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

by 김보영 posted Mar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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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


 큰 소나무가 솔방울 몇 개를 후드득 떨어뜨렸던 뜨거운 여름. 한 소년이 꺼끌꺼끌한 모래 위에 하얀 운동화를 비비며 서있었다. 하얀 바지, 하얀 티셔츠, 짧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 붉게 물든 귀방울과 홍조 띤 얼굴. 소년은 소나무의 품으로 숨어 햇볕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이었나?" 
 바람 하나 불지 않아 건조해진 모래 위에서 솔방울만 한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던 소년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제였는지 그저께였는지 아니면 그날 밤이었는지 모를 일을 중얼거리며 소년은 한참을 서있었다.
 "야! 이제 그만 들어와. 걘 여기 안 와. 걔 엄청 멀리 살잖아!"
 소나무에서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의 오랜 친구 재원이었다.
 "아니야! 걘 반드시 올 거야. 반드시."
 소년은 재원이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을 생각하며 소년은 한참을 제자리에 서있었다.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
 그날은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던 시원한 하루였다. 선생님이 칠판을 한 번 두 번 두드리면 나의 눈도 깜빡깜빡 감기곤 했던 4월이었다.
 "야! 수업 끝났어. 정신 차려 인마."
 "어...? 뭐? 수업 끝났어?" 눈을 깜빡인다고만 생각했는데 잠이 들었나 보다. 분명 아직 수업 중이었는데 말이다.
 "아... 언제 끝났지. 필기 하나도 못했는데."
 "참, 웃기는 소리 하네. 네가 언제부터 필기를 했다고 유난이야? 네 짝꿍만큼만 좀 해봐라."
 재원이의 비난 섞인 말에 슬쩍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김미연이라 이름 적힌 필기구와 지우개 가루 하나 없는 책상. 왠지 나를 약 올리는 듯 펼쳐진 깔끔히 정리된 노트. 나는 괜히 심술이 나 짝꿍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을 뱉곤 교실을 나와버렸다.
 "야. 뭐! 나랑 별다른 것도 없구먼!"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어느덧 햇볕이 뜨겁게 얼굴을 때리던 7월이 되었다.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던 선크림도 7월의 무더위 앞에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친구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던 교실은, 왠지 더 뜨겁게 느껴졌다. 이런 날에 운동장에서 하는 피구란, 그냥 땅속에 얼굴을 박고 있는 편이 났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 다들 모여라. 가운데 사람이 기준 잡고, 다 모여!"
 선생님의 말에 다들 얼굴을 왼쪽, 오른쪽으로 찡그리며 기준을 향해 뛰어갔다.
 "아니 도대체 이 더운 날에 여기서 피구를 왜 하냐고. 난 진짜 이해를 못하겠다. 재원아."
 "그래서 뭐.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라."
 이 무더위를 공유하고픈 맘에 용기 내어 선생님 몰래 말을 걸었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재원이는 싹수가 없다.
 "너네 덥다고 그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안 돼. 선생님을 봐. 선생님은 이 더위에도 운동을 하~도 많이 해서 끄떡없잖아? 나는 지금 시원해서 미칠 것 같아. 너네도 시원해서 미치고 싶지?"
 '아니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랬다간 태도 점수가 깎일게 분명했기 때문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원해서 미치게 만들어주겠다는 선생님은 우리들 보고 피구를 하라고 말했다. 이 더운 날에? 뛰어다니며 공을 잡고 던지고 맞으라고? 속에 천 불이 났지만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왜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선생님께서 친히 시원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너네 피구 많이 해봐서 어떻게 하는지 다 알지? 모르면, 어 거기 체육 반장! 네가 알아서 잘 하고. 따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이 잘생긴 선생님 불러! 알겠지? 팀은 음, 그냥 1,2분단 한 팀, 3,4분단 한 팀 해라. 선생님은 저~기 있을게. 무더위를 날려봅시다~"
 날씨가 시원해 미치겠다는 선생님은 저~기 나무 그늘진 곳으로 가셨다. 우리는 덩그러니 운동장에 남아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우리는 태도 점수에 이를 앙 다물고 피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피구는 시간이 흘러 1:1 동점 상황이 되었다. 1분단이었던 난 3분단인 재원이랑은 다른 팀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재원인 운동을 못했기 때문에 같은 팀이었다면 정말 암울했을 것이다. 상대팀은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아서 우리 팀이 작전만 잘 세운다면 이길 수 있었다.
 "야! 여기, 여기로 줘!" 
 "패스 돌리자 패스 돌려! 힘을 빼버려!"
 우리 팀은 상대팀의 힘을 빼기 위해 패스 전략을 세웠다. 계속 패스를 하다가 갑자기 공격을 넣으면 상대팀은 그대로 게임 오버였다.
 "야! 여기. 어, 어어 야! 잠시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공이 던져졌는데 그게, 미연이의 머리로 날아갔다. 미연이가 머리로 날아온 공을 막느라 손을 뻗었고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깜짝 놀라 미연이에게로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나무 아래 앉아있던 선생님이 언제 오셨는지 수업을 황급히 마무리 지으시곤 미연이를 데리고 양호실로 가셨다. 난 미연이가 주저앉았던 곳에서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 잘못이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태현이가 여기로 공을 달라는 소리를 못 듣고 바로 던져서, 빨리 게임을 끝내고 싶단 마음에 보지도 않고 던져버려서... 아, 나 때문에.
 다음날 미연이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붕대를 하고 등교했다. 저번 달에 자리가 바뀐 후로 미연이는 4분단 나는 1분단이 되어서 말 한번 안 했었는데. 어제부터 줄곧 신경 쓰여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다 연락하지 못한 내가 참으로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용기 내어 미연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갔다.
 "미연아. 손은 좀 괜찮아? 어제는 진짜 미안..."
 "어? 아니야. 내가 잘 막았으면 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잘 봤어야 했어. 어제 바로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냐. 어젠 양호실에서 바로 병원으로 가서 나랑 마주칠 일도 없었을 거야. 괜찮아."
 "그래도... 너 오른손 다친 거잖아. 하필이면 또 오른손이라서... 진짜 미안해."
 "의사선생님이 나 같은 경우가 되게 많대. 학교에서 피구하다가 손가락 붕대 감는 일. 더군다나 새끼손가락은 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금방 나을 거야!"
 미연이는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나 때문에 손가락을 다친 건데. 내가 조심했으면 다치지 않았을 손가락인데. 나는 미연이에게 더 미안해졌다. 
 "야. 너 미연이 좋아하냐? 허구한 날 이동수업 때 책 들어 줘. 필기도 도와줘. 가방도 들어줘. 같이 하교도 해. 뭐 하냐? 둘이 뭐냐고."
 "야. 미연이 손,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참나, 그렇다고 너처럼 그러진 않아. 인마. 너 분명 미연이한테 마음 있는 거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그냥 말을 해. 사나이가 진짜. 지질하다 지질해."
 가끔씩 재원이가 미연이와 나의 사이를 의심하고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난 정말 재원이 말처럼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길게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한심한 녀석. 자기도 나처럼 그렇게 했을 거면서 말이다.
 재원이랑 매점을 갔다 온 어느 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하고 다들 잠들어있을 교실에서 여기저기 감탄사가 들렸다.
 "오~ 김미연. 이거 누가 놔두고 간 거냐. 쪽지까지! 부럽다 부러워!"
 "이거 먹고 수업 잘 들어? 수업 마치면 보자~?"
 "아, 그만해 그만. 아무것도 아니야."
 미연이 자리에서 채영이와 보희가 큰소리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미연이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채영이와 보희는 그런 미연이를 보며 재밌다며 더 큰소리로 쪽지를 읽었다.
 "야! 김미연! 드디어 내 친구 연애하는 거야? 나 꼭 소개시켜줘야 돼."
 "아니라니까! 진짜. 나는 모르는 애야. 너네 조용히 해. 시끄러워!"
 미연이는 친구들의 장난에 화난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미연이의 책상 위에는 초코우유와 초코과자가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빵을 무의식적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초코우유에 시선이 갔다. 초코우유. 나도 사줄 수 있는데. 그러다 미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야. 미연이 인기 많네. 하긴 미연이면 뭐 매력이 엄청나지. 안 그래?"
 "어, 어. 그렇지. 어? 무슨. 야, 뭐, 매력? 난 모르겠는데?"
 나는 재원이의 말에 열이 더 올라 횡설수설 답하곤 자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나를 재원이는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열이 오른 얼굴은 바로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재원이의 눈치를 보며 얼굴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때 문득 재원이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무래도... 재원이가 했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나는 미연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미연이를... 좋아한다. 미연이에게 초코우유를 사준 사람이 누군지, 미연이는 어떤 마음인지, 내 심장은 왜 이렇게 쿵쿵 뛰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미연이와 같이 하교할 땐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야! 너 왜 아까 내 눈 피했어?"
 아니나 다를까.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벗어나자마자 미연이가 내게 물었다.
 "어? 피하긴 뭘 피해. 내가 미쳤어?!"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질러?"
 "어,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어..."
 원래라면 장난으로 넘어갔을 대화인데,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그런 나를 미연이를 이상한 눈초리를 하며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연이한테 초코우유를 준 애가 누군지 너무 궁금해서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괜히 신경질만 났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뭐라고?"
 나는 미연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뭐라고? 라니. 대체 무슨.
 "네가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잖아. 방금."
 "뭐?"
 어? 난 분명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아, 설마. 망했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날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너 오늘 왜 그래? 이제 나랑 같이 하교하기 싫은 거야?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옆에 사람 있는데 한숨이나 쉬지 말고."
 미연이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그런 미연이의 눈치를 보며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아, 미연아! 아니야 그런 거!"
 그날 일은 미연이에게 재원이 핑계를 대며 간신히 상황을 모면했다. 정말 이때만큼은 싹수 없는 재원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미연이가 완전히 화를 푼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다시 미연이와 하교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어, 보자. 오늘은 자리를 바꾸는 날이구먼? 반장? 칠판에 자리 배치하게 배치도 좀 그려줘요. 음, 이번에는 여학생들이 짝꿍을 고르는 차례네. 앞에 반장이 다 그리면 번호 순대로 나와서 말하세요. 알겠죠? 선생님은 회의 갔다 올 테니까 그전에 꼭 마무리하세요!"
 짝꿍이 바뀌던 날, 미연이는 나를 짝꿍으로 선택했다. 그러자 반에선 다른 친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이의 수줍은 웃음이 그 이유를 말해주는 듯했다. 나도 그런 미연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너도 나를, 나도 너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그날에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부터 서로의 손을 잡고 하교를 했다. 초코우유는 대체 누가 준건지, 언제부터 서로를 좋아했는지. 부푼 마음을 안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애써 숨기지 않으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미연이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그런 미연이를 보며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때는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함께 일 거라 생각했다.
 "미안해... 그래도 졸업하고 바로 떠나는 건 아니니까. 우리 앞서 걱정하지 말자. 응?"
 "어떻게 지금부터 걱정을 안 해. 너네 아버지가 해외로 나가시는 건데 왜 너까지 가야 하는 건데. 왜."
 "미안해..."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날. 미연이는 졸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떠나게 될 것 같다고 울면서 내게 말했다. 아빠가 해외에서 일을 하게 되어 가족들도 같이 가야 한다고 내게 그랬다. 졸업 후에 많은 것을 함께 하자며 수많은 약속을 했었는데. 미연이의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다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별 아닌 이별을 맞이하기 전까지 냉전 아닌 냉전인 상태로 지냈다. 미연이가 원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상황 그 모든 게 싫었고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미연이가 출국하기 전날, 우리는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시린 바람이 마음을 때렸다. 어두운 밤공기에 우리는 땅만 보며 앉아있었다. 그때 미연이가 울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미안하다고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작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울었다. 시린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내리칠 만큼. 펑펑 울었다.

 우리가 청춘이던 그 시절에, 소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매일 미연이의 집을 찾아가고 저녁마다 울며 연락하고 잡고. 그렇게 내동댕이 쳐지던 그 시절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미연이를 기다리는 소나무 그늘 밑 한 소년은, 마음을 고백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미연이가 준 약속의 증표만을 한 손에 쥐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증표엔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온 맘 다해 새겼을 너의 얼굴이 있었으니까. 우리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야! 걔 안 온다니까. 지금 몇 시간째 이러고 있냐고. 너 때문에 나는 무슨 고생이야. 진짜!"
 재원이가 다시 소리쳤다. 절대 이곳에 올 리가 없다고. 애꿎은 장난에 속아 넘어간 거라고.
 "아니라니까! 진짜 올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자신감과 설렘을 가지고 찾아왔건만. 아무런 사람도 심지어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자 소년은 점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에. 분명 우리는 울며 약속을 했고 자신이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걸까. 소년은 약속의 증표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시절의 추억을 한참 생각했다. 소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솔방울이 뚝뚝 떨어지듯 소년의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아니길 바랐던 우리의 끝이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지 소년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소년은 고이 보관해왔던 증표를 소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던 미연이를 한참을 기다렸던. 혹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약속된 날이 아니어도 매일 발걸음 했던 이곳을. 수년 동안 고민했을 미연이와의 만남을. 아프진 않을까 걱정했었던 수많은 밤을. 증표에 모두 담아 그곳에 내려놓았다. 우리가 가까워졌던 그날이 너무 까마득해 이젠 어제였는지 그제였는지 아니 그날 밤이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소년은 미연이를 잊지 않았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제든 그저께든 그날 밤이든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매일 그곳을 찾았었으니까.
 소년은 그날처럼 하얀 운동화에 하얀 옷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날처럼 붉게 물든 귀방울과 홍조 띤 얼굴을 하곤 소나무의 품으로 숨어 햇볕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제, 그저께 아니 그날 밤. 그리고 우리."
 소년은 애써 울음을 삼키며 소나무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소나무는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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