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차 단편소설 공모-첫사랑 증후군

by 서어나무 posted Apr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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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증후군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나와 연결된 모든 끈은 온·오프라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끊어진 연처럼 어딘가로 한없이 날아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열 평 남짓한 공간에 처박혀있었다. 무인도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밤 다비가 찾아왔다. 다비가 나를 어떻게든 육지로 데려다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다비는 입술이 터져있었고 교복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터진 입술을 부르르 떨며, 아빠, 그놈을 죽이고 싶다고 했다. 혼자 있던 무인도에 끈 떨어진 아이 하나가 보태진 것뿐이었다.

  다비는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입을 만한 티와 반바지를 찾아 욕실 앞에 놓아주었다. 얼마 후 다비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욕실에서 나왔는데 언뜻 연희를 보는 것 같았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교복을 벗은 다비는 매우 성숙했다. 열여섯 살, 내가 다비의 나이를 알지 못했다면 학생이기 이전에 여자로 보았을지도 몰랐다. 다비가 교복을 빨아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에 널며 말했다.

저 좀 데리고 있어 주세요.”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방금 자기가 내뱉은 말에 쐐기를 박았다.

우리 함께 살아요.”

~, 나는 비웃음이 섞인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를 변태 취급하고는 이 무인도에서마저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었으니 하룻밤만 재워주겠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려 하자 다비가 말했다.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닌 거 알아요.”

  못 들은 척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아내가 학교로 찾아왔던 그 날 이후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자정쯤이 되면 이렇게 잠깐 나왔다. 내가 습작하던 소설을 읽은 아내는 학교로 경서를 찾아와 경서 얼굴에 찢어진 습작 노트를 흩뿌렸다. 소설의 내용은 남자 교사가 어린 여학생을 몰래 훔쳐보다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교사가 학생을 사랑한다는 이야기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가능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가끔 반 아이들에 관해 아내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경서에 관해서도 물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고 소설 속 여학생 이름이 경서라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습작 노트의 여러 페이지를 찍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와 경서는 원조 교제 불륜 사이가 되어버렸다. 변명도 버티기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사는 이 사회의 속성은 이랬다. 거대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속은 좁았고 구원해줄 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관심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경서는 사라졌다.

  아내는 전 재산을 위자료로 요구했다. 그제야 아내의 속내를 알아차렸지만, 아내의 요구대로 해주었다. 내게 남겨진 것은 원룸 한 칸이었다. 아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며 내게 선심을 썼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어떻게든 경서를 찾아 용서를 빌고 싶었다. 사방팔방으로 경서를 찾았지만, 어딘가로 꼭꼭 숨어 들어가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경서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는 목소리로 경서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 찾아다니라고 애원했다. 내가 변명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원을 배회하다가 문득 경서 옆에 항상 다비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쩌면 다비만큼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또 경서와 연락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집에 잘 못 들어왔나 싶었다. 집 안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비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는데 또다시 연희를 보는 것 같았다. 같은 위치에 같은 모양의 보조개가 다비 얼굴에도 있었다. 뭔가 칭찬을 바라는 다비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경서와 연락할 수 있냐고 물었다. 다비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힘없이 의자에 앉자 다비가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경서는 왜 찾느냐고 물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다비에게 침실을 내어주자 무섭다며 문을 열어놓겠다고 했다. 개의치 않고 맥주를 마시자 다비가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내가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을 때 다비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경서를 어디까지 훔쳐봤냐고 물었다. 순간 저 아이가 경서 대신 복수하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에 있는 교복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교복을 침대 위에 집어 던지며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갑자기 다비가 방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빌었다. 경서 이야기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얼마 후 문이 열리더니 무섭다며 열어놓겠다고 했다. 다비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우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이튿날 아침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다비가 방 안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다비의 검정 머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실눈을 뜨고 자는 척하며 계속 바라봤다. 이 집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다비는 티와 반바지를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는데 까무잡잡한 다리가 유독 길었다. 다비는 서둘러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다비와 경서를 떠올렸다. 경서는 하얗고 다비는 다소 까무잡잡해 흑과 백이 함께 다닌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얀 경서가 더 돋보였는지도 몰랐다. 굳이 스타일을 논하자면 경서는 청순하고 다비는 관능적이었다. 다비가 관능적이라는 것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조금 전 옷을 갈아입었을 때 잘 발달한 골반을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골반이 관능적이라니! 아직 어린아이를 두고 상상이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오후 세 시쯤 아주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다비를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을 관찰하게 되었다. 아직은 수줍지만, 굴곡이 뚜렷한 골반과 기다란 두 다리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종일 경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지금은 온통 다비만 생각하고 있었다. 몹시 혼란스러워 차라리 다비가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여섯 시가 넘어도 다비가 오지 않자 서운했다. 어둠과 함께 소나기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깜박 잠들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다비가 여행용 가방을 들이밀며 들어섰다. 나는 다비의 팔을 잡아 세우고는 약속한 하룻밤은 이미 지났다고 말했다.

오늘도 하루잖아요.”

 말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하루라는 말이 왠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다비에겐 절실할 수도 있는 하루 같았다. 다비의 팔을 놓으며 딱 오늘 하루뿐이라고 못 박았다. 다비는 거실 바닥에 가방을 펼쳤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자기가 거실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나는 가방을 방 안으로 들여놓으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 자고 가는 것이라고 거듭 일렀다. 나는 아내와 이혼한 이후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방 하나에 부엌 겸 거실과 욕실이 딸린 이 작은 집으로 이사 왔다. 직장도 없고 사회적 위치도 없는 나에겐 이것도 과분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사 오던 날 집 앞에서 다비와 마주쳤었다. 왠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다비는 자기가 밥을 하겠다고 했지만, 냉장고 문을 열더니 아무것도 없다며 투정 부렸다. 왠지 그 투정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하고 설렜다. 다비는 라면을 끓였고 우리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다비가 내일 수업 끝나고 시장을 봐 오겠다며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정색했다. 내가 변태 같으냐고 물었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학생과 그것도 미성년자와 함께 살 만큼 정신 나간 놈 같으냐고 물었다. 또 내가 왜 어린아이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다비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돌하게 물었다.

제가 정말 어린 아이 같으세요?”

열여섯 살이면 당연히 아이라고 말하자 이번엔 따지듯 그런데 왜 훔쳐봤냐고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비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비의 저 날카로운 눈빛을 전에도 보았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교실을 순회하다가 경서 뒤에 멈춰 섰다. 경서의 목덜미와 빗장뼈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질문이 있다고 했다. 내가 뒤돌아섰을 때 다비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다비가 지금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도 절대 훔쳐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다비가 뒤에서 선생님은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내가 다시 돌아서서 뭘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냐고 물었다. 다비는 내가 습작한 소설을 다 읽었다고 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남자 교사처럼 내가 경서를 훔쳐봤고 자기가 그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을 했던 거라고 말했다. 다비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침을 삼키더니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빵을 구워 먹던 다비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다비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다비가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멈추고는 늦었다며 서둘러 학교에 갔다. 다비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정말 소설 때문에 훔쳐보기를 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분명히 소설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쯤 훔쳐보기를 했을 땐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꿈틀댔었다. 욕망이었다고 인정하고 나니 이젠 다비를 편안하게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의심이 맞았는지도 몰랐다. 아내의 의심을 인정하려 하자 이젠 이 무인도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저 아이가 나를 망치러 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비를 꼭 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야만 어떻게든 이 무인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이 어두워졌는데도 다비가 집에 오지 않았다. 여행용 가방이 있으니 다시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걱정되었다. 다행히 열한 시쯤 다비가 양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왔다. 시장을 봐왔다고 했다. 돈은 어디에서 났냐고 묻자 음식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어제저녁에 돈을 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다비는 당돌하게도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만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림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인도에서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아이가 일깨워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지만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다비에 건넸다. 시장을 봐온 값이라고 했다. 다비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 나를 위해서라도 꼭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 집에서 나가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정말 몰라서 이러느냐고 되물었다. 이 집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 알기라도 하면 나는 영영 매장될 거라며 제발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갑자기 다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교복 단추를 풀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그러지 말라는 말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깨와 빗장뼈가 수줍게 드러났다. 웃옷을 내리며 돌아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비의 어깨와 등판 여기저기에 검푸른 멍 자국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오른손이 멍 자국을 향해 다가가다가 그만두었다. 어제 아침 옷을 갈아입었을 땐, 골반과 다리에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옷을 입은 다비는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때렸다고 했다. 엄마가 일을 처리할 때까지만 친구 집에 가 있기로 했다고 했다. 처리라는 말을 듣자 다비가 다시 연희로 보였다. 이십 년 전, 연희도 처리하고 싶다고 했었다.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연희의 그림자는 여전히 나에게 달라붙어 있다가 이렇게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다비가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그냥 집에서 나왔다. 연희 생각을 하면 걸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연희도 나에게 아빠를 처리하고 싶다고 했었다. 맥주를 사 들고 집에 들어왔을 때 다비는 아르바이트가 힘들었던지 방문을 열어놓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문 하나도 닫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안쓰러웠다.

식탁 위에 술과 안주를 펼쳐놓고 침대가 보이는 곳에 앉았다. 자는 줄 알고 있던 다비가 고개를 들더니 맥주가 맛있냐고 물었다. 그림자 맛과 같은 맛이라고 대답하자 다비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더니 방에서 나와 마주 앉았다. 다비는 핫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걸어 나오는 다비의 긴 다리와 골반을 힐끗 쳐다봤다. 나는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여자의 골반에 대해 아주 묘한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림자처럼 특별한 색깔이 없는 맛이야. 하지만 늘 곁에 붙어있는 맛이지.”

특별한 맛도 없는 이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하자 다비가 맥주를 한 모금만 마셔 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가 마시던 컵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다비가 인상을 쓰며 이런 맛을 그림자 맛이라고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는데 웃는 얼굴이 열여섯 살 아이답게 순수하고 보기 좋았다. 갑자기 다비의 웃는 저 얼굴을 꼭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온몸에 소름이 돋더니 식은땀이 났다. 그 위험한 생각을 또다시 하다니! 내가 이 아이를 사랑....., 그런데 내가 사랑을 알던가?

  다비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불쌍하다며 엄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엄마를 언니나 이모라고 부른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 겨우 서른여섯 살이라고 했다. 딸과 엄마가 겨우 스무 살 차이였다. 나는 빙그레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는 엄마가 처리하겠다고 말한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다비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아빠와 헤어지려는 것이 아니겠냐고 내게 반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도 엄마와 동갑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만나 자기를 임신했다고 했다. 철부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참 많이 힘들다고 했다. 최근엔 직장을 잃은 아빠가 자기와 엄마에게 주먹까지 휘두른다고 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아빠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다. 아빠를 생각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난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던 모습이 떠올랐다. 폭력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깊어 보였다. 다비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비에게 다가갔다. 다 괜찮아질 거라며 어깨를 토닥이자 다비가 내게 기대 울었다. 울던 연희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밖은 아직 어두웠다. 시각을 확인하니 새벽 네 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비는 옆으로 누워 한쪽 골반과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어놓은 채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핸드폰이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다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비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다. 사진첩을 뒤졌다. 엄마 아빠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비가 아빠 피부를 닮았는지 아빠도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엄마 아빠 사진을 내 휴대폰으로 전송한 다음, 노트북 앞에 앉아 학교에서 근무할 때 정리해 두었던 파일을 뒤져 다비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기다란 다리 한 쌍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다비가 핫팬츠를 입고 거실에 딸린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었다. 비좁은 곳에서 다비의 두 다리가 애쓰고 있었다.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지만 잠시 더 누워있었다. 다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그냥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가 나이를 서너 살만 더 먹었다면 어땠을까?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는 마치 내 욕망의 문을 걸어 잠근 자물쇠 같았다. 그때 다비가 내 욕망을 눈치라도 챈 듯 눈떴으면 일어나라고 말했다.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민망한 나머지 밥은 할 줄이나 아느냐고 빈정대자 다비가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훔쳐보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아예 못 들은 척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욕실에서 나왔을 때 다비는 벌써 밥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하얀 쌀밥과 된장찌개가 있는 밥상이었다. 밥상을 보자 괜히 울컥했다. 이혼하고 나서 처음 받아보는 밥상이었다. 맛도 나름 훌륭했지만 칭찬하지는 않았다. 다비가 왠지 서운한 눈치였다. 나는 밥그릇을 비운 후 한 공기만 더 먹을 수 있겠냐며 밥그릇을 건넸다. 다비가 활짝 웃으며 밥을 퍼주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밥 먹고 나서 함께 놀러 가자고 말했다. 이 대낮에 어찌 가겠느냐고 되물었다.

우리가 밤에 다니면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볼 거 같은데요.”

우리! 다비가 우리라고 말하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함께 밥 먹고 스스럼없이 우리라고 말하고 함께 놀러 가자고 하는 다비를 보며, 나 또한 그런 다비에게 은근슬쩍 장단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주말 대낮에 밖에서 서성이는 것은 아직 두려웠다. 혹시나 학생들이 알아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멀리 이사 갈 자금도 챙기지 않은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거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다비가 내 눈치를 보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다비가 나를 부르며 자기를 봐달라고 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다비는 문 안쪽에서 한쪽 다리를 밖으로 내어놓았다. 순간 유혹하려는 것인지 쑥스러워 저러는 것인지 헷갈렸다. 종아리가 보이더니 오금이 보였고 이내 뽀얀 속살의 허벅지가 보였다. 허벅지 위로 흰색 치맛자락이 보였다. 잠시 후 다비가 스스로하고 효과음을 내더니 뒷모습 전체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다시하더니 돌아섰다. 전혀 다른 모습의 다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다비는 어느새 파마머리를 하고 화장까지 했다. 그 모습이 웃겨 보이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전혀 여중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놀라자 다비가 웃었다. 무슨 짓이냐고 묻자 옷은 엄마 것이고 머리는 가발이라고 했다.

  다비가 갑자기 자기를 믿어보라며 내 팔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비가 시키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스타일리스트 되는 것이 자기 꿈이라며 자기만 믿고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다비는 먼저 내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그러고는 내 얼굴에 화장을 시작했다. 다비의 손길과 움직임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원피스 안에서 솟아오른 봉긋한 가슴이 눈앞에 있었고 가느다란 숨소리와 머릿결에서 풍기는 미세한 향기가 소녀의 수줍은 몸짓 사이사이로 하나둘 펼쳐졌다. 다비를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민망했다. 눈을 감자 이번엔 다비의 손길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묘한 흥분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씌우더니 거울을 내게 주었다. 전혀 다른 모습의 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화장이 아니고 변장이었다. 다비는 내 옷장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냈다. 교사가 되기 전에 입었던 절개 청바지와 흰색 티였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 다비는 내 팔을 잡아끌고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이십 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이십 대 남녀 한 쌍이 거울 속에 있었다.

  우리는 한껏 들뜬 상태로 집에서 나왔다. 놀이공원으로 갔다. 다행히 우리 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옆에서 즐거워하는 다비를 보며 이래도 되는 거냐며 순간순간 움찔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양심을 거부하고 있는 나의 욕망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다비에게는 경서처럼 상처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비가 곤히 잠들었는데 그 모습이 참 맑고 예뻤다. 이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음이 움직이자 머릿속에선 벌써 구체적인 방법이 구상되기 시작했다. 위험한 계획이었다. 또다시 위험한 계획을 구상하다니! 분명, 내 안에 괴물이 사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다비가 연희를 닮아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이 있다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변장은 효과가 있었다. 아는 얼굴인데도 저쪽에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비네 집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물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둠은 어느새 내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다비 아빠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다비 말에 의하여 매일 저녁 PC 게임방에 있거나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확인하며 아파트 단지 주변에 있는 편의점과 PC 게임방을 뒤졌다. 다비 아빠는 아파트 뒤편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덩치가 큰 사람이 운동복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소주를 마시는 꼴이 누가 봐도 백수처럼 보였다. 나는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실례한다는 예의를 표하고는 살며시 옆자리에 앉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오늘 회사에서 쫓겨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다비 아빠가 미끼를 물듯 자기는 벌써 이 년째 놀고 있다며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예 소주와 오징어 다리를 사다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셨다.

  이튿날 저녁 다비에게 다시 한번 변신을 부탁했다. 다비의 손길 하나하나는 마치 유혹 같았다. 내가 계획한 목표를 더 분명하게 해주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다비를 지켜주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편의점에서 다비 아빠를 다시 만났다. 잘 아는 곳이 있으니 다음 주에 함께 바다낚시 가자고 제안했다. 다비 아빠도 좋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주 일기예보를 점검했다. 다음 주 수요일쯤 남해안으로 태풍이 상륙할 거라고 했다.

  매일같이 다비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중요 일과가 되었다. 또 거의 매일 다비 꿈을 꾸었는데 마치 몽정하는 열여섯 살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다비 아빠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다비를 깨웠다. 다비에게 또다시 변신을 부탁했다. 내 얼굴에 화장하던 다비는 내가 너무 긴장한 것 같다며 긴장을 풀라고 했다. 순간 움찔했다. 이 아이가 내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신을 끝내고 다비에게 일렀다. 오늘은 이 집에 있는 모든 짐을 싸서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이 올지도 모르니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말해주겠다고 했다. 당분간은 절대 찾아오지도 말고 행여 연락하지도 말라고 했다. 때가 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다비가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무섭다고 했다.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잠시 그냥 있었다. 왠지 이 아이를 꼭 지켜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차 안에서 태풍 소식을 확인했다. 태풍은 자정 전후에 남해안에 상륙할 거라고 했다. 낚시 장비를 확인한 후 정오쯤 다비네 아파트 앞에서 다비 아빠를 기다렸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와는 상관없이 간간이 바람이 불뿐 하늘은 너무 조용하고 맑았다. 저쪽에서 다비 아빠가 다가왔다. 그런데 옆에 다비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함께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 다비 아빠가 다가오더니 자기 아내가 함께 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다비의 말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비 엄마는 다비 아빠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다비가 거짓말한 것 같았다. 지켜주겠다는 결심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비 아빠가 다비 엄마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랄하고 왜 갑자기 따라나서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다비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순간 다비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목표는 더 선명해졌다. 그런데 다비 엄마가 왠지 이상했다. 아까 저쪽에서 걸어올 때부터 뭔가 연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 특유의 걸음걸이와 골반의 움직임이 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이 아주 달랐다.

  남해안을 향해 갈수록 바람이 점점 더 거세게 불었다. 화순 부근에서 결국 거센 비바람을 만났다. 다비 아빠가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난감했다. 그런데 다비 엄마가 집보다 목적지가 훨씬 더 가까우니 그냥 가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이 더 위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며 다비 아빠를 다독였다. 결국, 한 시간쯤 후에 목적지인 고흥만 방조제에 도착했다. 뉴스에선 태풍의 중심이 제주도 서쪽 해안을 지났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예약해 놓은 민박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우리는 태풍이 지나간 이후에 낚시하기로 했다. 식당 운영을 겸하고 있는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해물 매운탕을 끓여 내왔다. 우리 세 사람은 방 한가운데에 술상을 차려 놓고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단 다비 아빠를 취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다비 엄마가 알아서 술을 먹였다. 다비 엄마는 그동안 구박해서 미안하다며 다비 아빠를 구슬렸다. 그러자 다비 아빠는 처음보다 한결 부드럽게 다비 엄마를 대했다.

다비 아빠가 다비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 땐 정말 예뻤는데, 사고만 아니었으면 얼굴에 칼 대지 않았을 텐데.”

놀랍게도 다비 엄마는 얼굴 성형을 여러 번 했다고 했다. 나는 다비 엄마를 빤히 바라봤다. 눈빛이 연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을 물어보려는데 다비 아빠가 내게 술을 권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밖에선 비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다. 태풍의 중심이 고흥만 방조제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는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 세 사람은 꽤 취해 있었다. 사실 취한 것은 다비 아빠 하나였다. 다비 아빠가 졸린 듯 고개를 숙이자 다비 엄마가 다비 아빠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다. 술이 깰 수 있게 비바람을 맞자고 했다. 다비 엄마가 함께 나가자며 팔짱을 끼자 다비 아빠가 연희라고 말했다. 우리 연희가 오늘따라 왜 이러냐며 기분 좋게 웃었다. 분명 연희라고 말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두 사람은 방문을 나섰다. 나는 두 사람을 말리는 척했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몰래 뒤쫓았다. 밖은 비바람이 거셌다. 두 사람은 서로가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방조제로 갔다. 내가 바짝 쫓아갔지만 두 사람은 내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연희는 밧줄이 매여 있는 곳에서 멈추더니 오른손으로 밧줄을 꽉 잡았다. 그때 바닷물이 두 사람을 덮쳤고 연희는 다비 아빠를 잡고 있던 왼손을 빼냈다. 연희는 두 손으로 밧줄을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다비 아빠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졌다. 다비 아빠의 윗옷이 방조제 모서리 부분 어딘가에 걸렸다. 다비 아빠는 가슴 부근까지 바닷물에 잠겼다. 다비 아빠는 옷자락을 부여잡은 채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연희가 그 옷자락을 풀어버리려고 했다. 그제야 연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때 다시 파도가 덮쳤고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연희를 끌어안은 채 엎드렸다.

내가 할게. 빨리 들어가.”

누구세요?”

이 일은 원래 내 일이잖아. 옛날에도 그랬고.”

  그때 다시 파도가 덮쳤다. 내가 빨리 들어가라고 소리치자 연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연희가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다비의 변신 솜씨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소리치자 연희가 민박집으로 뛰어갔다. 나는 허우적거리고 있는 다비 아빠를 지켜보다가 한순간 다비 아빠의 눈과 마주쳤다. 다비 아빠가 살려달라고 했다.

  이십 년 전 그날은 집 앞 강가에 물난리가 났었다. 어머니는 홀로 민물 매운탕 음식점을 운영했다. 연희 아빠는 어머니가 남편 없이 혼자 살자 자주 찾아와 치근덕댔다. 그날도 연희 아빠는 많이 취해 있었다. 다리 건너에 사는 연희가 아빠를 찾으러 왔다. 연희가 자꾸만 집에 가자고 조르자 연희 아빠가 술병을 집어던졌다. 연희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연희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연희 아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내가 연희 이마에 약을 발라주자 연희가 아빠를 처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벌써 세 번째 하는 말이었다. 연희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연희를 지켜주고 싶었다. 연희를 사랑하니까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연희와 함께 연희 아빠를 부축하며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거셌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연희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연희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연희에게 빨리 가라고 소리쳤다. 연희가 울며 저쪽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비틀거리는 연희 아빠를 다리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 연희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연희가 뒤돌아 뛰어왔고 나는 울고 있는 연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연희는 나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며칠 후 연희 아빠 시신이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고 사건은 술에 취한 연희 아빠가 실족한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얼마 후 연희 모녀는 마을에서 떠났다.

  나는 이십 년 전을 회상하며 다비 아빠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비 아빠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혹시 연희가 다비를 내게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자꾸만 그랬다. 내가 또다시 여기까지 오다니! 내게 어떤 고질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첫사랑 증후군이랄까.



신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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