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미스트

by 평강공주 posted Apr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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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미스트

 

정기 복용일이 다가왔다. 나는 메모리 캡슐을 손에 든 채 멍하니 망설이고 있다. 창밖엔 비가 퍼붓고 있었고 먹구름의 잿빛이 밀려든 방안은 컴컴했다. 이따금 빗물이 창틀을 때리며 부서졌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박자에 맞춰 공기가 진동했다.

레인미스트 향초에 불을 붙였다. 막 달걀에서 부화한 색깔로 따뜻한 불꽃이 방 안을 밝혔다. 주홍색 불빛이 동굴 속의 곰처럼 웅크린 내 그림자를 짙게 깔았다. 흔들거리는 촛불과 무너지듯 녹아내리는 밀랍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서서히 퍼지는 달달한 향을 맡았다. 색감 탓인지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으니 이제 캡슐을 복용해야한다. 거부감이 드는 일이라면 의식 하지 않는 편이 수월하다. 나는 생각을 잠시 접고 눈을 꼭 감은 뒤 손바닥을 입에 털었다. 곧바로 물을 들이키자 캡슐은 허공에서 낙하하는 구름처럼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뜨거운 체내 속에서 약효는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작됐다. 기억들이 복기된다.

십 년간의 기억들이 재차 인식되었다. 순서는 순차적이었다. 회사에서 암기해야할 사항들 사이사이에 전 남편인 서진 아빠와의 기억들도 회상되었다. 점점 기억 복기가 진행될수록 온 몸의 구멍이 모두 열린 듯 땀이 흘렀다. 복기 진행은 점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만두고 싶었다. 목젖을 잡아 뜯어 모두 게워내고 도중에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신열이 올라오면서 용암 속에 떨어진 쇠구슬 같이 달궈진 몸속에서 약효는 이미 나를 그 기억 속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 하얀 실루엣이 나타나고 이목구비가 그려진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 우리 천사가 웃고 있다. 세상 어떤 미소도 이처럼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세상을 두 동강 내는 절망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다. 아이의 미소는 바람에 날린 잿더미처럼 분해된다. 악몽 같은 기억이 재구축되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가해 차량은 탑재 된 인공지능 기능으로 자동 운전 시스템이 가동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운전자는 시트를 뒤로 빼 놓은 채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가 도로에 갑자기 뛰어내려 왔을 때 거리는 너무 가까워 인공지능은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갑자기 도로로 뛰어 내린 아이를 피해 사람들이 북적이는 인도로 핸들을 돌리느냐, 아니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효율적인 측면을 고려해 핸들을 그대로 두느냐였다. 비상사태 속에서도 인공지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속히 계산을 마쳤다. 합리적이고 운전자의 정신적 피해 척도까지 고려한 결과였다.

아이는 입원하는 과정도 건너뛰었으므로 나는 병원보다 법원에 더 오래 있게 되었다. 재판이 열렸고 보행자 과실 비중이 더 컸다. 운전자는 위로금이랍시고 아이의 법적 보호자인 서진 아빠에게 돈 얼마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 돈은 위로에 위로를 얹어 내 통장에 위로금으로 입금되었다. 아이를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세상은 잠시 흑백 영상 속에 멈춰있는 허상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아이의 침대에 엎어져 불어난 통장의 액수를 확인하는 순간, 아이는 그저 은행 컴퓨터를 떠도는 억만 경의 숫자 중 하나가 되어버렸구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메모리 캡슐이 끌고 온 기억 복기가 끝나면 그대로 널브러져 잠에 빠졌다. 한 바탕 태풍이 몰아쳐 내 혼과 정신이 한 손에 움켜쥐어진 채 내던져진 아득함에 떨어졌다. 아무런 의식은커녕 꿈조차 내 안에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껍데기만 인간인 모습으로 방바닥에 버려져 있게 된다.

 


아침에 눈을 떠보면 정아 언니의 문자 메시지가 와있다.

-살아있니?

나는 바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잠시 허리를 세워 앉아 고개를 꺾어 보았다. 뻐근함이 몰려왔다. 초는 모조리 타 녹아있었고 방 안은 레인미스트 향과 내 땀내가 뒤엉켜 여름철에 뿌린 향수 같은 부조화의 냄새가 났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데 비는 밤사이 그친 모양이다. 창틀에 고여 있는 빗물에 소매가 젖었다. 내 눈도 밤새 호수에 담가 놓은 듯 눅눅하고 습했다. 잘못 건드리면 찢어져 버릴 것처럼 온 몸 구석구석이 약해져 있었다. 다시 무릎에 힘이 주저앉으면서 느낀 충격으로 확실히 살아는 있음을 확인했다.

-응 언니. 일단은

-초는 남았니?

답장이 빨랐다.

-아니. 다 썼어.

-아주 집에 불을 지르는구나. 기다려. 퇴근하는 길에 부쳐줄게.

집에 꾸준히 오는 택배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부치는 메모리 캡슐인데 나는 그 박스만 봐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시 복직해서 출근하기 위해선 억지로 복용해야만 했다. 반찬 투정 같은 어리광은 사회에선 통하지 않는 법이니까. 메모리 캡슐 없는 인간이란 구닥다리 AI보다도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는 바로 정아 언니로부터 오는 향초였다. 향은 항상 레인미스트, 그 한 가지만 보낸다. 포장지에는 검정색으로 그은 빗줄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표현하였고 알록달록한 무지개 우산 삽화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소개 문구로는 비가 오는 아침의 상쾌한 향기라고 적혀있었다. 사실 레인미스트란 땅에 떨어진 비가 증발 과정에서 수증기로 상승하려는 찰나, 수분이 찬 공기와 만나 얼어붙어서는 안개로 굳어지는 자연 현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따져 봤을 때 눅눅하고 서늘한 향이 날 것 같은 향은, 의외로 달달하고 따뜻했다. 정기 복용일에 그 향초를 함께 피워 놓으면 조금은 나아졌다. 잠긴 냉동 창고 안에서 고작 성냥 하나 그은 작은 불꽃이었지만, 딱 그만큼의 안식마저도 내겐 참혹한 기억 복기 과정에 맞서 함께 싸워주는 존재였다.

정아 언니는 레인미스트를 망각의 향이라 불렀다. 언니는 흐린 날에 대기를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뿌연 안개와 같이, 그렇게 내 기억 역시 용해되는 얼음이 물방울이 되어 구름 너머로 사라져 잊어버리길 당부했다. 그러나 기억의 상처가 비통할수록 그 흔적은 한때 위대했던 유적지와 같은 것이다. 찬란했기에 더 초라하고, 앞으로의 나날들로는 다시 세울 수 없는 돌조각들이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구는 그런 못 쓰게 된 기억들의 폐허.

게다가 메모리 캡슐을 복용하는 한 나는 기억 속 유적의 궁궐에 아이의 무덤을 안치해두고 정기일이 될 때 마다 새로운 슬픔으로 통곡할 것이다. 나는 그 약을 끊을 수 없을 테니까. 오늘 같은 시대에 망각이란 도태와 같은 말이니까. 복용을 중단한다는 건 낙오와 패배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날짜가 되면 캡슐을 집어 삼켰고 기억 복기가 일어나는 내도록 방바닥을 바퀴벌레처럼 기어 다니다 잠이 들어버릴 것이었다.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어둠의 숲을 떠도는 젖은 수증기에 불과하고 사방팔방 높은 나뭇잎들에 가로막혀 하늘을 평생 보지도 못할 슬픔은 끝내 증발될 수 없을 것이다. 허공에 걸린 물방울은 바닥에 고이지도 흩어져 사라지지도 못한 채 떠돌 운명이다. 한 번 일어난 일이란 요즘 세상에선 그런 의미인 것이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망각이란 단어가 환상이 되어버린 시대가 오늘이다.

 


몇 달 후 나는 복직 의사를 회사에 알렸다. 몸 상태가 호전된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나아질 기대가 없었으므로 일상으로의 복귀를 강행하기로 했다. 복직 첫 출근은 엉망이었다. 오랜 폐쇄 생활에 길들여진 몸이 사람들이 북적이는 지하철에 제대로 적응 못한 모양이었다. 이마에서 뜨거운 땀이 흘러 화장이 녹아내렸다. 호흡이 불편해지고 허벅지도 땀이 배기 시작했다. 공황장애 초기 증상 같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사람들은 슬금슬금 내 주변을 피했다. 나는 결국 다음 역에서 도망치듯 내렸다.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냈으나 공복인 탓에 끈적거리는 희멀건 위액만 올라왔다. 지친 걸음으로 역으로 나와 보니 내려야할 역보다 다섯 정거장이나 앞에서 내렸다는 걸 알았다.

지상으로 올라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만큼은 정말 타고 싶지 않았지만 사정이 급했다. 인공지능 자동 운전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택시는 목적지만 말해주면 도로 교통 정보를 분석해 최단 경로로 안내해준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 상태가 심각한 듯 했다. 작은 커브에도 뇌가 젖은 걸레를 쥐어짜는 기분처럼 지끈거렸다. 참지 못하고 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때 택시가 갑자기 멈췄다. AI가 날 취객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게 인식된 이상 기계와 오해를 풀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결국 회사까지 걸어가야만 했고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데다 말도 못 붙일 만큼 창백한 내 얼굴을 본 동료들은 걱정보단 공포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회사에서 무슨 사고라도 일으킬까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복직 후 얼마간 착실히 일을 잘 해냈다. 동료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나를 지켜봤고 이젠 인사정도는 형식상이라도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서진 아빠가 찾아왔다. 구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그동안 눈에 띨 만큼 늙어버린 서로의 얼굴을 지적했다. 그런 가벼운 빈정거림과 카페인을 들이키고선 서진 아빠가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말했다.

서진 엄마, 나 어쩌면 진짜로 우주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 회사에서 추진하는 우주 탐사 출장에 발탁만 된다면 말이야. 정말 화성에 다녀올 수도 있어. 당신도 알지? 내 꿈이었잖아.”

확실히 그는 체통에 안 맞게 티 없이 들 떠 있었다. 서진 아빠는 직접 인공지능 제조업에 속하는 고등 지식 직군에 속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그 때문에 서진 아빠는 나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메모리 캡슐을 복용해야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는 건 아이의 미소와 그것이 갈가리 찢어지는 장면을, 낚싯대에 걸린 행복이라는 미끼를 물자 바로 불행의 육지로 끌려 올라가는 그 끔찍한 기억 복기 과정을 나보다 몇 배는 더 거쳐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진 아빠는 지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잘됐네. 아예 화성에서 살지 그래.”

왜 그렇게 까칠해?”

당신 좋아 보여서. 평소에 잘 웃나 봐. 나는 그러질 못하거든.”

서진 아빠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의 대화는 평소에 무언가가 남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저 안부나 묻고 앞으로의 계획을 주고받는 그런 대화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서진 아빠의 미소가 마지못해 웃는 것 같이 보이고 커피 잔을 쥔 손이 살짝 떨릴 때 나는 그가 어딘가 사력을 다해 매달려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기어이 입술로 가져간 커피 잔이 치아와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 그의 튼 손등 위로 힘줄이 팽팽해졌다. 침묵이 이어지면서 우리의 대화엔 무언가 남았다. 나는 나대로 피폐해진 일상을 공개해 버린 것이었고, 서진 아빠는 서진 아빠대로 나로 인해 꿈이라는 파우더로 덧칠한 슬픔의 민낯을 확인하게 된 시간이 되고야 말았다. 우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는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선 남은 잔을 비웠다.

기억이 복기될 때 스쳐간 십 년간의 기억 속에서 서로는 늘 보아왔던 얼굴이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더라도 친근함은 무뎌지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는 깨졌으며 이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최적의 결론이란 사실도 명확하게 남아있었다. 깨어진 관계는 다시 이어 붙여봤자 금 간 모습만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에 빗줄기 같은 빗금을 그어 왜곡만 일으킨다. 서진 아빠와 나는 가벼운 인사로 가벼운 관계로 다시 돌아와 각자 헤어졌다.

 


다시 정기 복용일이 찾아왔다. 나는 종교 의식을 치르듯 향초를 방 안 곳곳에 두었다. 정해진 위치에 놓는 다기 보단 쓰러졌을 때 머리카락에 불이 붙지 않을 곳에 두곤 한다. 초 하나에 조심스레 불을 놓는다. 첫 번째 붙은 작은 불꽃은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뺏어 온 불처럼 신비롭게 일렁였다. 그 새로운 문물처럼 레인미스트의 불꽃은 내게 지혜를 줄 것이다. 망각이라는 지혜를. 하지만 캡슐의 힘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로서 어떤 믿음과 의지마저 벗겨버릴 정도로 강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결국 나는 또 한 번 심장과 온 장기를 파 먹히고 빈껍데기만 남은 채 방 안을 굴러다닐 것이다. 창밖엔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복기가 시작됐다. 머릿속에서 책장 넘어가듯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간다.

 


상태는 나아지지 않으면서 회사 생활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다. 꼭 정신 어딘가에 굳은살이 딱딱해지는 것처럼 안은 말랑하고 겉은 푸석푸석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점심을 거른 채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정아 언니가 비타민 음료를 거넸다.

일 계속 할 수 있겠어?”

대답은 무조건 예스여야만 한다.

해야지, 어쩔 수 있겠어.”

이미 어떤 분야든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다. 그게 설령 바닥을 닦는 청소 일일지언정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는 있으나마나 한, 마치 너무 뻔한 정답만 눈에 들어 와 다른 보기들이 안중에서 사라지는 현상인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쪽 업무는 다른 부서나 다른 직장에 비해 비교적 쉬운 일에 속하는 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을 제작할 때 필요한 하드웨어 부품을 납품 및 발송을 처리하는 담당인데 그 부품의 수는 일분이 지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사실 그 많은 부품을 기억하는 일은 인간의 순수한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류가 살아가는 배경이 바뀌게 되면 거기에 맞춰 인류의 역할을 해내는 인간들 역시 라이프스타일을 어울리게끔 바꿔야 한다. 그렇게 로봇이 아닌 잔존한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도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 둥근 지구를 굴리는 것은 더 이상 은하계의 거대한 공전력과 자전력이 아니다. 화성과 금성에 관제탑을 세우고 로켓을 쏘아 보내는 아주 소수의 천재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 그나마 지구를 인공지능의 손에 빼앗기지 않고 아직까지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점점 더 높이 올라가 태양에 닿으려는 이카루스가 되어가는 반면에 여전히 삶의 미로에서 헤매는 나 같이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과학자들이 보기에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힘차게 뻗어 나가는 인류의 물줄기를 가로막는 바위덩어리처럼 보이지나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메모리 캡슐이라는 걸 발명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 작은 알약은 복용만하면 암기력을 서너 배, 혹은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는 열 배나 가까이 증폭시켜 준다. 기억 복기 구간은 짧은 삼사년짜리도 있어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위한 용품도 있었다. 나는 십년 차여서 십 년용을 먹었는데 그 십 년이라는 구간에 들어가 있는 모든 기억들까지 줄줄이 딸려오는 것이다. 그건 내게 아이를 떠나보낸 후 박힌 가시를 뽑는데 심장이 함께 뽑혀져 나가는 일이 되고 말았다.

당시 메모리 캡슐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회사에 도입되려하자 그 캡슐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충분한 임상 실험 과정도 없이 급하게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는 말로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들은 두려웠다. 인공지능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 결국 노동 계층에서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에 위기를 느꼈던 탓이다. 반대의 뜻을 함께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대책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엔 회사에서 나와 가장 친한 정아 언니도 있었다. 형식적인 대화로만 진행되던 집회는 정아 언니의 발언으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게 말이 돼요? 업무 강도가 이미 평범한 사람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는 건 이해를 해요. 그렇지만 이젠 아예 작정하고 사람들을 기계로 만들겠다는 거 아니에요.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최소한 인도적 차원은 지키면서 의논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요. 나 참 사람들 머리를 개조시키겠다는 미친 발상이 실현될 줄이야. 다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정아 언니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표정과 억양 모두에서 감정이 느껴졌고 그 순간만큼은 언니가 어떠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들처럼 보였다. 연설을 듣던 사람들 틈에서 맞아요, 말 한 번 시원하게 잘한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같은 말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우린 사람이에요 기계와 다르다고요,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지, 아니 대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길 포기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같은 말들도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고여 있다가 이참에 엎어진 물통처럼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탄원서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름을 받을 만큼 받고 그들은 안건이 신속히 올라갈 수 있도록 주중으로 탄원서를 제출했고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임원 회의에서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날짜가 되었고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조치는 유래 없이 빨리 응답해왔다. 임원들이 제각각 흩어지고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 게시판에 커다란 종이가 붙었다. 정리 해고자 명단이었다. 탄원서에 서명한 이름 수 못지않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날 오후 사무실 분위기는 말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탄 재가 날아다니는 대형화재 현상 속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손동작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겨울 바다를 들이 부은 싸늘함이 뒤엉켜 있었다. 그 옆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중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왠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섣불리 하지도 말아야할 것 같았다.

그때 정아 언니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니 역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정아 언니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핏기가 사라지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언니의 자리로 어떤 열기를 머금은 덩어리들이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날을 벼리고 있었다.

정아 씨, 사실 윗대가리들이랑 짜고 선동질 한 거 아니야? 아하, 마침 그 메모리 캡슐인가 뭔가가 도입되면 직원 감축될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걸 미리 알고 우릴 제물로 바치러 직접 제 발로 임원들한테 찾아갔지? 가서 맞네, 맞아. 우리가 전부 속은 거였어. 그 늙은이들한테 보상으로 뭘 해줬어? 자기 스타일도 있었나 보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속담 있지. 난 그냥 구닥다리 옛날 말이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번 엿 같은 경우가 딱 맞아 떨어지더라. , 한정아. 너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귀신 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더니. 인공지능이 인간을 노예로 삼아 사육을 한다느니 이딴 소문에 벌벌 떨고 있을 게 아니었어. 정작 우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일 악랄하고 무서운 거였어. 아니, 아니지. 넌 사람도 아니야.

정아 씨, 지금 우리들 표정 하나하나 똑똑히 봐둬. 그리고 그 메모리 캡슐인가 하는 약,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면서 잘 지내. 그래서 지금 우리가 당신을 어떤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지 평생 기억 하며 살아.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온갖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로 정아 언니를 경멸했다. 집단으로 어울린 사람들은 분위기를 타 더 거침없고 잔인하게 그녀를 힐난했다. 사무실에 울리는 공명음에 주먹과 발길질이 보이는 듯했다. 정아 언니는 분명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길 원했던 그들은, 정아 언니가 결국 허튼 거짓말로 더 이상 인간이길 포기했다며 그녀의 말을 묵살시켰다. 그들이 회사를 떠나고 남긴 소문과 분위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아 언니의 목덜미를 꽉 움켜잡는 그림자로 언니의 삶 구석구석을 괴롭혔다. 언니는 한동안 목을 움츠리고 눈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살아갔다. 바람에 날려 다니는 찢어진 헝겊처럼 아무 고목에라도 좋으니 걸려 고통스러운 유랑을 마칠 수 있길 바라는 사람처럼 고독 속을 살아가고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진짜로 정아 언니가 윗사람들과 내통을 했다는 소문이 절반, 그리고 위에서 일부러 자기들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언니를 희생 시켰다는 소문이 절반의 반, 또 이 모든 것이 회사를 뒤에서 운영하고 있는 고성능의 인공지능이 그린 각본이었다는 음모론이 소문의 나머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인간사에서 소문은 많을수록 혼란만 부추긴다. 그러다보면 그럴듯한 이야기마저 신빙성을 잃고 시들시들해지다가 소문은 단순한 가십거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메모리 캡슐 복용을 선택한 직원들 모두 그날의 사건들을 잊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정아 언니에 대한 헛소문은 시간이 갈수록 시들해졌다.

세상 모든 절망의 노예 같았던 정아 언니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어둠을 걷어 나갔다. 심지어는 어색한 과장 없이 간간이 웃기도 하면서 직장 생활에 안정을 되찾았다. 언니는 마치 메모리 캡슐 성분에 내성이라도 생긴 듯 괴로운 기억들에게 인생을 뜯어 먹히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고자들이 떠날 때 남긴 말마따나, 그들의 육식동물 같은 얼굴들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를 텐데, 정기 복용일이면 복기가 환각이 되어 눈앞을 향해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어질 텐데도 언니의 표정은 그늘 없이 밝았다. 심지어 나는 언니가 부분 기계화 수술은 감정 제거 수술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고 의심도 했다. 그만큼 언니에겐 믿기 어려운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아 언니의 비밀을 알게 되자 나는, 정아 언니는 절망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절망의 주인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한테도 아이가 있었어.”

언니한테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없다는 말이에요?”

죽었거든. 네 아이 떠난 나이 그 만할 때.”

정아 언니의 고백은 잠시나마 언니의 트라우마쯤은 내가 가진 악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 관념을 모조리 뒤엎어 버렸다.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조차 몰랐다. 현기증도 씻은 듯 날아갔다. 어쩌면 언니가 나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동정을 해주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정아 언니의 표정은 놓쳐버린 사랑의 기억들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황량한 표정이 있었다. 그건 정말 나와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그리고 알아챌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게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고민을 해봐도 결론은 하나에 닿았다.

언닌 아이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나 보네요.”

엄청 사랑했지. 함께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어. 나도 따라가서 아침 먹여야 하는데 하고 말이야.”

정아 언니의 얼굴 위로 쓸쓸함이 좀 더 두꺼워졌다. 가을의 공원을 나뒹구는 초엽처럼 너무도 넓은 공간을 건조한 몸뚱이로 홀로 거닐고 있는 느낌. 바람보다 단단한 게 밟고 가면 바스라지는 위태로운 상태로 이리저리 떠도는 유랑객. 지나간 봄과 여름의 시간만큼 행복한 앞날을 기대할 수 없을 거란 슬픈 생각만으로 하루하루 숨 쉬는 존재가 바로 우리였다. 인생의 모든 기쁨과 슬픔을 잊지 못한 채, 망각이라는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희노애락 중 가장 독한 비애가 나머지 정서들을 뒤덮어 희망 없는 영원불멸의 슬픔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정아 언니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준 그것은 내게 희망의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의 빛을 냈다. 조그마한 병이었고 달그락 달그락 흔드니 빗소리가 났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수 년치 분은 될 법한 양의 메모리 캡슐이었다.

 


서진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다지 반가운 소식통으로 오지는 못했다. 병원과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계음은 일방적으로 상황 설명과 방문 일자를 통보하고 전화를 끊었다. 먼저 경찰 측의 이야기는 서진 아빠가 저지른 범법 행위에 관해 조목조목 따졌고 병원 측은 현재 서진 아빠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서진 아빠는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더 많은 지식과 능력이 필요했고 결국 개인 할당량을 훨씬 초과한 메모리 캡슐을 암거래로 구매해 과다 복용했던 것이다. 법적으로도 건강상으로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끝내 서진 아빠의 꿈대로 화성에 다녀왔지만 지구로 귀환했을 때 그를 더 기다리고 있던 건 기자들보다 앞에 나온 경찰들이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파리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서진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한 눈에도 사람이 겉으로나 속으로나 메말라 있다는 게 드러났다. 그 역시도 마찬가지로 생기를 놓아버린 가을의 초엽 같았다. 내 쪽을 돌아보는 서진 아빠 눈은 꿈을 이루고 돌아온 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락없는 약물 중독 후유증을 앓는 환자의 불안한 시선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게 농담이었음 해서 농담을 던졌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지? 지구든, 화성이든, 우주든.”

그러자 서진 아빠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자유를 허락받은 것처럼 서럽고 거칠고 진솔하게 울어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달마다 보았을 아이의 죽음을, 그는 일주일에 수차례는 보아왔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함께 했던 이 지구라는 땅을 벗어나기 위해 캡슐을 입 안에 털어 넣을 때마다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아이와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을 느꼈을 것이다. 갈수록 거울 속의 자기 얼굴보다 아이의 얼굴을 더 많이 마주하게 되고 그럴수록 살아있는 건 자신이 아닌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는 낙담을 언제나 새롭게 느끼면서, 줄어들지 않는 크기의 슬픔과 고통을 씹어 넘겨야만 하는 현실이다. 서진 아빠의 손을 잡자 굳고 외롭게 식은, 우주의 공기를 맞고 온 싸늘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서진 아빠가 언제 한 번은 쓰러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우주선을 타고 날아갈 정도로 멀리 가더라도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긴 비극을, 사람 하나 없는 진공 공간에 뱉어 내고 온다는 건 해결이 아닌 외면과 도피에 불과했다. 망각만으로 비극을 잊은 채 아주 가끔 울적해지는 날에만 통증을 느껴도 괜찮다면 메모리 캡슐을 버리고 우주로 훌쩍 떠났어도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남은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람이 서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떠나버린 아이를 붙자고 이제 그만 내 불행에서 떠나주면 안 되겠니 애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같은 기억과 절망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엉킨 실타래 같은 트라우마를 한 올 한 올 풀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옳은 방법으로 망각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새로 시작하는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퇴원 수속을 밟고 서진 아빠를 차에 태웠다. 시동을 걸자 인공지능이 자동 운전 모드를 작동시켰다. 나는 전원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되는대로 무작정 교외로 차를 몰아갔다. 자동 운전 모드를 켜놓은 채 드러누워 있는 운전자들 사이를 지나치며 아주 멀리 벗어났다. 비가 온다는 날짜를 골라 퇴원을 했을 뿐 어디로 갈지 방향은 정해놓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강둑이 있는 농가까지 달려와서야 차를 세웠다. 시동은 켜두고 히터를 높였다. 방금 퇴원해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서진 아빠를 뒷좌석에 편히 눕혔다. 서진 아빠의 입술 사이로 오랜 긴장을 비우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기서 뭐 하자는 거야?”

의식이야. 우리들이 꼭 해야 할 의식.”

나는 차량 곳곳에 레인미스트 향초를 두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좁은 차 안이라 향은 금방 가득 찰만큼 퍼졌다. 달달하면서도 따스한 향. 서진 아빠도 그 향기에 취하는지 얼굴을 씰룩이는 경련이 잦아들고 있었다.

서진 엄마, 우리 좀 더 나아지는 거야?”

서진 아빠가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아진다라. 사실 장담은 할 수 없다. 이건 그저 나아지고픈 발악의 첫 걸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아 언니처럼 메모리 캡슐을 끊고 인간의 능력에 걸맞은 일반적인 뇌로 직장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건 그리 희망적인 이야기가 못된다. 분명 희망은 불투명하다. 그렇기에 발버둥을 쳐야 한다. 일자리를 잃은 우린 생활고에 허덕일 것이고 내일, 그 내일이 힘겨워 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고역의 나날들이 미래라면, 우린 그 미래보다 더 멀리 있는 앞으로의 미래로 가기 위해서라도 이 의식을 치러야 한다. 서진 아빠가 닿았던 우주나 화성보다 더 멀고 먼 아득한 곳으로 가기 위해, 고난의 흔들다리 위에서 불행과 파멸이라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망각의 강을 건너 어제를 잊고 내일을 희망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온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딱딱한 빗줄기가 차창을 때렸다.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안정적인 공명을 일으켰고 그 바람에 졸음이 쏟아졌다. 은은한 향기 속에 스며드는 고운 연기가 되는 기분처럼 몽롱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나는 꿈에서 아이를 보았다. 메모리 캡슐이 가져온 기억에서 보던 모습과 똑 닮아 있었지만, 괴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꿈속의 아이는 애처로우나 사랑스러웠고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서정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깨지 않고 아주 오래 들여다 보고팠다. 그러나 먼저 돌아선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꿈의 출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쓰다듬고 얼굴에 입을 맞추며 그리움이 가장 훌륭하고 풍채 좋은 모양으로 가슴에 남을 만큼 아이를 사랑했다. 그리고 가슴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로 그리움을 담았을 때, 나는 뒤돌아섰다. 꿈에서 나가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렸다. 나는 온통 행복과 달콤함으로 가득 찬 아이의 세계에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문 밖으로 나갔다.

잠에서 깨어났다. 향초의 연기처럼 꿈은 흩어져 버렸다. 몸이 가벼웠다. 꿈을 꾸었으면서도 오랜만에 푹 자다 일어난 기분이었다. 창밖은 어슴푸레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빗소리는 얇아져 보슬비로 내리고 있었다. 새벽이 가장 진한 시간이었다. 와이퍼를 켜 창문을 닦아내고 앞을 내다보았다. 앞엔 안개가, 희뿌연 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서진 아빠를 깨웠다. 서진 아빠는 잠이 약간 부족할 만도 했지만 비 맞은 가뭄의 땅처럼 달고 촉촉한 잠을 잔 듯 개운해 보였다.

우린 차에서 내려 강둑을 따라 걸었다. 주위가 온통 뿌연 안개로 둘러 싸여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숲 속 걷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듯 나란히 걷는 옆 사람의 실루엣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무심코 손을 잡았다. 앞은 보이지 않았어도 겁이 나진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서진 아빠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손바닥에선 뜨끈한 땀이 흘렀고 맥박은 두근거렸다. 서진 아빠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그는 분명 자신 안에 곪아 있던 기억들을 모두 털어 버렸을 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결된 손 하나로 그는 우주복에 달린 특수 재질의 호스보다도 더 자유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안개 속을 지나고 나면 우린 서로의 얼굴을 보며 새로운 안부를 물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기억을 날려 버린 새로운 껍데기를 보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실제 레인미스트 향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결코 달달한 향은 아니었다. 습한 공기가 점막을 적시면서 들어왔다. 다만 이 생생한 레인미스트는 바람과 함께 몸 속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머리칼이 날리고 시린 눈에서 눈물이 살짝 새어나오고 귓가에 무언가를 훔쳐가는 듯한 공기의 빠른 흐름이 들린다. 그리고 안개를 모조리 걷어 간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식의 마지막 단계다. 온 몸이 증발해 버릴 듯 뜨겁고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안개가 가리고 있던 눈앞에 탁 트인 넓은 강과 끝없는 하늘, 아득하고 눈부신 태양이 펼쳐졌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도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우린 이제 오늘과 내일을 생각한다. 어제를 조금씩 고이 묻어가면서. 햇살은 세상을 감싸 안았고 물방울로 흥건했던 옷이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유독 강물에 빠진 걸레처럼 흥건한 가슴부분은 굳이 쥐어 짜내지 않더라도 시간과 바람과 햇볕 앞에 선 채로 가다보면은 다시 보송보송해질 것이다. <마침>

Who's 평강공주

?

바보 온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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