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 청문회

by 별티끌 posted Apr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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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철 청문회

1. 개막

 여러분! 지금이 어떤 세상입니까? 물질문명은 극에 달했고, 우리 세상은 유례없는 효율성으로 아주 멋지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산은 오류 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노동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이룩했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대로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전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단결과 협동을 성취해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분쟁은 말소되어 사소한 다툼을 제외하면 인류가 서로 총칼을 겨누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분쟁이란 지극히 이성적이고 절차적인 토론과 토의를 통해 완벽함을 더해줄 가치를 발견하는 일뿐입니다. 그야말로 완벽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세상은 완벽함을 지닌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러한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온 집단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집단 구성원들 중에서도 진성 골수라고 할 수 있는 세 분을 모셔봤습니다.
 먼저 우리 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님입니다! 하하, 이런 자리에 나와서도 메모장을 잊지 않으시는군요. 늘 소재를 기록해두려고 펜을 놓지 않는 모습 정말 작가님답습니다. 작가님이 과연 이곳을 나가 다음 작품을 내실 수 있을지 배팅하실 분들은 자유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우리 사학계를 대표하는 박사님입니다! 연구실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중요한 문헌자료를 들고 오셨답니다. 비싼 물건이라고 하니 청중 여러분은 아무런 물건도 던지지 말아주세요. 문헌이 손상되면 배상해줘야 하니까요. 원치 않는 곳에 돈 쓰고 싶으신 분은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우리 철학계를 대표하는 현자님입니다! 아무것도 들고 계시지 않군요. 이래서야 설명할 게 없네요. 하지만 딱히 예상을 벗어나진 않습니다.
 여기 세 분은 그동안 우리가 완벽한 세상을 건설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온 문사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부족하기만 한 시간과 돈을 축내는 주제에 제대로 된 성과물도 못 냈죠. 이들 집단의 성공률은 한 자리 수대도 아니고 고작 소수점대로 집계되었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혐의가 있으니 따로 분류되었겠죠?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문학가들! 이들의 역할은 명확하죠. 충실하게 일하느라 지친 우리에게 휴식과 오락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제공해주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신 상태는 늘 불안합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만 제공해주면 되는데 왜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선동하여 구설수에 오릅니까? 왜 작품세계란 것을 고민하나요? 당신들이 생산할 상품들은 저기에 다 있는데! 이처럼 작가들에 의한 오락거리 생산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불안정합니다.
 다음은 사학자들입니다! 여태까지 우리의 개척을 가장 먼저 가로막는 이들이 딱 둘 있었습니다. 바로 환경주의자와 사학자들! 환경문제는 완벽히 해결됐기 때문에 환경주의자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학자들은 여전히 골칫덩어리입니다! 이곳이 유적지니까 유물을 먼저 출토해야 한다며 가로막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항상 과거에 몰두합니다. 우리 같이 완벽한 세상을 이룩한 훌륭한 인류가 뭐가 아쉽다고 과거에서 배움을 찾습니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자멸한 불량품들 따위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볼 곳은 더 크고 위대한 미래입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자들! 이들의 무능함은 더 얘기해봤자 입만 아프겠지요? 물론 저는 수백 줄에 걸쳐 더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모든 페이지를 철학의 무능함으로 채워버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청중 여러분께서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짧게 끝내겠습니다. 철학자 여러분,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떵떵거리면서 남들을 위에서 내려다봅니까? 당신들이 오만하게 내려다본 사람들은 모두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꾼들이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축생과도 같은 문사철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완벽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오늘 청문회의 대표로 나온 세 분께 이 약을 각각 한 알씩 드릴 겁니다. 이 약을 먹게 되면, 먹은 사람의 성질과 유사한 사람들이 모조리 사망하게 됩니다. 즉, 그토록 고대하던 문사철의 청소를 이뤄내고 우리를 한 층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립니다!
 아, 원리는 묻지 마세요. 그런 거 누가 궁금해 하겠습니까? 우리가 궁금한 건 이 쓰레기들이 정말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히 사라지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게 강제로 약을 먹이지 않을 것입니다. 맨 위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우리는 청문회를 거쳐 이들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우리가 놓쳤을지도 모르는, 보다 완벽한 세상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 완벽을 위해 조금의 효율성을 버릴 줄 아는 위대한 인류에게 경의를! 그러면 청문회를 시작해볼까요?


2. 문학(작가)

 시작하기 무섭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드는군요! 완벽하고 효율적인 청문회를 위해 마인드 리딩을 거친 다음 가장 많은 주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대표로 A열 1번 청중을 뽑아서 질문 들어보겠습니다.
 “작가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피로를 덜어주는 문화산업과 그 작품들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가들의 정신 상태를 늘 걱정해왔습니다.
 그러한 병폐가 쌓이고 쌓이다 폭발해버린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죠?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은 아니니까요. 오늘 그런 문제를 다루지도 않을 거고요. 저는 작가님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작가님은 작가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환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나요?”
 가벼운 질문이네요. 그렇죠 작가님?
 “물론입니다. 저는 항상 저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고 의견을 아끼지 않는 독자, 시청자, 관객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제 무명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작가님 말씀대로 거짓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질문이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은 왜 대중들의 의견을 업신여기는 건가요? 여태까지 작가님께 작품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전달되었을 겁니다. 단순한 감상에서부터 구체적인 개선 방향을 꼬집는 의견까지 다양했죠.
 그 중에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작가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도련님과 아가씨에 대한 의견입니다. 작가님 작품에서 도련님과 아가씨라는 단어가 특정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을 수동적이고 틀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라고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너무 많이 쓰였다는 의견인데 아십니까?”
 “그에 대한 얘기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갈 만한 표현들이었는데 다들 잘 찾아내서 해석하셨더군요.”
 “당연하죠. 지금이 신분제 사회인 것은 아닙니다만, 작가님의 표현은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니까요. 멀쩡한 사람에게 작가님의 도련님이나 아가씨와 같은 프레임을 씌우는 용례도 많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폐해 때문에 그런 의견들이 전달됐던 겁니다. 그럼에도 작가님은 표현을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작가님의 언어는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고 귀를 열어 의견을 받아 고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가님은 오랫동안 의견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왔습니다. 작가님은 정말 대중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까?”
 “그 부분에서 분노나 불편함 같은 걸 느끼신 분들은 제 의도를 제대로 읽으신 겁니다. 제 글의 주제의식은 특정 단어에 축약되어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편견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시대극을 쓰다 보니 그 대상이 주로 질문자께서 언급한 단어에 쏠린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관심사가 이런 곳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당장 바꾸는 것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고 제 작품 세계가 넓어진다면, 더 많은 분들이 만족하시면서도 뭔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것이 작가와 독자가 함께 성장하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훈훈한 광경이군요. 보십시오, 여러분. 청문회는 이렇게 차분하게 절차대로 진행됩니다. 사실 처음엔 뿔난 분들이 많으셔서 걱정했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진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어, 아직 남으셨나요?
 “네. 아직 작가님의 언어가 대중 언어에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답변만 듣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질문이니까 더 이어가는 겁니다. 다음 질문자부터는 조금 빠르게 진행할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작가님?
 “제가 의도한 의미가 실생활에서 그렇게 악용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표현과 시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절대 그런 시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은 어떤 것을 접했어도 그런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을 겁니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겁니까?”
 “작가님이 낳은 결과인데 책임감이 없는 겁니까?”
 오우, 갑자기 청중 여러분이 흥분하셨습니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작가님은 우릴 기만하지 않으셨습니다. 작가님은 거짓의 의도 없이 답변하셨습니다. 훈훈했는데 조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질문을… 아니, 현자님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방금 질문하신 분, 제 대신에 여기로 오셔도 되겠어요.”
 아이고, 현자님! 조롱은 삼가주세요! 지금 이렇게 미운 딱지 붙이면 현자님이 얘기하실 수 있는 순간만 짧아질 뿐입니다. 다들 더 화났잖습니까! 얼른 다음 질문자를 찾아보겠습니다. P열 2번 분!
 “작가님의 수준이 드러나는군요. 결국 작가님은 대중들의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것이 작가의 역할을 다 하시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작가의 역할이 뭔데요?”
 “우리가 단순한 기계부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휴식과 오락을 제공해주는 일이죠. 우리는 즐길 거리와 그 내용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작가의 역할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네요. 저는 여러분의 입맛에 맞춰 글을 쓴 적 없습니다. 제 손 가는대로 썼을 뿐인데 여러분께서 좋아라하셨을 뿐이죠. 작가와 작품이란 그런 것입니다.
 작가와 독자에 대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누군가의 요구나 강압 없이 제 생각에 느낀 바가 있는 이들끼리 소통하는 거죠. 그 소통을 하면서 변화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세계관을 고집하는 작가도 있는 겁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장과 즐거움이 일어나는 거고요.”
 아… 이번에는 작가님 말씀에 어폐가 있습니다. 작가님이 순수한 창작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작가님은 매 순간 어디선가 대중들의 평가를 보고, 다른 작품을 감상했으며, 이러한 것들을 반영하셨습니다. 작가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제 손 가는대로 썼는데 여러분께서 좋아라했다는 것은 걸러 들으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여러분이 입력한대로 상품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작품들은 모두 생각의 소통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진정성 100퍼센트를 찍었네요! 여기에 반박하실 분 계신가요? 네, O열 3번 청중께서 손을 드셨습니다!
 “작가님은 그럼 대중들의 생각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그걸 알고도 작품들을 선택하는 것이고, 지금 떼쓰는 거고요?”
 “떼쓴다는 표현은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만, 맥락은 맞습니다. 문화산업과 작품은 항상 이런 것이었습니다. 최근의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일방향적인 입력과 출력의 일상화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 탓에 사람들이 모든 걸 그런 구조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문제를 해……”
 아, 작가님. 그 이상의 발언은 체제전복과 인류 존엄성 훼손 문제로 걸러질 겁니다. 더 얘기하셔도 소용없어요. 오, 표정이 많이 안 좋아지셨네요. 걱정 마세요. 진정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청중 여러분도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게 이런 현상은 익숙하지 않습니까? 작가님의 정신이 잠깐 불안해진 것뿐입니다. 청문회는 문제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질문 계속하시겠습니까?
 “이어서 하겠습니다. 작가님을 향한 최후통첩이 될 수 있겠네요. 작가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렇게 알아두세요. 지금 이 자리의 의미와 여기 모인 청중들의 생각이 바로 대중들이 작가님과 원하는 소통입니다.”
 작가님, 원한다면 청중들의 마인드 리딩을 전송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십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그러면 어디… 작가님과는 이제 끝을 맺길 원하는 분위기군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게 모일…
 “그것도 안 들어도 되겠어요. 에라 씨발. 내가 더러워서 자살하고 말지.”
 앗! 작가님! 아아, 이런…. 작가님의 정신이 불안정한 게 이런 결과를 낳는군요. 좀 더 여유 시간을 드려야 했나요? 작가님에게는 자기 혼자만의 자살로 끝날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가 수십 억 명의 생명을 결정짓는 행위였다는 점은 생각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청중 여러분 의견도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군요. 여러분, 문사철의 문. 문학이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21퍼센트가 작가님과 운명을 함께하셨군요.
 그렇지만 걱정 마십시오. 청문회는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잠시 청소하는 동안 쉬는 시간을 가지시면 되겠습니다.


3. 박사(사학)

 청문회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질문을 하실까요? 네, C열 4번! 어? 뭐라고요? 1, 2, 3, 4 순서대로 고르는 거 아니냐고요? 그럴 리가요! 저는 계산된 대로 청문회를 진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질문 시작해주시죠!
 “박사님께 질문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사학자님이시군요. 과연 어떤 내용일까요?
 “박사님은 사학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이네요.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그동안 인류가 뒷걸음질 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우리 부모님이, 조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그들의 삶과 가르침이 영영 사라진다면 어떨지.”
 안타깝지만 박사님, 이 자리에 더 이상 상상력 풍부한 사람들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상상하더라도 그게 와 닿거나 말로 나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박사님께서 전부 말로 설명해주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렬로 쭉 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무리라고 칩시다. 그렇다면 사학자는 그 행렬의 맨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면, 사학자들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는 사람들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다가 행렬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데이터 속에서 찾아 전달해주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복지가 생산과 효율, 발전과 크게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 전만 해도 충돌하던 관계였죠. 이 관계를 해소할 해답을 찾은 건 경제학자도, 공학자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사학…”
 제한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역시 사학자들은 말이 긴 것 같습니다. 옛날엔 말이야, 이런 소리로 시작하죠. 혹시 졸리신 분 있습니까? 냉수를 드릴 테니 잠 좀 깨시지요. 다음 질문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A열 5번께 발언권을 드리겠습니다. 멀쩡하신가요? 네, 그럼 질문해주시죠.
 “박사님께서는 사학이 문제 해결력을 갖추었다고 얘기하려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학의 문제 해결력은 공학에 비하면 한참이나 떨어지지 않습니까? 또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반론과 낭비를 야기하죠.
 옆에 있는 철학은 그래도 지금 우리의 처지에 공감 가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학은 뭡니까? 결국에는 상대성이니 시대상이니 불필요한 얘기만 늘어놓지 않습니까?”
 “상대성과 시대성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우리의 과거는 그저 지나가기만 하면 쓸모없다는 소리입니까? 그 말씀대로라면 지금 우리의 완벽함과 효율성, 그리고 그 정신도 미래의 후손들에게는 쓸모없을 것이라는 소리입니다. 정말 질문자께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불필요한 것 같습니까?”
 “궤변입니다! 우리는 이전 사람들과 다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벽함! 그것이 지금 우리의 시대이고, 앞으로의 우리입니다! 여러분! 사학은 겁쟁이들이나 신봉하고 몰두하는 학문입니다! 아니, 우리의 눈부신 발전과 완벽함에 의심을 품고 반발하는 반동분자들입니다! 지금 당장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질문자께서 많이 흥분하셨군요.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질문이 오가는 청문회지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여 세력을 모으는 자리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발언권은 다음 분께 넘어가겠습니다. 어디… L열 6번 청중 분!
 “박사님의 말씀, 그리고 사학이 추구하는 바를 곱씹어봤습니다. 그러니 어딘가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방금 질문자께서도 그걸 알아차리시고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중하게 물어보겠습니다. 박사님은 우리 세상이, 지금 이 시대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솔직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자, 박사님? 답변하실 차례입니다. … 박사님? 답변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어요. 박사님 입에 수많은 생명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기다려드리겠습니다.
 …… 허어, 말씀이 없으시네요. 포기하시는 건가요? 의견 정리도 하지 않으시고? 설마 작가님처럼 돌발행동을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안타깝지만 작가님의 행동을 교훈삼아 어영부영 마무리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놨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달려있는 일을 대충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씀이 없으시다면 최후의 수단을 쓰겠습니다. 마인드 프로젝터 부탁합니다.
─멍청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야. 이딴 연극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다니 세상이 언제 이렇게 썩어문드러진…
 오, 큰일 날 소리네요. 벌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선 게 느껴집니다. 아이, 박사님. 그러게 얼른 답변하셨어야죠. 그렇게 화내봤자 나아지는 게 있겠습니까? 어? 현자님? 또 할 말 있으신가요?
 “저거 편해 보이는데 저 그냥 저걸로 답변하면 안 될까요?”
 아휴, 안 됩니다. 저거 굴리는 게 얼만데요. 그리고 현자님은 자존심이랑 수치심도 없나요? 남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꼴인데요? 질문이나 이어가겠습니다. 네, Y열 7번 분.
 “박사님의 속마음 잘 들었습니다. 동시에 사학자들이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이해했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지요?”
 “여러분, 세계 어느 역사를 살펴봐도 지금 우리만큼 어리석고 오만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두 이성을 되찾으십시오! 기계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생산과 결과, 성과에 모든 가치를 맡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못나고 뒤떨어졌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저 이것 하나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겸ㅅ…”
 제한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끝까지 시간을 넘기시네요. 게다가 마지막 발언이라고 하는 게 전형적인 반동 체제전복자의 호소로군요. 음? 더 짧아졌지 않냐고요? 알게 뭡니까? 청중들은 당신의 훈계를 원하지 않는걸요. 잘 가세요 박사님. 직접 약 드시는 걸 원하진 않는 것 같으니 먹여드려야겠네요.
 이것으로 문사철의 두 번째, 사학도 정리되었습니다. 아까 살아남은 사람들 중 58퍼센트가 운명을 다했군요. 꽤 많은 분들이 사라지셨지만 예상범위 내였습니다.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갖고, 마지막 시간으로 나아가도록 하죠.


4. 현자(철학)

 마지막으로 철학자, 현자님만이 남았습니다. 미리 일러두겠는데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상력도, 가르침도 남아있지 않은 분들입니다. 적절한 설명과 표현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현자님, 준비되셨는지요?
 “이게 의미가 있을까요?”
 아직 준비가 안 되셨다는 얘기인가요?
 “결말이 뻔하지 않느냐는 얘기입니다.”
 혹시 모르죠. 어차피 나아갈 수밖에 없단 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저기 보세요. 몇 안 남았지만 현자님께 질문하기 위해 손들고 있는 청중들을 보시라고요. 현자님이 마주보셔야 할 건 저 사람들입니다. 이 상황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요.
 “그러면 진행하겠습니다.”
 좋습니다. P열 8번째 분께 발언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자님은 왜 현자님입니까?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정말 현자입니까?”
 “생각은 할 줄 아시는 분이 남았네요. 다른 분들도 그러길 바랍니다.”
 앗, 또 조롱하는 겁니까? 의미 없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을 얘기한 거예요. 제 진정성이나 보고 말하세요. 그러면 어디, 제가 왜 현자냐고 물으셨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서로 배움이나 나누면서 왜 그런지 생각해봅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네들은 항상 그랬습니다. 어렵게 말하고, 돌려 말하면서 정작 본질은 피하죠. 그러면서 자기들이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서 자기네들한테서 배우라고 꼬드깁니다. 지금 당신 대답을 들어보니 당신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현자라는 권위를 얻고 싶어서 어려운 소리만 해대는 것 아닙니까? 당신네들은 정말로 암적이고, 기만으로 가득 찬 집단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뭘 해줄 수 있느냐고 묻죠. 또 철학이 도대체 하는 일이 뭐냐고… 아니,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묻던가요 이젠?
 제 답변은 이렇습니다. 저도, 철학도 뭔가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질문자님처럼 뭔가를 원하고 해줬으면 한다면, 철학은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한편으로 철학은 우리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이것마저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화만 나네요. 왜 철학이 우리의 전부입니까? 철학이 언제 우리에게 확고한 답을 내려줬습니까?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줬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겁니다. 철학은 그런 힘이 없고요. 답변은 필요 없습니다. 또 궤변만 늘어놓을 테니까요.”
 두 분 다 진정성이 정상범위 내였다는 것만 덧붙이겠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 들어보겠습니다. S열 9번입니다.
 “만만치 않을 줄은 알았는데 이토록 뻔뻔하고 오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문사철의 성공률이 소수점대였다는 점, 그 평균을 철학이 제일 많이 깎아먹었단 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이렇게 실패로 점철된 불량품이 정말 우리의 전부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 실패를 딛고 지금 우리가 서있는 건데 당연하지 않나요? 잠깐 여러분이 좋아하는 디자인 얘기를 해봅시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 천 년 전 사고방식대로라면 나올 수 없는 디자인입니다. 작가님과 박사님이 살아계셨다면 더 자세히 얘기해주셨을 텐데 안타깝네요. 그렇지만 이것은 결국 생각, 즉 철학의 범주입니다.
 여러분의 사회제도. 이것도 과거의 온갖 사상을 거쳐 온 것이며, 이 또한 생각이고 철학입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기술? 과학?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어디에 우리의 생각이 빠져있다는 소리일까요?”
 현자님 말씀을 조금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 옛날까지만 해도 철학이 곧 모든 학문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현재로 올수록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각각의 학문은 각각의 영역과 전문성을 키워갔고, 철학과 완전히 결별한 학문도 있습니다. 철학도 철학만의 영역과 전문성이 생겨났죠. 지금 문제시되는 것은 그런 영역이나 전문성으로서의 철학 아닐까요?
 “그런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철학에서 생각과 배움의 줄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가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심해보려 한다면 이런 얘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란 건 대부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닙니다. 지난 생각들 위로 계속 쌓여온 거죠. 지금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미래의 생각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 말은 결국 아까 죽은 박사님과 같은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계속 배워야 할 정도로 완벽하지 않다는 소리입니까?”
 “왜 다르겠어요? 제가 계속 말하잖아요. 전부라니까요? 앞서 열심히 떠든 박사님, 작가님, 그리고 질문하신 여러분 모두 철학자라고요. 그리고 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요. 계속 배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완벽하다고 떠드시던 분들 지금 어떻게 됐죠? 여러분 양옆을 보세요.”
 현자님, 위험한 발언은 자제해주십시오.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다들 이제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마지막 질문자가 누구인지 맞혀보겠습니다. E열 10번! 살아계십니까?”
 아, 네. 맞으셨네요. 기계 같은 판단력입니다. 질문해주세요.
 “현자님이 무슨 얘길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해할 수 없는 소리 투성이입니다. 우리는 완벽합니다. 현자님의 말은 문사철이라는 실패의 집합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소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완벽함이란 걸 벗어나서 다르게 생각해보세요. 상상력도 없고, 가르침도 받지 않은 머리겠지만 생각해보라고요.”
 “저는… 싫습니다. 애초에 이 자리는 우리 사회의 걸림돌을 청소하는 자리였다고요. 왜 제가 당신과 같이 생각하고 있어야 하죠? 당신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쳐야 합니다.”
 “어…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편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 생각하는 걸 포기하세요.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제가 끝맺을 동안 뭔가 바꿔보려고 발버둥 쳐보세요.”
 어? 현자님 잠깐만요! 바로 드시게요?
 “그러면 남은 인류가 생각을 버릴 때까지 차나 한 잔 하고 있을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그럴 일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이제 지루하지 않습니까? 할 얘기도 없는데 빨리 끝내요.”
 어… 그래요…. 철학은 항상 이렇죠. 뭔 소리 하는지 알 수 없고, 뻔한 것 같다가도 끝에 뒤통수를 쳐버리죠. 잘 가세요, 현자님. 적당히 재밌었습니다.


5. 폐막

 네,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누릴 것만 누리고 해내는 건 없던 문사철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우리 세상의 걸림돌을 모두 청소했어요. 음, 그런데 축하해줄 사람들이 안 남았네요. 그럴 수밖에 없죠. 이미 다들 알고 있었잖아요?
 저는 왜 멀쩡하냐고요? 생각해보세요. 완벽한 세상인데 인공지능 로봇 사회자쯤은 당연히 있지 않겠어요? 애초에 비슷한 성질을 죽인다고 했는데 문사철 따로따로 죽는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딜 봐서 이 셋이 완벽하게 구별된다고 생각하세요?
 아, 이제 생각할 머리도 없구나.


유창원 yoochang777@naver.com 010-2795-2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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