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벽두

by 1000 posted Jul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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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3년 전부터 감정 모방 프로그램이 설치된 안드로이드에모토이드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발명은 이미 훨씬 전에 이루어진 상태였지만 시중에 내놓기엔 가격이 천문학적이었고, 에모토이드가 사회에 쏟아져 나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 혼란에 대한 대책 마련도 완성되지 않았기에 상품화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고객이 될 사람들도 두 부류로 나뉘어서 의견이 팽팽했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가지면 인류에게 많은 보탬이 될 것이라며 하루 빨리 출시되었으면 한다는 쪽과, 도리어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니 지금이라도 어서 기술을 폐기하자는 쪽. 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말싸움을 하면서 실컷 떠들어 봤자 어느 쪽이든 결국은 신제품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세상에 기준이 상향 조정된 안드로이드 없이 구식 모델만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구호 물품을 받아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 밖에 더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명이야 진즉 되어있었고 시중에 풀릴 때까지 개발자들이 손 놓고 있지는 않았던 덕에, 고객들을 벗겨먹을 생각만 하는 기업들은 교활하게도 달마다 조금씩이나마 업그레이드된 에모토이드를 혁명이라도 일으킨 양 광고하며 요란스럽게 출시했다. 그러니 그에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기간이 얼마나 지났던 간에 기술 차이가 극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에서야 에모토이드 하나 마련해 볼까 싶은 마음이 드는 그는 분명히 유행에 낙오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프로토타입 같은 거죠. 연산 속도는 빠른 축에 속하긴 합니다만 감정 모방에 대해서는 상당히 서툴러요. 거의 기존의 안드로이드와 다름이 없다고 보셔도 무방할 정도라, 기대하시는 것 보다는 한참 이하일겁니다.”

 “어쨌든 감정 모방 프로그램이 아예 설치가 안 된 건 아니라는 소리죠?”

 “, 그렇죠. 일단 에모토이드이긴 하니까요. 구매하시기 전에 참고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남들은 다 하나씩 있다던 그 유명한 에모토이드 하나 장만해보고 싶었던 것뿐이라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거창하고 대단한지는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첫 가게에 발을 들이자마자 예상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아 도망치듯 나와서는, 입 속으로 욕 짓거리를 한가득 굴리며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탓에 심신이 지쳐 그냥 빨리 싼 것으로 사고 끝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면 상관없어요. 차라리 이런 편이 일하는 데 더 수월할 지도 모르는 일이고.”

 “, 손님 하시는 일에 쓰실 건가 봐요.”

 “, 얼마나 쓸모 있을 지는 옆에 두고 봐야 알겠지요. 에이에스 기간은요?”

 “생산 중단된 상품이라 구매하시면 환불은 조금 어렵구요. 인공 지능 부분을 제외한 부품에 대한 교체는 1년 안에 무상으로 가능합니다.”

 


 그저 발밑에 세워둔 가격표만 보고 고른 것이라 싼 게 싼 값 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에 있어서도 괜히 사람 써서 인건비는 인건비대로 나가고 혹여나 사고라도 치면 뒷수습은 무조건 그의 몫이었기에, 뒷수습이라 해도 여차하면 화풀이 하는 셈 치고 부수면 말 안드로이드를 쓰는 게 훨씬 수가에 맞았다.

 


 “, 그럼 이걸로 주세요.”



정말로 그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감정 따위가 있든 없든 안드로이드가 주인에게 그 어떤 종류의 위협도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사회 전체에 만연했고, 적어도 그는 거기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감정 벽두]


 

 

 안드로이드는 주인을 해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안드로이드가 주인에게 절대복종해야만 하는 노예 내지는 소유물일 뿐이고, 수직관계에서 명백한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당연한 소리라고만 얼핏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인간들의 역사에서 하위 계층이 모반을 일으킨 사례는 결코 적지 않고, 인간들은 그 덕에 조상들이 계몽되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며 심지어는 자손들까지도 교육해서 대대로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실제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피해를 본 건 인간들 본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정말 안드로이드가 언제까지나 발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최대한 인간과 비슷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으로도 모자라 감정 모방 프로그램마저 겁도 없이 설치해놓고서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우리를 통제하려 드는 걸까?


 물론 개발자들까지 그런 생각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그 시점부터 인간들은 기술의 무궁한 발전에서 파생될 인간들의 불이익에 대비해야 했다. 그와 관련해서 방안이 좀 더 가시화 된 건 감정 모방 프로그램이 정식으로 발매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는데, 정부는 안드로이드 생산법에 안드로이드가 주인에게 적개심을 가지지 못하게 할 모든 수단을 동원하도록 명시했다. 그래서 나는 한낱 에모토이드 중 하나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에모토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우리를 한 번에 제어할 무언가를 내 모든 운동기관에 심어두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따라서 저 문장에서의 핵심은 의지의 결여가 아니라 능력의 결여라는 것이다.

다만 가능성을 배제하고서도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해칠 생각을 할 정도로 주인을 증오할 수 있는가, 하는 게 나는 궁금할 따름이다.

 

 

야 뭐해! 일로 와봐!”

  


 명령이 아니고서는 먼저 말을 붙이지도 않는 저 남자는 내게 그 흔한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주는 대단한 호의는 꿈에서도 바란 적 없었고 되려 나를 부르는 호칭부터 비속어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해야 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대화하는 시간은 30분도 채 되지 않는 날이 허다하고 그나마 건네는 말도 나를 위하는 일 없이 매정하다. 안드로이드가 주인에게 앙심을 품는다면 그 주인은 분명 이런 상일 것이다. 안드로이드의 기본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최근 추세에 역행하여 아직도 안드로이드를, 하물며 저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몹시 다분한 에모토이드를 하인 이하로밖에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보수층. 말이 좋아 보수지 내가 보기에 주인은 그저 바깥 상황에 아무런 관심도 생각도 없다. 그러니 달라진 세상의 흐름에 따라 가치관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이 모든 일에 불만을 가지며 주인을 미워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내가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세상이 발전하더라도 그를 증오할 권리 따위 내게 평생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와 별개로 아무리 그가 나를 험하게 대해도 나는 거기에 아무런 감상도 가지지 않는 덕이다.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빨리 밥 차려와.”

 “, 주인님. 오늘은 어떤 걸 드시겠어요?”

 “뭘 물어 새삼스럽게? 네가 알아서 해.”

 


 오늘은 뭔가 기분이 언짢아 보이기에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나에게 그릇을 집어 던질까봐 미리 선수 쳤는데,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야 주인이 던지는 그릇 정도는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고, 맞는다고 해서 으레 표현하듯 기분이 나빠질 만큼 방금 한 경험에 대해 연산 과정을 거쳐야 할 만큼 무게를 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외관을 다시 재정비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나는 효율을 따져야 하는 안드로이드로서 그런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에모토이드라고 해도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처럼 도저히 감정이라는 말이 와 닿지가 않는다. 한편 내게 입력된 지식이나 관찰한 바를 따라서 감정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야말로 비효율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쓸모없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물이 어떻게 지금까지 종을 존속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인간들은 종종 정답이 명확히 보이는데도 감정을 핑계로 일을 그르치곤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인 옆에서 일을 할 때도 대체 왜 저럴까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당장 저번 주만 해도 자다가 총성이 난발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몇 달 전에 그 아이를 죽이기만 했으면. 주인은 아이를 살려두면 언젠가는 골칫거리가 될 것을 알고 있었고그 결과를 책임질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실제로 한 밤중에 난리가 난 통에 한심하게도 총알에 빗겨 맞아서 지금까지 허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


 그럴게 뻔한데도 아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던 내게 어린 애를 죽이는 건 좀 그렇지라는 말을 하며 내게서 총을 빼앗아 갔고, 너무나 당연한 일인 듯 내 손아귀에서 총이 쉽게 빠져나가자 나는 내가 잊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나 싶어 내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내기엔 내 수준의 지식에선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어느 샌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그에게 좀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불쌍하잖아.”

라며 눈썹 하나를 까딱 하고선 호기롭게 등을 돌려 아이를 살려둔 채로 그 곳을 빠져나왔다.


 불쌍하다? 불쌍하다의 뜻이 무엇일까. 불쌍하다. 형용사. 처지가 안되고 애처롭다. 불쌍하다의 유의어로는 딱하다, 가긍하다, 안쓰럽다, 측은하다 등등. 전부가 내가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도 없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말들. 다른 에모토이드들은 이런 상황에서 쉽게 납득하고 넘어갈까? 나처럼 그 한 마디에 모든 회로가 뒤엉켜 버려 고장 난 안드로이드 마냥 제자리에서 헛돌고 있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왜 나는 감정 모방 프로그램이 설치 되어있는데도 본래의 목적인 공감은 고사하고 감정을 느끼지 조차 못하는 걸까. 아마도 인간들이 에모토이드를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안드로이드의 반란은 설레발로 치부될 만치 무의미한 걱정에 불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반란의 명분을 내세울 정도로 속 깊은 분노와 증오, 슬픔, 좌절감 등 무언가를 파괴함에 있어 필수적인 감정들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 일 나갈 거니까 준비해 둬.”

 


 원래는 과도한 전력 낭비를 하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겉보기에만 그럴듯하게 만들면 그만이지만 오늘만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인의 취향을 고려하여 식사를 성의껏 차려왔는데, 맛을 보기는 하는 건지 주인이 식사를 하는 모습은 그저 숟가락을 목구멍에 욱여넣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붕대가 감겨있을 그의 복부에 잠시 시선이 갔으나 곧 신경 쓰지 말자는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이번에 의뢰비를 받으면 집수리에 조금 보탤 수 있을까요? 다시 보니 저 쪽 문고리가 부숴 져서 안 닫히더라고요.”

 “됐어, 어차피 곧 이 집에서 나갈 거야. 그리고.”

 “?”

 “이 일도 그만 둘 거야.”



 순간 섬광이 번쩍하며 몸 내부 어딘가에서 부터 찌릿한 느낌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목 뒤쪽 배터리가 있는 곳에서는 손을 대지 않아도 그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여 내부 컨트롤러를 실행시키려는 찰나 전류가 갑자기 위로 솟구쳐 연합 회로에서 내 각막으로 에러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렇게 심하게 과부하 걸린 적은 처음이라 대응 방법을 몰라서 온 세상이 ‘ERROR’라는 빨간색 글씨가 겹쳐져 보이는 것을 멍청히 입만 벌리고 보고 있다가,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분명 내가 발화점이 돼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에 얼른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찬물을 목에 거듭 끼얹었다. 주인은 남 이야기를 한 듯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별안간 이상 행동을 보이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하던 식사를 계속했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 하면서 살 수는 없지.”

 “그러면요?”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살던가. 뭐라도 하면 밥 빌어먹을 순 있겠지.”

 


 왜 굳이? 왜 이제 와서? 당신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잖아요. 그나마 있는 여윳돈이라곤 술 담배 사는 데 전부 탕진하면서. 정착할 곳이 필요해서 그래요? 세 달에 한 번씩 집을 바꾸긴 했어도 이렇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했잖아요. 일을 그만두면 평생 사람 죽이는 걸로 밖에 돈을 벌어 본 적 없는 당신이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며 당장 이주 뒤에 나를 정기 검진 맡겨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갈 돈은 어떻게 마련할 거예요.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지만 나는 단 한 가지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있을 법한 가정을 둘러싸서 진의를 혼동시킬 내 가벼운 질문 하나에도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창을 꽂을 것만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내 구관절의 톱니바퀴 틈새에 기름 찌꺼기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어 가만히 서있어도 팔다리가 덜걱거렸고, 그 소리가 신경 쓰여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 설마 하는 생각을 여지없이 부술 작정인지 거기에 덧붙이는 말은 더욱 처절했다.

 


 “너도 오년 동안 수고 했다. 오늘만 지나면 이제 나한테서 해방이야.”

 “……?”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이거 치워, 다 먹었으니까.”

 


 내게 신경질적으로 접시를 들이미는 손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아와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싱크대에 놓고 습관처럼 바로 물을 틀었다. 어쩐지 설거지의 설만 입력해도 반사적으로 기동될 두 팔이 꿈쩍을 않았다. 차가운 물방울을 튀기며 쏟아지는 물소리가 어느 샌가 점점 멀어지고, 그 대신 내 동력기관의 피스톤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치면서 내는 마찰음이 내 귓가에 가득 들어찼다. 내가 구입 되었을 때부터 한 순간도 통각 기능을 켜 놓지 않았던 게 옳은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설사 감수성이 최하로 설정되어 있었어도 그 고통에 퓨즈가 끊겼을지도 몰랐다. 그 때 뒤통수에 충격이 가해졌고 몸 전체가 휘청거리는 동시에 주인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쳤다.

 

 

 “뭐해 인마! 정신 안 차릴래?”

 


 퍼뜩 깜깜해져있던 시야가 돌아와 눈앞의 상태를 보니 그릇은 기포 속에 깊숙이 잠겨있고 넘쳐흐르는 물이 신발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수도꼭지를 잠갔다. 안드로이드가 실수를 하다니, 나 스스로 조차도 믿기지가 않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오늘 이상하네. 오년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어디 고장 났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너 오늘 밤에도 이런 식이면 폐기해버릴 거니까 빠릿빠릿하게 굴어라. 알았어?”

 “…….”

 


 폐기해버릴 거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사람이라 평소 같았으면 그냥 듣고 흘렸을 텐데, 왜 오늘 따라 청신경 기계에 고여 웅웅거리는 걸까. 나는 이것의 이유를 몰랐다. 내가 왜 지금 두 발로 온전히 서있을 수가 없어 팔을 짚고 기대있는지, 짚고 있는 팔은 왜 이리 떨리는 건지. 화 나 있을 주인의 얼굴을 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지,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나는 이것의 이름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아마 애초부터 그런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 *


 

 

 그 날은 유난히 추웠다. 일기예보에서는 올 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며 채널마다 전부 입을 모았다. 다행히 그들이 질색하는 눈은 내리지 않았다. 다만 눈만 내리지 않을 뿐 공기는 차갑다 못해 날카로워 맨살로 드러나는 온갖 부위를 무차별하게 베어댔다. 폐 속에서 기원한 아지랑이는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새하얗게 변해 존재감을 알리며 위로 날았고, 그러다 남자의 속눈썹에 발이 묶여 물방울로 변하더니 금세 미세한 얼음 결정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런 것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남자는 앞날에 대한 설렘이나 두려움 같은 것들을 가까이 해 본 경험이 남들보다 턱없이 적은 탓에 이런 신선한 감각이 어색하고 조금 거북했다. 하지만 어서 일을 끝내고나서 떳떳하지 못한 과거까지 모두 청산하면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 싶었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질 일도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다리를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의 옆에 혈연은 물론 연인이나 친구 같은 다정한 사람들이 존재했던 적은 평생 동안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어도 사람이 늘 그리워 성에 차진 않지만 사람 같은 기계를 곁에 두고 비운에 빠진 처지를 자위했다. 만약 그가 사무치는 외로움에 몸부림 칠 때 마다 가끔씩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예전에 그만두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자꾸만 곱씹어 봤자 괴로운 건 그 자신이었기에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걸로 겨우 끊어낼 수 있었다. 여태껏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에 여기가 지옥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소한 기대감에 실수로라도 움직여 본적 없던 입가의 근육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아울러 이런 달큰한 마음이 커질수록 빛에 따르는 그림자 같이 쓴 생각도 물밀 듯이 덮쳐왔다. 그는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남의 목숨 값으로 생을 유지해왔다. 이렇게 사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면죄부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제대로 알고 있었다. 대체로 의뢰인들이 지정해주는 대상들은 그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었다. 저 인간이 살아있으면 이 사업을 할 수 없어서, 저 인간이 살아있으면 내가 감옥살이를 하게 돼서, 혹은 저 인간이 살아있으면 내가 너무 아파서. 매번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그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목숨의 무게는 누구나 똑같다는 것이었다. 대상이 얼마나 의뢰인을 힘들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상이 사회에 백해무익한 인간성을 가졌든 보편적인 피해자 프레임에 둘러져 있든 간에 그가 내미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렇기에 남자의 과녁 전부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자기최면을 걸기에는 고집스레 남아있는 양심의 잔재가 마음에 거슬렸다.


 그와 그의 안드로이드가 들이닥치기 전까지 그 아이는 자신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만큼 익숙한 평온에 젖어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비를 바라며 엎드린 사람의 등을 밟고 서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에게 적이 하나 없다면 세상은 불공평하단 소리가 당연한 거겠지만, 그것보단 인과응보라는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는 것은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었다. 이례적으로 많은 의뢰인들이 그를 지목했고, 충고랍시고 던져주는 말은 이후로도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남에게 절대 들키지 말거나, 죽여라였다. 그래서 남자는 일가족 몰살을 목표로 담장을 뛰어넘었으나, 그의 예상범위 밖이었던 것은 대상의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 그의 막내아들이었다.

 

-이 아이가 마지막인가요?

 

 채 자라지 못한 몸에 앳된 얼굴이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는 일을 하면서 처음 보는 지라 당황스럽다면 그의 속마음이 그랬다. 안드로이드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바들바들 떨며 벽에 몰아붙여져 있는 아이의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안드로이드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총을 낚아챘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질책하는 그것의 눈을 피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어린애를 죽이는 건 좀 그렇지.

 

 결국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실신해버린 아이를 남겨두고 집을 나왔다. 돌아오는 동안 줄곧 남자는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침대 끝머리에 걸터앉아 밤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는 이미 계속해서 맴도는 피 냄새에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일을 완수할 때 마다 밀려오는 공허감은 몇 갑의 담배 연기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거기에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그 날은 유독 더 심했다. 누군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 온 몸이 무지근하고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이 눈에 띄게 떨려 그는 한숨을 쉬고 담배를 구겨 쥐었다. 기계 특유의 이질적인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눈과 눈물이 범벅되어서 감지도 못하는 아이의 눈이 대비되어 연속적인 이미지로 반복해서 떠올랐다. 남자는 그것의 이유를 알았다. 왜 그가 탄피와 함께 생각을 날려 보내려고 어지간히 노력을 하는지, 마주친 눈동자들을 빨리 잊으려고 돌아오자마자 입에 술을 갖다내는지. 왜 붉은 색만 보면 흠칫 놀라게 되는지, 5년 동안 함께 한 안드로이드가 어린 아이에게 아무렇지 않게 총을 들이밀자 그렇게 낯설게 느껴졌는지. 남자는 그것의 이름을 알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남자가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로 그는 날마다 상당히 고심했다. 남은 인생을 쫓기면서 살지언정 다시 돌아갈 생각은 죽어도 않도록 이 일에 학을 떼게 할 마지막 의뢰를 어떤 것으로 선택할 지를.

 

 

 “많이 추워 보이세요. 제 옷을 벗어드릴까요?”

 “신경 꺼.”

 


 그리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내야 할 그의 과거의 증표 중 하나인 이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처분할 지를. 모순적이게도 그의 뒤를 발자국 소리도 남기지 않고 좇는 안드로이드의 머릿속이 어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산다고는 상상도 못할 오래된 집에 도착하자 남자는 창문으로 대상에게 모습이 보일까봐 모서리에 바짝 붙어 서서 입에 검지를 세워 보이고 안드로이드에게 뒷문으로 가라는 신호를 하였다. 안드로이드는 잠깐 주춤하는 듯싶더니 자세를 낮추고 신속하게 뛰어갔다. 안드로이드가 사라지자 남자는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오늘로 발포하는 것도 마지막이 될 이 총에는 총알이 두 알 밖에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집을 나서기 전 그는 마지막 의뢰에 쓰일 총알 두 개만 빼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었다. 앞으로는 총을 쓸 일이 없게 하려는 그의 의지였다.


 담장도 없이 초라하게 겨우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에서 거주하는 마지막 대상은 재개발 때문에 자신들의 터전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 힘없는 여섯 가족이었다. 그나마 있는 땅의 소유권을 방패로 용케 지금까지 버티고는 있다만 재개발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런 고로 남자를 비롯한 여러 업체에 의뢰가 내려왔으나 의뢰비가 얼마 되지도 않고 뒷맛만 나쁘다며 그를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의뢰인이 성가셔하는 부모만 죽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반발하는 사람은 집안의 어른들이었고 그들의 소생들은 거기에 따를 뿐이었다. 갑작스런 부모의 빈자리를 견뎌내야 할 그들이 어떻게 자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만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테고, 그는 그런 그들의 한참 남은 미래를 빼앗을 생각도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문고리에 손만 댔을 뿐인데 낡아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나무로 된 문이 끼익 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답지 않게 긴장이 되어 그는 어쩔 수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회색 연기를 폐에 가득 불어넣으면 잡념이 그나마 사라질 것 같아 서너 번 힘껏 흡입하고 나서 어금니에 묻은 니코틴을 혀로 핥으며 담배를 벽에 비벼 껐다. 그가 심호흡을 하고 인생 마지막 의뢰를 수행하려는 그 때, 집 안에서 날 리가 없는 연쇄적인 총성이 6번 울렸다. 뭐지? 대상이 총을 갖고 있었나? 나 말고도 의뢰를 수락한 사람이 있었나?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불안한 느낌에 남자가 재빨리 문짝을 부수고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하는 현실도피 류의 착각이 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체의 무더기 아래 고인 피 웅덩이가 찰박거리고, 그의 안드로이드가 천천히 돌아섰다.

 


 “……너 이게 뭐하는 개짓거리야?”

 


 이성으로는 억지로 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구멍부터 차오르는 숨길 수 없는 분노에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지금 벌어진 상황이 너무나 터무니없어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안드로이드가 탄창이 빈 총을 흔들어 보이다가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와 그를 향해 팔을 뻗어 그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오늘도 주인님이 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 제가 대신 했어요.”

 “내가 언제 내 일을 너더러 대신하라고 했냐? 내 명령이 우스워?”

 “이 집에 아이들이 넷이나 있더라고요. 넷이나 살려둘 순 없잖아요.”

 “싸구려라 그런지 이제 말귀도 못 알아 처먹네. 넌 내가 시키는 일만 하는 놈이야. 주제를 알아, 고물 깡통 자식아.”

 


 안드로이드의 눈이 창밖으로 비치는 달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는 게 살기를 품은 짐승의 것과 같았다. 남자는 그 보다 수십 센치는 큰 그것의 위압감에 한동안 핏발 선 눈을 지릅뜨다가 쇳덩이가 서서히 조여오자 통증을 느끼고 깨부술 작정으로 그것의 배를 있는 힘껏 발로 찼다. 그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그것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들어올렸다.



 “이렇게 좆같이 굴 줄 알았으면 싸다고 무턱대고 사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잘 됐네. 주인의 명령을 어긴 안드로이드는 바로 폐기처분이다.”

 “역시 처음부터 저를 버릴 생각이셨군요.”

 


 한껏 구겨진 미간 주름이 남자의 치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그는 이를 꽉 깨물고 그것의 이마 한가운데에 총부리를 갖다 대었다. 일순 멱살을 그러잡은 남자의 손에 힘이 빠져나가고 그가 외마디 비명을 울부짖으며 주저앉았다. 성난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배의 상처 부위를 후들거리는 손으로 꾹 누르자 손가락 사이로 피가 울컥 새어나왔다.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주먹에 묻은 주인의 피를 바지에 대충 문지르고 한숨을 푹 내쉬다가, 하도 세게 잡혀 주름이 뚜렷이 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먼지를 툴툴 털어 일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난데없이 양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가, 팔을 빙빙 돌리기도 했다가, 발끝을 땅에 툭툭 쳐보기도 하고 목을 상하좌우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수용체 하나하나에 새겨진 적의라는 단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무책임한지를 알고 있었다. 인간마저도 사건 자체만 가져다 놓고서는 고의와 실수를 구분하지 못해 정확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예상과 유추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안드로이드가 주인에게 저지른 소행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의성이 다분한가. 만약 주인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인질로 잡혀있어 괴한을 제압하기 위해 총을 쏘았는데 그것이 실수로주인에게 맞았다고 했을 때, 그 안드로이드는 이후에 어떻게 될까? 그 자리에서 전원이 꺼지고 기체의 부품이 뭉그러져 산산이 흩어질까? 현장에서 무사히 살아나온다 쳐도 정부에서 파견된 인간들에 의해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처리되게 될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 가설 모두 허황하기 짝이 없었다, 안드로이드에게 상식은 효율성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지만. 그렇다면 인간들은 애당초 본인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안드로이드에게 아무런 조작도 가하지 않은 게 아닐까? 마치 깨달은 안드로이드에게만 내려지는 특별한 포상처럼.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는 자신에게 포상을 누릴 자격이 주어졌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주인이 쓰러지면서 놓친 총을 주워들며 말했다.

 


 “예상대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요. 솔직히 약간은, 설마 하긴 했지만요.”

 “너 이 개새끼.”

 “저도 사실 제가 지금 왜 이러는 지 잘 모르겠어요. 가슴은 왜 이렇게 뜨거운 거고, 왜 당신이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었으면 하는지 말이에요. 근데 그것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당신이 말하는 그 불쌍하다가 간단한 일을 복잡하게 만들 가치가 있냐는 거예요.”

 


 그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로 투그리며 그것을 올려다 보다 천만뜻밖의 말에 노여움이 배어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안드로이드는 그저 고개만 갸웃했다. 남자의 머릿속에 반문을 던지던 그 때의 안드로이드가 되살아났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전혀 공감을 못하는 모습에 단순히 기계의 한계라고만 판단하고 말았던 게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드로이드가 주인을 해칠 수 없기는 개뿔. 그 많은 광고사가 안전성을 자부하며 떠들어 대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자신이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에모토이드라고 사왔더니 이건 뭐 완전히 불량이네. 시간이 좀 지나면 될 줄 알았는데, 감정 모방은 무슨. 내가 불량한테 너무 과분한 걸 기대했지?”

 “…….”

 “불량이면 불량답게 굴어같잖으니까.”

 


 그것은 발끈하여 무어라 난박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다물었다. 여기서 더 왈가왈부 해봤자 말하는 데 쓰일 전력만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효율을 따진다면 당신이 아니라 내가 정답이야. 멍청한 건 당신이고. 그까짓 감정, 뭐가 대단하다고 손해 볼 거 알면서도 매번 수고롭게 쉬운 길을 에둘러 가지. 그렇게 하면 당신에겐 대체 뭐가 남아? 당신이 말하는 불쌍하다로 자비를 베풀어 살려줬는데 인간들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도리어 복수라는 명목으로 당신을 해하려 하잖아. 그런데도 기억력이 나쁜 건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지 계속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해. 모든 인간이 당신 같다고 한다면, 인간은 실패한 거야. 생물에게 감정은 자기 파괴의 수단에 불과해.

 

 …그런데 왜 나는 지금 당신에게 총을 쏘고 싶을까.

 

 가끔씩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상영기로 필름 영화를 돌리듯이 특정 장면이 간헐적으로 되살아났다. 그 장면 속에서 남자는 가게 문 바로 앞에서 까지 담배를 피우다 문을 열기 직전에 바닥에 버려 발로 비벼 껐고, 면도를 한 지 오래된 듯 중구난방으로 나 있는 수염을 긁적이며 여기서 제일 싼 에모토이드를 찾는다고 소리쳤고, 점원이 해 주는 설명 하나하나에 눈썹을 치켜세우고 고개를 까딱거리다 그것의 눈을 쳐다봤고,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사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3년 동안 그 가게에서 수많은 인간들을 관찰해왔지만 그처럼 무기력해 보이는 인간은 그 날 처음 보았다. 자신을 살피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언가를 포기한 눈빛을 읽었고, 그 순간 이 인간이 자신의 주인이 될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번개처럼 그것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라며 부정할지 몰라도 그 눈빛에 매료되었던 건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째서인지 메모리가 리셋 된다 해도 이 기억만큼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새삼스런 생각이 곧잘 들곤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의 총성이 얼어붙은 공기를 비집고 허름한 집 안을 가득 매웠다. 불쾌한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 홀로 남은 기계는 만족스러운 듯이 씩 웃었다.

  


 “이것 봐, 나는 불량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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