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주인공

by 문학의길 posted Mar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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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유종화

1

 죽었다. 눈을 떠보니 죽어 있었다. 피 흘리며 쓰러진 W의 몸을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119에 전화하는 사람, 카메라로 현장을 찍는 사람,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찡그리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보고 있는 W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인의 몸을 이 거리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상 외로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는데, 오히려 죽었다는 사실보다 죽은 다음에도 시각이 온전한 상황에 놀랐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육체에만 있고 죽는 순간, 모든 존재는 불에 타 없어지는 종이처럼 소멸해버릴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우연이었다. 6시에 퇴근하여 회사 정문을 나가서야 핸드폰을 두고 왔음을 깨닫고 다시 사무실에 올라갔다 왔다. 그 후 전철역 앞에서 지인을 만나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눠 바로 탈 수 있던 전철을 놓쳤다. 전철에서 내려 갑자기 커피가 먹고 싶어 카페에 들렀고 집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바로 그 횡단보도에서 급하게 건넜던 탓에 하필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여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W가 핸드폰을 제대로 챙겼다면, 지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카페에 들르지 않았다면, 횡단보도에서 다음 신호등을 기다렸다면 그는 지금쯤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 문제에 답하려면 그가 탄생한 순간부터 되짚어 봐야한다. W는 아주 우연히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동창이었지만 얼굴밖에 모르는 사이였다. 20대 중반 갑작스럽게 열린 동창회에서 그들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술에 취한 남녀는 서로 대화가 잘 통한다는 것을 알았고 외로웠다. 동창회가 끝날 무렵 둘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날 밤 W의 탄생이 예정되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우연이다. W의 부모도 그 뜻밖의 일로 인해 태어났다. 그러니 그의 탄생은 수많은 우연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예견할 수 없는 일에 불과할까? 단언할 수 있는 절대적인 필연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우연히 태어나 필연적으로 죽는다.

 W의 죽음은 예정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을 만든 것은 결국 세상도, W도, 그 누구도 모르게 일어난 일들이다. 어쩌면 우연과 필연은 양극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 관계이다. 그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탄생도 사실 정자와 난자가 우연히 만났던 그 시간의 죽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간의 소멸도 절대적인 필연이다. 시간은 영원히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멸종하고 지구가 멸망하는 날 그것도 같이 사라진다. 시간은 그 흐름을 사유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W 2

 ​W는 허무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그는 학창시절부터 무엇이든 최고를 놓친 적이 없었다. 대인관계도 원활했고 외모도 준수했다. 그러니 여러 학우들이 W를 좋아했고 질투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였고 결국 대기업에 입사해 승승장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W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인생에 굴곡이 없는, 상승선으로만 뻗어나가는 삶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삶이란 것도 중력에 의해 영향을 받아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사고소식을 들었을 때 W의 어머니는 놀라긴 하였으나 올게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불성실한 경찰이 그녀에게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만 알려주고 자세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W가 후송된 병원에 갔을 때 이미 그는 죽어있었다. 어머니는 절망했다. W의 인생에 드디어 작은 굴곡이 생긴 줄 알았는데 수직선으로 이어지던 그래프가 밑으로, 한없이 추락했다. 그 선은 그대로 그녀의 심장을 뚫고 폐를 관통하고 온몸에 생채기를 냈다. 사랑하는 아들의 웃음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단순히 유전자 보존의 실패, 죽을 힘을 다해 탄생시킨 생명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랑을 주었던 어린 존재, 유일하게 그녀의 표정을 닮고 그녀에게 엄마라는 특별한 호칭을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 사랑하는 남자와의 유대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 그 아이를 더이상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함을 의미했다.

 W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두분이 돌아가시면 꼭 같은 곳에 묻어드리고 장례식을 세상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루겠다고 말하곤 했다. 보통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부모님을 향한 아이의 순수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연하게 여겨지던 약속은 더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우연이 만들어낸 W의 죽음은 부모에게 그 약속을 떠오르게 만들었고, 빛바랜 추억은 필연적으로 부모에게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는 부모님께 죄송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자신의 모든 시간과 돈을 성공을 위해 써왔고 부모님께는 편지나 작은 선물, 따뜻한 포옹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크게 속 썩이는 일도 없었고 나름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제대로 된 효도는 성공한 다음에 한꺼번에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다. W는 이렇게 뜻밖의 사고로 일찍 죽을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 났지만 실제로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W 3 

 W는 이제 더이상 자신과 관계 없는 육체가 실려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그곳엔 이미 부모님과 가장 친한 친구들, 직장동료들과 옛 애인 R이 와있었다. 그들은 아들, 친구, 동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W는 자신을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고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그들에게 감사했다. 어찌보면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R을 빼고는. 그녀는 W와 대학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같은 학과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친해졌지만 그뿐이었다. 서로 집도 멀었고 친했던 친구들도 달랐기 때문에 같은 과의 학우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원룸으로 독립했을 때, W와 R은 옆집이었다. 이사 온 후 그들은 복도에서 만났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같은 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은 그 이후로 항상 같이 공부하고 함께 밥먹으며 가까워졌고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W와 R은 원하는 곳에 입사하여 누구나 부러워하는 연인이 되어갔다. 주변 사람들은 그 커플이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R과 W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W는 앞에서 말했듯이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 덩어리로만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기계다. 수명이 다하면 배터리가 다 닳은 기계처럼 그 자리에서 영원히 정지한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저 기계 옆에 딸려온, 전혀 다른 언어로 되어 있어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설명서에 불과했다. 반면에 R은 신을 믿었고 영혼을 믿었다. 그녀가 하는 가장 큰 칭찬은 "너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것 같아. 난 너의 그 점이 무척 좋아."였다. 하지만 W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공감할 수 없었다. 그들의 다른 신념은 대화할 때, 공감이 필요할 때, 더 먼 미래계획을 세울 때마다 큰 장애물이 되어 나타났고 서로가 잘 안 맞는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헤어졌다.

 W가 영혼이 되어 R의 육체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후회를 안겨주었다. 만약 그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려고 시도했다면, 조금만 더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쯤 그들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또 다른 장애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W는 영혼을 믿지 않았던 자신에게 벌이 내려진 것 같았다. 어쩌면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W가 겪고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회의 늪. 후회는 죽은 자의 것이다. 후회는 인간 본인이 한 선택과 행동을 죽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인생은 돌아갈 수도, 건너 뛸 수도 없는 일회성 소모품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선택을 이전 삶과 비교할 수 없고, 잘못해도 다음 생에 올바르게 고칠 수 없다. 역사를 보며 다른 인생과 비교해 볼 수는 있겠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후회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죽이며, 또 죽으며 살아간다. 아니 죽어가는 것이 맞겠다. 

 

L 1

 ​죽었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 L은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몸은 움직여지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움직임 속에서 공기와의 마찰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공기와 마찰하는 느낌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희미하게 비춰지는 달빛으로 보기에 아까 자신이 들어온 공사장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보이는 콘크리트 더미 밑에는 누군가의 팔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L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몸이 저 밑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콘크리트 더미를 밀고 육체로 들어가려는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L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얼마 살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마칠 줄은 몰랐다. 황당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뉴스에만 나오는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길고양이를 따라가다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 L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그의 애인 P였다. 그들은 학창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이어져온 오래된 연인이었다. 소극적이고 흘러가는대로 살아가는 L과 달리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P는 항상 둘의 관계를 주도해왔다. L은 점점 그녀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커졌고 인생의 큰 결정들도 P의 말에 따라 선택하곤 하였다. 사실 자신이 그녀를 진정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할 뿐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P가 원했기 때문에 곧 결혼에 대한 계획도 세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애인에게 이럴 땐 어떡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L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 자리에서 동이 틀 때까지 쪼그려 앉아있었다. 서서히 공사현장으로 인부들이 들어왔고 그 중 한 사람이 무너진 콘크리트 밑에 깔린 사람의 팔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119와 경찰에 신고했고 곧 사태는 수습되었다. L의 시체는 처참한 현장에 비해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찰들은 단순사고사 이외의 어떤 다른 원인도 찾지 못하였다. 사건현장에 달려온 L의 가족들과 P는 그의 예고 없는 죽음을 믿지 못하였다. 하지만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시체와 끔찍한 사고현장이 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L 2

 ​앞 장에서 말했듯이 L은 흐르는 대로 살아왔다. 스스로 일을 해결하고 선택하기 보다는 남이 시키는대로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어찌보면 이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는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제 세상은 모든 사람을 개개인으로 나누고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따라오기를 강요한다. 과거처럼 한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절대적 규율이란 울타리는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 얻어낸 자유이지만 L과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안에 갇혀있다. 또한 과도한 성과주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일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흐름에 억지로 떠밀리고 있는 꼴이다.  

 L도 처음엔 직장에서 상사가 주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처리했다. 매일 있는 야근에도 불평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4시간 이상 숙면을 취해 본 적이 너무나 오래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몸과 정신은 점점 피폐해지고 가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자유라는 허울 좋은 미끼로 유인하여 인간을 뿌리까지 억압하는 이 세상에게 회의감을 느꼈다. 그날 밤, L은 멈춤 버튼이 없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커다란 기계 속에서, 그가 자신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처음으로 P와 상의하지 않고, P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소극적이고 겁쟁이었지만 적어도 무엇이 자신에게 옳은 일인지는 알았다. L의 애인이 그 소식을 알게 된 후 그들은 크게 싸웠고 가족들도 그에게 한숨섞인 잔소리를 하였다. 

 이 시대는 언제부턴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류의 인간형을 실패자로 분류하였고 '주체적'이고 '개혁적'이며 '진취적'인 인간만을 원하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L과 같은 사람은 '주도적이 되어라'라는 요구에서 불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제 와서 학창시절에 배운 도가사상을 떠올리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보다는 인위적인 이미지가 중요해진 세상, 쉼 없이 앞으로만 나가는 세상에 진절머리가 난 L은 도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억지로 꾸며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겁 많고 소극적인 성격이 왜 잘못된 것인가? 오히려 사회에 적극적이고 간 큰 사람만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보라. 서로 자신의 의견만을 강력히 주장하고 지나치게 활동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수동적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 소외된 약자들도 그들만의 의미가 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잘하는 일을 할지, 좋아하는 일을 시도해 볼 것인지 갈등하던 L은, 우선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느끼자고 마음 먹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슴이 뻥 뚫리는 광경을 보고, 밤바다에서 조용히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구체적인 방법을 정하진 않았지만 그 일이 고요하게 소리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밤바다가 자신에게 들려준 사명이었다.

 하지만 그 사명을 행하고자 마음먹은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L은 자신의 장례식으로 향하였다.

 

L 3 

 L이 자신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 절망하여 울고 있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 낯익은 한 존재를 보았다. 그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과 같이 대기(大氣)와 하나가 된, 또한 공간 속에서 몇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는 W였다. 둘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교에서 선망 받던 학생이었던 W와 달리 L은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L은 W를 동경했다. 그가 공부와 운동을 잘하고 외모가 준수하긴 했지만 그 밖의 이유가 있었다. W에게선 여느 아이들과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막힘이 없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대로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두려움과 불안이 없는 듯 보였고 겁이 많고 항상 불안에 떨고 있던 L에게 그런 면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선망의 대상이었던 W가 왜 장례식장에 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허나 W가 이승의 사람인 줄 알았던 L은 말을 걸 수 없었다.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L은 눈을 마주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을 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기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사실은 늘 마주치고 있지만.) 직감적으로 W와 L은 서로가 같은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L과 달리 W는 상대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청소년기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안에서 보냈지만 서로 다른 추억을 지니고 있었다. 한 소년에게 학창시절이란 지루하고 틀에 박힌, 그러나 막연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다른 소년에게 학창시절이란 역동적이고 늘 쾌활했던, 무엇이든 부딪쳐 보았던 추억이었다. 

 비록 W가 L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이 만났던 적이 한 번 있었다. 그것은 20대 초반에 열린 동창회 자리였다. 당시 술자리에 나중에 들어온 L은 자신이 학생때 동경했던 W를 보고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W는 술에 적당히 취해 있었고 어렴풋이 익숙한 얼굴이 옆에 앉자 그들은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 다른 동창들이 점점 나갈 시간이 되었을때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W는 L을 잘 알지 못했지만 원래 가까운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고민을 말하는 것이 쉬울 때가 있는 법. W는 옆자리의 누군가에게 그때 겪고 있던 내면의 고민들을 말하였고 L은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해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들은 절친한 사이인 것처럼 많은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둘은 서로를 부축해주며 밖으로 향했다. 각자의 집으로 가며 헤어질 때 L과 W는 마음에 든 상대에게 다음에 또 보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들은 술에 만취한 나머지 함께 나눈 20대 초반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20대 후반에 죽지 않고 서른살에 열린 동창회에서 만났더라면 같은 장소와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만나 그날의 추억을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었다. 그리고 반가운 친구를 만나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또다른 추억을 만들어가고, 남은 인생을 함께 하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추억은 영영 잊혀지고 말았다.  

 인간이 나이 들어가면서 가장 위로가 되어주는 것은 가족, 연인, 친구와 술 한잔 하며 나누는 소소한 추억거리일 것이리라. 그 기억이 맞든 틀리든, 슬펐던 경험이든 행복했던 경험이든 상관없다. 그저 아득한 나의 과거를 함께 공유하고 그때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다. 시간이 더 흘러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점점 떠나가고 결국 이땅에 자신 혼자 남을 때 비로소 인간은 절망적인 고독을 느낀다. 인간은 나약하여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결국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다. 그들은 또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고, 자신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남긴 채 그렇게 떠나간다.

 

G 1

 부질없다. G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그는 18세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대부분의 사물과 사건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 무심한 가족의 내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리라. 그는 학교 주변에 혼자 살았다. 부모는 약 3시간 정도 떨어진 관공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릴 적엔 일자리를 자주 옮기는 부모의 직업적 특성 탓에 전학을 자주 하였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그런 생활에 싫증이 난 것이다. 그래서 생활비를 받으며 따로 살고 있었다. 이렇게 고독한 생활에 익숙해지며 점점 성격도 무심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G에겐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귀신을 볼 수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세상에 귀신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가끔 방황하는 귀신을 만날때가 있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어서, 자신을 볼 수 있는 G와 같은 존재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한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G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는 '부질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그 말의 정확한 뜻은 '감정을 소모하기 부질없다'이다.) 또래보다 비교적 일찍 자신만의 가치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G는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매일 지나치는 병원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장례식장이 딸린 제법 큰 병원이라 그에겐 골치 아픈 장소 중 하나이지만, 집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경로였기 때문에 그날도 평소대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W와 L은 밖으로 나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서로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는 것에 대해) G와 눈이 마주쳤다. G는 원래라면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겠지만 귀신 둘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기해서 한번 쳐다보았던 것이다. 그는 좋지 않군, 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둘은 시선을 내어준다는 행위의 의미를 느낀 적이 있기에 G가 자신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G는 행여나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봐 병원과 허름한 술집, 미용실 등을 지나 집으로 향하였다. 두 귀신은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L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집 내부는 G의 성격만큼이나 단조로웠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이 '집'하면 떠올릴 수 있는 건물의 원형인 듯 보였다. W와 L이 집을 구경할 동안 G는 그들을 계속해서 못 본척 하고 있었다. W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W가 말했다.

  "우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알아. 하지만 우린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영화에서 나오는 한풀이하러 좇아다니는 귀신들이 아니라고."

 이에 덧붙여서 "우리는 너에게 어떤 악의도 없어, 이 상황이 아직 믿기지도 않고. 그저 대화하고 궁금한걸 묻고 싶을 뿐이야." 라고 L이 말했다. 

 G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죽은 사람 두명이서 대화하는 것도 처음 보고, 그다지 한을 가진 것처럼 보이진 않네." 그도 마찬가지로 귀신 둘에게 흥미를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왜 나와 대화하고 싶다는 거지?" W는 나이도 어린게 자꾸 반말이군, 이라고 말하려다 이제 와서 그런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넌 우리를 어떻게 볼 수 있는 건지 알고 싶군. 그리고 나같은 상황을 많이 봐왔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보였어. 처음엔 나만 갖고 있는 능력인 줄 몰라서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말해보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커가면서 '아, 나만 볼 수 있구나.' 라고 깨달은 거지." 

 L은 말하고 있는 G의 표정에서 뭔가 씁쓸함이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이 능력 덕분에 죽음에 대해 그다지 큰 공포심을 갖지 않게 되어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남과 다르다는 것은 힘든 법이야. 당신들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몰라. 지금까지 본 귀신들은 그저 어느 순간 사라지곤 했어." 

 그의 말을 듣곤 침울한 표정의 L이 말했다. 

  "그렇군. 정말 맥빠지는 소리네 그거."

  "그렇다면 이제 내가 질문할래. 죽으면 기분이 어때?" 갑작스러운 질문에 W는 당황해서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살아 있는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흠, 어떨 것 같은데?" 

 G가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죽음은 평안함과 끔찍한 고통 그 사이 어디쯤이야."

 

G 2 

 W와 L은 도통 평안함과 끔찍한 고통의 사이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 맞는 말 같았다. L이 말했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일 수도 있어.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줄은 몰랐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입장으로서 죽음이란 후회로 가득찬 쓰나미와 같아. 좋은 추억은 정말 애를 써야 생각나고 후회만이 밀려오더군.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좀더 열심히 움직이고 열심히 웃고 울지 않았을까, 어째서 부모님께 일찍 효도하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들이지. 그래서 묻는 건데 너는 지금 충분히 그러고 있니?"

 G는 아무리 떠올려봐도 열심히 웃고 울었던 기억은 없었다. 

  "아니, 난 이제 어떤 것에 몰두하거나 감정을 낭비하는 일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지금까지 부모님을 보고 배웠고 살아오며 그렇게 느꼈지. 뭐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W는 자신이 학창시절에 어땠는지 회상해보았다. 분명 그는 G의 나이때 언제나 쾌활했고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던 소년이었다. W는 너무도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학생에게 조언해주고 싶었다. 

  "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그렇게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건, 그런 것들은 죽은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 아까 L이 말했듯이 죽은 후엔 후회만이 몰려오고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이 세계에 더없이 회의적이게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넌 이미 죽은 자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건 살아간다고 말하기도 힘들지. 난 고등학생때 정말 끊임없이 세상을 느끼며 살았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에 관심을 가졌거든. 그렇게 지내기에도 젊음은 부족해.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후회는 남게 되기 마련이더군. 그러니까 감정낭비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조금 더 기분을 내며 살아.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면에서 넌 이미 죽어있어. 그래서 너에게 귀신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G는 W가 소위 말하는 꼰대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느정도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마음 속은 죽어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은 기분을, 혹은 슬픈 기분을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귀찮게 여겨졌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G를 이 지경까지 끌고왔단 말인가. 부모의 사랑의 부족? 혼자 사는 생활? 아니면 귀신을 보며 일찍이 철이 든 것? 이 모든 것이 그의 속에서 뒤섞여 그를 무섭도록 고독하고 무신경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L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 시대의 피해자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지금은 '허무의 시대'이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상실과 허무 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 가치의 상실, 여유의 상실, 또한 존재의 허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붙잡을 곳과 의지할 존재를 잃었다. 어두운 밤바다 위에서 나침반도, 등대도 없이 자신의 감에만 의존하여 항해해야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성공과 욕망을 위해 돈을 벌고, 쾌락을 위해 이성을 만나고(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해도 마음 속 한곳이 텅빈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가 만들어낸 집합체가 바로 G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G 3

 G가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떻게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저 모든 것이 자신을 알아봐달라는, 무의미한 움직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L은 자신이 살아숨쉴 때 마지막으로 결심했던,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는 그 사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럽지만 자연스럽게 G가 그 꿈을 이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은 G에게 어떤 강력한 우주의 에너지와 같은 것을 담아 말했다. 

  "나는 죽기전까지 정말 소심하게 남의 의견에만 따르며 살아왔어. 작게는 점심,저녁 메뉴부터 크게는 미래계획까지 애인이나 직장동료들의 말에 휘둘리며 결정한거지.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었어. 그리고 나같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쓸모없다고까지 느껴지곤 했지. 하지만 문득 깨달았어. 소심하고 매번 휘둘리고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다 각자의 의미가 있겠구나, 하고 말이지. 물론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딜가나 뭔가를 바꾸려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만으로 가득차 있다고 상상해봐. 아마 세상이 너무 산만하고 혼란스러워질거야. 물론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무의미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움직임들의 가치를 조금씩 깨닫는 순간 너는 살아숨쉬는 세상을 경험하게 될거야." 

 W는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L처럼 치열하게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L은 죽기전 마지막 사명을 가진 순간, 그리고 죽은 후에 지나온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순간, 각성하게 된 것이다. L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살아오면서 많은 후회를 남겼지만 딱 하나 잘했던 일은 밤바다 앞에서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진거야. 바로 너 말대로 무의미하게 홀로 움직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일이지. 어떻게든 기회를 얻어서 나처럼 허무하게 흐르는 대로만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같이 이 세상을 이겨내보자고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어. 너한테 한을 풀어달라고 온 것은 절대 아니지만...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더이상 어떤 후회도 하지 않고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W가 G에게 말했다. 

  "L이 어떤 소원을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소원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물론 너가 우리 말을 들어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말이야." 

 G는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 대화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처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귀신의 한을 풀어주거나 하는 일은 그의 원칙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애초에 지금 상황도 이미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G는 L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소원이 뭔데?"

 L은 차분하지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꿈을 너가 대신 이뤄줄 수 있겠니? 이 허무의 시대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이 삶의 방향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 말이야. 물론 정확히 어떻게 해야할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확실한건 너와 같이 지금은 마음이 죽어있지만, 동시에 세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동정심을 느끼게 되고, 슬픔을 느끼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가장 적합한 종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 현시대에 필요한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려주고 스스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존재야. 그리고 너가 그일을 잘 감당할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어서 이런 부탁을 하는거야. 사실 살아있을 때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어떤 예언적인 느낌이 들었거든. 어쩌면 우리가 지금 너의 앞에 오게 된것은 필연일수도 있겠군. 저 위의 누군가가 앞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에게 이 말을 해주기 위해 우리를 잠깐 머무르게 한거지. 절대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너의 생각은 어때?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G는 조금이나마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귀신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길과는 관계없는 너무나 귀찮은 종류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더이상 그렇게 살지말고 세상을 위해 움직여달라'는 말 아닌가. 원래의 그에게는 매우 허무맹랑하고 거들떠도 보지 않을 문장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변화의지'의 씨앗이 그의 무미건조했던 삶에 생기을 불러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G는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그 작은 움직임들을 하나하나씩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 작은 걸음을 뗄 때 비로소 그는 삶을 느끼고 세상을 변화시킬 길 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G가 대답했다. 

  "알겠어. 내가 그런 거창한 일을 잘 감당할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속는 셈치고 믿어볼게. 당신들은 위에서 내가 잘 하고 있나 지켜봐줘. 그럼 이제 하고 싶은 말들은 다 끝난거지?" 

 W는 이제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지막 말을 들어준 G에게 고마웠다. 

  "그래 우리 말을 들어줘서 고맙다. 꼭 L과 나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기를 빌게." 

 L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가야 할 것 같아. 내 말대로 살아가려면 힘들겠지만 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마." 

 G는 어느정도 아쉬움이 생겼지만 그 귀신들을 보내야 할 때가 왔다. 

  "꼭 그럴게. 나가는 문은 어딘지 알지? 이제 끝나지 않을 후회가 아니라 영원한 평안을 얻길 바라. 그럼 안녕"

 L과 W는 그냥 벽으로 나가도 상관없었지만 일부러 이승에서의 마지막 문으로 통과해 나갔다. 마치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 하듯이.

     

 

Epilogue  

 그 후 W와 L이 어떻게 되었는진 아무도 모른다. 글쓴이도 모른다. 그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어디에나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일수도,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이 글을 읽는 독자 바로 뒤에서 빤히 지켜보고 있는 어떤 존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란 짧은 글에서 배울점은 없다. 그저 읽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본인의 삶을, 이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가거나 혹은 각자 나름의 가치를 지키며 그대로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모두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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