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산책
내 앞에는 업소용 하얀 도마가 있다. 그 위쪽 토핑 냉장고에는 사각형의 스테인리스 통이 여섯 개 들어 있었고 하나의 통마다 김밥 재료가 들어가 있었다.
20대 여자 한 명이 와서 김밥 두 줄을 포장해달라고 한다. 위생 장갑을 낀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위생 장갑을 낀 상태에서 보냈다. 대형 밥통에서 하얗고 고슬고슬한 밥을 한 주먹 쥐어 옆에 있는 김에 살짝 댄다. 그러면 김이 밥 밑에 붙는다. 그 상태에서 김발로 가져온다. 김 위에 놓인 밥을 옆으로 한 번, 위로 두 번, 아래로 두 번 망설임 없이 쓱 밀어주면 알맞게 펼쳐진다. 거기에 토핑 냉장고에 나란히 담겨 있는 익힌 당근, 햄, 맛살, 달걀 지단과 데쳐 놓은 시금치, 단무지를 착착착 넣고 돌돌 만다. 단단해지도록 꾹꾹 눌러주고 참기름을 바른다. 이제 칼로 써는데 썰 때의 소리와 느낌은 어쩐지 포근하다. 그런 다음 조각난 김밥에 참깨를 뿌린다. 그다음 그것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향해 힘을 주면서 들어올려 접시에 보기 좋게 담으면 끝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님이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나는 기분좋게 못 들은 척하며 호일에 능숙하게 싸서 까만 봉지에 담아준다. 2천 원을 받은 후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한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자꾸만 나를 건드렸다. 그동안 나는 이 계절이 시작될 떄마다 이 유혹을 이겨야 미래에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착하고 밝은 햇빛을 일부러 미워하고 질투했었다. 나의 생활은 나태했지만 정신력은 강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많이 지쳐 있었다. 나의 정신력은 강력한 자연의 유혹을 이겨낼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즉흥적으로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3~4인용 은박 돗자리와 연두색 3단 도시락통을 주문했다. 다음 날 그것들은 도착했고 실물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집에 있던 청색 백팩에 지갑과 책, 휴대 전화, 생수 등을 넣었다.
오랜만에 대낮에 집밖으로 나가보는 것이다. 너무나 환해서 얼굴이나 옷차림이 다 드러나자 다시 움츠러든다. '지금이라도 집에 들어갈까, 괜히 나가서 눈치만 보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더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가 방금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50번, 2-3번 버스를 타면 한번에 갈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 벽에는 버스 노선이 빨간 줄로 표시된 지도와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내게 별 흥미를 주지 못했다. 벤치가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서서 왔다갔다했다.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갈까,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번에는 버스 도착 정보를 보여주는 단말기로 가서 화면을 보며 내가 기다리는 버스 번호를 찾았다. 50번 버스는 두 정류장 전에서 깜박이고 있었고 5분 후에 도착한다고 써 있었다. 2-3번 버스는 12분 후였으니 이건 더 볼 필요가 없었다.
날씨가 좋았다. 도로를 보니 쉬는 날인데도 승용차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잔디밭에 앉아 시원한 나무 그늘과 따뜻한 햇빛에 반씩 감싸여서 김밥을 먹을 상상으로 매우 흥분했었다. 하지만 막상 나오자 '그것들을 혼자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승용차에 가족들을 태우고 같이 가는 게 진정한 소풍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버스가 좀더 늦게 왔더라면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거고 부정적인 생각이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50번 버스가 눈에 보이고 말았고 나는 타겠다는 의미로 앞으로 좀 걸어나갔다. 버스는 내 앞에서 치익 소리와 함께 앞문을 활짝 벌렸다.
빈 자리가 몇 개 있었고 뒤쪽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회 앞에서 어깨 띠를 두르고 주보를 나눠 주고 있는 교인들, 작은 화분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꽃가게, 극장이 있는 건물, 사람으로 꽉 찬 시장 등이 보였다. 이런 구경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왠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속이 조금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소위 말하는 멀미의 증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시내 버스 조금 타고 멀미를 하는 인간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심지어 앞에서 날 보고 있는 것만 같은 파란색 의자 등받이한테도 창피했다. 더 큰 문제는 버스를 30분은 타야하는데 이제 10분도 안 지났다는 것이다. 어쩄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식혀주었다.
그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얀 선으로 구획된 공간에 빼곡히 들어찬 차들을 보니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주차장은 오전 10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만차였다. 아침 일찍부터 놀러간다고 설렜을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차장이 아닌 도로가에도 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딱딱한 보도블록이 넓게 깔린 광장을 지나니 파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호수 앞의 펜스로 바짝 다가가서 물을 구경하고 냄새를 맡았다. 잔잔한 바람에 청록색 잔물결이 일렁였다. 햇살이 반사되어 수면이 아름답게 반짝거렸고 공기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나들이를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호수에서 눈을 돌려 산책로를 바라보았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아이들, 아이를 안은 아빠, 유모차를 끄는 엄마, 손잡고 다니는 연인을 볼 수가 있었다.
어디가 좋을지 찾아보았다. 일단 돗자리를 깔고 짐을 내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 것은 언제나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산책로를 따라 가면서도 내 눈은 오른쪽의 풀밭을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돗자리는 아직 많이 깔려 있지 않았다.
산책로와 풀밭 사이에는 회양목 울타리가 경계를 짓고 있었다. 내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참나무 밑에 그늘진 풀밭이 오늘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 왔다. 다리를 한껏 들어올려 울타리를 넘어갔다.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고 약간 으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어쨌든 빨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고 싶었다. 발을 사용해 땅을 평평하게 고른 후 초록색 파우치에 김밥처럼 들어가 있는 은박 돗자리를 꺼내 펼쳤다. 크롬색 코팅지가 햇빛에 반짝였다. 으슥하긴 해도 멀리 호수가 보였다. 호수 끝에는 푸른 나무들이 조그맣게 보였고 거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나는 심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몹시 출출했다. 도시락만 맛있게 먹고 가더라도 나들이를 온 목적은 일부 달성한 것이다. 나는 하루종일 김밥만 먹으라고 해도 흔쾌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래서 김밥을 세 종류나 싸는 것도 귀찮지 않았다. 나들이객들 중 아무도 밥을 먹고 있지 않지만 나는 도시락통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참치 김밥이 자태도 아름답게 누워 있었다. 나무젓가락 포장지를 벗기고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참치와 그 위에 얹은 마요네즈, 그것들을 감싼 깻잎 맛이 기본 재료들과 합쳐지니 씹을수록 식감도 다양하고 깻잎 향까지 퍼지면서 한층 더 고소했다. 김밥 옆에 호일에 감싸여 있는 그것은 아직 열지 않았다. 그것은 후식이었다.
후식은 조금 있다가 먹기로 하고 도시락통을 닫았다. 이제 조금 누워 있고 싶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주위를 좀 둘러본 후 돗자리에 똑바로 누웠다.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돗자리 밖으로 나가서 편하지가 않았다. 돗자리의 크기는 180cm*120cm였으니 긴 쪽으로 누우면 내 키를 다 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 머리 위쪽에는 생수병과 도시락통과 가방이 있었는데 그것을 옆으로 치우고 위로 조금 올라갔다. 이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언뜻언뜻 보였다. 햇빛은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양손을 배에 올리고 이 평온함을 음미했다. 눈은 감고 귀는 열었다. 잠시 후에는 귀까지 닫히면서 머리의 중앙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어깨와 다리가 먼저 뜨고 맨 마지막으로 엉덩이가 조금씩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정말로 올라가버릴 것만 같아 순간 무서웠기 때문이다. 곧바로 양손을 머리 아래로 넣어 베개를 만들었다. 또 무릎도 굽혔다. 발바닥이 돗자리과 맞닿으면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건 사실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 굵은 몸통 끝에 매달린 참나무 잎사귀 수를 세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숫자를 세다가 갑자기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들어 눈가가 촉촉해졌다. 관자놀이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 뒤에서 양손을 꺼내 양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손가락과 관자놀이가 물기를 나눠갖었다. 몸을 왼쪽으로 돌려 새우처럼 누웠다. 양손을 머리 뒤로 돌려 깍지를 끼고 양팔을 귀에 붙여 얼굴을 가렸다. 양팔의 그늘 속에서 눈속의 눈물이 비워질 때까지 소리없이 쏟아냈다. 시원한 바람이 다가와 돗자리를 밀어 올려 이불을 덮어주고 가버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고래가 숨구멍에서 물을 뿜듯 물줄기 하나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수증기가 점점이 흩어지면서 신비로운 물안개가 떠다녔다. 분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양옆에 있는 여러 개의 분수노즐에서도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처음에 솟았던 가운데 물줄기가 가장 높이까지 올라갔고 양옆의 물줄기는 그것의 반정도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샤워하는 수양버들 같은 물줄기가 여러 개가 되었다. 대낮이라 그런지 조명은 켜지 않았다. 물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수면이 파닥거렸다. 여러 개의 분수가 줄을 맞춰서 물을 뿜으니 사람이 줄을 맞춰서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듯했다. 시원한 물방울이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사람들은 차갑다고 피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말없이 사람과 물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분수쇼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질 때쯤, 모든 물줄기가 최대의 힘으로 일제히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까지 머리에 퍼부어졌다. 장관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너무 궁상이었다. 가방 속에 든 것들 중에 무겁거나 아무도 안 가져갈 것 같은 것은 꺼내놓고 지갑과 전화기만 남겨둔 채 그것을 어깨에 멨다. 돗자리 밖에 얌전히 놓여 있는 운동화도 신었다. 나는 그곳을 떠났고 주인이 떠난 돗자리는 쓸쓸해보였다.
그곳의 양옆으로는 꽃사과나무가 서 있었다. 여러 개의 빈 자전거 거치대가 있고 자전거는 세 대가 있었다. 사람이 대여해주는 곳도 있었지만 나는 기계가 더 편했다. 거치대 옆에는 네모난 화면으로 청색 빛이 어렴풋이 비치는 무인 단말기가 있었다. 일일구매권은 천 원에 90분 동안 이용할 수 있었다. 알맞은 버튼을 화면에서 찾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마침내 결제가 되었고 하얀색 안장과 체인 커버가 똑같이 달린 자전거들 중에 방금 선택한 10번 자전거로 갔다. 거치대 옆에 달린 단말기에는 잠금 장치와 자전거 앞바퀴가 연결되어 있었고 파란색 불이 켜져 있었다. 단말기의 버튼을 누르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가 풀렸다. 거치대에 꽂혀 있던 자전거가 뒤로 힘을 주자 빠져 나왔다.
안장에 엉덩이를 대고 페달을 밟았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능숙하지 못했다. 바퀴가 제멋대로 꼬이고 발이 페달을 놓치고 장난 아니었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많은 구역이 나타나자 자전거에서 내려 한적한 자전거 도로까지 끌고 갔다. 가운데에 하얀 선이 그어진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 자전거 손잡이를 꽉 잡고 다시 자전거를 탔다. 맞은편에서 자전거가 나타날까봐 조마조마했다. 느린 속도로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속도를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도로는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 모양으로 그늘이 나 있었다. 그 밑을 지나가면 터널을 지나가는 것마냥 즐거웠다.
아름다운 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늘로 쭉 뻗은 메타세쿼이아들이 양쪽에서부터 입체적으로 뻗어나가다가 저 멀리 보이는 한 점에서 모였다. 나는 의장대를 사열하는 국가수반이었다. 겨드랑이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돌 하나 없이 평평한 길을 의기양양하게 달렸다. 나무들이 양쪽 귓속으로 사라졌다. 즐거운 속도감에 몸을 실었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귀가 아파왔다. 나는 돌연 무서움을 느끼고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메타세쿼이아 옆으로 갔다. 숨이 찼다. 자전거는 나무에 기대어 놓고 나는 풀밭에 풀썩 주저 앉았다. 심호흡을 했다.
난 역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체질에 맞았다. 즐거운 속도감은 무슨. 다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앉아 있으니 다시 안정감이 차오른다.
시계를 보았다. 자전거를 빌린 지 30분이 지나 있었다. 여기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자전거 도로를 벗어나 보도블록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왔던 길까지 갈 때는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다시 만나는 자전거 단말기가 반가웠다. 원래 있던 자리에 앞바퀴를 고정시켰다. 친구 같던 자전거가 없으니 허전하면서도 가뿐했다.
넓은 공터에는 비둘기들이 모여 있었다. 어린이 전동차를 탄 남자 아이는 커브 운전 중이었다. 꼬마 아이가 씽씽카를 타고 내 앞을 쌩하고 지나갔다.
나무의 그늘은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돗자리의 아주 작은 부분만 어두울 뿐이다. 대신 눈부신 빛이 돗자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돗자리 끝부분이 접혀 있고 돗자리 위로 잎사귀와 지푸라기가 올라와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서 손바닥으로 돗자리 위를 쓸었다. 발을 쭉 뻗고 앉아 생수 뚜껑을 열고 물부터 마셨다. 생수통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다리 위에 얹었다. 치즈 김밥과 호일에 싼 방울 토마토와 딸기가 먹음직스러웠다.
나무젓가락을 꺼내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돗자리 위에 앉아 있는 햇살의 귀퉁이도 같이 씹었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단무지의 시큼하면서도 짠 맛도 느껴졌다가 맛살의 감칠 맛도 느껴졌다가 햄의 불 맛도 느껴졌다가 당근의 딱딱함과 기름진 단맛도 느껴졌다가 시금치의 질기면서 건강한 맛도 느껴졌다가 묘한 냄새가 나는 듯한 치즈 맛도 느껴졌다. 마지막에는 모든 재료가 합쳐져 풍부하고 따뜻한 맛이 났다.
시선이 양말 신은 발가락으로 향했다. 발가락을 괜히 한번 꼼지락거렸다. 발가락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때 오른쪽에서 작은 움직임이 감지됐다. 일본왕개미 한 마리가 햇빛의 조명을 받아 더없이 화려해진 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내 영역을 침범한, 아니 내가 그것의 영역을 침범한 걸까, 아무튼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그 작고 까만 생명체가 나는 반가웠다.
그것이 곧장 간다면 내 발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것에게 내 발은 커다란 바위나 설산처럼 보일까. 나는 쭉 뻗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개미가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얀 양말 앞에서 약간 머뭇거렸다. 나는 개미가 올라오면 싫을 것 같으면서도 발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개미는 그것이 자기를 공격할 수 있는 인간의 발이라는 걸 몰랐을까. 그것은 땅에 닿아 있는 발뒤꿈치를 통해 발등으로 올라섰다. 그 발걸음이 피부까지 닿을 정도로 자극을 주진 못했는데도 나는 괜히 간지러워하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발가락 맨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정상까지 올라간 후 그것은 제자리에서 돌며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방향을 정했는지 개미는 발바닥 쪽으로 내려갔다. 발바닥은 투명한 물체가 아니었으므로 개미가 발바닥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목 근처에는 피부와 바지 안감 사이에 깜깜한 동굴이 형성되어 있었고 개미가 청바지 속으로 들어가지나 않을까 긴장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처졌다. 그래서 발을 마구 털었다. 개미는 유유히 돗자리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양팔을 그 위에 얹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이 회양목 울타리를 보고 있었다. 조금 고개를 드니까 산책로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 뒤에는 스테인리스 펜스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펜스 사이로 아까 보지 못했던 광경이 보여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배 한 척이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배에는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기린처럼 쭉 늘어뜨렸다. 그는 호수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을 뜰채로 걷어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는데 그게 뭐라고 그것은 오늘 본 것 중에 제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 배가 지나가고 난 뒤 나는 무언가가 호수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고 점점 형체를 선명하게 갖추며 물 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내 손은 휴대 전화로 향했다. 통화목록을 저 아래까지 뒤져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통화를 한 날짜를 보니 6개월 전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수화기 아이콘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조금 망설였다. 그러다 갑자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같은 김밥 집에서 일했던 그 친구는 참 예쁘고 성실했다. 엄밀히 말하면 친구가 아니라 동생이었다. 두 살 어렸으니까. 갑자기 신호음이 끊어졌고 나는 숨을 멈추었다.
“웬일이에요? 잘 지냈어요?”
상대방은 쿨한 척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의 통화가 어색한지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그냥 "여보세요." 했으면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랐겠지만 상대방이 질문을 해주어서 나는 말을 꺼내기가 수월했다.
“나야 잘 지냈지. 넌 어때?”
“잘 못 지냈어요. 누구 때문에. 의리 없이 갑자기 그만두다니. ”
“무슨 말이야? 니가 먼저 그만뒀잖아."
“그냥 이틀 빠진 것 뿐이예요."
"이사 간 거 아니었어?"
"이사가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요?"
"그랬구나. 난 니가 그만둔 줄 알고......"
하지만 분명히 그때 서영이는 내 전화를 안 받기도 했다. 6개월 전 통화기록에 번호가 남아 있는 것은 내가 그 번호로 발신을 했기 때문이지 통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기 사이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금 어디에요?”
서영이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나? 그냥 좀...... 어디 가고 있어."
한동안 전화기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넌 어디냐고 묻는 게 순서 같았지만 멍한 상태였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어요.”
서영이가 말했다.
“그래. 잘 지내.”
전화를 끊어야 숨을 제대로 몰아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전화 통화 갑자기 끝내기 선수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난데 그걸 받아준 사람에게 바쁘니까 끊으라는 태도를 취하는 게 나였다. 고의는 아니었다. 그냥 통화 내내 숨이 차서 어쩔 수가 없었다.
"끊을라구요?"
"아, 아니. 니가 끊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내가 지금 뭐하는 중이라서요, 나중에 통화해요."
“그래, 알았어. 나중에 봐.”
“네.”
밤 10시가 되어 퇴근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아마 내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서영이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나는 움찔했다. 서영이는 내게 뭘 물어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는 아랑곳없이 서영이는 내게 집에 가면 뭘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인터넷 좀 하다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새벽 2시쯤 침대에 들어간다고 말이다.
“그럼 우리집에 가서 놀래요?” 나는 뭔가를 먹고 들어가자는 제안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나는 내 집을 남에게 보여주는 걸 싫어해서 누구에게도 그런 것을 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님 뭐 먹고 갈래요?" 애교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나는 내일 보자고 말하며 서영이의 등을 떠밀었다. 그 친구는 앞으로 두 발짝 떠밀렸지만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나는 길거리에서 실랑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를 그곳에 그냥 놓아두고 집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 친구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저녁 퇴근길에 서영이에게 "너네 집에 놀러가도 돼?" 라고 물었다.
집은 멀지 않았다. 서영이는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걷다가 한 오래된 건물의 출입구로 들어섰다. 보통은 지나가면 센서등이 켜지던데 이 건물의 계단은 계속 어두웠다. 서영이는 2층 복도를 지나 맨 안쪽 집에 멈추었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스테인리스 싱크대가 보였다. 설거지는 되어 있지 않았다. 좁은 주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거실이 있었다. 거실은 청소가 안 된 것은 아니었지만 깔끔하다고 할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하늘색 담요가 구석에 구겨져 있었고 식탁이 없는 대신 동그란 양은 밥상이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거실 한쪽에 빨래 건조대가 세워져 있었고 빨래가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거실 벽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화장실 문이었고 하나는 방이었다.
방 문은 열려 있었고 안은 어두웠다. 창문은 없었고 이불이 펴 있었으며 옷장과 5단 서랍장이 벽쪽에 붙어 있었다. 또 작은 티비가 2단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왠지 속삭여야할 것 같아 작은 목소리로, 뒤에서 거실 바닥을 쓸고 있는 서영이에게 니 방이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할머니 방이라고 말하고는 쓰레받기를 베란다로 가져가 쓰레기 봉투를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보니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고 주인 아주머니와 대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방 안을 살펴보았다. 뭔가 께름칙했던 것이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이불의 구겨진 형태가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건 느낄 수가 있었다. 크게 튀어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길쭉한 형태로 불룩해져 있었다. 갑자기 이불 위로 손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나는 거실에 앉아 혼자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있는데 초대를 왜 했지가. 불편할 게 뻔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영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기는 자기 집이고 가족이니까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서영이는 거실 구석에 구겨져 있는 이불 밑에서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켰다. 그 전에 할머니가 보고 계셨는지 볼륨이 매우 컸다. 나는 놀라서 볼륨을 작게 낮췄다. 서영이는 뭘 만들어 주려는지 주방으로 갔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뭘 한단 말인가. 편하게 말도 못하고 속삭일 거면 왜 남의 집에 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1분 정도를 흘려보냈다. "야, 나 가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영이는 "왜요?" 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급하게 신발을 신으며 그곳을 나왔다.
다음 날 서영이가 김밥집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서영이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매일 보기 때문에 따로 전화를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려면 알 수는 있었다. 김밥집 주인 아주머니는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전화번호는 모르면서 집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집에 찾아가볼까 생각했었다. 어제는 내가 무례했었다며 사과도 할겸.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보통, 좋은 일 때문에 결근을 하지는 않으니까 무슨 일이 있다면 안 좋은 일일 것이다. 안 좋은 일이 있다면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서영이의 집앞에서 서성였다.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창문에는 아까부터 불이 켜 있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라기보다는 여기까지 온김에 2층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고 그냥 무슨 소리가 들리나 현관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살짝 노크를 해봤다.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일은 나한테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옆집에서 문을 열고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그 집 오늘 이사가는 거 같던데." 아주머니가 말했다. "혹시 여기 사는 여자애 전화번호 아세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죠." 나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친구가 없으면 난 아무도 없없다.
나는 다음날 김밥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어 서영이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러고는 점심 시간이 지나 한가한 시간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가 서영이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서영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 김밥집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부터 나는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이기라도 한듯 갑자기 이곳이 지겨워졌고 내 집이 그리워졌다. 빨리 가서 쉬고 싶었다. 여기선 쉰 게 아니었다.
주차장은 아침보다 비어 있었다. 승용차를 끌고 나들이를 왔던 가족들은 집에 가서든 집에 가는 길에 음식점에 들러서든 온가족이 둘러앉아 맛있는 저녁을 먹을 것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들처럼 자가용을 타고 가고 싶었다. 버스에 타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섞여 가고 싶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벤치에 있었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4명이 꽉 차게 앉아 있었다. 버스 한 대가 왔지만 내가 탈 버스는 아니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50번 아니면 2-3번을 타야 했다. 도시락통은 오른손에, 초록 파우치는 왼쪽 어깨에 있었다. 도시락통은 처음보다는 가벼웠지만 완전히 가볍지는 않았다. 소고기 김밥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는 앉아서 갈 수 없었다. 별로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아팠고, 자리가 난다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니까 괜찮을 줄 알았던 멀미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행여 전화번호가 바뀌었으면 어쩌지 걱정했었다. 언젠가는 다시 연락을 할 것이다.
멀미 때문에 어질어질하면서도 어디선가 들리는 휴대 전화 알림음에는 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저마다 전화기를 들여다봤지만 모두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럼 내 알림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의 앞지퍼를 열어 전화기를 꺼냈다.
“지금 밥 먹을래요?”
나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알림음은 내 것이었다.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내게 관심은 없었다. 나는 정말 쓰레기인 것 같다. 오늘은 더 이상 연락이 없을 줄 알았던 그 친구의 연락이 뛸듯이 반가우면서도 한편, 답장을 하기가 귀찮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원래 답장을 빨리 보내는 편은 아니다.
어쨌든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밥은 집에 가서 혼자 먹고 싶었다. 격한 감정은 하루에 한 번이면 족했다. 두 번 반가우면 심장에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곤란해. 좀 멀리 있거든. 그나저나 할머니는 잘 계시니? 아까 못 물어봤는데.”
답장이 엄청 빨리 왔다.
"잘 계세요."
"아까 못 물어봤는데, 너 근데 왜 이사 간 거야?"
"궁금한 게 많나본데 그냥 만나서 물어봐요."
"아니 지금 만나기는 좀 그렇" 글자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또 문자가 왔다.
“뒤를 봐요ㅋㅋ”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쪽을 둘러보았다. 버스 맨 뒤칸 구석에 전화기를 귀에 대고 미소를 짓고 있는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