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것에 대...

by 깜씨 posted Aug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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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에 대한 욕구


    "장마가 시작 되려나······"

  재희는 방 창문을 열고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거리며 벽지에 공팡이 핀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 곳에 이사 오기 전까지 인터넷에서 미리 정보을 얻고 집은 직접 확인하며 꽤 많은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비록 공간은 좁고 낡았지만 그나마 탁 트인 풍경과 넓은 옥상은 가족과 빌라 건물의 반 지하에서 살던 재희에게 가슴을 설레게 했던 곳이다. 서로에게 용서와 배려가 부족한 가족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재희는 쉬지 않고 일했다. 옥탑 방을 처음 소개해준 공인중개사도 재희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

  "아가씨 여기가 건물은 낡았어도 방은 깨끗하고 넓어요. 거기다 교통도 좋지, 이만한 가격에 이런 집 얻기 힘들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자취생들이 벌써 채 갔을 텐데 아가씨가 운이 좋네요. 호호."

  공인중개사는 네일아트를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흐뭇한 듯 웃는 푸짐한 얼굴과 뱃살은  웃을 때마다 흔들렸다. 그렇게 운 좋았던 집이 이주만에 수돗물줄기가 반으로 줄어들고, 비가오니 천정에 물이 새고 벽지가 뜯어지면서 벽마다 감추고 있던 스티로폼이 보였다. 아무리 싼 값에 얻은 집이라고 해도 재희에겐 큰 의미가 있는 집인 만큼 운은 다하고 보잘 것 없는 집이 되더라도 자신이 아껴줘야 할 집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잘 보살피다 보면 자신만의 아늑한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 집에 대한 재희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전에 가족과 살던 반 지하 집과 자꾸 비교되었다. 비교해서도 안 될 재희만의 공간이니만큼 조금씩 돈을 모아 집을 고치고 꾸며서 누가 봐도 탐낼 수 있는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굳게 마음먹었던  그 믿음은 일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의심만 늘어나고 있었다. 솔직히 재희는 자신이 그런 다짐을 했었는지조차 잘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새 삶을 끝내고 의존하는 삶이 아닌 이제는 당당히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지이이이, 지이이이" 재희는 휴대폰 진동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진동소리는 곰팡이 핀 방안 전체를 좁은 듯이 울려대고 있었다. 어김없이 아침마다 새로운 충전을 한 듯한 은행대출금 전화독촉은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냥 무시할 생각에 버텨보았지만 계속되는 진동소리는 재희를 불안하게 했다. '그래, 지금 내가 버틸 처지가 아니지' 통화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단 듯 은행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한 재희 씨인가요?"

  "네."

  "입금하실 대출금이 아직 입금이 안 되어서요. 오늘 입금 가능하신가요?"

  재희는 순간 아무 대답을 못했다. 머릿속에는 벌써 답이 나왔지만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입금할게요.' 구구절절히 지금의 재희의 처지를 설명해봤자 은행직원은 관심 없을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입금하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입금···"

  은행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희는 바로 대답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입금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툭, 재희는 바로 휴대폰을 끊었다. 서로 말을 더 들을 필요도, 할 필요도 없다. 일주전만 했어도 이렇게 예의 없게 전화를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은 없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일주전에는 변명거리 할 직업은 갖고 있었다. 연극배우라는 직업과 편의점 아르바이트, 식당일 등을 하면서 하루하루 힘을 내자는 다짐을 머릿속에 수없이 하고 다녔다. 사실 연극배우생활이라는 직업은 돈하고는 그리 인연이 없다. 배우는 재희에게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자 삶의 목표다. 자신의 형용할 수 없는 또 다른 내면을 표현하려면 연극배우만한 것이 없었다. 오롯이 삶에 깊이 있는 연기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지금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다. 그러다 연출자인 선생님이 무대연습이 끝나고  혼자 뒷정리를 하는 재희를 불러 세웠다.

  "잠깐 시간되면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재희는 불안했다. 연출자 선생님이 자신을 보자고 했을 땐 항상 재희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십대 초반의 연출자 선생님은 유달리 광대뼈가 튀어나온 마른 얼굴에 눈빛은 검은 늪지대 같았다. 재희를 쳐다 볼 때는 항상 소름이 돋았다. 무대를 감독 할 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를 않는다. 연기연습을 하다 배우들의 작은 실수라도 보이면 바로 그자리에서 화를 내며 좀 더 배역에 열중하라고 소리쳤다. 가끔 재희의 연기를 보다 답답한 듯 일어나 책자를 바닥에 집어던지곤 제자리에서 일어나 재희에게 고함을 쳤다.

  "너, 정말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연출자 선생님은 자주 재희의 연기에 제동을 걸었다. 주위 동료 배우들도 재희와 연출자때문에 연기의 리듬이 깨지는지 두 사람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출자는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어 들고있던 커피머그잔을 집어던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연습실 주변을 계속 서성이며 고함을 치고 돌아다녔다.

  "재희야, 배우는 자신의 배역에 감정을 실어줘야 해. 그대로 그 인물이 되는 거지. 그냥 대사만 외워서 지시한대로 행동을 한다면 누가 연극을 볼까? 매번 말했지만 너는 노력이 부족하기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좀 부족한 듯싶다. 아직 나이도 있으니깐 새로운 걸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하는데······?

  연출자는 재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재희는 어색하지 않게 연출자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요즘 좀 힘들어서 집중을 못했나 봐요. 앞으론 더 잘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희는 용기를 내어 간절한 눈빛으로 연출자를 바라봤다. 이와 달리 연출자의 눈빛은 공허한 무채색의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 얘기는 전에도 여러 번 한 듯싶구나.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렴."

  그 말을 끝으로 연출자 선생님과 다시 대면할 일이 없었다. 아니, 재희에게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과 함께 며칠 나갈 수가 없다는 전화를 했다. 언니는 바쁘다고 재희한테 엄마 병실을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재희는 할 수없이 연출자 선생님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연출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극단에는 이미 재희의 배역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 같이 연기 연습을 했던 동료배우들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속에 동료가 아닌 생소한 타인이 되어 있었다. 재희는 또다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밀려난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버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배우를 그만두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시간이 생겼다. 어차피 연극배우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기는 힘들다. 연극을 하며 생활을 하기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남는 거라곤 언제나 피곤하고 물컹물컹한 신체만이 남아 있었다. 재희는 왼쪽 손목에 여러 개의 금이 가 있는 흉터를 보며 미희와 규희를 생각했다. '지금쯤 얘네들은 뭘하고 있을까.' 친구들 덕분에 살아있는 목숨치고 너무 안이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야! 꽉 잡아! 절대 놓으면 안 돼!"

  고등학교 일학년 때 재희는 미희를 찾아가다 그대로 미희네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미희와 규희는 학원을 가다 재희가 아파트 옥상에 있는 것을 보고 뛰어 올라왔다. 둘은 재희에게 진정하라며 천천히 다가와 옥상 난간에 서있는 재희의 양쪽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재희는 면도칼을 평소 휴지에 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방과 후 빈 교실에 들어가 손목을 그었다. 그때 아직 학교에 남아있던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은 빈 교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살펴보다 문 쪽의 책상과 바닥에 피가 홍건이 떨어져있는 것을 보자 비명을 질렀댔다. 미희와 규희는 계단을 내려가다 비명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뛰어왔다. 미희는 쓰러져있는 재희를 보자마자 손목을 감싸 쥐며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 빨리 119를 불러주세요!"

  미희의 다급한 소리에 담임선생님은 무척 당황해 했다.

  "으 응, 응 그래"

  그때부터 학교 아이들은 재희가 '자살 중독증'에 걸린 정신병자라며 슬슬 피했다. 담임선생님도 재희를 대할 때 조심스럽게 대했다. 예전 같으면 성적지도를 할 때 온통 짜증 섞인 행동으로 일관하던 선생님이 재희를 대할 때만큼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재희의 엄마는 담임선생님의 계속된 정신상담을 받으라는 권고에 할 수 없이 재희를 정신상담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어는 정도 상담을 한 후 엄마에게 재희 증세를 설명했다.

  "재희의 마음속에 상당한 분노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가족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자신의 신체에 풀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좀 더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청소년 때는 가장 예민할 때라 이런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보통 리스트 컷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자살중독증이라고도 합니다."

  의사는 사십대 중반 정신상담의사로서 재희와의 상담을 하는 동안 내내 친절한 표정을 잊지 않았다. 엄마에게 설명할 때는 다소 무게감 있는 표정과 함께 재희의 증세를 나열하듯이 말해주었다.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니 이러햔 증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이 평소보다 더 신경써주십시오. 땡, 의사의 굵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는 할 말을 다한 표정과 함께 다음 환자를 기다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재희는 의사에게 자신의 얘기를 더 많이,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재희 주위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엔 관심 없다. 오직 아이들의 성적과, 어른들의 돈 되는 이야기에 관심이 높았다. 정신과 의사 역시 자신의 분야에만 충실할 뿐 환자의 입장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재희도 더 이상 시시콜콜히 의사에게 할 말은 없었다.

  엄마는 돌아오는 내내 차안에서 계속 굳은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짜증을 냈다. 신호등이 빨리 바뀌지 않는 것에 화가 났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할머니들디 불빛이 바뀌었는데도 뛰지를 않는 것에 화가 났다.

  "너도 좀 적당히 해라.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이게 몇 번째니··· 엄마도 네가 이러는 거 마음 아파. 하지만 지금은 엄마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이러다 엄마마저 일 못하게 되면 언니나 너나 학교는 둘째 치고 우리 가족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져."

  엄마는 말하면서 한 쪽 손으로 틈틈이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운전했다. 아마도 어제 아빠가 때린 부위가 많이 아픈 듯 했다. 아빠는 이 삼일 만에 집에 들어와 마치 운동이라도 하듯 언니, 재희를 돌아가면서 때렸다. 오빠가 집을 나가기 전에는 그래도 재희가 맞는 횟수가 덜할 편이었으마 오빠도 성장을 하면서 아빠의 폭력에 기꺼이 반기를 들었다. 아빠도 "너 같은 새끼 필요 없다"고 당장 나가라고 했다. 오빠는 나가면서,

  "내가 이 거지같은 집구석 다시는 들어오나 봐라! 허구헌 날 술이나 쳐 먹으면서 창피한것도 모르는 주제에. 지가 무슨 아빠라고!"

  그렇게 오빠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문 밖에서 침을 뱉고 나갔다. 엄마는 나가는 오빠를 잡으녀 고등학교라도 졸업하고 나가라고했지만 오빠는 엄마를 밀치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아빠는 오빠가 나가거나말거나 관심 없다는 듯 술을 마시며 난동을 피웠다. 그렇게 온 몸을 신나게 놀린 후 너무 과한 폭력운동으로 자신도 지쳤는지 안방에 들어가 술과 함께 대자로 뻗어 잤다. 그럴 때면 안방은 온통 썩은 술 냄새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채워진다. 동네 사람들은 아빠보고 사람이 아닌 짐승 또는 양아치 같은 놈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엄마보고도 요즘 세상에 왜 맞고 사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도 했다. 경찰에 신고해 봤자 경찰들은 가정일은 가정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만으로 일관했다. 경찰서 의자에 앉아 여기저기 피가 터진 몇몇 아저씨들조차 경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가 보기엔 엄마, 아빠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것이 습관인 여자와 때리는 것이 습관인 남자는 서로 자신들이 천생연분인 것도 모르고 서로를 탓하는 것도 습관이 탓에 서로를 원망하느라 바빴다. 재희는 엄마가 용기 있는 삶을 살기 바랬다. 왜 아빠는 때리는 게 당연하고 엄마는 왜 맞는 게 당연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엄마 아빠의 생활습관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희


  "고객님, 저희 제품은 천연성분만을 사용합니다. 저희 화장품이 조금 비싼 이유도 좋은 원료을 사용하기 위해 연구원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특히 저희 기초화장품은 고객님처럼 피부가 약하신 분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미희는 최대한 밝은 표정과 친절한 미소로 고객에게 화장품 설명을 해주었다. 고객은 화장품 설명안내서를 한참 살펴보다 결심한 듯 세트로 기초화장품을 구매했다.

  "어쨌든 이 화장품이 민감한 피부에도 좋다니 구입할게요. 그리고 다른 샘플 좀 더 담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미희는 최대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둘러 화장품 포장을 끝내고 고객에게 쇼핑백을 건네며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미희는 매장을 나가는 고객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입구 쪽을 지켜보며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휴···"

  고객이 안보이자 미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 자신의 한숨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급히 입을 막았다.

  지이이이, 휴대폰이 울리자 미희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희니?"

  재희 전화였다.

  "응, 재희 네가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하고."

  "너희들이 보고 싶어 전화했어. 같이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아서. 다름이아니라 오늘 내 생일이거든."

  "오늘이었어? 미안, 바빠서 미처 네 생일것도 잊었네. 미안해."

  "아니야, 혹시 오늘 시간되면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오늘?"

  "바쁘면 나중에 다시 시간 잡고."

  미희는 조금 황당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자신의 생일이라고 만나자니···

  "아니야, 마침 오늘 일찍 끝나니깐 규희한테도 연락해 봐."

  미희는 통화를 하면서 눈은 항시 화장품 매장 입구를 바라봤다.

  매장입구에서 서성이던 손님이 들어오자 재빨리 나중에 문자를 남기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어서오세요. 손님. 어떤 물건을 찾으세요?"

  진열된 화장품을 살펴보는 손님을 향해 미희는 급히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미희는 손님을 보내놓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물을 마시는 사이 얼굴에 약간의 경련이 오는 것을 느꼈다. 계속된 미소에 얼굴도 지쳤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일을 하다간 분명 자신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님, 미쳐가고 있는데도 자신이 잘 모르고 있는지도. 물맛은 달게 느껴졌다. 인상을 찡그린 채 휴대폰을 살펴보니 재희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규희도 시간이 된대. 좀 늦을 수도 있으니 기다려 달래. 너도 언제쯤 올 수 있을지 시간을 알려줘.'

  '얘도 참 별일이네' 재희는 한 번도 먼저 모이자는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미희 아니면 규희가 전화를 하면 마지못해 나온 것처럼 행동을 했다. 미희와 규희가 재희에게 계속 연락을 하는 이유는 재희가 좋아서라기보다 왠지 재희를 혼자두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주로 미희가 연락을 하다 취업준비며 직장일 때문에 한 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육 개월 동안 서로가 연락한번 안하다가 재희가 갑작스럽게 전화 한 것이다. 사실 미희는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 쉴 생각을 하고있었다. 차라리 회사며 친구도 다 팽개치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계속 이렇게 피곤하게 살기는 싫었다. 미희는 불현듯 확 저질러 버릴까 하는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이런 생각조차 쓰잘데없는 것이었다. 미희는 답답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을 거의 다 먹은 생수 패트병을 꽉 쥐고 있었다. 남은 물은 무릎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서둘러 변기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자 화장실 문 밖에서 미희에 대한 얘기소리가 들렸다.

  "얘기 들었어? 진화화장품 매장 이 매니저가 사람들 이간질 시키고 다닌다는 거."

  백화점 직원인 듯한 여성 둘이 들어와 미희의 얘기를 하고있었다.

  "아아, 그 얘기? 당연히 들었지. 화장품 매장 직원들끼리 무슨 모임을 만들었는지 자기네끼리 몰려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마음 안 드는 상대가 있으면 여기저기 험담하고 다니나봐."

  "그러게. 그럼, 이 매니저가 주도하는 모임이야?"

  "아니, 그냥 서로가 비슷하니까 자기네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무조건 씹나봐. 뭐, 그러고 나면 자신들이 더 특별해지나보니. 취미생활도 아니고 뭐하는 건지··· 자기네 매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미희는 당장이라도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 자신을 험담하는 여자들한테 소리치고 싶었다. 너희들도 다를 것 하나도 없다고. 사실 고객을 상대하는 백화점 매장 직원들치고 매일매일이 힘들지 않은 직원들은 없을 것이다. 미희처럼 다른 화장품 직원들도 고객이 없을 때도 항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한다. 속은 힘들고 괴로워도 웃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제품을 팔 수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 서로를 위한답시고 틈 나는 대로 모여 이 얘기 저 얘기 수다를 떨게됬다. 얘기의 주인공은 주로 주위 사람들 이야기였고, 그렇게 흘러나온 얘기들은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당연히 험담하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미희는 찌그러진 생수 패트병을 바라봤다. 왠지 자신이 패트병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오전에는 내용물이 가득한 패트병이 되었다가 오후에는 다시 찌그러진 패트병이 되는 것이다. 분명 언제가는 재활용도 끝은 있을 것이다. 더구나 미희 자신은 인간이니 패트병보다 재활용의 수명은 더 빠를 것이다.

  미희는 화장실 밖의 여자들의 소리가 안 들리자 살그머니 문을 열고 살펴봤다. 여자들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손을 씻으려 하자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울고 있는 얼굴이었다.


                                                                                           * 규희


  규희는 점심을 먹은 것이 체했는지 계속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전화안내원으로 일하다보니 입안은 항상 침이 마르고 입안에 단 내가 났다. 그래서인지 음식물을 먹을 때마다 맛으로 먹기 보단 억지로 먹는 경우가 많았다. 자주 소화제를 먹거나 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많이 생겨 위에도 염증이 생겼다. 규희는 또 다시 병원을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재빨리 사무용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여러 가지 약이 들어 있었다. 편두통, 소화제, 진통제 등, 그 중에서 소화제를 꺼내 주위를 빠르게 살핀 다음 약을 먹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전화 안내를 하던 동료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규희씨, 무슨 약 먹어?"

  규희는 흠짓 놀랐지만 재빨리 당황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으응, 피부비타민제야. 요즘 피부가 너무 거칠고 기미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하긴, 우리 같은 직업에 비타민제라도 제대로 챙겨먹어야지."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료는 의자를 끌고 규희곁으로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한 알 줘봐. 요새 나도 피부가 많이 거칠어졌거든."

  규희는 어의가 없었다. 남이 먹는 비타민제를 아무 거리낌 없이 달라고 하는 동료가 이상했다.

  "이건 처방받은 거라서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나중에 따로 본인한테 맞는 거 먹는 게 좋을 거야."

  규희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으응, 그래?"

  동료는 대답은 했지만 그새 무표정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규희의 대답이 서운한 눈치였다. 규희에겐 오히려 동료의 태도가 짜증스러웠다. 아무리 같은 직장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라해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개인적인 것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 싫었다. 규희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싫어한다. 대인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는다.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약한 면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어 온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규희가 냉정하다는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규희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 그 외 많은 인원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규희는 가끔 외로울 때가 생겼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하고도 멀어진 느낌이었다. 어쩜 자신이 그들을 밀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등학교시절 재희, 미희, 규희 셋이서 모여 세 가지 기쁨이 모여 그 기쁨은 배가 된다는 생각에 항상 셋이 몰려다녔다. 친구 셋이 모여 가장 힘들고 외롭다는 시기를 서로에게 기쁨이 되자는 취지에서 각자의 이름에서 마지막 '희' 자만을 따와 '희 걸 그룹' 이라고 이름 지었다. '희 걸 그룹'을 아는 반 친구들은 이름이 너무 이상하고 웃기다며 놀려대는 친구도 있었지만 '희 걸 그룹'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할 때마다 서로가 더 특별해지는 느낌이었다.

  규희는 하루에 수백 통의 전화 안내를 받는다.  자신이 가끔 전화 받는 기계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이 직업도 요즘 같은 취업난에 소중한 직업이었다. 의외로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데도 아직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중한 직업이기에 규희는 항상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한다.


                                                                             * '희 걸 그룹'


  미희와 규희는 술과 케이크, 먹을 것을 사들고 재희 집에 찾아왔다. 재희는 친구들을 보자 뭔가 자신의 내부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재희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차려놓은 음식을 먹일 수 있어 행복한 기분이었다.

  "별 거 차린 건 없지만 너희들 좋아하는 거로 준비해 봤어. 배고플 텐데 많이들 먹어."

  재희는 친구들에게 의자를 권하며 행복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미희와 규희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똑같이 소리 높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희 걸 그룹'은 식사를 끝내고 서로 맥주 캔을 번갈아 뜯어주며 쉼 없이 마셔대기 시작했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미희와 규희는 작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규희는 계속 미희에게 불만과 비난을 털어놨고 미희는 미희대로 너나 잘하라고 소리를 쳤다.

  재희는 술을 마시며 말다툼을 하는 친구들을 계속 지켜보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너희들은 언제부터 귀를 막고 사는 거야?"

  친구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 소리 높여 언쟁을 하고 있었다.

  "야, 솔직히 규희 너 전화만 하면 바쁘다고 전화 잘 받지도 않았잖아!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없고, 나도 뭐 한가한 줄 아니? 나도 하루 종일 매장 고객들 상대하느라 시간이 없어. 그래도 틈틈이 시간 내서 너희들에게 전화하는 건 나라고!"

  미희는 규희가 자신에게 비난을 하는 것이 몹시 화가 났는지 규희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귀가 아주 들리지 않는가보네·····"

  재희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재희는 김빠진 맥주 캔을 조용히 내려놓고 일어났다. 옥상 한 쪽 구석에 있는 라면박스쪽으로 걸어갔다. 흙먼지가 군데군데 쌓인 라면박스 안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 물품들이 가득했다. 재희는 손을 넣고 박스 안을 뒤지다 가위 하나를 찾아냈다. 가위는 오래되어서인지 칼날은 녹이 슬고 뻑뻑했지만 아직은 쓸만했다. 재희는 친구들 쪽을 다시 쳐다봤다. 여전히 다툼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내가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새로운 선물을 줄게!"

  선물을 준다는 소리에 친구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재희를 보았다.

  "별거 아니야. 너희들이 직장생활 하면서 귀를 잃어버린 것 같아 내가 한 개씩 주려고."

  재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리고 가위는 왜?"

  규희가 왜 그러냐고 질문하자마자 재희는 빠르게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꺄, 꺄악! 재희야!" 미희는 눈과 입이 벌어진 채 비명을 질러댔고 규희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미쳤어! 귀는 왜 잘라? 기껏 전화해서 우리한테 너 귀 자르는 거 보여주려고 전화 한 거야!"

  재희는 피를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너희들한테 내가 너무 신세만 진거 같아 뭐라도 선물을 하고 싶었어. 너희들 예전엔 누구보다 서로의 말을 잘 들어줬잖아. 내가 학창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다 너희들이 있어서였어. 그래서 조금이나마 너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거야."

  재희는 피가 흐르는 귀를 들고 미희 쪽으로 걸어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우선 미희 너한테 한 개 줄게."

  공포에 질려 기가 막힌듯한 얼굴로 미희는 재희를 쳐다봤다.

  "도, 도대체 너, 너는 언제까지 이런 짓을··· 우선 치료라도 하자···"

  미희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피를 막을 것을 찾아 옥상 여기저기를 돌아나녔다. 규희는 휴대폰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119죠! 여기 급한 환자가 있는데 빨리 좀 와주세요! 여기 주소가···"

  그때 갑자기 재희가 다가와 규희의 휴대폰을 빼아았다.

  "무슨 짓이야! 휴대폰 이리 줘!"

  "그럴 필요 없어. 나는 환자가 아니야. 단지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

  재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규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담 갖지마, 규희야. 이제라도 내 마음의 빚을 갚는 거니까. 너에게도 한 개 줄게."

  "그, 그러지마! 도대체 네 귀가 우리한테 왜 필요한데? 우리가 다른 사람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아니, 재희 너야말로 주위 사람들이 너 때문에 고통 받고 괴로워해도 전혀 관심없었어!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너 자신만 생각하고 살았잖아!"

  규희는 재희를 향해 울부짖듯 소리치며 말했다.

  재희는 고개를 숙이며 피가 범벅인 가위를 내려다봤다.

  "미안해······ 난 뭐라도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었어. 너희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줬잖아. 그런 너희들의 장점이 사라지는 게 싫었어. 혹시라도 내 귀를 주면 너희들이 예전처럼 잘 들어주는 친구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어"

  재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미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희에게 다가가 피가 흐르는 왼쪽 귀부분을 수건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재희야, 네 마음 다 알아····· 너도 그렇고 규희도 나도 지금은 모두 힘들어도 우린 '희 걸 그룹' 이잖아. 분명 언젠가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여행도 다니며 기쁘게 살 때가 올 거야. 그렇게 믿고 견디자. 아마 그때가 오면 우린 기쁨이 넘쳐나서 우리 주위사람들도 행복해지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재희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미희를 바라봤다. 미희는 울고 있었다. 예전부터 '희 걸 그룹'이 힘들고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미희는 셋 중에서 제일 먼저 '희 걸 그룹'이 가야할 길을 찾아냈다.

  미희는 손을 내밀어 재희가 들고 있던 가위를 가져가려고 하자 재희도 자신의 손아귀에서 힘을 빼고 가위를 주었다.

  점점 크게 들리는 구급차 싸이렌 소리에 '희 걸 그룹'은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이렌 소리는 마치 옥탑 방에 퍼진 흥분과 공포, 두려움 들을 조금씩 잠재우는 듯한 음악과도 같이 들렸다.

                                                                                                                                                                                                    END


유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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