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수채화
‘날씨 참 좋네’
‘드르륵 드르륵’ 가방 바큇 소리는 조용해지고 옷깃을 여미는 추위도 곧 사그라진다.
“티켓 여기 있습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가슴이 속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또 시작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 자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가기 싫다’ 복받쳐 오는 뜨거운 느낌을 삼키며 걸어간다. ‘아직도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거야’ 불안함과 미세한 떨림은 머릿속을 다시 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열심히 하며 웃고 있는 외국인, 이국적인 옷을 입고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외국인 그리고 멀리 유학을 가는지 어린 꼬마와 엄마의 모습도 보기 좋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는다. ‘힘들어’ 또다시 뜨거워지는 얼굴, 그리고 차가운 촉감은 천천히 얼굴을 타고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찾아온 내 몸의 변화, 긴장을 하면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고 눈물이 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유독 증상이 빠르고 쉽게 찾아 온다.
창가 쪽 이라는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로 향한다. 이미 내 옆자리에서 안경을 쓴 40대 중반의 남성이 짐을 올리고 있었다. 나도 짐을 올려 놓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얼핏 본 남자는 얼굴은 희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어려운 영어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인사를 한다. 간단히 목례만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긴 비행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잠을 청한다. ‘이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아 목소리도 익숙하고’ 남자의 짧지만 강한 인상을 기억했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이 남자와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을 떠 올려봤다. ‘설마 같은 비행기에 그것도 옆자리에 아는 사람이 앉아 있겠어? 귀찮게’ 엔진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이륙한다. 답답함과 갈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남자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비행기 엔진소리와 섞여 들려온다. 나는 안경을 벗고 두 손을 모으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승무원을 불러 물을 부탁했다. 그러는 사이 옆자리 남자를 힐끔 보게 됐다. 두꺼운 금테 안경,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흰 얼굴,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까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란 표정으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들었던 물컵마저 남자의 무릎 위에 그만 쏟고 말았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가 내게 화를 내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도 나를 알아 본 것 같다. 남자의 깊은 한 숨이 들려온다. 그 깊은 한 숨 너머 나는 13년전 그의 모습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현아 괜찮을 꺼야 의사도 괜찮다고 했어”
친구의 병으로 처음으로 종합병원을 가게 됐다. 친구를 간호하며 병원 편의점에서 마실 것을 사게 됐다. 건너편에 친구의 입원 장을 줬던 20대 후반의 의사 아저씨가 서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짓더니 나가버린다. 지적이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는 눈빛은 편치 않은 모습을 풍겼다. 며칠 뒤 친구는 퇴원을 했다. 그리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현이씨 몸 괜찮은가요?” 다짜고짜 물어보는 남자의 목소리.
“네 괜찮은데 누구시죠?”
“저는 그때 담당했던 의사에요” 종합병원 의사가 전화까지 해서 환자의 상태를 물어 볼 일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요?”
“혹시 그때 보호자 유소영씨 맞으신 가요?”
“네…… 맞아요” 이름까지 기억한 걸로 봐서 나를 본 사람은 맞는 것 같았다.
“혹시 시간 되시나요? 오늘 저녁에?” 의사라는 사람이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에게 만나자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이 들어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소영씨가 편의점 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단발머리에 갈색 코트 입고 계셨었잖아요 저 아시다시피 어디서 일하시는 줄도 알고 나쁜 사람 아니니까 저녁만 잠깐 해요”
전화를 끊고 친구들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대부분 ‘만나보라고’ 조언을 주었다. ‘너 주제에 의사랑 밥 한번 먹어 보겠냐? 만나고 잘 되면 새끼 쳐라’. 회사근처와 병원이 가까워서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책을 끼고 있었고 얼굴은 웃는 것도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공부와 일에 지친 모습이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웃는 모습이 예뻐서 뵙고 싶었어요” 쑥스러운 듯 아닌 듯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누구 말대로 ‘젊은 나이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면 어떻겠냐’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도 잘난 의사양반인데. 의심할 여지 없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좌석 괜찮으신가요?”
승무원이 이승민한테 묻는다. 물을 쏟아서 닦을 것을 갖다 준다. 그는 괜찮다며 승무원을 안심시켰다. 다시 비행기 안의 답답함과 옛 기억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더구나 반갑지 않은 사람이 옆 좌석이라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승무원을 불렀다. 이승민도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피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저기 혹시 자리 남는 곳 없나요? 옮기고 싶은데……”
승무원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 오늘 비행기에 사람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자리가 불편하면 다른 분께 대신 물어봐 준다고 한다. 그때 승민이 입을 열었다.
“아 저희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건 나중에 물어봐 주세요” 나 대신 승민이 이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려 했던 것 같다. 승무원은 알겠다면서 자리를 떠났다.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하려는 것일까? 좋았던 기억? 상처들?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승민과 처음 저녁을 먹은 후 그 잘난 승민이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 친구들과 승민의 친구들과 같이 만났었다. 승민 또한 따로 내 친구들의 저녁을 종종 사주기도 했다. 그때 내 친구들은 나를 부러움으로 봐라 봤다. 친구들은 이승민을 꼭 키다리 아저씨처럼 나를 지켜주는 사람 같다고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이 사람과 만남을 지속할 수 있었다. 승민은 내게 이것 저것 많이 사주고 싶어했지만 나는 극구 부인했었다. 레지던트 월급 남는 것도 없겠다고 생각한 나의 작은 배려였다. 그게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믿음이 만남을 더 지속시켰다. 하지만 그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간대에 매일 걸려오는 전화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오늘 뭐했어? 나 대신 다른 사람 만나지마’ 그는 내게 같은 말을 반복해 왔다. 레지던트 생활이 많이 힘들고 시간도 없고 월급도 적고 그래도 나중을 위해서 견뎌야 한다고 했다. 내심 열심히 공부하는 그가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를 생각하면 무척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린 3년이란 시간을 연인으로 지냈다. 사실 자주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서운한 점이었다. 그래도 난 그에 못지 않은 잘 난 여성이 되고 싶어 공부도 새로 시작하고 외국어, 헬스 등 나한테 투자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무렵 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보호해주고 아껴주는 그 마음이 한 낯 종이 한 장의 무게처럼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에 진실성이 부족했고 나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스트레스 탈출구로 만나는 것 같았다. 나는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 사람은 그의 갈증을 풀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를 만나려 하는 것 같아 점점 불쾌해졌다. 그 불편한 느낌은 이 사람을 내 마음속에서 멀리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멀리 하면 할수록 집착되는 이 사람의 전화와 간섭은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란 생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부탁을 했던 아는 언니의 같은 학교 출신 의사 형부에게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사랑이 아닌 구속으로 구속에서 쉬운 취급을 받는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공부했던 학창시절, 성격 등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면 좀 더 나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는 언니는 나를 만날 때 마다 형부한테 물어보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가 거의 1년만에 기억이 났는지 전화가 왔다.
“소영아, 놀라지 말고 들어 그 사람 결혼했대. 2년전에…… 딸도 있대. 너 혹시 그 사람과 깊게 만난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아는 언니한테는 대수롭지 않은 냥 쿨하게 “당연하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 순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밥을 먹을 힘도 누굴 만나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진실됨이라 생각했던 사랑이 한 사람의 욕심과 욕구에서 철저히 짓밟아 버려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가 의사고시를 치른다고 했을 때도 정성스런 편지와 선물을 줬지만 반기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떠 올려졌다. 편지 따위는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는 그가 얻고 싶은 것만 얻으려고 했을 뿐 사랑 따위의 단어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종종 상처를 받았지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서 기다리고 참아주고 이해하려 해던 나의 모든 노력들이 그 어떤 멍청이보다도 못한 짓이라고 생각하니 그 비참함을 차마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해서 회사도 그만두고 승민의 전화도 거절하고 승민과 잘 해보라던 친구들 마저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싫어지기만 했다. 나의 순진함과 진실성이 무참히 짓밟힌 그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잘못을 나 자신을 학대하는 일로 시작됐다. 멍청하고 더러운 순진함으로 스스로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내 자신. 내 자신이 너무 싫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다. 경찰서로 향했던 순간도 있었다. 냉랭한 분위기의 경찰서 안 모든 남자들이 사람이 아닌 탈을 쓴 짐승으로 보였다. 이성을 차리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없기에 힘들게 정신을 차린 후 형사와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러니까 아가씨 이건 다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상처가 될 테지만 잊어버려요. 고소해서 뭐해? 하물며 돈 몇 푼 받는다고 뭐가 달라져? 잊어 버리고 열심히 살아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썼지만 억울함에 심장이 요동을 쳤다. 이 사람 말도 맞는 것 같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20대 초반 나 혼자서 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저 나는 이승민이라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한 사람의 진심을 짓밟아 버린 무서운 벌. 그 벌이 내가 아닌 법의 잣대가 해주기를 바랐으나 이 방법 또한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꺼져버린 조금의 자존심이라도 회복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 스스로 진짜 무너져 어떤 일도 벌일 수 있을 거란 또 다른 두려움에 마지막 희망으로 그 사람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열었다. 그리고 어느 나이 지극한 여자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 여자분은 내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눌러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며칠 뒤 이승민이 전화를 했다. 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경멸하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병원에 소문 쫙 퍼졌어. 내가 너 잘 되게 하나 두고 봐라 가만두지 않을 꺼야” 순간 그 사람의 말이 두려웠지만 나는 떳떳하고 싶었다. 그는 가진 게 많아서 잃을 것이 많을 것이요, 깊은 상처투성이의 나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그래 너 맘대로 해” 그게 내가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로 그를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사랑해서 받은 상처가 아니라 내가 짓밟혔다는 상처 때문이었다.
순진함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순진함을 더러움으로 짓밟아 버리곤 한다. 버려진 사랑은 상처에 허덕이며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더 고된 사랑을 찾아 헤맨다. 그 사랑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 가득한 힘든 사랑도 하게 된다. 그 이후 사랑은 독 이였다. 그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을 지독히도 힘들게 했다. 나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고 그 누구보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10여년이란 세월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나 혼자’ 홀로 설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것이 유학 길 이었다. 느지막이 유학을 갔고 그 상처를 덮어 버릴 수 있도록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었다. 공부와 일,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며 힘든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돌이켜 볼 때 마다 ‘이승민’이란 사람은 악마였다. 나의 몸과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악마. 나의 순수함을 송두리째 뺏어간 사악한 남자. 그런데 어찌 그 사람이 내 옆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토록 내가 증오했고, 미워했던 그 사람이 어찌 하여 내 옆에 떡 하니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진짜로 바꿔줄 만한 자리가 없는 거에요?” 신경질 적인 태도로 다시 승무원한테 물었다. 승무원은 안절부절 짜증 섞인 표정이다. “소영씨 미안해” 그에게서 먼저 나온 말 한 마디는 ‘미안해’ 였다. 그리고 그는 승무원한테 미안하다는 미소를 보이며 다시 보냈다. 온 몸에서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이 인간이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불러?
“믿지는 않겠지만 나 소영씨가 힘든 만큼 나도 많이 힘들었어” 침묵이 흐른다. 어떻게 힘들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속이 매스꺼워진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줄 몰라도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나보고 사과하라고 하는 것 같아” 입만 살아 있는 돼지 같은 의사쟁이. 순간 떠 오른 욕이다. 나는 아무런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나오는 눈물을 꾹 참았다. 그 사람 앞에서 눈물 따윈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 그때 이후로 소영씨한테 상처 준거 생각이 나서 나도 많이 괴로웠어”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나도 그 일 있은 후에 많이 힘들었어” 그는 힘들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에 제대로 된 사랑 한번 하지 못하고 아직도 안정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유학으로 공부도 힘들었지만 외롭고 지칠 때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내 마음이 그런 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 줄 곧 외롭게 보내야만 했다. 스스로가 강하다고 체면을 걸었지만 상처가 온몸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후회와 한탄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고 싶어서 내 자신에게 혹독한 시련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 사람으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에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나 사실 이혼했어. 와이프가 우울증이 심했어. 그리고 그 딸은……” 그는 고개를 떨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딸은 어릴 적 하늘로 갔어 다 내 잘못이지” 그리고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딸이 안타까운 사고로 하늘로 가서 와이프가 그 일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삶 자체가 평탄하진 않았어. 그것을 원망하진 않았어 그게 내 업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계속 공부만 했어 그게 아니고서는 살 자신이 없었어. 이렇게 라도 이야기 하면 나를 조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겠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씨를 아낀 건 사실이었어. 진짜 그땐 좋아했었어 그런데 상황이 내 상황이 모든걸 말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그는 긴 한숨을 내쉰다.
어떤 이는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더 잘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남자의 인생은 그렇게 되는 건 아니었다 보다. 내가 겪어야 했던 힘듦과 상처들. 이 사람 또한 그 죄책감과 그리고 실제 일어난 비극으로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살아왔었다. 순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업이라고 까지 생각을 하며 받아들였다고 하니 순간 나의 창피함과 자존심은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았다. 깊은 한 숨을 내쉰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했다.
“아이와 아내 분은 유감이네요” 진심이다. 그에게 있어 아이는 소중한 존재였을 텐데 그것을 잃었다는 것은 그가 평생 짊어질 고통이었겠지. 그리고 아내라는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 우울증으로 지금까지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니 이들이 나보다 더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타고난 운명이 있듯 이것들은 내가 바꿔 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내가 또 다른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승무원을 불러 물 두 잔을 부탁한다. 주변은 자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남자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한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사실 10년만에 다시 본 사람이지만 그때의 느낌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깊게 폐인 주름진 얼굴, 뱃살과 삶의 고뇌가 가득 찬 얼굴색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했던가?’ 그저 쓴 표정으로 허공을 보다가 다시 앞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제서야 철이 드나 봐 사람한테 함부로 상처 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손에 든 책을 만지작거린다.
“나도 의사가 하기 싫었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줄 때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리고 수술이 끝나면 온몸에 기가 빠지는 것 같아. 그럴 때 마다 천국이 있다면 그런 곳에 누워서 꽃 향기를 맡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잠시라도 눕고 싶었어” 그의 말은 내 귀를 거슬리게 한다. 왠지 그 꽃 향기가 20대 초반의 나였던 것 같은 기분 나쁜 비유로 들린다.
“나는 소영씨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던 것 같아. 다만 나의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그렇게 넘어가고 그렇게 그렇게 벌을 받고 이렇게 다시 사과하라고 여기서 만나게 된 거잖아. 미안해요. 이렇게라도 만나서 이야기 하니까 차라리 내 맘속이 조금이라도 편해져”
그 당시 그가 결혼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았었다. 부잣집 아가씨와 잠깐 만났는데 그 아가씨가 임신을 하고 병원으로 찾아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 어떤 변명을 해도 내겐 용서가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삼십 대 중반이 다 된 내게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또 한번 코 웃음을 쳤다. 나는 이 사람의 과거 그리고 거짓을 증오했다. 그것은 부자와 권력 그리고 의사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그가 생각했던 것이었고,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현실의 벽처럼 느꼈기에 애증도 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나는 그저 천국의 꽃 향기였던 것 같고 그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했던 아무런 감정이 없어야 했던 슬픈 꽃 향기였던 것 같았다. 오히려 그가 겪어온 인생의 풍파가 고소하다고 느껴졌다. ‘그래 넌 벌 받아도 싸’.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내가 말했다. 그래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꿔 놓는다는 말인가? 또 다시 코 웃음이 난다. 그도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본다.
“당신 그래도 유명해졌네요. 뉴스에도 나오고” 나는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마다 병원과 이 사람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행여라도 그가 유명해졌다면 그게 더 억울했는데 떡 하니 인터넷에 이름이 올라와 있을 줄이야. 수술을 많이 했다고 기사 몇 개를 본 적이 있다. “응” 그가 짧게 답한다.
“의사 양반이 비즈니스 타야지 왜 이코노믹인지” 나는 비꼬는 조로 물어봤다.
“세미나에 가는 건데 그쪽에서 해 준 티켓이야” 그는 이제서야 웃음조로 말한다. 나는 한번 더 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한 그 원인 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것 같았다. 우리의 인생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누군가 알려준다면 고마울 것을. 이렇게 미안하다 해서 그 상처들이 쉽게 아물 수 있을까? 나를 자학했던 그 수 많은 시련들.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며 허공을 쫓아 다녔던 그 기나긴 시간들. 그리고 이제는 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나의 몸과 마음. 이런 것들이 ‘미안하다’는 말로 다 치유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지만 어떻게 이것을 정리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냥 잊고 지나치자니 찜찜하고,그렇다고 이야기를 계속 하자니 확 짜증이 밀려왔다.
“앞으론 행복하세요”
나도 모르게 나온 말 이다. 남자는 ‘그래’라고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여전히 앞 좌석으로 향한다. ‘행복 하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 어떻게 지내든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그냥 그렇게 그가 내 기억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언제든지 찾아와”
남자가 명함 한 장을 건네왔다. 명함에는 ‘승리산부인과’라고 적혀 있다. 나름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 같은데 꽤나 성공한 것 같다. ‘너는 사랑과 가족을 잃었지만 명예와 직업으로는 성공했구나’ 이상한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또 답답해 지는지. 보잘것없는 노처녀의 유학이야기를 꼭 감춰야겠다고 결심했다.
“너는 왜 호주로 가는 거야” 나는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회계사야 외국회계법인에서”
공부중인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다행 이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그가 나에 대해서 따로 알아볼 일도 없을 테고 앞으로 우리는 만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의 거짓말쯤은 괜찮다고 느꼈다. 아니 이 거짓말로 내 자신을 조금이라도 추켜 세울 수 있는 것이 놀라웠다. 너는 의사, 나는 회계사 그래 나도 뭔가 한 건 해 낸 그런 느낌이었다. 그도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안도의 미소 같았다. ‘네가 잘 지내고 있었구나’라는 그런 안도의 모습이 얼굴에 비춰졌다. 거짓말인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거짓말을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를 짓밟고 원망하고 미안해하고 다시 속상해하며 침묵을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을 ‘이겼다’라고 생각하며 맘속으로 좋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힘들게 걸어온 삶이 그의 말대로 ‘업보였으면 좋겠다’라고도 생각했으니까.
나의 10여년은 칼날처럼 아팠었다. 어쩌면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었던 실패한 사랑이었지만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신은 그 방법을 찾는데 10여년이란 세월을 주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목덜미가 뜨거워지더니 코 끝이 찡해졌다.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들키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회한의 10여년 나의 청춘들.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온 나의 몸과 마음. 그런 것을 이 눈물에 마지막으로 씻겨 내리고 싶었다. 남자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미움과 증오와 연민으로 가득 찬 나의 모든 감정들이 서서히 눈물 속에서 촉촉히 녹아 들고 있었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강해졌다. 조금 있으면 시드니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이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혼자 있고 싶었다.
“시드니에 5일정도 있을 꺼야 실례가 안 된다면 저녁 같이 먹어도 돼.”
승민은 그것이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을 했는지 내게 말을 건네 왔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나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고 나가면 또 다시 이 게임은 내가 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택시를 잡았다. 나는 처음과 같이 목례만 하고 눈을 피했다. 그도 한번 쳐다 보고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끝이 났다. 나의 심장을 아프게 했던 나의 악몽과도 같은 지난 과거들이 조금씩 내 곁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내 나이 35, 슬프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하고픈 노처녀다. 사랑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다. 이제 누굴 만나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해주고 싶다. 나를 위하고 새로운 ‘그’ 를 위한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
그와 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잃은 것들이다. 그가 잃은 것은 그의 진짜 가족이고 내가 잃은 것은 새로운 가족이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가 그 가족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다시 코 웃음이 났다. 세상 세상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인연도 있다고.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를 오늘을 기점으로 멀리 떠나 보냈다. 사랑해서 아쉬움이 아니라 상처투성이로 놓기 힘들었던 그 족쇄를 이제서야 풀게 된 느낌이다. 내가 받아온 시련만큼이나 그도 다른 시련이 있었다는 것에 웃음이 난다. ‘상처 주면 안돼’라는 말을 되새긴다. 오늘 시드니 하늘이 참 맑다. 감옥에서 나온 것처럼 눈이 부시다.
‘날씨 참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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