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의 정답’은 소설이 아닌 내 체험이다. 지금 부터는 소설이다.
나는 아직도 오래전 내 사무실에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며 겸연쩍게 들어온 그 친구와의 첫대면, 첫인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축 처진 눈매에 운동으로 단련된 다부지고 아담한 체격, 왠지 모를 수줍음에 다소 순박함이 묻어나는 웃음과 말투. 이마 한켠에 긁히듯 남겨져있는 흉터도 그리 험악해보이지는 않았다. 버릇처럼 이마의 흉터를 긁적이는 모습이 순박한 이미지를 한층 높여주는 듯 했다.
이 친구가 들어와서 지역 말단 사회복지 공무원인 나에게 하는 말이, 지금 갓 돈을 벌기 시작한터라 큰 돈은 없지만 이만큼이라도 보태고 싶단다. 정말 초라한 성금이긴 했다. 성실한 이 친구는 그 뒤에도 여러해 동안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양을 쪼개 고향마을 빈민촌 달동네를 위해 기부해주었다. 초라한 성금은 그리 오랜기간 이어지지 않았다. 몇 년 뒤 무슨일인지는 모르나 그 성금의 규모가 놀랍게도 배에 배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베품의 연속은 이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성금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 이상 이 친구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돈을 기부하지 않았다.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지도 않았으며, 거액의 기부에 세상의 이목이 다소 부담스러운지 굳이 익명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 이날까지 이 친구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다.
지금, 오늘 내 기분이 이렇게 좋은 이유는 나의 팀, 나의 영혼, “바스코 다가마”가 1997년 남미 클럽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리 남을 승리. 100여년간 그토록 갈망했던 최고봉의 자리이다. 사실 내가 바스코다가마의 영혼이 된 계기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올해로 10년 남짓, 오랜기간 무명이었던 한 선수가 막내로 주전발탁이 되어 열정을 쏟아 붇는 모습이 나에게 묘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화려하고 특출나지 않은 선수이지만, 끈기있고 집요한, 성실함이 전제된 열정이 그 선수에게서는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도 느껴졌다. 이러한 열정이 있으니 당연, 퇴보할 리는 없다. 10수년간 차츰차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지금 현재, 오늘, 바스코 다가마의 주장으로 챔피언 팀의 MVP가 되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스코 다가마의 성공에 에드문드의 성공이 스며있어 더욱 감격스럽고 감동적이다. 이 친구의 성공이 내 성공인 것 같다. 아니 내 성공이다!
팀의 캡틴으로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그 친구에게 소감을 묻는 카메라가 다가왔다. TV속의 이 친구 여전하다. 여전이 겸연쩍은지 이마의 흉터를 긁적인다.
여기까지다. 위 짧은 소설은 역시 10수년전 해군시절 업무 휴강기 어느 따스한 오후 내 사무실에서 한가로이 긁적여보았던 이야기다. 물론 허접하지만, 나름 당시의 내 추구하는 바가 느껴져서 이 이야기가 나는 좋다.
교체 출전한 한 무명선수가 그 친구라는 사실을 TV를 보고 알게된 그 순간부터 그와 그가 속한 팀의 열혈팬이 되었다는 점도 나름 애정이 간다. 젊었던 해군시절 그때는 소설속의 에드문드와 같은 인생이 진정 모두가 추구해야할 가치로운 인생이라 여겼던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낮은 자세로 조건 없이 베풀며 살기는 그 누구도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과 이러한 요소를 삶에 일정부분 포함시켜야하지는 않겠나…는 그때 생각이고, 지금은….
‘우선은 내가 편해야한다.’ 내가 괴롭고 힘든데 어찌 남을 배려할 수 있나. 우선은 나부터이다. 나와 내 가족 챙길만큼 챙기고 그러고도 에너지가 남아돈다면, 일정부분만, (오버해서 많은 부분은 아니고,) 어느 정도만 타인을 위해 할애해야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왜? 잘못됐나?
이것도 안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