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감옥

by 엑스타 posted Apr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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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호사가 된지 한 달도 되지 못한 때였다. 그때의 난 초짜중의 초짜였기 때문에 사무실에 의뢰서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방문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손님이 없어서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의 계절이 화창한 봄날이었기에 오후만 되면 나른해져 몸이 나태해져가는 느낌을 받아 심적으로도 초조했다.

 

불안함에 시달리던 하루가 계속되던 어느 날, 한통의 의뢰서가 사무실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반가움에 바로 뜯어 읽어보았더니 황당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는 당신을 변호사로 고용하겠습니다. xx일 까지 지정된 법정으로 나와 주세요.>

 

의뢰인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날 변호인으로 지목하고 법정에 세우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그리고는 그 아래 장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고는 마지막에는 아무 변론도 하지 말아주세요라는 구절만 덩그러니 써 놨다. 순간적으로 신인 변호사였던 난 원래 변호사 직업이 이런 건가라는 착각이 정도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 사람이 다 있나하고 화나기도 하였지만 장문의 편지를 다 읽고 무언가의 감정이 자꾸 거슬려 결국 법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법정에 들어서자, 의뢰인 옆에 내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완벽한 자리였다. 의뢰인은 지나치도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앳된 외모로 봐선 아직 스물 중반이나, 후반 때는 돼보였다. 내가 의뢰인 옆에 앉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꾸벅하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나를 향해 돌아보거나 감정을 들어내지 않았다.

 

그녀의 죄는 살인죄였다. 명백한 증거, 그리고 모든 범행을 인정하는 그녀. 정말 재판은 수월하게 돌아갔다. 적어도 상대 검사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난 재판이 진행되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의뢰인을 변론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몇몇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내가 못 참고 일어나려 할 때면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판사가 유재판결을 내리며 재판은 끝났다. 절대 나서지 말아달라고 하던 그녀의 말처럼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허수아비처럼 재판장에 비웃음이 흘러넘쳐도 참고, 또 참았다.

 

재판장에서의 나를 되새겼다. 그러다 문득 내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의뢰인의 명령이라도 과연 내가 가만히 있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난 왜 재판장을 굳이 찾아가 그녀의 허수아비 짓을 자처했을까? 초짜 변호사에 실수였을까?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몰려온 질문들에 갑자기 화가 났다. 비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다. 아무리 길어진 봄날에 나태해졌다고 해도 이렇게 정상이 아닐 수가.......

 

교도소로 떠나는 그녀를 잠시 붙잡고 물었다. 왜 날 직접 찾아오지 않았냐고, 그저 편지한통 보내고 뭐하는 짓이냐고, 나를 왜 지루한 재판장에 끌어들인 거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그녀는 나를 한번 보더니 재판장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냈다. 피식-하고 그녀의 비웃음인지 얕은 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보자 짜증이 났다.

 

단지 말할 곳이 필요했어요. 너무 억울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변호사님을 만난 것뿐입니다.”

 

그녀는 나에게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감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멀어져가는 버스를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변호사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읽어보았다. 확실히 편지에는 억울한 만큼에 긴 이야기가 두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난 그녀의 글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때 그 상황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 * *

 

그녀의 이름은 이윤아, 윤아는 모두의 선망에 대상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적당히 잘하며, 운동신경까지 있는 그야말로 엄친딸의 정석이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언제나 주변에는 사람이 흘러넘쳤고, 외로움이라고는 전혀 느껴보지 못할 만큼 사랑만 받아온 여자. 그런 여자가 사랑을 주지 않는 남자를 만났을 때, 그것은 불행의 시작점이었다.

 

그녀가 만난 남자는 자수성가 재벌이었다. 청년재벌로는 극히 드물게 대한민국 재력 100위 안에 꼽히는 수재중의 수재, 얼굴 또한 나쁘지 않게 훈훈한 얼굴이여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였다. 그런 남자가 고백해 오는 순간 어떤 여자가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있다고 해도 극히 드물 것이다.

 

윤아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미치도록 사랑할 만큼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행동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불러왔기에 쉽게 선택할 수 있던 결정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환호 속에 결혼식이 열렸고, 둘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윤아는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남자는 신혼 첫날밤부터 외박을 했다. 새벽까지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그에게 윤아는 화를 내고, 소리도 질러봤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다. 매일 밤을 기다리고, 매일 밤을 혼자지내며 점점 쓸쓸해져 갔던 윤아는 어느 날 청소를 하다 벽장에서 몇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건 그가 바람을 피우고, 여러 여자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찍었던 사진이었다. 그날 분노에 찬 그녀는 처음으로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친정으로 증거사진을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어이가 없었다.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하는 친정, 사랑받으려고 노력해 본적 없을 윤아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구애를 요구했다. 윤아는 어머니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구애에 도전했다. 요리도 해보고, 애교도 떨었다. 최대한 미소를 보이려 노력했으며 어떨 때는 유혹하듯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비참해져만 갔다.

 

윤아는 남자를 친정에 데리고 갔다. 그의 실체를 보여줘야 다들 믿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친정에서 세상어디에도 없는 착한남편 행세를 했고,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그렇게 믿으셨다. 아니 믿은 게 아니었다. 믿고 싶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그의 돈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치도록 이혼하고 싶었다. 몰래 이혼서류를 준비해 그의 지장을 찍고 싶었지만, 그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쩌다 한 번 집안에 있을 때 지장을 찍게 하려고 달려들면 이때까지 없었던 폭력으로 대응했다. 자기라도 나서서 이혼신고를 할 때면 그의 재력에 빈번히 좌절하였고, 점점 윤아는 외로움에 잠식당해 갔다.

 

외로움은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냈다. 윤아는 평범한 빵집남자와 눈이 맞았다. 예전에는 외모와 스펙만을 중시하던 외모지상주의가 어느새 진짜 사랑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는 윤아를 압박해왔다. 빵집남자와 신나게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그날 밤 그는 폭력으로 그녀의 비명을 무마했고,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그녀의 남자를 철저하게 망가트렸다. 실업자가 되어 자신에게 도와달라며 충혈 된 눈빛으로 애원하던 남자를 보며 윤아는 점점 미쳐갔다.

 

그 후로 윤아는 여러 번 이혼을 시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남자의 벽은 높았고, 그녀는 언제나 좌절했다. 마치 자신은 깨지고 부딪치며 안달복달인데 상대방은 너무나도 평온한 것 같았다.

 

그렇게 위태한 결혼생활이 이어지고, 그녀의 결심이 서게 된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상태였다.

 

* * *

 

언제나 불쌍한 여자였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돋아났다. 마치 측은함이 서린 마음이었다. 아마도 내가 그 법정을 향해 걸어갔던 건 이 감정에 대한 의구심인지도 모르겠다.

 

난 편지를 고의 접어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피곤한 마음에 블라인드 옆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오는 햇빛에 몸을 맡겨 잠을 청하려 책상 위에 엎드렸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잘 잤을 텐데, 그리고 지금 분명히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찝찝한 기분이었다.

 

다시 일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갑작스런 노파심에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내가 말했다.

 

이번 재판 의뢰인의 집주소를 제가 알 수 있을까요?”

 

난 가만히 있어달란 그녀의 부탁을 조금씩 거절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