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들의 공명

by 교관 posted Mar 02,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제때에 하지 못한 말들에 의해 예기치 않는 일들에 휘말리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


쥐들의 공명[하루키의 오마주]

 

 

그 공명을 처음들은 날은 비가 억수처럼 내렸다. 그리고 비는 이후로 자주 내렸고 공명은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들렸다. 장마시즌이라 비는 계속 내렸다가 소강을 반복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래된 나의 차를 운전하는 것도 평소와는 다르다. 성에가 많이 끼기 때문에 추운 날에도 뜨거운 바람으로 전환해서 에어컨을 틀어야 했고 설명하기 힘든 냄새도 났다. 일하는 건물의 지하주차장도 비가 오는 날이면 습기가 엄습하고 비를 몰고 주차를 한 자동차들 때문에 거대하고 축축한 공간의 덩어리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주차장은 자동차 안에서 나는 냄새의 원형격인 방대한 퀴퀴함이 가득했다. 건물은 30년이나 된 오래된 빌딩으로 건물주가 없기에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시간은 아마도 이 건물에서 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내가 제일 늦은 축에 속했다밤 열한시가 되면 마무리를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 녹색바닥의 주차장은 외부와는 다른 모습을 한 세계를 연상케 했다. 지하주차장은 4층까지 있는데 나는 늘 제일 밑의, 제일 구석에 있는 자리에 주차를 했다. 차를 빼서 주차장을 나오면 건물 주차장 입구에 작은 화단이 있는데 거기에 심어 놓은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었다. 건물과 어울리지 않지만 30년 전에 건물 주차장 입구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서 거기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주차장을 빠져나오면 제일 먼저 그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관리하는 사람도 없지만 무화과나무는 내리는 비를 맞고 그동안 잘도 지내서인지 가끔 무화과 열매를 맺어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기계실에서는 열매가 맺힐 때마다 따 먹었다

 

애인이 있지만 주말마다 만났다. 가끔 애인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특히 드문 일이었다. 나는 건물의 2층에서 작은 스튜디오를 하고 있다. 스튜디오라고 하지만 5평 남짓의 아주 작은 공간에서 인상사진만을 찍을 뿐이다. 돈이 되는 가족사진이나 아기사진 같은 건 촬영하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손도 많이 가고 작업을 잘 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후에 안 좋은 소리까지 듣는 경우도 있고 해서 그저 눈앞에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증명사진이나 인상사진만 찍을 뿐이었다. 그래서 부의 축척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래된 건물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산이라고 하는 건 비어있는 시간이어서 책을 읽거나 사진관의 작은 공간에 음악을 풍부하게 틀었다. 여러 음악을 하루 종일 풍성하게 듣는 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생활하는 것에 큰 지장은 없었다. 8년 전에 시작해서 어느 정도 이곳을 좋아하는 단골은 꾸준하게 이곳만 찾게 되었다. 미용실이나 사진관의 특징이라면 마음에 들게 해주면 그곳을 지속적으로 찾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사진이나 가족사진은 단발성으로 끝나지만 증명사진은 어떻든 몇 번 찍어야 하니 스쳐가는 사람보다는 계속 오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단골이 되어 버리면 이곳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생활을 하더라도 그 단골이 다시 이 지역으로 오는 날이면 시간을 들여 내가 운영하는 사진관을 찾아서 사진을 찍고 갔다

한 번 온 사람이 계속 오게 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보는 앞에서 얼굴을 수정해주고 보정한 듯, 안 한 듯하게 사진을 만들어주면 된다. 지극히 간단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꽤 부리지 않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성실하게 일하면 결과는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고 알고 있었다. 신분확인을 하는 인상사진은 나라에서 정해놓은 법이 있지만 그 법을 무시하고 자기위주로 생각을 하고 찍히기를 바라는 사람도 간혹 있다. 그런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으면 모든 순간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당연한 것은 어딘가에서 틈이 생기고 균열이 가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거센 날이면 인상사진을 찍는 빈도가 떨어진다. 레인시즌 중에서도 폭우가 내리는 날에는 손님이 없어서 책을 읽고 있거나 애인인 그녀와 연락을 평소보다 많이 하기도 했다. 일을 마치면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계단으로 내려가는 일이 많았다. 계단으로 내려가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면 그 경계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문이 열리면 후욱 맡아지는 알 수 없는 지하 주차장의 급격한 냄새에 적응하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계단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계단은 있지만 계단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8년 동안 거의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일을 싫어한다. 오전에 출근을 해서 지하4층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다보면 지하1층에서 탄 사람이 지상1층에서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작 한 층 정도도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인구대비 비율이 어떻게 될까. 왜 이런 건 통계청 같은 곳에서 조사를 하지 않을까. 정작 궁금한 건 전혀 알 수가 없다. 계단은 늘 고요하고 소음이 없다. 사람들의 흔적도 없지만 가끔 홈리스가 그랬는지 똥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줌을 싸 놓기도 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인간의 흔적이 빠져버린 기이한 계단의 세계가 있어서 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서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그 공명의 소리는 지하 3층과 4층 사이에서 들렸다. 공명처럼 들리는데 공명이라고 딱 잘라 말 할 수도 없었다. 그 소리를 들은 날이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는데 비가 오는 그 날, 11시가 넘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을 때 그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3층과 4층 사이의 코너에서 울리는 공명은 현재 이 세계에서 벗어난 소리였다. 적막한 낯선 공간을 만들어 버린 지하 주차장은 건물 밖의 세상과는 벽을 쌓고 단단한 세계를 그 공명을 통해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들었던 그 공명은 무섭고 우울했다. 그런 소리를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건물이 오래되었기에 쥐가 내는 소리인줄 알았다. 기계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건물은 비록 낡고 오래되었지만 쥐는 없다고 했다. 상가번영회 사무실에서 다른 건 몰라도 방역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건물의 닥트와 구석진 곳에도 쥐와 벌레는 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 공명은 내가 다가가면 소리가 좀 더 작아지고 내가 멀어지면 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느껴졌고 사실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 무엇인가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기계가 내는 소리도 아니며 자연주의적인 소리도 아니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영적인 소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오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더러운 꼴을 씻겨 내려는 듯 구멍 뚫린 하늘에서 신나게 비가 내렸다. 그런데 주차장 옆에 심어놓은 30년 된 무화과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갑자기 잘려버린 것이다. 번영회에서 나무를 자른 모양인데 어제까지 잘 있던 나무를 오늘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왜 잘라버렸을까. 세입자들의 입김이 있었을까. 나뭇잎이 떨어져 주차장에서 나오는 손님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말을 가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멀쩡하게 잘 있던 나무를 한 순간에 잘라버리다니 이상했다

자동차의 잘 움직이지 않는 와이퍼를 3단으로 하고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무화과나무가 있던 자리의 밑동에 쥐 세 마리가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쥐는 잘 먹었는지 신발보다 더 컸고, 눈이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쥐가 없다는 말을 기계실직원에게 들었는데 쥐는 보란 듯이 무화과나무가 잘린 곳에 비를 맞고 앉아 있었다. 엄연히 따지면 건물 밖이기 때문에 기계실 직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 마리의 쥐가 미동도 없이 비를 맞으며 운전을 하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은 기이했다

차를 몰고 건물을 빠져나와 도로위에 차를 올렸다. 집으로 가는데 30분가량 걸린다.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비가 차 뚜껑에 떨어지는 소리도 시끄러워 그대로 운전만 했다.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추었을 때 우산을 쓰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를 발견하고도 내가 내리지 못한 이유는 그녀가 다른 남자의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어서였다. 그녀는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남자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서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을 때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산을 썼음에도 비가 온 몸을 다 적시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와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애써 차려입고 나온 옷이나 발이 더럽혀지거나 젖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우산 밑에 있는 여자는 분명 그녀였다. 그녀를 닮은 사람도 아니었고 그녀의 언니도 아니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뒤에서 상향등으로 신호를 하는 바람에 기어를 넣고 집으로 왔다.

 

나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녀에게 달려가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어야 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모습을 보며 지나쳐 집으로 왔다. 옆의 남자에게 붙어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내 남아있는 찝찝한 이물감처럼 감돌았다.

그런 기운은 나를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씻지도 밥도 먹지 못하게 했다. 사실 얼굴을 마주보며 더 이상 당신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지만 생각은 진전이 없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한 번 울리고 받았다.

, 웬일이야?”라고 그녀가 물었다.

지금 어디야?”

지금 집이지. 자기는 퇴근했어?”

 

그녀의 거짓말에 나는 어쩌면 안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다른 남자와 있다. 그리고 신호대기를 할 때 두 사람이 어디를 가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만들었다.

인상사진은 필요에 의해서 찍는 사진이다. 물론 개인이 보관하고 싶어서 찍는 사람도 있지만 인상사진이나 증명사진의 용도는 확실하기에 찍어야만 해서 찍는 것이다. 사진을 촬영하고 나면 컴퓨터에 이름을 적고 보관하고 있다가 한 달 뒤에는 삭제를 한다. 그 파일은 손님들의 이메일로 다 발송을 하기 때문에 여기 컴퓨터에 없다고 해도 이메일을 열어서 사용을 하면 된다.

인상사진은 보통 자신이 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기를 바라며 촬영하는 경우가 다분하지만 목적은 제3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순위이다. 그렇지만 어떤 여자들은 그런 것은 안중에 없다. 사진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놓은 자신의 얼굴에서 벗어나면 마음에 들지 않아 클레임을 건다. 여권사진은 법적인 규정이 있어서 거기에 맞게 촬영을 해야 하지만 컬러렌즈를 빼지 못하겠다느니 머리를 어깨 앞으로 늘어트리고 찍겠다느니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 장면을 본 이후로는 손님이 원하는 대로 촬영을 해 주었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아무런 탈이 없다. 단지 시청에서 다시 찍어오라는 말을 듣고 짜증을 내며 다시 와서 촬영을 하는 수고를 겪지만 결국 그건 나의 몫이 아니다. 순전히 그 손님의 시간과 차비를 버려가며 다시 촬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정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환불을 해 주면 된다. 잠시 사진관을 비워놓을 때에도 연락받을 수 있는 전화번호 같은 것도 붙여놓지 않았는데 거기서 좀 더 모호하고 느슨해진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그녀는 전화를 잘 받아 주었다.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주말에 만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그녀의 손을 그 전처럼 잡을 수 없었고 잠을 자는 것도 피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듯 내가 손을 잡지 않아도 잠자리를 가지지 않아도 평소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녀에게 그것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었지만 나는 어쩐지 말을 꺼내는 것이 힘겨웠다.

그녀와 마주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테이블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면 그녀는 나의 눈동자에서 아주 약간 비켜간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에게 제대로 말을 해야 했다.

 

그 손님이 찾아온 건 일 년 만이었다. 손님은 일 년 만이라고 했다. 기억이 나는 없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물에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고집스럽게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틀어 놓고 컴퓨터 모니터로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다. 뮤즈의 음악을 좋아해서 틀어놨지만 지금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런지 그날 이후로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매일매일 사진을 하나씩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였는데 전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비 비린내를 몰고 한 여자 손님이 찾아왔다. 비가 와서 날이 흐리고 어두운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라이반으로 여자의 얼굴을 반이나 가렸다. 머리는 아주 흑발로 살짝 웨이브가 있었고 입술이 도톰해서 입술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여자는 재출력을 바란다고 했다.

언제 찍었습니까?”

딱 일 년 전에 왔어요.”

일 년 전 사진은 없습니다. 한 달 이전의 사진은 전부 삭제를 했거든요.”

컴퓨터에 있어요. 검색해보세요라는 여자의 말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나는 조금 위압감을 받았지만 다시 사진은 다 삭제를 했습니다. 이 메일로 보낸 사진으로 검색을....”까지 말했을 때 여자는 컴퓨터에 있습니다. 검색해보세요.” 라고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톰한 입술이 같은 말을 되풀이 하니 부드러운 강압에 나는 눌렸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검색을 해서 없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최흑오라고 짧게 대답했다. 최흑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렇게 특이한 이름이라면 나는 기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을 다시 재출력하는 손님은 대체로 단골이었고 이름이 특이하다면 나는 분명히 기억을 했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이 없었다.

최흑오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최흑오라는 이름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일 년 전에 왔다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기억이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내 기억은 그녀에 대한 기억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어떻든 여자에게 최흑오라는 이름이 컴퓨터에 없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검색란에 최. . . 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엔터키를 눌렀다. 사진이 하나 나타났다. 분명하게 있었다. 날짜가 확실하게 일 년 전의 사진이었다

여권사진으로 인화해주세요.”

여자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을 했고 나는 사진을 여권사진에 맞게 크롭을 하고 출력을 하려고 했다. 여자의 사진을 조금 확대해서 보니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와 달랐다. 눈동자에 채도가 조금 빠져 있는 색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부린 적이 없기 때문에 사진은 오롯이 내가 전부 찍는다. 대량의 손님들이 오는 곳이 아니기에 특이한 손님은 기억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눈동자를 가진 손님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등 뒤에 여권사진이 필요하다고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누구일까

지금은 눈에 문제가 생겨 선글라스를 벗고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요. 찍어 놓은 사진이 있으니 재출력를 해서 사용하려고 해요.” 여자의 말에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손님, 그런데 제가 한 달 이전에 찍은 사진파일은 전부 삭제를 합니다. 어떻게 여기에 사진파일이 삭제되지 않고 있다고 알고 계시는 겁니까? 뭐랄까 신기합니다. 어떻든 사진은 이제 삭제를 할 테니 이메일 주소를 가르쳐 주시면…….”

이제 그 사진은 사용하지 않을 테니 삭제하셔도 돼요.”

?”

신분확인을 하는 증에는 한 번 썼던 사진은 쓰지 못할 테니 이제 그 사진은 필요가 없어요. 주민증에도 운전면허증에도 그 사진이 붙어 있거든요. 이제 여권을 만들고 나면 그 사진은 전혀 쓸모없는 사진이 됩니다. 곧 눈동자도 달라질 테고라고 여자는 말했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커피 한 모금 마실 정도의 틈을 가졌다

그 소리는 쥐가 내는 소리예요.”

나는 여자 손님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쥐의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그 공명이 쥐 소리로 들릴 때면 당신은 이 건물을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아직은 조금 시간이 있지만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어요.”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저는 여기서 팔 년이나 장사를 했고……. …….”

그 소리는 쥐들이 내는 소리에요. 시궁쥐와 들쥐를 섞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어요. 그 쥐들이 다 자라면 30센티미터 정도 된다고 하지만 아마도 더 큰 쥐들일 거예요.”

여자가 말을 끝냈을 때 그녀가 남자와 우산을 쓰고 있던 날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무화과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본 세 마리의 큰 쥐들이 생각났다. 아마 그 쥐들을 말하는 것일까

, 그 쥐들을 본 것 같습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여자는 나의 말에 갑자기 미동이 없었다. 꼭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순간 세계가 멎은 것처럼 가게 안의 모든 소리를 웅 하는 하나의 집약으로 그러모으는 것처럼 기이했다. 여자의 도톰한 입술이 굳어 있었다. 선글라스 그 안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러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동자 같은 거 보이지 않아도 대화를 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동안 인간은 학습을 해 왔기에 학습된 논리에서 벗어나면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할 때 나의 눈동자에서 벗어난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 역시 이상했다

보기보다 시간이 앞당겨졌어요. 당신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준비를 말하는 겁니까?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 것 말입니까? 그렇지만 처음 보는 손님의 말을 듣고…….”

우리는 일 년 전에도 여기에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어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쥐들이 한 짓입니다. 여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점점 이상한 일에 당신은 말려들게 됩니다. 쥐들이 당신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어요. 이미 30년 된 나무가 사라지지 않았나요?”

, 그렇기는 하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무화과나무가 있는지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건물에서 일을 하거나 가게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인지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마 오늘도 지하주차장 3층과 4층 사이에서 소리가 날 겁니다. 그 소리는 쥐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보통의 쥐가 아니에요. 세상에 없는 소리에요.” 

 

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 공명에 대해서. 나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기 위해 기계실을 찾아가서 수십 대나 되는 지하주차장의 모니터를 확인한 적도 있었다. 모니터로는 아무것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 몰래카메라의 화질은 나날이 좋아지는데 시시티브이의 화질은 90년대 초에서 벗어나질 못 하는 것 같았다. 주사선이 많거나 꺼져있거나, 자동차들의 움직임도 뚝뚝 끊기는 등 화질이 좋지 못했다. 그런 시시티브이로 소리의 존재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계실의 직원에게 소리를 설명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건 꼭 영혼을 쥐어짜는 소리입니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었다.

쥐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거든요.“ 나는 여자에게 겨우 말을 했다. 여자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곧 손가락으로 출력이 되어 있는 여권사진을 가리켰다. , 나는 여권사진을 들고 커팅작업을 했다. 사진을 자르면서 곁눈질로 여자를 쳐다봤는데 여자는 역시 미동 없이 앉아서 한곳을 응시하고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일반적인 쥐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죠. 하지만 당신이 들은 그 소리는 쥐가 내는 소리가 맞아요. 일반적인 쥐들이 아닌 쥐들의 소리에요. 당신은 준비를 빨리 해야 해요.”

제가 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쥐들이 어째서 나에게 오는 것입니까?”

당신은 이대로 몹시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됩니다. 당신은 그 일이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는 채 빠져들어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쥐들이 당신의 몸에 접속할 거예요. 쥐들은 당신을 선택했어요. 당신의 기억은 슬슬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틈을 두었다. “당신은 제때에 제대로 말을 했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때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조금 일그러져버린 틈 사이로 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 같아요. 틈이라는 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쥐들은 그 틈을 이미 통과를 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보다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에요.”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건 무엇을까지 말했는데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비바람에 대역죄인 같은 몰골이었다. 머리는 마구 치솟았고 얼굴과 몸이 비에 젖어 형편없었다. 손님은 여자 두 명으로 둘 다 운전면허증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사진 빨리 되나요? 사진 얼마 만에 나오죠? 금방 찍을 수 있죠? 저희는 아주 급하거든요라며 두 명의 여자 손님은 헐레벌떡 들어왔다. 나는 사진은 바로 나온다고 했고 거울을 보고 준비가 되면 카메라 앞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여자 두 명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털며 화장을 고치고 쏟아지는 비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했지만 들어온 여자 두 명의 손님 때문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여권사진을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받아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건네받을 때 본 여자의 손등에는 꽤 깊은 상처가 있었다. 어딘가에 찍힌 상처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것에 할퀴었거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동물에게 물린 것 같은 상처였다. 여자의 손가락은 길쭉하고 몹시 예뻤다. 손을 보자마자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등의 상처는 깊고 굳게 아물어 있었다. 최흑오라는 이름의 여자는 계산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여자의 입에서 그 다음의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으로 나에게 손님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어떻든 저 두 명의 여자 손님들이 나가고 나면 선글라스의 여자가 무슨 말을 해 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두 명의 여자 손님은 이십분이 넘어 갈 동안 거울 앞에서 얼굴을 보고 있었다. 요즘은 운전면허증 사진도 여권사진규격처럼 바뀌었다고 말해주었다. 오히려 여권사진 규격이 완화되었다고 말했지만 두 명의 여자 손님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머리가 여기까지 좀 길면 좋겠는데.”

라인을 좀 더 그릴까?”

입술은 어때? 이정도면 된 것 같아?”

옷을 여기까지(어깨부분과 쇄골부분) 내리면 더 괜찮지 않을까?”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과 옷에 대해서 사진 찍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보통 손님들이 거울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기 전에 자신의 얼굴을 보는 시간은 아무리 길다 해도 몇 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들 역시 목적에 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러 왔기에 빨리 사진을 받아서 가야한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오랜 시간동안 보는 것에 대해서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고 늘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 저 두 여자 손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거울을 본다기보다 그저 거울을 보기 위해서 사진관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글라스의 여자는 가만히 앉아서 이 모든 상황을 주시하듯 다리를 꼬고 미동도 없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으니 허벅지 부분이 보였다. 운동을 아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30대 중반 밑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리를 꼰 허벅지에는 마치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트레이너 같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허벅지에도 상처가 보였다. 어떤 날카로운 무엇인가에 물린 상처였다. 그렇게 보였다. 더 이상 선글라스의 여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가는 어딘가로 빠져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벌써 4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자 두 명은 거울 앞에서 그저 자신들의 얼굴을 보며 만지고 있었다.

, 손님들, 사진 안 찍으실 겁니까?”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러자 두 명 중에 머리가 좀 긴 여자 손님이 얼굴을 돌려 나를 보며 아니, 머리가 비에 젖어 좀 말린 다음에 찍으려고 하는데 안 되는 건가요? 빨리 가라는 말인가요? 대충 찍으려고 그러는 거죠?” 

그러자 옆의 머리가 비교적 단발인 여자가 손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안 되겠네. 인터넷에 올려야겠네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저 들어올 때 급하다기에 빨리 사진을 촬영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50분이나 흘렀고 머리와 옷에 묻은 비는 전부 마르거나 없어져서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인데 죄송하다고 했다.

뒤에 말을 한 여자가 자신이 먼저 찍겠다며 배경지 앞으로 갔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촬영하기에 부적합했다. 머리가 눈썹과 귀를 다 가리고 있었다. 나는 손님에게 운전면허증 사진규정이 예전과 달라서 이렇게 촬영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여자는 손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는 척 하더니 그대로 두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이렇게 찍어봐야 경찰서에서 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니 그럼 뭐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여기 사진관 참 이상하네. 머리를 다 묶으라는 말이에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으레 당황할 일이지만 나는 침착하게 컴퓨터 모니터로 인터넷을 열어 검색하여 운전면허증사진에 관한 규정을 보여주었다. 여자는 훑어보더니 눈썹과 귀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혼자서 화를 냈다.

한 시간이 흘렀다.

이 여자 두 명은 정말 사진을 촬영하러 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찍고 사진을 사용해야 할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앉아서 가만히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 곧바로 컴퓨터 모니터로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며 보정작업을 해 준다.

모니터에 띄운 여자의 얼굴은 상당히 비대칭이었다. 입술 한 쪽이 많이 올라가 있었고 그쪽의 콧구멍과 코도 올라가 있었다. 눈썹 높이가 달랐고 한쪽으로만 누워서 잠을 자는지 한쪽귀가 납작했다. 다섯 컷을 찍어서 모니터에 띄웠는데 여자는 사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찍어 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어느 부분이 이상해서 그러냐고 물었다.

이것보세요, 거울로 봤을 때는 내 얼굴이 이렇게 삐뚤하지 않았어요. 사진을 잘못 찍은 거 아니에요?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나 비틀어지게 찍어놓고 이걸 사용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

아마 다시 찍어도 똑같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보정을 하는 것이니까요. 사진이 이렇게 찍힌 게 아니라…….”

그러자 거울 앞에서 머리를 계속 만지고 있던 머리가 긴 여자가 모니터 앞으로 와서 보더니 어머, 너 얼굴이 이러지 않는데 정말 사진을 못 찍네.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네요.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악마의 얼굴처럼 이렇게 비틀어지게 찍다니. 다시 찍어주세요라며 톡 쏘아 부쳤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배경지 앞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는 것이다. “저 그렇게 촬영을 하면 규정에서 벗어나서…….”

이보세요, 그냥 이렇게 찍어주세요. 손님이 해 달라는 대로 하세요 그냥!”라고 소리를 지르는 여자의 얼굴에는 핏기도 걷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찍어봐야 전혀 사용할 수가 없고, 어디서 찍었냐고 하면 또 여기의 이름이 나올 테고…….”

이봐요 사진관 아저씨, 찍어 달라는 대로 찍어주세요. 잔말 말고요.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찍었다. 이번에는 여섯 컷을 찍어서 모니터에 펼쳤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부정했다. 여자의 얼굴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유난히 비대칭이 심했다. 눈동자도 양 옆으로 벌어져 있어서 정말 현실적이지 않았다. 목 길이는 양쪽이 너무 달랐으며 입술은 틀어진 턱 쪽으로 많이 딸려가 있었다. 여자는 세 번이나 재활영을 했다.

 

한 시간 사십 분이 지났다. 한 사람을 촬영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적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모니터로 여러 개 띄워서 본 다음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보정을 해 달라고 했다. 선택한 사진은 제일 처음 촬영한 첫 번째 사진이었다. 나는 옆에서 손님이 보는 앞에서 피부의 잡티를 없애고 눈과 눈썹의 높이를 맞추고 튀어나온 턱을 밀어 넣었다.

비가 내려 습기 때문에 가라앉은 머리의 볼륨을 높이고 갈색머리인 손님의 머리뿌리가 까맣게 되어 있는 것도 갈색으로 바꾸었다. 왼쪽어깨와 왼쪽쇄골이 많이 내려가 있어서 그것도 수평으로 맞추었다. 어느 정도 보정을 하고 여자 손님에게 완성이 되었다고 말을 했다.

여자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한참 보더니 밑의 턱을 너무 넣었으니 다시 조금 밖으로 나오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밑의 턱을 왼쪽으로 좀 당겨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머리가 긴 여자가 아니야, 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위로 살짝 올려야 해라며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원래로 돌려 옆의 여자가 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입술이 큰 것 같으니 조금 줄여 달라고 해서 줄여 줬더니 옆으로 늘려 달라고 했다. “나 눈이 되게 짝짝이네. 나 정말 이렇게 짝짝이야?”라고 사진 속의 여자가 옆의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옆의 여자가 모니터를 보고 실제 얼굴을 보더니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사진으로는 엄청 짝짝이네. 한쪽 눈꼬리는 많이 올라갔네. 너 사진이 이상한 거 아니야?”라며 두 사람은 사진을 보며 대화를 했다.

대화를 실컷 하더니 한참 만에 밑 트임을 한 것처럼 눈의 밑 부분을 좀 더 옆으로 당기고 밑으로 내려 달라고 했다. 눈동자를 안으로 좀 더 모으고 눈썹이 조명 때문인지 다르게 보이니 연하게 보이는 눈썹을 칠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눈썹 정리를 잘 못 한 것이었다. 눈썹을 잘못 깎고 정리가 다르게 된 것도 자신의 탓보다 사진의 탓으로 돌렸다. 눈썹을 맞추는 데만 십 분이 걸렸다. 코볼이 짝짝이니 한쪽 코볼을 좀 줄여 달라, 광대를 조금 넣어 달라, 이마에 걸린 머리 라인을 자연스럽게 해 달라, 입술의 양쪽 끝을 살짝 올려달라고 했다. 여자가 하라는 대로 나는 다했다.

지금 사진관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에 관한 행위는 사진을 찍는 이의 고유의 몫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저작권을 가지고 사진이 나올 때까지 자신만의 작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사진은 촬영하는 행위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행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저 손님을 위해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더 이상 상업사진이란 예술의 경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면서 인간과 사진의 관계라든가 사진이라는 예술이 먼저 나온 모든 예술보다 나이가 적어서 좋은 사진을 담아야 하는 관념에서는 완벽하게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 사진은 인화보다는 파일로 존재하여 비슷한 사진이 대량 생산되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앞으로 상업사진관은 사람들에게 멀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몇몇은 살아남아있겠지만 그건 아마도 거대자본에 귀속한 형태로 남아있을 뿐일 것이다.

사진 속의 주인공 손님은 사진이 출력되는 크기로 보여 달라고 했다. 두 여자 손님에게 모니터로 사진을 작게 보여 주었다. 여자는 한 마디 했다. “저 아닌 거 같은데요. 전혀 내 얼굴이 아니에요. 이건 정말 이상해요. 저 이 사진 안 할래요라고 했다. 옆에 있던 동행도 이건 얘의 얼굴이 아니에요. 완전히 얘의 얼굴에서 변했어요. 이건 아니잖아요. 왜 이렇게 수정을 했어요?”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정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진관에서 찍으셔도 됩니다라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했다

뭐라구요? 다른 곳으로 가라구요? 여기에서 이만큼 시간을 들였는데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마음에 들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장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화를 냈다.

이거 완전히 손님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심보잖아. 이거 휴대폰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자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다시 촬영을 해주겠다고 했다. 두 시간 가까이 되어 갔다. 중간에 온 다른 손님은 기다리다 가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나는 깜깜했다. 같은 얼굴을 여러 번 찍고 수정을 한다는 것은 점점 의미를 잃어갈 것이 뻔했다.

그때 선글라스의 여자가 두 명의 여자에게 당신들 옥암동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새로 생긴 시스터 포토에서 온 사람들이지? 여기 상가협회에서 알면 곤란할 텐데라고 말했다. 두 명의 여자는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고 그 순간 사진을 촬영한 여자의 얼굴이 모니터 속의 얼굴처럼 현실에서도 비틀어져 보였다. 눈썹한쪽이 위로 올라감과 동시에 눈도 코고 입술도 모두가 한쪽 위로 올라갔고 턱은 옆으로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당신은 누군데 참견이에요?” 머리가 긴 여자가 말했다

상도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는 건 상가협회에서 금지하는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인터넷에 올려 손님을 끊기게 만드는 비열한 짓을 하는 걸 협회에서 알면 뭐라고 할까. 그렇게 되면 당신들도 이 바닥에서 발붙이고 장사를 하기 힘들 텐데.”

여자 두 명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나에게 하던 공격을 선글라스의 그녀에게로 옮겼다.

, 이제 보니 이 두 사람 그렇고 그런 사이구만. 당신들까지 말했을 때 선글라스의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화면에 터치를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여자 두 명이 한 이야기가 다 녹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녹음파일을 메일에 첨부하여 상가협회장의 메일에 보내기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거든. 손님으로 가장한 이런 치졸한 일도 다 폭로가 될 테고 손해를 보는 쪽이 누구인가 잘 생각해보도록 해요.”

최흑오는 아주 차분했다. 목소리의 톤이 일정했고 전혀 떨림이 없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어쩐지 얼굴이 더 틀어졌다. 마치 지우개로 문댄 것처럼 얼굴이 비틀어져 있었다. 주로 말은 머리가 긴 여자가 했는데 단발의 여자는 고개까지 비스듬하게 꺾여 있었다. 비대칭이 심한 건 평소 안 좋은 자세와 잘못된 습관 때문이다. 여자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않고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니면서 다른 곳을 파괴하는 것보다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인들의 가게에서 개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두 명의 여자 중에 머리가 긴 여자가 가방을 챙기더니 단발의 여자를 끌었다

없었던 일로 하죠라며 두 명의 여자는 비가 오는 가운데 두 시간 만에 왔던 길로 다시 나갔다.

 

이 모든 게 쥐들이 하는 짓이에요. 당신에게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군요. 처음에는 한두 달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과 같은 일에 당신은 계속 휘말리게 될 거에요. 그러다가 벌어진 틈으로 나온 쥐떼에게 몹시 기이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나 아주 무서운 일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오늘 저녁에 다시 올 겁니다. 그 전에 당신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것을 하지 않고 떠났다가는 어떤 몹쓸 일에 휘말리게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제대로 이야기를?”

, 그래요. 제대로 당신은 이야기를 해야 해요.”

무슨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건지…….”

그건 당신이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제때에 해야 할 말을 건너뛴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여권을 만들고 제가 다시 오기 전까지 당신은 제대로 해야 할 말을 하세요. 그리고 준비를 하면 돼요.”

그렇게 하면 쥐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겁니까?”

선글라스를 쓴 최흑오는 조금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의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좀 더 복잡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돼요.”

선글라스의 여자는 생각났다는 듯 , 제가 올 때까지 반드시 기다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의 최흑오는 나에게 계산을 하고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이후로 손님은 오지 않았다. 비가 더 거세게 내렸기 때문에 이 비를 뚫고 왔다가 사진을 촬영 할 몰골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아 그때 그녀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그녀에게 그 남자에 대해서, 그날 우산을 같이 쓰고 어디를 갔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것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물어보는 것을 하지 않았다. 물어봐야 아마 대답은 뻔 할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서 스스로 조금씩 물이 빠지듯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꺼내지 않으면 절대로 그녀가 먼저 꺼내지 않을 말들에 대해서, 꺼내는 순간 현실이 되어버리는 말들. 그 뻔 한 대답이 아마도 나를 결락으로 이끌 것이 뻔했다. 뻔 한 것은 늘 뻔 한 결말을 가져온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내가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최흑오라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름도 이상했다.

 

최흑오. 검색을 해보니 까마귀의 눈물을 뜻하는 이름의 흑오는 많이 검색이 되었지만 최흑오라는 이름으로 검색이 되는 건 없었다

까마귀의 눈물이라. 까마귀가 눈물을 흘리면 세상이 이상하게 되는 것일까. 지금 내리는 비는 까마귀가 흘리는 눈물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였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건 여기를 찾아오는 것만큼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근래에는.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말을 해야 한다. 내가 제대로 말을 하면 그녀도 제대로 말을 해 줄 것이다. 나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손님 있는 거야? 다시 전화할까?”

? 아니, 이제 없어. 괜찮아.”

전화 받을 수 있어?”

.”

비가 정말 많이 오네. 비가 이렇게 오면 손님이 없다고 투덜대던 자기가 생각나라며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키득키득 거렸다. 처음에는 그녀가 먼저 나에게 전화를 많이 했다. 하지만 손님이 있으면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손님이 가고 나서 다시 내가 전화를 했다. 그것이 죽 길어지니 그녀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시간이 되면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자신은 늘 받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동안 내가 죽 전화를 했다. 그동안에는.

그래, 맞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사진을 찍는 손님들이 드물지.”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아무런 말도 없이 있었다

자기 화나지 않아?”

나는 그 다음 말이 빨리 떠오르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화가 나지 않는 모양이야. 자기는.”

글쎄, 잘 모르겠어. 화가 난다기 보다…….”

또 조금의 틈이 있었다. 틈이라는 게 눈으로 보이는 균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예리한 틈이 전화기와 전화기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좋다와 싫다 사이에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아. 자기가 늘 하는 말이었지. 하지만 가끔은 좋다, 싫다, 확실한 게 나을 때도 있어.”

시간은 그 틈을 좀 더 벌리고 깊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데는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 더 많다, 라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이렇게 될 것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말투가 높임말로 바뀌었다.

어째서 말투가 그렇게 바뀌었지?”

당신은 정작 중요한 걸 늘 비켜가고 있어요. 어떻게 하고 싶어요?”라고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든 될 거야라는 내 말에 그녀의 웃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그 소리는 단무지를 아주 잘게 씹어 먹는 소리처럼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녀는 짧게 웃음을 끝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웃음은 노을의 꽁지처럼 내 귀에 길게 맴돌았다.

그래요. 어떻게든 되겠죠. 그 말은 어떻게 되든 간에 당신은 상관없다는 이야기군요.” 그리곤 어떤 인사 같은 말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나는 다시 전화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은 했지만 생각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는 그걸로 끝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끝끝내 하지 못했다. 최흑오라는 이름을 가진 선글라스의 여자가 말하는 제대로 이야기하라라는 말을 따르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일 년 하고 5개월 정도 전이었다. 후배 녀석 때문에 나가게 된 한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사진을 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면서 둘이서만 따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친밀한 스타일로 얼굴도 작고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는 마치 컬러렌즈를 낀 것처럼 갈색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그것이 몹시 신비스럽게 보여서 그녀의 눈동자를 많이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사진들을 건네주면서 맥주를 마시는 사이로 발전을 했고 같이 자는 사이가 되었다. 막상 사귀는 사이가 되고 나니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가서려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일까, 어떠한 면에서 질투도 덜 느끼고 데이트를 해도 그녀위주로 했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말해본적은 없었다.

그녀가 먹고 싶은 걸 먹는 것이 나는 괜찮았다. 그녀는 요즘 여자들과 다르게 내가 몰고 다니는 오래된 수동기어 자동차에 대해서도 크게 참견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동기어라서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빈 운동장에서 운전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운전을 서툴게 하여 차의 조수석 문에 스크래치가 갔는데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서서히 변해가는 동안 나는 그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으며 눈치를 챘다고 해도 그것에 상응하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 대해서 흉을 본다고 해도, 욕을 한다고 해도 내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것을 듣기보다 내 뒤에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친구들끼리 나를 흉보는 게 훨씬 나았다.

어차피 나의 귀에 안 들어오면 나는 모르는 것이니까 상관없었다. 만약 나에 대한 흠담이나 충고 따위가 내 귀에 들어오게 되면 그 친구들을 피하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면 영영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그들 역시 살아가는 생활이 바쁘기에 늘 나를 흉보며 살아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여자, 내 편이라고 하는 그녀가 떠났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의 공간에 검은 물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으로 몹시 언짢았다. 거북하고 체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역기를 든 무게만큼 나를 짓눌렀다

불쾌한 기분이 온 몸을 덮었을 때 한 손님이 왔지만 손님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비가 너무 와서 컴퓨터가 고장 났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손님은 비가 와서 컴퓨터가 안 된다는 말을 이상하게 들을 법도 한데 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늘 신나게 들었던 악틱 몽키즈의 노래가 끝났음에도 다시 노래를 틀지 않았다. 가게 안은 그야말로 고요가 모든 공간에 들어앉아 있었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행동의 정당성도 잃은 채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비는 계속 쏟아져서 고요함을 깨웠다.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았으며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내 내부의 오토 장치는 스위치를 내려 방호벽을 만들어서 그 안쪽으로는 안전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의미로 진공관의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 방호벽의 밖에서는 불꽃놀이처럼 만개와 함께 무화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방호벽을 사이로 그 안쪽에서는 나는 진공에 몸을 감싸인 채, 그 모습을 그저 일별할 뿐이다.

그렇게 조금 지나면 불꽃놀이는 끝이 나고 평소와 똑 같다.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는 건 일어나고 만다.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겁이 나기 때문에 내 내부의 어떤 장치는 작동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방호벽은 더 거대해졌다. 적이라는 건 다름 아닌 내 내부의 방호벽을 만들어버린 나였다.

자기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준 상처보다 자기가 받은 상처의 총량이 훨씬 많다고 생각을 늘 하고 있는 거 같아. 그렇기에 자기 같은 사람이 이렇게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어느 날 그녀와 술을 마시고 그녀가 술에 취해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그 당시에는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어떠한 역사적인 일들도 동 시간 속에 있으면 알아채지 못한다어찌되었던 나는 그녀에게 내가 제대로 해야 할 말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 9시가 되었다. 건물의 다른 가게들이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인사를 하고 빗속을 뚫고 집으로 갔다. 불이 하나씩 탁탁 꺼지기 시작하니 건물은 겨우 숨을 쉬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둠이 온 세계를 덮쳤고 거기에 비까지 내려 건물은 마치 고립의 자세를 지니는 것 같았다.

최흑오라는 여자는 오지 않았다9시가 넘어서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오지 않으려는 것일까. 그때 지하주차장에서 들리던 그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소리였다. 일반적인 쥐들이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없는 기이한 공명의 소리가 들렸다. 영혼을 갉아먹는 어둠의 소리였다.

가게 안에 앉아있는데도 지하주차장의 그 소리가 자글자글 들려왔다. 2층의 모든 가게는 전부 문을 닫고 퇴근을 했고 로비의 불은 꺼졌다. 붉은 눈동자의 쥐들이 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와서 나는 그만 가게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빼는 것도 겁이 나서 건물의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날 밤, 나는 몹시 이상한 꿈을 꿨다. 최흑오라는 여자와 잠을 자는 꿈이었다. 선글라스의 그 여자가 어째서 내 꿈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다. 최흑오라는 여자는 꿈속에서 계속 이건 꿈이 아니에요,라고 말을 했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옷은 다 벗었지만 선글라스는 벗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여자와 섹스를 하는 건 어쩐지 이상했다. 그것이 설령 꿈이라고 해도 기이하기만 했다. 밖에는 비가 내려요,라고 최흑오는 그렇게 말을 했다. 옷을 다 벗은 최흑오는 방의 불을 끄기를 바랐다. 꿈이지만 정말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 등이나 허벅지에 그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에 물린 상처가 몸 여러 곳에 있었다. 선글라스의 여자는 눕지 않았다. 나를 눕히고 여자가 내 위에 올라와서 섹스를 했다. 선글라스를 낀 얼굴 양 옆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움직임을 말해주고 있었고 입술이 약간 벌어졌고 그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꿈이지만 최흑오라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손끝으로 그녀의 가슴에 있는 상처를 느꼈다. 도돌도돌 올라온 살갗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의 상처를 손끝으로 느낄수록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하려다 만 것, 내가 확실하게 해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에 관한 것들이었다. 익숙하지만 고통이 되어 결국 그대로 아물어 상처가 된 것들이었다.

나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괜스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제대로 어루만져 줘야할 행동이 빠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자의 피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존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여자도 눈물을 흘리는 거 같았다. 선글라스를 쓴 채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최흑오라는 여자의 눈이 보고 싶었다. 강렬하게 여자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모니터로 본 여자의 눈동자는 채도가 빠진 것 같은 아주 기이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눈에 문제가 있어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눈에 문제라는 건 빛에 관련된 것일까.

나는 여자의 눈동자가 몹시 보고 싶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끌리는 것일까.

지금 섹스를 하고 있지만 동통이 오는 것 이외에 섹스가 전해주는 쾌락이나 흥분은 잘 느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최흑오라는 여자의 얼굴은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사진을 찍었던 비대칭의 비현실과는 다른 비현실이었다. 보통의 얼굴은 왼쪽 오른쪽이 조금씩은 다르다. 완벽하게 좌우가 대칭이 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섹스를 하면서 본 선글라스의 여자, 최흑오의 얼굴은 완벽하게 좌우가 대칭이었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는 도톰한 입술 사이로 더 큰 신음 소리를 냈다. 섹스를 하지만 쾌락이 없는 섹스였다. 동통만 느껴지는 섹스, 아니야, 이건 꿈이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자 최흑오는 이건 꿈이 아니에요, 좀 더 집중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최흑오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신음 소리의 중간에 섞어서 했다. 그러자 선글라스 너머의 눈이 있는 곳에서 붉은 빛이 엿 보였다. 그 붉은 빛은 비가 오는 날 무화과나무가 잘린 밑동에 앉아있던 쥐 세 마리의 눈빛에서 본 붉은 빛이었다.

나는 최흑오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정말보고 싶었다. 손을 뻗었다. 여자의 선글라스를 벗기려고 했다. 선글라스를 치웠을 때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까악 까악.

 

 

나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곤혹스러웠다. 어떤 꿈을 꾸다가 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을 땐 잠과 잠에서 깬 그 사이의 적응이 어려워 늘 곤혹스럽다. 전화소리에 잠에서 깼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 휴대전화는 웅웅 진동과 함께 반짝이며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가 지났다. 비가 아직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비가 양동이 같은 곳에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났다. 휴대전화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주소록에 입력되지 않는 사람이 전화를 한 것이다. 대체로 그런 번호는 손님이지만 이런 새벽에 전화를 할 리는 없다.

그녀가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가 그런 구차한 일을 할리 없다. 받지 않으면 그대로 끊길 것이고 영영 울리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번호로 새벽에 온 전화의 상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땀에 젖어 축축한 티셔츠를 벗었다.

땀은 어딘가 어둡고 퀴퀴한 곰팡이 같은 냄새가 났다. 지하주차장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나는 벗은 티셔츠를 최대한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던졌다. 하지만 티셔츠는 방을 벗어날 리 없고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휴대전화의 벨소리는 한 번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일까. 고향에 있는 어머니일까. 아니다. 어머니는 이 시간에 이런 번호로 전화를 할리가 없다. 이상하지만 집에서 전화가 와도 나는 긴장을 했다. 신기하게도 그저 안부전화는 벨소리에서 이미 표가 났다. 긴장을 해야 하는 소식이 온다는 벨소리라고 느껴지면 어김없이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손을 하체로 내렸더니 페니스에 동통이 느껴졌다. 팬티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니 몽정을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꿈을 꾸었는데도 몽정을 하다니. 몽정이 끝난 지 이미 10년도 넘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팬티를 열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정액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이렇게 많은 양의 정액을 분출해 본적이 없었다. 끝나버린 줄 알았던 몽정을 다시 했고 상상 밖의 양의 정액이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몇 번이나 다시 걸려 와서 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입단한 배구선수처럼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받았다.

쥐들이 이동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은 빨리 정액을 닦아서 그것을 물에 희석을 시켜야 해요. 쓰레기통이나 그대로 휴지로 닦아서 버리지 말고 변기에 집어넣거나 물에 넣으세요. 지금 빨리 해야 해요라고 수화기너머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을 했다. 나는 순간 놀랐지만 그 목소리는 최흑오라는 여자의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당신은…….”

이봐요, 내가 당신 꿈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대로 잠에 빠져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꿈이지만 꿈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가게에서 나오는 바람에 쥐들이 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쥐들이 곧 그 집으로 갈 겁니다. 어서 물에 희석 시키고 빨리 집을 나오세요.”

나는 여자의 말을 믿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일단 알았다고 하고 다 끝나면 전화를 내 쪽에서 하겠다고도 했다. 일어나서 팬티에 묻은 정액을 닦고 그것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팬티에 묻은 정액도 물에 대충 빨았다. 잠깐 스친 쥐들이었지만 그 크기와 눈빛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 필요한 물품을 넣고 짐을 챙겨 선글라스의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한 번 울리고 바로 받았다

그런데, 최흑오 씨가 꿈속으로 들어왔다는 건…….”

지금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다시 당신의 가게로 오세요. 여기에도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요.”

제가 차를 거기 놔두고 와서 택시를 타고…….”

이제 당신의 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무용지물이에요. 이미 쥐들이 그렇게 해놨어요. 그러니 스치는 차들, 그러니까 택시를 타고 되도록 빨리 오세요라고 하며 전화는 뚝 끊겼다.

나는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려고 하니 그동안 이 집에서 지냈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다. 빗속에 오고가는 택시가 없지만 미리 전화를 해서 콜을 불렀기에 집을 나오자마자 택시가 앞에 섰다. 천 원이 더 비쌌다.

 

택시기사는 인도인이었다. 외국인이 운전하는 택시는 처음 타봤다. 그는 나에게 인사를 했다

저 는  인 도 사 람 이  아 닙 니 다.  저 는  스 리 랑 카  사 람 입 니 다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 했다. 그는 얼굴이 까맣다. 흑인만큼 까만 얼굴이었지만 흑인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크레파스의 검은 색을 얼굴에 칠해 놓은 것처럼 새까맣다.

어둠에 묻혀 버릴 것처럼 얼굴이 검었는데 눈동자의 색과 가끔씩 말을 할 때 보이는 이빨이, 난 흑인과 달라, 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스리랑카 사람과 흑인의 검은색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목적지를 물어보고 기어를 넣고 운전을 했다. 그러고 보니 택시가 수동기어였다.

택시가 수동기어를 장착하고 달리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제 가 수 동 기 어를 운 전 하는 게 편 해 서 그 렇 게 회 사에 말 했 습 니 다라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밤을 새워 일을 하면 매월 집에 150만원을 보내주고도 자신은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름을 쉬안이라고 밝힌 그는 여자 친구가 스리랑카에 있는데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 친구의 얼굴을 폰을 열어 보여주었다. 여자의 얼굴은 아주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같은 얼굴이었다. 손님에게 늘 이렇게 여자 친구를 자랑하는 모양이었다. 여자 친구가 보고 싶으면 한국여자와 잠을 잔다고 했다. 한국여자는 자신과 한 번 잠을 자면 보통 몇 달을 자신에게 붙어서 술과 밥을 사준다고 했다. 지금 자신과 섹스를 즐기는 여자는 간호사라고 했고 그 여자는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다.

저 는 스 리 랑 카 에 있 는 여 자 친 구 가 보 고 싶 습 니 다.”

한국여자는 그렇게 예쁘지 않다고 했다. 나는 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같은 동급의 차라도 수동 기어를 가진 자동차는 힘이 좋다. 그렇지만 택시를 굳이 수동기어로 운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쉬안은 스리랑카를 한 번 검색해 보라고 했다. 그곳의 바다는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이곳의 바다는 쓰레기가 많고 깨끗하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연을 마구 더럽힌다고 했다. 어느 날은 쥐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바다에 발을 담그는 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점점 이 세계가 시궁창 같아지고 쥐들이 이쪽으로 다 모여드는 것 같았다. 신호등 때문에 잠시 멈추었다. 보통 택시는 이런 새벽에 신호등을 꼬박꼬박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쉬안은 신호를 잘 지켰다. 그것에 불만은 없다. 그리고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것도 나의 문화권에는 없었다.

쉬안이 비가 오는 밖을 보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하수구였는데 물이 넘쳐 역류하고 있었다. 그곳에 쥐들이 몇 마리 모여서 무엇을 먹고 있었다. 쉬안은 언젠가부터 비가 많이 오면 이 도시는 쥐들이 밤에 막 나온다는 것이다. 비가 아무리 와도 낮에는 쥐들이 가만있는데 밤만 되면 하수구 밖으로 흘러나온다고 했다.

택시의 창밖으로 보이는 쥐들은 무화과나무 밑동의 자리에 있던 쥐들과는 달랐다. 작고, 그저 늘 보던 볼품없는 쥐들이었다. 하지만 최흑오라는 여자가 말한 것처럼 쥐들이 이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쥐들의 이동은 단순히 지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새벽인 시간에도 30분 넘게 달려 나는 가게로 왔다. 이 시간에 가게에 온 적은 처음이었다.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매일 와서 생활을 하는 자리다.

하지만 시간만 바뀌었을 뿐인데 생소했다. 그러니까 내가 8년 동안 들숨과 날숨을 쉬며 지내온 그 모든 것이 몽땅 빠져나가 있었다. 몹시 이상한 곳이 되어 있었다. 매일 와서 맡았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사람이 생활하는 곳에는 냄새라는 게 존재하지만 냄새가 죽어 있었다.

내가 나의 등을 계속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도 켜지 않고 넋을 잃고 앉아서 지금 가게에 오게 된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나의 꿈속으로 들어왔다는 최흑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붉은 눈을 가진 쥐들과 그 쥐들이 내는 소리와 이상한 손님들과 택시 운전사인 스리랑카인 쉬안을 생각했다.

 

생각은 돌고 돌아 원점인 그녀에게로 갔다. 그녀는 우산을 같이 쓴 남자에게 상당히 친밀 적이었다. 처음 만나거나 몇 번의 만남만으로 그런 표정이 나올 수는 없다. 꽤 오래전부터 그녀는 그 남자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몸을 섞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녀가 무릎 밑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온 적이 있었다. 대일밴드만으로 안 되는 상처가 나서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그녀는 우산 속의 그 남자를 만나서 섹스를 즐겼을 것이다. 문득 그녀의 다리에 난 상처도 물린 상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우산을 쓰고 있던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그 남자가 혹시,

 

나는 가게에 불을 켜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컴컴하게 있다가는 가게의 어느 곳에서 어떤 손이 나와서 나를 잡아 당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위치를 올리려는데 최흑오가 들어왔다

불을 켜지 마세요. 쥐들이 지금 당신 집에 있어요. 당신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정액을 물에 희석하여 버렸기에 당신처럼 보이는 형태가 그곳에 남아 있어서 쥐들은 잠시 동안은 그 형태를 당신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리 오래있지는 못해요. 당신은 어째서 제 말을 듣지 않았죠?”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일어날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거예요. 불을 켜서는 안 돼요. 일단 문을 잠그세요.”

여자의 말에 나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내가 가게 안에 있으면 문을 잠근 적은 처음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잠그는 순간 방호벽이 쳐진 것 같았다.

문 밖에서 어떤 이벤트가 일어나더라도 나는 이 안에서 그저 방관하는 자세로 볼 수 있는 태도만 취하게 된다. 여자는 문 앞에서 문 밖을 잠시 보더니 블라인드를 쳤다. 시각적으로도 단절이 되었다. 그리고 여자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게 안은 그야말로 적막이 가득했다. 검은 적막이 우리 두 사람을 꽉꽉 에워샀다. 여자는 적막 속으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여자는 내 손을 들어 자신의 상처를 만지게 했다. 그 촉감은 몇 시간 전에 꿈속에서 만졌던 여자의 상처와 같은 감촉이었다.

손등, 팔뚝 그리고 어깨에도 상처가 있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윗도리를 벗었다. 그 모습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가슴 언저리 부분에도 상처가 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실제로 만지고 있는 것이다.

손끝으로 실제의 상처를 계속 만지고 있으니 내 마음의 한 부분을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말을 뱉어버리고 나서 그 후에 일어나는 일을 미리 걱정하여 그저 입을 꾹 다물었던 마음이 손끝으로 만져졌다. 그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나의 최선이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내 생각과 늘 다르다는 걸 커가면서 점점 느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여행을 갔었어요. 그곳에서 죽으려고요. 그런 사정이 있었어요. 이곳에서 더 이상 살아갈 가망이 없다고 생각을 했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여자는 그럴만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런 여자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요. 그 사람은 나의 이야기를 걸러내지 않고 들었어요. 전 그걸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날 그 남자와 잠을 잤어요. 마지막이니 한 번쯤 그런 섹스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남자의 집에는 그 남자가 키우는 영혼이 살아있는 쥐가 있었어요. 촛불 앞에서 옷을 벗은 그 남자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는데 저는 그 상처를 만지는 순간 그 남자에게 빠져들어 갈 것을 이미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 남자는 자신의 상처가 영혼이 살아있는 쥐가 낸 상처라고 했어요. 저 역시 그 상처를 바라고 있었어요. 나는 점점 그 남자에게 빠져들었죠.”

그럼 그 남자와 잠을 자고 난 후에 흑오 씨도 이렇게 몸에 상처가 난 겁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치마를 벗고 팬티도 벗었다. 내 손을 잡고 팬티가 있던 자리에 손을 갖다 댔다. 그곳에도 상처가 있었다. 다른 곳보다 예리한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손으로 만져지는 상처의 흔적은 깊은 골과 절망, 유약한 인간의 실체가 만져졌다. 도돌도돌한 상처는 살아있어서 그 곳이 벌어지고 어떤 이벤트가 꼭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는 오래되었고 딱딱하게 밀봉된 문처럼 굳게 아물어 있었다

여자는 옷을 다 벗었다. 선글라스만 벗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바지의 앞섶을 열어서 페니스를 꺼내서 만졌다. 선글라스는 벗지 않았다. 꿈과 비슷했다. 꿈속에서 이미 한 번 여자와 전위를 가져서 동통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다시 딱딱해졌다.

여자는 입으로 딱딱해진 나의 페니스를 잘 빨아 주었다. 최흑오의 머리는 가게 안의 적막에 스며들어갈 정도로 검은색이었다. 여자의 머리를 보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의 웃음과 그녀의 스타일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반드시 섹스를 하지 않더라도 그녀와 손을 잡고 카페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좋았다. 그녀가 섹스가 하고 싶다면 마지못해 내가 하는 꼴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방호벽이라는 게 적당한 시기에 필요한 때에 필요에 의한 것인데 방호벽의 남발이 어쩌면 결과를 비틀어서 옳지 못한 결과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얏, 페니스에 동통이 심하게 왔다. 마치 퉁퉁 부어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정성스럽게 빨았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내 위에 앉았다. 그녀는 몸을 움직였고 신음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그녀의 등은 조각 같았고 상처가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등에 있는 상처를 지도 속의 지역을 찾듯 서서히 손으로 더듬었다. 이상했다. 최흑오라는 몸이 몹시 아름다운 여자와 섹스를 하고 있지만-이렇게 몸이 아름다운 여자와 섹스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나는 몹시 외롭다고 느꼈다.

특히 여자의 등에 난 수많은 상처를 만질수록 외로움이 더 들었다. 상처는 일정하지 않았고 형태도 다 달랐다. 문명을 이룬 것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앞으로 무엇을 해도 그 고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사정하기 전에 꼭 말해줘요라고 여자가 고개를 약간 돌려 말했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의 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어두운데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생각과는 다르게 페니스는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선글라스의 여자를 향해서 점점 다가가려 했다. 그럴 때마다 희미하지만 그녀와의 추억에 대해서 떠 올렸다.

실은 나는 그녀를 정말 사랑했던 것이다. 진정 사랑하게 되면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 서툴러지게 된다. 어쩌면 사랑보다는 이해가 더 필요했을지 몰랐다. 때문에 나는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들이 시간의 정당한 흐름을 막아놓고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급격하게 거대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무턱대고 나에게 화가 났다. 몸이 떨렸다. 추운 날이 아님에도 한기가 확 들었다.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으윽, 신호가 왔다. 나는 여자에게 사정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흑오는 엉덩이를 빼서 나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돌아간다. 여자는 나의 페니스를 손으로 흔들었다. 격정적인 순간이다. 여자는 나의 정액을 바닥에 방출하게 했다. 그리고 발가벗은 채(선글라스를 쓴 채)로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들고 와서 바닥에 선명하게 방출되어 있는 정액에 물을 부었다.

이 모든 게 당신이 제대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을 어겼기 때문이에요. 이제 중요한 물품만 챙겨서 여기를 나가요. 되도록이면 며칠 휴가갑니다, 라고 써 붙여 놓으세요라고 말했다.

이제 쥐들은 없어지는 겁니까?”

나타난 쥐들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아요. 쥐들이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형태가 당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곧 이리로 올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쥐들이 이리로 들어와서 일주일가량의 시간동안 서서히 죽어갈 거예요. 쥐들에게 필요한 건 당신 내면의 대립되는 마음이거든요. 방호벽을 치면서도 방호벽이 뚫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쥐들에게 필요한 거예요. 쥐들은 당신의 냄새를 맡고 당신의 잔재를 먹을 거예요. 쥐들은 그러면 당신의 그 마음을 가질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당신의 집 변기에도 몇 마리의 쥐가 빠져 죽어 있을 거예요. 쥐들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당신의 마음을 갉아 먹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쥐들은 이곳에서 죽어 갈 겁니다. 어쨌든 짐을 챙기세요. 이곳을 나가야해요.”

전 그럼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집도 가게도 아닌 곳으로 가면 됩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와야 했지만 서랍에 있는 16기가 USB3개를 들고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고가지만 카메라가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고가의 카메라를 챙기지 않았을까. 무거워서 일까.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서 일까.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사진보다 훨씬 낫다. 그렇지만 카메라를 두고 나왔다. 그것이 사진관 안의 모든 물품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값어치가 나가지만 나는 그대로 두었다.

어디 조금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나을 거예요. 이대로 떠나세요. 지금 당장 버스터미널로 가서 시간이 되는 버스를 타고 아무 곳으로 가는 겁니다. 당신이 유념해야 할 사항은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거나 돈으로 섹스를 하되, 절대 그 안에 사정을 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지금처럼 반드시 물에 희석하든지 휴지는 물에 버리도록 하세요. 그것만 유념하면 됩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당신을 도와주는 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자 짐을 다 챙겼으면 이제 나가죠.”

최흑오라는 여자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큰 우산을 펼치고 높은 굽을 신은 채로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일 년 전에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는 저 여자에 대해서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채도가 빠진 듯 한 기이한 눈동자를 지닌 여자를 기억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기억은 없고 여자가 왔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컴퓨터에 파일이 남아 있으니까. 도대체 파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것, 또는 자주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몸이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은 몸이 알아서 한다. 분명히 한 달 정도 지나면 나는 모든 파일을 삭제를 했다.

컴퓨터라는 것이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제대로 지우지 않았거나 그 당시에 여자가 절대 지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대로 나는 기억을 하고 있어야 했다. 여자의 말대로 나는 기억이 조금씩 소멸되어 가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게 쥐들에 의해서, 내가 제때에 제대로 태도를 취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최흑오는 나에게 말했다.

 

여자의 말대로 시외버스정류장으로 와서 5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7번 국도를 타는 버스였다. 신용카드는 있고 주머니에도 현금으로 34만 원 정도 있었다. 가방에는 속옷 두 벌과 여벌의 티셔츠와 바지가 있었고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

허기가 졌다. 배가 고팠지만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는 영덕으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에는 운전사 이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할머니 한 명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또 다른 할머니 한명이 올라타 있었다.

나는 맨 뒤의 창가에 가서 앉았다. 할머니들은 그 나이 때가 비슷하고 버스에 사람이 없어서 서로 인사를 할 법도 했지만 그들은 얼굴이 마주쳐도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고 각각 다른 자리의 창가에 앉았다.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비슷한 모습에 그만 실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은 정당하지 않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막아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앉아서 2분쯤 지나니 버스의 냄새가 올라왔다. 검붉은 색의 가죽 시트에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찢어 놓거나 손으로 뜯어 놓았다. 상처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사람들을 맞이했다.

가죽시트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했다. 나는 손으로 그 상처를 만지려다가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떠올랐다. 가끔씩 신고 나오는 하이힐과 나의 팔짱을 끼고 걸었던 거리와 때로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손님들 앞에서 마네킹의 미소를 보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비틀어짐이 마음의 한 구석에서 모래성을 쌓았을지도 몰랐다. 기억이 나야 하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만들어낸 기억은 그것을 생생하게 재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응이 토착화되어 있지 않아서 반응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못할 때도 있고 생각보다 앞서 말하거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되도록 중의적인 말을 찾으려고 했고 될 수 있으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의 방호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그럴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쥐들은 그런 나를 찾아서 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쥐들을 피해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흑오라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쥐들이 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방호벽 안의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더 피하려 하고 있다. 편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몹시 외로워서 더한 외로움의 껍질을 덮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깊게 사랑 할수록 나의 외로움은 깊어지는 사랑만큼 커져가는 것이다.

외로움의 발로는 사랑에서의 시작이었다. 학습을 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기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호벽만큼은 단단하게 만들어 버렸다. 양의적인 의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을음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기억의 주위에서 떠돌아다니며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버스가 영덕 전의 영해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거기서 내렸다. 아주 작은 터미널이었다. 레인시즌이라 날은 맑지 않고 비는 소강상태였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을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먹구름은 하늘에서 영역을 만들며 이동을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무엇인가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내장탕 집으로 들어가서 내장탕을 주문했다

더운 날임에도 덥지 않았고 외롭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한기가 들어 내장탕 집 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 집만이 오직 아침식사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주문하고 몇 분 쯤 지나니 벌건 국물의 내장탕이 조미료의 냄새를 내며 앞에 놓였다. 막상 내장탕이 나오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저은 다음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는 계산을 하고 그대로 나왔다

포구를 거닐다 숙소를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모텔이었다. 항구가 보였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모텔은 모텔만의 냄새가 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비슷한 책상과 생활용품이 테이블 위에 있고 거울이 있고 티브이가 있고 욕실이 있다

침대가 있고 바닥이 보이고 콘돔이 보였다.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오후 5시가 넘었다.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이렇게 낮잠을 오래 잔 것도 처음이었다

창문으로 보니 아직 날은 아침처럼 그대로 흐린 상태였다. 바다의 냄새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일어나서 또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사람은 소거되어 있었다. 10분 정도 그림처럼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수순처럼 밤에 들어갔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불러 줄 수 있냐고 하니 주인은 그렇다고 했다. 여자는 손톱의 매니큐어가 벗겨진 30대 중반의 여자로 검은 블라우스와 자주 빛의 타이트한 여름용 치마를 입었다

손톱의 벗겨진 매니큐어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합의를 봤다. 여자는 입으로 해주는 대신 오만 원을 더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여자는 빨랐다. 나의 바지를 내리고 침대에 앉힌 다음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나의 허벅지 안쪽을 잡고 한 손으로 만져주고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입으로 잘 빨아 주었다.

 

그녀와의 섹스가 떠올랐다. 처음 그녀와 잠을 잤던 때가 생각났다. 작은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모임에서 빠져나와 둘이서만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실컷 취했다. 그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들고나간 고가의 카메라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신은 그런대로 말짱했다

그날 하룻밤 만에 카메라로 그녀의 사진을 몇 기가바이트나 담았다. 주로 얼굴을, 주로 신비로운 눈동자 위주로 사진을 담았다. “소세계가 있어라는 말도 술을 마시고 하니 꽤 낭만적으로 들렸다.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그녀가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있었지만 포커스는 그녀의 눈동자에 맞춰져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사진을 대량으로 찍은 적은 없었다. 그녀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 USB 3개를 다 들고 나왔다. 나는 이것을 이곳에 버리기로 한 것이다.

 

왜곡된 기억으로 앞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왜곡의 기억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정이라는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조커의 얼굴을 한 채 양립된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며 그렇게 상대방을 대할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외로움 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멀리까지 왔기에 이곳에서 버리면 된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지도 않고 하드디스크에도 없다

그녀와 처음 섹스를 했던 날 그녀는 술이 취했음에도 부끄러워했다. 적당한 가슴에 적당한 엉덩이가 마음에 들었다. 여인숙의 허름한 방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건드릴수록 반응이 왔다. 그녀와 만나면서 몇 번 섹스를 했지만 입으로 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의 페니스를 입으로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처음 본 여자에게는 당연하게도 입으로 빨아달라고 했다. 어째서 사랑하는 이에게는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개를 숙여 보니 여자가 아주 기계적으로 잘 빨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 속의 남자와 격렬한 섹스를 했을 것이다. 내가 못해준 절정에 도달하는 섹스를 우산 속의 남자는 그녀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일종의 분노와 함께 결락이 동시에 몸을 덮쳤다. 그리고 뒤따르는 격렬한 외로움.

나는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을 외롭다고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외로울지도 몰랐다. 혼자서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옆에 그녀가 있음에도 나는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일이 비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혀로 페니스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전조가 있어야 했지만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죽 나오고 말았다. 여자는 미간을 좁히며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칭찬해달라는 듯 미소를 보이더니 돈을 챙겨서 더 이상 우리는 볼일이 없다는 듯 인사를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나갔다. 돈을 집어 드는 손톱의 매니큐어는 더 벗겨진 듯 보였다. 몸에 있던 무엇이 그대로 빠져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게 여자의 입에 사정을 해버렸다. 최흑오는 나에게 물에 희석해서 버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에 사정을 했으니 위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잔재라는 것들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소멸해왔다

 

어떻게든 되겠죠,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될 일은 어떤 식으로든 되고 만다.

고개를 들어 둘러 본 모텔의 모습이 생기가 빠져나가버린 그 여자의 손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텔의 냄새가 가득했고 집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항구에 있는 모텔의 티브이는 잘 나오지도 않았고 휴대전화기의 송신도 잘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돈을 더 지불하고 이틀을 더 머물렀다. 다음 날 포구를 걷고 마을을 걸었다

털 빠진 개들이 보였고 포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이 보였다. 잠시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들어와서 누웠다. 침대시트로 갈지 않았고 그대로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잠시 해가 뜨는 것 같더니 이내 흐리고 몇 시간 동안 비가 내리고 그 사이로 다시 해가 잠시 보이더니 또 구름이 해를 가려서 흐린 날이 되었다. 하늘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생이 진지하게 그려놓은 하늘같았다

조금 살이 빠졌다. 나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흘러가 버린다. 늘 그래왔다. 의도라는 자체가 없었기에 어쩌면 공백이 생기고 공백의 부피가 커지면서 의도가 흐를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만들어지면서 의도는 그 길로 진입을 해 버리고 의도를 제외한 것들이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나는 그녀가 무리해서 사준 휴고보스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다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의도는 물처럼 다른 길을 따라서 졸졸 흘러간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좋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 또 다른 길로 흘러가버린 의도는 그것대로 하나의 체재를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의도가 되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손길을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놓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고 예쁜 손으로 느껴졌던 따스한 그 온기만 있어도 나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믿어 왔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습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USB를 버리러 왔으니 나가서 장소를 찾아봐야 한다. 장소를 찾아서 버리면 된다. 바닷가이니 어딘가에 던지고 나면 끝이다. 나는 손으로 USB를 만지작거렸다. 이 안에는 그녀의 수많은 사진이 있다. 3개나 되는 USB에 가득 들어있는 그녀를 이제 나는 버리려 한다.

역시 의도치 않게 눈물이 흘렀다. 우산을 쓴 남자와 잠을 잔 그녀의 몸에도 상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USB를 버리고 나면 나는 나의 방호벽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방호벽은 좀 더 높아질 거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방호벽은 거대한 외로움이라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렇게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하주차장에서 들리던 그 공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쥐들이 내는 소리였다.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먼저 갉아먹듯 자글자글 거리는 공명은 조금씩,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을 머리위로 덮고 귀를 막았다. 어떻게든 될 것을 알고 있다. 공명은 먹구름 사이를 지나 포구에 정박한 배들의 선미를 건드리고 정중하지만 막힘없이 다가왔다. 자글자글한 공명은 붉은 눈빛을 띠며 숙소 가까이 왔다. 그때 인터폰이 크게 울렸다. 그리고 인터폰은 끊어지지 않았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