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by 봄의폭풍 posted Jan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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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을 사랑했다. 아니 형과 보낸 시간들을 사랑했다. 침대 위에서 벌어졌던 형과의 수많은 전투, 베개들이 날아오르고 빛 속에 뿌옇게 춤을 추던 먼지. 어느 겨울날 새벽, 형의 속눈썹에 방울방울 맺혀있던 투명한 안개, 내 다리를 핥으며 꼬리를 흔들어대던 강아지 럭키, 정강이에 닿던 물기어린 풀잎의 감촉,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달콤하고 들척지근했던 복숭아과즙, 다정한 형의 목소리, 다락방 한구석의 우리만의 아지트,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길, 햇살에 바싹 마른 시트, 바람에 일렁이는 플라타너스 나무 우듬지, 오렌지 빛 구름, 운동화 끈을 고쳐 매어 주던 형의 손길, 버터쿠키가 오븐에서 구워지는 냄새,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 속에서 첨벙거리는 소리.

돌아오지 못할 시간이 그곳에 있다. 아주 가까이 있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애태우다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대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다. 누웠던 자리와 입고 있던 옷이 축축하게 젖었고 낮잠을 너무 오래 잔 탓에 머리도 지끈거린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침대를 떠난다. 인근 공사판에서 날아든 먼지 때문에 맨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까슬까슬하다. 방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소파 위를 차지하고 개수대엔 냄비며 접시가 잔뜩 쌓여있다. 열린 문틈으로 드러나는 작업실엔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들과 번역원고들이 책상이며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져있다. 어머니가 다녀가신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며칠 내로 전화가 올 것이고 또 방문 하실 텐데. 모든 걸 포기하려 한다고 지레짐작하시고 눈물을 보이시겠지. 이런 꼴을 절대로 보여 드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곧장 청소를 시작하지는 않는다. 생각과 행동은 늘 거리가 있다.

강렬한 꿈의 잔해를 떨쳐내기 위해 거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창문 밖으로 오렌지색으로 물든 나무들과 집들과 바둑에 푹 빠진 노인들이 보인다. 단단해진 고독과 무심한 시간이 그곳에 있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옆집 창문너머로 며칠 전에 이사 온 이웃과 눈이 마주친다. 여자의 날카롭고 복잡한 시선이 먼저 나를 외면한다. 작은 박스에 포장된 이삿짐을 정리하는 그녀의 손길이 분주하다. 유연하고 정확한 몸놀림, 굳은 표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다시 눈이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본다.

그 집에는 그녀가 이사 오기 전에 현진과 가희가 살았다. 소파에 누운 채 한 인간을 탈바꿈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자리를 옮겨 소파에 드러눕는다. 나는 한동안 가희에게 빠져있었다. 가희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바비큐 립, 코다리 콩나물찜, 브로콜리 감자그라탕, 간장게장, 더덕 양념무침, 닭 칼국수, 낙지전골 등을 만드는 데 열중하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완성된 요리들은 아쉽게도 주말마다 소파에서 빈둥거리기나 하던 현진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시청 인재양성과에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퇴근시간이 일정했다. 그가 퇴근하고 앞치마를 한 가희가 문을 열 때 나는 벽 쪽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목에 얼굴을 비벼댈 때면 못 견디겠다는 듯이, 그녀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까르르 웃어젖히곤 했었다. 현진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가희가 현진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그의 재력인가? 외모인가? 유머인가?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는 건 나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현진과 가희가 옆집을 떠나버린 건 유감이다. 가희는 내가 만들어준 사랑스런 이미지를 말끔히 벗어두고 내가 없는 세계로 떠나갔다. 가희는 이제 평범한 현진의 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옆집여자가 정리를 끝내고 저녁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목이 마르다. 한 손에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을 들고 다른 손으로 바지뒷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꺼낸다. 액정에 뜨는 번호를 확인하지만 몸이 뻣뻣해져 소파에 던져두고 맥주 캔을 딴다. 내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끈질기게 진동한다. 더 지연시켜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폴더를 열고 영상통화를 시작한다.

“저녁 먹었니?”

아버지가 저녁이라는 입모양을 두 번씩이나 만든다.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내가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아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묻는다.

“어머니는 어떠세요?”

“잘 지내고 있다.”

아버지가 손으로 오케이라는 제스처를 해 보인다. 머리전체가 희끗희끗해지고 주름이 깊어진 아버지의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순간 코끝이 찡해진다. 우리 걱정은 마라. 일요일에 집에 올 수 있니, 라고 이번엔 아버지가 수화로 말한다.

“좀 바쁩니다.”

아쉬움이 짙게 깔린 얼굴로 아버지가 알았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곧 입술이 닫혔다. 나는 더 이상 자신감이 배어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버지의 열정과 추진력과 가능성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성공을 위해 자신을 괴롭혔던 아버지의 신념이 세월 속에 낡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늦게까지 좁은 연구실에 머물며 논문을 쓰고 술자리에서 동료들과 어울리겠지만 부질없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나에 대한 걱정이, 미래가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숨통을 조르고 위협할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창문으로 비쳐든 햇살을 만끽하며 아침에 눈을 뜨고 화단에 핀 꽃들을 돌보며 주말을 보내고 이웃들이 보내는 존경어린 시선을 즐길 권리가, 자식의 결혼을 지켜볼 수 있는 기쁨과 직접 손주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둘 권리가 있음에도 나는 그들의 기대를 불안에 떨도록 방치했다. 부모님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흔들릴까봐, 또 다른 생각에 빠져들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갈등과 절망으로 긴장한 아버지의 눈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괴로워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음번에 시간을 내서 한 번 들러주겠니? 네 어머니가 걱정이 많단다. 여자들이란 늘 걱정을 달고 살지”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갑자기 생각난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나는 휴대전화를 소파에 던져두고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추억 중의 하나는 어머니가 겨울방학 때 나와 형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날들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심리학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번역 일을 했지만 내가 태어나고 나서 일을 그만두었다. (내가 어릴 적에 병치레가 잦아서였다.) 우리는 알파벳을 다 외울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세상은 설탕시럽을 두텁게 발라놓은 듯 하얗게 변해갔다. 창문너머로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알파벳을 외워야하는 일은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알파벳을 외우기 시작했지만 점심나절이 되어 형은 어머니의 테스트에 통과했다.

오후에 함박눈이 그치고 해가 나자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위해 시장에 갔다. 결국 집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실컷 눈 놀이를 즐긴 형이 모자에 하얗게 눈을 묻혀 돌아왔을 때 나는 여전히 M자와 N자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이 모자를 벗자 머리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형이 함께 나가 놀자고 꼬드겼지만 나는 끝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입심이 사납거나 완고한 분이 아니었지만 나는 어머니를 쉽게 거역하지 못했다. 그건 어머니가 완벽한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대단히 헌신적인 분이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집은 늘 아늑하고 청결했다. 봄이면 정원에 빨간색 팬지와 노란 수선화, 튤립이 꽃을 피웠고 여름이면 장미꽃 향기가 온 집안을 감쌌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장아찌와 잼이 냉장고에 있었고 창틀이며 가구 위에 먼지가 쌓이는 일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늘 다림질된 옷을 입었고 물건들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욕실에 휴지가 떨어지는 일조차 없었다.

나의 첫 번째 경쟁자였던 형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세상을 떠났다. 사고였다. 형의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그날 어머니의 얼굴은 납빛이었고 유골함을 든 손은 내내 하얗게 질려있었다. 죽음. 경쟁에서의 이탈. 무작위로 찾아든 죽음은 주변사람들을 무기력 속에 빠뜨리고 만다. 집안에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일들이 그 가치를 잃었다. 상대를 설레게 만드는 활기찬 형의 웃음이, 강인하고 도전적인 눈빛과 세계를 매료시킬 근사한 건축물을 세상에 내놓겠다던 형의 진지한 포부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았다. 되돌릴 수없는 시간들이 어머니의 뇌를 좀먹고 점점 비대해져만 갔다. 우리가족은 단 한 번도 예측하지 못했던 불행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는 서재를 피난처로 삼았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세상을 거부했다. 불행을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못했다. 그들의 위로와 동정은 불행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뿐이었다. 음식은 배달되었고 집안을 지키던 청결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었다. 어머니가 미용실에 들르지 않아 머리카락이 점점 길었다. 어머니는 퇴행했다. 하루 종일 멍하니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길게 물결치는 머리가 언제고 땅을 덮고 바다를 덮고 세상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릴 것만 같아 나는 두려웠다.

저녁은 볶음밥이었다. 냉장고에 뒹굴고 있는 야채를 죄다 썰어 넣고 밥과 함께 볶았다. 나는 요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주의다. 그러니까 요리는 청소와 마찬가지로 간단히 해치울수록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오래전 사다둔 위스키를 꺼내 한잔 마셨더니 좀 나아졌다. 설거지를 끝내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늘 현진이 그랬던 것처럼 나또한 소파 인간이 되어 창밖을 바라본다.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여자는 커튼을 달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급히 거실의 불을 껐다. 집안이 어두워지자 밖은 한층 밝아졌다. 빛을 탐하는 나방처럼 나는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희가 떠났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가희가 두고 간 이미지를 여자에게 입힐 작정이었다. 나는 이제 가희를 잊을 것이고 옆집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급조된 환상 속에 몸을 맡긴다.

식탁 중앙에는 칼라 꽃이 목이 긴 화병에 꽂혀있고 작고 새하얀 식기들 위에는 한 사람을 위한 음식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음식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은 배고픔에 다소 흥분해있다. 여자가 코를 킁킁거리며 먹는 일에 열중한다. 젓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동나는 동안 누군가 여자의 몸에 공기를 주입하는 것처럼 여자의 몸이 서서히 거대해져간다. 여자는 식욕이 왕성하다. 음식을 해치우고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와 식탁과 의자와 창문을 먹어치운다. 여자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작아져간다. 아무것도 그녀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여자는 자신의 집을 완전히 먹어치우고 거리로 나와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먹어치운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거대해진 눈을 들이대며 창문 너머로 내 집 안을 들어다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기분 나쁜 눈길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내 집 지붕을 먹어치우고 창문과 벽을 뜯어먹는다. 나는 달아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음식이 되고 싶다. 여자가 눈을 내리깔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나의 어깨와 가슴과 다리가 식욕을 촉진시켜줄 것이다. 먹어다오. 먹어다오. 여자가 벌레를 집어 올리듯 검지와 엄지로 나를 집어 올린다. 그녀의 거대한 눈이 다가온다. 새카맣고 거대한 동공 속에 공포에 질린 나의 미니어처가 들어 있다. 빨간 입술이 벌어지는 순간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이 번쩍 떠지고 말았다. 얼굴과 목이 땀으로 흥건하다. 역시 몸살기가 있는 모양이다.

이번 주말에는 꼭 집에 들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막상 주말이 되자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 결국 방문은 다음 주로 미뤄졌고 내일까지 끝내야할 원고 때문에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최 교수에게 받아온 영문 텍스트를 펼치고 노트북을 열었지만 쉽게 몰두 할 수가 없다. 7월에 접어들면 늘 이 모양이다. 잠시 뻑뻑한 눈을 감자 풀을 뜯고 있는 지온의 하얀 손이 떠오른다.

어느 여름날, 운동장 조회가 끝나고 학교전체가 대청소로 떠들썩했다.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즐거운 얼굴로 여러 명씩 짝을 지어 흩어졌다. 어찌하다보니 나와 지온만이 운동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담임이 다가와 우리에게 테니스 코트 주변의 웃자란 풀들을 뽑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테니스 코트 쪽으로 걸으며 다른 아이들처럼 담임의 귀에 정확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투덜거렸다. 지온은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왔고 말없이 풀을 뽑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태양은 점점 뜨거워져 풀을 뽑는 동안 등과 겨드랑이쪽이 끈적거렸다. 그와는 중학생이 된 후 줄곧 같은 반이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본적이 없었다. 지금은 어떤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말없이 풀만 뽑는 게 어색해서 내가 실없이 희떠운 소리를 해댔다. 그가 이따금 소리 내어 웃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가 좋았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벌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장난삼아 몇 개의 돌을 던졌는데 그 중 하나가 벌집을 건드렸고 약이 바짝 오른 벌떼가 우리를 공격했다. 지온과 나는 나란히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지온은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그를 보기 위해 나는 자주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경기가 끝나면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곧장 수돗가로 뛰어가지 않고 지온이 앉아 있는 벤치로 갔다. 그러면 녀석은 책을 덮고 그림을 감상하듯 땀범벅이 된 나를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가 읽던 책을 뺏어들고 관심도 없으면서 읽는 척을 했다. 여느 때는 숨 막히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도 했다. 녀석의 주먹이 가볍게 내 가슴을 치면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한동안 장난스런 주먹질이 오고갔다. 서로의 몸이 부딪치는 동안 우리는 주위의 시선 따위에 아랑곳없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누군가 우리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둘이 사귀냐?”

“그래, 사귄다.” 우리는 동시에 소리치며 웃었다.

지온은 호모새끼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언젠가 덩치가 크고 사납기로 소문 난 진규 선배에게 지온이 대책 없이 당하고 있을 때 구해준 적이 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맨주먹으로 과학실 유리창을 깨뜨렸고 진규 선배를 향해 마구 욕설을 내뱉었다. 제대로 열 받은 진규 선배가 주먹을 휘두르자 나는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가 나의 멱살을 부여잡고 씹새끼 너는 끼어들지 마라,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마지막 용기로 그의 페니스를 걷어찼다. 결국 나는 그날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지만 지온을 온전히 얻었다.

소문은 날개를 달았고 나는 지온을 두고 겨룬 경쟁에서 금빛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형이 휘파람을 불며 받아오던 우등생 상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힘겹게 쟁취한 것으로 사춘기를 빛내는 전리품이었다. 여리고 아름다웠던 지온.

저녁을 일찍 먹고 트레이닝 복장으로 산책에 나섰다. 공원을 한 바퀴 돈 다음 옆집 여자가 타고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정류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한껏 기대에 차 있었지만 막상 버스에서 옆집 여자가 내리자 나도 모르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유리창 밖으로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가희처럼 아름답지 않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거침없고 생동감이 넘친다. 옆집 여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필요한 물건이 떠오른 듯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자주 이용하는 곳인 듯 내부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장 음료 코너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주저 없이 여섯 캔들이 맥주와 감자스낵을 집어 든다. 계산대 쪽으로 나가며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는 인스턴트 음식도 챙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인사를 건넬 작정으로 여자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외면하고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집 앞에서 몇 번이고 마주친 적이 있으니 나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녀가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편의점을 나왔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내 등 뒤에다 대고 뭐라고 소리를 쳤을 테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지름길을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닫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네모난 창가로 간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린다. 여자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브래지어 차림으로 맥주 캔을 따서 마신다. 능숙하게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선채로 먹는다.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데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자가 욕실로 들어간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모기는 여전히 극성이다. 나는 창가에 바짝 붙어 서 있다가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벽 쪽으로 달라붙어 몸을 숨긴다. 언뜻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어둠속에 서 있는 나를 감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잠옷차림으로 나타난 여자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외면당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강하게 집착했다. 나를 외면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외모나 입고 있는 옷의 가치가 그녀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성급하게 여자에게 말을 거는 성품에 부당한 의심을 가지고 날선 경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를 외면하는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자에게 정복 욕구를 심어준다. 나는 그녀를 정복하고 말 것이다. 가희처럼 정복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가희처럼 육체가 없는 여자를 또다시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자가 자리를 뜰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아침을 해결하고 막 번역을 시작하려했을 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폴더를 열자 최 교수로부터 자신의 연구실로 나와 달라는 문자가 와 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휴대전화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잠그고 인도 쪽으로 서너 발자국 걸어 나갔을 때 몸이 일순간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몸에 거의 닿을 듯이 배달용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다. 경적을 울렸겠지만 내가 피하지 않자 놀란 것인지 사내가 뒤돌아보며 화를 낸다.

‘병신새끼, 귓구멍 처먹었냐?’

사내는 아마도 그런 욕설을 내뱉었을 것이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물놀이를 갔다. 해변은 휴가철을 맞아 여느 여름처럼 인파로 북적거렸다. 바다는 반짝거렸고 모래는 발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뜨거웠다. 온몸을 검게 그을린 남자들이 비치볼을 즐겼고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해변을 활보했다. 둥글게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며 단체 게임을 즐기는 대학생들, 원반을 던지며 뛰어다니는 무리, 물속에서 즐거움에 아우성치는 인간들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개를 안고 몸이 거의 스치듯 지나가던 여자의 짙은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형의 진지한 시선이 때때로 여자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해안에서 가장 한갓진 곳을 찾아냈다. 어머니가 그곳에 짐을 푸는 동안 나와 형은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차례 물놀이가 끝났을 때 어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점심을 먹고 형과 나는 햇살아래 드러누워 짐 속에 넣어온 게임기로 게임을 했다. 아버지는 파라솔 아래에서 랭보의 시를 읽었고 어머니는 새로 산 니콘 카메라로 나와 형을 찍어댔다. 우리는 못이기는 척 어머니를 위해 모래사장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고 바위가 있는 곳까지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 형이 내 손을 끌어당겼고 우리는 나란히 해변을 걸어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형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졌다. 학교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소파에서 TV를 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마침내 형이 입을 열었다.

“그 자식과 무슨 관계야?” 형이 물었다. 지온과 나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우린 친구야.” “친구? 웃기시네.” 형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다시 지온과 어울리면 그 녀석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으르렁거렸다. 지온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귀까지 빨개져 형의 눈을 피하며 계속 만날 거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어? 호모새끼와 어쩌겠다고.” 형이 마구 화를 내며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우리는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형이 제안을 했다. 무조건 이기는 사람 말을 듣기로. 우리는 동시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형이 앞서 바다로 나아갔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경쟁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해변에서 점점 멀어졌다. 형은 보란 듯이 힘차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죽었다는 건 찰나에 머무는 것이다. 내가 어른으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동안에도 형은 여전히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형에게 주어졌다고 믿었던 미래는 어디로 갔을까? 형의 짧은 생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반복되는 물음에 넌더리가 난다. 악취가 난다. 형의 육신과 옷과 신발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기억을 불태울 수는 없다.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거지? 왜 하필 형이란 말인가. 아무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사고였다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죽음을 상쇄시킬 만큼 큰 장애가 아니란 것이 슬플 뿐이다. 신이 나를 세상에 남겨둔 대가로 나는 평범해지기 위해서 기를 쓴다.

졸업할 때까지 좋은 학점을 유지했지만 청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취업은 불가능했다. 최 교수는 늘 나의 처지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출판사로부터 많은 양의 번역물을 요청받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를 나에게 맡겼다. 형편없는 수입이지만 현실을 잊게 해준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다.

연구실 앞에 도착했을 때 깊게 심호흡을 하고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앉게, 라며 입모양을 가장되게 움직인다. 그의 연구실은 좁고 블라인드가 내려져있어 약간 어둡다. 언제나처럼 책들은 책장을 벗어나 여기저기 쌓여있고 일회용 컵들이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놓여 있다. 그가 재스민차를 내놓았는데 나는 입술에만 가져다대고 탁자에 도로 내려놓았다.

“자네한테 좋은 소식이 있네.”

그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흰 종이에 그렇게 적었다. 나는 이야기를 나눌 때 상대가 천천히만 말하면 그들의 입모양으로 말뜻을 대강 읽어낼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천천히 말하는 것을 곤혹스럽게 여겼다. 누군가가 말할 때 자신의 입모양을 주시하는 게 못마땅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그가 휘갈겨놓은 글자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뜸을 들였다. 재가 빨갛게 타오른다. 마침내 그가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적기 시작했다. 그는 내년에 교환교수로 런던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써야할 논문의 양이 너무 많아 출판사로부터 의뢰받은 번역을 나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건 그의 말대로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자네에게 주고 있는 번역료에서 번역료를 더 줄 수는 없네.”

그는 내게 더 많은 일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돈은 더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신 취업하고자 할 때 추천장이 필요한 경우 자신이 써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대화가 순조롭지 않을 때 어딘가에 홀로 갇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하고 나서 재스민차가 남은 종이컵을 들고 그의 연구실을 나왔다.

학교에 나온 김에 책을 빌리려고 잠깐 도서관에 들렀다. 윤서를 만난 것은 중앙도서관 로비에서였다. 윤서는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양손에 논문 복사물을 잔뜩 들고 있었는데 무거워보였다. 학교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도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 쪽에서 멈칫하자 그녀 쪽에서 다가왔다.

“어쩐 일이야.”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최 교수님 뵈러 왔어.”

내가 대답하며 손을 내밀자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의 일부를 내게 건네주고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그녀는 인문관 옆 주차장으로 걸어가 자신의 차에 그것들을 싣고 나서 차 마실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 마다 그녀에게서 라벤더 향이 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시절 내내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나의 룸메이트는 도쿄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그는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위트가 넘쳤고 언어를 몸짓으로 바꾸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와의 대화는 늘 즐거웠다. 그해 여름 룸메이트의 소개로 나는 윤서를 만났다. 윤서는 도쿄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때 서로 알게 된 사이였다. 윤서를 처음 집으로 데려갔을 때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하며 음식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다소 의아해했지만 옷을 갈아입는 수고까지 하며 우리를 기다렸다. 윤서는 외동으로 자랐지만 배려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구김살 없이 밝았다. 두 분 모두 윤서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식사시간 내내 두 분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들과 만나주는 것만도 고맙다는 얼굴이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녀와 함께 그녀의 원룸에서 영어스터디를 시작했다. 그녀는 영문법에 취약했으므로 나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했다. 나는 가끔 집중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텍스트 위로 떨어지곤 했다.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 머리를 아무렇게나 매만져 머리 위쪽에 연필로 고정시켜놓으면 양파처럼 하얀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볼펜 끝 쪽을 잘근잘근 씹었는데 그럴 때면 분홍색 혓바닥이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드러났다. 그녀가 즐겨 입던 푸른색 셔츠를 벗기던 날이 떠오른다. 그녀의 작고 앙증맞은 가슴을 쓰다듬고 부드러운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쓸어내렸을 때 나는 진정 그녀를 원한다고 믿었다. 우리를 방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거리와 열린 창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과 따뜻한 햇살은 이미 우리 편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녀는 나의 그런 노력들을 좋아했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나는 나른한 충족감 속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곁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그녀를 보며 나는 강해졌다고 느꼈다. 어떤 것도 나를 좌절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때 나에게 힘이 되어 주던 사람이다.

커피숍 창가자리에 앉자마자 윤서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내가 휴대전화를 흔들자 그녀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게 더 편리하지.”

내가 문자를 보내자 그녀가 웃었다. 윤서는 작년에 결혼했다. 나는 결혼식에 가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행복하니?”

내가 물었다. 나는 이미 그녀의 얼굴을 보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휴대전화를 내밀어 남편의 웃는 얼굴과 키우는 고양이가 하품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윤서와 헤어지고 나서 오래간만에 부모님의 집에 들러 어머니가 끊여주는 된장찌개를 먹었다. 식탁에서 어머니의 관자놀이가 하얗게 센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껏 보아오던 어머니의 머리색이 염색된 것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혼자서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이 없는지, 번역으로 얻는 수입만으로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취업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최 교수님이 한 제안을 화제로 꺼내놓으며 번역일거리가 늘어나게 생겼다고,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젖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현관 앞에 섰을 때 뜻밖에도 한참동안이나 안아주셨다. 약간 머쓱하고 놀랐지만 그대로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편의점 문을 열고나오자 회청색 하늘에 별이 뜬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아서 그냥 공원 앞을 지나치지 않고 잠깐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은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렸다. 나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들 속에서 옆집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돌고 있었다. 나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팽팽한 줄에 이끌려가는 것처럼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었다. 뭔가를 느낀 것인지 갑자기 여자가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고 재빨리 말을 했다. 여자는 가희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가희처럼 상상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냉정했고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꿰뚫어보았다. 귀머거리 호모새끼. 그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보고 말았다.

처량했다. 그해 여름은 길고도 길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지온을 떠났지만 호모라는 말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소리가 없었다.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조차 없었다. 침묵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나는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지 못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집 앞에 당도했을 때에야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현관문을 열기위해 열쇠를 찾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뒤에서 나를 돌려세웠다. 뜻밖에도 눈앞에 지온이 서 있었다. 그는 주위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잡으려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환영 따위가 아니었다. 단단한 육체와 아름다운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세월이 그를 훑고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지온이 나를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나는 일조차 없기를 원했다. 그 시절 우리가 품었던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진지해지기를 거부한다. 만약 그 해 여름 형이 죽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지온이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지온이 마치 늘 그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거리낌이 없이 소파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보기 위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동안에도 틈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목이 말랐는지 쉬지 않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빈 물 컵을 내려놓으며 다음 주에 다시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말했다. 왜 찾아왔는지 묻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다른 길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온 것이다. 내 앞에는 지온과 함께 평범함에서 계속 멀어지는 길과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처럼 평범함 속으로 돌아가는 길이 놓여있었다. 지온과 함께하는 길로 들어선다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 사람들이 보내는 악의에 찬 멸시가 어딜 가나 따라다닐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이 없다면? 홀가분하게 가고 싶은 길로 갈 수 있을까? 후회할지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가족이 받을 상처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진정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인생은 한 번뿐이고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가족이 받을 상처는 가족의 몫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을까?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지온은 어떤 마음일까? 그는 가족을 버렸나? 아님 그의 가족이 그를 버렸나? 지온은 사람들의 경멸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조롱당하는 일에 익숙해진 건가? 그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지? 대체 무얼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그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말을 하고 있는데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대답여하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질까? 그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먼저였다. 나는 특별하고 싶었다. 은밀하게 그를 탐한 건 나였다. 그의 손을 잡고 싶다. 함께한다면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진실이란 없다. 완전무결한 진실을 원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란 걸 안다. 진실이 뭘까? 거짓의 다른 얼굴? 거짓은 또 뭔가? 자아와 객체가 수긍하는 진실이 진실인가? 자아 쪽에만 진실하면 진실이라 말할 수 있나? 객체는 진정 객관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나? 사실 이런 질문들은 모두 부질없다. 지금껏 받아들인 모든 삶이 거짓이었다고 세상에 떠들어댈 자신이 없다. 귀가 먹었다고 해서 소리를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어머니가 다시 머리를 기르고 아버지가 책 속으로 도망칠 것이다. 나는 지온이 볼 수 있도록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온은 울고 있었다. 그는 나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여리고 아름다운 사람. 나는 지온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허벅지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박해동/ etion@naver.com/010-2462-4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