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저...어르신.”
아버지는 같은 병실 옆 침대의 할아버지께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흔의 춘추까지 살아오시면서 믿어 오신 신념이나 진리는 어느 것입니까?”
“죽을 때 저 새끼 잘 죽었다 하는 놈만 없으면 돼.”
“네? 어르신, 그게 무슨...”
“허무해? 그럼 그것보다 더 잘 살 자신 있어?”
아버지는 말문이 막히셨다. 밤바람이 병실의 열린 창문으로 타고 들어왔다. 하얀 커튼이 치맛자락처럼 날려 할아버지의 마른 어깨를 쓸었다.
“저 년 또 왔네.”
할아버지는 가습기를 창 쪽으로 돌리고 이불을 끌어올리셨다.
새벽 한시였다. 근무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나는 전투화를 신는 내내 얼굴을 찡그렸다. 일병 때 큰 전투화를 신었다가 발목을 삐었던 적이 있어서 얼마 전에 한 사이즈를 작게 산 것이 문제였다. 발이 쓸리기 시작하더니 뒤꿈치가 다 까졌다. 내일이면 말년 휴가인데도 어떤 사이즈의 전투화를 신어야 맞는 건지 모르겠다. 당직실로 걸어가는 데 뒤꿈치 상처가 전투화에 쓸렸다. 밀려드는 짜증에 복도 쓰레기통을 전투화 코로 금이 갈 때까지 찼다.
같이 근무에 들어갈 신병은 당직실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병은 정문에 도착하자 잠이 깼는지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고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초소 앞을 돌며 헌병다운 척을 했다.
"새벽이니까 총 내려놓고 담배나 피자."
"괜찮습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려주자 신병은 '감사합니다.'를 외치더니 로봇에 가까운 동작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음료수 캔을 건네며 앉으라고 하자 신병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내가 음료수 캔을 손에 쥐어주고서야 신병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반복했다. 평소였으면 '나중에 너 후임들이나 잘 챙겨줘.'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매캐한 연기가 새벽 별을 뿌옇게 덮었다. 냄새가 덜 난다기에 부대 밖에서 사 온 양담배인데도 냄새가 지독했다. 전투화에 까진 발이 계속 쓸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제는 지쳤다. 군대에서는 모든 신념과 고민이 무의미하다.
4월, 내가 그 부대에 신병으로 갔을 때 부대 곳곳에는 눈이 아직 남아있었다. 포대장을 맡고 있던 남소령은 부대에 복무중인 병사의 친동생이 신병으로 왔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남소령의 큰 키와 퉁퉁한 몸집에 바짝 긴장해 내 손에서는 더플백의 손잡이를 놓칠 정도로 땀이 났다. 그 때 아픈 곳은 없냐는 남소령의 질문에 나는 ‘아니요!’라고 대성박력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남소령은 눈이 반달모양이 되도록 푸근하게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전입신고를 끝내고 생활관에 들어가 짐을 풀면서 형에게 방금 만난 거구의 남자에 대해 물어봤다. 남소령은 공군사관학교 출신에 다음 달 참모총장 표장까지 예정된 엘리트였다. 뿐만 아니라 남소령은 병사들의 충성까지 한 몸에 받았다. 병사들 간의 계급 관계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로만 핏대를 세웠던 다른 간부들과는 다르게 남소령은 병사들 간의 계급 관계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라면 차라리 합리적인 선에서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래서인지 청소 시간이 되면 후임들은 청소를 하고 상병들은 감독을 맡았다. 병장들은 쉬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짐 정리를 끝냈다. 형은 같은 생활관 사람들에게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나갔다. 지갑에 끼워두었던 가족사진을 사물함 안에 넣는 순간 나는 완전히 ‘그 곳’ 사람이 되었다.
헌병 업무는 만만치 않았다. 강원도의 밤은 봄에도 기온이 영하까지 내려갔다. 산 속의 한기는 전투화 코를 천천히 얼렸다. 나는 감각이 무뎌진 발을 반대쪽 발로 밟아가며 감각을 되찾으려 애썼다. 근무가 끝나면 햇살이 바닥의 반도 채 닿지 못한 빈 생활관에서 서류를 정리했다.
어느 날 혼자서 발을 밟다가 문득 입에서 올라오는 입김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새벽별이 보였다. 새벽별은 초소 안에서 혼자 잠든 병장도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깜깜하고 싸늘한 부대에는 동물들이 풀 밟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새하얀 별과 감색으로 바뀌어 가는 새벽하늘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발은 시렸지만 차가운 이불처럼 청량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잠을 못자다보니 몸속이 삭는 것 같았고 한쪽 뇌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견디게 해준 것은 매일 밤 같은 자리에 있는 새벽별들이었다. 어느 여신의 감색 드레스에 박힌 그 큐빅들은 말라가는 내 몸에 빛과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에 법원은 모 기업의 비리 및 은폐 여부가 의혹에만 그칠 뿐 아직 정확히 밝혀진바 없으며 사실로 드러난 로비 및 접대 의혹은 기업 간의 친분 관계 유지 중 하나로 보고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같이 TV를 보던 형은 말년 휴가를 나온 동생에게 치킨을 사주겠다며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다가 입을 연다.
“남소령의 인간미는 ‘빈틈’이 아니었어. ‘유연함’이었지. 포대는 그런 사람이 계속 맡았어야해.”
담배를 끄다가 나도 모르게 꽁초를 짓이긴다. 배가 부르고 취기도 올라와 맥주잔도 소주잔도 잡지 못한 채 손만 허공에서 빙빙댄다.
“전 병사 교육장으로 집합!”
봄의 아늑한 온기가 점점 불편해지더니 여름이 왔다. 근무를 끝내고 생활관으로 돌아와 헌병 헬멧을 벗자 헬멧 안에 가득했던 열기가 얼굴을 쓸며 내려갔다. 땀에 절어 러닝이 잘 벗겨지지 않자 러닝 자락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따뜻한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찰나 복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 나오는 생활관 어디냐, 왜 안 나와!”
벗고 있던 러닝을 그대로 입고 복도로 뛰었다. 그 날은 ‘마음의 편지’ 공개 날이었다.
검은색 활동복에 전투모를 눌러 쓴 선임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까마귀 떼처럼 복도 한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다. 후임들은 선임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으려고 복도에 몸을 바싹 붙이고 걸었다. 복도는 간간히 들려오는 날카로운 욕 소리를 빼면 발소리로 가득했다. 한바탕 선임들이 지나가자 바닥을 끄는 발소리가 사라지고 후임들이 또각또각 걸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모두가 모인 교육장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일병이었던 나는 온몸에 힘을 주어 차렷 자세를 했다. 혹시라도 선임들에게 잘못 보여 선임 생활관에 불려가는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두려웠다. 얼마 전 청소시간에 병장 생활관을 청소하면서 어느 병장의 경험담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러닝과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그 병장은 재현까지 해가며 자신의 동기들에게 후임을 밤새 때렸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안 재우고 밤새 욕을 하니까 얘가 자꾸 울면서 비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멱살을 잡고’ 하면서 옆에 앉아있던 병장의 멱살을 쥐는 시늉을 했다.
“너 내가 휴가 못 나가게 해서 여자 친구 못 본거 때문에 나 찔렀던 거지? 너 지금 여기서 여자 친구랑 잔 거 얘기 해봐. 그럼 내가 보내줄게.”
병장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장 한 명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내 다른 병장 하나가 생활관 가운데로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빗자루를 챙겨 조심스럽게 경례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뿔테를 쓴 병장이 교육장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굴에도 힘을 주며 차렷 자세를 했다. 행정병이었던 그 병장은 뿔테를 올려 쓰더니 가져온 ‘마음의 편지’를 읽어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개 병장이 일을 안 합니다.’, ‘병장들은 왜 청소를 안 합니까?’같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거는 너희가 상병, 병장 되면 다 누리는 거다. 어차피 기각될 거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도 이딴 거 써 내냐.”
선임들의 욕이 곳곳에서 들렸다. 상병이 얼마 남지 않은 일병들의 욕도 간간히 들렸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너희를 부른 것은 이것 때문만이 아니다. 너희 중에 마음의 편지를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한 사람이 있다.”
순간 행정병의 뿔테 밑에서 미간이 팍 구겨졌다.
“아무리 공군이 성적으로 병사를 뽑는다고 해도 얼마나 잘났기에 부대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써내는 거냐. 이건 포대장님께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다. ‘부대 내 불평등과 폭력에 대한 보고서’ 쓴 사람 반드시 잡아낼 거다.”
행정병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서류를 집어 들고 병사 자리로 갔다. 보고서에는 병사들 간의 불평등한 업무 분담과 구타 및 언어폭력 사례가 낱낱이 적혀있었다. 모든 사례는 실명으로 적혔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도표까지 그려져 있었다. 선임들 사이에서는 의심 가는 몇 명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이름이 수군거려지는 병사들은 못들은 척 했지만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보고서의 의도를 알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은 작성자를 잡는 데에만 전념했다.
남소령이 교육장에 들어섰다. 그는 왼팔에 파일을 끼고 또각또각 군화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연단 앞에 멈춰 병사들을 바라보더니 파일을 탁 소리를 내며 연단에 내려놓았다. 모두가 긴장하며 남소령을 응시했다. 그런데 남소령은 씩 웃고 있었다.
“우리 너무 심각한 것 같은데 단순하게 생각하자. 물론 이번 사태에 거론된 가해자들은 감점과 봉사활동을 비롯한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도 우리 부대의 구성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이병, 일병이었을 때 여기 있는 병사들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며 부대에 헌신했다. 우리는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짬 차는 맛도 군생활의 재미다. 가족처럼 서로 이해하며 지내자.”
남소령은 말을 마치고 간단한 전달사항을 전파했다. 최선임자의 경례와 함께 집합이 종료되었고 선임들은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얼굴까지 경직시켰던 내 몸이 더 뻣뻣해졌다.
그날 밤 보고서 작성자로 의심받은 다섯 명이 선임들에게 불려가 ‘순회공연’을 돌았다. 그들에게는 평소에 불성실하고 비협조적이라는 죄까지 더해졌다. 다섯 명은 불 꺼진 병장 생활관에 나란히 서서 목멘 소리로 여자 친구와 잤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어둠 너머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마 선임 중의 한명은 ‘내가 예전에 지금이랑 똑같이 해봤는데’ 하며 누군가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새벽 근무를 나가면서 보니 병장 생활관 창문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같이 근무 나온 선임이 잠들자 나는 몰래 담배를 꺼냈다. 유독 검은 하늘과 구름 탓에 새벽 별이 평소보다 작아보였다. 하지만 그 빛은 여전했다.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친형과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는 덕에 군 생활이 힘들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부대는 바뀌어야했다. 하지만 선임들은 과거의 피해자였다. 심지어 그들이 겪었던 고통은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국군이 ‘선진 병영생활’을 목표로 세우며 군대는 점점 이성화되어갔다. 하지만 상병, 병장들은 적으로 취급 받았고 그들이 받았던 고통은 정의라는 명분하에 묵인되었다. 남소령은 모두가 묵인한 그들의 과거를 ‘공로’로 인정했다. 선임들의 입장에서 남소령의 정책은 모든 입장을 고려한 최초의 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객관적인 정의’와 거리가 멀었다. ‘보고서’는 우리가 여전히 진흙탕 속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변화는 여전히 진창 속을 허덕였다. 변화를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상병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후임들과 선임들 사이의 갈등은 깊은 물속의 묵직한 물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셌다. 후임들의 저항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마음의 편지는 선임들을 마녀사냥 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선임들은 마음의 편지 작성자들을 잡기 위해 행정병의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밤이 되면 후임들이 선임 생활관으로 끌려갔고, 헌병대에는 해가 뜨자마자 선임들이 불려왔다.
후임들의 거짓 보고는 점점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선임들은 행정병을 매수하거나 더 잔인한 가혹행위를 동원했다. 더위가 정점을 넘어 싸늘해지기 시작한 가을, 큰 전투화를 신고 작업을 하던 나는 친했던 선임의 호통을 듣고 달려가다 발목을 삐었다.
새해가 되었다. 나는 상병이 되었고 군 생활 1년 차에 가까워졌다. 같은 부대에 1년 먼저 와 있던 친형은 말년병장이 되었다. 이미 총보다 냉동식품을 잡는 것이 더 익숙해진 형은 진급 기념이라며 내 손을 붙잡고 B.X.로 갔다. 냉동치킨을 가운데에 두고 형은 나의 남은 군 생활 계획을 물어봤다.
“공부는 영어공부 계속 하려고. 읽고 싶은 책도 많고. 그리고 혼자 세운 계획은... 이병 일병 때 생각했던 거 절대로 안 잊어버리는 거야. 후임 시절을 잊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기특하네.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는 마.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정의가 다른 건 둘째 치고 우선은 네가 생각하는 정의가 옳은 건지 아는 것도 진짜 힘드니까.”
우리는 침묵하고 냉동치킨을 집어 먹었다. 잠시 뒤 우리는 걸 그룹 같은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다가 노래방으로 갔다.
상병이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폭설 때문에 제설 작업이 끊이지 않았다. 건빵주머니에 뜨거운 캔 커피를 넣고 제설 작업을 하는 중에 방송이 흘러나왔다.
“16시 00분에 포대장님의 전출 행사가 있습니다. 전 병사는 16시까지 체육관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던 후임의 팔을 툭 쳐서 창고 뒤로 갔다. 담배를 건네자 후임은 자기 것을 피겠다며 양담배를 꺼내 물고 내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 나는 캔 커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더니 이내 몸이 따뜻해졌다. 후임은 내가 건넨 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오늘 남소령 전출인줄도 몰랐네. 그 담배는 뭐냐?”
“휴가 나가서 사온 양담배인데 냄새가 덜 난다고 해서 사봤습니다.”
“그래? 헌병들 초소에서 담배피면 간부들이 냄새 때문에 눈치 채던데 앞으로 후임들이랑 그거 피워야겠다.”
“저는 나중에 상병 달면 정말로 상병님처럼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후임 생각 해주시는 분들 많지 않은데 정말 닮고 싶습니다.”
“너 정신병원으로 외진 좀 가야겠다. 다시 나가서 하던 일 계속 하자.”
우리는 펜스 밖으로 빈 캔을 던지고 눈 속에 담뱃불을 박아 껐다. 제설 구역으로 돌아와 보니 간부들이 높은 분들께서 오시기 전에 눈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1년의 임기를 다 채운 남소령은 짧은 행사를 마친 뒤 포대장 전용차를 타고 나갔다. 욕을 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아쉬워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병장들은 대부분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2월은 추위에 익숙해진 우리를 위해 눈을 내려주었다. 포대장 운전병이 포대장 전용차에 새 얼굴을 실어왔다. 새로 부임한 이소령이었다. 이소령은 남소령과 사관학교 동기인데도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다. 키는 내 턱쯤 왔지만 어깨가 벌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많아 거칠고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 때 시체닦이까지 해가며 학비를 벌어 온 사람이었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은행 지점장 딸과 결혼한 남소령과는 정반대였다. 부대 행사 때마다 고급 바람막이를 입고 캔 맥주를 준비하던 남소령과 달리 이소령은 낡은 파일럿 가죽 재킷을 입고 소주를 준비했다. 시체닦이 시절에 소주 한 잔을 꼭 마시고 영안실에 들어갔다던 그의 경험을 생각하지 않아도 소주는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간단한 부임 행사가 끝나고 이소령은 몇 일간 혼자 부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며칠 뒤 야간 근무 중이던 나에게도 왔다.
“근무는 할 만한가?”
“예, 그렇습니다.”
“물어보나 마나 한 것을 물었군. 부대에 바뀌었으면 하는 부분 있나?”
“개인적으로...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소령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고생하게. 난 가 보겠네.”
이소령은 정문을 열더니 산 아래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운전병 불러드리겠습니다. 밤에 눈 덮인 산길은 위험하십니다.”
“아닐세. 운전병도 자야지. 고생하게.”
이소령은 가죽 장갑을 손에 끼우고는 산 아래쪽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나는 그 순간 막 뜨기 시작한 새벽 별이 그의 머리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별은 몇 시간 뒤에 하늘 높이 올라갔다. 감색 드레스를 입은 여신의 눈동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마다 나를 찾아온 여신과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감색 드레스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보는 순간 나는 황홀함에 빠져 낮고 벅찬 숨을 쉬었다.
얼마 후 포대장이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근무를 마치고 초소에서 돌아오던 나도 교육장으로 향했다. 교육장에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말년 병장이었던 형은 방한내피에 전투모를 쓰고 다른 병장들과 함께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상병이 된지 얼마 안 되었던 나는 적당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교육장 안에는 상병과 병장만 있었다. 한순간에 막내가 된 나는 얼떨떨해져 차렷 자세를 했다. 이소령이 교육장으로 들어왔다. 이소령은 군화 밑창에 자갈이 끼어 걸을 때마다 군화 소리와 대리석 긁는 소리가 동시에 났다. 뒤따라 들어온 주임원사는 우리에게 A4용지를 나눠주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구타 및 가혹행위, 불평등한 업무분담을 시키거나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은 육하원칙에 따라 모두 A4용지에 적는다. 만일 다른 사람이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는데, 자신은 그 일이 적지 않았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
병장들이 A4용지를 그대로 접기 시작했다.
“상병, 병장은 왜 규정된 복장을 하지 않고 전투모와 활동복, 방한내피까지 혼합해 입었지? 군복을 혼합해서 입는 것은 군인복무규율에 금지되어 있는 사항 아닌가?”
병장 무리 속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저번 포대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병장들은 아무것도 적지 않은 A4용지를 마저 접고 다시 다리를 꼬았다. 포대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병장 전체 일어나.”
병장들이 포대장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포대장이 고함쳤다.
“다 일어나 이 개새끼들아!”
놀란 병장들이 허겁지겁 일어났고, 그들이 앉아있던 의자가 넘어져 교육장 바닥을 뒹굴었다.
“난 지휘관이고 지금 이치에 맞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를 위반하는 것은 군법에 명시된 엄중 처벌 대상이다. 모두 지시한대로 종이를 작성하도록!”
병장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앞에 앉은 상병들의 펜을 빼앗았다. 나는 종이에 ‘가해, 피해 경험 전무합니다.’라고 적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방송으로 20여 명의 병사들이 헌병대로 불려가는 것을 듣고 오침에서 깼다. 분명히 친형의 이름도 들렸다. 형이 누군가를 때릴 사람은 아니기에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전에 혼냈던 후임이 나를 적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복도에서는 몇몇 병사들의 욕과 고함이 들려왔다.
이소령은 본격적으로 부대를 바꾸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군복의 혼합 착용을 금지했다. 그리고 모든 병사가 똑같은 두발 기준을 지키도록 했다. 업무 분담에서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일을 선임이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병사가 비슷한 양을 할당받도록 했다. 청소와 작업 구역도 기수별로 분담해 선임들도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부대는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청소시간이 되면 병장들은 활동복에 활동 모자를 쓰고 대걸레를 빨러 갔다. 짧은 머리를 한 상병들은 걸레로 창문을 닦았다. 여전히 선임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수직보다는 대각선 위에 있는 권력이었다.
부조리 처벌 역시 강화되었다. 방송으로 불려갔던 20여명은 특별 관리대상자로 지정되어 모든 행동을 장교들에게 허락받아야 했다. 나의 친형도 예외는 아니었고 전역 전날까지 군기교육대에 참여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형을 비롯한 몇몇 병장들은 전역을 앞두고 군기교육대를 가야한다는 사실에 탄원서를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전역하는 날 이소령을 공군 감찰부서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소령은 흔들리지 않고 부대 개혁을 진행했다. 이소령은 마음의 편지함을 본인만 볼 수 있도록 바꾸어 행정병들이 신고자를 알아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의 편지를 이용해 마녀사냥을 한 후임들은 허위 보고로 영창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소령이 부대를 바꾸고 며칠이 지났다. 아침점호시간,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깜깜한 야외에는 병사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지휘자가 구령을 시작하자 줄을 맞춘 병사들이 군가를 불렀다. 비록 상병과 병장들은 귀찮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병사들은 모두 같은 차림으로 서 있었다. 군가가 끝나갈 즈음 해가 뜨며 새벽 별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신의 눈이 우리를 정면에서 마주했다. 일출에 붉어진 구름이 입술처럼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여신은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산 너머로 몸을 뉘었다.
폭설로 제설작업이 끊이지 않았지만 날씨는 꽤나 포근했다. 생활관으로 돌아와 사물함을 정리하는 데 가족사진이 보였다. 얼마 전 흡연장에서 만난 이소령은 다음 포대장에게 완벽한 인수인계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병 때와 달리 오랜만에 본 가족사진은 아련하기보다는 반가웠다. 생활관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따뜻했다. 날이 갈수록 햇살이 점점 생활관 안쪽까지 들어오더니 얼마 뒤 봄이 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봄바람은 즐길 여유도 없이 더위로 변했다.
초소 온도계가 30도까지 올라갔다. 병장이 된 나는 주머니에서 아이스티 스틱을 뜯어 스테인리스 컵에 부었다.
"너무 덥습니다. 차라리 겨울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 해 봄에 들어온 후임은 겪어보지도 않은 겨울을 그리워했다.
"막상 겨울 되면 그런 소리 못할걸. 마셔."
나는 아이스티 잔에 얼음을 넣어 후임에게 건넸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근데 굳이 겨울 안 겪어봐도 알 것 같습니다. 군대는 진짜 여름에 오는 게 제일 고생입니다."
목까지 올라온 욕을 아이스티로 삼키고 조용히 책을 꺼내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이 점점 아찔해지더니 이내 머릿속이 핑 돌았다. 책을 후임의 발 앞에 던지자 후임은 놀라 휘청거리더니 이내 차렷 자세로 섰다.
"넌 겨울을 안 겪어본 게 문제가 아니라 생각도 안 해보고 지껄이는 게 문제야. 이번 겨울에 제설작업하고 동상 걸린 발로 근무 들어갔을 때도 그딴 소리 나올 거 같아? 그딴 소리 한번만 더 하면 그때는 입 찢어버린다."
근무를 서는 내내 머리가 핑 돌았다. 기동타격조가 순찰을 돌다가 초소에 놀러왔다. 나는 후임을 세워놓고 초소 뒤로 가서 기동타격조원들과 담배를 피웠다. 여자 친구가 있는 후임과 없는 후임이 둘이서 자기 군 생활이 더 힘들다며 티격태격 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선임 두 명은 전역 후 등록금 걱정과 고졸 콤플렉스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문득 한 명이 밖에 세워 둔 후임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쟤 너 아들군번 맞지? 볼수록 묘하게 비슷하단 말이야.”
“안 그래도 어지러우니까 헛소리 하지 마.”
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오면서 옆에 있는 후임을 힐끗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비슷한 점을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머리가 더 아파와 포기했다. 그날 저녁, 평소보다 이틀 늦게 마음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그런데 게시판에 뜻밖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부대 내 문화 및 제도를 남소령 시절로 바꿨으면 합니다. 저희가 이병, 일병 시절에 겪은 고통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팠다. 머릿속을 휘젓던 물결이 머리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벽을 짚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들고 흡연장으로 나갔다.
흡연장은 이미 마음의 편지 얘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흡연장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연기 너머의 얼굴들을 향해 나는 마음의 편지를 적은 병사가 누군지 아냐고 물어봤다. 킬킬거리던 병장 하나가 대답했다.
"아마 김 아무개랑 그 무리들이라는 거 같던데. 그 있잖아, 얼마 전에 상병 단 애들. 솔직히 걔들이 보상받으려고 하는 건 좀 어이없지만 내가 알바 아니지. 어차피 집에 갈 건데 몸까지 편해지면 좋으니까."
김 아무개 무리가 남소령 시절로 돌아가기를 주장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이소령이 부대에 왔을 때 이병, 일병이었던 병사들이다. 이소령의 개혁으로 공평한 업무 분담을 받았던 그들은 상병이 되자 자신들의 공로를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이번 사안이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법 사각지대에서 자행되어 온 비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치킨 배달부가 문을 두드린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형이 나를 축하해주던 날이 있던 것 같다. 이미 냉동치킨보다 치킨이 익숙해진 형은 배부르다는 나의 손을 끌고 식탁으로 간다. 치킨을 가운데에 두고 형은 나의 전역 후 계획을 물어본다.
“복학하기 전까지는 영어공부 계속 하려고. 그리고 군대 습관도, 군대 기억도, 군대 말투도 다 잊어버릴 거야. 이제 민간인이잖아. 여긴 거기랑 다르니까.”
“기특하네.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는 마.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막상 해보면 그게 생각처럼 안 될 때가 많거든. 그런데 웃긴 건 사람들이 실패한 다음에 새로운 신념을 세우면 그걸 해보지도 않고 또 맹신한다는 거야.”
나는 침묵하고 치킨을 집어 들었다.
복고를 원하는 목소리가 주위에서 점점 커졌다. 동기들은 남소령 시절의 병장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이야기했다. 청소시간이 되자 동기들은 슬리퍼로 바닥의 쓰레기들을 대충 끌어 한쪽으로 몰아놓고는 다시 생활관 침대로 돌아갔다. 나를 롤 모델이라 부르던 후임은 흡연장의 재떨이를 들고 와 일병들 앞에서 내동댕이치며 청소 좀 제대로 하라며 소리쳤다.
마음의 편지 조치까지 연기되자 복고를 원하는 목소리는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병, 일병 시절을 남소령 밑에서 보낸 병사들뿐만 아니라 이소령 밑에서 보낸 병사들 사이에서도 복고의 목소리가 나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복고를 외치는 목소리와 유지를 외치는 목소리의 갈등은 눈앞에서 펼쳐질 정도로 커졌다. 결국 이소령의 전출을 앞둔 어느 날, 한 병사가 이소령을 여단 본부에 역차별로 신고하면서 부대 내의 갈등은 분열로 끝을 내렸다. 부대는 남소령 때보다도 처참하게 무너졌다.
전출 행사 날, 이소령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병사들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행사는 중단되었다가 잠시 후 재개되어 급히 마무리 지어졌다. 이소령은 포대장 전용차를 타고 나갔다. 근무를 서고 있던 나는 말없이 정문을 닫았다. 그날 밤 새벽 근무 때 나는 새벽 별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 담배는 더 이상 여신을 위한 향불이 아니었다. 그저 고인을 위한 향이었다. 난 더 이상 여신의 눈을 믿지 않았다. 감색 드레스의 여신은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나갈 생각뿐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오늘 아침, 새로 온 포대장에게 말년 휴가 신고를 했다. 그는 나에게 '자네가 아무개인가?'하며 악수를 하고 포옹까지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밤 9시다.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끝낼 시간이다. 나는 짧은 머리에 왁스를 간신히 바르고 휴대폰을 집어 든다. 이제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는다. 발을 감싸는 쿠션이 푹신하다. 안방에 계신 부모님을 향해 '갔다 올게요.'를 외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간다. 모든 것이 끝났다. 후련하면서도 찝찝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런데 라이터에 담배를 대는 순간, '휘청' 하더니 그대로 중심을 잃고 나뒹군다. 눈앞에 아스팔트 바닥이 바싹 다가오더니 손바닥이 욱신욱신하며 쓰려온다. 발목이 시큰거려 몸을 일으켜 청바지를 걷는다. 주먹만큼 부어오른 발목이 보이는 순간 머리가 핑 돈다. 발목이 삔 것 같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감색 밤하늘이 아득해 아찔하다. 멀리서 눈동자 같은 별 하나가 점점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다. 식은땀이 흐른다. 지독한 양담배 냄새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김없이 어둠 속에 담배연기가 아득히 올라간다.
단편소설
주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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