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아무것도, 그 무엇도

by 이선재 posted Apr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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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재민은 편의점에서 삼 년째 근무 중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삼 년을 내리 근무한 것이 아닌, 그 사이의 군 입대라는 공백기가 있었다. 이 년을 먼저 근무하고 군대 복무를 마치고 일 년째 다시 근무 중이다. 휴학으로 학교를 가지 않는 탓에 일하는 시간이 꽤 된다. 그의 하루 일과는 철저히 편의점의 매뉴얼에 맞춰 짜인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그를 편의점 업무에 기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고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란, 혹은 초록색의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도시락과 각종 김밥 유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자루걸레로 잔무늬가 없는 하얀 대리석 바닥을 닦는다. 매장을 비교적 깨끗이 관리해온 덕에 걸레질을 조금만 해도 바닥에서 금세 광택이 났다. 청소 도중 손님이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면 상부에 달려있는 철제 종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입장을 알린다. 재민은 “어서 오세요!”라고 크게 외치며 그들을 응대한다. 이것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흘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교육을 받은 대로 손님에게 “할인이나 적립되는 카드 있으세요?”나 “현금영수증 필요하세요?” 따위를 물으며, 친절하게 그들을 응수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오전이 마무리되고 스피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해서 듣던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유통기한이 정오까지인 식품을 폐기처분하고 나면 금방 오후에 접어든다. 한동안 손님을 받고 머지않아 저녁 즈음 유제품과 냉장식품을 실은 본사 트럭이 편의점 앞에 정차한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내려 분주하게 물품들을 가게 안으로 옮겨주고는 황급히 떠난다. 진열과 정리를 대충 마치고 여덟 시쯤 그는 퇴근한다.

재민의 하루는 늘 이 매뉴얼의 반복이었다.



2


그에게는 단골손님들이 있다. 그들은 늘 엇비슷한 시간에 나타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들의 상품들을 사간다. 매번 오는 손님과 매번 그들을 맞는 점원. 손님이 매정하게 그를 도외시하지 않는 한 그들은 사소할지라도 서로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친분이 쌓인 사람들이 꽤 되었다.

물론 그렇게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편의점에는 고객층이 다양한 만큼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유형도 다양했다. 걸핏하면 그에게 고함을 지르는 손님도 있는가 하면, 욕을 내뱉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다반사다. 다행히 학생들의 접근이 용이한 곳에 위치하지는 않은 덕분에 미성년자 판매 금지 물품에 대한 걱정이 다른 곳보다 덜하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작은 위안이었다. 힘든 일이 적지 않음에도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편의점 사람들이나 손님들로 하여금 언짢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기에 그는 여전히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편의점 유리문에 달려있는 철제 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며 나이 든 여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들어왔다. 숱이 거의 없는 머리칼은 뿌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살집이 거의 없고 밑으로 늘어진 피부 가죽만 뼈에 붙어있는 듯 꽤 앙상한 모습이다. 그녀는 거의 매일 같이 담배를 사러 이 가게에 들르는 단골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재민은 그녀가 태우는 담배를 찾아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이것은 재민이 그녀를 오랫동안 맞이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 노년의 여성은 그런 재민의 행동을 보며 방긋 웃었다. 그 바람에 탄력을 잃은 그녀의 피부가 주름졌다.

“이거 맞으시죠?”

확인 차 재민이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담배를 피운 일은 재민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으응.”

“한 갑이면 되세요?”

“그거면 돼요.”

그녀는 팔에 걸어둔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동전들이 부딪히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빼낸 손에는 꾸겨진 옅은 파란색의 지폐가 여러 장 들려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현금이 아닌 카드로 결제한 적이 없었다. 카드가 아예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굳이 카드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소지하고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사천오백 원이요.”

“자, 여기…….”

그녀는 지폐 다섯 장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재민은 접힌 지폐의 낱장을 일일이 펴서 다섯 장인 것을 확인하고 포스POS기의 현금 버튼을 눌렀다. 띵, 소리를 내며 수제금고가 튀어나왔다. 지폐를 넣어둔 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거슬러주었다.

“고마워요. 근데 나 나무젓가락 좀 얻어갈 수 있을까?”

“몇 개나 필요하세요?”

“한 예닐곱 개만 좀 줘요.”

재민은 그녀에게 라면회사 로고가 그려져 있는 하얀 종이로 포장된 나무젓가락을 한 움큼 쥐어 건네었다. 그녀는 항상 담배를 사면서 나무젓가락을 챙겨갔다. 재민은 왜인지 그 이유가 궁금하였지만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설거지의 번거로움 때문일 거라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원래도 싹싹하고 상냥한 성격의―서비스업에 종사하려면 그래야만 했다―재민이었지만 적적한 노년을 동정하며 더욱 살갑게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를 그녀가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총각을 보면 참 손주 같어. 손주를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녀는 재민을 늘 총각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또래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는 내심 이 표현이 그리 나쁘지는 않게 들렸다. 친근함의 표시라 생각한 까닭이다.

“고마워요. 고생해요.”

그녀는 허리쯤 되는 높이의 지팡이에 체중을 실은 채 걸음 하나하나 천천히 내딛어 편의점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방이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앞뒤로 살짝살짝 흔들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런 그녀의 등 뒤로 재민은 소리쳤다. 유리문의 철제 종이 딸랑 울리며 그 대답을 대신했다.


“박금자 할머니가 너 칭찬 많이 하시더라.”

“네?”

교대 시간 십 분 전쯤 출근한 점장이 불쑥 이야기했다. 재민은 카운터에 있는 금고의 돈을 세다말고 처음 듣는 이름에 놀라 물었다. 그 바람에 세던 지폐의 수량을 까먹어 다시 세어야만 했다. 점장은 그가 하던 일을 끝낼 때까지 특별히 말을 잇지 않고 배려해주었다. 시재의 점검을 마친 재민이 다시 물었다.

“그 분이 누구세요?”

“그 왜. 맨날 담배 사러 오시는 할머니 한 분 계시잖아. 자녀분 없이 혼자 사시고.”

점장은 편의점 전용 조끼를 상의 위에 입으면서 알려주었다. 점장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재민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점장은 이 자리에서 계속 개인 편의점을 비롯해 쭉 영업을 해왔다. 그녀 또한 이 가게를 오랫동안 애용했기 때문에 서로는 꽤나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 그들의 대화에 언젠가 한번,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히 잘 해줘서 너무 좋다는 이야기가 올랐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해준 것이었다.

“아, 맨날 이 담배 사러 오시는 할머니요?”

재민은 진열대에서 그녀가 태우는 E자로 시작하는 담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점장은, “그래. 그 분.”이라고 했다. 매번 지팡이를 짚고 담배를 사러 오는 노년 여성의 이름이 박금자였던 것이다. 꽤 오랜 기간 서로 대화도 나누고 지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민은 이제껏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박금자 씨라는 사람에 대해 갑작스런 거리감을 느꼈고, 그 탓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박, 금, 자…….’

그는 한 자 한 자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리고 계속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다음번 박금자 씨가 오면 이름을 넣어 친근하게 불러드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곧 관두었다. 혹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호칭을 바꿔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부담스럽지 않도록, 예전에 저한테 알려주신 적 있어요, 하면서. 만일 이름을 알게 된 경위를 묻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이 분 조금 넘게 남아있었다. 재민은 입고 있던 편의점 조끼를 벗기 위해 지퍼를 내렸다. 그때 많은 수의 사람 무리들이 편의점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장내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각각은 다양한 상품들을 하나씩 집어 계산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점장은 그들을 응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만요. 야, 빨리 가져와!”

“오늘 부장님이 쏘시는 거예요?”

“삼 초 안에 안 오면 없다. 아이, 죄송해요.”

사람들은 순식간에 계산대 앞을 점령했다. 그 탓에 다른 사람들의 계산이 밀려 옆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이쪽에서 도와드릴게요.”

재민은 점장 다른 손님 두어 명의 계산을 도왔다. 삑, 삑, 하고 바코드를 읽는 소리가 편의점에 가득했다. 재민이 옆에서 도운 덕에 계산대에 늘어져있던 줄이 금방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재민의 퇴근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계산대에 잠시 사람이 없던 틈을 타 점장이 말했다.

“늦었다. 얼른 가.”

“괜찮아요. 오늘 좀 늦게 왔어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사실 재민은 제시간에 출근했었다. 돕던 일을 마저 끝내니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그의 퇴근길을 비추고 있었다. 무척 유별난 하루였다는 생각이 재민은 들었다.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단골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잠깐의 낯선 감정. 익숙한 것이 생경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그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여겨오던 무언가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현상.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매일 가게를 찾아오던 한 여자의 부재가 오늘 하루의 특별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3


그녀가 편의점에 맨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정도 전의 일이었다. 165센티미터를 웃돌 정도의 작지 않은 키였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으니 재민과 눈높이가 어느 정도 맞았다. 빨간색과 갈색의 사이 어디쯤 되는 빛깔의 긴 머리를 가졌으며 끝부분에 부담스럽지 않은 컬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같이 편의점을 방문해 커피를 사갔던 여자였다.

그녀가 편의점을 방문하는 시간은 오후 여섯 시쯤으로 일정했다. 재민이 언젠가 관찰해본―손님들을 관찰하는 것은 일과의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결과에 따르면 그녀는 늘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캔 음료가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로 직행했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찬 공기가 가득한 내부로 손을 뻗어 캔 커피를 항상 두 개씩 손에 들고 계산대로 왔다. 그리고 항상 카드로만 계산했다. 단색의 플라스틱 위로 조금 더 진한 색의 줄무늬 하나만 가로지르고 있는 조촐한 디자인이었다. 할인, 적립 카드는 따로 제시하지 않았다. 재민이 할인, 적립 카드의 소지 여부를 물었을 때 그녀는 아예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와 업무 상 필요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을 제외하고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것은 그녀가 편의점을 처음으로 방문한 지 열흘 쯤 지나서였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었던 날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철제 종의 울림에 반사적으로 재민은 소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가 어김없이 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그 모습을 포착한 재민은 계산대의 포스기로 눈이 향했다. 포스기 모니터 오른쪽 상단의 디지털시계는 여섯 시 칠 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하고 재민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였다. 그 말에는 수줍음이 꽤나 묻어나있었고, 목소리가 상당히 고왔다. 무언가 시비를 걸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님은 어조만으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민이 묻자, 매번 사던 커피가 냉장고에 없다고 말했다. 재민은 화들짝 놀라 냉장고로 달려가 보았다. 그녀가 늘 사가던 캔 커피의 진열대만 휑하니 비어있었다. 그 빈틈으로 냉장고 내부가 훤히 다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만요. 안에 있나 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아, 감사합니다.”

재민은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섭씨 5도 안팎의 차가운 내부 공기가 그의 몸과 얼굴을 휘감았다. 혹시라도 냉장고 내부에서 물건을 찾을 동안 밖에서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을까봐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선반을 아무리 살펴도 재민의 눈에는 그녀가 원하는 상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재고가 모두 소진된 것 같았다. 오래도록 냉장고 안에서 그것만 찾고 있을 수는 없어 밖으로 나왔다.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 때문에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부르르 떨렸다. 다른 상품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죄송한데 지금 상품이 다 떨어진 것 같아요. 다른 상품으로 고르셔야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재민은 황급히 계산대로 돌아왔다. 옅은 색깔이 들어가 있는 와이셔츠를 입은 한 중년의 남자가 계산대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상품도 올려져있지 않은 것을 보니 담배를 사러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계산대 위에는 그가 내려놓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만 원권 지폐 두 장만이 덩그러니 올려져있었다. 그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뭐 필요하세요?”

“담배.” 그는 짧게 답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재민은 다시 물어보아야만 했다.

“어떤 담배 필요하신데요?”

“던힐 라이트.”

“던힐 라이트요.” 재민은 던힐 담배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어 한 갑을 꺼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그 남자가 덧붙였다.

“세 갑.”

재민은 다시 손을 뻗어 두 갑을 더 꺼내었다. 한 번에 말해주면 좀 좋아, 라고 그는 생각했다. 꺼낸 담배의 바코드를 스캐너로 읽어들이자 삑, 삑, 삑, 소리가 났다. 커피를 사러 온 여자가 그 남자 옆으로 다가와 줄을 선 것이 바로 그때였다.

“만 삼천오백 원입니다.”

재민이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던 지폐 두 장을 향해 눈짓했다. 고개를 까딱하며 턱으로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계산대 위에 재민이 올려두었던 담배 두 갑 중 하나는 자신의 셔츠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한 갑은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포장 비닐을 뜯어 계산대 위에 아무렇지 않게 올려두었다. 재민이 계산대 위에 놓인 돈을 가져가며, “이 만원 받았습니다(받았다고 말해야하는 건지는 좀 의아했다).”라고 말한 뒤, 육천오백 원을 거슬러주고 있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언짢은 어투로 말을 꺼냈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데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떡하나. 바빠 죽겠는데 말이야.”

재민은 거스름돈을 두 손으로 정중히 건네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다른 손님이 뭘 찾으셔서요.”

“그래도 카운터는 될 수 있으면 비우면 안 돼. 누가 와서 돈을 가져갈 지도 모를 노릇이니까.”

재민은 그의 말이 투정인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우선은 “죄송합니다.”하고 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과의 마찰은 최소화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재민은 일을 하는 동안은 죄송해야하는 상황이 꽤나 많았다. 그 남자는 거스름돈을 받아들고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채로 편의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뜯어놓은 포장 비닐이 계산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은 마치, 날 여기에서 놀린 벌이야, 하는 듯 보였다. 쓰레기를 치움과 동시에 그녀가 계산대 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해요. 어째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네요.”

들고 있던 캔 커피 세 개를 그녀가 계산대 위로 올리며 재민에게 말했다. 당연히 그 커피는 그녀가 지난 열흘 간 샀던 것과는 다른 상품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저런 사람들이 꽤 돼요?”

“네, 뭐.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어휴. 힘들겠다.”

“괜찮아요. 할 만 해요.”

재민은 입으로는 그녀와 대화하면서도 손은 스캐너로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포스기의 스피커에서 행사상품임을 알리는 음성이 나왔다. ‘투 플러스 원’ 상품이었다. 두 개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는 방식인데, 이것 때문에 편의점을 애용하는 사람들도 여럿 되었다. 그녀는 행사 상품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미리 세 개를 가져왔다. 재민은 카드를 건네받아 계산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며 문득 든 의문점에 대해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왜 매번 그 커피만 사세요?”

“이름이 재밌잖아요. 칸타타.”

“칸타타…….”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명확하게 발음했다. 그리고는, “장난이에요. 그냥 제 입에 제일 잘 맞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재민을 향해 아름다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포스기에서 계산이 완료되었다는 음성이 나오자 재민은 멋쩍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카드를 건네받은 그녀는 한 캔은 가방에 넣고, 한 캔은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재민의 쪽으로 커피 한 캔을 밀어주었다.

“이거 드세요.” 그녀는 말했다. “그냥 아까 일에 대한 보상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녀는 또 한 번 방긋 웃어보였다. 재민은 편의점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남기고 간 캔 커피를 손에 쥐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커피를 그녀가 꽤 오랜 시간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용물은 차가웠지만 캔의 겉면에는 아직도 그녀의 손에서 전해졌을 온기가 남아있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녀의 등 뒤로 재민은 또 한 번 소리쳤다. 어제도 왔고, 그저께도 왔고, 사흘 전에도 왔던 그녀이기에 내일도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왔으면 좋겠다고도 말이다. 재민은 퇴근하기 전에 점장에게 칸타타 커피의 재고가 없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전했다. 그의 손에는 그녀가 주고 갔던 캔 커피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재민의 예상대로 그 다음날도 여섯 시쯤 나타났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재민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냉장고 진열대에 그녀의 커피, 칸타타가 충분히 들어차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 서서 문을 열지 않고 한참을 서있었다. 재민이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찰나 계산대로 손님이 한 명 다가와 상품을 내려놓았다. 재민은 그의 상품들을 서둘러 계산해주었다. 어느새 그녀가 그 손님의 뒤에 다가와 서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칸타타가 아닌 전날 사간 것과 같은 종류의 캔 커피였다. 그리고 계산대 위로 그것들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칸타타 들어왔는데 못 보셨어요?”

“봤어요. 그냥 이걸로 해주세요.”

“어……. 네.”

재민은 의아했다. 왜 갑자기 이걸로 바꾼 거지. 행사 상품이라 그런 걸까. 하지만 칸타타가 입에 제일 잘 맞는다고 그랬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스캔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재민은 건네받은 카드를 결제기에 삽입했다. 결제 완료까지 몇 초 간 소요되는 틈을 타 어제 그녀가 준 커피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잘 마셨어요.”

“아니에요. 어차피 저는 두 개면 돼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녀는 이전에도 늘 커피를 두 개만 사갔었다. 완료되었습니다, 하고 결제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재민은 카드를 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카드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한 캔은 가방에, 한 캔은 손에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캔은 전날처럼 또 다시 재민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마치 전날의 데자뷔deja-vu 같았다.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안녕히 계세요.”

재민은 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저 때문에 커피 바꾸신 거예요? 하지만 묻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재민이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거라면, 보기 껄끄러워질 정도로 큰 망신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내심 바랐던) 그녀와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걷어차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로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 이유였다. 시간이 지나서도 가끔 그때 물어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한 재민이지만 그때마다 여전히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민은 그녀의 이름이 윤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녀는 재민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았으며, 매일 여섯 시쯤 편의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둘은 서로의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꽤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녀는 칸타타가 없었던 그날 이후로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계속 행사 커피를 사서 두 캔은 자신이 가져가고 나머지 한 캔은 재민에게 주었다. 그렇게 이십 여개의 캔 커피를 받은 만큼 시간이 흐른 오늘, 윤서가 갑작스레 편의점에 오지 않았던 것이다.



4


그녀가 편의점에 오지 않은 이튿날, 문이 열리고 편의점에 등장한 건 다름 아닌 윤서였다. 그녀는 이전처럼 늘 그랬듯 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행사 커피를 세 캔 꺼내왔다. 편의점 안은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윤서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던 재민은 잘 됐다고 생각했다. 계산대 위로 캔 커피 세 개가 올려지자마자 말을 꺼낸 건 재민이 아닌 윤서였다.

“미안. 나 기다렸지?”

“네. 어제는 왜 안 왔어요?”

“좀 아팠어.”

재민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하니 아파보이는 듯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은요?”

“괜찮아. 말짱해.”

“다행이다. 연락도 안 받길래 걱정했어요.”

“미안. 정신이 너무 없어서.”

윤서는 이번에도 커피를 재민에게 건넸다. 그리고 계산이 완료되길 기다리며 물었다.

“오늘 언제 끝나?”

“늘 똑같이요. 왜요?”

“그러니까 언제.”

“아. 난 늘 여덟 시 퇴근이에요.”

“그래?”

그녀는 가방에 커피를 집어넣었다. 들고 있던 한 캔은 그 자리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두어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나랑 술 마시러 안 갈래?”

“네?”

갑작스런 물음에 재민은 놀랐다. 재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술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는 여자에 대해 놀란 것뿐이었다. 여자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지낸 그의 친구들과 술을 먹은 것을 제외하면 한동안 여자와 술자리를 같이해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하루 일과가 편의점의 매뉴얼에 맞춰진 따분한 일상인 탓이기도 했다.

“왜, 싫어?”

그가 너무 오랜 시간동안 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아니. 좋아서…….”

재민이 말했다. 서운한 기색이 슬금슬금 올라오던 그녀의 표정이 곧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생긋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재민은 너무 좋았다. 마치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미소 같았다.

“그럼 여덟 시에 편의점에 다시 올게.”

“네. 그때 봐요. 몸은 정말 괜찮은 거죠?”

“응, 괜찮아. 갈게. 이따 봐.”

“알았어요. 조심히 가요.”

윤서가 밖으로 나가자 재민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남은 한 시간 반쯤 되는 시간동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그득했다. 힘든 것도 잊은 채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 지도 모르고 일을 마쳤다. 여덟 시가 다가오고 재민은 퇴근해 윤서를 만났다.

둘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마시자 둘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잔을 비운 윤서가 재민에게 말했다.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너 되게 귀여워.”

“갑자기 뭐라는 거야. 취했어요?” 재민은 당황했다.

“아냐. 정말이야. 멀쩡한 걸.”

“고마워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재민은 그 말에 내심 흐뭇했다. 그녀에게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 그리고 이전에 미처 묻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술기운을 빌려서, 혹은 빌린 척 하며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예전엔 칸타타 먹었었잖아요. 왜 요즘엔 다른 거 먹어요?”

“음……. 그냥. 너한테 커피도 줄 겸.”

“그럼 나 때문인 건가?”

“어차피 두 개 살 거 기왕 하나 더 주는 걸로 사서 그거 너 주면 좋잖아.”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너무 그러지 마.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입에 잘 맞아요?”

“그러니까 먹는 거겠지?”

“그럼 다행이네.”

그녀는 웃었다. 재민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었다. 둘은 몇 잔을 더 마셨다. 그녀는 그다지 취해보이지는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인 듯했다.

“잘 먹네요.”

“응?”

그녀가 잘 못 들었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잘 먹는다고. 술.”

“못 먹지는 않나 봐. 어디 가서 못 먹는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거든. 잘 먹는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지만.”

“그게 뭐야.”

“몰라. 적당히 먹는가보지.”

그녀는 또 꺄르르 웃었다. 윤서는 웃음이 헤픈 여자 같았다. 술을 먹으니 더욱 그랬다. 재민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꼭 재민이 술을 먹어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윤서가 입을 열었다.

“야, 재민아.”

“네.”

“오늘 나랑 잘래?”

“……”

재민은 잠시 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잔다는 건, 섹스를 말하는 걸까. 그 말을 하기 이전까지는 안 그래보였던 윤서가 갑작스럽게 대단히 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을까.

“무슨 소리에요?”

“나랑 자자고. 오늘.”

“취했어요?”

“자꾸 뭘 취했대? 싫으면 싫다고 말해. 상관없으니까.”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너는 장난으로 섹스하자고 하는 여자 봤어?”

찾으면 없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도 들었지만, 재민은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는 분위기를 망칠 게 분명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술에 취한 여자와 무턱대고 관계를 가져도 괜찮은 건지 양심에 묻고 또 물었다. 혹여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리고 자신의 첫 번째 섹스 경험을, 이렇게 갑작스레 그녀에게 헌납해도 괜찮을지 자문했다. 첫 경험이 특별하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오 초 줄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 손가락을 모두 곧게 폈다. 그리고 하나씩 숫자를 셈에 맞춰 접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상황에 재민은 당황스러웠다. 마치 윤서의 카운트는 이성보다는 직감에 따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자, 잠깐만.”

“오, 사, 삼, 이…….”

“가, 가요.” 재민이 말했다. “가자. 하러.”

“그래 좋아.”라고 말하는 윤서는 왜인지 모르게 굉장히 들떠보였다. 술을 먹어서 그런가, 하고 재민은 생각했다.

둘은 술집 근처의 모텔로 가서 대실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도 오만생각이 그를 끈질기게 덮쳤다. 둘은 차례로 씻고 나와 침대 위에서 몸을 포갰다. 재민은 그가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전무하다고 밝힐 수밖에 없었다. 밝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설픈 그의 행동을 그녀가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그녀는 처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윤서는 딱히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했다. 능숙하게 그와의 관계를 주도했고, 둘은 술기운이 오른 탓에 꽤 오랜 시간동안 침대 위에서 몸을 섞어야했다. 정사를 마칠 즈음에 둘은 정신이 또렷해져있었다. 비록 몸은 피곤에 절어 녹초가 되어있었지만.

“안아줘.”

그녀가 말했다. 재민은 그런 윤서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살갗과 그의 살갗이 맞닿았다. 보드라운 피부가 맞닿는 감촉에 이불 밑에서 그의 성기가 또 다시 단단하게 발기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재민의 허리를 타고 계속해서 내려가 결국 꼿꼿이 서있는 재민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대단하네. 지치지도 않고.”

“부끄럽다.”

“나 사랑해?” 그녀가 갑작스레 물었다.

“응.” 재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고마워.”

“뭐가요?”

“나 예전에 남자한테 크게 한 번 데인 적 있었다?”

재민은 그녀의 등을 손끝으로 훑었다. 그러자 윤서는 간지러운 듯 콧소리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연에 대해 재민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예전에 남자친구를 한번 사귄 적 있었는데, 정말 사랑했어. 그 애도 날 사랑했다더라. 우리는 오랜 기간 만났고, 당연히 섹스도 했고, 좋았어. 행복했어. 근데 어느 날 보니까 그 새끼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고 있더라고. 그리고 뻔뻔하게 그날 저녁에 나랑 섹스를 하더라?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나는 모른 척하고 해줬지. 그리고 다 끝나자 울음이 터져 나왔어. 그리고 다 이야기했어. 다른 여자랑 바람피운 거 알고 있다고. 그렇게 헤어졌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게 이런 거더라.”

“그랬구나…….”

재민은 눈꺼풀이 자꾸만 눈을 덮어갔다. 희미한 의식을 붙잡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의 흐름이 자꾸만 끊겼다. 끊긴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고, 나체의 재민과 윤서는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전날 밤 일이 꿈은 아니었구나.


그 후로도 재민과 윤서는 자주 만나 술을 먹었고, 섹스를 했다. 거리를 함께 걷기도 했고, 서울 근교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재민은 윤서라는 여자 덕분에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윤서 또한 행복해보였다.

윤서는 여전히 매일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사갔다. 행사 기간이 끝난 탓에 재민에게 덤으로 따라온 커피를 건네주는 일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시 칸타타를 사갔다.



5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재민의 눈에 보인 건 저 멀리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한 쌍의 남녀였다. 키 큰 여자의 뒷모습이 재민의 눈에 익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쇠로 된 안경테가 귀에서부터 콧잔등까지 걸려있었다. 게임 속 캐릭터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펫처럼 재민은 그 낯익은 여자의 뒤를 밟았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녀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자는 가방을 뒤적여 하얀색의 이어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귀에 꼽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재민은 그 여자의 뒤를 쫓았다.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 걸로 보아 단순히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가는 길은 그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항상 윤서와 함께 걸었던 길이었다. 그리고 재민 앞에 허리를 곧게 펴고 걷고 있는 저 여자의 뒤태. 그녀는 윤서였다. 그녀는 오늘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어느새 윤서와 그녀를 뒤쫓던 재민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윤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일층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멈춰 섰다. 그런 윤서의 가까이 재민이 다가갔다.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었던 탓인지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재민은 윤서의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저…….”

“아, 깜짝이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고는 돌돌 말아 핸드백 속에 넣었다. 놀란 감정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얘기 좀 할래요?”

“길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 좋아.”

둘은 가까운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밤이 깊어선지 인적이 드물었다. 밝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 주위로 날벌레들이 모여들었다.

“할 얘기가 뭔데?”

윤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재민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음.”하고 말을 더듬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갔다. 윤서는 재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지만 재민은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괜스레 저 멀리서 지나가는 검은 실루엣만 눈으로 좇았다.

“뭐야. 할 얘기 없으면 간다?”

그녀는 나긋하게 말했다. 일말의 양심도 없는 걸까 저 여자는, 하고 재민은 생각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그에게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윤서도 들었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여 꼼지락거리는 손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구였어요?”

“응?”

“그 남자요.”

“어떤 남자?”

“아까 같이 걸어가던 남자. 안경 쓰고 있던.”

“아.”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민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한편으로는 혹시 괜한 오해로 윤서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도 들었다. 그러던 찰나 옆에서 “흠.”하고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옆에 앉아있는 윤서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뭐야, 난 또.”라고 말하면서. 재민은 그 웃음을 보고는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오해한 거네.

“그 남자. 그냥 카페 알바생이야.”

“응?”

“카페 알바생이라구. 너처럼 그냥 심심할 때 만나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재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였는지 그녀가 한 말이 천둥처럼 크게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윤서는 혼란스러워 하는 재민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주 아름다운 웃음이어서 재민은 그게 역겹기까지 했다.

“너는 귀여워서 좋아.”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요.”

“내가 널 사랑하고 있었다고 믿었어?”

“……어.”

그녀는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뒤이어 말했다. 그 말은 날카롭게 날아와 재민에게 꽂혔다.

“누군가를 꼬시는 방법은 되게 간단해. 사람들은 뭔가 대단한 스킬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재민의 눈동자가 머무를 곳을 잃고 방황했다. 손의 움직임은 멎었다. 주름져 접힌 손바닥의 사이사이로 땀이 차올랐다. 닦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처음엔 늘 일정한 패턴으로 행동해. 그 사람이 나를 예측하게 만드는 거야. 그 다음엔 그 예측을 보기 좋게 깨버리는 거지. 그럼 그 사람은 빗나간 기대 때문에 안달나 하는 거고. 너도 그랬잖아. 상대방이 분명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 알고 있는데도 무관심한 척 하면 더 끌리는 것처럼 말이야.”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재민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오던 윤서가 오지 않던 날이면 그 이유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그리고 윤서가 이튿날 편의점을 찾으면 그 반가움은 이전의 배는 되었다. 정리해보자면, 윤서는 계획 하에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이고 거기에 재민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던 것이었다. 재민은 숨이 가빠오고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억울하고 분했다. 땀에 젖은 손이 얼굴 근처로 올라왔다. 호흡기라도 차듯 코와 입을 손으로 감쌌다.

“화내지는 말고.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걸. 게다가 너랑 그 사람 말고도 많아. 아마 다 너희처럼 나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

“단지 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게 좋을 뿐,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는 않아. 아, 다만 섹스는 해.”

“나한테 한 말도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내가 너한테 뭔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을 거야.”

사실이었다. 재민은 한 번도 윤서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매를 정돈했다.

“당연한 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믿지 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극단적일 진 몰라도 너희 엄마가 너를 낳았다는 것조차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겠어. 뭐,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재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그 무엇도 믿지 않아. 설령 내가 널 사랑했다는 게―혹은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게―진실일지라도.”

구구절절 틀리다고 생각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재민을 더 비참하게 나락으로 끌고 갔다.

“나 먼저 가볼게. 이제 볼 일 없을 것 같다. 조심히 들어가.”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웃음지어 주었다.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걸까, 하고 재민은 생각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리에 남아있던 온기마저 식을 때까지도 한동안 재민은 자리를 지켰다. 내가 봐온 윤서가 맞는 걸까. 저건 윤서가 아니야. 잡다한 상념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6


재민은 이후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은 초기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사소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조그만 불씨가 번져 산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듯이. 병적인 의심이 그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윤서의 말을 의심했다. ‘그 말이 진심이었을까?’하는 물음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아도 답을 찾지 못했다. 윤서가 진심이 아니었길 바랐다. 그렇다고 거짓일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이유도 딱히 재민에게는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물음은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때 잘못 들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다시 상황을 향해 의문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그치지 않는 의심에 사로잡혀 그는 한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커피를 준 것과, 그녀와 술을 먹고 처음으로 잔 날과, 그녀가 자신에게 내뱉은 말.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갑작스런 몸살로 인해 이틀 가량을 편의점에 출근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그렇게 끙끙 앓는 와중에도 그는 진실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던 걸지도 몰랐다.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절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때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어, 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는 너무나도 원했다. 하지만 재민에게 들려온 것은 윤서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완전히 다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몸살 기운이 남아있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결국 사흘 후 재민은 편의점으로 다시 출근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계속 흘러갔다. 그의 하루 일과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여섯 시쯤 윤서를 맞이하는 일뿐이었다. 이따금씩 칸타타와 그녀가 건네줬었던 행사 상품이었던 커피를 볼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만일 그때 칸타타가 잘 채워져 있었더라면…….

유리문이 열리고 박금자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는 사뭇 달라보였다. 그녀는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잘 화장된 얼굴과 빼입은 그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재민은 낯설었다. 그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단골손님 박금자 씨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박금자 할머니는요?”

“응?” 그녀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재민은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박금자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허허. 오늘은 좀 달라 보이지? 어디 갈 데가 좀 있어서, 다녀오느라구 그래요.”

그녀는 어디 갔냐는 물음을 평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 보인다는 뜻으로 나름 해석해 대답했다. 그래서 재민은, “그러게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이네요.”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박금자 씨가 왜 갑자기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정말 이제껏 봐왔던 박금자 씨가 맞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박금자 씨가 맞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그저 그렇다고 믿어왔을 뿐이었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인 척 연기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확고하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서둘러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 모든 것들이 가짜 같았다. 그것들이 진짜라는 이유가 없으니까. 왜 거짓들이 진실인 양 행세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진실이란 없는 걸까. 거짓을 참이라고 믿으면 참이 되는 걸까.

그래, 어쩌면 진실 따위, 애초에 없었는지도.


재민은 거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자신과 꼭 닮은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거울 밖의 재민과 거울 속의 재민이 눈을 맞췄다. 재민은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야?”

“너는 누구야?” 거울 속의 그가 거울 밖의 그와 똑같이 말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왜 나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거야?”

“왜 나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거야?”

“이제 연기는 그만해. 연극은 끝났어. 넌 끝이라구.”

“이제 연기는 그만해. 연극은 끝났어. 넌 끝이라구.”

재민은 거울을 깨부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만 한 조각을 하나 손에 단단히 쥐었다. 깨어진 거울 조각이 그의 손을 파고 들었다. 재민은 그리고 그 조각의 뾰족한 끝으로 얼굴을 그었다.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낭자했다. 선혈을 뒤집어 쓴 재민은 얼굴가죽을 잡아 뜯었다.



7


한 남자가 정신병원을 찾았다.

“선생님, 제가 요즘 좀 이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제가 주변에 가짜들이 넘쳐나요.”

“어떤 것들 말이죠?”

의사가 그에게 묻자, 그는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가지런히 한데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은 계속 꼼지락꼼지락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음.”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데카르트 아세요?”

“예?”

난데없는 질문에 의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울어져있던 의자의 등받이가 곧추세워지며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데카르트요?”

“천육백 년쯤에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인데요. 이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방법적 회의를 주장했더라고요. 맞아요. 우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해요.”

“그래서 뭘 의심했죠?”

“전부 다요. 믿을 게 하나 없더란 겁니다. 세상 모든 게 가짜에요. 제 주변 사람들도 가짜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어요. 겉모습만 똑같은, 실은 그들을 연기하고 있는 가짜. 우리가 사실 세뇌당한 거죠. 모두가 진짜라고 믿게끔요.”

“흐음.”

의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당연하게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잖습니까. 근데 그 사람은 이 더하기 삼이 오인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악마가 계산 과정에서 우릴 속인 걸 수도 있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에요. 그것마저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잖아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의사가 종이 위에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계속 이야기해보세요.”라고 말은 했지만 시선은 종이 위로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종이와 의사를 한 번씩 번갈아 훑고는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밑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한 번 올려 쓴 뒤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사랑한 한 여자가 있었어요. 어느 날 우연히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보았죠. 저는 따지고 들었어요. 그랬더니 그녀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더라구요. 그러고는 제게서 떠났죠. 근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우리는 정말로 사랑했거든요. 제게 이별을 고한 건 그녀를 연기한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탈을 쓰고요. 저를 사랑하던 그 여자를 온데간데없고 누군가 그녀인 척 연기 중이에요.”

그것은 무척이나 진지한 말투였다.

“아무래도 환자분께서는 카그라스 증후군인 것 같습니다. 카프그라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좀, 특이한 것 같긴 하지만요.”

의사는 십 분 가량을 그 증상에 대해 분주히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흡사 수강생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도 괘념치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강의를 이어나가는 머리가 다 벗겨진 노교수 같았다. 그리고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하며 뒤에 말을 덧붙였다. 쇠로 된 안경테 너머 남자의 눈에는 의심이 한가득 서려있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이 의사란 것도 믿을 수 없네요.”


왜인지 한동안 많은 남자들이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자와, 진실과 거짓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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