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백일몽

by 줄기한마리 posted Apr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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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



그녀의 집은 산리(山里)거리의 가장 으슥한 곳에 위치애 있었다.
무수한 얼룩으로 그을린 가로등을 시작으로 그 주변은 밤 사이 왔다간 우범자들의 담배꽁초와 깨진 술병들이 악취를 풍기며 으스러 굴러다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용물 든 콘돔비닐까지도 버려져 있으니,아무리 세련되고 화려한 산리거리 1번가라 해도 그 골목만큼은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게 상책이었다.
그곳은 산리거리의 대로분수를 지나,차츰 조용해지는 북쪽구역의 어느 이자카야 가게 맞은편에 자그맣게 나 있는 작은 골목으로 시작되는 곳이었다.
산리거리에서도 가장 후줄근한 그 골목은 다세대 맨션이나 단독주택이 모인 맨션촌이었고,그녀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그녀의 하루는 녹슨 현관문에 비틀린 열쇠를 꽂아 넣는것으로 시작된다.그녀의 집은 골목에서 가장 첫 맨션이었고 1층이었다.
현관문은 암녹색으로 철제였고 도어락이 아닌 열쇠형식이었다.
그녀는 지친걸음으로 현관에 구두를 벗고 곧장 침대 맞은편의 붙박이장 문을 열어 가장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20평도 채 안되는 방 두칸짜리 집안에 유일한 붙박이장이었다. 서랍속에는 정리되지 않은,흩뿌려진 현금들이 쌓여있었는데 그녀는 그 속에 그날 벌었던 현금을 던져 넣는것으로 하루동안의 모든 긴장을 놓았다.
그렇게 쪽창으로 드는 햇살아래 코트를 벗고 단추를 푼 그녀는 어느새 알몸이 되어 꿉꿉하고 눅눅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맨션의 유일한 쪽창이 해를 드리우는 곳은 오로지 먼지쌓인 희끄무레한 방바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불면에 자신의 알몸을 부비적거리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려 하고 있었다.
누구도 없는 안식 속에 묻혀가는 그녀의 아침은 항상 그랬듯 짙은 어둠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결혼하자]

아득해지는 의식속에서 실낱같은 빛줄기가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메케한 밤냄새 사이에 퍼져,귓전에 맴도는 중저음은 그리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익숙하디 익숙한 그의 목소리였기에,언제나 등 뒤에서 기다려주던 그의 한마디였기에.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의 잔상을 뒤쫒았다.계속,계속,계속.
하지만 지독한 담배연기가,들끓는 알코올의 도수가,그에게로 가는 길로를 차단시켰다. 눈 앞에 움직이는 나방은 형체를 일그러트리며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웠고 곧이어 붉은 조명에 타죽어버리듯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그럼에도 그녀는 사라진 나방을 찾기위해 풀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중이었다.
"취했어?"
팟,하고 시야를 뜸과 동시에 익숙치 않은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물론 붉은 조명 아래에는 나방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내리쬐는 조명이 심하게 눈부셔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결혼하자]

독한 알코올과 끈적한 시선이 후덥지근하게 섞인 체온을 뒤틀리게 했다.
피부에 닿아오는 감촉은 서늘하고도 역겨웠다.그녀는 아무런 동요없이,그저 머릿속을 헤집던 말 한마디를 떨쳐내기 위해 이름 모를이의 욕망을 받아내기로 했다.

모든것은 어제부로 끝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12월11일.
그날은 간만에 포근함이 찾아온 날이었다.
하늘이 흐릿한게 눈이 올 날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다 나온 부시시한 갈색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며 커피를 가져오는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갈색머리를 짧게 친 헤어스타일을 가졌고,그녀보다 2살 연상인 남자였다.검은셔츠와 은회색 자켓을 걸친 그는 프렌차이즈 마크가 세겨진 컵 두잔을 들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크아웃용인 컵 두잔에는 축 늘어진 얼그레이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아메리카노가 각각 넘칠듯 담겨있었다.
그는 시원스런 이목구비 답게 시원스런 중저음으로 홀더를 잡으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날씨네"
그녀는 그와 8년을 알고지낸 사이였다. 그녀에게 있어 시우는 세상 누구보다도 편한 존재였다.
"응,이런 날은 하루종일 집에 있고 싶어"
그녀는 아직 피곤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묵직한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그런 그녀의 몽환적인 색기가 눈이 마주친 그를 당황하게했다는건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그와 그녀의 관계는 여러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는데.원초적인 가게 직원과 건물 소유주의 관계부터,연상연하를 뛰어넘는 둘도 없는 친구관계,가끔 기분이 이끌때면 함께 침대 위로 쓰러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게 둘만이 이어온 시간 속에서,그가 느끼는 한가지의 감정이 지금 이 자리를 비롯해 바깥으로 드러날려 하고 있었다.
창 밖을 돌아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그에게 괴리감을 느끼게 했고,오늘만을 기다려온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드디어 입밖으로 내뱉었다.
"세라야,우리 결혼하자"
오늘,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난 본연의 이유.
오늘이 지나면 이순간을 영영 잡을 수 없을것 같았기에,그는 오늘을 선택했다.
"나랑 결혼하자"
그녀는 한치의 거짓없이 진지하게 직면해오는 그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마주했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마터면 얼그레이잔 옆에 둔 휴대전화도 깜빡 할뻔 했지만,그녀는 잊지않고 핸드백과 함께 휴대전화를 챙겨 카페를 뛰쳐나갔다.시우는 그런 그녀를 잡지 못했다.그녀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그렇게 그는 아련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아주 잠시 놓아주기로 했다. 


그녀는 그 이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아무것도 떠올리기 싫었다.

'이제 그만 끊을 때가 된건가'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여 그가 쫒아오기라도 할까 현관문을 굳게 잠그고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
바깥에 있던 긴장이 풀리며 두 다리가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녀는 우연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칙칙한 화장대 거울 속의 자신을 허탈한 눈빛으로 훑어내렸다.그와 했던 시간들이 유독 길었던 탓인지,엊그제 일같은 8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그가 아쉽지 않았고,그 또한 자신을 아쉬워 하지 않았음 했다.이게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바램이었다.결국 그녀는 먹먹하고도 꽉 막힌 한숨을 토해냈다.복부 언저리가 어디 체한듯 딱딱하고 무거웠다.그녀는 그 감정이 '괴로움'이란 색을 지닌 감정이란걸 몰랐고,
그날은 눈이 오지 않았은,그와 마지막 만남이 됐어야 했던 11월의 어느 음습한 오후였다.






'그날의 포근했던 바람이 다시한번 뺨을 훑는다면'시우는 씁쓸한 담배연기를 입 안으로 삼켰다.
자신은 아마도, 그 날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 말을 했을것이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고,포기할 마음도 없었다.
단지 그녀가 외로워할 공백의 시간들을 자신이 달래줄 수 없다는게 늘 마음 저릿할 뿐이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연락을 거부하고 있었다..
메신저도,전화도,모든 연락수단이란 수단은 다 차단당해버렸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이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었다.
-후
목구멍까지 빨아들인 스모그를 골목 담벼락 위로 또 한번,올려보낸다.
그떄의 프러포즈는 결코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었다.
연약한 삶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그녀가 불쌍해서,아무것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그녀가 안타까워서.혹은 창 밖을 돌아보는 옆얼굴이 사무치게 슬퍼보여서...그는 동정,연민,정.따위가 아닌 8년간 품어왔던 진심을 그녀에게 부딪힌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함께 지내며,나날히 꺼져가는 그녀의 생기에 그것을 채워줄 수 없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던가.
빈껍데기처럼,숨쉬고,말하고,안기는...인형같던 그녀를 자신은 어느순간부터 사랑하고 있었던걸지도 몰랐다.
사랑이 있었기에 프러포즈도 가능한거였겠지만,그는 사랑을 떠나 그녀에게서 운명의 무언가,'연'을 느껴버렸다.
이 여자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크나큰 존재인지,자신의 뇌리 한켠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부여하고 있는지.
'넌 알고있을까'
해가 지면 일몰에 물든 흔적이 그녀의 새하얀 살결에 울긋불긋 피어오르고,따가운 조명 아래에서 아무것도 없는 눈동자가 춤을 추는 살색을 비춘다는게.
더이상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쌀쌀맞기만한 공기가 쓸고 간 지저분한 아스팔트 위.
온갖 쓰레기들이 전봇대에 기대 있고,해가 들지않아 살이 시렵기 그지없는 좁은 유흥가의 골목 사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가 그의 짧은 욕설에,입에서 떨궈낸 담배꽁초를 즈려밟는 비싼 구둣발에,아주 조금 드러나는 듯했다.그는 펌프질하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차가운 허공을 그려쥐어보기도 했고,시린 바람이 통과하는 잇새를 악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무용지물이었다.그는 계속해서 분노할 것이며,평생을 죄책감이란 형태 속에 절망해야했다.그러지 않고서는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용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또다시,그는 받지 않을게 뻔한 여자에게 초조한 전화를 걸어보고 있었다.

이날은 12월14일의 오후 한때.그의 뺨 위로 체온을 닮은 눈물이 흘러내린 날이었다.





무수한 성에가 방안의 유일한 쪽창에 내려앉은 밤.
가로등의 섬뜩한 주황빛이 뿌연 쪽창에 물감처럼 퍼져있는 밤.
잠들고 일어난 그녀의 손바닥에는 축축한 식은땀이 진득하게 베여있었다.
그녀는 개운치못한 시트 속에서 발치에 굴러다니는 속옷 한겹을 입기 위해 살 오른 몸을 바르작 거렸다.
그녀가 살고 있는 낡은 맨션에 창이라고는 침대 옆에 자그맣게 난 쪽창 하나뿐이었고,해가 들지 않는 1층은 낮동안 채광을 보지 못해 습기차고 콤콤했다.가끔 해가 든다해도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그 외는 언제나 어슴푸레하고 희언 그림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몇일 째 살냄새만 덮고 있던 이불은 숨이 다죽어 구깃하고 말라비틀어져 서늘한 겨울 공기를 허락없이 통과시키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오지 않아'
차가운 겨울바람에 잔뜩 어깨를 움츠린 12월 15일.
출근하지 않은 날의 썰렁한 방안에서 그녀는 되뇌었다.

'이제 그는 오지 않아'







"지금쯤 아이스크림이나 퍼먹으면서 티비보고 있겠지"
정곡이었다.새콤한 오렌지 무지개와 부드러운 레몬크림,핑크빛 무스 속에 속속들히 박힌 슈팅스타들을 건조한 입안에 넣고 있던 그녀는 오색의 메르헨을 느끼며 따뜻한 방안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가게에서는 최신 EDM대신 보사노바 비트를 틀어놓은 인호가 카운터 안쪽에서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인호는 그녀가 일하는 가게의 마스터였고 시우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의 무월세 세입자였다.
탈색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굵은 웨이브를 넣은 젊은 마스터는 전직 호스트 출신에다 지금 바 테이블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시우와 고등학교 동창생 이기도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6년이나 내 가게에 있었는데 자택방문 한번 안해봤을까봐,시우완 다르게 곱상한 미남형인 그가 보조개 들어간 눈을 찡긋 휘어보였다.
"그나저나 3일연속으로 안나오는건 매출에 지장이 큰데"
그녀를 걱정하는 시우를 뒤로하고,카운터 아래에서 장부적힌 공책을 펄럭인 인호가 크나큰 그녀의 존재에 아쉬움을 표명했다.
"그 애는 여기 오래있었기도 했고,그만큼 찾는 사람도 많으니까"
시우는 대답없이 술잔에 가라앉은 라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넓은 홀에서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보사노바 비트를 뚫고 두 사람에게 들렸다.
인호는 놀라 퍼뜩 공책에서 고개를 돌렸고 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머리를 괴고있던 시우는 곁눈질로만 파열음의 출처를 힐끗했다.
홀 중심에 놓인 소파에서는 손이 미끄러졌는지 직원여성의 몸에 술을 쏟은 남자손님이 난감한듯 어쩔줄 모르고 카운터의 인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는 깨진 유리잔 넘어로 보이는 남자의 추잡한 욕망에 쯧 하고 혀를 찼다.
"저 정도면 양반이지"
"들린다"
소파까지 닿지 않을만큼만 중얼거린 시우가 곧장 카운터를 나서는 인호를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갈려고?"
"바빠"
조명 아래 두 개의 노란 얼굴이 보사노바 비트에 맞춰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한쪽 팔걸이가 허전한 하얀색 스탠딩 의자는 주인을 잃고 허공만 빙그르르 배회했고,검게 썬팅된 유리문은 이곳에서 시우를 내보내기 싫단듯 한박자 늦게 거대한 입을 좌우로 벌렸다.
바깥에 나와 온몸으로 느낀 겨울은 환락가의 백야에 어울리게 후끈한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이제 막 진정한 아침이 떠오른 골목길 사이에서 단정한 오토록을 두드린 시우는 가게 옆 지정자리에 세워둔 자동차 운전석에 자신의 몸을 집어넣고 곧바로 차체를 출발시켰다.

 
[오늘 밤은 첫 눈이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돈 벌기 싫냐는 sns 연락에 그녀는 주저없이 차단을 눌렀다.
다 먹고 던져둔 아이스크림 통 옆에서는 어느새 자정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기상캐스터는 눈 덮인 전국지도를 부위별로 짚어가며 눈안개가 내일모레까지 이어질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뉴스는 곧 광고로 돌아갔고 문득 창밖이 궁금해진 그녀는 쪽창으로 다가가 펑펑 날리는 눈송이를 내다보았다.사람은 물론이고 자잘한 신문지 조각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는 암흑으로 둘러쌓여 괜시리 가로등 불빛을 소름돋게 만들었다.
"하?"
그 사이,산란되는 불빛 아래에서 녹색 마세라티 한대가 처절하게 눈을 맞으며 서있는걸 본 그녀는 헛숨을 내뱉았다.극도의 불안정증세처럼 그녀는 시선을 가만둘 수 없었고 오싹한 소름까지 뒷목을 타고 번지는 듯했다.
'설마'
황급히 현관문을 열어본 그녀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뭐하냐"
순식간에 차가운 한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올려본 그는 추위에 오래 노출되지 않은,지극히 평범한 혈색으로 멋쩍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안녕"
마음한켠으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또다른 한켠으론 괜히 열어줬단 생각도 들었다.그렇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어색해하던 기색도 잠시,
"들어간다"
태연스레 현관문을 젖히고 들어온 그는 본래의 말간 얼굴로 집주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말릴 틈도 없이 신을 벗는 그에게서 코트에 걸려있던 찬바람이 느껴졌다.
"왜 왔어?"
혹시나 해서 문을 반만 열은거였는데,어리석게도 체인을 걸지 않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그녀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는 그에 기분나쁘단 티를 역력히 내며 자신보다 한참은 큰 그를 삐딱한 자세로 쏘아보았다.
"왜 왔냐고"
"전화는 왜 씹어?"
방안을 둘러본 그가 뒤따라 들어오는 그녀에게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귀찮았고 상대하기 싫었다.그래서 가시돋힌 그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야"
"받기 싫으니까"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작정 안아오는 차가운 몸에 자연스레 팔을 감았다.얼굴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떨리게 했다.
"불 끌게"

두 사람은 어두워진 방 안에서 침대로 쓰러졌다.
코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졌고 맞부딪히는 입술의 차가운 공기가 따뜻한 체온을 빼앗았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입술은 달콤하고 말캉해서 그를 아찔하게 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옷을 벗었고, 말없이 몸을 섞었다.
간간히 들리는 신음만이 그들의 대화였고,서로의 질척한 땀만이 지금 이순간의 감정이었다.
키스는 수도 없이 거듭됐고 감각적인 손길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 위를 배회했다.
마지막에 내지른 그녀의 교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버린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가쁜 숨소리가 발가벗은 두 사람 사이를 나돌았다.
볼통한 엉덩이를 보인채 엎드린 그녀는 발치에 걸리는 이불자락을 지친 손으로 끌어 올렸다.
"씻어야지"
다정한 손이 식어버린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혼자 덮을 때는 말라붙어 얇았던 이불이 지금은 부드럽고 아늑해 미칠듯이 잠이 쏟아졌다.
"세라야"
"이제 가"
관계후 나른해지는 몸은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서 등을 돌린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껀데"
훅 치고들어오는 거친 말에 그녀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몽롱했던 정신이 지잉하고 울리는것 같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눈가에 차올랐다.
그는 상체를 세워 그녀를 내려보았다. 어둠속에 희게 보이는 얼굴 아래로 입술을 맞문 얇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울긴 왜 울어"
시우는 보이기 싫어 배게에 파묻은 그녀의 얼굴을 애써 돌리지 않았다.대신 그녀의 입까지 이불을 올리고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 받아들여야지"
"네가 뭘 알아"
울먹이며 하는 말이라 시우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소리내지 않을려고 악을 쓰는 그녀를, 그는 그저 한겹의 거리 넘어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후들거리는 여린 체온이,서럽게 흐느끼는 마른 목소리가.그동안 자신이 무슨짓을 했는지 재차 깨닫게 해주었다.
"운다고 되는게 아니잖아"
"좀 놔두라고!"
그는 팔 안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반항을 가볍게 억눌렀다.
"울게하지 않을꺼야"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뜨거운 입술을 가로막았다.
"네가 언제 울었다고 이제와서 엄살이야,8년간 마음대로 살면서 이정도 각오도 안했어?"
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엄격한 말 속에,말하는 이의 괴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울게하지 않겠다는 말은,그녀를 슬픔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눈물을 게워낸 심장에는 허탈함과 공허함만이 남을 테니까.
이기적이게,뻔뻔스럽게 8년을 털어버리고 가버릴려는 그녀를,8년이나 지켜봐온 그가 허락할 리 없었다.
설령 그녀가 이 자리에서 모든걸 울며불며 토해낸다 해도, 그의 체온을 느껴버린 이상 그녀의 옥죄이는 심장은 평생가도 죄의식에 허덕일 것이다.

오랜 세월을 참아왔던 대성통곡이 그의 손을 축축하게 적시고 베개에 스며들었다.
아픔이라기엔 아물수 없는 상처가 서러움만 잔뜩인 그녀를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했다.
"나쁜 새끼"
"더 나쁘게도 할 수 있어"
무자비 했던 8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자상하게 읆조린 그는 더이상 반항않는 그녀를 품 속에 끌어안았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깨져버릴까 두려운 그녀를,시우는 벌을 받을 각오로 끌어안았다.
그녀는 붉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작은 주먹을 숨결 아래로 쥐었다.
그날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리광을 부린 12월 16일.한 해의 첫눈이 내린 한밤중,서로의 의지를 확인한 정사 후였다.








낡은 맨션에서 살기 대신,번듯한 시우의 집으로 이사를 가는데 그녀가 가지고 간 것은 옷가지 몇 벌과 폭 50cm의 무거운 종이상자였다.그녀는  그 상자를 '판도라 상자'라 소개했고 그에겐 절대 열어보지 말란 주의를 당부했다.
"이건 절대 열지마"
그리스 신화에서도 그랬듯,몇번이나 옷장 깊숙히 넣어둔 종이 상자에 눈이 간 그였지만 끝내 손가락 하나도 건들지 않았다.
사람사이에는 누구든간 신뢰가 중요한 법이니까.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보여주겠지라는 기대를 걸어보는 그였다.
"가끔은 전화도 좀 해줘"
그녀는 밤일을 그만두고 시우와 혼인신고를 했다.
물론 그는 사업상의 이유로 여전히 밤업소를 들락거리고 있었지만,그녀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며,그 또한 그녀와의 신뢰를 무너트리는 일은 현재까지 만들지 않고 있었다.
원래가 돈 많은 남자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서류작성을 위해 훑어본 그의 재산 내력은 물직적욕심 하나없는 그녀가 봐도 놀랄 정도였다.
"왜,칼 맞을까 무서워?"
일명 '사채'를 징수하는 '제3금융권'의 사장이 자신의 남편이 될 줄은 아무리 그녀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이었다.
"그게 아니라...그냥 안부전화 말이야,남편이 나가있는데 안보고 싶냐?"
"칼 맞을까 무서운거 맞네"
그가 소유한 건물은 그녀가 일하던 가게 외에도 시내에 몇 군데가 더 있었다.
돈과 여자를 굴리는 사람이다 보니,그는 항상 수트를 입었고,차안이나 포켓에는 언제나 명함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코트를 받아드는 그녀의 손은 어느새 안주머니를 확인하는데 익숙해져 갔고,많은 종류의 수트를 종류별로 정리하는데에도 통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오늘 그가 입고 나갔던 블랙 수트 자켓은 옷장 맨 위쪽 행거에 걸어야 했다.
그녀는 무거운 옷걸이를 들고 조금 힘겹게 팔을 뻗으며 까치발을 세웠다.
"그럼 뭔데"
높이 뻗은 행거에,그녀의 뒤로 다가온 그가 대신 옷걸이를 걸어주며 까치발을 내리는 사랑스러운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사랑하니까"

절분이 지난 3월 24일.
그가 출장을 갔다온 이틀 사이 꽃봉우리를 터트린 목련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날이었다.

"얘가 왜이럴까"

아이를 낳는데 신분이 뭐가 중요해,
그 남자를 사랑했기에 가진거고,그 남자가 사랑했기에 태어날 운명인데.
문득 그와의 관계 도중,
느끼한맛 담배를 좋아하던 친구의 명언이 떠올랐다.
'유사(遊佐)'성을 가진 일본인 사업가 아버지와'이(李)'라는 성을 가진 한국인 서양화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를,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혈족의 족쇄에 속박해도 되는것일까,
"집중안해?"
혼전출산을 앞둔 그의 동생 내외,그 보다 3살어린 남동생을 그녀도 몇 번인가 만난적이 있었다.
만삭이던 와이프는 전 공무원이었고,앞으로 도련님이라 불러야할 그의 동생은 지명도 높은 미술감정사였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이,저도 모르게 움직임으로 드러나버렸다.
'아이를 가져야할 몸이 되는게 무서워'
4월 8일의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차가운 밤.
도심 속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자랑하는 최고급 맨션 최상층에서,그녀는 그 와의 관계를 거부했다.



-시어머니가 문제야?
봄비가 적시고 간 화창한 도보에 새하얀 유리굽 한 켤레가 세련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날 이후,한 집에 사는 남자와 묘한 거리감이 생겨버린 그녀는 간만의 외출로 축 쳐졌던 기분을 달래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본적도 만난적도 없는 시어머니를,과거 직장 동료이자 평생 친구인 희수에게 들으니 모처럼 평온해질려던 마음에 또다시 불쾌감이 이는것 같았다.
"그건 아닌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가 애매모호하게 말 끝을 흐렸다. 안그래도 지금 향하는 곳이 그 예술가 시어머니의 사랑(갈굼)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동생내외였다.출산한 동서에게 외출차 인사를 다녀오라는 남편의 반강제적인 심부름이었다.
무사히 퇴원한건 축하할 일이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니,그녀로써는 귀찮기만 한 외출이 아닐수 없었다.
-그 자식 무디니까,네가 말 안하면 너만 더 빡칠걸?
분명 느끼한 맛일터인 담배 한숨이 수화기 넘어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무디고 눈치없다는건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벌써 빡쳤어,인간이 눈치 없는것도 한계가 있지"
이렇게 그녀는,오늘 아침 기껏 일찍 일어나 아침준비를 할려했더니 오늘은 브런치 회의가 있다며 쌩하니 나가버리는 그의 만행까지 조잘조잘 씹어버렸다.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치미는게 울화라고,그녀는 일순 욕지거리를 내뱉았다.저쪽에서는 상상이 간다며 거대한 폭소가 터져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서서히 도착해가는 고동색 돔 지붕 주택에 그만 전화를 끝어야 겠다고 수화기에 일렀다.
-그래,정연이한테도 안부전해줘
세상이 좁다는게 이런말인지.
아직 골반도 붙지 않은 몸으로 반갑게 인터폰을 열어준 정연은 희수의 고향 동생이었다.
출산전이나 후나 앳되보이는 얼굴은 여전한 정연과 슬리퍼로 갈아신고 거실로 입성한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화과자 선물세트를 인사차 나온 가정부에게 넘겨주었다.
"아기 보실래요?"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대답도 안듣고 아기방에 들어간 정연이 입이 귀에 걸려라 활짝 웃으며 배냇저고리에 싸인 아기를 안고 나왔다..
척 봐도 성별이 구분되는 분홍색 배냇저고리에 속으로 그녀는 시어머니와 동조된 생각을 중얼거렸다.
'저러니 시부모가 갈굴 수 밖에'
피부가 백옥같은 공주님은 그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쏙 빼닮아 있었다.
한번 안아보라는 정연의 부추김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두 손에 소독약을 문지르고 아기를 받아안았다.
"이름은 하나예요"
본디 아기는 생물이지만 어느 적정기 까진 미생물이라 아니라 배웠거늘,그녀는 의외로 귀여운 것같은 미생물에 자신의 지론이 흔들리고 있다는걸 느꼈다.
'나도 늙은건가'
예로부터 애들이 예뻐보이면 늙은거라했다.



"애는 어떻든?"
저녁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들어온 그가 휴대전화를 콘솔에 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완전 네 동생"
정연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그러다 얼핏 그의 동생의 얼굴도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다 지나갔다.
그는 셔츠 단추를 풀며 '성격은 닮지 말아야 할텐데'라며 아직 얼굴도 안본 조카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낮,어색하게 팔 안에 안겼던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얼떨떨한게 전해지는것 같았다.
"그래서,넌 왜 아직도 표정이 그 따위야?"
자신의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났나,세탁물인 셔츠를 받아든 그녀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를 새초롬하게 올려보며 작은입을 오물거렸다.
"내가...네 애를 가져도 되나 싶어서"


공간의 경계가 끊어지듯.
뜨겁게 안아오는 숨결과 격정적이게 채워오는 사랑이 그녀의 몸 속에 꽃을 피웠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를 받아들인 뒤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읆조렸다.
그제야 마음을 연 그녀가,여태껏 아무말 없이 기다려온 그에게.
'이 순간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귓가에 내려앉는 입맞춤을 기억했다.
살결을 쓰다듬는 손길을 되뇌었다.
모든걸 바치는 그 눈빛에 답을 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차고,애달팠다.황홀했다.
4월 17일.아무것도 없는 밤.두 사람을 이은 영혼이 새파랗게 불타 없어진 날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가졌으며,남자는 아버지가 되었다.
입덧이 심했고,우울증을 앓았다.
괴로움 속에서 한 남자의 사랑을 기억한 그녀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아기랑 와이프랑 일본 갔데"
배가 부르기는 커녕 팔 다리만 붓는 지경에 의사도,본인도 착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한손에 휴대전화를 든 그녀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 다른 한손에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통화 상대는 희수였다.
집안에는 그녀 외 아무도 없었다.
"센님이지,가끔봐"
한 침대에서 어린 와이프와 어떤 잠자리를 할지,상상 안할래도 상상이 가는 그녀였다.
희수는 느끼한 담배맛을 길게 뿜어내고 키득거리는 수화기 넘어를 따라 피식 웃었다.
-진짜 웃겨.
친구의 비아냥,고향 동생의 퀘퀘한 정.
희수는 함부러 웃지못하는 자신의 입에 또 한번의 필터를 물었다.
-입덧은 괜찮아?
"벌써 5개월이야,거의 없어"
그녀는 희수의 다행이란 말에 진심이 느껴져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번 놀러와 그 사람 없을 때.튀긴 음식은 평생가도 못먹겠지만 그 외는 다 잘먹어"
매슥겁고 비릿한 기름 특유의 냄새가 집안에 들이서는 순간 그녀는 코와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가야 할 정도로 기름냄새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답지않게 편식을 하는 친구를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희수는 내일 그녀의 집에 놀러가면서 사갈 아이스크림 메이커를 머릿속으로 선별하고 있었다.
-그래,내일 들러볼께
마음이 맞았다.
마침 내일은 시우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없는 날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날 친구에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은 그녀는 곧바로 현관에서 들리는 도어락 소리에 일순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가라앉았다.
120평이 넘는 집안임에도 곳곳의 소리가 잘 울리는 이유는 2층까지 뻗은 높은 천장 때문이리라.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거실에 들어서는 그를 어정쩡하게 맞이했다.
"세라야"
그는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고 왜인지 무슨일이 있는 것처럼 운을 뗐다.
"일단 이거부터"

가을이 깊어지는 9월의 오후 한때.
시우는 어설프게 등만 세운 그녀에게 작은 상자속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는 출산 후 입게될 드레스에 가장 잘 어울릴 보석으로 골랐다며 반지가 끼워진 예쁜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평생 같이 있자"
행복해서 흐르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미소 한 줌이,약지에 걸린 보석보다 더욱 값진 그녀였기에.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목련이 흐드러지고 있을 3월 24일. 황량한 바닷바람은 아직 쌀쌀하고 날카로웠다.
"혼전출산이 뭐 대수라고"
이틀간의 출장을 끝내고 올라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동생과 나란히 바라보는 수평선은 어느덧 열오른 고개를 절반가량 숨기고 있었다.
그는 반쯤 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길다란 연기를 불어냈다. 
"어머니 눈엔 뭐가 들어와도 시원찮겠지"
본인이 아끼던 제자 아니고서야,예술가란게 원래 그런 종족이잖아,시우는 그런 진저리나는 부류가 자신의 어머니란 것에 혀를 찼다."브루주아로 커서 예술에만 둘러쌓여 살아온 사람인데,그게 싫어서 10년전 출가했던 시우를,소라는 짙은색 선글라스 넘어로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예외일껄'
누군가의 가늘던 손가락이 생각나,속으로 중얼거려 보는 소라였다.
평생 결혼이라곤 거들떠도 안볼것 같던 형의 혼인신고서에 아직 잉크도 안말랐을 그녀의 이름이 생각났다.
"형이야말로,그 사람이랑 같이 살 줄은 몰랐어"
희뿌연 스모그 속에 취해가던 그 몸뚱아리.
시스루 속에 감춰놓았던 아찔하고 야릇했던 속살을.소라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턱선은 여전해?"
그녀의 턱선을 잡아올린 손 마디가 일순 저릿했던게 생각난다.
시우는 매력적이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동생을 힐끗한 후 필터까지 탄 담배꽁초를 버리고 재밌단 콧웃음을 쳤다.
"네가 왠일로...."
말끝의 공백은 날카로운 눈빛이 대신했다.
그는 동생을 지긋히 바라볼 뿐이었고,소라도 가만히 형의 뒷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수려한 입술이 단조로운 한마디를 내뱉았다.
"여전해"
네가 섞었던 혓바닥도,맞부딪혔던 입술도.

여전히 붉고,색스러.




소란스러운 바다파도 뒤로 회의에 찬 물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때를 후회해?'
하얀색 벤츠에 내려진 운전석 차창 안으로 동생의 손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시우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먼저 가라고 길을 양보해주는 벤츠에 그는 사양않고 엑셀을 밟았다.
자신의 여자가 될줄 몰랐던 그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동생과 함께 올려보냈던 그날.
분명 그녀를 사랑했던건 훨씬 전부터 였을 터인데,어째서 자신은 그 둘을 말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야 뻔하지'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
낙엽이 떨어지기 직전의 11월 중순은 매년보다 이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 열지 않은 삭막한 거리를 지친 두 다리로 걷는 그녀의 하루는,낡은 맨션 붙박이장의 가장 아래쪽 서랍에 그날 번 돈을 던져넣는걸로 끝이 난다.
몽롱한 손길로 옷을 벗을떄면 희끗했던 쪽창에선 어느덧 아침해가 투과되고.
그녀는 새벽 안개가 묻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눅눅한 이불이 불쾌하단것도 느낄새 없이 잠 속에 빠져든다.
출근길은 언제나 일몰이 흥건했다.
바람아 차가워지는 계절,일을 마친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싸늘한 적막과 엉덩이 축 늘어진 아내뿐.그런 남자들을 비즈니스 상대로 삼는 그녀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한 남성에게 가느다란 시선을 보낸다.
남성은 깔끔한 수트를 입고 지적인 외모를 가진 30대 초반이었다.
그녀는 미안하다 사과하는 그에게 아니라는 짧은 목소리를 내고,정면에 부시는 일몰과 가장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내 멈추었던 구두를 또각또각 옮기고,뒤통수를 찌르는 시선이 인파속에 사라질때까지 조금은 빠르다 싶은 걸음을 걷는다.
"너 그러다가 예전엔 소매치기범도 잡았었잖아"
"경찰서에 진술하고 나오면서 진짜 웃었어"
그녀는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희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에 희수는 손뼉까지 부딪혀가며 폭소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녀가 같은 방식으로 핸드백을 감을려던 남성을 그 자리에서 굳어지게 만들어버린 사건을 떠들고 있었다.
그녀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겨서 말이 안나올 지경이었다.
"얼굴이 멀쩡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랬지,누가 설마 내 가방 훔치려던건줄 알았겠냐"
두 여자의 늘씬하고 매끈한 다리는 미약한 보일러가 틀어진 장판바닥과 갖빨래한 솜이불 사이에서 나태하게 녹아가고 있었다.방안은 그런 그녀들의 열띈 입수다 탓인지,미지근한 보일러 탓인지 계속해서 온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는 때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로 마스터의 sns알림이 동시에 울렸다.
[주아가 큰일났어]
요는,멋도 모르고 손님을 넣어준 마스터의 잘못이었다.
이러니 우리한테 미리 얼굴을 보이고 넣으라니까요.
곳곳에서 앙칼진 질타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아라는 아이는 아직 20대 중반 밖에 안된,다소 돈욕심이 강한 아이였다.
돈욕심이 많다해도 다른 언니들에겐 융통성있고 싸가지 있는 아이여서 가게 내에서도 적은 없는 편이었다.
그런 아이가 대학때 사귀던 전 남자친구를 손님으로 맞다가 온갖 협박과 혐오를 받았으니 그 정신적 충격은 오죽할 것이다.
남자도 상당히 질나쁜 놈이었으니까 이 사실을 대학 동기들에게 퍼트린다고 협박했던 것이겠지.
세라는 주아를 제외한 단톡방에 쏟아지는 비난을 성의없는 눈으로 훑어내려가고 있었다.
"한 두번도 아니고"
주아는 자기 방에서 울고 있고 있다한다.마스터는 그 옆에서 나름 달래줄려 노력하고 있다 한다.
희수는 채팅방 알림을 끄고 휴대전화 전원도 껐다.
[단체 파업각?]
이번에는 주아와 마스터를 제외한 대화방이 개설되었다.
마스터에게 썰풀이 대화방이 개설되었다는걸 들키지 않기 위해 두개의 대화방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희수는 그게 귀찮아서 휴대전화를 멀리 던져버린듯 했지만,
"단체 파업하자는데?"
"나쁘지 않네"
방안의 보일러보다도 훨씬 더 끓어오르는 대화방이었지만, 하룻밤 새에 들어오는 돈이 아쉬웠던 그녀들은 충동적인 단체 파업계흭을 흐지부지하게 끝내버렸다.
"주아는 몇일 쉴껀가봐"
"그 자식이 알면 당장 그만두라 할텐데"
희수가 말하는 그 자식은 시우를 말하는 것이었고 세라도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애가 예쁘니까 놔두겠지"
"둘이 했데?"
"했다던데,마스터가"
일순 풉 하는 웃음소리가 요동치는 이불 위로 터져나왔다.




[저녁 먹었어?]
17학번 법학과동기 회식중 sns알림을 확인한 민호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물론 동기들의 엄청난 눈총과 심문을 받아야 했지만 민호는 다음에 설명한다 둘러대고 재빨리 고기집을 나와버렸다. 
청년은 후드티에 묻은 숯불 냄새나 흘러넘치는 맥주 냄새를 빼기 위해 그녀가 부탁한 햄버거 세트 종비봉투를 들고 금요일 밤의 산리 거리를 몇 바퀴나 산책했다.
그러고나서 어느정도 냄새가 빠진거 같자 청년은 곧장 시우의 가게 계단을 부리나케 뛰어올라 갔다.
"뭘 그렇게 뛰어와"
어둠이 내려앉아 더욱 눈부신 11월 20일의 밤.
청년이 뛰어오른 계단 끝에는 그토록 갈망하던 첫사랑의 그녀가 난간에 팔을 기댄채 그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배고프실까봐"
환락가의 백야가 시작될 시간.
청년의 '차민호'란 이름이 그녀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기를 약 일주일.도심의 높은 빛 같던 그녀에게서 선톡이 날라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청년이었다.

건물은 총 3층이었고,그들은 2층의 가장 끝방으로 들어갔다.가게는 1층과 2층만을 사용하고 있었고,1층은 홀,2층은 개인실이었다. 계단은 새카만 유리문으로 막아놓은 홀 바깥쪽으로 연결되어 있었고,그 계단이 2층으로의 유일한 통로었다.
2층의 모든 방에는 호수가 붙어있지 않아서 청년은 그녀의 방을 왼쪽 세번째 방이라고 외워버렸다.
그녀가 왼쪽 세번째 방을 지나쳐 가장 구석방으로 자신을 안내했을떄,청년은 부끄럽지만 아주 조금 실망했었다.
실망 보다는 놀랬다는 표현이 더 가깝겠지만 청년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지난 기억에 일순 귀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여긴 우리가 쓰는 휴게실이야,아무도 안올꺼니까 편하게 있어"
직원 휴게실은 계단 왼쪽 세번째에 있는 그녀의 방보단 좁았으나,있을건 다 있는 곳이었다.소파 한개와 테이블 한개,벽걸이 티비와 그 밑의 단상,갈색 장판인 방은 보일러가 틀어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펼쳐진 이불도 있었다.
방안은 그녀의 말대로 아무도 없었다.
"바쁜데 부른건 아니지?"
"아닙니다"
청년은 예상외로 너무나 잘먹는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전체적으로 마른 몸을 가지고 있는 그녀여서 햄버거를 사오라 했을때는  의외였다.막상 먹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의외인것이.한 두입 먹고 버릴줄 알았는데,감자튀김까지 다 긁어먹을 기세였다.
물론 민호는 회식 중간에 나온거였기 때문에 니글거리는 패스트푸드가 쉽사리 입에 들어가진 않았다.하지만 그는 1L짜리 콜라와 함께 손에 들고있던 빵조각을 집어삼켰다.그때였다.아무도 들어올일 없다던 휴게실문이 느닷없이 벌컥 열리더니 청년도 곧잘 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나와"
청년은 패티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릴뻔 한걸 겨우 삼키고 벌떡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넌 왜 여깄냐"
방안을 휘익 뒬러본 시우는 꽤나 기분좋게 취해 있는것 같았다.
그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청년을 돌아보았다.
"따라와,소개시켜줄께"


닫히는 휴게실 문틈 사이로 느릿하게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는 그녀가 보였다.
청년은 시우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 조명이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 남자를 만났다.
"인사해,내 동생이야"




혹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부르라며 '마술감정사 이 소라' 라고 적힌 명함을 받아버렸다.
그녀에게 소장중인 미술품 따윈 당연 없었다.
"한가할때 밥먹자고 부르는건?"
"그때 그떄 다르겠죠"
고급재질로 코팅된 명함을 앞 뒤로 팔랑여본 그녀가 피식 웃으며 명함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럼 필요없어"
바 안이 한바탕 남자들의 웃음으로 시끄러웠다.
1층 바 홀은 트러블이 발생한 직후임에도 변함없이 평소와 같은 분위기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목과 유려한 손가락으로 눈 앞의 빈 잔에 입구가 찰랑거릴 정도로 술을 따라주었다. 손짓 하나에도 시선을 끄는 그녀의 관능미에 잔 속에 쌓여있던 얼음이 녹아났다.유리잔을 두드리며 몸을 굴린 얼음들은 그녀에게 홀린 남자들을 한차례 깨워줄려는듯 맑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은 테이블 위를 울렸다.



성격나쁜 키스,취향을 알 수 있는 스킨쉽.
"처음은 아닐텐데"
시간은 빨랐다.
멈춘듯한 어둠속에서 계단을 밝고 올라오기까지.
얽혀드는 키스로 성격을 알 수 있었고,질척하게 엉키는 살덩어리로 이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형 만큼이나 멋진 남자였고,여태까지 상대한 누구보다도 않좋은 취미를 갖고 있는 남자였다.




여자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물줄기 떨어지는 욕실에 울려퍼졌다.
소라는 자신의 골반과 맞닿아있는 가느다란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그 아래의 움푹패인 골짜기를 또 다른 한손으로 쓸어내렸다.그녀의 피부는 미지근한 샤워물임에도 차갑게 식어있었다.그의 손끝에는 그 차가운 피부가 여리게 떨고있는 감각이 투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만해"
군데군데 남아있는 손자국은 새하얀 살결 위에 선홍빛 꽃을 피워놓은 듯했다.그런 육감적이고 탐스러운 흥분제 앞에서,어찌 남자가 자지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그래,형?'
살풋 미소지은 소라가 그녀의 귀에 들리도록 매끄러운 등에 탄탄한 근육을 겹쳤다.
"그렇지?"
"뭐라는 거...."
익숙치 않는 곳을 침범당하는 이질감이 얼마나 아플지는 소라도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정을 향해 달려가는 허리짓은,벽을 붙잡은 그녀의 손끝을 하얗게 질리게 했고,버티고 선 두다리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서툴게 속살을 조으는 그녀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교성이 아닌 거친 숨소리 섞인 신음일지라도,그는 사랑스러운 그녀의 가슴을 만져주며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아요,금방 끝내줄테니까"
한계에 다다른 몸집이 남자를 포기하고 무너져내릴려 했다.
하지만 허리를 받쳐드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그녀는 꿈쩍도 못한채 짖궂은 남자의 성적욕망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자비,배려.
이런게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부터 인간으로써(여성이기 이전에)의 수치심도 건들지 않았겠지.
그를 만족시키지 않음 안되는 그녀는 1분1초의 괴로움을 신음으로 토해내며 어서 빨리 정사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고생했어요"

마지막 추삽질 끝에 새하얀 백지가 그녀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아랫배가 아릿하도록 깊숙히 찔렀다 빼는 마지막 감각에 그녀는 허전함을 느껴버린건지,아직 식지 않은 남자의 욕망을 벌름거리는 본능으로 감칠나게 붙잡아 버렸다.






"다 이런거야"
이제 쉬어도 된다는 부드러운 음성이,격한 관계에 지친 그녀를 녹아내리게 한 11월 20일.
그녀가 따라놓고간 독한 술을 입에 머금으며 시우가 읆조렸다.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에게,기나긴 밤이 될 오늘의 이순간에게.
취해가는 밤공기가 그의 눈빛에 지긋히 닿자,술을 넘긴 그 입꼬리가 또 한번 호선을 그리며 건조한 읆조림을 흘려보냈다.
"다 이런거야"

그날 밤,그녀가 기억하는 것은,격렬했던 정사 끝에 맞춰오는 짧은 입맞춤과 그 입술이 지나갔던 엉덩이 끝의 적나란 흔적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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