥이 있어 내려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나는 팔을 모래 위에 올려둔 뒤 발을 하나씩 내렸다. 여자가 나에게 달려오자 팔을 꽉 붙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조금씩 발을 내리니 어느 지점에서 바닥에 닿았다. 깊을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나의 키에 한참 못 미쳤다. 그녀는 나의 부축을 받고 내려왔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 갈래로 갈라진 바다 사이를 몇 십 분 동안 걷고 나자 그만 체력이 동이 나 버렸다. 여자와 나는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 끝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사이에 두고 잘린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내가 여태껏 봐온 그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다웠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끝냈다. 온종일 밖에서 쉬지 않고 걸은 탓에 땀을 많이 흘려 불쾌했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누운 탓인 것 같아 로비로 내려갔다. 마침 여자도 있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잠옷 차림이었다. 우리는 좁은 소파에 앉았다. 가죽이 갈라진 소파는 앉자 푹 아래로 꺼졌다. 아무 말 않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통성명을 시작했다. 여자의 이름은 세미였다. 이름을 나누고 난 뒤에는 밖으로 나왔다. “얼음 조각가라니 신기하네요. 여기서는 파티에도 그런 조각은 안 써요. 아마 몇 분이 못 가서 녹아내릴걸요. 만약 사람모양을 만든다면 좀비가 되겠군요. 나는 더운 게 딱 질색이에요.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안 오니까 영화들을 봐 공감이 안 가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얼음 조각을 떠올리는 듯 잠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각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당장 큰 얼음을 구하는 것은 무리다. “냉장고에 오랫동안 얼려둔 생수 한 병이 있을 거예요! 가져올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여자에게 생수병을 건네받은 나는 얼음을 두 개로 잘라 좀 전에 본 것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마땅한 도구가 없어 여자가 건네는 칼을 썼다. 이렇게 무른 얼음은 처음이라 몇 번 손에서 엇나가긴 했지만, 곧 속도를 되찾았다. 아까 보았던 그 아름다운 광경을 되새기며 손을 움직였다. 자연이 무섭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 그 위험성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웠다. 과묵한 자연은 왜 한 번씩 큰 변화를 보이는 걸까. 생각은 조금씩 얼음 사이를 파고들어 점차 어떤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연은 고양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귀찮게 굴면 사납게 돌변한다. 괴롭히다 물린 사람은 문 쪽에 화살을 돌리려 하겠지만 자초한 일이니 책임은 자기에게 있을 뿐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조각에서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아니, 나는 거대한 시간을 조각했다. 얼음 자체가 시간이었고 내가 얼음 위에서 움직인 것 모두가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을 놓치는 중이었다. “진짜 예뻐요. 손닿은 곳부터 녹아가고 있지만……. 빨리 가서 냉장고에 넣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냥 지금 봐요. 여기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를 붙잡아 앉혔다. 녹으면 몇 개고 다시 만들어 줄 테니 지금은 마음껏 보라고 덧붙이며 말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공연을 생중계로 중계해주잖아요.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종종 보곤 해요, 흥미로운 게 있거든요, 예전에는 관객들이 공연자에게 집중했지만, 이제는 모두 자신의 휴대전화에 집중해요. 결국, 나중에 남은 기록들을 되돌려 보아도 감흥이 없을 거예요. 그 공연을 안 본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사람들은 실제 그 공연을 느낀 것이 아니라 네모난 화면을 바라본 것이죠.” 여자는 얼음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얼음은 얼마 못 가 형태를 잃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마치 얼음을 처음 본 사람처럼 신기해했다. 다 녹아 물을 털어 낸 손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얼음에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그녀와 나 우리둘 다 항상 물을 곁에 두고 살았지만, 그 형태가 다른 것뿐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각자 서로 살았던 이야기를 했다. 마치 각자의 추억을 카드 패처럼 잔뜩 늘어놓고 하나씩 뒤집어 어떤 것이 같은지 찾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한 곳이 많았다.

  나는 근사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여자를 따라 걸었다. 나의 얼음 조각상처럼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큼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근사한 것은 시장이었다. 곳곳에 놓인 텔레비전은 짜 맞춘 듯이 모두가 한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앵커가 소개했다. 오른쪽 위에는 작게 시간을 표시했는데 점점 줄어들었다. 시간은 여섯 시간 삼십 분에서 여섯 시간 이십 분을 향해 달렸다.

  여자는 열대과일을 잔뜩 들고 나에게로 왔다. 먹기 좋게 잘라서 막대기에 꽂은 것도 있었고 과일 채로 잘라 음료처럼 마시는 것도 있었다. 여러 개를 사서 나눠 먹다 보니 하늘이 어둑해졌다. 요 며칠 새에 나타난 괴현상이 아닌 진정한 어둠이었다. 우리는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이 밤을 그 사이에서 보내고 싶었다. 호텔에 들어가 침구와 요깃거리를 챙겨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되어 납작해진 이불은 꽤 괜찮은 깔개가 되었다. 카펫은 너무 크고 무거워 대신 이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몇 겹을 올리니 매트리스와 같은 모양새였다. 그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치미 떼는 하늘에는 별이 잔뜩 떴다. “만약에 자연이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어떤 식이든 상관이 없을까요?” 여자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나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이냐 되묻자 여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요. 난 그런 일들이 어떠한 신호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엇에 힘든 자연들이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아무도 그 소리에 귀 기울지 않을 거예요, 어딘가 뒤로 숨어들어 카메라를 내밀고는 각자 자신의 공간에 영상을 올리고는 서로 좋아요를 누르겠죠. 수많은 공연처럼 말이에요.”

바다 속은 바삐 돌아갔다. 물고기들은 공기 방울을 뿜어댔다. 조개들과 해초들이 어우러져 그림과도 같았다. 어렸을 때 미술숙제로 만들었던 양초와 같은 꼴이었다. 모습이 똑같다고 해도 경이로움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다. 나는 여자의 말을 곱씹었다, 검게 물든 하늘과 두 갈래로 갈라진 바다에 나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며.

  자정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초침이 평소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 같아 초조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면세점에서 산 선크림이 생각났다. 깜빡하고 바르지 못한 것이 이제야 신경이 쓰여 피부를 문질렀다. 어차피 기억해내서 바르고 나왔더라도 붉어진 색이 조금 옅어졌을 뿐 큰 효과는 못 보았을 것이다. 나는 여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려우신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페이지도 뒤집으면 첫 페이지거든요.”

  우리는 눈앞의 풍경이 암시한 몇 시간 뒤의 아침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오른쪽 화면 위의 시계는 이제 이분에서 일분이 되었다. 이렇게도 편안한 자정은 처음이었다.

 

 

 

 

나예빈

yb_14@iclou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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