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NTITY
1. 프롤로그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될것이다”
섬뜩한 문구로 시작되는 영화, 늦은 밤 영화관 한켠에서 최근 개봉작을 보는 남자
늦은 시간이라 한산한 영화관은 드문 드문 홀로 영화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인다
영화관 맨 뒷자리에 자리잡고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들고 스크린 속으로 빠져드는
한 남자, 영화가 전개될수록 남자는 스크린에서 눈을 뗄수 없다 갑자기 들리는 비명소리,
남자 놀라서 주위를 돌아보지만, 스크린 속에 있는 인물의 비명소리일뿐, 주위는 고요한
정적만 흐른다 다시 스크린 속으로, 얼마간 시간이 흐른후 다시 들리는 비명소리, 단말마의 고통, 잠시후 고요해진다 남자는 스크린 속의 인물이 내는 비명일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 갑자기 들리는 비명소리, 여기 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소리,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남자는 일어나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뚫고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스무살 남짓한 여자에게 다가간다 자지러질듯 놀라는 여자가
가리키는 곳은, 여자의 자리에서 서너칸 건너에 앉아있는 갈색 자켓의 남자 목부근에 피를 뚝뚝 흘리며 숨이 멎어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안아서 진정시키는 남자, 잠시후 경찰과 구급요원이 들이닥친다 남자의 시신은 그 사람들에 의해 영화관 밖으로 옮겨지고, 남아있던
관객들은 하나둘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어느새 텅 비어있는 영화관 안에는 남자와 여자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같이 나갈까요?” 여자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서 그 자리를 떠난다
어둠만이 남겨진 영화관 까만 스크린이 스르르 움직인다
까만 스크린이 한발 한발 뚜벅 뚜벅 걸어나온다
죽은 남자의 자리에 멈춰선 스크린, 종이 한 장을 남기고 스르르 사라진다
남자가 앉아있던 의자 위에 펼쳐진 종이 한 장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될 것이다”
2. 서강혁
34세, 지하철 근무 3년차, 막차가 끊기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빈 지하철 역,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한 장의 영화 포스터,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될 것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영화 포스터를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다음날 늦은 밤 영화표를 예매한다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남자, 갈색 자켓이 제법 잘 어울리는
잘 생긴 남자다 나가기전 영화 포스터를 흘긋 한번 보다가, 시계 알람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걸어나간다 텅비어 있는 지하철 역 안에는 벽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될 것이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무렵, 밤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온다
자켓을 꼭꼭 여미며, 어깨를 웅크리고 걷는 강혁, 번화한 상가를 지나서,
주택가로 접어든다 드문 드문 불이 켜져있는 가로등, 강혁은 꺼져있는
가로등 몇 개가 못마땅한듯 혀를 쯧쯧 찬다
“아직도, 골목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걸음을 재촉하는 강혁의 뒤에서 또각 또각 소리, 여자의 하이힐이 내는 마찰음이다
강혁 거슬리는 듯 잠깐 멈췄다, 하이힐 소리 들리지 않는다
다른 골목으로 갔겠거니, 여기며 다시 걷는 강혁의 등뒤로 다시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 들려온다
섬뜩한 느낌이 드는 강혁, 걸음을 빨리 하는데, 하이힐 소리도 바쁘게 따라온다
온 신경이 곤두서있는 강혁, 슬쩍 뒤돌아본다
아무도 없이 캄캄한 어둠속에 하이힐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머리 끝이 쭈뼛 서는 느낌에 정신없이 달리는 강혁의 등뒤로 또각 또각 또각
따라 달리는 하이힐 소리, “으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다급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대문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뿐 숨을 고르는 강혁, 몸을 돌려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들리는 하이힐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강혁,
빨간 하이힐 두짝이 또각 또각 마찰음을 내며, 강혁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온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는 강혁,
“돌아보지 마라”
“으아아악”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는 강혁, “일어나라 일어나라”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아침을 알린다
식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는 이마, 악몽치고는 꽤 선명한 꿈이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3. 진채우
영화표를 예매했다 오랜만에 여동생과 영화 한편 볼 여유가 생겼다
학업과 가장 역할을 병행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애련이 취직했지만, 아직은 어린애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우리 둘의 생활비와 애련이 시집갈 밑천까지
벌어놓아야한다 잠을 줄여서 투잡을 한다
그래도 하늘 아래 우리 둘뿐인 사랑하는 여동생과 함께라서 하루 하루가 뿌듯하고
행복하다
오늘은 친구 녀석에게 잠깐 일을 맡겼다
대신 일당은 친구 녀석에게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하루는 여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늘은 하나뿐인 여동생 애련의 생일이니까
오늘따라 강의가 길어진다
교수님 말씀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시계를 본다
친구 녀석에게 일거리를 전해줘야 되는데, 오늘따라 교수님은 느긋하시다
삼십분이나 넘겨서 강의를 마친다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전화벨이 울린다 기다리던 친구 녀석이다
어? 안된다고? 어쩌지? 오늘 애련이 생일인데
저녁 먹을 시간은 어찌 빼보겠는데, 그 외의 시간은 어렵다고 얘기한다
친구도 갑작스럽게 생긴 일로, 오래 시간을 빼기가 어렵게 됐나보다
어쩌지? 영화표는? 애련에게 전화를 건다
영화표 취소할까? 얘기해보지만, 영화는 혼자 보겠다고 한다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
기쁘다 애련이도 드디어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나보다
그동안 오빠가 바빠서 많이 미안했는데, 이제는 덜 미안해도 될 것 같다
그래도 오빠한테는 너뿐이야 애련아
하나뿐인 내 여동생, 네가 있어서 오늘도 나는 힘을 낸다
4. 갈혁준
헤어샵 원장인 나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에게 별 의미없는
대화를 던지고 영혼없는 칭찬을 몇마디 건넨다 그러면 사람들은 활달한 사람이네
유쾌한 사람이야 재밌네 하면서 다음에 또 올것을 기약하면서 만족하며 헤어샵을
나간다 머저리들, 그 사람들을 공략하는건 아주 쉽다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아주 슬쩍 건드려서
그들 안에 내재되어있는 태고적 외로움을 곱씹어보게 하면 된다 그러면서 나도 너처럼 외롭다 사는게 다 그러하지 않겠느냐 사는건 고해로다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 즐겁게 살다가면 되는거 아니냐 들어보면 뻔한 얘기를
누구나 하는 얘기를 몇마디 건네면 사람들은 아, 이 사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아, 이 사람은 내 마음에 공감해주는구나 하면서 만족해한다 아, 여기서 하나 빠진게 있다
그 사람들의 얘기를 성의있게 들어주고 대답해주는거다 내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아느냐고?
아니, 모른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그 사람들은 내 고객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고객 관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만큼의 관심만 보인다
고객과 친해지는거 나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계 중독증”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증상을 보인다
잠시의 혼자 있는 시간도 견디질 못해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소통아닌 소통을 하고,
어딘가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영혼없는 대화를 지껄이고, 영혼없는 대화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지나친 관계 의존증” 자신은 없고 관계를 통해서 그들에게 대입된 나, 그들과 소통하는 나만 있을뿐이다 그들이 던지는 몇마디가 나의 외로움을 희석시켜 주며, 그들이 던지는 영혼없는 칭찬이 나를 제대로 보아준양, 으쓱해지며, 봐라 나는 이런 사람이야 자위하며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나의 존재 가치를 알아준 사람에게 잘 보이려 내 자존심을 팔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비굴하게 그들의 영혼없는 대화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다 누구 하나 떨어져나가면, 서둘러 다시 아무나 그 자리에 갖다 앉힌다
쉽게 쉽게 다시 영혼없는 대화에 빠지고, 떨어져나간 자리를 메우며 다시
“관계 중독증” 에 중독된다
그래야 나는 살아있는 것 같으니까, 그래야 내 존재 가치를 확인 받으니까,
나는 그들을 통해서만 살아있고,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현대인들,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나를 입증하고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만 나를 위로하는
자신을 그들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건, 바로 자신임을 모르고 있는
바보들이다
그들이 몇마디 중얼거리는 공감이 태고적 외로움을 걷어낼 수 있을까?
진정한 공감은 “침묵속의 공감” 임을 모르는 그들에게 철저하게 고독해지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뼈속 깊숙이까지 고독해지고 난 다음, 온전하게 자신과만
마주할 수 있을때, 비로소 침묵으로 공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걸
그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헤어샵을 하는 이유는 그거다
영혼없는 대화를 통해서 고객의 기분을 북돋아주면 그들은 필요이상으로
자신을 내보인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나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보이고
자신과 상관없는 내가 자신에게 공감해주길 바란다
쉽게 드러낸 자신의 치부조차도, 아무 상관없는 나의 공감을 얻어내길 바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을 모르는 나에게 털어놓고, 공감을 얻어서 홀가분해졌으니,
마치 면죄부라도 부여받은양 한숨 돌리며 들어올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헤어샵을 나간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각자 부여받은 자신의 몫이 있다
자신이 해내야할 일을 해냈을때 마땅히 부여받는 몫,
겸허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짊어졌을때 마땅히 부여받게 되는 몫
자신에게 부여받은 몫조차 해내지 못하면서, 이미 얻어낸 남의 몫을 탐낸다
탐욕, 탐욕으로 얼룩진 자신의 내면을 모르는 나에게 공감을 얻어냈다 여기겠지만,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인내하며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해낸 사람들이 마땅히 얻어야할
가치를 탐하는 탐욕까지 면죄부를 부여할 재간은 내게도 없는 것이다
정의의 사도? 아니다 정의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것이고, 나는 그저 인내하며
묵묵히 살아낸 사람들이 받는 각자의 몫이 정당하게 그들에게 주어지길 바랄뿐이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판하는게 아니라, 부정적인 시각 또한 가져야 긍정적인 세상의
가치를 아는게 아닌가 하는거다
자, 이제 내가 헤어샵을 하면서 자신의 치부조차 모르는 이에게 가볍게 드러내는 그들과
깊이 공감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겠는가?
그들은 실패가 아닌, 과정이 경험이 되는 실수가 아닌, 정당하게 주어져야할 몫까지
탐을 내는 탐욕조차,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으며 쉽게 쉽게 털어내려 한다는거다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 고통받았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묵묵한 인내의 시간은
어디서 위안 받아야 된다는 말인가?
정당한 몫을 받고, 정당한 대가 또한 주어지는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일텐데
인고의 시간을 걸어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할 몫이 탐욕으로 얼룩진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까지 공감해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공감할 수 있다는건,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맞아떨어졌을때나 가능한 일이다
맞아떨어지지 않은 가치에 고개를 끄덕이면, 결국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밖에 더 될까?
그러나, 누구나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무랄 생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나에게 공감만 바라지 않으면 될뿐이다 거짓 섞인 공감은 되도록 하지 않는게
자신의 겉포장과 내면이 괴리되지 않는 일이 될테니,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해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할 가치가 그들에게 정당하게 주어지기만을 바랄뿐이다
나는 갈혁준이다
5. 진애련
원장님께 매일 아침 모닝콜을 해드린다
면접시 원장님께서 바란건 딱 한가지,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모닝콜을 해달라는
조금은 이상한 요청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원장님의 요청이 나이 지긋한
변태남의 능글맞은 요구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원장님께서는 단호하게
자신이 바라는건 모닝콜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알람이 있어도 깨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서 매일 아침 모닝콜을 해줄 수 있는
직원이라면 무조건 채용하겠다며, 뭐 어떠랴 조금 일찍 일어나서 원장님이
원하는 시각에 모닝콜을 해드리고 덩달아 나도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원장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첫날, 긴장했는지 잠을 설친 탓에 가까스로 일어나 모닝콜을 했다
둘째날, 전날보다는 여유롭게 모닝콜을 할 수 있었다
가벼운 농담을 곁들여서 아침 인사를 건넸지만, 원장님은 모닝콜 외의
어떤 농담도 듣고 싶지 않아 하셨다
셋째날 원장님의 뜻대로 원하는 시각에 모닝콜만 했다
사무적이고 냉랭하게 원장님은 별 상관 없어하는 듯 보였다
넷째날 전날처럼 사무적인 인사만 건네고 이내 전화를 끊었다
다섯째날 역시나 전날과 다름없다
헤어샵에서 원장님은 고객들 외에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직원들에게는 지시 사항만 전달할뿐, 사적인 어떤 대화도 일체 허용하지 않으신다
베일에 싸여있는 원장님, 직원들 누구도 원장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접근하던 여직원을 가차없이
자르셨다 그 후로 어느 누구도 원장님께 사적으로 들이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게 됐다 원장님은 일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듯
보였다 직원들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이상의 정을 주지 않으려한다
그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원장님께서는 사람으로 인한
상처가 깊은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따름이다
가끔 오빠와 원장님 얘기를 나눈다
채우 오빠는 그런 원장님을 마음에 들어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나이 지긋한 원장님 밑에서 일하는게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오빠는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고 얘기한다
내가 볼때는 채우 오빠가 꼭 그렇다 항상 쾌활하며 늘 유쾌하다 사람은 누구나
선할거라 여기며, 인간의 근본은 모두 선함이 바탕이 되어있다고 믿는다
가끔 인간에 대해서 의심할 줄 모르며 무조건 믿는 마음을 가진 오빠가
염려되어 견딜 수 없어질때가 있다
인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고 있던 그 마음을 다치게 되면,
오빠는 아마도 누구보다 크게 상처받을 것이며, 누구보다 더 오래 아파하며,
누구보다 더 깊숙하게 자신의 마음을 가둬버릴 것이다
오빠가 염려되어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을 내비치면 오빠는 되려 나를 걱정한다
스무살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으면 안된다면서
오빠, 나는 불신하는게 아니야, 그저 인간의 내재되어 있는 양면을 보는 것 뿐이야
얘기해보지만, 오빠의 대책없는 인간애는 말릴 수가 없다
오빠, 건전한 마인드를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
다치지 말고, 언제까지나 그 마음 그대로 인간의 내재되어있는 선함을 믿으며
생을 밝고 건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항상 속으로만 오빠의 선한 마음이
상처 받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채우 오빠는 내게 하나뿐인 혈육이며, 부모님이니까, 오빠는 내게 유일한 가족이니까
나는 진채우의 하나뿐인 여동생, 진애련이다
6. 영화관
혁준은 오랜만에 영화나 한편 볼까하고 영화관에 들렀다
영화표를 끊고 팝콘과 콜라를 샀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많은 양이다
양팔 가득 안고 돌아서는데, 저 멀리 서있는 여자가 보인다
‘우리 헤어샵 여직원 애련이다
애련은 이제 스물, 청순하고 귀여운 아가씨다
애련에게 모닝콜을 요청했다
스무살이나 차이가 나는, 애련에게 변태남으로 비춰지기 싫어서
애써 무뚝뚝하게 대하지만, 애련이 무척이나 귀엽다
하지만, 나는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기로 맘먹었다
인간의 내면은 선과 악, 두 가지 양면을 갖고 있고 이 두 가지에서
자유로울 수 인간은 누구도 없다
우리는 늘 작은 일조차도 선함과 악함 사이에서 선택하고 내면에서 흔들리며
아슬 아슬 줄타기를 한다
오늘 선함의 편에 서있다고, 그 사람이 과연 전적으로 선한 사람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어제의 악인이 어제를 뉘우치고 오늘 선함의 편에 서있다
이 사람은 선인일까? 악인일까? 선과 악을 흑과 백으로만 나눈다면, 우리는 대단히 커다란 오류를 갖게 될거다 인간은 때에 따라서 선하기도 악해지기도 한다
나는 오늘 애련에게 선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 하지만 내일도 나는 과연 애련에게
선한 사람이 되어있을까? 나는 그저 애련에게 어떤 사람도 아니고 싶다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사람, 딱 그정도였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대하며 생각을 해본다는건 어떤 의미로든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애련이 나에게 어떤 관심도 갖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나는 애련에게 그저 “無” 이고 싶다‘
애련에게 향하려는 발걸음을 애써 돌려본다
돌아서는 마음 한켠으로 애련이 나를 먼저 발견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스멀 스멀 피어오르지만, 꼭꼭 누르며 극장 안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혁준은 총총히 걸어서 좌석에 앉으며,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시선을 고정한다
영화관 안에 들어온 애련, 영화표 두장을 들고, 한 장은 주머니 속으로, 한 장은
매표하는 직원에게 내민다 꽤 늦은걸까?
극장 안은 벌써 캄캄하다 비어있는 좌석이 대부분이다 자리를 찾아서 앉는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갈색 자켓을 입은 남자, 꽤 미남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다
‘아까부터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이 남자는 왜 혼자 온걸까?
나처럼 약속이 취소된걸까?‘
스크린에서는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괜한 호기심으로 바라봤던 젊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서히 영화에 빠져든다
어디선가 두두두둥 소리, 북치는 소리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지만,
주위에는 까만 어둠뿐, 다시 스크린 속으로 빠져드는 애련, 갑자기 비명소리 들린다
애련, 다시 주변을 보지만, 고요하다 젊은 남자는 잠이라도 든걸까? 고개를 숙이며
앉아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자, 남자의 손에서 핸드폰 액정, 불빛이 밝아졌다 사라진다
‘잠이 든건 아니었구나’ 애련은 다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영화에 집중한다
다시 이어지는 비명소리, 여자는 무서워하면서 스크린에서 시선을 뗀다
젊은 남자를 본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있다
‘핸드폰을 보는걸까?’ 한참동안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잠이 든것처럼 보이는 남자, 이어지는 비명소리에 애련은 다시 영화속에 빠져들고
영화가 끝날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않는다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불이 환하게 켜진 실내, 영화의 여운을 느끼려 잠시 앉아있는
애련, 갑자기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 애련, 무심하게 옆을 보다가 잠이 든것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연신 비명을 지르는 애련, 놀라서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어딘가로 전화하는 사람, 달려오는 직원들,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
누군가 다가와 애련을 안아준다 애련의 비명소리 작아지고, 등을 두드리는 남자에
의해 차츰 진정이 되는 애련,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본다
혁준이다
구급대원과 경찰이 들이닥쳐서 남자의 시신을 옮겨간다
혁준은 아무 말없이, 애련을 안고 있다
“같이 나갈까요?”
애련, 고개를 끄덕이며, 혁준에게 안긴채,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매표소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직원들,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두 사람의 팔을 잡는 누군가, 돌아보는 두 사람,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두 사람을 어딘가로 데려간다
직원들 사무실, “앉으세요”
“아까 그 남자분 제일 가까이 앉아계셨죠?”
“네” 애련,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뭐 이상한 점 없었어요?” 영화 보는 동안,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던가, 전화를 받는다던가,
하는, 없었어요?“
“없었어요 아, 핸드폰을 잠깐 봤던것 같아요 그 남자분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자는건가? 봤더니, 핸드폰 액정, 불빛이 켜졌다 꺼지더라구요“
“그래요? 그 후에는?”
“그 후에는 잘 모르겠어요 봤는지, 안봤는지, 무서운 장면이 나와서 잠깐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때 그 남자분은 자고 있었어요”
“자고 있었다구요? 확실해요?”
“아니오 확실하지는 않아요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봤더니, 한참 그대로 있길래, 자는 줄 알았거든요 그후로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남자를 못 봤어요”
“허, 거참, 암튼, 두 분은 여기 연락처 좀 적어두고 가세요”
“네에?”
“아까 거기서 영화 보신 분들 연락처를 다 받고 있어요”
“네...”
영화본 사람들 연락처가 쭈욱 기록되어있다
우진혁
“어?”
애련, 어디선가 본 이름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한다
“왜요?”
혁준이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에요”
우진혁의 이름 밑에 제 이름을 적고 연락처를 남긴다
혁준, 역시 연락처를 남겨놓는다
“가도 되는거죠?”
“가보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영화관 바깥에서 잠시 멈춰서는 혁준, “이제 어디로 가죠?”
애련, “오빠를 기다려야해요”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아니오, 친오빠에요”
“아, 어디서 기다릴까요?”
‘이런, 내가 왜 이 여자의 오빠를 같이 기다리지?’
‘원장님, 왜 나랑 같이 있지?’
“아무데서나요 이 근처면 돼요”
주위를 둘러보는 혁준, 늦은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있는 커피숍을 가리키며, “가요”
혁준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는 애련, 걸려오는 전화, “여보세요 채우 오빠?”
“너 어디냐?” 경쾌한 목소리의 채우, 떨리는 목소리로 “나, 지금 영화관 근처야”
“어디? 너 안 보이는데?” “오빠 여기 왔어?” “아, 찾았다 너? 누구랑 같이 있냐?”
“아, 우리 헤어샵 원장님” “같이 영화본거야?” “아니, 우연히 만났어, 오빠 어딨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애련, “돌아보지마” 애련의 팔을 잡는 채우, 어느새 애련의 등뒤에 서있다 애련, “오빠 놀랬잖아 아, 우리 헤어샵 원장님이셔” “안녕하세요 진채우입니다”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안..안녕하세요” 엉거주춤 인사를 받는 혁준, “반갑습니다”
“우리 애련이가 많이 서툴죠?” “아니, 뭐, 잘 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빨리 배우고 있어요”
“그래요? 우리 애련이 이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하셨어요?”
“네에? 지금 시간이...식사는..아, 출출하세요?” 채우가 되묻는다
“네, 조금 출출합니다” 근처를 둘러보는 채우, 피자집이 보인다
“저기로 갈까요?”
“그러죠” 혁준과 애련, 채우, 세 사람 나란히 걷는다
7. 흑백
늦은 시간에도 손님들로 북적이는 피자집, 적당한 조명이 서로의 어색함을 가릴 수 있을만한 구석자리 한켠에 자리잡은 세 사람, “어때요? 여기?” 채우가 혁준에게 “괜찮은데요” 왠지 성의없어보이는 대답의 혁준, “피곤하세요?” 채우가 혁준에게 되묻는다 혁준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애련, 주문을 하고 잠시 자리를 뜬다
혁준, 말없이 눈으로 애련을 쫒는다 채우, 혁준의 눈빛을 읽는다
채우, 불쾌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혁준, 마주앉은 채우를 의식하고는 이내 애련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오늘 어땠어요?” 채우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혁준, “뭘요?” “영화”
“아, 괜찮았어요 영화는, 근데..영화관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소스라치게 놀라는 채우,
“살인 사건이라니요?” “애련씨와 같은 줄에서 영화를 보던 남자가 죽어있었어요 영화 끝나고 발견됐구요” “애련이가...오늘 영화 같이 봤어야 됐는데...아, 그래도 원장님께서 계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혁준, 담담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갑자기 물어본다
“근데 왜?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아요?” 채우, 허를 찔린 듯 보인다
“네에? 아니, 뭐..저희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범인은 경찰이 알아서 잡을테니까요 우리가
뭐 별달리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안 그런가요?“
“으음, 채우씨는 보기와는 다르게 꽤 냉정한 사람이네요 의외인데 이거..”
“의외라니요? 혁준씨는 저를 잘 모르실텐데 의외라 말씀하시니 제가 더 당황스럽군요”
“대부분 살인 사건이 생겼다하면, 관심을 갖고 보니까요 같은 영화관에서 건너 건너 자리에 앉은 사람이 영화를 보다가 살해당했다면, 누구나 관심을 갖는게 인지상정이니까요 보편적인 정서에서 벗어나있다 밝아보이는 채우씨와는 상반되는 모습이라 오히려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채우씨 혹시 살인 사건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요? 의식적으로 살인 사건을
언급하지 않으려하는 뭐 그런거..“
“제가 살인 사건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죠, 저는 그저 우리 애련이가 많이 놀랐을텐데..싶어서..더이상 얘기를 안 꺼내는 것일뿐..혁준씨는 직업을 헤어 디자이너가 아닌,
추리 소설 작가를 하실걸 그랬어요 추리 소설 많이 보시나봐요 말도 안되는 추리를 하시는걸 보니, 취미가 혹시 추리 소설 읽기, 뭐 그런건가요?“
“하하, 이거 바로 보셨네요 네 제가 추리 소설 마니아에요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추리 소설에서처럼 생각하는게 습관이 되나서, 하하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아, 저기 애련씨 오네요, 이제 이런 얘기 그만 할까요?”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애련, 밝은 얼굴로 다가와 채우 옆에 앉는다
“두분 왜 이렇게 조용하세요? 말씀이라도 나누고 계시죠, 피자는 왜 안 나오지?”
“피자, 저기 나온다 애련아” 종업원 피자를 애련의 테이블에 놓는다
“맛있게 드세요”
“어서 드세요 오빠도 먹어”
애련, 두 사람에게 피자를 권하고, 자신도 한쪽을 들고 맛있게 먹는다
“맛있어요 여기 피자 괜찮은데, 어때 오빠? 어때요 원장님?”
“맛있네요” “어, 맛있어”
무미건조한 대답, 표정없이 피자를 우걱 우걱 먹는 혁준, 먹는둥 마는둥 피자를 들고 있는 채우, 두 사람을 갸웃거리며 보는 애련, “이상하네 두 사람, 혹시 나 없는 사이에 두분 다투셨어요?” “아니” “아니에요” 둘이 동시에 대답한다
“하아, 거참 이상하네 두 사람 혹시 둘이서 나 욕했어요? 그래서 어색한거에요?”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다 채우 피식 웃어보이며, “그래 너 욕했다 그렇죠? 원장님?”
혁준에게 슬쩍 동의를 구한다 혁준, 채우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가볍게 농담하듯
“맞아요 애련씨, 일 잘 안 하고 가끔 농땡이라구요” “뭐에요? 원장님?” 발끈하는 애련,
이내 피식 웃어버린다
조명은 시시각각 변하면서, 혁준의 자리를 어둡게, 채우의 자리를 밝게, 비춰주면서,
웃고 있는 혁준의 얼굴이 진지하게, 무표정한 채우의 얼굴이 즐겁게 보여진다
조명은 다시 변한다, 혁준의 자리를 밝게, 채우의 자리를 어둡게 비춰준다
평소와 마찬가지인 우울한 표정의 혁준의 얼굴이 편안해보인다
평소와 다름없는 쾌활한 채우의 얼굴이 침울해보인다
애련,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두 사람 다른 듯 닮은 얼굴을 하고 있네 하아, 신기하다’
8. 거리의 여자 그리고 남자
"거봐, 조심하랬지?“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있다 옷에 흘리는 애련, 가볍게 퉁을 주는 채우, ”뭐, 어때, 곧 들어갈텐데..오빠는 괜히 그래“ ”다 큰 여자애가 칠칠맞게, 이리줘“ 애련의 커피잔을 대신 들어주는 채우, 사이가 꽤 좋아보이는 남매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흐뭇해지는 혁준, “보기 좋아요 부모님이 흐뭇하시겠어요” 흐려지는 애련의 얼굴,
채우 담담하게 얘기한다 “부모님 안 계십니다 두분다 우리 어릴때 돌아가셨어요”
미안해지는 혁준, “이런,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미안합니다”
채우, “괜찮습니다 오래전이라 이제는 담담해요 그렇지? 애련아?”
담담해보이지 않는 표정의 애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채, 멀리 본다
채우, “애련이는 아직도...아무래도 저보다는 더 어릴때니까요”
“실례가 안된다면, 몇 살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는지?”
“애련이 열 살, 저는 열다섯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갑작스런 비행기 사고로 두분다
아버지 회사에서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게 됐어요 해외 여행은 처음인 두분 다 무척 들떠있었는데, 여행지에 도착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저와 애련이는 그 후로 비행기 근처에도 안 갔어요 아마도 평생 비행기는 못 탈 것 같아요“
슬퍼보이는 얼굴의 애련, 눈물이 나려하는지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래서 오빠랑 둘이서만, 십년동안 고생많았겠어요 채우씨도, 애련씨도, 친척분들이 키워주신거에요?” “아니에요 친척은 없었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고아라서, 우리는 부모님밖에 없었어요 두분 돌아가시고 난 후에 우리 둘은 고아원에서 컷어요 다행히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애련이 데리고 고아원을 나왔어요 그때부터 쭈욱 둘이서 살았구요“ ”오빠, 원장님 들어가셔야지“ ”이런, 제가 원장님을 붙들고 있었네요 들어가셔야죠“
“가야죠, 어디로 가세요?” “집으로요” “태워드릴까요?” “아니오,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지하철 끊겼을 시간인데” “서둘러 가면 아직은 있을거에요” “오빠 얼른 가자”
“원장님 저희 먼저 들어갈께요" "저어, 애련씨?” “네?” “천천히 출근해도 돼요, 천천히 나와요 모닝콜도 안해줘도 되니까 늦잠도 자고” “네? 네, 원장님”
“다음에 뵐께요” 애련의 손을 꼭 잡고 뛰어가는 채우,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애련,
친척집을 전전하며 커왔던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밝게 웃는 애련의 얼굴이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는 자신의 얼굴과 겹쳐진다
‘수선화 같은 그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시인 정호승‘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읊어보는 혁준, 뒷모습이 외로워보이는, 수선화를 닮은 그녀다
9. 수수께끼 풀어봐
헐레벌떡 뛰어오는 채우와 애련 앞에 마지막 지하철이 들어온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사람들 하나둘 안으로 들어간다
채우와 애련이 타려는 찰나, 애련을 스치며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 애련 기우뚱거린다
“뭐야?” 지하철 다른 칸으로 이내 사라지는 남자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채우, 갈색 자켓을 입은 남자가 등만 보이며 다른 칸에 서있다 애련, 발밑에 떨어져있는 종이 조각을 펼쳐본다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순간 당신은 살해될것이다” 방금 본 영화 포스터다
애련과 스쳤을때 남자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오빠?” 채우, 영화 포스터를 나지막하게 읽어본다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순간 당신은 살해될것이다” “뭐야? 이 기분나쁜 포스터는?” “오늘 본 영화 포스터야 아까 그 남자가 흘리고 갔나봐” 채우, 다른 칸의 갈색 자켓을 다시 본다 갈색 자켓의 남자, 여전히 지하철 문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갖다줘야 되나?”
“됐어, 그냥 영화 포스터인데 뭘, 버리자” “그럴까?” 채우, 영화 포스터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이따가 내려서 버려야겠어”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채우의 팔에 기대어 균형잡고
서있는 애련, “오빠 오늘은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나도..피곤한 날이었다”
한참을 달리는 지하철, 내리는 두 사람, 다른 칸에서 내리는 갈색 자켓의 남자,
여전히 채우와 애련을 앞서가고 두 사람은 그 남자의 등만 보인다
“갈색 자켓” 애련, 중얼거린다 “뭐라고? 잘 안들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주택가로 이어지는 긴 골목, 남매는 손을 꼭 잡고 가로등도 드문 드문 켜져있는 긴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다 멀찌감치 앞서가는 남자 보인다 갈색 자켓의 그 남자다
애련의 하이힐이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고요한 골목길을 노크한다
“구두 사야겠다 너무 낡았어” “괜찮아 아직은 신을만하니까” “굽이 많이 닳았어, 알바비 받으면 사줄게” “으이구 됐어요 오빠 운동화나 사요”
앞서가는 남자의 걸음이 빨라진다 덩달아 애련과 채우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또각 또각 소리 유난히 크게 울려퍼진다 좁은 골목길 안을 남자의 빠른 발걸음 소리와
애련의 하이힐 소리, 채우의 낡은 운동화의 마찰음이 가득 메운다
애련의 하이힐 소리가 빨라질수록 남자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남자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채우의 낡은 운동화도 걸음을 재촉한다
“또각 또각”
10. 고마운 사람들
스물 다섯의 나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
이제 다시 대학생이 된 나는, 각오가 남다르다
빨리 졸업해서 하나 하나 차근 차근 나의 목표를 향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야한다
“내 꿈은 무역 회사 오너가 되는거다 꽤 잘 나가는 대학, 무역학과에 재학 중인 나는,
다시 시작된 대학 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다 부모님은 없는 형편에 내 등록금을 대느라
허리가 휜다, 형이나 누나들처럼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면, 부모님은 더 기뻐하셨을까?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고만 고만한 직장에 다녀서 어느 세월에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지? 나라도 형과 누나들과는 달라야한다 형과 누나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님의 고생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먼 미래를 위한 작은 투자로 여겨주셨으면 좋겠다 나, 서강혁은 기필코 무역 회사 오너가 되어 성공할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조금도 게으름 부릴 여유가 없다 오늘도 나는 책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낸다 무역 서적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다 읽을수록 모르겠고, 알아갈수록 더 흥미롭다“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신다
형, 누나들이 너를 위해서 희생한걸 잊지마라
너 대학 보내려고 형, 누나들은 대학 문턱에도 못 가봤다
형, 누나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젠장, 도대체 형제들이 내게 해준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대학 등록금은 일부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부모님이 부담하는건 장학금 외의 등록금과
내 생활비와 책값이다
형, 누나들은 자신의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사람들이다
앞가림하는 것에도 전전긍긍해하는 그들이 도대체 내게 무엇을 해줬단 말인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동생을 위한 희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이다
그들은 대체 나에게 뭘 바라고 있는걸까? 그들과 달리 나는 대학 문턱이라도 밟아봤으니
부모의 특혜라면 특혜를 누리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다는 것이겠지
아버지는 평생 농사일로 등이 굽으셨다
가타부타 말씀이 없는 분, 자식들에게는 일절 말씀이 없으시지만, 거나하게 약주라도
한잔 걸치신 날에는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분,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악마와 조우라도
하시는양 온 집안을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아버지, 그런 아버지도 꿈은 있으셨다
젊었을때 꽤나 촉망받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아버지의 좌절은 어머니와의 결혼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울에 상경해 이것 저것 손을 대보지만, 번번이 말아먹고, 급기야는 술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를 불러내리셨다
다시 서울로 향하려는 아버지를 단호하게 주저앉히며, 농사일을 배우게 하셨다
몇 달 후 오촌 당숙의 중매로, 농사일만 할 줄 아는 어머니와 반강제로 혼인을 하셨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항상 말씀하신다 온 집안이 떠나가라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니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니년만 아니었으면, 니 년이 낳은 저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나는 촌무지랭이로 늙지는 않았을거다 다 니년 때문이다“
아버지는 모든 원망을 어머니에게 돌리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신다
“아버지 당신은 대체, 나에게 우리 형제들에게 해준게 무엇이 있단 말씀이세요
평생 농사일 하신게 저희 때문이라면, 대체 우리들은 왜 낳아서, 그 모진 원망을
죄다 어머니와 우리들에게 쏟아붓고 있는건지, 낳지 않았으면 됐을것을,
애초에 어머니와 혼인하기 싫다고 야반도주라도 하셨으면 될것을, 자신의 나약함을
어머니 탓, 우리 형제들 탓으로 돌리고 있는 당신의 비겁함을 어떤 마음으로 용서해야할지,
나는 당신을 보살피겠지만, 당신을 결코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서강혁은 집에 내려갈때마다 아버지를 보면서 독기어린 속내를 꾹꾹 누르고 있다
이런 내게 어머니는 형제들에 대한 고마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평생 자식들을 위해서
아버지를 참아내며 희생하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고마움을 세뇌시킨다
어머니, 제게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고마움을 베풀어주신 분들, 나는 당연하게 그들에게 그 고마움을 갚아야하는, 어머니 내게는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가 갈리게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1. 풀려진 매듭
쉬는 날이면 의례껏 도서관을 찾는다
책장 안에 그득한 수많은 책을 접하면 그 안의 방대한 지식이 모두 이미 내 것인양
뿌듯한 마음을 이루말할 수가 없다
헤어샵에서 손님들 머리를 만지며 시시껄렁한 농담 몇마디 주고 받으면 되지만, 많은 책을 읽으며 습득한 지식은 손님들을 접하는데 있어서 다채로운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가는데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오늘은 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다 멀리 보이는 책장 앞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지하철에 근무하고 있나보다 남자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책을 다 고른듯 책 몇권을 들고 자리에 앉는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눈도 떼지 앉고 단숨에 읽어내려간다 남자의 속독은 놀라울 정도다
삼십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책 한권을 다 읽고 연이어 두권째..남자가 두 번째 책을
펼쳤을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남녀다
낡은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은 청년은 책장앞으로 가서 여자에게 몇권의 책을 골라준다
여자는 밝게 웃으면서 남자가 골라준 책을 다소곳이 품에 안고 남자의 곁에서 남자의 얘기를 경청한다 두 청춘 남녀로 인해 도서관 내부가 환해졌다
가끔 나는 여기서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읽으러온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들이 읽는 책, 그들의 행동, 그들의 대화, 그들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자신들의 겉모습과 닮아있는 책을 고르고는 한다 진취적이고 쾌활한 청년은 자기 계발서를 고루한 지하철 남은 무역 관련 서적을 여자는 시집을 골랐다 그들은 그들에게 꼭 맞는 옷을 골라입듯, 자신과 꼭 맞는 책을 고른다 사람의 취향이란 생각보다 고정되어 있다 쉽게 바뀌지 않고
쉽게 달라질 수 없다 시간 떼우기용 그냥 읽는 책 한권에도 그들의 취향은 여지없이
읽혀진다 취향이란 생각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성격보다, 그 사람의 말보다, 취향은 훨씬 더 많이 그 사람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성격은 감출 수 있어도, 말은 꾸밀 수 있어도, 취향에 담긴 그 사람의 내면은
쉽사리 숨겨지지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는 직업을 가졌고, 우리 헤어샵에는
잡지책보다 다양한 종류의 책이 훨씬 더 많다
나는 가끔 기다리는 손님들이 읽는 책을 유심히 본다
책을 읽는 그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취향을 대략적으로 추측하고 차례가 됐을때
그 사람의 취향에 맞는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
그러면 그들은 어쩌면 자신과 이렇게 잘 통하냐며 신나서 얘기를 이어간다
마치 자신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읽는게 아니다, 다만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그들의 취향을 읽어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대략적으로 추론해볼뿐이다
나를 제외한 여기 있는 세 남녀는 모두 오늘 영화를 볼 예정이다
오늘의 상영작은 꽤 오랫동안 인기를 끌고 있는 무역왕 장보고의 이야기다
12. 너는 뭐니
지하철 플랫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사라져간다
출근해서 퇴근할때까지 오며 가며,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는 아이 엄마,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보며 그들만의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
앞서가는 중년 남자의 등을 보며 종종 걸음을 걷는 중년의 여인,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세상을 향해서 있는 욕, 없는 욕 쏟아내는 내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들,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누이같은 그녀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게 나의 일과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장보고 같은 무역왕을 꿈꾸던 내가 왜 여기에서, 나의 꿈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그날이 그날같은 별다를 것 없는 하루 하루가 계속되고 있다
한 청년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지루한 일상에 지겨운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을 구비한 것 처럼 반짝 반짝 빛나보이는 청년, 낡은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이지만, 청년의 쾌활한 웃음과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걸음걸이는 잊고 있던 지난날의
내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청년은 늘 손에 책을 들고 있다 잠깐의 기다림에도 늘 책을 보고, 책을 읽는다
청년의 관심사는 다양한 듯 하다 매번 다른 책을 본다
청년의 일상이 궁금하다 어디서 무얼 하는 사람일까?
쉬는 날, 청년을 기다린다
무작정, 청년의 일상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청년은 나를 모르니까, 청년이 왔다
지하철에 탄다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다 나도 얼른 청년의 건너편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청년, 청년이 내린다
나도 얼른 내린다 청년은 성큼 성큼 걷다가 어딘가에 전화를 한다
잠시 후에 어려보이는 여자가 청년을 보면서 손을 흔든다
청년은 여자를 반기며,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자는 청년의 팔에 매달려 어딘가로 향한다
나도 같이 발걸음을 옮겨본다
청년과 여자는 도서관 앞에서 멈췄다
청년과 여자는 매점에 들러 컵라면을 산다
먼저 올라가서 그들을 기다리자
한때 나도 여기에 꽤 자주 드나들었다 청년처럼 여자처럼 청춘이었을때
그들을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책 속에 파묻혀서 꿈을 키워갔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배고팠고
지금보다 바쁘게 살았지만 분명히 지금보다는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여기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누굴까?
창을 통해서 그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굴까?
창을 열어서 그들을 불러보고 싶지만, 그들에게 나는 낯선 사람일뿐,
그들에게 나는 무엇도 될 수 없다
내가 만약, 그들을 부른다면, 그들은 낯선 이에게 보내는 무심한 예의로
‘너는 뭐니’ 하는 경계심을 감추면서 잠깐의 관심을 보이겠지
찰나의 관심, 그리고 나는 이내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겠지
세상의 모든 빛을 구비한 쾌활한 웃음, 자신감 넘치는 힘찬 목소리의 청년,
청년의 온 관심을 집중시키는 가녀린 여자, 청년의 곁에 설 수 있으려면
그녀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녀가 되고 싶다
나는 그녀가 되어야한다
나는 그녀가 되어야겠다
13. 어디로 가야하지?
시집을 읽다가 잠이 든 애련의 책을 가만히 덮는다
애련이 깰까봐 살며시 덮는, 채우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잠이든 애련을 두고, 밖으로 나가는 채우, 도서관 밖 복도에 서서 창밖을 내다본다
파란 잔디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다 한참을 서성이는 채우,
‘이번 학기에는 알바 때문에 학점이 엉망이다 이러다 계절 학기를 들어야할지도 모르겠다
학비는 어떻게 하지? 몇 개씩 뛰는 알바가 요즘 들어서 참 버겁다
애련은 나를 위해서 진학도 포기했다
애련이도 대학에 가고 싶었을텐데, ‘이쁘고 미안하고 애처로운 내 여동생, 애련이’
얼른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지금보다는 편할텐데, 공부와 학업을 병행하는게
너무 어렵다 날마다 피곤에 쩔어서 하루를 마감하고 피곤이 덜 풀린채 일어나서
다시 학교로 향한다 그러나 가여운 내 여동생 애련에게 내색할 수가 없다
나는 여동생에게 언제나 항상 활기찬 오빠, 믿음직스러운 오빠여야하니까
여동생에게는 내가 세상의 전부니까, 학업을 포기하고 취직하면 어떨까?
애련이가 실망하겠지? 애련은 졸업하면, 내가 얼마든지 번듯한 직장에
쉽사리 들어갈거라 믿고 있다
대학을 나와도 입시만큼이나 어려운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되는데,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다
요즘에는 이미 졸업해서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남자들이 정말 부럽다
아까도 직장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무역 서적을 읽고 있는 남자가 정말 여유로워보였다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직장과 관련없는 책을 읽을 여유도 생기는구나
나는 그저 지금의 나에게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자기 계발서를 읽는 정도인데
그 남자가 너무 부럽다 그 남자, 우리 애련이를 흘긋 흘긋 쳐다본다
우리 애련이가 이쁘긴 하다 내 눈에 한없이 이쁜 내 여동생이 다른 남자들 눈에도
이쁘게 보인다는게 뿌듯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시큰해져온다
언젠가는 좋은 사람 만나서 내 곁을 떠나게 될 여동생, 당연한데도 벌써부터 섭섭해지는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아까 그 남자처럼, 아까 그 남자라면 어떨까?
이왕이면 애련이 또래 어린 남자들보다는 아까 그 남자처럼 적당한 나이의 직장인을
만나는게 마음이 더 놓이는데, 애련이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
친구놈도 우리 애련이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 눈치지만, 이놈은 별로 권하고 싶지않다
“우진혁” 이 놈은 내 친구지만, 너무 가벼운 놈이다, 그리고 아직은 너무 어리다
애련이를 정식으로 소개해달라고 조를때마다 “됐거든, 너같은 놈한테 보낼바에는 평생
결혼 안 시킨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꾹꾹 눌러서 참는다
애련이한테 듬직한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내 마음이 한결 놓일까?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자랑스러운 오빠이고 싶은데, 요즘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취업이나 하고 싶다 나만 믿고 있는 애련이가 이런 내 마음을 알면, 슬퍼하겠지?
몇 개씩 뛰는 알바도 지치고, 학업도 지겹고, 모든게 다 지겹고 지친다
뭔가 숨 쉴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하다‘
“애련아 오빠는 어디로 가야하니?” “어디로 가야하지?”
14. 다시 미로에서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 마주보고 있는 경찰과 근무자
“두분 제일 친한 동료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그날 영화를 보셨더라구요 그날, 같이 보신 것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저는 영화보러 갔는지 몰랐어요 저는 그날 소개팅이 펑크나서
헛헛한 마음에 근처 영화관에 들어가서 아무 영화나 봤을뿐입니다“
“영화관에서 혹시 못 보셨습니까?”
“못 봤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얘길 들었지만” “두분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평소에”
“뭐, 그럭저럭 달리 좋을일도, 안 좋을 일도 없는 사이였어요 친하기는 해도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별 얘길 하지 않거든요 여기 나오면 동료로서 얼굴보고
퇴근하고 나면 연락 안하는 뭐, 그냥 직장 동료 그정도였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더 말씀해주실것은 없어요? 동료분에 대해서? 최근에 찾아온
사람이 있다거나, 행동이 이상했다거나 하는거 없었습니까?“
“찾아온 사람은 없었는데...행동은 조금 평소때보다 들떠있었던것 같아요 유난히 실수를 많이 하길래 실수같은거 전혀 안하는 사람이 왜 그러나 해서 물어봤었거든요 후배가 여동생을
소개해주기로 했다면서, 꽤 들떠있었습니다 그날, 맞아요 그날이에요 소개 받기로 한 날이,
그날, 소개받으러 간다고 들떠서 나갔습니다“
“네, 그날 후배에게 소개를 받기로 하셨다, 혹시 그 후배가 누군지?”
“글쎄요 저는 잘 모릅니다 고향 후배라고 했으니까요 아,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나가 살아요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시는게 어떠실지?”
“누나가요?”
“네” 메모지를 꺼내서 몇글자 적는다 “여깄습니다”
“여기가?” “네” “네, 바쁘신데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인사를 마친 후, 경찰은 누나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운전한다
허름한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헤어샵이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의 머리를 말고 있던 누나는 돌아보지 않고 거울을 통해서 인사를 건넨다
“머리 하시려구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머리 하려는건 아닌데, 혹시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연락이라니요?” 경찰, 셔츠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서 보여준다
“동생분 맞으시죠?” “네, 맞는데, 동생일로 저를 왜?”
“오늘 영화관에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연락이 아직 안 갔군요, 시골 집에 연락이 갔을텐데..”
“그럴 리가,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동생분 맞습니다 혹시 가깝게 지내던 고향 후배가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어요 동생은 고향의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않았어요 동생은 고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형제들도 다 싫어했어요 고향을 떠나는게 동생의 소망이었으니까요” “동생분이 친한 후배에게 여동생을 소개받기로 한 날, 사건이 발생했는데, 후배가
누군지 전혀 알수가 없네요 친구분 중에 혹시 아시는 분 없을까요?“
“아니오 동생 친구는 전혀 모릅니다 제가 본적이 없어요 동생이 제게 소개해줄리도 없고, 형제들 중에 저를 제일 싫어했답니다”
“동생분에 대해서 형제분들도 전혀 아는게 없으시군요 형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셨습니까?” “네, 우리는 서로 데면데면 합니다 명절때 외에는 서로 얼굴 볼일이 없어요 명절때에도 가급적이면 서로 다른 날 내려가서 부모님만 뵙고 올라옵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게 다 아버지 때문이지만요, 아버지로 인해서 형제들까지 감정의 골이 깊어졌어요 아버지가 저희 남매들을 미워하십니다 어머니도 미워하시구요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제일 싫었던 말이 그런 아버지라도 낳아주신 아버지다 아버지께 잘해라 하시는 어머니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 잘보일까 평생을 연연하면서 살아오신 분이거든요 우리도 어머니에게는 아버지께 잘보여야할 대상이었을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낳은 우리가 아버지께 잘 보여야 자신도 사랑받을 수 있다 여기셨죠 우리는 아버지도 싫어했지만, 어머니도 못지않게 싫어했습니다 동생은 더했었죠
우리보다 더 오래 어머니곁에 있었으니까요 동생은 치가 떨리게 싫어했어요 폭언을 퍼붓는 아버지도 폭언에 길들여져있는 어머니도 동생은 좋아하지 않았어요“
“네..혹시 동생분 형님은 어디에 사시는지?”
“오빠는 몇 년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오빠가 세상을 떠난 후 올케는 애들 데리고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지금은 연락도 안됩니다 언니는 고향에 살고 있구요“
“네, 그럼 막내 누나 되십니까?”
“네” “집에서 연락 못 받으셨어요?” “제가 집에 연락이 거의 끊겨서 이혼한후에
집에 연락을 끊었어요 혹시라도 전남편이 알고 찾아올까봐 집에 연락도 안하고 살고 있어요“
“네, 그렇군요 이거 참 난감하게 됐습니다 동생분 후배를 찾아야되는데 아는 분이 없으니, 암튼,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뵙죠”
15. 수평선 너머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매너리즘에 빠져서 날마다 그날이
그날이다 이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다 우연히 발밑에 떨어진 영화 포스터를 주웠다
“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당할 것이다”
이 문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돌아보면 살해당할것이라 얘기한다
이 생활에서 빠져나가는건 정녕, 살해당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일까?
오늘은 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들를 예정이다
이 영화가 끝날때쯤이면 나는 살해당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이 지겨운 나날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겠지
나는 오늘 꼭 이 영화를 보러가야한다
늦은 시간의 극장 안에는 관객이 거의 없다
대부분 나처럼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일거다 드물게 연인들도 보이긴 하지만,
늦은 시각 극장 안의 연인들은 영화보다는 둘만의 대화에 빠져있으니, 그들이 나의 죽음에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은 찬란한 10월의 어느날 밤, 살해당하기 딱 좋은 날이다
오늘 밤 나는, 이 지겨운 생을 드디어 마감할 것이다
가을밤 나는 드디어 생의 수평선 너머로 항해할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영원한 항해를 떠날것이다
아무도 나의 죽음에 방해하는자 없기를, 오늘은 10월 30일 밤, 드디어 나는 살해당한다
16. what do you think?
오고 가는 지하철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앉아있는 서강혁의 어깨에 손을 얹는 우진혁
서강혁, 돌아본다
“뭐해?” “그냥” “오늘 무슨 날이야? 조금 들떠보이는데?” “그래?” “좋은 일 있는것같아
여자 소개라도 받기로 한거야?“ ”그렇지, 뭐, 여자, 하하“ ”어떤 여자야?“
“그냥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 소개 받기로 했어” “소개를?” “후배 여동생이야”
“아, 후배가 소개해주는구나 좋겠다 어쩐지 오늘 들떠보이더라고” “잘되면, 나도 소개해줘
여동생 친구 중에 이쁜 여자 있으면“ ”알았어“
오늘은 왠지 모르게 설레인다 설레임, 영원한 끝은 그 무엇보다 짜릿한 설레임이다
들떠보였나? 우진혁에게는 소개팅이 적당하다 늘 소개해달라고 노래를 부르는 녀석이니까
우진혁에게 나는 오늘밤 소개팅에 나가는 들떠있는 남자로 보일것이다
나는 오늘 우연하게 그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나를 보이고 싶지 않다 그녀는 나를 모르길 바란다 그녀가 나의 마지막을 알아서는 안된다
”어디서 소개팅해?“ ”왜?“ ”그냥, 나도 구경하려고, 강혁씨 소개팅하는거“
우진혁에게 그녀를 보이고 싶지 않다 우진혁이 그녀를 본다면 분명 마음에 들어할것이다
나는 우진혁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지 않다 “됐어”
“알았네 알았어, 소개팅이나 잘 하고 오라고”
17. 간격은 허물어졌다
갈혁준, 영화 티켓을 들고 팝콘을 산다
갈혁준 옆에서 팝콘을 들고 있는 서강혁, 점원이 주는 콜라를 받아든다
갈혁준 서강혁을 쓰윽 본다, 서강혁 역시나 갈혁준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갈혁준, 서강혁에게 자신의 영화 티켓을 건네고 서강혁의 티켓을 자신이
갖는다, 서강혁 동의하는듯 별말이 없다
서강혁, 보일듯 말듯한 웃음으로 갈혁준을 스쳐가고, 갈혁준 멀어져가는 서강혁의
등뒤로 작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양손에 팝콘과 콜라를 가득 안고 돌아서는 갈혁준의 시선이 입구에 머무른다
그녀다 애련은 영화표 두장을 들고 어딘가를 응시한다
애련의 시선을 따라가는 갈혁준의 눈빛이 흔들린다
시선의 끝에는 오늘 상영하는 영화 포스터 두장이 걸려있다
영화 포스터를 천천히 읽는 갈혁준 “돌 아 보 지 마 라 돌 아 보 는 순 간
당 신 은 살 해 될 것 이 다“
갈혁준의 흔들리는 눈빛이 다시 애련에게로 향한다
애련의 시선은 여전히 영화 포스터에 머물러있다
애련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서 빛날 일은 없으리라, 아쉬움 섞인 체념이 갈혁준의 걸음을
재촉하지만, 애련에게 닿아있는 눈빛은 쉽사리 거두어지지않는다
갈혁준 매표소로 걸음을 옮겨본다 애련이 혹시나 자신을 먼저 발견하지 않을까, 아쉬워지는
마음에 돌아보는 갈혁준, 순간 반짝이는 눈빛의 애련, 영화 포스터의 문구를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돌아보지마라 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살해될 것이다”
18. 정원
오늘의 알바는 연못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다 비단 잉어를 키울거라 얘기하는 나이 지긋한 여자는 사람을 부리는 일에는
서툴러보인다 일하는 사람들이 농을 하며 설렁 설렁, 여자의 재촉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갸녀린 여자가 안쓰러워보여서 그 사람들의 몫까지 열심히 일해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농땡이다 이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릴수록 오늘 일은 늦게 끝나게 된다
빨리 끝나고 애련에게 가야되는데, 오늘 일이 언제나 끝나게 되려는지, 빨리 애련이에게
가고 싶다 혼자 사는 여자인가? 남편이 보이지않는다 남편이 없는 여자일까?
남자가 이럴때 한마디 하면, 일꾼들이 농땡이 부리지는 않을텐데, 농땡이 부려도
시간내 부지런히 일해도 받아가는 일당은 같지만, 우리 애련이한테 빨리 가려면
나라도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은 이일을 내일까지 미뤄서 내일 일당까지
챙길 생각이다 남편이 없는 나이든 여자, 남자들은 이 여자들을 함부로 대한다
심지어 쉽게 대해도 되는 여자라 여기기도 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나이든 여자란,
남편이 있는 여자와 남편이 없는 여자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남편이 없는 여자는 쉽게 대할 수 있는 여자로 여겨보기도 하고, 쉽게 대할 수 없으면
도도한 여자네, 그러니 남자가 안 따르지, 자기들만의 남자들의 언어로 그 여자를 인금나름한다 나이든 여자는 남편이 없으면, 남편이 있는 것처럼 당당해야한다
그들만의 언어로 인금나름하더라도 그들에게 휘둘리지않아야한다
이번 알바를 마치면, 나이든 여자를 다시 볼일은 없겠지만, 나이든 여자의 연못은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어릴때 작은 마당 한켠에 엄마가 키우던 글라디올러스가 여기에 있다
나이든 여자가 키우는 글라디올러스가 애잔하다
일꾼들 서서히 움직이고 연못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더디다
어딘가에서 애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쯤 애련이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겠지
애련과 저녁이라도 먹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저녁을 먹고 다시 다른 알바가 있다
진혁이 녀석, 알바 대신해달라니까, 애련과 소개팅해주지 않는다고 삐쳐있다
알바 대신해주지 않아도 진혁이 녀석에게 애련을 소개해주고 싶지는 않다
원장님은 어떨까? 나이만 많지않다면, 좋을텐데, 우리 애련이가 아깝다
우리 애련이 남자친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 한켠이 시려온다
애련아 그냥 오빠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할래?
너도 나도 여자친구, 남자친구 만들지 말고, 우리 애련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빠, 됐거든~”
19. 다시 영화관에서
심야 상영 직전의 영화관 안은 한산하다
서강혁은 맨 좌측, 구석자리에 앉아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다
서강혁의 티켓을 갖고 있는 갈혁준은 끝자리에 앉는다
서강혁은 스마트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하느라, 진애련이 자신과 같은 줄에
앉아서 자신을 흘긋 거리는걸 못 보고 있다
불이 꺼지고 관객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다
늦게서야 들어온 한 남자가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는다
갈혁준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 우진혁이다
영화가 시작됐다 옆사람과 수다를 떨던 관객들도 영화에 빠져들고 스크린에 정신을 빼앗긴
갈혁준은 곁에 앉아있는 사람을 잊고 있다
우진혁 가만히 일어나서 뒤쪽 통로로 서강혁의 뒷자리로 이동한다
우진혁 핸드폰을 꺼내서 본다
영화가 한참 절정에 이르렀을 순간 서강혁의 옆자리에 앉는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서강혁을 찌르는 우진혁, 서강혁은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고개를 떨군다
우진혁 유유히 영화관을 빠져나간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못하는 애련은 영화의 여운에 젖어있다 일어나서 빠져나가는 관객들, 누군가의 비명소리, 애련은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강혁을 본다 고개를 푹 숙인채 깨어나지 않는 서강혁, 날카로운 비명소리, 공포에 떨고 있는 애련이다 누군가 다가와서 애련을 껴안는다
애련, 고개를 들어서 본다 갈혁준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마주한다
애련, 갈혁준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공포로 떨고 있는 자신을 달랜다
구급대원과 극장 직원들 들어와서 서강혁을 옮긴다
상영관을 나서며 극장안을 돌아보는 갈혁준, 극장 안은 불이 환하게 켜진채로 텅비어있다
떨리는 발걸음을 애써 옮기며 상연관을 빠져나오는 애련과 갈혁준
매표소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직원들,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앞에 서있는 남자
“잠시 사무실로 와주세요 오늘 오신분들 명단이 필요합니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사람들을 어딘가로 데려간다
직원들 사무실 안에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앉으세요”
“아까 그 남자분 제일 가까이 앉아계셨죠?”
직원, 우진혁을 향해서 묻고 있다
“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차츰 진정되는 우진혁,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뭐 이상한 점 없었어요?” 영화 보는 동안,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던가, 전화를 받는다던가,
하는, 없었어요?“ 나이 지긋한 남자 직원이 우진혁에게 묻는다
우진혁, 잠시 생각하다가 재빨리 대답한다
“없었어요 아, 핸드폰을 잠깐 봤던것 같아요 앞자리에서 불빛이 새어나왔습니다”
“그래요? 그 후에는?”
“그 후에는 잘 모르겠어요 그후로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남자를 못 봤어요”
“허, 거참, 암튼, 여기 연락처 좀 적어두고 가세요”
“네에?”
“아까 거기서 영화 보신 분들 연락처를 다 받고 있어요”
“네...”
영화본 사람들 연락처가 쭈욱 기록되어있다
우진혁 이라고 쓰고 연락처를 남겨둔다
“가도 되는거죠?”
“가보십시오”
“네, 수고하세요”
영화관을 서둘러 빠져나오는 우진혁,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20. 공허한 사건
병실 침상에 누워있는 서강혁의 손에는 이제 막 전화가 끊어진듯 액정이 켜졌다가 꺼진다
서강혁의 목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 보인다
문이 열리고 경찰이 들어온다
“좀 어떠십니까?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범, 범인은 잡았습니까?”
“아직, 영화 상영 중간에 누군가 빠져나와서 화장실에 가는걸 목격한 직원이 있어서
우선 그 사람을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해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
“우진혁이라고 서강혁씨 동료더군요,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 몇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우진혁씨가 범인이라면 중간에 빠져나갈 시간이 충분했을텐데, 왜 다시 상영관으로
돌아온걸까요?“
“글, 글쎄요”
“형사 생활 십년인데, 이런 용의자는 드물군요 뭔가 석연치않아요”
“두분 제일 친한 동료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그날 가까운 자리에서 영화를 보셨더라구요 그날, 같이 보신 것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저는 영화보러 갔는지 몰랐어요 저는 그날 소개팅이 펑크나서
헛헛한 마음에 근처 영화관에 들어가서 아무 영화나 봤을뿐입니다“
“영화관에서 혹시 못 보셨습니까?”
“못 봤습니다” “두분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평소에”
“뭐, 그럭저럭 달리 좋을일도, 안 좋을 일도 없는 사이였어요 친하기는 해도
워낙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별 얘길 하지 않거든요 여기 나오면 동료로서 얼굴보고
퇴근하고 나면 연락 안하는 뭐, 그냥 직장 동료 그정도였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더 말씀해주실것은 없어요? 동료분에 대해서? 최근에 찾아온
사람이 있다거나, 행동이 이상했다거나 하는거 없었습니까?“
“찾아온 사람은 없었는데...행동은 조금 평소때보다 들떠있었던것 같아요 유난히 실수를 많이 하길래 실수같은거 전혀 안하는 사람이 왜 그러나 해서 물어봤었거든요 후배가 여동생을
소개해주기로 했다면서, 꽤 들떠있었습니다 그날, 맞아요 그날이에요 소개 받기로 한 날이,
그날, 소개받으러 간다고 들떠서 나갔습니다“
“네, 그날 후배에게 소개를 받기로 하셨다, 혹시 그 후배가 누군지?”
“글쎄요 저는 잘 모릅니다 고향 후배라고 했으니까요 아,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나가 살아요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시는게 어떠실지?”
“누나가요?”
“네” 메모지를 꺼내서 몇글자 적는다 “여깄습니다”
“여기가?” “네” “네, 바쁘신데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경찰, 병실을 나간다
서강혁, 주먹을 꽉 쥔다
“제길, 복잡하게 됐어, 진혁이 녀석..”
경찰, 동료와 병원을 빠져나가면서, “김형사 서강혁 통화내역 조회해봐”
동료 “네? 우진혁이 아니라, 서강혁 통화내역을요?”
경찰, “뭔가 석연치가 않아, 두 사람 뭔가 있어”
동료, “저는 지금 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어디로 가실겁니까?”
경찰, “우진혁 누나가 하는 미용실에 들러봐야겠어”
동료 “지금이요?”
경찰 “지금 가야 될것같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줘”
동료, “네”
다시 병실, 서강혁 잠들어있다
꿈을 꾸는듯 씰룩 씰룩 눈동자가 움직인다
21. 안녕 여자친구
“여기야 천천히 와”
널따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애련을 향해서 손을 흔든다
애련은 헐레벌떡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돗자리에 앉는다
“늦었지? 오래 기다렸어?”
“오래 기다렸지”
“언제 왔어?”
“여기서 기다린지 한 34년 됐나?”
“뭐야?” 애련은 귀엽게 눈을 흘기며, 강혁의 팔을 가볍게 잡는다
애련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길게 다리를 뻗고 눕는 강혁의 눈에
파란 가을 하늘이 눈이 부시게 시리다
“좋다” “뭐가?” “그냥 이렇게 누워있으니까 좋다고” “강혁씨는 어린애같아”
“어린애?” “너, 이렇게 맛있는 도시락 준비해온 어린애 봤냐?”
피크닉 바구니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는 강혁, 애련 도시락을 열어보면서 감탄한다
“우와, 이거 다 강혁씨가 직접 만든거야?” “맛있겠어? 먹어봐”
김밥을 애련의 입안에 쏙 넣어준다 “어때?” “맛있어” 소리내어 얌얌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운 강혁, 애련의 볼에 살며시 뽀뽀한다
“쪽” 소리가 나게 다시 강혁의 볼에 뽀뽀를 하는 애련, 쑥스러운 듯 먼산을 본다
산들 산들 바람이 선선한 가을날 오후 평온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애련과 강혁,
두 사람의 얼굴이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않아요”
작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깨어나는 서강혁, 행동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강의 들으러 가야되는데, 왜 여기 있지?”
22. 어설픈 범인
헤어샵을 빠져나온 경찰의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으응? 우진혁이 지금 거길?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차를 돌려 서둘러 운전하는 경찰, “뭐야? 싱겁게 두 사람 뭐지?”
취조실 안, 마주앉은 두 사람, 경찰과 우진혁
경찰 “어떻게 된겁니까? 두 사람?”
우진혁 “저는 강혁씨에게 부탁받은것밖에는 없어요 그날 영화관에서 자신을 찔러주면
저희 어머니 병원비를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경찰, “서강혁씨는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우진혁씨?”
우진혁, “모르겠습니다 아, 지겹다고 했어요 근무하기싫고, 여행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딸린 식구들도 없는데 때려치고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경찰, “그랬더니?”
우진혁, “부양해야할 조부모가 있다고 하더군요 같이 살지는 않지만 아버지도 있고”
경찰, “서강혁씨 평소에 좀 어땠습니까? 뭐 이상한 점 없었어요?”
우진혁, “별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그냥 무척이나 바쁘게 사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경찰, “바쁘게 사는 사람?”
우진혁, “강혁씨 근무 끝나면 야간 대학원에 다녔어요 요즘 레포트가 있어서 바쁘다고 했는데, 틈틈이 어딘가에 알바하러 다니는거 같고, 암튼, 무척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어요”
경찰, “우진혁씨 강혁씨랑 마지막 통화한 사람이 당신이죠?”
우진혁, “네, 이젠 어떻게 해야할지 강혁씨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경찰, “강혁씨가 뭐라 하던가요?”
우진혁, “자신이 연락할때까지 피해있으라고 했어요 회사에는 병가내주겠다구요”
경찰, “서강혁씨는 대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왜 자신을 찔러달라는거죠?”
우진혁,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제가 물어도 통 대답을 하지않으니까, 저야 뭐 어머니
병원비 대신 내주겠다는 얘기에 혹해서, 죄송합니다“
경찰, “잘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우진혁, “네”
경찰 서둘러 나가서 다시 서강혁에게로,
텅비어있는 병실 안, 경찰, 담당 간호사에게 서강혁이 어딨는지 묻고 있다
“서강혁씨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서강혁씨 어디 갔는지, 아시는 분 없어요?”
“제가 압니다”
“네에?” 뒤돌아보는 경찰, 거기엔 오래 입어서 물빠진 청바지와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남자가
갈색 자켓을 입고 밝은 웃음을 띄며 경찰을 본다
“서..서강혁씨?”
“서강혁이라니요? 저는 진채우입니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경찰과 환한 웃음이 대조적인 채우
23. Yes or No
하얀 방의 의자에 앉아있는 서강혁과 여러명의 의사들, 경찰들, 그중 나이들어보이는 의사가 서강혁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진채우, 대학생입니다”
“당신은 지금 몇 살이죠?”
“25살입니다, 여동생 애련이는 20살이구요”
“여동생이 있었어요? 여동생은 뭘하죠?”
“헤어디자이너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갈꺼죠?”
“저는 잠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에요”
“누구와 같이 가십니까? 여동생과 함께 가십니까?”
“아니오”
“여동생은 헤어샵이 바쁩니다 갈혁준 원장님과 함께 갑니다”
“왜 원장님과 함께 가죠?”
“원장님도 휴가가 필요하세요”
“여동생이 혼자 계실텐데 걱정되지않으세요?”
“여동생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어요”
“남자친구는 누구입니까?”
“서강혁, 지하철 역무원입니다”
“채우씨는 얼마나 계시다 올거죠?”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갈혁준 원장님이 돌아오실 때 같이 올께요”
“갈혁준씨는 언제 뵐수있을까요?”
“아마도 당분간은 뵙기 어렵겠습니다”
“갈혁준씨께 즐거운 여행 되시라고 전해주세요”
“네”
하얀 가운의 의사들 고개를 끄덕인다
경찰 역시나 고개를 끄덕인다
“채우씨, 피곤할텐데 그만 쉬어요”
“네, 고맙습니다”
방안 한켠의 침대에 눕는다
24. 완성된 퍼즐의 “無”
애련은 오전 아홉시에 출근한다
새로운 원장님은 47살 여자분이다
원장님은 오늘 내게 커트를 가르쳐주신다고 했다
오늘은 바쁜 날이 될 것 같다
하얀 방 한 가운데에서 마네킹의 머리를 헤어샵에서 하듯 정돈중인 서강혁,
창을 통해서 서강혁을 들여다보는 젊은 의사, 채우와 비슷한 모습이다
젊은 의사의 뒤에 서있는 원장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다
헤어샵 일을 끝내고 채우 오빠한테 들러야한다
채우 오빠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혼자서 외롭지는 않을까? 채우 오빠 곁에는 원장님이 계시니까 괜찮겠지
채우 오빠, 갈혁준씨 이제 여긴 잊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전국에 매장을 둔 헤어샵을 열거야 그러려면 나 지금부터 열심히 배워야해
한가한 오전이 끝나고 바쁜 오후가 시작됐다
딸랑 소리와 함께 돌아본다
갈색 자켓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애련은 경쾌하게 인사하며 남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맑은 가을날 오후다
“안녕히 가세요”
25. 에필로그
서강혁은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와 이혼으로 버려졌다 버려진 강혁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에 자라지만, 할아버지는 강혁의 아버지 대신 어린 강혁에게 분노를 쏟아붓는다
머리만큼은 뛰어나게 좋았던 서강혁은 고등학교까지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다
고교 졸업후 대학에 진학하려는 강혁에게 돈이나 벌어서 뒷바라지한 자신들을 편하게 모셔달라는 조부모의 요청을 거절하자, 할아버지는 폭언을 쏟아붓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강혁은 할아버지에게 독기어린 말을 내뿜고 집을 뛰쳐나간다
몇 개의 알바와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쳤지만, 원래의 꿈이었던 무역업을 포기하고 지하철에 근무하게 된다 그날이 그날같은 업무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강혁은 동료, 우진혁에게 자신의 자아를 덧입혀보지만, 만족할 수 없고, 급기야는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중에 마음에
드는, 자신이 부러워할만한 모습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하나의 자아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해결하지 못하는 서강혁은 또 다른 자아를
다시 만들어낸다 강혁의 안에는 두 개의 자아, 즉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하게 된다
첫 번째 만들어낸 자아가 경쾌한 청년 채우다, 밝음과 자신감은 겸비했지만 학생인 채우는
아직 현실의 벽을 뚫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서강혁은 채우를 그대로 두고,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 갈혁준을 만들어낸다
예리한 지성을 갖췄지만, 부정적이고 삐뚤어진 시각의 혁준은 현실을 극복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에만 여념이 없다 독설로 현실을 비판한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행동하지 않는 비판은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다를바가 없다 혁준을 통해서
지친 일상을 달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다 그렇게 그는 나이들어가고, 순수했던 자신의
청춘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 안에 숨겨져있던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이 되고 싶은 욕망,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을 이루려면 여성이 되면 가능하리라 여겨진 서강혁은 숨겨진 자아, 애련을 탄생시킨다 애련은 그의 마지막 자아, 그 안에 감춰져있던 여성성이다
그들을 통해서 서강혁은 매번 똑같은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 하늘을 날고, 바다를 달리며,
현실을 도피한다
서강혁은 현실을 도피하면서 점점 정체성을 잃어가는 자신을 없애기로 마음 먹는다
궁리 끝에 동료 우진혁에게 자신을 찔러주길 부탁한다
우진혁은 만성 노인성 질환을 갖고 있는 어머니의 병원비가 필요해서 사건에 가담하게 된다
우진혁은 부상만 입히면 되는지 알았지만, 서강혁은 살해당할 결심이었다
우진혁에게 살해당하면 자신은 영원히 없어진다
이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서강혁은 설레이면서 우진혁에게 살해당하는 그날을
기다리지만, 실패하고 결국에는 진채우라는 자아를 통해서 자신의 다른 자아를
스스로 없애버린다 가장 순수한 진애련의 자아만을 남겨둔채로, 서강혁의 정체성은
진애련의 자아에 녹아들어 사라져버린다
서강혁의 또다른 자아는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매번 같은 일상, 달라질 것 없는 하루, 그날이 그날같은 생활,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쉽게 바꿀 수 없는 현대인들, 그들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낸다
웹에서 자신과 180도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자신을 감추며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아바타”를 만들어낸다 게임을 통해서, 채팅을 통해서, 웹의 익명성은 그들의 가상 현실을
실제화시키고 그들은 쉽게 자신의 아바타에 빠져든다
가상 현실이 더 현실같다고 느껴진다면, 아바타가 더 자신이라 여겨진다면, 당신은 이미
자신의 다른 자아에 자신의 다른 인격에 중독되어있다는 말이다
웹에서의 자신의 다른 자아는 현실의 자아보다 훨씬 대담하고 훨씬 솔직하다
손 안의 작은 세상, 스마트폰의 역기능으로 우리는 자신의 솔직한 얘기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눈으로 말로 전하기보다는, 빠르고 간편한 0과 1의 조합으로 전달하고 만다
쉽고 빠르고 간편하게, 어렵고 느리고 복잡한 많은 것들이 시대에 뒤쳐진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현재는 천천히 변화되고 있다
0과 1의 조합처럼 빠르고 간편하게가 아닌, 느리고 천천히, 느리고 천천히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오늘을 만들어냈고
내일을 또 만들어낼거라는걸 사람들은 쉽게 간과해버린다
아바타를 통해서 자신을 전달하는게 쉬워진 웹의 세상처럼 우리는 현재 또한 빠르게 바뀌고
현재 또한 바쁘게 변화되는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당연하지 않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하루는 24시간 이며, 매초마다
확인 가능하고 매분마다 답변이 가능한 웹의 세상과는 다르다
숙고할 수 있느냐, 숙고할 수 없느냐의 차이가 주어진다
현실의 세상은 숙고하면서 걸어갈 수 있지만, 웹의 세상은 빠르지않으면,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빠르게 빠르게 흘러가는데 익숙해지면, 현실의 느리게 달라지는
일상의 지루함에 지치게 된다 일상의 지루함에 지치게 되면 일상을 확 바꿔버리면
웹의 세상처럼 쨔안~하고 뭔가 확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서강혁은 자신을 달라지게 할 수 없어서 채우와 혁준과 애련을 만들어냈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달라지게 할 수 없어서 웹에서의 아바타를 만들어낸다
자신이 만들어낸 아바타를 자신의 일부라 여겨야할까?
어느 날 갑자기 아바타였던 자신의 일부가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바타가 자신이 되어버리고,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면?
자신이 만들어낸 아바타가 내가 되고, 나는 아바타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이텐티티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바로 당신들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 THE END -
고은혜 : dissolve47@naver.com
010-9416-2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