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로 가는 달

by 세계의끝 posted Apr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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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로 가는 달
 

배낭을 꺼냈다. 너무 낡아서 진작 버렸어도 되는 물건이지만 쓸모 여부에 상관없이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면, 이 배낭이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20,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절에 무작정 유럽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다. 동행하는 친구도, 계획도 없었고 돈도 최소한의 비용 말고는 없었다. 삼십 대에 접어든 지금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참 겁도 없었어, 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영어 발음도 후졌었는데. 지금이라고 그때보다 월등하게 나아진 건 아니지만 말이다.

군대를 전역한 직후였다. 개들에게 개껌을 물려주듯이 내게도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대로 두면 내 안의 뜨거운 무언가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와서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별거 없이 시시해 보이는 학교로 복학하기엔 나를 끌어당기는 다른 중력이 작용했다.

내 속에 남은 열정을 태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노가다를 뛰어서 비행기 티켓 값을 모았다. 유럽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축구팀밖에는 없어서 새벽에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프리미어리그를 직접 보러 영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행기 예약을 하던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가 영국행보다 무려 352300원이나 저렴한 걸 발견했다. 그 돈이면 몇 끼의 밥값은 해결될 돈이었고 그렇다는 것은 며칠을 더 외국에서 버틸 수 있다는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들겼다. 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파리가 되었다. 윙윙 날아다니는 파리 말고, 에펠탑이 있는 파리.

 

 

배낭은 현재만 있는 것처럼 살았던 20대를 추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배낭의 이라는 글자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리함에 고스란히 담겨서 30대를 살아가는 나의 손에 다시 들려 있다. 배낭을 둘러메고 여행하는 건 미지를 탐험하고 싶은 욕망과 비례한다. 길에서 우연히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새로운 세계가 부러웠다. 지금은 캐리어를 끄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걸 받아들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었다.

이번 추석은 개천절과 한글날 사이에 끼어있었다. 개천절을 앞둔 주말과 한글날을 앞둔 주말을 두 번 통과하는 연휴 기간은 길게는 열흘까지도 가능했다. 열흘이라니. 우리나라에서 열흘이라는 휴가는 누군가에게는 버티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2017년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라고 하면서 올라온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담긴 댓글을 보면 그들에게 이번 연휴는 꿀이었다.

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토요일인 오늘 뉴스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의 모습이 나왔다. ‘출국대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혼란을 피할 요령을 몇 가지 일러주기까지 했다. 여름 휴가철보다 많은 사람이 외국으로 빠져나갈 거라는 추측도 나왔다. 썰물 빠지듯 밀려 나가는 여행객들의 머리를 보면서 그 틈에 지은이의 머리도 있는지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턱까지 오는 짧은 단발이었다.

내가 이번에 하려는 게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은 배낭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생각나는 대로 집어넣었다. 면도기, 양말, 칫솔, 노트북. 그렇게 집어넣다가 배낭 아래쪽에 난 구멍을 발견했다. 손가락이 세 개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었다.

그 구멍은 어이없게도 나와 지은이를 이어준 구멍이었다.



“There is a hole in your bag.”

“What?”

“Hole in bag.”

배낭을 앞으로 돌려 살펴봤을 때 구멍엔 팬티 일부분이 비죽 나와 있었다.

, 뭐야. 이건 또."

난 얼른 팬티를 쑤셔 넣었다.

, Thank you.”

한국 사람이에요?”

? , 한국 사람이세요?”

, 소매치기가 뭐 빼간 거 아니에요? 확인해보세요.”

난 순간적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들쑤셔가며 안을 살폈다. 다행히 배낭 안엔 없어질 만한 물건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우린 통성명을 했고, 마침 둘 다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라 작은 식당에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먹게 되었다. 내 가방엔 그녀가 임시방편으로 준 대일밴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고지은이고, 나이는 스물네 살로 나와 동갑. 서울에 살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위해 호주로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영어교육을 전공했지만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 거 같아서 고민이라고도 말했다.

그쪽은요?”

, 그림 그려요.”

, 그럼 미대생인 거네요? 멋지다. 그럼, 그림 그리러 여기 온 거예요?”

때로는 생각회로를 거치기 전에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취미로 만화를 그리는 건 맞지만 미대생이 아니었다. 수능 점수에 맞춰 화학과에 갔다. 하지만 미대생이 멋지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굳이 사실은 이러저러해요,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녀가 우연히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미대생인 것이 더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주로 무슨 그림을 그려요?"

라고 묻는 그녀의 얼굴빛은 사과 빛이었다. 그을린 피부에서는 건강미가 느껴졌고 웃을 때 잇몸이 드러나는 게 그녀를 명랑해 보이도록 했다. 그녀 말대로 교사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모험가 쪽이 더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돌돌 말아 정수리에 붙였고, 운동화에는 열심히 걸어다닌 흔적이 묻어있었다.

, 뭐 사람도 그리고 풍경도 그리고

만화라는 게 그랬다. 사람도 그리고 풍경도 그렸다.

루브르에도 다녀왔겠네요?"

, , 아니, , 다녀왔죠"

난 그녀가 혹시나 같이 보러 가자고 할까 봐 식은땀이 났다. 루브르엔 진작에 다녀왔었다. 파리에 아는 것이라고는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뿐이었다. 그 두 군데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보러 간 곳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생각보다 더 거대한 곳이었다. 왜 유명한지 알 것 같았다. 당연히도 안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예약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긴 줄을 서야만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걸로 그저 만족하는 부류였다.

"아쉽네요. 같이 갔더라면 이것저것 설명도 들었을 텐데. 저는 내일 가거든요."

그 순간 미술에 대해 무지한 나 자신이 미웠다. 그녀와 좀 더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더 이상의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카페테리아의 열린 창문 틈으로 국적을 알 수 없는 말소리가 연이어 넘어왔다.

지은이와의 첫 만남은 어느 정도는 희미하고 미화된 채로 몸 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카페테리아를 나서면서 반가웠다고 했지만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할 깜냥은 없었다. 인사를 하고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건만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해가 떠올랐던 방향으로 배낭을 보이며 걸었다. 난 그녀의 배낭을 확인해 보려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등 뒤를 차지하고 있던, 주인을 빼닮은 배낭은 주황색이었다. 그녀의 방엔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이어지는 무지개 색상의 배낭들이 차례로 걸려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지은이를 만난 건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스물아홉의 여름이었다.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가 통 떨어지지 않아 병원을 찾았던 날이었다.

고지은 님 2번 진료실로 오세요.

익숙한 그 이름의 주인은 보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2번 진료실 앞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내 이름도 불렸다.

공연수 님 3번 진료실 앞으로 오세요.

진료가 끝나고 엉덩이 주사를 맞고 약국으로 서둘러 갔지만, 고지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지은이 그때 그 고지은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영영 없겠구나, 하고 돌아설 때 몇 년이 지났음에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가방에 구멍 났어요.”

그녀 역시 내 이름이 익숙하게 들렸다고 했다.

우리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필연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들떠서 연애를 시작했다. 유럽의 넓은 땅 중 파리의 그곳에서 만났다는 것, 또 한국에서 현재 자리 잡은 곳이 용인이라는 점이 그랬다. 모든 것이 우리가 연애하기 위한 원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또 그때 우린 용인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밖에 없는 외로움을 안고 있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했다. 사랑을 하면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 병이 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다 나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검은 실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 하얀 실을 집어 들었다. 군 훈련소 때 이후로 처음 잡아보는 바늘과 실이었다. 작은 바늘구멍에 실을 넣기가 어려워 한참을 꾸부정하게 있었다. 슬슬 짜증이 올라와 다 내팽개치고 싶을 때 실이 아슬아슬하게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엑스 자 모양으로 꿰맨 하얀 실은 상처 부위를 봉합한 수술 자국 같았다. 배낭을 다 꾸린 후에 서둘러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장을 보러 나가셨던 부모님과 마주치는 일은 없길 바랐다.

추석 연휴 동안 여행을 다녀올 거라는 말을 미리 꺼내진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찰 아버지의 입과 서운해 하는 어머니의 눈빛을 감당해내기 싫었다.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희대의 불효자가 되는 것 같이 여기는 친척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선 진작에 자리를 뜨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진짜 인생이었다고 믿고 요즘 젊은 애들은, 으로 시작되는 말을 좋아하는 꼰대였다. 꼰대도 되지 못하고 붕붕 떠다니는 내 삶에게 미안해진다.

포스트잇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짧은 메시지를 적어 식탁에 붙였다. 배낭을 메고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가 도로 돌아와서 식탁에 붙여 둔 포스트잇을 구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인천 버스터미널엔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과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용인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놀이동산 야간개장에 가기 위해 용인으로 갈 사람이 많을 거라는 계산을 하지 못했던 탓에 마지막 하나 남은 좌석에 앉아 가야 했다. 맨 뒷좌석의 가운데. 양쪽에 앉은 연인들 틈에 궁둥이를 붙이고 어정쩡한 자세로 배낭을 끌어안았다. 내가 앉은 좌석은 다른 좌석과 다르게 앞이 뻥 뚫려있었다. 갑작스럽게 버스가 멈춘다면 다른 사람들은 앞 좌석에 부딪히겠지만 난 버스의 중앙 통로로 데굴데굴 굴러가게 될 것이었다. 안전띠가 생명줄이다.

연휴의 시작에 들뜬 다른 승객들은 저마다 어떤 흥분감을 입가에 감추고 있었다. 그나마 나와 비슷한 기분인 사람은 버스 안에 운전기사 아저씨뿐이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하루에 지나지 않는 그 무엇. 그의 표정은 무뚝뚝했고 정면을 응시했다. 아니, 아니지. 그래도 기사님은 돈이라도 벌고 계시지. 붕 뜬 건 나뿐이잖아.

 


지은이와 연애를 하던 시기에 용인에 있는 큰 놀이동산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알바를 시작한 이유는 기숙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독립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던 내가 떠올린 묘안이었다. 그 넓은 환상의 세계는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고, 난 캐릭터 상품과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일을 지원했다. 그곳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일은 미소 짓는 일이었다. 일이 힘들고 짜증나서 웃을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얼굴 근육 자체가 미소를 짓기 어렵게 타고난 편이었다. 아침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활짝 웃고 있는 마스코트 인형을 보며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한 가지 요령은 아항하는 콧소리를 내면서 이를 보이면서 웃으면 좀 더 자연스러운 미소를 연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항, 환상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거나 아항, 풍선 하나 드릴까요?” 이런 식이었다. 어금니는 꽉 깨문 채로 입술만으로 웃는 중노동이었다. 일과가 끝나면 볼이 얼얼했다. 먹고 산다는 건 알랑방귀를 껴대는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지은이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매일 복잡한 사건에 대한 이슈로 넘쳐나는 그곳에서는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종일 문서들을 정리하고, 살펴보고, 작성하느라 이마에 주름이 잡힐 지경이라고 했다. 혼자서 문서를 작성 할 때 이어폰을 끼고 컬투쇼를 듣기도 하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 주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난 그녀에게 내가 많이 웃지 않더라도 이해하라고 했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많이 웃더라도 이해하라고 했다. 그녀는 지나가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에도 꺄르르륵 거렸다.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가 바로 지은이었다.

데이트도 당연히 환상의 나라인 놀이동산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물론 난 그녀에게 입장권을 끊지 않고 놀이동산 안으로 들어올 방법을 마련해줬다. 우리가 가장 많이 탄 놀이기구는 나무로 짜인 롤러코스터였다. 반복해서 타다 보니 나름의 룰이 생겼는데, 캄캄하고 밝은 달이 뜬 밤에만 타러 간다는 것이었다.

좌석에 눕다시피 기울어진 각도로 최고 높이의 레일 구간으로 올라가기까지 오로지 덜그덕되는 목재 트랙 소리만 들린다. 보이는 건 어두운 하늘뿐이다. 그 칠흑 같은 어둠은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를 구분 못 할 정도라서 그 순간 다른 모든 감각은 잊히고 청각만이 생생하게 몸 전체를 휘감는다. 맨 꼭대기에 오르면 떨어지기 직전까지 직선 구간이 잠깐 나온다. 덜그덕덜그덕, 열차가 정점의 위치를 찾아가는 동안 나의 시각을 일깨우는 건 검은 하늘에 뜬 달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찰나에 추락.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다 보면 인생이 별거 아닌 것처럼, 고통 없이 죽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조금 울었다.

지은이는 어땠을까. 그녀의 요구로 우린 롤러코스터를 탈 때마다 따로 앉았다. 그녀는 추락의 순간에도 웃었을까, 아니면 그 순간만큼은 울기도 했을까. 우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는데. 딱 한번 그녀와 나란히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우리가 영원한 이별을 한 날이기도 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영원한 이별만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마지막 날,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표정을 봤다면 후회는 남지 않았을까. 매 순간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밝은 달이 눈에 들어오는 악몽을 자주 꾸던 여름밤도 아닌 가을밤도 아닌 그런 날이 있었다.

 

 

용인 공용터미널에서 내릴 생각이었는데,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터미널에 도착해서 엉덩이는 움찔거렸는데, 문이 열리고, 지금이라도 버스 카드를 꺼내서 찍고 내리면 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 문이 닫혔다. 꼼짝없이 종착점인 놀이동산까지 가야 한다. 이 좋은 가을날에, 혼자, 어쩌자고, 놀이동산 정문에 도착했다.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딸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그 옆에 연인들이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추석을 앞둔 가을인데도 햇살만은 늦여름의 그것처럼 열기가 있었다. 오랜만에 안쪽을 둘러보려고 했는데 입장권만 4만 원이 넘는 금액에 뒷걸음질 쳐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쥔 것처럼 손이 끈적거렸다.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 옆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 쪽으로 갔다. 그곳만이 유일하게 끈적한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목이 말라 천 원짜리 지폐를 찾아 자판기 쪽으로 갔다. 코코팜을 찾았지만 없었다. 포카리스웨트 버튼을 눌렀다.

코코팜이 그렇게 좋아? 맨날 그것만 먹어.”

그런가? 콜라나 환타보단 이게 더 고급스럽잖냐.”

고급? 그래봤자 몇 백 원에?”

내가 중딩 때 용돈이 없었어. 필요한 거 생길 때마다 돈을 달라고 해야 하니까. 집이 되게 쪼들렸거든. 근데 중2 땐가? 매점도 없던 학교 복도에 자판기가 생긴 거야. . 진짜 대단했지.”

복도에 자판기가?”

, 돈 있는 새끼들은 쉬는 시간에 목마르다면서 음료수를 뽑아 마셨어. 콜라, 데미소다, 게토레이 같은 거. 막 한 입만 달라그래서 뺏어 먹었지. 그러다가 코코팜이란게 생겼네? 열대과일 음료라니 그때만 해도 센세이션했거든. 다른 거보다 그게 좀 더 비쌌어. 한 입만 말고 통째로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니까."

짠하네.”

이게 바로 드림 드링크지.”

드림 드링크래. 하하하하.”

지은이가 달밤처럼 환하게 웃던 날의 기억이다.

이제 내 꿈의 음료를 찾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커피 전문점들이 생기면서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이 사라졌다. 날이 어둑해졌다. 거대한 환상의 세계에서 화려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오늘 안에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용인의 한 마트에 들러서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고, 애완동물 코너에 갔다. 고양이 캔 사료와 간식을 샀다. 녀석은 배가 많이 고플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지금이었다.

, 조용히 해봐.”

?”

고양이 소리 안 들려?”

지은이 말대로 어디선가 희미하게 고양이가 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새끼 고양이 같은데?”

놀이동산 화단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녀석은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야위어서 일어설 기운도 없어 보였다. 지은이는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그날 이후로 지은이에게 새 식구가 생겼다. 손이 좀 많이 가는 녀석이었지만 귀여워서 용서되는 녀석이었다.

, 이름 지었어."

뭘로?”

지금!”

지금? 이름이 지금이라는 거야?”

, 은보다는 금이 좋잖아.”

지은이가 지은 이름, 지금.”

, 라임 좀 아는데?”

0927. 지은이의 생일이면서 이 집의 비밀번호이면서 지은이의 핸드폰 뒷자리이기도 한 번호.

지금아.”

야옹, 어둠 속 어디선가 응답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지은이의 방엔 침대와 고양이 용품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방의 불을 켜자 후다닥, 거리며 숨는 소리가 들린다. 엎드려서 침대 밑을 보니 웅크린 채 내 쪽을 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이 보인다. 고양이 밥그릇에 마트에서 사온 캔 사료를 따서 부어놓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냄새를 맡았는지 녀석이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다가온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밥그릇 앞에 앉아서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배가 고팠는지 쩝쩝거리는 소리를 낸다. 고양이의 물그릇에 있는 물을 버리고 생수를 부어주었다.

밥을 다 먹고 털 손질을 끝낸 지금이가 침대 위에 자리 잡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직도 경계 중이다. 창문에 짧은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안녕.]

 


지은이와 내가 연애를 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우리에게도 권태기라고 부를 만한 시기가 찾아왔다. 우리는 서른한 살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둘 다 현재를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 어디쯤이나 미지의 미래 어디쯤에 머물렀다.

요즘 어린 것들은 싸가지를 아주 밥 말아 쳐먹나 봐. 왜 지난달에 새로 들어왔다고 한, 부산이 고향이라는 애 있잖아. 걔 교육하다가 오늘 개빡쳤다니까.”

연수야.”

군대도 다녀왔다는 새끼가……

연수야, 네가 뭐라고 생각해?”

?”

너 주변을 살펴봐. 다 너보다 한참 어린애들이야. 그런 애들 틈에서 네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지은이는 목소리 톤을 낮추고 훈계하는 사감 선생님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본다.

, 왜 그래, 무슨 말을 꺼내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이러고? 내가 뭐가 어떤데?”

우리 서른한 살이야. 다른 서른한 살들 뭐하고 사는지 몰라?”

다른 서른한 살? 회사원들 말하는 거야? 걔들은 걔들이고, 나는 나잖아."

난 시시하게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날이나 기다리며 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머물기 싫었다.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기 전의 일이었다. 대학 동기 중에 별 볼일 없던 놈이 대학을 휴학하고 주식을 하겠다고 나대더니 웬만한 대기업 다니는 것만큼 돈을 번다고 나불거리는 걸 듣고 나도 쉽게 돈 벌 수 있을 거란 환상에 사로잡혔다. PC방에서 야간 알바를 하면서 번 돈을 탈탈 털어 변화하는 그래프를 좇으며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 눈에는 폐인처럼 보였겠지만 난 나의 직감이랄까 그런 것을 지나치게 믿었다. 7개월 그 짓을 했을 때 투자한 돈의 세 배를 회수했다. 자신감이 붙었고 그 돈으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바로 다 털어먹었다.

정신 차리고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 무렵 간간이 그리고 있던 만화에서 살길을 찾았다. 웹툰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만화가 다시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나자, 아버지와는 마주치면 신경전을 벌이는 대화가 이어졌고, 어머니의 한숨 소리는 배경이 되었다. 집을 나가려고 해도 방 구할 보증금 500만 원이 없었다. 생각해 낸 방법이 용인의 놀이공원에서 알바를 하는 것이었고,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누가 너보고 회사 들어가라는 거야? 우리 나이도 있고, 좀 더 절실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 절실해. 그러니까 낮에는 싱글벙글거리면서 뺑이 치고서 밤에는 그림 그리는 거잖아."

아항, 그러셔? 그런데 지금 현재 상황을 좀 봐 바. 나 결혼하고 싶어. 내 나이 서른하나야. 너 당장 나랑 결혼할 수 있겠어?”

친구 누구 결혼한다고 청첩장 왔어? 오늘 왜 그러는데?”

그래! 왔어. 현진이도 결혼한대. L 전자 다니는 남자랑.”

거봐, 대기업이잖아. 넌 지금 내 조건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어디 가서 말하기도 쪽팔리냐?"

"누가 그렇데? 그냥 정상인처럼, 평범하게..."

"정상? 그럼 내가 비정상이라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쨌든 넌 나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고 책임은 안 지려는 거잖아."

", 그게 내 책임의 문제로 넘어가냐? 너야말로 내 꿈을 응원한다더니 이제 와서 돈 잘 버는 놈 만나서 호강이라도 하고 싶어진 거야?"

"꿈 그거 좋지. 그런데 정말 너 그거 이루기 위해서 노력은 하는 거야? 그냥 알바하면서 만족하는 거 아니고? 그 놀이동산에서 대접받는 거 같아? 그래, 나도 호강 좀 하고 싶다. 그게 뭐 어때서?"

지금이가 야옹, 울면서 우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지은이와 나는 서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현관 쪽을, 나는 창문 쪽을 바라봤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타이밍이었다. 우리가 만날 때 기막히게 들어맞았던 타이밍처럼 모든 것이 이별이라는 결과를 향해 순차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이별은 나에게 부당한 처사처럼 생각되었다.

내 목소리는 수그러들었다.

"내가 대기업에 다니지 않는 게 무슨 죄는 아니잖아? 너를 속인 것도 아니고. 너한테 당장 결혼하자고도 못 하는 거 미안해. 조금만 지나면 우리에게도 적당한 시기가 올 거야."

난 지금이 그 때야. 지금이 아니면 싫어.”

내 인생이 송두리째 거절당하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말다툼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난 지은이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먼저 나를 찾아와 줄 거라고 착각했다.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틀은 쌀쌀하다가 또다시 더워진 그런 밤에 마지막 롤러코스터를 탔다. 물론 마지막인지 모르고 탔다. 일주일 만에 내가 일하는 곳에 찾아온 지은이는 롤러코스터를 타자고 했다. 그리고는 웬일로 내 옆 좌석에 앉았고, 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봤다. 윤기 나던 이마와 콧등.

그냥 나란히 한 번 타보자.” 환하게 드러나는 치아와 잇몸. 가슴 속이 저릿저릿했다. 난 모든 걸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멋지게 이별을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수도 없이 많이 탔던 롤러코스터였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렸다면 볼 수 있었던 지은이의 마지막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열차가 정해진 레일을 빠른 속도로 모두 통과하고 종착 지점에 도착할 때쯤 지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다.”

뭐라고 했어?”

지은이는 앞장 서 출구로 내려갔다.

이젠 됐다고 했어.”

내 눈앞에는 이상하게도 환하게 뜬 달만 보였다.

그녀는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넌 사랑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거였냐면서 비아냥됐다. 아니 그냥 찌질하게 아무 말이나 했다.

누구냐고, 상대방이 얼마나 잘난 새끼길래 당당하게 결혼한다고 나한테 고백할 수 있느냐며 게거품을 물면서 따졌다. 변호사라고 했다. 변호사들 부탁으로 자료를 전해주려 법정에 오며가며 알게 된 변호사라고 했다. 그놈이 지은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했다. "나도 솔직히 싫지는 않았어.” 라고 했다.

마치 지은이가 천한 여자인 듯 굴었다. 내가 덜 상처받기 위해 난 그녀를 창녀로 만들어야 했다. 난 그런 놈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시작과 끝에서, 나만 상처받은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미안해하는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떨쳐낼 걸 드디어 떨쳐냈다는 시원한 표정도 읽을 수 있었다. “넌 내 인생 최고의 쌍년이야.” 라고 내뱉었다.

당시의 나는 나이만 먹었지 여전히 어렸다. 지은이의 조급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난 나만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니,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그런 인간. 웹툰 작가로 성공하는 건 다 핑계일 뿐, 놀이동산에서 나가기 싫은 어린애처럼 남들처럼 번듯한 무언가에 속하지 못하고 거절당할까 봐 도망 다니는 겁쟁이였다.

그녀에 대한 미움이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지다가 그녀가 다시 그리워질 때쯤, 어쩌면 지은이가 나 정신 차리라고 그냥 세게 나와 본 것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위안을 삼고, 결혼한다는 말은 거짓말일 거라고, 나를 2년을 만났는데 갑자기 결혼이란 걸 그렇게 쉽게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언제쯤 그녀가 나를 다시 받아줄지 그 타이밍을 따져봤다. 그래서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카톡으로 그녀의 프로필사진을 자꾸만 확인하게 되던 어느 날에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클릭해 보았을 때, 프로필 사진에 찍힌 고지은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이제 영영, 정말 영영 끝이구나. 모든 게 한 순간에 정리되는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놀이공원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용인에는 다시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부모님이 사시는 인천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웹툰에 도전하려는 마음은 접지 않았지만 그것만 바라고 살 수도 없었다. 남동공단에는 수많은 공장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나를 사무직으로 받아주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 비정규직이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할 수 있었고, 비로소 보이지 않은 가느다란 선 안으로 내 삶을 들여놓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 보란 듯이? 변호사랑 결혼한 지은이는 아마 나 따위는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살림으로 가득 채운 아파트에서 남편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가졌을 수도 있다. 자신만으로도 벅찬 삶들이 이어질 텐데, 나 따위를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몇 년 후에 걷기 시작한 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 갔을 때, 롤러코스터 위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을 보면서 어렴풋이 날 떠올리겠지. 잘 산다는 것도 그렇다. 그냥 살고 있기에도 빠듯해서. 잘 산다는 말은 어린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말처럼 여겨졌다. 그런 이유에서 새로 그리기 시작한 웹툰의 주인공은 자신을 배신한 여자 친구 보란 듯이 잘 살게 되는 남자 이야기였다.

잭팟까지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웹툰을 연재한 결과 내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주인공들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베댓에 달린 댓글들과 그들이 달아주는 별점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고 좋았다. 덩달아서 내가 연재하는 만화가 도전만화에서 베스트도전만화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웹툰 속의 지은이를 닮은 여자는 주인공을 버리고 가서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주인공을 버린 걸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인생은 롤러코스터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그래도 인생에 제법 오르막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난 오르막길에 오르기 직전에 힘없이 후진하고만 인생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안심할 무렵, 당연하게 진행될 거로 생각했던 정규직으로의 전환은커녕 그나마 있던 비정규직 자리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무심하게 꺼져버렸다. 그게 올 초의 일이었다.

겨울에 일자리를 잃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교육을 받으러 터덜터덜 고용노동센터를 다니는 일은 참으로 처량했다. 거기에 가면 나와 같은 처지의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와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같았다. 버스를 타기에도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서 차가운 칼바람을 얼굴로 대면하면서 그 길을 걸어야 했다. 내리막길에 들어선 이상 떨어질 일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레일을 이탈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다. 어느덧 가느다란 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웹툰에 정말 매진해보자, 공모도 내보고, 여기저기 지원도 해보자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역시나 한심한 혀 차기를 날리셨고, 어머니는 그래도 운동도 좀 하고 그러라고 말씀하셨다.

 

 

무더운 여름이 이제 한풀 꺾이는구나, 할 무렵이었다. 아마추어 웹툰 작가지만 겉으로 보기엔 백수에 지나지 않은 삶을 이어가는 것이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11시가 좀 지난 무렵이면 새롭게 올린 웹툰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댓글을 남겨주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유안나, 꼭 나 같네. ^^~]

멈춤. 유안나는 내 웹툰 속에서 주인공을 차고 떠난 후에 후회하는 여자였고, 나 같다고 한 는 틀림없이 고지은이었다. 웃음에 물결을 넣는 것도 그랬고, 아이디의 이니셜이 그랬다. gogo****. 무엇보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난 당황했다. 그녀가 나의 웹툰을 찾아 읽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마치 내가 쪼잔하게 허구의 만화 속에서 나의 욕구를 채우고 싶어 하는 놈처럼 보인 건 아닐까하는 이상한 걱정이 한 움큼 들었다. 혹시나 다른 곳에도 그녀가 남긴 댓글이 있었는데 미처 놓친 것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은 시그널에 내 머릿속 회로들은 온갖 짜 맞추기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결론은 정말로 고지은이 나와 헤어지고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냥 댓글을 남겼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한 번 봐서 신경 쓰이기 시작해 버린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지은이는 나에게 쌍년이었기에 연락처도 지우고, 카카오톡 친구도 차단했었다. 다시는 연락을 할 일도 볼 일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한 번씩 떠오르기는 했다. 특히 뭔가 잘 안 풀리는 상황에 놓이면, 이상하게도 환하게 웃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다가 밝은 달처럼 바뀌었다. 지은이를 만나던 시기가 내 생에서 가장 많이 밤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기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시기도 참 지랄 맞은 시기였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지은이 덕분이었다고,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어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폰 번호. 그렇지만 이런 밤에 네가 댓글 달았냐면서 능청스럽게 연기하듯 연락하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그때 포털 사이트 아이디로 쪽지가 한 장 날아왔고,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그 많은 쪽지 중에서 지은이가 보낸 그 쪽지를 읽게 되었다.

 

 

고양이 지금이가 그르릉그르릉 거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눈에 한가득 졸음이 담겨있었다. 예전에도 꼭 사람 곁에서 잠들려고 하더니 여전히 그런 모양이다. 잠이 오니 나를 경계하던 마음도 허물어진 모양이다. 드디어 내가 기억 난 걸까. 아니면 이제 나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걸 녀석은 동물적 감각으로 터득했을 것이다.

지은이는 쪽지로 그간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물어왔다. 무시할 수 없었다. 뭔가 다시 만나서 잘 될 거라는 기대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관계의 강을 넘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쪽지를 주고받은지 한 달여 지난 2주 전, 이별 후 처음으로 지은이를 만났다. 북적거리는 부평의 스타벅스의 수많은 소음에 섞여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긴 머리였던 그녀를 기억해내고 있었는데 레옹의 마틸다만큼이나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수척한 얼굴로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걱정했지만 유럽에서 처음 만나던 날처럼 밝아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용인에 살고 있고, 인천에 지인 결혼식이 있어서 왔다가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결혼생활은 아주 금방 끝장났어. 이혼 도장 찍는데 네 말이 생각났어. 결혼을 위한 결혼은 결국 다른 삶으로 도피해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 말. 네 웹툰에서도 주인공이 그런 말 하더라.”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었나?”

친구의 결혼식을 다녀왔는지 부케를 받은 여자가 끼어있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스타벅스는 도떼기 시장같았다.

종종 거기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했어. 나 혼자.”

그냥 흘러가는 대로 고지은을 만나기는 했지만 전처럼 편하지도 않았고, 괜한 추억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 입장을 이해했는지 그녀가 나를 만난 목적이랄 수 있는 말들을 털어놨다.

나 한국을 좀 오래 떠나있을 거 같아. 긴 여행이 될 거 같거든. 모험가가 어울린다는 네 말이 결국 또 맞아떨어진 건가? 너 그러지 말고 점술사 해보는 건 어떠냐?”

그녀가 예전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난 머그잔에 설탕을 털어 넣었다. 흔적 없이 녹아버렸다. 그녀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었다.

내가 키우던 고양이, 지금이 기억나?”

, 기억나.”

미안한데…….”

그녀가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내 얼굴의 어디쯤을 바라봤다. 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뜻으로 눈썹을 들어올렸다.

고양이를 좀 돌봐줄래? 아무래도 데리고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

짧은 순간, 난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무래도 무리겠지? 거절해도 돼.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도 있으니까.”

아니야. 내가 키울게.”

정말? 고마워.”

한 시름 놓았다는 지은이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나 역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은 어디로, 얼마나 가는데?”

일단은 몽골. 적어도 1?”

몽골을? 대단하네.”

대단하긴, 근데 떠나기 전에 널 꼭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고. 내 이기적인 욕심이었는데,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

아니 뭐, 고맙긴.”

네가 꿈을 접지 않고 웹툰을 계속 그리고 있어서 참 좋더라. 너야말로 대단해.”

, 별것도 아니야. 그걸로 돈 한 푼 못 버는데 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거 대단한 거야.”

그 후론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난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몽골 갈 때, 배낭 메고 갈 거지?”

? 그렇겠지.”

무슨 색깔이야? 그 배낭은? ”

 

 

난 길면 열흘이나 되는 추석 연휴의 첫날을 몽골로 떠나버린 예전 여자친구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런 걸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렸다. 구깃구깃 접힌 포스트잇이 손에 잡혔다. 난 포스트잇을 펼쳐서 지은이가 붙여둔 포스트 잇 위에 붙였다.

[여행 다녀올게요]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열고 고개를 내밀자, 작고 낡은 놀이터가 보였다. 페인트칠을 다시 했는지 가로등 불빛에 정글짐이 반짝였다. 그 뒤로 보름달로 가는 달이 환하게 웃고 있다.
<끝>




- 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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