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창작 콘테스트 단편 공모 ㅡ 12시 12분 12초

by 번개 posted Feb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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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12분 12초

1.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이었던 20XX년 X월 X일 그날 오후. 놀이터에서 친구들은 포켓몬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덧 화제는 무서운 이야기로 넘어갔다. 

   " 우리 엄마가 해준 얘긴데 인형들은 어른, 아이가 다 잠드는 밤 12시 12분 12초에 살아서 움직인대!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직 자지 않은 사람이 인형하고 눈이 마주치면 그 사람에게 저주를 건대!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밤 그 사람은 온갖 괴물들이 모여 사는 어둠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고 만대••••. " 남자아이A가 말했다.

  " 꺄악! 무서워! " 여자아이A가 소리쳤다. 몸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 옆에 앉아있던 남자아이B가 꽥꽥 소리질렀다. 귀가 얼얼해졌다. 

  " 밤에 일찍 안 자는 애들을 겁주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잖아! "

  " 그, 그래? 뭐야. 괜히 놀랐잖아! 에잇. A는 거짓말쟁이!! " 여자아이A가 말했다. 귀엽다.

  " 아니! 진짜야!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실제로 봤대!! 가만히 앉아 있던 인형들이 멀쩡하게 서서 움직이는 걸 봤대!! " 남자아이A가 확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했다.

  " 좋아! 그럼 시계가 밤 12시 12분 11초가 될 때까지 기다려 보자

고! 만약 내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 다음날 여기 있는 모두 나한테 빵 한개씩 사줘야 돼! (A는 빵을 아주 좋아했다.) 그 대신  내 말이 틀리면 내가 대신 너희가 먹고 싶은 건 다 사줄게!! (A는 일주일에 용돈 10만원을 받을 정도로 집이 부자였다.) " 라고  우리 동의도 없이 무턱대고 약속을 정했다.

  " 아, 난 싫은데.. "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 뭐~!! 그럼 넌 앞으로 우리하고 놀면 안돼~. 알겠지? "

  " 아, 아니야, 한 번 해볼게. " A가 그렇게 말하니 나는 할 수 없이 거기에 동의했다. 칫.

  " 좋았어! 내일 학교(서로 다니는 학교가 달랐다.) 끝나면 여기 모이자!! " 

  약속 시간이 다 되자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난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곧이어 엄청난 공세가 시작됐고 난 속수무책으로 잠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밖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 창밖엔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그때 오늘 A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엄마가 깰까봐 조심조심 몸을 시계가 걸린 반대쪽 벽으로 돌렸다. 밤 12시 11분 15초 였다. 세상에.. 시간이 벌써 저렇게나 지났네•••. 조금 놀랐다.


  나는 가진 인형이라곤 검은머리의 여자아이 인형 밖에 없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선물로 주셔서 매우 아끼고 있었다. 그 인형은 내 머리에서 조금 떨어진 3층 서랍장 위에 있었다. 몸을 뒤집고  고개를 들어 인형을 가만히 바라봤다.

  인형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똑, 똑, 똑, 시계 소리가 들려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밤 12시 11분 55초였다. 그때를 시점으로 나는 마음속으로 시간을 재며 인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56, 57, 58, 59, 00, 01, 02, 03, 04, 05, (인형은 계속 앉아있다.) 06, 07, 08, (점점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진다. 꿀꺽, 침을 삼켰다.) 09, 11, 12!!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 뭐야. 안 움직이잖아? 역시 거짓말이었어. " 

  정말 실망한 나머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다음 눈을 감으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들어 인형을 올려봤다.

  그때 드디어 온몸이 얼어붙었다.  너무 무서워서 식은 땀까지 흘렸다.

  인형의 눈이 감겨져 있다.

  ' 말도 안돼. 원래 눈을 뜨고 있어야 되는데? '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아서 눈을 비벼봤다. 다시 보니 인형은 평소처럼 눈을 떴다. 

  ' 휴우, 깜짝이야! 잘못 봤나. 하긴 인형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겠어. 그건 정말 말도 안되는. '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인형을 봤다. 근데 이번엔 인형의 눈이, 시계 쪽이 아니라,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망치에 얻어맞아 두두둥, 하고 울려댔다. 

  " 어, 어떻게? " 난 너무 무서운 나머지 거기서 더이상 말하지 않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영혼까지 빼앗길 것 같아서 그랬다. 

  ' 인형이 살아있다!! 인형이 살아있어! 쟤가 살아있다고!! 하,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 이건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그래, 맞아, 틀림없어. 이건 꿈이야, 꿈이야.꿈이라고! ' 1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번개같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가능했는지 믿겨지 지가 않는다.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숨겨진 잠재능력을 일깨워낸다는 게 정말 사실이었나 보다. 그때 이후론 그 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하기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무심하게 날 내려보던 인형이 실로 묶여진 입을 열며 말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극도로 메마른 목소리였다.

  " 너, 봤구나? "

  쿵! 깜짝 놀랐다. ' 이, 이, 이, 이젠 말까지 하네? ' 너무 무서워서  눈을 꼭 감으려고 눈꺼풀에 힘을 줬다. 하지만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 어, 어? "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멋대로 팔이 움직여진다.

  ' 왜 이러지? ' 이젠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다음 내 의사완 상관없이 하늘로 날아갔다!! 

  " 아악! "

  인형하고 눈높이가 같아졌을 때 공중부양이 끝났다. 인형은 매섭게 날 노려보며 말했다. 

  " 아이들은 일찍 자야 된다고 부모님께 배우지 않았니? "

  무서워서 대답을 못하자 인형은 손으로 내 입술을 꼬집었다. 아아악! 아, 아파!!

  그러다 팍! 하고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입술이 풀렸다.

  이번엔 내 의지와 다르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 응. 배웠어. "

  " 그럼 왜 아직 자지 않은 거니? " 차분하지만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화가 아주 많이 났나 보다. 

  하지만 이유를 말할려면 친구들 이름까지 말해야 한다. 하지만 말하면 그 애들도 안 좋은 일을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다해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 좋았어. " 그렇게 말하곤 인형은 하늘에 떠 있는 채로 방문을

나갔다. 

  " 뭐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읍. 읍! "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인형은 거실을 지나 문앞에 멈춰섰다. 옆창에서 노란 불빛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 뭐지? '

  인형은 문을 저절로 열어 밖으로 나갔고 나도 같이 끌려갔다. 거친 시멘트 바닥과 집 왼편의 화단들을 보니 장소는 마당인 것 같다. 

' 도대체 왜? '

  순간 인형하고 눈이 마주친 아이는 저주를 받는다는 남자아이A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사실 원래라면 걔는 바로 나한테 저주를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자길 극진히 보살펴준 게 고마웠는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종의 유예 기회로 이유를 물었으나 자백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저주 의식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때 인형이 걸었던 저주는 이랬다. 먼저 개집 앞에 인형들이 모여서 장작을 갉아먹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을 둥그럽게 빙둘러싸서는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 뭐, 뭐야? 왠 춤? ' 당황해서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나의 마음은 상관하지 않는 다는 듯 인형들은 계속 춤을 췄다. 그때 개집 안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맞춰 한 목소리로 인형들은 " 또치야, 또치야, 나오너라, 밖에 나와, 같이 놀자. " 라고 쉬지 않고 계속 합창을 했다.

  인형들이 노래시작 후 세 바퀴를 돌았을 때였다. 또치가 으르릉 거리며 개집을 나왔다. 또치가

앞으로 전진하면 인형들도 다 따라 움직였다. 신기한 모습이었다. 

  또치가 그렇게 앞마당 중간에 다다를 때 인형들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했다.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 또치야! 거기 가면 안돼!! " 그제서야 또치는 하늘에 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또치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러곤 나를 향해 멍멍, 하고 짖어댔다. 

  " 안돼, 또치야. 돌아가! 개집으로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 내가 그렇게 울며불며 난리를 쳤지만 또치는 계속 짖어댔다. 오히려 더 흥분한 것 같다. 나한테 시선을 둔 채 불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인형의 눈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또치도 하늘로 들어올려졌다. 목을 조르는지 짖지도 못하고 낑낑 신음했다.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 안돼! 제발 또치만은 풀어줘!! 걘 아무 잘못 없어!! " 하지만 인형은 내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요동하는 나와 달리 인형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눈으로 떠있어서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갑자가 오른팔을 들더니 힘차게 내렸다. 그러자 또치가 마당 가운데에서 회전하는 불꽃을 향해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 안돼! "

  어느새 꼬리에 불이 붙었다.

  " 제발 죽이지 마! " 엉엉 울면서 미친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때믄에 땀과 눈물이 곳곳에 부산스럽게 튀었다.

  그래도 인형은 내게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불이 활활 타올라 또치를 먹어치웠다.

  " 아아. "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저렇게 또치가 고통에 매여 몸부림쳐도 난 인형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렇게 강아지가 불타 죽어가는데도 인형들은 춤을 멈추지 않았다.

인형들의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커져 마당을 장악했다.

  이젠 절반이 불에 탔다.

  " 흐, 흑. " 

  온기가 다리까지 후끈후끈 올라왔다. 왠지 이상하다. 진짜로 즐거워하는 것 같다. 

  이젠 배부터 귀까지 다 태워졌다.

  이미 늦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내 정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치도 없었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또치를 부르다가 지친 나머지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고 난 2년 인생 반지기를 잃어버렸다.

  또치 사건으로 정신 없는 오전을 보낸 후 나는 거실 가운데 소파에서 뒹굴뒹굴거리며 쉬고 있었다. 또치와 찍은 사진들을 훑어 보고 있었는데 전화벨이 징, 하고 울렸다. 남자아이A의 전화번호였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은 건데? "

  " 아끼던 강아지가 불탄 채로 발견되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조사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학교에 가지 못했어.  " 

  " 범인은 밝혀졌어? "

  " 아니, 용의자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대. 도둑이 죽였다고 하기에는 훔친 물건도 없어서 경찰들이 매우 힘들어 하고 있어. 계획적인 걸로 봐서 그냥 도둑은 아닌 것 같아서 혹시 모르니 인근 CCTV까지 다 조사하고 있지만 그래도 잡지 못하면 미제로 끝내버릴 것 같아.

  " 또치를 죽이다니. 정말 너무하다. 많이 슬펐지? " A의 진심에 난 감동을 받았다.

  " 응, 그래도 많이 울어서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 

  " 다행이네.근데 말이야, 어젯밤 정말 무서운 일이 있었는데 말해줘도 되니. "

  " 뭔데? "

  " 어제 학교 끝나고 여자아이A, B, 너, 남자아이A, B 모여서 모래 놀이하다 했던 약속 기억나니? 12시 12분 12초엔 인형들이 모두 살아서 움직인다는 괴담이 사실인지 알아내기 말이야! "

  " 어? 아, 아니. "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 우리가 어제 그런 약속을 했었나? 기억이 안나는데. " 

  " 그래? 아깝다. 그럼 못봤겠네. "

  남자아이A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봤다는 거지?

  " 어젯밤 실제로 인형이 살아움직이는지 궁금해서 잘 때 인형을 안고 잤어. 눈을 떠보니 시간은 12시 20분이었고 인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어. 처음엔 착시라고 생각하며 넘어갔지만. 하지만 30분이 지나서 다시 눈을 떠보니 이번엔 인형이 있었어. 다시 눈을  감고 떠봤는데 이젠 인형이 안 보였어. 그리고 다신 눈을 뜨지 않았어. "

  " 왜? "

  " 얼굴 뒷편에 인형이 서서 내 뒤통수를 내려보는 시선이 느껴졌거든. 처음 소문을 엄마한테 들었을 땐 인형이 무슨 저주를 내릴지 궁금해서 인형하고 눈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뚝, 하고 사라진 거야. 만약 내가 실제로 본다면 그 뒤로는,  인형의 눈이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무섭게 느껴졌던 거야. 도저히 상상이 안돼서 더 무서웠던 것 같아. 또 겨우 저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 "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모르게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치 누군가 린치로 정수리를 여러 차례 후려친 것 같았다. 아파서 이마를 세게 문질렀지만 그래도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눈덩어리처럼 불어나 이마 구석구석까지 고통을 심어놓았다. 너무 아팠다.

  " 아흑, 갑자기 머리가 죽을 듯이 아파. "

  A의 말이 수화기 너머에서 엉크러져 들려오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쳐져있던 장막이 벗겨졌다. 거기에 직방으로 작은 낙뢰같이 두통이 내려쳤다. 모든 게 떠오른다. 그 사악했던 인형부터 몸 구석구석까지 타들어가던 또치, 기괴했던 인형들의 북유럽풍 강강술래까지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 A야. 학교 끝나면 여자아이A,B, 남자아이A,B를 놀이터에 데려와줘, 할 얘기가 생겼어.  "

  초월적 직감이 나의 선택을 그렇게 이끌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지금의 내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모험이 되리라곤 삼태할미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같이 아이들 모두 포함해서) 남자아 이A는 나의 말의 속뜻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방금전에는 머리가 아프다더니, 이젠 애들까지 불러 모으라고? 왜 그래야 되는 거야? 그것도 내가. "

  " 봤거든, 인형의 눈을. "

  그 대답을 듣고 A는 토를 달 생각이 없어졌는지 별말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난 기왕이면 옆반에 다니는 귀신 보는 아이라고 불려지던 여자아이 C를 데려와 주라고 부탁을 덧붙였다. 남자아이A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오후 3시 30분,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학원가기 10분 전엔 헤어지기.) 아이들이 모두 모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원을 그려 앉아 있었다. 내 왼쪽 반원 구역엔 여자아이A, 여자아이B가 오른쪽에는 남자아이A, 남자아이B가 내 맞은편엔 TV애서 튀어나온 듯한 블랙서클의 소유자 여자아이C가 앉아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아이였다. 실은 사람들과 대화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란 걸 대화를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 른이 되서 생각해보니 원치 않게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수시로 보게 되다보니까 성격이 음침해진것 같다. 

  아이들은 이 모임의 총지휘자인 나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 좋았어, 오늘 내가 너흴 불러둔 이유는 쉽게 말하면 이거야, 12시 12분 12초데 인형이 살아움직이는 걸 본 사람은 손 좀 들어줘. "

  남자아이A, B, 여자아이A, C 그다음 내가 손을 들었다. 

  " A야, 사흘째 되는 날 전날 밤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본 아이는 괴물들이 사는 어둠의 세계에 인형들이 데려간다고 말했지? "

  " 어? 응, 맞아. "

  " 내가 기르던 강아지 또치있지? 어젯범 내가 아끼던 여자아이 인형이 나와 눈이 마주쳤던 걸 이유로 불에 태워 죽였어, 처음엔 너무 화가 나서 A 너하고 전화에서 처음 다시 기억이 났을 때 그 인형을 죽여버리고 싶었어. 그런데 다시 보니까 궁금해져서 그 세계에 가서 괴물과 인형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졌어. ' 인형들아, 어째서 너희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길 싫어하는 거니? 왜 저주를 내리는 거야?' " 

  애들이 다 미쳤냐는 듯 날 보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장했다, 내 생각을.

  " 처음 또치를 반려동물가게에서 만났을 때 그 애는 매우 사납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어. 그래도 또치가 마냥 좋아서 집에 데려와 길렀지만 다가 가면 왼손을 물기도 하고 만져주려고 다가가면 으르렁 짖으면서 싫어하기만 했어. 그래도 또치가 마냥 좋아서 왜 화를 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아빠와 같이 동물병원에 또차를 데려가 검사를 했어. 얘의 이러한 인간혐오 증세의 연유를 되집어보니까 또치는 사실 이미 주인이 있었는데, 사고로 죽고나서 가족이 또치의 엄마, 아빠, 형, 여동생을 끓여먹으려고 도살해버린 거야. 그걸 보다 놀란 또치는 주인의 집에서 도망쳐 이곳저곳을 외롭게 떠돌아다니다가 개사냥꾼에게 잡혀서 2주 동안 철창신세를 지낸 거야. 다행히 인근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구출되어 반려견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됐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쌓여 왔던 사람 에 대한 불신이 또치를 고립적인 성격으로 바꾸게 만든 거래. 그래서 의사선생님의 지시대로 한 삼개월 동안 또치를 놔두니까 나중엔 이 사람이 자길 해할 마음이 없음을 깨도 눈치챘는지 내가 손만대도 물던 애가 가만히 있게 됐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우선 그걸 알라보고 판단은 나중에 하는 거야, 아무리 미워도 제대로 알고미워하는 게 맞는 거잖아, 난 그렇게 생각해. 뭐든지 눈에 보이는 건, 누군가의 판단만으로 모든 것의 가치, 선악을 말하면 안돼. 그래서 난 직접 인형들이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 그 세계에 가고 싶어졌어. 그 세계의 보여지는 풍경 안에도 보이지 않는 인형들의 속사정이 숨어 있을 거 아니야, 그치? 그리고 내 저주도 풀고 싶고, 어떻게 풀어줄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다만 그렇다고 강제로 가자는 건 아이냐, 거기 싫은 사람은 가지 않아도 돼, 그러나 분명 나처럼 저주에 걸린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나혼자만 가면 힘들 것 같아서, 그 저주를 풀고 싶다면 겉이 가줬으면 해. 어때? 그럼 같이 갈 사람은 손 들어줘. " 내 말에 감화되었는지 아이들은 다 일제히 손을 들었다. 나의 호위병들을 얻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안심도 됐다.

  

  2.

  자, 그럼 그 어두운 세계에 가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까? 그걸 알아보려고 C를 데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 방학이 되면 가끔씩 아빠랑 여행을 떠나는데 영국 리버풀, 중국 창장강,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내 어딜가도 밤 열두시 십이분 십이초가 되면 인형들이 살아 움직여. 난 영혼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어서 옆에 인형의 영혼이 내가 일어나는 걸 보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조금 기척이라도 느끼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 그래서 걔들이 아이들을 그 세계로 데려가도 문도, 길도 볼 수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날이었어. 멍하니 천장을 통과하고 있는 인형의 영혼이 보인 거야! 그때 실수로 눈이 마주쳤지만 액운이 씌어지는 게 느껴지

지가 않아서 난 안심하고 그 혼들이 어디서 오는지 혼이 지나가면서 나는 자국을 따라 그 근원지를 찾아보았어. 가보니까 혼이 몸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타서 더이상 온데갈데 없어진 혼들이었어. 그 애

들을 추적해보니 각 지역 어딘가에 그세계로 통하는 문이 밤에 생기더라고, 영감이 없는 사람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영기가 서렸는데, 문제는 매일매일 그 위치가 바뀐다는 거야. 일본 도쿄도 하치오

지시 모토하치오지마치의 하치오지성 안에 있던 문이 다음날에는 하치오지시 인근에 있는 다카오산(599m) 신사 고마이누에 있고 그 다음날에는 하치오지시 케이오 호리노우치역의 큰 나무로 바뀔 정

도로 다음엔 어디 있을지 예측이 불가능해. 그러니 오늘 한번 들어가면 다시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 수 있으니까 할 일은 그날 밤 내에 매듭을 짓는 것이 제일 좋아. " 

  " 좋았어! " 역시 불러오길 잘했다.

  " 그럼 오늘밤 12시 12분에 놀이터에서 모이자!! "

  C는 무턱대고 혼들의 소굴에 가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도구들은 왠만하면 다 챙겨오라고 당부했다. 그럼 뭐가 좋냐고 여자아이B가 물어보니까 너무 많아서 힘들면 대

표적인 도구들 몇 개만이라도 챙겨오라고 말했다.

  나는 C가 준 포스트잇에 C가 적어준 난생 처음보는 괴상한 이름들이나 익숙한 이름들을 집에 가서 바로 훑어보았다.


  1. 모리시오(盛り塩)

  재료: 5cm 정도 접시 여러 그릇, 소금 10~15g, 분무기 or 원뿔 모

양의 틀

   1) 접시에 소금을 올려놓는다.

   2) 분무기를 뿌려 원뿔 모양을 만든다.

   3) 일주일에서 한달 사이에 교체(물에 흘려보낸다)한다.

  2. 다음에 나오는 부적들을 몸에 붙여가지고 온다.

   1) 옴마니발모부

   2) 괴물퇴치부

   3) 관음부

   4) 악귀 퇴치부

  3. 경을 외워온다.

     " 육경신장 육갑신장 기문신장 팔문신장 오방오령신장 육도병법

   사막신장 가유본평 제대신장 전에서 사방으로 진을칠제 동은 팔문

   금사진 남은(중략)환희좌정하옵소서. "

  4. 열정, 정열이 담긴 물건을 챙겨온다.

  5. 바닥에 큰 원을 그리기 위해 먹물과 붓을 챙겨온다.

  6. 돈과 성냥갑

  7. 오줌

  8. 성경책

  9. 붉은 고추

  10. 팥, 찹쌀


  나는 개중에서 또치와 찍은 사진(4), 붉은 고추 2개, 먹물통, 먹붓, 부적 4장, 소금이 든 작은 지퍼백, 소금을 넣을 천을 챙겨왔다. 아이들도 각자 챙겨올 수 있는 것만 준비했다.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는 기괴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자아이C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문」이 있는 장소를 알려줬다. 다행히 장소는 하교 앞 운동장, 그렇게 놀

이터에서 멀진 않은 곳이다.

  C가 선두에 섰다. 중간에 인형들을 만나면 온 몸을 무장한 것이 수상해 공격할 수 있으니 그런 것이다. 가는 길마다 기척이 느껴지면 C는 늘 다른 길을 요리조리 잘도 찾아냈다. 참 신기했다. 그렇게 이상한 긴장상태에서 5분만에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중심이 직사각형 문이 있는데 안이 붉은색으로 채워져있었다. 뭔가 기분 나쁜 문이었지만, C는 바로바로 우리들을 문안으로 들여보냈다.

  " 절대 뒤를 돌아보지마!! 앞만 보고 달려가! "

  등 뒷가에서 C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모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뛰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

는데 무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정말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도는 일이다. 그래도 금지된 세계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 우리들은 이미 지킬 것도 없는 몸이어서 그냥 계속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 앞에 선두로 달리던 남자아이B가 앞을 가리키며 기쁨에 겨워 말했다. 

  " 저기 문이 보여! 문이 보인다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만 더 참자! " " 그래! " " 그래. "

  모두 쉴 틈이 없이 뛰느라 벌써부터 지쳤는지 아까보다 발걸음이 느려졌는데 그 말이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젖먹던 힘을 다해 그「문 」으로 뛰어갔다.

  「문」은 마치 네모 모양의 비눗방울 채에 오렌지식 안료를 끼얹은 주황색 거품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모습이었다. B가 먼저 들어갔다.

  B의 몸의 절반이 주황색 문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눈 한번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모두 도움닫기 하듯이 숨가쁘게 뛰어 문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정체모를 불가사의한 물줄기에 휩쓸려 곧바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숲속의 우거진 풀밭 위에 누워있었다. 하늘은 이미 땅거미가 져서 앞의 나무들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 아악ㅡ!! " 가까이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남자아이B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졌나 보다.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 으윽! 아파! 아프다고!! 만지지마! "

  여자아이A의 손을 뿌리치며 B가 말했다. 아무래도 바닥에 착지하는 도중에 실수로 발목을 접지른 모양이다.

  " 어떡하지? 약도 없는데•••. " 여자아이A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 다행이다. 미리 약과 붕대를 챙겨오길 잘했네. " 남자아이A가 말하며 스스슥 가방을 벗어놓았다. A는 가방에서 미리 챙겨온 라이트를 모두에게 나눠 준 후 B의 발목을 비춰놓았다. B의 발목은 왼쪽으

로 심하게 꺾였고 눈에 띄게 퉁퉁 부어있었다.

  B는 능숙하게 응급처치를 했다. 집에서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A가 이렇게 안전에 철저했을 줄이ㅑ, 나와 여자아이A, B는 너무 놀라서 속으로 감탄까지 하며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 휴, 자, 다 됐어. " 남은 붕재를 구급 세츠에 챙겨넣으며 A가 말했다.

  " 이제 어때? " A가 B에게 물어봤다.

  " 아까보다는 훨씬 더 나아졌어. 땡큐! " B가 대답했다.

  그래도 이대로 가기는 힘들 거라며 남자아이A는 B하고 같이 있어 줄 사람 한 명만 여기 남고 떠나자고 제안했다.

  " 내가 B와 같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 여자아이A가 말했다.

  나 때문에 B가 다친 것 같아서, B에게 미안하고 말했다. B는 오히려 다쳐서 가지 못하게 된 게 마냥 좋은 건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우리는 C가 올 때까지 계속 수풀에 앉아서 기다렸다. 숲은 기분나쁘게 조용했고 위압감도 주었다. 인형이나 괴물들에게 들킬 까봐 라이트는 꺼두었다. 그래서 가까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친구들의 얼굴과 윤곽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곳에 살고 있을 괴물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 거기에 동력

이 더해져 아직 만나보지 못한 괴물의 눈부터 다리, 입, 더듬이, 날개, 털색까지 상상해보기 시작했다. 이러면 덜 무서워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젠 한기까지 느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그래도 인형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때맞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왼쪽에 앉아있던 B의 동반자인 남자아이A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C가 올 때까지 각자 여기에 살 것 같은 괴물을 상상해서 말해 보자. 그럼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어때? "

  " 좋아. " A가 대답했다.

  어느덧 이야기는 새순이 돋고 뿌리를 내려 한 그루의 나무로 하나의 구상을 이뤄나갔다. 아이들은 다 하나같이 본인만이 떠올릴 수 있는 개성적이고 기괴하며 기상천외한 괴물들을 창조해냈다. 키도 성

격도 가지각색이지만 아이들을 잡아먹는 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나무인간이 아닐까라는 추측부터 마음을 갉아먹어 감정을 빼앗아 버리는 목화꽃잎의 요정, 신비의 청옥 주두부터 기둥, 양초, 거대한 스테인글라스 창문까지 살아있는 거대한 유령성까지 자신이 읽은 동화나 엣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 설화, 공포 영화의 히든 몬스터까지 이 자리에 불려와서는 합쳐지고, 덜어내고, 덧붙여졌다. 그렇게 괴물 만들기에 정신이 팔려서 방금 전 우리들의 마음을 꼬집었던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잠시 뿐이었지만 극도로 희미해져버

렸다.

  그런데 친구들의 웃음 소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가까운 곳, 숲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바로 발소리였다.

  " 짝, 짝, 짝, 짝. "

  순간 우리는 연습이라도 한 듯이 곧바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 짝, 짝•••. 짝, 짝•••. "

  점점 소리가 가까워진다. 우리는 조용히 스무스하게 일어서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 짝. " 발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날 기준으로 오후 4시 방향에서 말이다. 

  원래 그러지 말아야 되지만 난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쪽으로 라이트를 비춰보았다.

  그것은••••그것은•••••C였다. 

  " 하아! "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다리힘이 풀려 털썩, 하고 우리 모두 주저앉았다. 

  " 너 였어? " 남자아이B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C를 올려보며 말했다. 모두 어지간히 긴장했던 모양이다. 

  " 왜 이제서 온 거야? " 계속 랜턴으로 그녀를 비추며 나는 질문했다. 

  C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 허억•••. 허억•••. " 헐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뭐,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여자아이A가 걱정되서 물어봤다.

  " 괴물들에게••헉, 헉, 쫓기고 있었어. " C가 대답했다. 

  그 말은 충분히 강력한 신호탄이 되었고 우리는 재빨리 C를 따라 머리 위에 묶어 놓은 랜턴을 켠 채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정말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람쥐 소리도,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나무가 어딨는지 정확히 얼마니 더 가까이 있는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오직 머리에 찬 벨트에 부착된 라이트에서 나

오는 한 줄기 빛이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우리는 빛이 땅에 닿아 만들어낸 원에 의지해 숲을 뛰어다녔다.

  불빛에 조금씩 드러난 숲의 지형은 참으로 험난했다. 땅 곳곳에 온갖 꽃과 풀이 무질서하게 잎을 가지에서 내리며 자라나 있었고, 지나치게 굵게 자란 나무 뿌리가 우리의 갈 길을 위협했다. 엄청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조금이라도 지났더라면 형성될 수 없는 생태계였다. 

  그래도 우리는 달려갔다. 누군가가 넘어지면 재빨리 일으켜세웠다. 앞에 나무가 보이면 나무가 앞에 있다고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지막하게 알려주었다.

 앞에 가시넝쿨이 그 뾰족뾰족한 가시를 위엄있게 내보이며 우리를 위협해도 재빨리 팔로 밀쳐서 지나갔다. 그렇게 달려가니 몸 여기저기 성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도 모르 게 행렬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달린지 한 10분이 지났을 즈음, 앞서 달려가던 C가 멈춰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무릎으로 뻗쳐내려오는 팔을 받치며 헥헥, 하고 헐떡였다.

  " 따돌린 거 같아•••. " 겨우 숨을 고르며 C가 말했다.

  우리는 옷이 더러워질 건 신경쓰지 않고 땅에 그대로 주저 앉거나 눕거나 누운 채로 각자 자세를 바꾸며 휴식을 취했다.

  우리 모두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티셔츠, 바지는 가시에 뜯겨서 생긴 구멍이 파다했다. 팔은 붓고 시리고 완전 장난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소방벨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괴물한테 잡아먹혀 죽

는게 이것보단 훨씬 낫겠다는 미친 생각도 들 정도였다.

  " 괴물은 어떻게 생겼어? " 여자아이B가 물었다.

  매우 장황스럽게 C는 대답했다.

  " 빛을 비춰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징그럽고 포악하게 생겼어. 뼈가 거의 다 드러났고, 왼다리와 등에난 살가죽이 너덜너덜해진 채 남아있었어. 내장이 다 드러났는데, 보다가 토할 뻔했을 정도

로 너무 생생해서 역겨웠어!! 괴물의 위장에서 덜그럭덜그럭 뼈다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라고!! 사람도 먹어치우는 모양이야. 그래선지 내가 과연 먹을 만한 녀석인지 탐색하려는 것처럼 날 뚫어지

게 쳐다봤어. 난 재빨리 나이프를 이용해서 나무를 타고 놈이 가길 기다렸어. 그녀석이 어딘가로 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내려와서 너희들이 있는 곳을 찾아 걸어가는데 놈이 뒤에서 날 쫓아오는 소리가 들

려왔던 거야, 글쎄. 그렇게 뛰다가 너희들이 있는 곳을 발견했고 놈을 따돌린 후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 

  " 어쨌든 다행이다. 우린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 푸하, 안도의 한숨을 쉬고나서 여자아이B가 말했다.

  " 맞아, 네가 안 올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 여자아이A가 맞장구를 쳤다.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 너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는 생물의 영혼을 볼 수 있으니까, 우린 그러지 못하잖아. 그래서 무턱대고 가다간 괴물을 만날 것 같아서, 여기 계속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었던 거야. " 

  그때 남자아이B가 대화에 끼어들어 C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했다. 

  " 괴물도 따돌려 놓았으니•••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돼? "

  " 앞으로, 좀만, 더, 가면 돼. 헉. " 그렇게 말하며 C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자, 잠깐 뭐라고? " 남자아이B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라이트를 켜서 짐작가는 곳으로 빛을 쏘아보냈다. 우리도 똑같이 따라했다.

  보이는 건 빽빽하게 자란 수풀과 그 뒤에 서있는 왼쪽,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보였다. 나무 뒤엔 당연히 또 다른 나무가 있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하나 보였다. 빛을 문지기

처럼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비춰보니 앞은 그동안 갔던 길과 달리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즉 우리는 지금 숲 의 외곽지역이나 아니면 벌목지대에 도착해있다.

  " C 말이 맞는 거 같아. 저기 앞에 나무가 별로 없어. 사람이 사는 데가 있는 거 같아. " 나무 사이를 주시하며 말했다.

  " 하지만 단순히 나무가 덜 자란 걸 수도 있잖아. " 남자아이B가 반문했다.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C에게 물었다. " 저기에 뭔가 보이는게 있는 거야? " 믿음과 불신이 반반씩 섞인 질문이었다. 

  " 응, 인형들이 엄청 바글바글 모여있어. 사람의 형체도 보이는데 진짜 사람인지는 확실하진 않아. 사람만큼 큰 인형일 수도 있거든. "

  C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 두개, 세개만 있는 게 아니라? " B가 이번엔 식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응. " C가 대답했다.

  잠시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게 실감되지 않았다.

  발이 선뜻 떼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에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도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야 된다, 라고 결심하며 혹시 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친구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절대 물러설 수는 없다고 허공에 대고 웅변하는 것처럼 결의에 찬 표정을

지은 남자아이A, 살짝 불안해하는게 티가 나는 남자아이B, 선뜻 들어가기 싫다고 말은 못하겠어서 그런 건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여자아이B, 이미 두려움을 초월해버린 눈으로 앞만 바라보과  서 있는 여자아이C,  공포를 억누르려고 하는지 그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입술을 앙 다물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여자아이A까지. 

  모두 다 도망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 까아아아아악ㅡ! " 동쪽에서 짐승이 내지르는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몸 구석구석에서 한기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기분 나쁘다 . 

  " 뭐, 뭐야! 어떻게 알아챈 거지? " 당황해하며 C가 말했다.

  " 그럼 저 소리는 우리 위치가 괴물들에게 들통났다, 그런 뜻이야? "

 다급한 목소리로 여자아이A가 물었다.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 라고 대답하면서 C는 정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울상을 지으며 남자아이B가 "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돼? " 라고 질문했다. " 이대로는 도망치기도 전에 잡혀버리는 거 아니야? " 

  " 아니, 걱정 안해도 돼. 저기에 " 수풀 뒤에 그 정체를 드러낸 지평선을 오른손으로 가리키면서 " 인형들의 본거지가 저기 있어. 가운데에 문이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면 안전할 거야. " 라고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쿠콰쾅! 하고 천둥이 우렁차게 울렸다. 그다음 마치 영화에 위기상황임을 알려주려고 긴박한 음악이 깔리듯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괴물들의 비명소리는 어째서

인지 점점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마치 축구선수들이 공을 패스하는 것처럼 비명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괴물이 숲에 많이 포진해 있는 것 같다. C가 없었더라면 우린 저 중에 한 마리라도 마주쳤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혔을 것이다. 상상만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 모두 날 따라와! " C가 말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수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우리도 따라갔다. 

  우린 재빨리 나무 사이를 지나 나무 몇 그루 빼고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기나긴 평지로 달려갔다. 1분 정도 달리다 보니 지평선 끝자락에 뭔가가 솟아있는 게 보였다. 달빛 덕분에 잘 분간이 되었다.

  칡 같은 넝쿨 식물이 자라나 잎이 전체를 가려서 산인지 아님 아주 오래된 건물인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 끼아아아악ㅡ! " 아까의 그 비명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뼈만 남은 거대한 짐승들이 우릴 쫓아오는 게 보였다. 살가죽은 다 썩어말라 비틀어졌고 그 아래엔 뼈가, 또 그 안엔 온갖 기관들이 멀쩡하게 움직 이며 순환•배설•소화 활동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로테스크한 괴물의 모습에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도중에 넘어질 뻔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만 보며 뛰어갔다. 다행히 괴물들은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느려서 도망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눈코 뜰새 없이 달리다가 어느새 우리는 그 거대한 그것 안에 들어와 있었다.

  " 문은 어땋게 닫아? "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이 문이지 사실상 직사각형으로 뻥 뚫려있는 구멍이라 손잡이가 없었다!! 

  " 조용히 해 봐! 분명 무슨 장치 같은 게 있을 테니까, 있을 테니까•••. " C는 갑자기 짜증을 내더니 이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우린 라이트, 성냥불을 이용해 벽을 밝혔다. 그다음 손으로 벽을 더듬고, 눈으로는 벽위•아래•왼쪽•오른쪽 순으로 훑어보며 비밀 스위치 같은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보기 시작했다.

  문에서 2미터 떨어진 곳까지 더듬다가 다른 벽돌보다 좀 더 깊숙히들어가 있는 벽돌을 찾았다.

  " 얘들아! 아무래도 찾은 거 같아! " 내가 말했다. " 어디? 어디? "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 어? 진짜다! 빨리 눌러봐! 빨리! 빨리!! " 

  " 알았어! " 손에 힘을 주니 그그극, 하고 벽들이 마찰음을 내며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벽돌이 완전히 끝에 도달하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천장에서 드드드, 무언가 기계장치같은 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문바닥에서 쿠구구궁, 하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크고 묵직해보이는 바위문이 올라와 문을 점점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철퍽! 철퍽! 하고 크고도 날카롭게 괴물이 비에 젖어 불어버린 흙탕물을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다급한 얼굴로 문 위쪽을 올려보며 바위문 끄뜨머리가 문을 완전히 다 닫히기 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 순간! 문이 그그극 올라가다가 쾅!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때 딱 맞춰 괴물이 문에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인해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 꺄아아악!!! " 여자아이A, B가 무서워서 소리질렀다.

  그래도 문은 꼼짝을 안했고 도리어 괴물의 몸이 산산히 부서지고 파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를 죽게 만든 우리가 야속한지 괴물들은 끼아아아악ㅡ!!! " 하고 아까보다 더 크게 비명을 내지르벼 너나 나나 할것 없이 문에다가 박치기를 했다. 그래도 꼼짝을 안하니까 잠시 있다가 또 한번 부딪치

고나서 포기했다는 듯이 아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 끼아아아아아ㅡ! " 하고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씩 철퍽 철퍽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몇 마리는 꼭 남아선 건물을 뱅뱅 돌며 계속 우리

를 감시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문 오른쪽에서 천천히 찰박찰박 걸어오는 소리가 줄어들어서 완전히 가버린 줄 알았는데 얼마 안가 또다시 오른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 미친 XX들. " 남자아이B가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발을 문지르며 " 좀 닥쳐봐. " 라고 남자아이A가 말했다. B를 업고 달려와서 많이 지쳤는지 목소리에 힘이 별로 없었다. B는 조금 숙연해졌는지 더이상 짜증을 내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괴물이 떠나가기를 두고 보며 기다렸다. 왜냐하면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발소리를 괴물이 들으면 한꺼번에 달려와 문을 부셔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ㅡ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어진 산성이라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중 공격을 하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ㅡ


  한시간이 흘렀다고 짐작될 때 괴물들도 완전히 탐색을 포기했는지 더이상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휴우~! 살았다•••. " 남자아이B와 여자아이A가 말했다.

  " 쥐는 좀 풀렸어? " 남자아이A를 향해 물어봤다.

  " 어, 이제 좀 나아진 거 같아. 하지만 곧바로 움직이면 또 쥐가 날 것 같아. " 벽에 등을 기댄 채로 A가 대답했다.

  " C야, 밖에 뭔가 보이는 게 있어? " 여자아이B가 다소 공손하게 물었다.

  " 응, 두 마리가 자고 있어.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나봐. " C가 대답했다. 

  " 그럼 쟤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움직이면 되겠다, 그치? " 여자아이A가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 응. " C가 대답했다. 

  우리는 들킬까봐 양초도 라이트도 모두 끈 채로 짧은 휴식시간을 보냈다. 여자아이C는 지쳐서 골아떨어졌고, 남자아이B와 여자아이A 그리고 B는 남자아이B가 챙겨 온 과자들을 야금야금 먹으며 배에

짝 달라붙은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 팀의 리더는 나였으니까, 나름 책임감이 들어 그랬던 모양이다. 

  " 이제 충분히 쉰 것 같으니까 모두 일어나자!! " 괴물이 깰까봐 짝짝짝, 세게 박수를 치진 못하고 애들 귀를 일일히 다 붙잡고 깨웠다.


  라이트로 사방을 요리조리 훑어보며 우리들은 천천히 전진했다.

  벽은 울퉁불퉁했다. 별다른 장식같은 것 하나도 없어서 밋밋하게 느껴졌다. 색깔은 전체적으로 민트색이었다. 건물의 구조는 생각보다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복도 이외에 다른 방이라든지 복도 따위

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현대인이 만든 건축물은 아닌 모양이다. 아직 집의 세분화가 진행되진 않은 걸로 보아서 고대 마야문명같이 아득히 먼 과거, 아직 신정체제를 유지한 시대에 세워

진 건축물 밖에는 신상도 기둥도 없었다. 보통은 조금의 잔해라도 남아있어야되는데 그것조차도 없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보며 계속 걸어갔다. 저주를 건 이유를 알아내려고 온 것인데 왠지 이 세계엔 그것보다 더 큰 비밀이 묻혀있나보다. 그럼 내가 그것까지 다 드러내버리겠다, 결심하고 가는 길에만 집중했다.

  " 어? 잠깐 멈춰서 봐. " 역시 여기서도 선두로 걷던 C가 갑자기 쉿, 하고 왼손 검지를 입술에 대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갑자기 오른팔을 들어서 걸어가던 우리를 막아섰다. 

  " 무슨 일이야? " C의 귀에 대고 물어봤다. 

  C가 작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기 앞에 사람이 한명 오고 있어. "

  ?!, 순간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전에 남자아이A가 한 말에 의하면 이 세계는 12시 12분 12초에도 자지 않은 어린이나 어른들에게 인형들이 저주를 걸고 사흘째 되는 날 밤에도 자지 않은 어 린이를 납치해 오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래 어딘가에 갇혀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이 건물을 멀쩡히 걸어다니고 있는 것인가?

  " 키가 190cm도 넘는 것 같아. 평생 듣도 본적도 없는 장신이야. 서양사람인거 같아••••. 영혼이 아직 땅에 붙들려 있는 걸 보면 귀신은 아니야, 하지만 우릴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건 다 꺼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

  그리고 진짜로 빛이 보이지 않는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탁, 탁, 탁 목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재빨리 자기만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나는 피부를 지져버리려고 성냥갑에 마찰을 시켜 불을 붙인 성

냥 한 개비와 조명탄을 준비했다. C는 바지 주머니에서 맥가이버를 꺼내 나이프를 허공에 내세웠다. 남자아이A는 거즈를 자를 때 쓰는미니 가위와 뚜껑을 열어 둔 소독용 알코올통을 꺼내 들었다. 남자아

이B는 다리라도 깨물려고 입을 벌려 새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영구치들을 무기처럼 과시하며 탁탁탁 부딪혀댔다. 여자아이B는 어딜 가더라도 늘 챙겨두고 다니는 십자수 세트의 바늘을 꺼내 찌르는 부

분을 위로 드러내고 손으로 문질러대며 눈을 찔러버릴 준비를 했다. 여자아이A는 고작 다닌지 2주 밖에 안된 태권도장에서 배운 태극 1장의 품새를 취해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모두가 만반

의 준비를 하는 가운데 복도에서 하얀 빛이 깜박이는 게 보였다. 밝기로 보건대 양초나 성냥불보단 크지만 깜박임이 없이 곧게 직진하는 라이트의 불빛과 달리 깜박깜박 불안하게 빛나며 일렁였다. 공포

영화에서 본 적 있는 오래된 철제기름등이었다.  

  C는 작게 속삭였다.

  " 먼저 공격하지 말고 저 사람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내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공격하도록 해. " 

  그러고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맞대어 붙여들고는 휙휙 내리는 제스처를 보여줬다. 저것이 방금 전 C가 말했던 공격신호인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여러 번 반복회상해서 머릿속에 완벽히 각인시켜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잠시후 빛의 장막으로 그 사람이 발을 내디뎠다.  그다음에는 다리를 감싼 갈색 수의복이, 그다음엔 덜그럭덜그럭 흔들거리는 철제기름등을 들고 있는 팔이, 또 다음엔 완전히 모습을 공개했다. 

  그는 영화 「빌리지villege」에 나오는 감시자들이 입는 옷과 유사한 수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색깔이 노랑이 아닌 갈색이라는 점이 달랐다.

  키는 아주 커서 마치 천장을 뚫을 기세로 계속 자라나는 거인같아보였다. 그는 우리가 자경단원들처럼 전투 태세를 하는 걸 보고 무지 깜짝놀랐는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우리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 오! 오해하지 마세요. 전 여러분을 해치려고 온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을 안내하려고 온 것입니다. " 라고 두 손을 좌우로 돌리며 능청스럽게 말

했다.

  그렇다고 의심을 거둘 우리가 아니었다. 도리어 우릴 속이려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세워야 된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낌새를 그 사람도 알아차렸는지 그는 일단 자기소개를 해 개인신상을 조금은 털어놓는 전략을 취했다.

  "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이름은 앙리 드 마르셀입니다. 태어난 곳은 프랑스의 몽셸미셸인데 열네살 때 이곳에 끌려와 무려 20년 동안 여기서 ' 연구자 '로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세계

의 학자들처럼 진리 탐구와 문제 해결•오류 수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것을 연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저기 연구소로 들어갈 때 설명해 드리죠. 자, 들어갑시다. 모두가 여러분

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

  C가 그래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어조로 날카롭게 앙리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 우리가 왔다는 건 어떻게 안 건가요? " 

  " 문에 ' 크류류 '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구소 안까지 들려와서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말은 누군가 ' 크류류 '한테서 무사히 살아나왔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것도 자진해서 찾아

올 줄이야!! 마침 점점 인력이 부족해지고 있었는데 정말 잘 됐군요. 연구자들이 매우 기뻐하겠군요. "

  " 밖에 돌아다니는 저 괴물들이 ' 크류류 ' 라고 불리는 것들인가요?"

  "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녀석들은 연구소가 세워졌던 일만년 전부터 존재한 녀석들이라 각 세대별 연구자들마다 부르던 이름이 맨날 달라져 왔기 때문입니다. 물

론 이름이 소실됐다는 건 아니고 각 시대마다 저 괴물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 왜 있는 거죠? "

  " 그건 여기서 바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극비사항이란 뜻은 아니고 오랫동안 우리 선조 연구자들이 이뤄왔던 연구의 의의를 듣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연구소에 들어오길 꺼려하실

까봐 걱정되서 그런 것입니다. "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일단은 시초의 연구자들의 실패작이란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 

  C는 질문거리가 떨어졌는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당신은 프랑스인인데 어떻게 한국인의 말을 알아 듣는 건가요? "

  그건 나도 궁금했다. 마법을 쓰지 않은 이상 어떻게 외국어를 깨칠 수 있겠는가? 

  " 그것또한 저희 연구자들의 연구 덕분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당신들도 만약 여기에 살게 된다면 방법을 배우게 되실 겁니다. "

  C는 드디어 나이프를 거두었다. 그러자 거기에 맞춰 우리도 모두 무기를 치워 두었다.

  " 좋았어요. 일단은 같이 가주도록 하겠습니다. " C가 말했다.

  " 하지만. " 거기서 팍, 인상을 쓰고 " 연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 금도 없다는 것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린 다른 목적이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거 거든요. " 라고 멋지게 갈무리를 지

었다. 

  " 좋아요. 그럼 거래는 성사된 거군요. 그럼 이제 절 따라 와주시면 됩니다. "


  우리는 앙리씨를 따라 한 5분 정도 복도를 걸어갔다. 다행히 앙리씨 이외에 더이상 돌아다니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복도는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똑같았다. 그래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무한히 돌아가는 시간의 물레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실뭉치에서 실을 뽑아내서 물레를 돌리면 실이 짜이는 게 아니라 다시 실덩이로

딸려 들어가는 것이다. 정작 옷을 만드려는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닫지못한다. 영원히•••.

  드디어 실이 뚝, 하고 끊어졌고 물레쟁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저기 복도 끝자락이 하얀 빛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복도 끝에는 바깥의 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고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에 들어가보니 커다랗게 넓은 방이 나타났다. 방의 네벽에는 각각 2개의 문이 달려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

었는지 방 이곳저곳에서 수다를 떨며 활보하며 다니고 있었다. 그때 그중 한명이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 어? " " 너희들은•••. " " 모두 나와 봐! " " 진짜 많이 왔어! " 곧이어 하나둘씩 방문에서 사람이 나오

기 시작했다.

  우리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사람들의 과한 기대를 받았다. 분명 우린 저주를 풀려고 인형을 만나려고 했는데 오히려 멀쩡히 살아있는 ㅡ 저주에 걸리지 않은 ㅡ 사람들을 만났다. 저주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인가? 당시에는 모든 것이 어린아이의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한가득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경험의 전말이 나에게 준 충격은 20년이 지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큰

후유증으로 남아 있다.

  한 성인 여성이 우리 앞으로 다가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모두 안녕? 나는 크리스 헬레나야. 잘 부탁해~. " 여자아이B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저, 저도 안녕하세요•••. " 인사는 끝없이 이

어졌다. 악수를 청하는 이도 있었고,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고, 무뚝뚝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 듯 인사방식도 나라마다 개인마다 다 차이가 났다. 그게 20분이나 계속되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들

었다. 그래서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카시마 유코라는 일본여자와 깎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을 맺었다. 그제서야 난 손을 들어 땀을 닦고 한숨 쉴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용건을 말했다. " 자 그

럼 ' 크류류 '는 왜 만들어졌고, 외국인인 여러분들이 어떻게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말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다음은 만약 있다면 인형들과 만나는 걸 허락해주세요. " 그 연구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앙

리씨가 걸어나와 말했다.

  "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가 없구나. " 

  " 네?! 아까 말해드린다고 약속한 건 바로 당신이잖아요!! " 

  연구자들이 갑자기 일제히 앙리씨를 째려보았다. 히나타 후미코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앙리씨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ㅡ 그래도 다 들렸지만. ㅡ " 왜 당신 멋대로 약속을 정한 건가요?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거잖아요!! " 이번엔 앙리씨가 그녀의 귀에 대고 대답했다. 긴장한 여력이 배어있었다. "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만약 안 그랬다면 애들이 절 믿고 따라와 주지 않았을 거라고요!! "

  그다음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시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변명했다. 

  " 하하하•••. 좀만 더 들어줘. 연구상 기록이라든지 그런 건 우리의권한 아니, 소관이 아니야. 하지만 걱정안 해도 돼. 이곳엔 우리 연구자들만 살고 있는 건 아니거든. 인형들! 맞아, 인형들. 너희들 인형들

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 우리는 모두 엇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들도 우리하고 같이 살고 있는데 권한도 그들이 가지고 있어. 그들이 사실상 이곳의 최종 관리자거든. 그러니 일단 인형들에게 너희들이 왔다는 걸 알려주고 들어와서 선문답하는 것을 허락해주면 너희들은 그들을 만날 수 있어. 그러니 좀만 더 참고 기다려주렴!! 그래 줄 수 있겠니? "

  " 네. 그럴게요. " 진짜 마지막으로 속는 셈치고 믿어주기로 했다.

  앙리씨는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곧바로 무리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들은 어떤 거대한 무늬가 새겨진 벽앞에 멈춰섰다. 무슨 무늬인지 궁금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잃

어버리고 말았다. 저 벽에 새겨진 무늬가 어떻게 생겼냐면 우선 이렇게 생겼다•••. 십자리 수가 순수하고 아름답게 빛을 내는 코발트 안료로 색칠되어 있었고, 두껍게 노란색으로 칠해진 테두리가 숫자를

둘러 싸고 있었다. 같은 수가 세 개 있었고, 왼쪽과 오른쪽은 2미터, 가운데는 크기가 3미터였다. 숫자 중간 큰 점이 코발트 블루로 색칠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2, 12, 12였다!!!

  앙리씨와 그 외에 두 사람이 일렬로 서서 같은 박자로 그 점을 눌러넣었다.

  그러다 쿠구구궁, 하고 12, 12, 12 무늬가 진동했다. 그다음 땅속으로 내려갔다. 

  쿵ㅡ, 하는 단말마의 충격음이 들리는 동시에 무늬가 멈췄다. 어느새 무늬가 있던 자리에는 크고 깊은 비밀 복도가 생겼다.

  우리는 살며시 틈새를 건너뛰어 복도로 들어갔다. 별다른 조명장치도 없어서 몇 발짝만 걸어갔는데 바로 눈앞이 아득하게 어둠에 잠겨버릴 정도로 안은 어두웠다. 그래서 딱, 스위치를 눌러 라이트를 켰 다.

  앙리씨와 연구자들은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 미안하지만, 우린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단다. 인형들에게 너희들이 대화를 원한다는 건 따로 전송해서 알려줄 거야. 거기로 쭉 들어가면 굳게 닫힌 문이 나올 텐데 만약 그들이 허락하면 문이 열릴 거

야. 그러나 거부하면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려도 문은 굳게 열리지 않을 거야. 알겠지? 그럼 행운을 빈다~!!! "

  그렇게 우린 모험의 최종착점을 향해 6개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3.

  " 인형들을 만나면 뭐라고 할거야? " 붓기가 가셔서 절뚝절뚝 걸어라도 가던 남자아이B가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봤다.

  " 왜 저주를 걸었냐고, 물어볼거야. " 앞만 바라보고 걸어가며 대답했다.

  " 그다음은? " 

  " 저주를 풀어달라고, 부탁할 거야. "

  "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 내가 질문했다.

  " 네가 나처럼 생각이 바뀌었을까봐 걱정이 되서. "

  " 그게 무슨 소리야? "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 나 점점 여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거든. "

  나는 걸음을 뚝 멈췄다. B가 당황했는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 왜? " 다시 걸어갔다.

  " 저 사람들을 보니까 인형들이 우리에게 과연 저주란 걸 걸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 그 저즈란 건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에 불과한 게 아닐까? 왜, 그런 거 있잖아. 사람들은 자기가 이

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잖아. 어쩌면 인형들도 사실은 매우 착할 수도 있어.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잊지 않으려고 무력하게 불에 타가는 또치와 생기없던 인형의 눈을 다시 회상했다. 그리고 속으로 호언장담을 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이미 경험했거든.

  " 그래서 난 인형들이 연구자라고 되라고 명령하면 그럴 생각이야." B가 흐느끼는 어조로 용서를 구하는 듯 말했다.

  "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않아 줬으면 해.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야. " 난 B의 형을 떠올리며 절뚝거리는 B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B가 너무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때문에 B에게 들기 시작했던 미움

의 감정이 사르륵 녹아버렸다. 순간 내가 너무 빨리 판단한 게 아닌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B가 더 마음 아파하지 않게 나 자신의 자아와 타협하고나선 이렇게 말해줬다.

  " 미안, 또치가 그놈들 때문에 죽은 게 생각나서 그만••••. " B는 바로 대답은 안했지만 눈을 살짝 감으며 작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 하지만. " " 저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네 말대로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다만 그건 인형들이 알고 있을 테니까 그것만은 꼭 확인해봐야 돼. 그 이외엔 간섭하지 않을게. 여기 살고 싶으면 살아도 돼. 뭐

라 하지 않을 테니까. "

  " 알았어. 정말 고마워. " B가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문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계속 걸어만 갔다. 

 벽은 바깥과는 달리 붉고 검었다. 그 기준이 불명확해 더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어떤 때는 어두운 붉은색으로 보였다가 눈을 뜨고 다시 보면 붉은 검은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치 이 복도 전체가 살아

서 꿈틀거리며 시공간을 닫힌 구조로 강제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같았다. 정말 내 몸이라는 껍질을 아득히 초월하는 초월감이 기분 나쁘게 얼룩지고 일그러지고 비틀가리며 느껴졌다. 또한 평평했던 바

닥이 가면 갈수록 점점 울퉁불퉁 일그러졌다. 이러다간 평형 감각까지 상실해 잘못하다간 토할 것만 같을 정도로 심하게 어지러웠다. 정말로 정말로 다신 가고 싶지 않은 복도였다. 익숙해지려고 몇 번을 가도 도저히 친해지지 못할 것 같다. ㅡ 라이트를 켜서 가는데도 말이다. ㅡ 거기에 더해 이제는 머릿속이 둥둥둥, 북채를 치는 소리로 가득차서 울려퍼지는 환상까지 느껴졌다. 다른 애들도 보니까 나만 겪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ㅡ 안심도 됐지만 무섭기도 무서웠다. ㅡ 몇몇 아이는 제대로 걷기도 힘든지 벽에 손을 대며 걸었다. ㅡ 심지어 우리 일행에서 가장 강인한 C조차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ㅡ

  난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쓰러져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번쩍였다. 그래서 모두 날 기준으로 오른쪽 벽에 기대걷자고 큰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러면 누가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수긍이 됐는지 모두들 내 말에 그대로 따라줬다. 나는 제일 앞에 서서 갔다. ㅡ 이러니까 한결 나아졌다. ㅡ

  5분 정도 지날 즈음까지 걸어가더보니 드디어 눈앞에 성인 크기의 문이 보였다. 이 문도 역시 손잡이가 없었다. 바닥을 훑어 보았다. 장치는 없고 해골바가지에 지천에 널려 있는 것만 알아냈다. 그걸 보고

우리도 저들처럼 까딱 잘못하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 모두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서 해걸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뼛가루로 만들어진 모래 사막에 그 해후를 드

러낸 갈비뼈도 거침없이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먹으로 세게세게 문을 두드렸다. " 문 좀 열어주세요ㅡ!! " 여자아이A가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그때였다!! 땅바닥에서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소

리기 들리더니 문이 오른쪽으로 들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재빨리 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진전이 되자 시선을 앞으로 맞췄다. 아직 동공이 풀려있는지 영상 자체가 흐릿해보였다.

분명히 눈앞에 무언가가 있긴 했는데 검은 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모여 있는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저것들이 인형인가 보다. 부아가 치밀어서 힘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멈추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머리가 더 어지러워져 그대로 벽에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4.

  " 이제 일어나라. " 

  인간이 낼 수 없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성당을 가득 메우는 오르간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승사자처럼 나의 이성과 정신은 방향키가 망가진 배를 타고 파랗고 어두운 무의

식과 의식의 바다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는 잊혀졌다. 그러자 잠시후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이제는 아예 호통치는 어조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덕분에 거대한

파도가 생성됐고 파도가 배를 뒤집는 순간 나는 깨어났다.

  " 빨리 일어나. " 부스스 머리를 흔들며 힘겹게 눈을 떴다.

  예상했던 대로 눈앞에 있는 건 괴물도 사람도 뭣도 아닌 바로 인형이었다. 

  하지만•••인형의 종류와 개수는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방은 족히 수천 평도 넘어보였다. 인형들은 거기서 1단, 2단, 3단, 4단•••55단까지 앉아있었다. 수천 명의 눈이 우리에게 쏠리니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드디어 인형들을 만났다는 기쁨이 앞선 나머지 다짜고짜 일어섰다. 그리고 입을 열려고 했는데•••!!! 갑자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설마••••.

  " 안녕. " 그 여자인형이 인형의 무리에선 빠져나와선 말했다. 그리고 변함없이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얼굴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정말 기분나빴다. 

  " 아는 사이냐? " 오래돼 보이는 토우 인형이 물었다. 

  인형이 대답했다. " 네. " 그리고는 잠시동안 말을 끊었다. " 그것도 아주 많이요. "

  " 그렇군,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 " 그렇게 말하고는 인형들의 무리로 다시 되돌아갔다. 

  " 대단하네.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물론. " 여자아이C를 살쩍 훑어보며 " 누군가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던 거긴 하지만. " 이라고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C는 그순간 자신의 신

상이 다 들통나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빡! 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ㅡ 아무래도 C의 영감을 눈치챈 것 같다. ㅡ

  " 그래서. 왜 우리를 찾아온 거야? " 인형이 물었다.

  " 물어서 싶은 게 좀 있어서 왔어. " 내가 짤막하게 요지를 전했다. 그러자 그 애는 목을 다시 반대쪽으로 꺾으며 어리둥절해하는 눈길로 다시 나를 내려보았다. ㅡ 걔는 현재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는 상

태이다. ㅡ " 뭔데 그래? "

  " 너희들은 12시 12분 12초 후엔 살아서 움직이잖아? 그때 너흴 본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다 저주를 건다는데•••사실이야? 진짜로 저주를 거는 거 맞아? "

  그거 하나 질문하려고 여기까지 온 나를 인형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나의 저주 때문에 또치가 죽은 걸 본 것이 떠오른 이후 이대로 나는 마냥 당할 수만은 없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 네가 비웃어도 나는 상관없어. 빨리 말하기나 해 줘. 어서. "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 당시 나는 저주만 풀면 여길 떠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ㅡ 하지만 상황은 내가 원하던대로 잘 흘러가지 못했다. ㅡ

  " 응. 맞아. "

  " 무슨 저주를 거는 거야? "

  " 그건 인형의 대상자가 그 인형을 그동안 어떻게 길렀는가, 또 그 인형은 화가 많은가, 아님 상냥하냐 등등에 따라 다 달라. 나한테는 너 대신 또치를 희생시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저주였

어. "

  " 그럼. " 이 말을 얼마나 열심히 속으로 곱씹었는지 모르겠다. " 왜 너희들이 살아움직이는 걸 본 사람한테는 저주를 거는 거야? "

  인형은 목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입가의 미소를 억지로 힘을 줘서 자워버렸다. 마치 정색하는 것 같았다.

  " 너희 인간들이 미워서. 죽도록 꼴도 보기 싫어서 그래. " 나는 당황했다. 인형은 인간의 친구로서 기능하려고 만들어진 장난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인간을 싫어한다는 거지? 

  " 일단 너희들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우릴 만들어냈어. 거기까지는 괜찮았어. " 거기서 픽, 하고 코웃음을 짓더니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 적어도 너희들의 신은 너희들이 만든 경전

안에선 그래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데 성공한 거 같은데. 하지만 너흰 그러지 못했지. 너흰 토기장이가 될 그릇 자체가 되지 못했어. 우릴 만들어놓고 나서 제대로 자기들 의도를 충족시키지 못

하고 죽어버렸어!! 히히히•••. 그래서 더욱 화가 나.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안에 내재되있는 ' 어둠 '도 걷어내지 못했잖아. 난 그래서 너희 인간들이 정말 죽도록 미워 죽겠어. 잘하

면 너희 모두를 쇠사슬에 묶어서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불로 지져서 고문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하! 하하! " 

  그러면서 계속 웃어댔다. 이미 이성도 지성도 세월이 주는 고난에 쇠할대로 쇠해버린 한 영혼의 말로가 과연 저런 것이란 말인가. 

  " 무슨 헛소릴하는 거야? 지금. " 남자아이B가 말했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이 바로 저거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 우리가 너희들한테 잘못을 했다는 거니? 나는 5살 때 선물로 받았던 티리노사우르스 인형도 지금까지 아껴서 잘 가지고 놀고 있단 말이야!! 뭐 이딴 대우가 다 있냐는 듯, B가 화를 내며 말했다.

  " 너희들이 한 행위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야. "

  " 너희들의 본질이 ' 우리 '를 화나게 만드는 거야. "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적당히 해라. 아리스. " 아까 그 토우 인형하고는 목소리가 다른 토우 인형이 여자인형을 제지하려고 말했다. ㅡ 전의 토우 인형은 왼쪽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반면 이번 토우 인형은 오른쪽 눈이 없었다. ㅡ 

  " 무조건 화만 낸다고 저녀석들이 이해할 수 있겠나? "

  그리고는 붕, 떠서 여자인형의 앞까지 날아갔다. 그다음 드응 ㄹ쳐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 자네는 이제 빠져 주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

  한숨을 쉬며 토우 인형이 말했다.

  " 무슨 말을 하려는 거에요. 지금? " 살짝 화가 나서 말했다.

  " 왜 우리가 너흴 미워하는지. 우릴 만든 자가 누구인지. 연구소는 왜 세워줬는지.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주겠네. "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으려는 듯 몸을 앞 위로 까닥거렸다...

  그 이후는 더이상 말하기 싫어서 더이상 알려주지 않겠다. 다만 믿는 자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를 마음에 새겨두길 바란다. 그럼 자신이 어떤 위치에 속해있는 존재인지 처절하게 깨닫고 말 테니까, 부디 내 말대로 해주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임종률

andreda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