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점

by racook posted Apr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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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점


  '아직도 이 집에 내 옷이 이렇게 많았구나……. 지난번에 다 가져가지 않았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옷장을 정리하는데, 대문을 여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방문을 열었다.

  "청예야,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챙기고 있잖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대략 세 달 만에 만나는 것 같다. 온몸이 너무나 떨려서, 옷을 제대로 접을 수가 없어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러지 말자"

  지호는 그 넓은 어깨로 청예를 뒤에서 안았다. 그 동안의 응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귀와 뺨까지 올라와 뜨거워졌다. 이제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이럴 것이지……. 그래, 우리가 그렇게 쉽게 끝날 리는 없지……. , 이제 됐다……. 아직 늦지 않았어. 부모님께 아직 헤어졌다고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그 와중에 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초인종 소리가 갑자기 끊임없이 울려댔다. 지호야, 지금은 나가지 마, 중요한 사람은 아닐 거야, 지금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라고 말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미 가을도 끝나가는 2월 말의 월요일 아침 630분의 알람이 정신 차리라고 울리는 현실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말았다.

  '꿈이었구나.'

  정말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지난 8개월이 조금 안된 시간 동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공들였던 연애가 어이없이 3개월 전에 깨끗하게 두 조각으로 박살이 났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난 둘은 두 번째 데이트에서, '너를 만나려고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였다'라고 고백도 아닌, 인생의 묘수에 그저 감탄했었다. 처음 몇 개월을 ''이라든지 '100%'라는 수식어만 사용했던 그들이 막상 그리 되고 나니, 충격은 그 이전의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한 달반이 넘도록 현실을 거울로 비춘 듯 생생한 꿈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었다. 대부분은 간밤처럼 지호의 사과와 이제 되돌리자는 말에 깊이 안도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재회도, 뜨거운 화해의 눈물도 없었다. 한때는 그의 집을 가득 채웠던 물건들로 터질듯했던 여행 가방은 꼭 잠긴 채 몇 달 째 그대로 눈치를 보며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람을 진정시키고, 침대에 누워 잠깐만 시간을 좀 달라고 애걸해 본다. 손목과 팔꿈치, 어깨가 불이 난 듯 화끈거렸다. , 정말……. 그만 살고 싶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제 다 그만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30분이 조금 안되어 도착한 사무실에 청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각한 주제라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낮은 포복을 하듯 기어들어가 앉았다.

  "굿모닝, 아침에 별일 없었지?" 옆자리의 옥경에게 속삭였다.

  ", 사장님이 마케팅 사람들이랑 회의 있어서 아침부터 바쁘신 거 같아."

  그러고 보니, 회의실 쪽에 사람들이 가득 차 분주해 보였다.

  "늦잠도 잤고, 차도 막히고……. 근데 배는 또 고프다."

  "그럴 줄 알고 두 줄 샀다."

  회사에서 짝꿍과도 같은 옥경은 자신의 아침으로 김밥을 사면서 한 줄 더 샀는가 보다.

  "너무 고마워! 내가 옥경 씨 덕분에 산다."

  농담이 아니라, 지난 3개월 동안 시체처럼 업무에 집중도 못하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거나, 자리에 앉아 있기조차도 어려웠을 때, 그녀 마음을 알아주고 챙겨 준 것은 옥경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과는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 둘은 일을 할 때도 죽이 잘 맞았고, 가끔은 주말에도 만나 영화를 보거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말은 잘 보냈어?"

  ", 남친이랑 집 보러 다녔는데, 대출을 받아도 이 돈으로는 아파트는커녕, 서울 변두리 반 지하에나 들어가게 생겼다. 하기야 흙 수저 둘이 결혼을 하겠다니……. 수저가 좀 섞여야 공평해질 텐데. 내가 이 사회의 불평등을 부추기는 결혼을 한다. 하기야, 어느 색깔 수저가 이 시대에 흙 수저랑 결혼하려 하겠느냐만."

  "내 어린 꿈이 십 년 연애하고 결혼하는 거였는데, 자기네들은 15년을 만났으니, 내 꿈을 대신 이루고 있는 거야. 당장은 힘들어도, 둘이 벌기 시작해서 알뜰살뜰 십 년, 이십 년 모으면 또 살만해 진다."

  "그것도 옛날 얘긴 거 같아. 모은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당장 나 휴직하고, 얘가 나와 봐. 둘이 살아도 빠듯한 생활비에 분유 값, 기저귀 값, 대출비 상환……. ……. 앞이 캄캄해……. 얘 안 생겼으면 우리 아직도 결혼 꿈도 꾸지 않고 있었을 텐데……. 이런 마음으로 결혼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옥경은 부풀어지기 시작한 배를 쓰다듬었다.

  "복덩이지 뭐. 무엇보다도 정현 씨가 워낙 사람이 괜찮잖아.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검증할 수 있었던 게 어디야. 돈만 많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침 저 쪽에서 회의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떠들던 두 여자도 대화를 멈추고 컴퓨터를 응시하며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돈 없이 결혼한다고 매일 툴툴대는 옥경의 얘기는 단 한 톨의 과장도 없을 뿐 아니라, 청예의 실연을 동정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임신 때문이든, 오랜 연애의 끝이든 두 명이 함께 결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손잡고 예식장을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전에 없이 부러웠다. '왜 나는 그러지 못했을까.'

오전 시간은 늘 빨리 지나가곤 하는데, 월요일을 오전은 더욱 그러하다. 오늘도 밀린 메일에 응답하고, 몇 건의 정례 미팅을 마치자 12시가 되었다.

  "오늘은 점심으로 뭐 먹을래?"

  "콩나물 국밥? 난 왜 이렇게 추운지 모르겠어. 특히, 발이 너무……. 하루 종일 내 발, 발가락을 느낄 수가 없어. 얼음 위에 발목을 꽂고 다니는 거 같거든. 그럼 정말 신경질이 나. 뭔가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면 막 불러 따지고 싶을 정도야. 지호 씨랑 사귈 때도 잠자리에서 발이 차가우면 너무 당혹스러웠어. 막 타오르는 찰나에 내 발이 지호 씨한테 닿으면 어찌나 미안하던지……."

  "지호 씨한테 시작하기 전에 발부터 좀 따뜻하게 해달라고 하지 그랬어."

  "맞네……. 왜 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오케이, 오늘은 청예 씨 먹고 싶은 콩나물 국밥으로 몸을 확 녹이자."

  '정말, 왜 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지난 3개월 동안 청예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살짝 데쳐져 숨이 아직 다 죽지 않은 콩나물이 넘칠 듯 담긴 돌솥에 아직도 바글바글 끓고 있는 붉은 국물이 용광로 같았다. 숙련된 아주머님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상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그 위에 생달걀을 하나씩 깨어 넣고 반숙으로 되어가기를 기다리며 간장과 식초에 절인 오이와 고추로 첫술을 떴다.

  "입덧 끝나고 나니깐, 식욕이 엄청나다. 말이라도 먹는 다는 말을 알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얼굴은 참 좋아 보인다."

  "그래? 살쪘지? 저녁 먹고 나면 아이스크림 한 통씩 먹고 잔다."

  "살쪘다는 말이 아니야, 정말 보기 좋아."

  청예는 정말 옥경을 부러워하는 자신이 놀라왔다. 처음 옥경을 만났을 때, 못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조금 촌스럽고, 소박한 그녀 앞에서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청예는,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잡지를 구독할 정도였고 자신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두 사람은 외모에서 조금씩 비교당하기도 했는데, 옥경은 그런 부분에서마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에서야 청예는 그런 그녀의 의연함이 정현과의 오랜 연애에서 온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것이 긴 연애를 이끌어 온 옥경의 힘인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쩝쩝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콩나물 국밥을 먹는 옥경을 보며, 이런 옥경에 대해서 정현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광화문에 위치한 유명 신문사를 다니던 지호 덕분에 청예는 퇴근 후에 그곳에서 저녁을 먹거나, 날이 좋으면 오래된 궁궐 담벼락을 따라 걷곤 했다.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좋아해서 지구상의 누구보다도 많은 음악을 듣고, 음악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지호는 음악 전문 기자였다. 그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항상 청예가 알지 못하는 노래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런 지호가 좋았다. 큼직한 목련이 캄캄한 하늘을 배경으로 훤하게 등처럼 빛나는 밤이면, 둘은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큰길 뒤쪽의 작은 골목 오래된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그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울고 웃으며, 음악을 들었는데 말이다.

  "청예 씨, 나 휴직하는 동안 일할 웹 개발자 뽑혔나 봐, 저기."

의미심장한 옥경 씨의 눈빛이 빛났다.

  "마흔인데, 미혼이래. 일단은 내가 없는 동안 일할 임시직이지만, 미희 씨가 곧 유학 간다잖아? 그럼 그 자리에 정규직으로 돌릴 지도 모르나 봐. 키키키"

  멀리 한 남자가 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 피부, 왜소한 몸에 검은 색 뿔테 안경으로 얼굴의 반은 가리고 있는 그 남자를 보고 어쩌라는 말인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기 언제부터 휴직이랬지?"

  "다 다음주, 결혼식 끝나면 바로. 그 전까지 인수인계 하고 가야지.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뭘 부탁해!"

  "아니, 잘 지내라고……."

  연애가 끝나고 내가 너무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계속 옥경에게 부럽다는 둥, 소박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둥, 장기 연애의 비결은 무엇이냐는 둥의 질문을 해댔던 건 사실이었다. 그 되풀이되는 질문에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고, 대답해 준 옥경을 원망할 수는 없다. 그렇대도 저 곤충같이 생긴 남자랑 어떻게…….

  부장님과 그 남자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함께 옥경의 자리로 다가왔다.

  "옥경 씨, 휴직 전에 확실하게 인수인계해주고 가야 된다. 지금 홈페이지 개편 중이었지? 디자인은 청예 씨가 하고 있나?"

  ","

  "청예 씨, 여기 웹 기획자로 같이 일하게 된 정재민 씨. 아무래도 재민 씨가 처음이라 내부 사정은 모르는 게 많을 테니, 청예 씨가 옆에서 좀 살펴줘. 옥경 씨랑 잘 지내왔던 것처럼. 재민 씨가 이쪽에서 잔뼈가 굵어서 같이 일하기는 좋을 거야."

  "안녕하세요? 정재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습보다 목소리는 고왔다.

  ", 최청예에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근무 시작 전에 혹시 회사 나올 일 있으시면, 저희랑 같이 점심이나 하세요." 옥경이 마치 오랜 동료였던 사람을 대하는 양,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제출할 서류 몇 개 가지고 다시 와야 하는데, 그 때 뵐까요?"

  ", 그날 그럼 인수인계 자료도 드릴게요."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그 남자는 떠났다. 한참을 가까이 서서 이야기 했던 사람이었는데, 얼굴을 떠올리려 하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호색을 띄는 곤충 같아. 정말 존재감 없지 않아? 이목구비가 있었나 기억이 안 난다. 체구가 워낙 작아서 그런가?"

  "좀 작긴 하지. 근데 가까이서 보면 못난 얼굴은 아니야."

  "그래? 너무 캄캄하게 생겨서 잘 보이지 않는 건가?"

  "청예 씨, 외모 보는구나……." 옥경이 낄낄 거렸다.

  "아니 그건 아닌데, 좀 그렇잖아……. 한 회사에서 어쩌라고."

 

 청예는 지호가 자기를 붙잡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마 천만 번, 좀 더 정확하게 계산을 해 보자. 헤어진 날로부터 지금까지가 105일이니, 24시간 중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시간은 오직 잠에 깊게 골아 떨어 진 하루 7시간 정도(꿈에서 지호를 만나고 어쩌고 한 일은 그냥 제외하기로 하자)라면, 105 X 17 = 1,785시간 동안 그 생각만 했다. 이제 경우의 수는 다 들여다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자신의 치명적인 결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뭘까? 가수가 아니라서 라고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노래를 좀 더 잘했다면 그는 나를 더 놓치지 않으려고 했을까? 음악을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아니면, 아프지 않았다면?

  그림 그리는 것이 마냥 좋았던 청예가 전공을 디자인으로 정한 건, 졸업 이후 취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높은 빌딩 숲에서 그 건물들처럼 당당해 보이는 소위 '커리어 우면'이 되고 싶었다. 타이트한 H라인 스커트, 시폰 블라우스, 산뜻한 연두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스카프를 둘렀지만, 뉴요커처럼 스니커즈를 신고 불소처럼 출근 인파를 뚫고 지하철에서 회사 앞까지 걸어간다. 회사 안에서는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7센티의 하이힐을 신고 누구보다 섹시하고 당당하게 일하는 그런 모습 - 그리고 그게 그리 대단히 이루기 어려운 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름 학창시절부터 크고 작은 공모전에 입상하기도 했고, 동아리, 학과 활동에서 늘 적극적이어서 교수님을 비롯한 친구들은 청예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젊은 열정을 다름 아닌, 그녀의 몸이 감당해내지 못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졸업을 앞두고 밤샘 작업을 몇 주 째 계속하던 겨울 초입, 작업실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려는데, 상체에 날카로운 고통으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도 없었고, 스스로 천천히 이 고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목을 좌우로 돌려 보았다. 괜찮았다. 팔을 뻗으려는 순간 어깨와 팔꿈치가 직각으로 얼어붙은 듯이 굳어졌고,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이 따라왔다. 다행히 오른 쪽 팔은 괜찮았다. 무서웠다. 그래도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른쪽으로 간신히 디디고 일어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빠, , 팔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이리로 좀 와줘야겠어."

 겨울로 들어가려는 가을의 새벽의 싸한 냉기에도, 놀란 마음에 추운 줄도 몰랐다. 굽은 어깨와 팔위로 코트를 걸친 채, 아빠와 정형외과를 향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본 의사 선생님은 원인은 잘 모르겠으나, 관절 주위가 많이 부어있다고 말했고, 팔을 많이 사용한 적이 있는지 등의 단순한 질문을 했다. 그리고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 지리라며 붕대로 팔을 고정해 주고, 당분간은 사용하지 말라는 말로 돌려보냈다. 그 때가 시작이었는데, 그로부터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기까지는 손가락이 펴지지 않고 목이 돌아가지 않고, 온몸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 근육통으로 안 다닌 데가 없이 이 병원과 저 병원을 전전한 이후였다. 마침내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은 약을 먹은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개운한 잠을 잘 수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다. 너무 고마워 잊고 있던 기도도 했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의 완화는 잠시였고, 그로부터 시작된 소염, 진통제와 스테로이드 등의 장기 복용은 지금의 청예를 만들어 냈다. 푸른빛이 도는 하얀 얼굴과 나무 막대기 같은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나이 든 어린애 같은 느낌을 주었다.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지난 15년간 몸을 사용하지 않아 근육이 빠져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몸은 쉽게 피로해져서, 주말 이틀 가운데 하루를 제대로 쉬지 않으면, 주중의 평범한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 이런 약한 모습이 지호에게는 인생을 걸기 불안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평범하게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그리고 그 때 그도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던 것 아니었는가. 그 시원한 대답이 청예를 무장해제 시켰고, 그 다음부터는 영원을 향하는 일밖에 없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 -, -' 휴대폰 진동이었다.

  "여보세요?"

  "청예야, 뭐해?" 정원이었다.

  "쉬는데?"

  "산책하고 저녁 먹자, 나와라. 나 오늘 민희 만나는데."

  "그래? 그럼 잠깐만 그러고 있어. 내가 출발하면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청예는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주변은 캄캄했고, 정원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전화를 했다.

  "정원아, 나 깜박 잠들어서, 여태 잤어. 미안, 못나가겠다."

  "연락 없어서, 그런 줄 알았어. 담에 봐."

늘 그랬다는 듯 익숙한 친구의 반응이 고맙고, 편했다. 하지만, 지호는 이런 자신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청예가 일하는 곳은 유기농 제품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온라인 유통회사이다. 몸이 아프고 난 뒤에는 몸에 사용하는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이게 되었고, 그러다가 천연 재료로 만든 제품의 광팬이 되었는데, 우연히 구매하는 제품의 수입처에서 웹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그 때가 마침 대학원에서 웹디자인을 마친 직후 이었는데, 제품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청예가 정성들여 지원한 결과 낮지 않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가 결정되었다. 몸이 그렇게 된 이후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던 차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 순간이었다.

  <청예 씨, 재민 씨가 1층에서 기다리나 봐. 점심 뭐 먹을까?>

  옥경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몰라, 이탈리안? 자기는?>

  <그래, 그러자! 내가 예약할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우중충한 카키색의 야상 같은 것을 두른 남자가 구석에서 보호색을 띠는 곤충처럼 서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제출하실 서류는 다 내셨고요?"

  ", 점심 이후에 인수인계만 받으면 되요."

  "뭐 드실래요? 가정식 이탈리안 요리점이 근처에 있는데 어떠세요?"

  ", 좋습니다."

  활짝 웃은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옥경의 말대로 못나지 않았다. 덥수룩한 머리와 얼굴의 자르르한 기름기만 어떻게 한다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회사 근처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벌써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일부 기다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예약하길 정말 잘했네! 이 집 제법 잘된다."

  작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이 레스토랑은 자기네 텃밭에서 자란 야채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 밖의 모든 재료들도 원산지를 또박또박 칠판이 적어 문 앞에 걸어 두었다.

  "이 집 주인이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하다가 만난 커플이래요. 그래서 그런지 음악 선곡도 너무 괜찮죠?"

  "청예 씨는 이제야 좀 물먹은 꽃 같다. 출근했을 때는 팍 시들어 있더라니."

잔에 놓인 물을 마시며, 옥경이 말했다. 재민은 익숙하게 바구니에 주어진 냅킨을 각자에게 깔고 수저와 포크, 나이프를 올렸다.

  "재민 씨는 전에 어디에 계셨어요?" 청예가 물었다.

  "다온 게임에 있었어요."

  ", 거기 업계 연봉 1위잖아요? 왜 거기를 그만 두시고? CEO도 상당히 마인드가 진보적이라고 들었는데요? 너무 다른 분야로 오신 거 아니에요?"

  ", 즐겁게 일했고,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그만 뒀습니다."

  조곤조곤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싱글이시죠? 연봉이 좋은 곳이라니, 저축 많이 하였겠어요!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옥경이 물었다.

  "저축으로 작은 아파트 하나 마련한 게 다예요. 아직 짝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우와! 서울에서 아파트 마련하면 혼수는 준비되신 거네요! 저는 결혼 바로 앞두고 요즘 전셋집 구하려는데 죽겠어요. 초면에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호호호."

  그날 그 음식점까지 걸어오는 길에 코끝에 찡하게 불어온 봄바람이, 막 움트려 봉긋해진 목련의 꽃망울이, 그 때 음식점에서 흘렀던 베르디의 오페라 <여자의 마음>, 신선한 채소에 올라간 상큼한 오렌지 망고 드레싱과 루꼴라가 담뿍 올라간 마르게리따가, 아니면 이 전부가 마치 드라마의 세팅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점심시간이었다.

 

  옥경은 결혼식을 마치고, 휴직으로 들어갔고, 재민은 마치 늘 그 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출근을 시작했다. 청예를 제외하고는 옥경이 휴직이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업무에도 지장 없이 잘 적응해 나갔다.

  <최청예 씨, 정재민 씨, 10시에 회의실에서 봅시다.>

  사장님이 메신저로 두 사람에게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청예는 사이트 개편 건일 거라고 짐작했다.

  '또 올 것이 왔구만…….'

  일 년에 한 번 정규 사이트 개편 때마다, 웹 기획자들과 크고 작은 의견충돌도 귀찮은 일이지만 마감일을 맞추려다 보면 아무리 미리 준비한다 해도 야근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 즈음이 되면 진통제와 소염제를 최대한으로 먹는다 해도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 퉁퉁 부은 손목과 어깨로 마우스를 굴릴 힘조차 남지 않게 되고,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손가락 마디가 바늘과 송곳으로 찔리는 느낌이다. 목도 돌아가지 않고 어깨도 올라가지 않는다. 심지어 발바닥도 아파 큰 신발을 신고 출근을 하면 마치 미라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것 같다고 사람들은 웃는다. 웃지 못하는 건 청예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잘 모를 때이자, 이 병은 도대체 왜 나에게 왔느냐 묻는 때이기도 하다.

  이 병을 앓은 이래로 과거를 의심하는 버릇, 특히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다시금 되짚어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병이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성적표에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늘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라는 말이 빠진 적이 없었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남달리 ''이 될 만큼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외의 진단에 놀랐다. 기껏해야 남들도 다 겪는 수험 스트레스 정도? 그래도 혹시 놓치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과거를 되짚어 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이런 행동이 병을 만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병 때문에 이런 행동이 강화되어 결국 나을 수 없게 되는 것인지도.

사장님은 청예와 재민을 불러 가을 시즌에 맞춰 개편 일정을 맞춰 주었으면 하는 것과 요즘 사회의 웰빙 트렌드, 건강 이슈 등을 들어 온라인 구매자들의 수요를 잘 이끌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다 멀쩡해 보이는 것 같아도 실은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청예 씨도 맨날 아프다며? 우리 제품 쓰고 달라진 거 없나? 그런 거 있으면 우리 사이트에 수기로 좀 올리든지, 하하하"

  악의 없는 사장님의 농담이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서 마우스 질을 해대는데, 멀쩡한 사람이라도 아프겠지요, 사장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몸 아프게 해가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이 회사 제품을 사서 쓰고, 또 사기 위해 돈을 벌려면 더 아프고 이런 미련한 짓을 아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게 어이없는 현실이지만,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오후에 청예와 재민은 개편 건을 두고 만났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루 종일 이 사이트를 보고 살아서 그런지 이제 반성적인 회의가 도무지 들지 않아요. 오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뭐 아이디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의 첫 인상은 너무 이미지로 승부하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품에 자신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품 성분이나 효과를 더 어필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거 사실 늘 개편 때마다 시간이 부족하니까 디자인으로 커버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거죠 뭐. 전임 기획자 탓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현실적으로 시간에 비해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건 인정 하니까. 성분과 효과 별로 일일이 코딩 작업 다시 해야 될 텐데 가능하시겠어요? 저는 계획대로만 맞춰 주시면 디자인 할 수 있어요."

 "그럼 일정 정리해 볼까요?"

 

  사이트 개편 작업 시작한 지 벌써 3주가 흘렀다. 피로에 시체처럼 일어난 청예가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재민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직 덜 풀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때, 재민이 자리로 다가왔다.

  "아침은 드셨어요?"

  "아직요."

  "제가 뭐 좀 사왔는데, 회의실 가서 드시면서 회의할까요?"

먹을 거라는 말에 청예의 눈이 맑게 커졌다. 옥경 이래로 아침을 권유한 사람이 없었던 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최근에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진땀 것이 나고, 온 몸이 후들거리곤 했다. 그런데도, 가능하면 단 것보다는 음식에 준하는 걸 먹고 싶은 생각에 늘 점심까지 버티고 있다가, 꼭 쓰러지기 직전의 순간에 후회하면서 초콜릿을 입에 쑤셔 넣곤 했다.

  "그럼 그럴까요?"

  노트북과 회의 자료를 챙겨 들고 회의실로 갔을 때, 샌드위치와 커피가 테이블에 올려 져 있었고, 재민의 노트북은 이미 프레젠테이션 용 대형 스크린에 연결되어 있었다.

  "일찍 출근하셨나 봐요."

  "약간 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여기……."

  청예는 햄과 신선한 야채, 그리고 달걀 반숙이 잘려 들어간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먹었고, 그걸 재민은 바라보았다.

  "천천히 드세요."

  ", ……. 그럼 회의 시작할까요?"

살짝 당혹스러워하며 청예가 먹는 속도를 늦추고, 컴퓨터를 열었다. 재민은 그런 청예를 바라보지 않은 채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신이 작업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첫 화면에 많은 상품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건 좋은데, 상품 가치가 보존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내용을 조금 정리했어요. 감출 것들을 감추되, 찾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찾기 쉽도록 - 뎁스는 하나 더 생기지만, 유저에게 불편하지는 않을 정도로."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렇게 되면 디자인 들어갈 공간이 더 생기는 군요. 고급스럽게 이미지 넣으려면 공간이 좀 있어야 되서……. 근데 벌써 구조를 다 짜셨네요. 코딩도 끝내셨어요?"

  "코딩은 꾸준히 개미처럼……. 생각하신 디자인이랑 잘 맞나요?"

  ", 전 전부터 조금씩 작업을 해둔 게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걸 좀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거여요. 잘 하면 이번 달 내로 데모 페이지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검토 하시다가, 이상한 점 발견되면 알려 주세요."

  재민의 홈페이지 기획은 상당히 논리 정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군다나 가장 좋은 점은 다른 기획자와는 다르게 디자이너의 생각을 존중해 준다는 점이다. 이 업계에서 다양한 기획자들과 일하면서 초반에는 디자인과 색감에는 도무지 관심 없는 기획자들 때문에 팽팽하게 싸우곤 했는데, 벌써 10년 넘게 일하다 보니 결국 기획자의 눈으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그렇대도 점점 예민해지고 있었지만, 재민은 가능하면 청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참 일을 했다 싶어 몸을 움직이려다 보니,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이 굳어진 채로 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릎도 아프다. 얼마나 앉아 있었나 싶어 시계를 보니, 벌써 9- 사람들은 거의 퇴근하고 없었다. 불이 켜진 자리에 재민이 앉아 있다.

  "아직도 계시네요? 퇴근 안 하세요?"

  "가야죠. 전 가신 줄 알았어요. 오늘 퇴근이 늦으시네요."

  ", 유능한 기획자를 만난 덕분에, 오랜만에 재미가 붙어서요."

  좀 낯부끄럽긴 해도, 한번은 '고맙다'와 함께 칭찬을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민은 가볍게 웃었다.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면 제가 살게요. 아침도 사주셨는데."

  ", 그거 별거 아닌데……."

  청예가 회사 근처의 일본식 이자까야로 안내했다. 야근을 하고 나서 간단히 요기하기 위해 자주 오는 집이기도 했다

  "이 집 맥주가 온몸의 피로를 한방에 풀어주는데, 저는 오늘 운전을 해야 해서……. 재민 씨는요?"

  "저는 차가 없습니다."

  맥주를 시키자, 곧 차갑게 식힌 삶은 풋콩, 오이와 오크라, 다시마로 만들어진 쯔께모노와 그 위에 하늘하늘 가쯔오부시가 오른 순두부가 함께 나왔다.

  "어느덧 맥주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이러다 곧 엄청나게 더워지겠죠?"

  "그러게요, 요즘은 여름과 겨울이 너무 극단적이라 개인적으로 날씨 때문에 살기가 힘드네요."

  "저도 그래요. 몸이 약한 사람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요. 양은 냄비처럼 기온에 따라 빨리 끓고, 빨리 식고……. 혼자 사신지는 오래 되셨어요?"

  ",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 집 밥이 엄청 그리우시겠다! 제가 회사 근처 집 밥 하는 곳을 좀 알아요. 알려드릴게요."

왜 이 남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아야만 했을까를 생각하는 동시에 다음 이어갈 말을 찾으려 했을 때, 재민이 먼저 시작했다.

  "우리 홈페이지 작업은 지금 잘 되가는 건가요?"

  "물론이죠. 오늘 작업 분 디자인도 아주 괜찮게 나올 것 같아요. 내일 보시면 아실 거여요."

연어와 아보카도가 어울린 샐러드와 꼬치에 갈색으로 잘 구워진 닭고기, 아스파라거스가 마침 나왔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어서 드세요."

  마치 자기 집에서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듯이, 청예는 샐러드를 재민의 앞 접시에 덜어 주었고, 뒤이어 자신의 접시에도 담았다.

 

  사장님은 개편된 웹 페이지의 데모 버전에 무척 흡족해 했다. 앞으로의 호흡도 지켜보겠다, 두 사람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앞으로의 구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따로 지급 하겠다고 말했다. 입사 이래로, 이 정도의 호평까지 받은 적이 없었던 청예는 재민에게 고마웠고, 재민은 첫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음에 안도했다.

  <마침내 끝났는데, 우리끼리라도 파티 해야죠?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청예가 메신저를 보냈다.

  <전 다 괜찮습니다.>

  <그럼 금요일 저녁? 장소는 재민 씨가 좋으신 데로 가요. 늘 제 마음대로 했던 거 같아서…….>

금요일 하루가 더디게 흘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졌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 자신을 비춰본 청예는 깜짝 놀랐다. 아침 내내 신경 써서 골랐던 검정 원피스는 꼬깃꼬깃해졌고, 머리도 풀이 죽어 가르마에 딱 붙어 있는데다, 푸른 다크 서클과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쳐진 볼, 종아리는 탱탱하게 부어 있었다. 저녁 회식이 취소된다고 해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겠다 싶었다.

  '어릴 때는 밤을 샌 다음 날 아침이 청초한 듯 더 예뻐 보였지.'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재민에게 문자가 왔다.

  <어디 계신가요? 슬슬 퇴근해도 될 것 같은데요?>

  <곧 자리로 들어가요. 1층 로비에서 뵈어도 되고요.>

  <, 그럼 610분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회식인데, 당당히 둘이서 같이 사무실을 나가는 게 꺼림칙한 이유는 뭘까. 생각하며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재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아니오, 괜찮아요. 덕분에 전에 없이 사장님한테 인정도 받고요."

  "저도 덕분에 입사 후 첫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됐습니다. 차로 가시나요?"

  "아니오, 오늘은 차 안 갖고 왔어요."

  "여기서 두 블록 정도만 걸으면 되는 것 같아요. 걷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 오랜만에 안 신던 하이힐을 신어서……. 예전엔 운동화처럼 신고 뛰어다닐 정도였는데."

  "키 크신데도, 하이힐을 즐겨 신으셨네요?"

  ", 높은 신발 좋아하는데, 이젠 자주 못 신겠어요."

 재민은 청예의 좁은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전에 한여름 야근 후 맥주 한 잔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 떨어지면 바람에서 가을 느낌이 나요, 그죠?" 트렌치코트를 어깨에 걸치며 청예가 말했다.

  ", 이러다가 갑자기 또 추워지겠죠. 무슨 계절을 제일 좋아하세요?"

  "겨울이요."

  "추위 타신다면서요."

  "추운데 견디는 그 느낌이 좋아요. 살아있는 것 같고."

  "전 시작되는 봄이 좋아요. 그 작은 연두색 잎이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역시 연두색 좋아하시는 군요. 사이트 작업할 때도 눈치는 챘어요."

  "너무 개인 취향으로 일하나? 후후"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레스토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테헤란로가 펼쳐져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샴페인 한 잔씩 할까요? 술은 하세요?"

  "마음대로 정하셔도 됩니다. 저는 주로 맥주나 소주만 마셔서요."

  "그럼 제가 고를게요."

  청예는 와인 메뉴를 받은 뒤, 마담 포메리의 2013년 샴페인 선택했다.

  "프랑스에 상파뉴에 갔을 때, 이 집 지하 저장고에 만들어 놓은 샴페인 뮤지엄에 가 본 적이 있어요. 남편이 죽고, 아내인 마담 포메리가 사업을 더 확장시켜 나가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되었대요. 남편이 먼저 죽은 것은 안 된 일이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좋은 와인을 오늘 마시게 되네요."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마담 포메리 샴페인은 정말 없었을까요? 남편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같이 만들지 않았겠어요? 사람의 기질이라는 게 쉽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그래도 마담 포메리라고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을 거 아니에요."

  "물론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될 만큼 성공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적극적인 여성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남편의 생과 사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평소와 달리 많은 말을 하는 재민에게 놀라 벙벙해 있을 무렵 주문한 샴페인이 나왔다. 향긋한 포토 향의 탄산을 목구멍을 따끔거리며 지나갔다. 머릿속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근데, 왜 아직까지 결혼은 안 하셨어요?"

  "?" 갑작스러운 청예의 질문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재민이 머뭇거리다가 되레 물었다.

  "그러는 청예 씨는 왜……."

  "전에 만나던 사람하고 잘 안됐어요. 8개월 정도 연애 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인연인 줄 알았거든요. ,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그 많은 이별을 했었구나, 그랬어요. 어쩜 그림이고, 음악이고, 영화고, 취향이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정해진 짝이라고 생각했었죠. 후훗……."

  "그런데요?"

  "너무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더 잘 보려고 하지 않았고, 더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죠. 그는 기자였는데, 같은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와 장기간 공동 취재를 한다고 남미를 갔어요. , 2주 정도? 그녀는 저도 같이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실 정도로 친구처럼 지내는 동료였는데, 그 출장을 떠났을 때는 그냥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질투였던 건가? 아무튼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어요. 낯설었고……. 지금 생각하면, 원래 가족하고도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낯선 게 당연한 건데, 그 때는 그냥 그게 분하고, 밉고……. 이유 없이 한동안 화만 냈던 것 같아요. 정말 제가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 수가 없지만. 매일 뭔가 걸리기만 해봐라, 하면서 벼르고……. 그러다가 지쳐서 헤어졌어요."

  재민은 듣고 아무 말이 없었고, 청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기 며칠 전, 그의 집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었거든요……. 늘 꽃을 사곤 했던 노상 꽃집에서, 이상하게도 노란 들국화가 너무 예뻐 보이는 거여요. 그 샛노란 들국화를 한 다발 사다가 저희 사진이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 꽂았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거여요. 꼭 영정 사진 옆에 국화를 꽂아 둔 것처럼 말이에요. 꽃병을 다른 곳으로 치워놓고도, 마음이 한참 이상했는데, 나중에 헤어지고 나자, 그 날 그 꽃이 생각나는 거 있죠. 그리고는 왠지 안도감이 좀 들기도 했어요."

  "그 분을 정말 좋아 했었나 봐요."

  "? 왜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양갈비 스테이크가 나오자, 청예는 레드 와인을 한 병 더 주문했고, 기분 좋게 한잔 두 잔 무르익었다.

  "재민 씨는요? 연애했던 적 없으세요?"

  ", ……. 제가 연애를 잘 못해요……."

  "그럼 결혼도 생각 없으시고요?"

  ", 너무 행복해 지는 일이……. 좀 부담스러워요. 그냥 적당히 뭔가 불행해야 마음이 편해요."

  "그렇다면, 딱 결혼 하셔야 되는 데요. 결혼이 늘 뭔가 불편한 거잖아요. 후후후"

  "가족이라는 구도가 너무 완벽하잖아요. 부부와 그들의 자녀……. 그런 게 저랑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 한 번도요."

  "연애는요?"

  "연애……. 안 한 건 아니었어요. 좋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요. 아니, 사실은 너무 좋았죠. 그런데, 잘 되지 않았고,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된다고 하고……."

  "재민 씨는 상처가 되지 않았고요?"

  "저한테 상처는 괜찮아요. 저야 뭐……."

  "겁내고 계시는 거네요."

  "?"

  "저도 겁나요. 누구 만나는 거……. 적지 않은 나이에 정들었는데, '아니다' 싶은 생각 들면, 내가 또 뭘 한 건가 싶고……. 지난번에도 그랬고……."

  샴페인과 와인 한 병을 다 비운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그 때는 이미 10시가 넘어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살짝 어정쩡한 기분이 되어,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었을 때, 청예는 재민의 팔을 잡지 않고는 똑바로 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이 어디세요?"

  "…………."

  택시를 타자마자 청예는 재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택시가 재민의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여, 동 앞에 완전히 멈춰 서기까지 청예는 눈을 뜨지 않았다가, 내리라는 이야기에 잠시 정신을 차리는 듯 했다.

  "저희 집이에요.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저층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재민은 청예의 한쪽 팔을 부축하며, 5층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이끌었다. 문을 열었을 때, 유난히 지저분한 잡동사니들이 정신없이 취한 가운데도 청예의 눈에 띄었다.

  "잠시 여기 앉아 계세요."

  청예를 소파에 앉히고 나서, 재민은 물을 끓이러 주방 쪽으로 향했다. 청예는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재민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쏟아져다. 그리고 잠이 깨었을 때는 벽에 걸린 시계가 이미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재민은 침대 끝에 잠들어 있었다. 목구멍이 달라붙은 것 같았다.

  ', 머리야…….'

  두통과 함께 지난밤에 탐했던 모든 음식의 찌꺼기가 입 속에서 부패하여 역겨운 냄새를 풍겨냈다. 그리고 처음에 잠들었던 소파에서 자신을 안아 침대로 눕힌 재민과 갑자기 가깝게 다가온 그의 얼굴, 입술, 몸이 차례로 기억나기 시작했다. 주방으로 가 물과 컵을 찾으려 했을 때 마실 물을 찾을 수가 없어 수돗물로 입을 헹구고, 간밤에 자신을 위해 만들었음 직한 옥수수 티백이 들어있는 물 잔을 들이켰다. 갈증이 조금 가셨다. 맨발로 디디고 있는 바닥이 먼지로 끈적거렸다. 식탁도, 싱크대도 그랬다. 문득 자신이 마신 컵을 내려다보았다. 청예는 소리 나지 않게 자신의 물건을 챙겨 집밖으로 나왔다. 초가을 새벽바람이 어금니를 제대로 닫지 못할 정도로 추웠고, 뾰족한 청예의 신발은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낯선 새벽 거리를 깨우는 소리를 냈다. 큰 길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6시 무렵 잠에서 깨어난 재민은 이미 이곳에 그녀는 없음을 알았다. 주방으로 들어가 수돗물을 들이켰다. 빈 물잔 만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지만, 정신이 너무 선명하여 쉽게 잠들지 못했다.

 

  월요일 청예가 출근을 했을 때, 책상 위에는 희미하게 온기가 남아있는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과 하얀색 빵 봉투가 놓여 있었다. 재민의 자리 쪽을 바라보았을 때, 컴퓨터는 켜진 채, 사람은 자리에 없었다. 컴퓨터를 켜자 자신과 재민이 함께 만든 웹페이지가 화사하게 펼쳐졌다. 컴퓨터 화면을 내리고, 메일을 열자, 지난주까지의 웹 사용자 분석과 매출 상황을 알려주는 보고서가 들어와 있었다. 어쩌다 고개를 들었는데, 입구 쪽에서 재민이 자리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재민은 저쪽 편에 자리에 앉아 있는 청예를 보았다. 머리끝이 조금 올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깜짝 놀라 다시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앉았다.

  <커피랑 크로와상, 고맙습니다.>

  <.> 

  <잘 돌아가셨나요?>

이번에는 재민이 먼저 말을 붙였다.

  <.>

  <오늘 저녁에 시간되시나요?>

  <잠깐은요.>

  <그럼 퇴근 때, 차 한 잔 하시죠.>

  6시 반 즈음, 청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왔을 때, 이미 재민은 로비 입구에서 청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청예가 빠른 걸음으로 재민이 있는 쪽을 향했다. 자신을 향해 오는 청예를 보고 로비를 먼저 빠져나가 문을 열고 기다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각자 우산을 쓰고, 둘은 말없이 역삼에서 선릉까지를 걸었다. 퇴근길 오가는 거리가 상당히 붐벼, 우산이 부딪히곤 했다.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큰 창이 있는 커피 점 앞에서 재민은 잠시 멈춰 서더니, 여기로 들어갈까를 물어보는 눈짓을 했다. 청예는 대답 대신 먼저 발걸음을 내부로 향했다. 자리는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밖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에서 멈춰 서서 우산을 정리했다.

  "뭘 드시겠어요?" 재민이 물었다.

  "제가 살게요. 그날 실례가 많았던 것 같은데."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청예는 시나몬을 많이 뿌린 카푸치노를 원했고, 재민은 자신을 위해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두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사이 청예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재민의 말을 끊고 청예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을 못 차렸죠. 그리고 그 날 저녁 먹으면서 제가 떠들어 댔던 말들도 잊어 주세요. 프로젝트가 잘 되고 저녁을 먹어서 그런지 너무 흥분했었던 것 같아요."

  ", 청예 씨가 괜찮으시다면 저야 뭐…….“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너무 급하게 말한 것이 아닌가 싶어 청예가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운을 떼려 했을 때, 이번에는 재민이 말을 가로챘다.

  “그럼 너무 늦어지기 전에 일어날까요? 비도 점점 더 많이 오는 것 같고."

  "? , ……."

  "먼저 일어나시죠. 저는 마저 끝내고 나갈게요."

  재민이 마시는 커피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벌겋게 달아오른 청예는 두꺼운 유리문을 온몸으로 열고 급히 우산을 펼친 뒤, 차가운 거리로 사라졌다. 재민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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