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호 보조사가 새로 갈아준, 병원 침대의 흰 베개에 편안히 머리를 묻습니다. 오늘 지나치게 많은 추억들을 떠올린 탓에 약간 피곤하고 눈꺼풀이 조금 무거웠지만 뒷머리에 와 닿는, 세탁이 잘 된 베갯잇의 뽀송한 촉감과 냄새가 나를 위로합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리면 2층 창밖에 나란히 선 은행나무 두 그루가 눈 한가득 들어옵니다. 당신과 나의 나무. 이 병실에 처음 들어온 그 가을날,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그 나무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나란히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가지 끝이 겨우 몇 개 닿을 정도로만 가까웠던 두 그루의 나무. 한쪽 나무를 통째로 뽑아서 더 가까이 옮기지 않는 한, 가지들이 서로를 깊이 품어 안을 수 없었던 그 어정쩡한 거리 때문에 어딘지 더 쓸쓸해 보이던 나무들. 부채꼴 잎사귀들의 가장자리부터 번지기 시작한 샛노란 가을빛이 눈부십니다. 곧 이 방도 온통 노란 물결로 풍성하게 넘실거릴 겁니다. 내가 머문 방도, 침대도, 흰 시트도, 당신과 나의 시간을 재촉하는 벽시계도, 당신을 생각하는 나도, 내 생각 속에 있는 당신도 모두 노랗게 물들겠죠.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벌써 황금빛 노을이 흩뿌려진, 잔물결로 반짝이는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한 마리 행복한 물고기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샛노란 잎사귀들을 뒤집어 쓴 은행나무가 되어 세상을 아름다운 노란빛으로 채색하는 꿈도 꾸어봅니다. 점점 졸음이 밀려듭니다. 아무래도 오늘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추억한 것 같습니다. 이제 생각을 멈추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게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허락될지 알 수 없기에 잘 쉬어가면서 더 집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 뒤에 당신과 떠날 여행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렙니다. 당신과 수없이 많은 여행을 떠났었지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운이 좋다면 오늘 밤 꿈속에서 당신을 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도 당신, 부디 행복하기를.
일주일은 마치 영원처럼 더디게 흘렀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한 기다림을 담은 더딤이었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과 약속한 여행을 떠납니다. 짐을 싸고 있는 내 귓가에 벌써, 열어둔 창밖으로부터 성큼 들어온,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소리가 와 닿습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고요? 조금만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면, 숲속을 거닐 때 여름의 숲과 가을의 숲 사이에, 단순히 색깔의 변화 이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가을이 되면 먼저 공기 중에 습도가 확연히 줄어듭니다. 당연히 피부도, 피부에 와 닿는 바람도, 나뭇잎도 건조해지면서 버석거립니다. 나뭇잎사귀에서 수분이 빠지면, 훨씬 가벼워진 잎사귀들은 바람에 제멋대로 팔랑거릴 때마다 건조하고 상처 입은 듯한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고, 단내를 닮은 마른 냄새를 발산합니다. 그 냄새를 맡으면 왠지 입에 침이 고이면서 바싹 잘 구워진 빵이 먹고 싶어집니다. 물론 마른 잎사귀들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훨씬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그 소리는 마치 조금 멀리서 들리는, 졸졸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가을은 그렇게 수분이 적은 공기와 바람 속에서 오감(五感)을 자극하며 시작됩니다.
나는 한참 여행 가방을 싸다가 돌아보며 나보다 두 살이 많은 당신에게 묻습니다. 이 여행이 어떨 것 같죠? 당신은 내게 대답합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여행이 좋은 건가요, 내가 좋은 건가요, 라고 또 물으면 당신은 늘 그렇듯이 피식 웃으면서 오히려 내게 되묻듯이 대답합니다. 아마 여행? 그 말에 내가 애써 화난 표정을 지으면 당신은 곧 대답을 수정합니다. 둘 다. 당신은 내 기분을 풀어줄 줄 아는 여자입니다.
당신과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나 역시 당신을 보며 내 자신에게 자주 묻곤 했었습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당신을 좋아하는가? 잠시 생각한 뒤 늘 나는 속으로 같은 대답을 했었습니다, 여행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갈 때마다, 마치 가을과 낙엽의 관계처럼, 항상 당신이 내 곁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나는 상봉역에서 청평으로 가는 경춘선을 탈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춘선을 탄 뒤부터 왠지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습니다. 뭐, 곧 괜찮아지겠죠. 오랜만의 설레는 여행이라 그럴 겁니다. 당신의 옆 자리에 앉은 나는 눈을 감고 가볍게 숨을 골랐습니다. 10분쯤 지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예정대로 청평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5분쯤 거리에 있는 청평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거기에서 쁘띠프랑스로 가는 버스를 탈 생각입니다. 쁘띠프랑스 구경을 마친 뒤 나와 당신의 종착지는 남이섬이 될 겁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배차 시간을 맞추지 못한 탓에 갑자기 두 시간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나는 두 장의 표를 산 뒤 작고 낡은 터미널에서 당신과 함께 배차시간표도 보고 버스노선도 살펴보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를 뿐이었습니다. 잠시 앉아서 쉴 곳을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터미널 저 편의 편의점 2층에 있는 카페테리아 비슷한 곳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카페테리아를 닮았지만 카페테리아는 아닌 그 곳에 올라갔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오는 여자를 계단 중간쯤에서 몸을 비키며 스치듯 지나쳤습니다. 나는 잠시 서서 여자와 아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당신이 내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었을 텐데요. 당신은 말없이 웃었습니다. 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창문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잠시, 조금 전에 서성거렸던, 터미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죽은 듯이 멈춰 서 있던 버스들은 제 차례가 되면 하나씩 제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는 버스가 떠난 뒤의 빈자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와 떠날 시간이 따로 있나 봅니다. 내 차례도 곧 오겠죠. 두 시간은 쉽게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빵을 먹고 우유를 마시며 CSI 과학수사소설을 읽습니다. 주간 반 반장인 그리섬과 야간반 반장인 캐서린이 연쇄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공조 수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함께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은 각각의 장면들을 상상하려는 듯 눈을 감고 내 어깨에 기대어 말없이 들었습니다. 도중에 내가 읽기를 멈추면 당신은 눈을 뜨고, 뭐예요, 나 안 자는데 하고 가볍게 투정을 했습니다. 나는 웃으며 다시 소리 내어 읽곤 했었습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뒤 낮은 소리로 소설을 읽습니다. 내가 읽기를 멈추면 당신의 투정하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나는 왜 당신과 수십 번 간 용문사가 아니라, 굳이 남이섬에 갈 생각을 한 걸까요? 당신과 겨우 한 번 갔을 뿐인 그곳에 말이죠. 그것도 당신이 모는 지프차―여성스럽고 섬세한 당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터프해 보이는 차였는데요―를 타고 갔기에 여정이 거의 기억에 남지도 않은 그곳에 말이죠.
더디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나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버스는 오른쪽으로 북한강을 벗 삼아 나란히 달렸습니다. 쁘띠프랑스는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곳이 당신이 좋아하던 어린 왕자와 프랑스와 관계되는 곳이 아니었다면, 평생 와보지 않았을 만큼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쁘띠프랑스라는 말은 여전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아마 나는, 당신과 전에 같이 왔을 때에도,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쁘띠프랑스가 잘못된 한글표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생텍쥐페리가 쓴 소설『어린왕자(Petit prince)』를 생각했었기 때문일 겁니다. 쁘띠프랑스의 성문 같은 입구 쪽으로 향한 오르막 초입의 벽에서, 어린왕자와 에펠탑의 그림과 함께, 쁘띠프랑스(Petite France)라고 쓰인 것을 보았습니다. 전에도 이 자리에 이렇게 쓰여 있었을 텐데 그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요? 아마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쨌든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엇비슷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왕자(prince)와 프랑스(France)는, 의미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것일 뿐더러, 발음적인 차원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내가 애초에 오해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사실 이것도 정확한 표기는 아니었습니다. 여성명사인 프랑스(France) 앞에 있는 여성형용사인 ‘쁘띠뜨(petite)’는 비록 ‘뜨’라는 발음이 약화되기는 할지언정, 남성형용사인 ‘쁘띠(petit)’와 달리 ‘쁘띠뜨(petite)’―물론 한글 발음 표기상 좋게 들리지 않아서 그렇게 썼겠지만―라고 읽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왼편으로 평지보다 낮게 움푹 파인 작은 계단식 공연장이 보였고 오른편으로는 언덕 위에 아이보리색 작은 건물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줄 곳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신과 같이 왔을 때에는 거의 당신만 찍었는데 지금 나는 당신 없는 집들과 공간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시간들만 사진에 담고 있습니다. 내 사진 속에 당신을 담을 수 없어서 조금 섭섭했지만, 당신과 한 번 같이 왔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정겹게 느껴집니다. 나는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작은 공연장으로 왔습니다.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 가족이거나 연인들뿐인 사람들 틈에 홀로 섞여 간단한 공연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 관심은 공연보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에게 쏠려있었습니다. 나는 즐겁게 웃고 있는,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들을 마음껏 만끽하며 살아 움직이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내가 밟고 있는 이 굳건한 콘크리트 바닥을 느끼며,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내가 죽은 뒤에도, 당신과 나의 추억을 아무도 몰래 홀로 간직한 채, 얼마나 더 오래 이렇게 존재할까요?
내 눈에 작은 집 앞에 서 있는 어린 왕자의 작은 상(像)이 들어옵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별이, 하나의 씨앗으로 날아온 바오밥나무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었습니다. 바오밥나무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물통형의 매끈하고 긴, 나무 끝에만 가지가 일부 붙어 있을 뿐인 특이한 외양의 나무였습니다. 가지를 보이지 않는 땅 속에 처박고 뿌리를 인간의 맨다리처럼 공중에 내놓은 것 같은, 마치 뒤집힌 듯한 모습의 나무. 그래서 누군가가 이 나무를 보고 음란하다고 했던가요? 뿌리를 공기 중에 한껏 드러낸 채 수분도, 영양분도 흡수하지 못해서 곧 죽을 듯이 보였지만 수령이 5000년이 넘는다는 나무. 물통형으로 생긴 나무둥치에 많은 물을 저장하고 물을 찾기 위해 깊은 뿌리를 가졌다는 나무. 수령이 5000년인 나무가 존재하다니요! 어린 왕자가 왜 바오밥나무를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오래 살아남아서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한 별을 파괴할, 그리고 파괴된 별과 같은 운명을 맞을 나무가 왜 두렵지 않았을까요. 자기 파괴적인 당신을 닮은 나무. 사랑이라는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 날아와 내 가슴 속에, 내 머릿속에 나도 모르게 뿌리를 내린 당신. 나 역시 어린 왕자처럼, 내 안에서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그 작은 씨앗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었을 때에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실은 내가 당신을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당신이 오래 전부터 내 안에서 조용히 둥지를 틀고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내가 겨우 깨달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것처럼, 나 역시 내 안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자라는 당신에게 나도 모른 채 조금씩 다가가고 길들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수줍음 많고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했던 당신. 폭력 남편을 피해 서슴없이 4층에서 뛰어내렸던 당신. 이혼 후에 하나의 작은 씨앗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마냥 날리다가 내게 안착했던 당신. 어느 날 당신은 텔레비전에서 마라톤 경기를 보다가 뜬금없이, 죽기 전에 마라톤 풀코스를 한 번만이라도 꼭 뛰어보고 싶다, 고 웃으며 내게 말했었습니다. 온 몸에 퍼지는 고통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까지 달린 그들이 부러웠던가요? 하지만 당신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에는 이미 나 역시 너무 늦은 뒤였습니다. 하지만 비록 늦었다고 해서 우리의 꿈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2시간쯤 뒤에 나는 쁘띠프랑스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잠시 뒤 5천원을 내고 순환 버스를 탔습니다. 이 버스는 ‘아침고요수목원’에서 쁘띠프랑스와 남이섬을 거쳐 자라섬을 돌아 다시 역순으로 되돌아가는 순환버스였습니다. 예전에는 당신이 모는 지프차를 타고 왔었기에 그 또한 몰랐었습니다. 애초에 이 버스를 탔다면 청평터미널에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거나 이중으로 돈을 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는 낯설고 꼬불꼬불한 길을 계속해서 달렸고 나는 좌로 우로 심하게 회전하는 차 안에서 다시 식은땀을 흘리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몸살 기운이 있는지 몸이 좋지 않았고 구토를 할 것 같았습니다.
5시쯤 남이섬 선착장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습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강 너머 단풍이 짙게 든 남이섬 쪽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쯤 남이섬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을 겁니다. 빨리 가보고 싶었지만 머지않아 해가 질 테고, 10여분 동안 바람을 쐤음에도 어지럼증이 여전히 가시지 않아서 남이섬으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은 내일 아침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선착장 근처의 약간 언덕배기에 서 있는 7층 높이의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내부 수리를 하는 중인지 일 층 프런트 뒤쪽 구석에 공사 재료들이 약간 쌓여 있었습니다. 방은 작았지만 깨끗했습니다. 예전에 당신과 함께 묵었던 방이 어디였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약간 러브호텔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습니다. 자극적인 빨간 침대에 현란한 조명 시설도 있었습니다. 나는 방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본 뒤 컴퓨터로 인터넷을 좀 하다가 다시 복도로 나가 약간 어두운 건물 내부를 구경했습니다. 복도에서 만난, 가족으로 보이는 투숙객들을 제외하곤 사람이 거의 없는 듯 보였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선착장의 매표소 옆에 비치된 남이섬과 관계된 팸플릿을 몇 개 고른 뒤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가볍게 선착장 근처를 산책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앉아 팸플릿을 참조하며 내일의 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선착장에서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첫 배를 타고, 사진을 찍으며 섬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잠시 그늘에서 쉰 뒤 다시 사진을 찍고, 오후 3시나 4시쯤 나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때쯤이면 서울로 들어가는 국철에서 피곤한 몸을 의자에 의지한 채 편안하게 눈을 감고 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정을 점검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멀뚱거리며 천장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핸드폰에서 노래를 하나 골랐습니다. 이 호텔의, 여전히 방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방에서 당신과 땀을 흘리며 사랑을 나눌 때 함께 들었던, 5인조 그룹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였습니다. 당신의 육체를 탐닉하느라 전에는 들리지도 않던 가사가 내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어두운 사막의 고속도로에서, 서늘한 바람이 나의 머리를 흩날리고, 콜리타스의 따뜻한 향기가 그 공기를 통해 풍겨오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보았지. 나의 머리가 무겁고 눈앞이 자꾸 흐려지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을 보내기 위해 머물러야 했지. (중략) 혼자 생각했어. 이곳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중략) 너무나도 아름다운 호텔 캘리포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호텔캘리포니아에는 많은 빈 방이 있습니다. (중략)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체크아웃 할 수 있지만, 당신은 결코 떠날 수가 없을 겁니다.’ 관계가 끝난 뒤 당신은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다리를 역시 땀으로 번들거리는 당신의 왼다리로 문지르며 내게 물었었죠, 호텔 캘리포니아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건가요? 라고.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애매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캘리포니아든, 로스엔젤리스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했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 다리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당신의 다리의 따뜻한 촉감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실 호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 주의 토도스 산토스(Todos santos)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호텔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호텔 캘리포니아>가 정신병원을 의미한다는 말도 있었고, 마약과 사탄 숭배에 대한 노래라는 말도 있었지만 내겐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시절의 당신과 내가 사랑을 나눌 때 함께 들었던 것이 바로 그 노래였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내 곁에 누워 있던 당신을 생각하며 자위(自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없으니 자위도 쉽지 않군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이라면, 상처 입은 짐승에게 그러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를 보고 웃었겠죠. 괜찮아요, 피곤해서 그래. 이제 쉬어요.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당신을 가슴에 안고 당신의 등을 쓰다듬으며 잠이 들 겁니다.
나는 아침 5시에 눈을 떴습니다. 잠에서 깨자마자 왜 나는 은행나무를 떠올렸을까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어쩌면 어제 꿈속에서 은행나무를 보았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나는 호텔의 낯선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사실 당신은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좋아했었습니다. 남이섬을 좋아했던 것은 나였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달 용문사에 갔었습니다. 반면에 당신과 함께 남이섬에 왔던 것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42미터로 한국에서 가장 큰 나무로 알려진 용문사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였습니다. 은행나무 밑의 안내문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 재위)의 세자 마의 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은 것이라는 설과,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의상대사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상상을 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행나무는 적응력이 워낙 뛰어나서 공해가 심한 도시에서도 잘 자라기에 요즘 자주 심는 묘목 중의 하나인데, 토막 내어진 은행나무 둥치에서 푸른 잎사귀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도 없고 땅에 닿은 것도 아님에도 잎사귀가 나다니요. 한편으로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놀랍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치 사람의 잘려진 팔다리에서 계속해서 털이 나고 손톱과 발톱이 자라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상되어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저 토막 난 둥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어떤 간절함이 또는 어떤 안간힘이, 몸부림이 그 안에 숨어 있었던 걸까요?
당신은 천백 년을 산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은행나무 밑에서 지치지도 않고 계속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당신은 그때 은행나무의 경이로움과 섬뜩함을 이미 알았던가요? 처음에는 나도 당신의 옆에서 당신과 같은 속도로 사진을 찍었지만 곧 지치고 말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나는 나무 난간에 기대어 도무지 지치지 않은 채 계속 사진을 찍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어 은행나무를 찍는 일에 몰두한 당신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나무를 찍고 나는 당신을 찍는 이 미묘한 삼각관계는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당신의 앨범 속에는 용문사 은행나무의 사계가 지치지도 않고 해를 거듭하며 점점 늘어갔고, 내 앨범 속에는 은행나무를 찍는 당신의 사계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언뜻 보면 모두 같아 보이지만, 적어도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은행나무의 사계들이었을 것이고, 내게도 전혀 다른 당신의 사계들이었습니다. 새싹을 찍는 봄의 당신, 푸른 성장을 찍는 여름의 당신, 노란 낙엽을 찍는 가을의 당신, 흰 눈을 인 겨울의 당신. 당신은 사진들 속에서 늘 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달랐습니다. 당신과 나의 사계는 그렇게 약간 다른 모습으로 함께 흘러갔습니다. 당신과 나의 한 해는 은행나무로 시작되었고, 은행나무로 저물었고, 또 그렇게 매년 같은 식으로,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긴 호흡을 닮아가며 흘러갔습니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매번 같아 보이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 반복 속에서 당신이 보았던 것은,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포착하기도 힘든 어떤 작은 변화였을까요, 아니면 반복 그 자체였을까요?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이동을 할 수 없기에, 중심은 여전히 고정한 채로 자신의 몸체만 가능한 한 옆으로 조금씩 부풀리면서 겨우 이동 아닌 이동을 몇 미터 했을 뿐인 은행나무를 찍으면서 말이죠. 은행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어서, 무엇을 그리 보고 싶어서 그렇게 자신의 몸과 키를 비정상적으로 부풀린 걸까요?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은행나무는 자신의 뜻을 이루었을까요? 아니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여전히 또 다른 천 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아마 아직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당신과 내가 사라진 오랜 뒤에도, 은행나무는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꾸겠죠. 분명히 그럴 겁니다.
어느 가을 날, 사진을 찍는데 열중한 당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도봉구에 있는, 연산군 묘 근처의 수령이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생각했습니다. 도봉도서관에 갔다가 집까지 걸어오는 한 시간의 여정 중에 자주 지나치던 개천가, 낡고 오래된 시장 골목, 낮은 언덕길을 올라 그 정점에서 2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한 구비의 내리막 산길과 시골의 한 단면을 그대로 옮긴 듯한 텃밭들을 지난 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호두나무와 밤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허름한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곧 마주치던 작은 공원 내의 은행나무였습니다. 800여 년 동안 세상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다가, 30년도 안 된 거대한 아파트 빌딩 숲 속에 묻혀, 어느새 초라해진, 여기저기 굵고 긴 쇠 받침대들이 없었다면 진작 무너져 내렸을, 제 가지 하나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 마치 지팡이를 겨우 짚은 노인 같은 노목(老木). 내 핸드폰에는 여전히 사계절에 반응하는 이 늙은 은행나무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가나 봅니다. 푸른 이끼가 잔뜩 낀 은행나무의 굵은 둥치를 손으로 한 번쯤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출입을 금지하는 난간이 있어서 할 수 없었습니다. 800년을 넘게 산 이 나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요? 조선시대를 관통해서, 그 긴 세월 동안 이 나무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혹시 이 노목은 용문사의 노목과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요? 지나치게 오래 산 이 특별한 존재들은 뭔가 우리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대화였을까요? 800년을 넘게 살고도, 백 년도 채 못사는 인간의 도움 없이는 이제 살기 힘들어 보이는 나무이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들이 예상할 수 있는 대화는 분명 아니겠죠.
아침 6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여러 명의 사람들이 선착장 근처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였습니다. 나는 면도를 하고 얼굴을 씻은 뒤 어제 산 빵을 먹고 음료수를 마셨습니다.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을 했지만 오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일찍 나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열쇠를 프런트 안쪽에 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침 공기는 서늘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매표소 쪽으로 갔습니다. 강에는 물안개가 살짝 끼어 있어 운치가 있었고 물기에 젖은 단풍은 더 깊어보였습니다. 나는 예전 이곳에서 아침에 잡았던 당신의 따뜻한 손을 떠올렸습니다. 내 손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당신의 손의 작은 존재감. 나는 당신의 손가락들이 마치 살기 위해 간절하게 대지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나무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내 손바닥에 아직 남은 그때의 간절한 촉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배는 7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섬에 도착한 뒤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습니다. 평일 아침이라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식당에서 냉면으로 조금 이른 점심 식사를 한 뒤 잠시 차를 마시며 쉬다가 다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후가 되니 사람들은 훨씬 많아졌고 은행나무 노란 잎사귀들이 날리는 길에는 은행나무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서 사진을 찍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오전에 좀 찍어두어서 다행입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홀로 외롭진 않은가요?
자전거 두 대를 옆으로 나란히 붙인, 붉은 천정이 있는 2인용 네 발 자전거를 탄 연인이 내 옆을 지나갔습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사심 없어 보이는 환한 미소가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당신과 저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이 같이 보조를 맞추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지, 아니면 한 명만 페달을 밟아도 가는지 모릅니다. 나도 한 번 타보고 싶었지만 지금 내겐 당신이 없습니다. 나는 혼자 밟아도 자전거가 전진하지만 둘이 같이 밟을 때 더 잘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의 꿈이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즉흥적으로 표명했던 마라톤 완주에 대한 바람 말고 당신은 처음으로 진짜 당신의 꿈에 대해 내게 얘기해주었습니다. 바로 은행나무길 가의 이 벤치에 앉아서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당신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진 찍기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내가 당신에게 물었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또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영원히 멈출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 그것은 영원히 간직된 현재인가요, 아니면 이미 지나간 과거인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나는 내가 원하는 순간에 멈춘 시간을 원할 뿐이에요.”
“그래도 사진을 찍을 때 찰칵, 하는 소리가 나고 나면, 1초 전에 현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에게 현재란 단어의 의미를 제외하곤 거의 존재하지 않죠.”
“그래요. 그것은 지나간 과거예요. 하지만 또한 그 순간들을 현재처럼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그때 그 순간의 현재예요. 그런 의미에서 과거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지나간 현재이고 또 지나갈 현재예요. 말하자면 현재의 연속이죠.”
“어떻게 지나갈 현재가 될 수 있죠?”
“그때 그것은 현재였지만 그 이전의 어떤 순간에 그 현재는 미래였죠. 과거의 어떤 순간도 그 언젠가는 미래였던 적이 있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도 있고 미래에서 과거를 볼 수도 있어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간은 그렇게 가변성을 가져요. 나는 시간의 그 가변성이 마음에 들어요.”
“그럼 당신이 사진 속에 가두고자 한 것은 과거인가요, 현재인가요, 미래인가요?”
“나는 사진 속에 아무것도 가두지 않아요. 나는 단지 그때의 한 순간만을 원했을 뿐이에요. 그것은 시간과도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는 내게 있어 언제나 영원해요.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찍고 있다 보면 마치 내 서른 살 인생 따위는 한 순간에 불과하거나 또는 아예 정지된 것처럼 느껴져요. 우리 인간의 너무도 짧은 인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과는 무관한 그저 한 순간의 찰나 같아요. 마치 그냥 영원히 멈춘 순간의 현재처럼.”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 과거, 현재, 미래는 차례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마음대로 뒤섞여 있는 것들이거나, 또는 동시에 멈춰있는 듯한 무언가일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당신은 지금 여기 있지만 더 이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작년 평일에 첫 배로 도착한 남이섬의 아침에, 이 벤치 옆 은행나무 길 위에 화장(火葬)하고 남은 당신의 고운 뼛가루를 조금 뿌렸다는 사실을, 내 생각 속의 당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를 겁니다. 왜 나는 용문사 은행나무 밑이 아니라 여기에 당신을 뿌린 걸까요? 아마도 내가 이곳에 당신의 뼈를 뿌린 것은, 과분하게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당신이, 당신이 좋아했던 용문사보다는 내가 좋아했던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이제 침대에서만 여행의 꿈을 꿀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당신이 내가 원한 곳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어쩌면 꿈에서조차 다시는 이곳에 올 수 없을 지도 모르기에,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당신에게, 아니 땅에 뿌려진 당신의 뼛가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당신 행복하기를…….
나는 3시 30분쯤 배를 타고 남이섬에서 나왔습니다. 남이섬도, 당신의 뼛가루도 내 눈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이 길은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약 없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당신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버스정류장에서 30분을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줄을 선 채 내가 아침까지 잠들어 있던, 호텔캘리포니아를 닮은 듯 보이는 그 호텔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습니다. 비록 당신이 없지만, 당신의 추억이 있는 여기는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여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호텔 캘리포니아인가요? 잠시 뒤 나는 버스를 포기하고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가평역까지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면서 줄 곳 당신을, 당신과의 추억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추억하면서 당신에게서, 당신의 추억에게서 그렇게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나만 홀로 두고 먼저 떠났나요? 왜 뒤늦게 나는 당신의 길을 이렇게 따라가고 있는 걸까요?
예전에 몸이 건강할 때, 나는 식물인간에 대한, 안락사에 대한 기사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식물인간의 대체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심장이 정지하고 저산소성 대뇌 손상으로, 스스로 호흡을 하고 소화, 흡수, 순환 등도 계속 진행되지만, 의식도, 운동 능력도 없는 상태. 식물인간이 되면 의식이 없어진다는데 그 때에도 계속 꿈을 꿀 수 있을까요? 혹시 의식과 꿈은 다른 것이 아닐까요? 아니, 아마 힘들겠죠? 만일 꿈조차 꿀 수 없다면, 스스로 호흡한다는 것만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식물인간이라도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가족들의 눈에는 단지 잠이 좀 오래 든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움직이지도, 말도 못하지만 아직 따뜻한 육체. 그 따뜻한 손을 어찌 쉽게 놓을 수 있을까요. 그 점에 대해 당신과 잠깐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결론이 없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그때에는 내 문제가 아니라 남의 문제였으니까요. 인간의 존엄성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요? 인간에게 행복하게 죽을 권리가 있는 건가요?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건가요? 행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 거나 죽을 수는 없는 건가요? 이유 같은 것은 묻지도 않고 그냥 피고 지는 꽃처럼. 거의 움직이지 못해도 천 년을 살 수 있는 나무처럼. 새싹이 피었다고 그리 기뻐하지도, 잎이 떨어졌다고 그리 슬퍼하지도 않는 나무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건가요?
죽음은 무엇일까요? 심장이 멈추어야 죽음인가요, 아니면 뇌도 멈추어야 죽음인가요? 우리에게 죽음의 경계는 어디까지 일까요? 요즘 내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언제 식물인간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몸은 목 아래로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마치 가장 높은 가지 끝에 몇 개의 잎사귀만 겨우 난, 죽음을 기다리는, 또는 이미 거의 죽은 노목(老木)처럼. 하지만 분명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이제 곧 내 자신도 느끼지 못하겠죠. 아직 나는 내 규칙적인 호흡을 통해, 정기적인 눈의 깜빡거림을 통해, 말은 할 수 없지만 잦은 입 마름을 통해 내 존재를 느끼고, 움직이지 않는 내 뇌로도 아직 당신을 생각할 수 있으며, 눈을 감은 채로도 아직 당신을 볼 수 있고, 당신의 꿈도 꿀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호흡만 겨우 붙어있을 뿐, 눈도 깜빡일 수 없고, 의식도 없는 그런 완전한 식물인간이 된다면 어떨까요? 여전히 내 몸이면서 더 이상 내 몸이 아닌 내 몸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아마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라겠죠. 손톱도 자랄지도 모릅니다. 씻어주지 않으면 때도 생기겠죠. 그 때에도 더우면 내 몸의 털들이 땀구멍을 열어 땀을 배출할까요? 나 없이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때 나는 이 모든 두려움을 잊고 나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살고 싶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직 당신의 꿈을 꿀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죠. 그 오랜 풍파를 다 견디고도 여전히 꿋꿋이 서있는 고목처럼. 몇 년 동안 자신의 사진을 끈덕지게 찍던 한 여자를 기억의 저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한 나무처럼.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태어나고 죽어가는 주변의 사람들과 나무들을 보며, 영화롭거나 헛된 세월들을 보며, 천 년이 넘도록 여전히,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꿈을 꾸고 있는 나무처럼. 천 년 나무를 수없이 찍던, 지금은 내 마음속에만, 내 머릿속에만 뿌리를 내린 당신은 앞으로 내 길고 긴 꿈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마침내 잎사귀로 호흡만 하는 나무가 된,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내 곁에서 그렇게 내 꿈의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 끝 -
노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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