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역

by 무명 posted Jun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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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역



 무늬 없는 흰색 반팔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단발머리에 야구 모자를 눈썹 위까지 푹 눌러쓴 채, 그녀는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아메리카노를 젓고 있었다. 모자 창 아래로 언뜻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크고 예쁜 눈의 모양과는 달리 불투명하고 초점이 없었다. 다리를 꼬고 있었는데 까딱까딱 흔들릴 때면 샌들에 삐져나온 발가락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에나멜이 작고 붉은 모조 플라스틱 보석처럼 반짝였다. 번지거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색칠되어있었다. 그녀는 아마 십 평 남짓한 자신의 원룸에서, 낡은 소파에 앉아 붉은 색으로 물든 조그마한 붓을 들고 집중해 엄지발톱을 정성껏 칠했을 테다. 삐져나가서도 안되고 모자라서도 안 된다. 완벽한 모조 보석이어야만 한다. 낡은 선풍기가‘탁’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때 알겠더라고요. 날이 정말 덥구나.”


카페에 마주 앉은 김서현은 빛이 꺼진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스물 아홉살 때 결혼하지 않으면 영원히 결혼 못 하겠다 그런 생각했었어요. 여자들이 갖는 위기감이라고 할 까.  누구나 그런 때가 있잖아요. 해야만 해. 지금 아니면 안 돼. 두렵고 걱정되고.  그렇다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 그런 불안감이요.”

“남편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전혀요. 우리는 친구처럼 잘 지냈어요. 오늘 하려는 얘기도 남편 얘기는 아니고…….  불가사의한 얘기를 찾는다고요.”

“네. 여름 기획이죠. 자극적인 얘기 없이는 사람들이 도통 클릭하지 않아요. 저희 상주 신문이 극악범죄 사건을 시리즈로 연재해서 큰 호응을 얻었죠. 주로 해외 연쇄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긴 하지만……, 최근에는 존스타운 사건을 다뤘었죠.”

“어머. 저도 그거 봤어요. 천 명 가까운 종교 집단 사람들이 교주에 따라 집단 자살한.”

“네. 그때 반향이 엄청났죠. 근데 대중은 더 큰 자극을 원하잖아요. 여름이기도 하고요. 편집장이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일화를 특별 기획하자고 하더라고요. 어쩝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죠.”

잠시 멈췄던 발가락이 다시 까딱거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는다.

“제 친구 얘긴데… 경희라고,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아버지가 선박 무역사업을 했었고 집이 잘 살았죠. 당시에는 보기 드문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귀가 하곤 했는데 그 때면 우리들은 부러운 마음에 서로 뒷얘기를 하느라 바빴어요. 부자라서 세상 물정 모르고 자기중심적이다 라는 등 말을 지어냈죠. 근데 경희는 나쁜 애가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순수한 애죠. 불쌍하기도 하고.”

“불쌍하다니요?”

“호황이 있으면 불황도 있잖아요. IMF 터지고 180만 명의 실업자가 생기고. 매일 발생했던 8천 여 명 신용불량자 중에 경희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죠. 바람 한 점 없는 아주 더운 여름 오후에, 경희는 전학을 갔어요. 먼지만 자욱이 날리는 뙤약볕 아래로 사라졌어요.” 

 

 그녀는 지루해 볼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을 보았다.


“물론 그때는 다 어려웠으니까. 저 사실 경희하고 친했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 그녀가 나를 그랜저에 태워주면 63빌딩 꼭대기에서 개미들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태워주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과 뒷얘기에 성실이 참여했죠. 태워주면 내 친구 아니면 적. 그런데요. 웃긴 건, 걔네 집이 망한 뒤에는 친구도 적도 아니더라고요. 그냥 잊어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다 10년 뒤에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남편이 치과의사고 대대로 명망 있는 정치가 집안의 장남이라는. 어떻게 알았냐고요? 갑자기 동창회에 나오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녀는 기사가 딸린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10년 만에 동창회에 나타났죠. 만삭이었어요. 그때 동창들의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데. 도마 위의 생선이라고 토막 낼 생각만 하고 있다가 알고 봤더니 자기네들이 경희 도마 위의 생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의 그 자괴감.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그녀가 조그맣게 킥킥 거리며 웃었다.

“어떻게 남편을 선택했냐고 물었을 때 경희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글쎄요.”

“소금꽃이 폈기 때문이래요. 남편 등짝에 땀이 말라 폴로셔츠에 소금꽃이 폈다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넋이 나갔다고.”

서현은 잠시 번뜩이던 눈빛을 그전처럼 모자챙에 가린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호사다마라고. 몇 년 뒤에 나쁜 소식을 들었어요.”

“어떤?”

“죽었어요. 아이가.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다 이안류에 휩쓸렸어요. 구명조끼를 입은 채 둥둥 떠다녔죠. 남편은 경희를 도우려고 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망상에 빠졌어요. 염전에 산같이 쌓인 소금 속에 파묻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부러진 삽으로 파헤치는 꿈을 꾸거나 맥주잔에 따른 물에 소금이 보일정도로 계속 집어넣고 마시는 꿈. 소금에 절인 생선이 살아나 펄떡이는 상상을 하게 됐어요. 누구의 위로도 소용없었죠. 그러다 경희는 남편 등에 허옇게 핀 소금꽃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남편 탓이라고. 이혼하기를 바랐죠. 아니 이혼 뿐 아니라 남아있는 모든 기억을 삭제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회귀 열차를 찾았고.”

“회귀 열차요?”

“네. 그렇게 불린데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측두엽 아래 해마를 조금 삭제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어느 병원에서 어떤 의사가 어떻게 수술하는지는 아는 바는 없어요. 저도 들은 얘기니까.”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커피 잔을 이리저리 돌린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해마를 덜어낼수록 열차가 출발해요. 어둑하고 축축한 터널을 통과해서 조금씩 나쁜 기억을 ‘필요 없는 역’에 남겨두고 천천히 과거로 돌진하는 거죠. 경희는 그것을 회귀열차라고 했어요.”


***


   역장이 표를 확인하고는 경희를 열차로 들여보냈다. 역장은 서글픈 눈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 치아를 모두 보이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라미네이트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표정은 이질적이고 인공적이었다.

경희는 F2열 창가 쪽에 앉았다. 창 밖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는 텅 빈 역사를 곧 무너뜨리겠다는 기세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경희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비틀어 손을 빼냈다. 준석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본다. 경희는 서둘러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내리자.”

“…….”

“어떻게 좋은 추억만 갖고 살아.”


   경희는 무릎에 모은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낀다. 손가락을 세워 각각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게 해 뼈를 부러뜨리고 파괴하려 한다. 지구를 압축해 손아귀에 넣고 쥐어 터트릴 셈이다. 준석은 경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한 숨을 쉬며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열차가 움직인다. 길게 늘어진 레일을 따라 속력을 더해갔다. 경희는 자신이 망가진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략 2만개의 유전자 중 12992 번째 유전자가 변이를 거쳐 어떤 흐름을 가로막고는 절벽 끝으로 자신을 몰고 가려 한다고 여겼다. 그녀의 바람과 생각대로 가지 못하게 숙주를 감염시켜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고는, 이번 세대에도 자기 역할을 끝냈다고 만족해하며 에어컨 아래서 숙면을 취하는 기이한 유전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사실 그랬다. 그녀가 태어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녀가 성장 할수록 가세가 기울었으며 그녀와 절친했던 친구는 반드시 다쳐야만했다. -한번은 연필을 깎기 위해 커터 칼을 빌리다가 칼날에 친구의 엄지손가락 마디를 긋기도 했다. 진작 자신의 몸 어느 세포에 있는 잘못된 유전자를 찾아 절단했어야만 했다.

가세가 기울고 차례로 병들어 시들어가던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경희는 절벽 끝으로 기어오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 사학과를 나와서 교직 이수를 했고. 교원 임용시험에 두 차례 떨어진 끝에 합격 후 사립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냈던가. 준석과 결혼 후 비로소 그녀는 지긋지긋한 유전자의 결박을 해제했고 승리자의 영광의 징표로 새 생명까지 잉태했다. 그리고는 만삭의 몸으로 자신의 불안한 유전자를 향해 끊임없이 질타와 조롱을 일삼던 무리들에게 그녀가 건재함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비이상적인 자신의 세포가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괴상한 작용이 있다 해도 그녀는 이미 쟁취한 승리처럼 재차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돌연변이 세포들은 손 쓸 틈도 없이 바닷물을 빨아들여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의 튜브를 뒤집어버렸다. 아이는 엉덩이가 튜브에 낀 채, 분식집 돈가스 접시만한 구멍을 탈출하지 못하고 바다위에 뒤뚱뒤뚱 오리배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완전한 패배였다. 저주였다. 죽음이었다. 처절한 비명이 속안에서 곪아터졌는데도 입 밖으로는 어떤 소리조차 기어 나오지 못했다. 준석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등을 두들기고 부둥켜안고 몰락해 쪼그라든 그녀의 심장을 주물럭거렸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정복한 유전자가 완전한 변이를 일으킨 건 준석의 멀쩡하고 건강한 유전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그녀가 품고 있던 괴물에게 창피를 줬고 자괴감을 주었고 폭주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는 등에 땀이 많았고. 여름이면 늘 허옇게 소금 자국을 남겼는데 경희는‘그것’을 꽃으로 불렀다. 경희가 눅눅하고 초라한 늪을 빠져나와 절벽을 기어오를 때 경험했던 그 치열함을 그는 등에서 꽃으로 피우고 있었다. 황홀했고 아름다웠던 그 소금꽃이 이제는 퀴퀴한 땀 냄새가 밴 끈적끈적하고 바싹 말라 갈라진 논두렁같이 역겨웠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녀는 지옥 같은 석 달의 밤낮을 보내고 회귀열차에 탑승하기로 결정했다.


‘이 열차 곧 터널을 지납니다.’


   잡음 섞인 스피커의 음성은 깜깜한 터널 속을 부유하다 금세 사라졌다. 덜컥 거리더니 기차가 움직인다. 열차 내 전등이 소멸됐다가 다시 빛을 발했다.

창밖을 보고 있던 경희는 차가운 손의 감촉을 느꼈다. 준석의 손이다. 다행히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의 손에 깍지를 낀다. 준석은 치과의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울퉁불퉁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화산 속에서 튀어나와 굴러다니는 현무암처럼 자연스럽다. 경희는 무의식적으로 따라 웃는다.


“이도 중요하지만 잇몸이나 혀, 입천장도 칫솔질 해줘야하거든. 사람들은 칫솔질이라고 하면 치아만 닦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버릇을 어떻게 들이냐가 중요하다니까.”

“좋은 아빠 되겠네.”


   준석은 경희의 불거져 나온 만삭의 배를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열차는 곧 그녀를 몰락시킨 그 불운한 유전자의 잔상을 지우며 수목이 푸르게 우거진 숲을 통과하는 중이다. 친정으로 가는 길이다. 출산 직전 엄마를 꼭 보고 싶었다. 고단한 삶이 인이 박힌 그 얼굴에 잠시라도 위안을 주고 싶었다. 기차는 레일을 따라 불안하게 덜컹거렸다. 그러나 그 어떤 굉음도 소음도 곧 담배 연기처럼 사라질 테다. 준석이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떴다. 덜컹 덜컹 소리가 요란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경희는 일본 신혼여행을 떠올렸다.

도쿄에서 요코하마로 이어지는 일정이었다. 신주쿠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하코네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프린스 호텔에 짐을 풀고 준석과 시내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두통이 왔다. 지끈거리며 관자놀이가 조였다. 서둘러 근처 파친코에 들어섰다. 좁은 통로를 두고 양쪽으로 화려한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좌석에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경희는 무심하게 1엔 파친코 기계에 앉아 구술을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구슬이 구멍에 들어가고 세 개의 슬롯에 숫자와 그림이 돌아갔다. 구술을 넣고 손잡이를 돌린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넘치던 구술은 바닥을 드러냈다. 두통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구술을 재구매해 기계에 넣고 손잡이를 돌린다. 천 엔을 썼다. 이 천 엔을 썼다. 빠져든다. 비가 그친 뒤에도 계획했던 일정은 잊어버린 채 기계에 구술을 넣었다. 시시덕거리며 준석과 경희는 게임에 몰입했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지구에서 우주로 떠났고 모든 잡념은 깨끗이 세탁 되었다.

   자정쯤 호텔로 돌아왔다. 슬립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TV를 켰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는 진도5의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렸고 낡은 화장품 창고는 일부 무너졌으며 전철도 일시 운행 중지 되었다고 다급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경희는 그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귓속 달팽이관에서조차 균형감각을 상실했거나 어쩌면 정말 다른 세계로 아주 짧은 시간동안 순간 이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머리가 찌근거린다.

하늘이 무너질 듯 비가 내린다. 경희는 열차 밖의 회색빛 풍경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준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가 침을 넘긴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우리 돌아가자. 이번 역에서 내려서 반대편 열차타고 서울로 올라가자.”

“갑자기 왜?”

“지금은 기억 못해. 말해도 이해 못하고. 다음 터널이 오기까지 시간이 있어. 그러니까 날 믿고 지금 내리자.”

“엄마는? 엄마 봐야 되는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그가 간절하게 설득했지만 경희는 망설였다. 이번 역에 내리면 ‘뭔가’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밀어 오른다. 준석의 거뭇하게 자란 수염 자국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 면도를 했는데도 6시간 만에 이미 거친 피부를 뚫고 올라왔다. 차가운 손도 보인다. 창백하다 못해 붉어진 피부가 빨간 수채 물감을 손바닥에 묻히고 온 벽에 손바닥 도장을 찍고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다섯 살 아이의 어린 손과 같았다. 그는 손이 작고 손가락이 짧았는데, 손톱은 바투 깎아 동전 같이 납작한 물건을 집거나 캔 뚜껑을 따는데 불편해했다.

'손톱을 좀 기르는 건 어때'라고 물으면 그는 손을 아무리 씻어도 손톱 안까지는 씻기 어렵다며 차디찬 손으로 그녀에게 들고 있던 사이다 캔을 내미는 것이다. 경희는 그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준석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다시 눈을 감을 뿐이다. 그녀는 내릴 생각이 없다. 열차는 곧 짙은 어둠 속의 터널을 향해 들어선다.

   잠시 뒤 열차는 단풍이 만연한 산을 끼며 돌고 있었다. 유난히도 붉고 노란 원색에 가까운 나뭇잎에 경희는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매년 지나는 가을이었고. 매번 봄에 이어 여름을 건너 단풍을 지나 겨울을 보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그냥 시간에 따라 지나는 계절이며 풍경일 뿐 어떤 의미라던가 무엇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경희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경이로움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고 몰두했다.

    괴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점심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시야에 검은 물감이 칠해진 것처럼 부분적으로만 보인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황반변성이라고 했다. 망막과 망막아래에 불필요한 찌꺼기들이 쌓여서 혈액공급을 방해해 황반부를 손상하는 희귀병이라고 했다. 지금의 시력을 유지하거나 변성을 늦추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경희는 눈을 감았다. 답답했다. 눈을 떴다. 보이는데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아름다운 단풍은 매년의 봄처럼 무의미해졌다. 입술이 자꾸 말랐다. 연한 핑크빛 립스틱을 칠했었는데 모두 먹어버렸다. 낡은 흰색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바른다. 거울에 비춰봤다. 완벽했다. 완벽한 모양으로 빈곳이 없이 빼곡하게 차있다. 립스틱을 가방에 넣으려다 떨어뜨렸다. 자리를 비웠던 옆 좌석의 남자가 립스틱을 주어준다. 남자는 수더분한 외모에 작은 키에 작고 여린 손을 갖고 있었다. 손을 줬다 폈다 반복하고 있다.


“내리자. 부탁이야.”


 준석이 경희에게 말했을 때, 경희는 한동안 준석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무례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열차에서 처음 본 남자가 반말로 내리자고 말한다. 게다가 눈가에는 눈물까지 어렸다. 남자가 진심으로 애원하고 있다.

경희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발가락이 되어 움직이다 사라진 꼬리가 되고 곧 손을 생성해 피부를 파고들어 심장에 뭉툭하게 자란 그 손톱을 꽂아대는 상상을 했다. 서둘러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가방을 부술 듯 움켜쥐고 있었다. 경희는 준석이 잡은 가방을 당겨 빼 냈다. 칸막이 문을 열고 도망치듯 나갔다. 터질듯이 펌프질하는 심장이 쉬 진정되지 않는다. 다음 열차 칸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준석이 서 있었다. 경희는 신경이 곤두섰다. 다시 문을 닫고 이전 칸으로 돌아왔다. 준석은 그곳에도 서 있었다. 그가 경희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경희는 황반변성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물은 선명하고 또렷이 보일 뿐이다.


“내가 내려야 된다고 했잖아.”

“…….”


 경희는 놀라다 못해 공포에 질려 말문이 막힌다.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병원에 누워 있고 그는 내 옆에서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며 삭제된 측두엽의 일부분이 빈공간이 되어 회복되도록 조제된 약물이 내 몸속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오롯이 지워진 뇌 조각에만 남아있지 않는다며 지금이라도 습하고 답답한 병실을 걸어 나가자는 것이었다. 경희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친다. 립스틱을 또다시 먹어 버렸다.


“당신 누구에요?”

“나… 몰라?”


 그녀는 준석의 붉어진 눈을 본다. 아파 보였다. 그는 자기가 남편이라고 했다.

경희가 고개를 저었다. 준석은 시선을 먼 곳으로 옮겼다.


“지금이라도 내리자,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기억 못하게 돼”


 경희는 한동안 그를 보다 말없이 다시 좌석에 앉았다. 눈물이 난다. 이상한 눈물.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바람, 스산하고 후덥지근한 공기, 어둡고 밝은 태양….

기차가 덜컥덜컥 거렸다. 두 사람은 각자 말없이 눈을 훔쳤다. 경희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낙엽이 바람에 날린다. 

 

“그럼, 내 미래를 알겠네요?”

“알지.”

“어땠어요?”

“좋았지.”

“우리 가난했어요?”

“아니. 풍족했어.”

“가족들은 건강하고요?”

“그럼 건강하지. 아버님 황반변성 치료제도 나왔고. 매달 주사 맞아야하지만.”

“다행이네요.”

“다행이야.”

“우리 행복했어요?”

“행복했지.”

“사람들이 욕하지는 않고요?”

“아무도. 다들 부러워했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언제든.”

“입고 싶은 거 다 입고?”

“그럼.”

“근데 왜… 내가 기억을 지워요?”

“…….”

“혹시, 우리 아이 있어요?”


경희는 의심스럽게 준석을 본다. 준석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아이… 있어. 남자 아이”

“착해요?”

“극성스럽지.”


경희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애들이 다 그렇죠.”

“…….”

“지금 내리면… 만날 수 있어요?”


준석은 경희의 희망을 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석은 열차를 내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열차가 정차한 적은 없었고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억이 소멸되었다’ 정도 밖에는 어떤 정보도 알 수 없었다. 탈출로가 필요했다. 그들은 ‘필요 없는 역’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두 사람은 무턱대고 열차 칸을 나와 통로에 섰다. 통로에 들어서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비가 거세게 내리고 세상은 온 통 회색빛이다. 열차 칸 안에서 스피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곧 터널에 도착한다고 말한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준석과 경희는 차례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잔디밭이었다. 한참을 구른 뒤 멈췄다. 다친 곳은 없었다. 흠뻑 젖은 몰골로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털어내는 만큼 흙탕물이 튀겼다. 그들은 철도를 따라 터널로 들어섰다.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높이는 일반 터널의 두 배 이상으로 거의 20m는 되어 보였다. 천장에는 그만큼 거대한 환풍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일반 터널에 있을 법한 오렌지 빛 전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비가 거센 바깥에 비하면 공기는 탁했지만 아늑했다. 나선형 무늬가 바닥에서 천장까지 돋을새김 되어 있었는데 곧 어마어마한 크기의 총알이 발사돼 두 사람을 휩쓸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쉭쉭 거리는 바람소리도 그러한 상상을 부추겼다. 준석과 경희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 까. 출구도 입구도 보이지 않는 점이 되어버렸다. 경희는 쓰러지듯 땅에 앉는다.


“괜찮아?”

“괜찮아요. 발뒤축이 까졌어요. 새 구두라서 발에 맞지를 않네요. 지금은 헌 구두 됐지만.”


 경희는 신발을 벗어 바닥으로 탁탁 쳤다. 진흙물이 주르르 흐른다. 그러더니 뒤축을 꾸겨 신고는 일어섰다. 그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준석이 주변을 살펴본다. 경희가 손가락으로 천장의 전등을 가리키고 있다. 깜빡 깜빡 불빛이 흐려지고 있다. 한 참을 걷는다, 걷고 또 걷는데 불이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준석은 주머니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를 꺼내 켰다. 경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준석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라이터도 곧 꺼졌다. 그들은 벽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돌이나 철로에 걸려 수차례 넘어졌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더듬더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준석의 손에 차가운 손잡이가 걸렸다. 철문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접이문경첩이 녹이 슬어 움직이지 않았다. 준석이 어깨로 문을 밀쳤다. 경희와 합세해 밀자 그때서야 기괴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터널갱이다.

  벽을 쓸어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켰다. 곧 사그라질 것 같은 자색 불빛이 마치 난롯불을 켜놓은 듯하다. 20평되는 정방형의 공간에 한 200미터는 되어 보이는 천장까지 철제 계단이 지그재그로 놓여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공기는 서늘했고, 젖은 옷은 몸에 달라붙어 걸음을 올릴 때 마다 마찰음을 냈다. 그들은 지치고 피곤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발소리만 엇박자로 공동을 울린다. 하나의 소리가 멀어지면 또 하나의 소리가 이어진다. 누군가 천장 끝에서 천천히 북을 치고 있는 듯하다.

  한 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꼭대기에는 ‘ㄷ’자 사다리가 벽에 박혀있었고 천장에는 남자 어깨가 간신히 빠져나갈만한 해치가 달려있었다. 손잡이를 돌려서 해치를 열고 준석이 먼저 올랐다. 손을 내밀어 경희를 끌어당겼다.

그들이 올라온 곳은 지하철로 옆의 한 평 남짓한 네모난 공간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걷다보니 희미하게 형광등 불빛이 어른 거렸다. 준석은 허리를 굽혀 숨을 내쉬는 경희를 기다린다. 곧 두 사람은 불빛을 향해 걸었다.

낡고 방치된 지하철역이었다. ‘신설동 11-3’이라고 적혀 있다.


“이런 역이 있어요?”

“그러게. 그래도 신설동에 있다는 얘기니까. 길이 있겠지.”

“애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집에 있어.”

“내가 알아 볼 수 있을까요?”

“그럼, 자기 자식인데.”


 준석이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굵고 낮은 음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돌아보자, 역무원이 서 있었다. 명찰에는 이진수라고 적혀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 오셨어요. 폐쇄된 역인데.”


 준석이 화제를 돌릴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더 그가 반가웠다. 경희는 그런 준석의 시선을 따라 역무원을 본다. 낯이 익었다. 그녀가 처음 열차를 탔던 역장과 동일한 인물이었다. 진수는 라미네이트를 한 흰 치아를 보이며 웃는다. 

    

“얘기가 길어요.”

“그래요? 그럼 표부터 검사할게요.”

“표요?”

“없어요? 무임승차 하셨네. 이거 곤란한데. 요금의 30배 지불 하셔야 합니다. 어디서 타셨는지요?”

“저희는 걸어서. 그리고 폐쇄된 역이라면서요.”

“아. 내 정신 좀 봐. 그렇죠. 폐쇄됐죠. 오랜만에 손님이 오니까 반가워서 그만 깜빡 했네요.”


그러더니 그는 시간을 죽이게 되어 기쁘다는 듯이 역사 설명에 몰두했다. 서울 지하철 개통 당시에 이 역이 임시 차량정비 공간으로 쓰이다가 5호선 역사 개발이 무산되면서 계획이 수정됐고, 결국 폐쇄됐다는 것이다.


“맞다. 요금은 안 내셔도 됩니다.”


그는 한꺼번에 많은 말을 쏟아냈고, 준석과 경희는 일일이 맞장구쳐 줄 기력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지상으로 나갈 수 있어요?”

“저쪽 출구로 올라가면 2호선 신설동역으로 갈 수 있죠.”


그는 자주색 철문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그럼.”


준석과 경희가 출구 쪽으로 가려고 하자 진수가 부른다.


“나갈 준비는 됐어요? 경희씨.”

“네? 제 이름을 어떻게…”


그는 옆구리에 낀 차트를 툭툭 두들겨보인다.


“여기 다 기록되어 있죠. 뭐 이름은 중요한 건 아니고. 나가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까요? 물론 준석씨가 경희씨 기억을 잃지 않도록 조언해 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경희씨 몫이죠.”

“저는 어쨌든 밖에 나가야 돼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누구요? 아이? 이런……, 거짓말은 최악인데.”

“네?”

“남편이 거짓말 했다고요.”


경희가 준석을 쳐다본다. 준석은 물에 젖은 구두코만 바라 볼 뿐이다.


“무슨 소리예요?”

“…….”

“애는 죽었어요. 바닷가에서 놀다가 이안류에 휩쓸려서 익사했어요.” 진수가 말한다.

“아니야. 안 죽었어!” 준석이 소리 지른다.

“그래서 당신은 회귀 열차에 탑승했고, 무단이탈 했죠.”

“자기야. 저 사람 말 믿지 마. 다 거짓말이니까. 듣지 마! 아니야”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죠. 어차피 끝 난 일 아닙니까?”


경희가 털썩 주저앉는다. 준석은 할 말을 잃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흩날렸다. 그러자 곧 두 사람이 탔던 회귀열차가 역내로 들어섰다. 끼익 제동이 걸리더니 문이 열렸다. 빛이 쏟아진다. 역무원은 준석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닙니다. 본인의 기억을 지우겠다는데...  열차 기다리게 하지 말고 승차하세요. 경희씨. 모든 고통을 싹 지워 드릴 테니까. 망설이지 마시고. 경…경희씨?”


진수가 보면 경희는 비틀대며 일어나 2호선역으로 오르는 문고리를 잡고 있다.


“그 문 열면 안돼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우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어요. 다시 살 수 있다고. 경희씨, 경희씨!”


준석이 따라 나갔고 자주색 문이 쿵하니 닫힌다. 11-3 신설동역은 낡고 자욱한 먼지만 흩날렸다. 열차도 없고, 역무원도 없다. 애초부터 텅 빈 역이였다.

 자주색 철문을 열고 2호선 역으로 나왔다. 역내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그 중 몇몇은 준석과 경희의 비에 젖은 몰골을 보고는 눈길을 주기도 했지만 이윽고 핸드폰을 보는데 집중했다. 두 사람은 노랑, 빨강, 녹색으로 칠해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경희는 한동안 눈을 감더니 마른입을 뗀다.


“…어렸을 때 친구집 정원에 연못이 있었는데... 비단 잉어를 키웠거든. 어른 슬리퍼를 신고 먹이 주겠다고 사료를 뿌리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거야. 깊지 않아서 일어서면 얼마든지 걸어 나올 수 있었는데 나올 수 없었어. 비단 잉어들이 사료 범벅이 된 내 몸을 쪼아대고 있었거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바윗돌을 잡고 어찌어찌 기어 올라왔던 것 같아... 울면서 집에 뛰어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정말 다행이지 싶더라. 정성들여 몸 구석구석을 씻고, 젖은 옷은 빨아서 빨랫줄에 널고 숙제를 했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준석이 손으로 얼굴을 비빈다.


“ 그런데 잊혀 지지 않더라고. 잉어의 붉은 색깔과 뻐끔대는 두툼한 입술과 미끈한 감촉. 펄떡대는 그 느낌. 아마도 친구 아빠는 돌아갈 때 과자를 사먹으라고 천원짜리 몇 장을 쥐어줬던 것 같아. 전과 다르지 않다고 속으로 되뇌였지만 연못에 가기 전의 나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걸 알았어. 그렇잖아. 어떻게 잊어. 잊을 수가 없지.  그래서 열차에 탔을 거야. 같은 이유겠지. 단지 더 고통스럽고 더 힘들어서… 그래서 당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우리 같은 실수 반복하지 말자.”

“…….”

“잘 있어. 잘 살고.”


 준석은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굽혔다. 흐느낀다. 경희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나, 둘 천천히 계단을 누르듯 밟고 오른다. 계단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때 ‘끼이익’ 열차가 급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생각에 계단을 뛰어 내려간 경희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스크린 도어가 반쯤 열려 있었고, 전차는 승강장 반쯤 들어선 채 멈춰 있다. 준석이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는 텅 비어있었다. 그대로 털썩 앉은 경희는 목이 따끔거렸다. 소리가 속 깊은 곳에 터져 나온다. 처참한 비명 소리가 역내를 가득 메웠다.

 그때 열린 스크린 도어 아래서 혼절한, 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를 누군가 올리고 있다. 준석이다.스크린 도어 오작동으로 선로로 떨어진 아이를 준석이 구하려고 뛰어들었고, 사람들이 열차를 가까스로 세웠던 것이다. 경희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준석의 등이 펑 젖었다. 마른 옷에 젖은 땀이 또 젖었다. 소금꽃이다. 하얗게 핀 소금꽃이다. 

 

***


 날이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 때문이지 카페에는 몇몇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서현은 넋을 놓고 텅 빈 유리잔을 바라본다. 유령이라도 본 듯 했다.


“어때요? 불가사의하죠.”

“좋은데요. 궁금하기도 하고.”


서현은 모자챙을 조금 들어올렸다.


“죄송한데 지금 뭐라고 하셨죠?”

“궁금하다고요. 두 사람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요.”


서현은 다시 눈빛을 숨긴다.


“뒷얘기는 잘 모르겠네요. 경희와는 연락이 두절 돼서... 지금 몇 시쯤 됐죠?”

“7시 10분전이에요.”

“그만 일어나봐야겠네요. 그럼.”


그녀가 떠나자마자 그녀와 그녀의 얘기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꿰매졌다. 나는 혹시나 그녀를 놓칠까봐 뛰어 나갔고 반대편 교차로에서 서 있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보고 있다. 나는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저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요! 제 생각에는 요! 경희가 준석과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열차를 타고 이번에는 미래로 가는 겁니다. 어렵겠지만 두렵겠지만 무섭기도 하겠지만… 분명히, 분명히……”


그녀가 웃었다. 야구 모자를 벗는다. 그녀는 서현이자 경희이다. 그녀는 불가사의한 사고를 넘어 열차를 탄다. 불안하지만 희망을 실은 열차를 탄다. 소금꽃이 핀 열차를 탄다. 그녀가 웃는다. 손을 흔든다. 그리고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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