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

by 로리로렌스 posted Jan 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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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기


“분이야” “으응?” “분이야” “왜 자꾸 불러?” “분이야” “아이, 또 그런다”

“좋아서 그래, 분이야, 우리 분이야, 우리 이쁜 분이야”

대답없이 사내를 보며 싱긋 웃는 분이의 뺨이 수줍음에 발그레하다.

사내는 수줍어하는 분이가 사랑스러워 발그레한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춘다.

아까보다 더 발그레해져서는 사내를 바라본다. 천천히 분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사내,

눈을 질끈 감는 분이, 수줍은 두 연인들은 큰 나무 아래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새벽부터 서두르는 사내, 얼마 안 있으면 분이의 생일이다. 서둘러 장에 가야 분이의 생일에 돌아올 수 있다. 사내는 너무 이른 아침이라 분이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나무를 한가득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어느새 동네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무거워지는 등짐, 흐르는 땀,

사내는 땀을 닦아내며, 잠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걸터앉아 하늘을 본다.

‘얼른 가서 나무를 팔아야 분이 댕기 사주지’ 분이의 낡은 댕기가 마음이 아팠던 사내는

며칠 후 있을 분이의 생일에는 꼭 새 댕기를 사서 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사내의 길동무가 되어주던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멀리 날아가고, 사내는 다시 일어나

등짐을 짊어지고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느새 해가 중천, 사내는 오늘내로 산을 넘어야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져서 걸음을 빨리 하지만,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끼니조차 거르고, 등짐을 짊어진 사내의 발걸음은 점점더 흐트러진다.

한발 한발 힘겹게 걷는 사내의 등뒤로 해가 지고, 산길은 금새 어두워진다.

‘이러다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거 아니야? 오늘내로 산을 넘기는 글렀어, 어디 묵을데라도 찾아봐야겠다 이런 산중에 묵을데가 있을까? 큰일이네’

칠흑같은 어둠에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내, ‘여기서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면 우리 분이, 다시는 못보는데, 안돼, 하늘님 어디 몸 뉘일 곳이라도 찾아주세요’

사내는 어둠 속에서 하늘을 보며 간절히 기도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하나, ‘이제 됐다 살았다 고맙습니다’

사내는 곧 쓰러질것같이 비틀거리며 희미한 불빛을 향해서 한발 한발 힘겹게 걷는다.


옹색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홀린듯,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문을 두드리는 사내,

“계시오?”

“누구세요?” 가냘픈 목소리의 아낙이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산 너머 장에 가는 나무꾼인데, 밤이 깊어서 산을 넘을 수 없으니, 산길에서 헤매다 호랑이 밥이 될까 두렵소, 하룻밤만 재워주시면 안되겠소 부탁하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선선히 대문을 열어주는 아낙,

사내는 마당 한 귀퉁에 등짐을 내려놓고 아낙을 따라 방으로 들어간다.

사내를 안내하고 말없이 방을 나가는 아낙,

‘젊은 여인인데, 바깥 양반은 안 보이네 혼자 사나?’

옹색한 방안을 둘러보던 사내는 살며시 열리는 문 소리에 궁금함을 감춘다.

“차린건 없지만 어서 드세요 많이 시장하시겠어요”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낡은 상 위에는 보리가 거의 대부분인 밥 한 그릇과 간장,

김치뿐이다.

허겁 지겁 먹는 사내를 보며, 아낙은 다시 방을 나간다.

숭늉 한 그릇을 내오는 아낙, “천천히 드세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아낙이 내온 숭늉까지 말끔하게 마셔버린 후,

그제서야 한숨을 돌리는 사내, “맛있게 잘 먹었소 고마워요”

아낙은 싱긋 웃어보이며 사내를 마주 본다.

‘여인이 낯선 사내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대담하네’


처음으로 아낙과 눈을 마주치는 사내, 아낙의 시선은 사내를 향해있지않고, 사내 뒤의 뭔가를 보는 듯 아득하다.

‘아, 앞이 안 보이는 여인이구나’ 사내는 그제서야 아낙의 대담한 눈빛이 이해가 되는듯하다.

더듬 더듬 상을 치우려는 여인을 만류하며 사내는 상을 들고 나가서 치운다.

사내는 이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 아낙은 이불을 내어주며, 사내의 잠자리를 챙겨준다.

“앞이 안보이는 여인인듯 한데, 깊은 산중에 어찌 홀로 계시오? 바깥 양반은 출타중이신거요?”

“원래는 오래비와 둘이 살았었지요 한두어달 전에 오래비가 장에 간다고 산을 넘어가다가

여태 감감 무소식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눈시울이 붉어지는 아낙

“딱하게도” 한동안 말이 없던 사내는, 다시 여인을 보면서 “혼인한 여인인듯 한데 오래비와 둘이 살았다면? 아, 바깥 양반을 말씀하시는거요?”

“아니에요 친 오래비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여 비녀를?”

“아, 이건..”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아낙,

“내가 괜한것을 물었소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오래비가 제 낡은 댕기가 맘에 걸린다며 말리는 저를 뿌리치고, 기어이 산을 넘어가다가, 흑흑” 흐느끼는 아낙, 다시 말을 잇는다

“오래비가 돌아오지 않는건 모두 제 탓이에요 하나뿐인 누이가 앞이 안보이니, 데려갈 사내도 없다며, 늘 마음 아파하셨어요 오다가다 묵어가는 사내조차도 앞이 안보이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오래비 마음이, 많이 아팠을거에요 오래비는 낡은 댕기 대신 새 댕기라도 들이고, 입성이라도 말끔하면 눈 먼 사내가 데려가지 않을까 해서, 하나뿐인 누이를 아끼는 마음에 길을 나섰다가 그날로 돌아오지 않게 됐어요 오래비를 찾아서, 오래비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해서 산을 넘어가고 싶지만, 이런 몸으로는 혼자서는 산을 넘을 수 없어서, 하루 하루 돌아오지 않는 오래비만 기다리다가, 자신을 원망하며, 낡은 댕기 대신,

스스로 비녀를 꽂았어요”


사내는 흐느끼는 아낙의 모습에 낡은 댕기를 메고 있는 분이를 떠올려보며, 어느새 아낙의 새 댕기를 사러갔던 오래비의 마음이 되어버린다.

오래비의 마음으로 사내는 울고 있는 아낙의 등을 토닥 토닥 두드리며 달랜다.

“울지 마소, 내일 장에 가면 오래비의 소식을 물어봐주겠소 내, 약속하겠소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요”

“정말? 정말입니까? 우리 오래비 소식을 물어봐주실거에요?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낙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내를 보며 더 크게 흐느낀다.

서럽게 흐느끼는 여인을 달래려 품에 안는 사내, 사내의 품 안에서 앞 못보는 혼자 몸으로 노심초사 오래비만을 기다리던 자신의 설움이 복받쳐서 더 서럽게 흐느끼는 아낙

품안에 아낙을 안으며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싶었던 사내는 그 순간 자신을 기다리는 분이를

잠시 잊고서, 스스로 비녀를 꽂을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의 설움에 살포시 마음 한자락을 내어놓는다.

그밤 그렇게 사내는 설움을 품은 앞 못보는 여인을 품에 앉았고, 아낙은 사내의 품 안에서

댕기를 푼 여인이 되었다.

사내는 품 안에 안긴 여인에게 나이를 묻는다. 여인은 수줍게 대답한다.

사내보다 서너살 많은 여인이다. 사내는 품 안에 안긴 여인의 이름을 묻지않는다.


그제서야 자신을 기다리는 분이가 생각난걸까? 꼭 그 이유만은 아니리라.

여인의 이름까지 알게 되면, 앞 못보는 여인의 설움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옮겨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내는 하룻밤을 품은 여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 순간 사내의 마음은 앞 못보는 여인의 설움을 하룻밤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잠시 잠깐 위로해주고 싶었던, 하룻밤 다독여주고 싶었던 마음뿐인, 사내의 이기심이었으리라.


사내는 품 안에 여인이 잠이 들자, 조용히 방을 나온다.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이 사내의 처지를 일깨운다.


분이, 분이가 있다 사내에게는 자신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분이가 있다.

사내는 바삐 등짐을 짊어지고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선다.


서둘러 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오자, 살며시 눈을 뜨는 아낙,

아낙은 사내가 바삐 방을 나설때부터 사내의 마음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아낙은 사내가 마음 편히 갈 수 있게, 잠들어 있는척 눈을 감고 있었다.


한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서두르는 사내의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서러워 닫힌 문 뒤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아낙의 마음에는 남기고간 사내의 마음 한 자락만큼의 설움이 더해져있다.


등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걷는 사내는 아낙의 집에서 한참을 멀어졌을때, 그제서야 한시름 놓으며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조그맣게 보이는 앞 못보는 아낙의 집, 그 집에서의 하룻밤은 사내에게

이내 잊혀져버릴 기억이 될것이다.


사내에게는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는 분이가 있으니까, 댕기를 사서 분이의 생일 선물로 주며, 청혼을 하자, 사내는 결심을 한다.

이제 사내는 앞 못보는 여인의 설움 따위는 잊고, 분이의 사내로만 살게 될거다.

산을 넘어가는 동안 내내 사내는 분이만을 생각한다.

분이를 생각하며 힘을 내어 산을 넘어간다.


장에 도착해서 사내는 서둘러 나무를 팔고 분이가 좋아할만한 댕기를 산다.

장터 주막에 들러 국밥 한 그릇을 먹는다.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사냥꾼들이 들어와 사내 옆에 걸터앉는다.

주모가 사냥꾼에게 묻는다. “이번엔 좀 잡았수?”

“잡기는 다 글렀소” “왜요?” “그 산에는 다시는 못가겠소”

“왜 못 가요?” “어제 우리 시껍했지않소 호랑이 울음 소리가 들려서 사냥할 생각이 싹 달아났소” “사냥꾼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요?” “어허, 모르는 소리 하네 사냥꾼도 목숨은 하나뿐이라오 어제는 호랑이에 물렸는지, 죽어있는 남자의 시체에 질겁했다오 그 시체보고 질겁해서 내려오다 호랑이 울음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 산을 내려왔다오”

사내는 깜짝 놀라며, 사냥꾼을 본다 “혹시 그 시체, 한두달 되어 보였소?”

“내가 어찌 알겠소? 한두달인지 서너달인지 놀래서 혼비백산 내려오기 바빴으니까?

근데 그건 왜 물어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혹시 어디쯤에 있었소?”

“이 냥반이 궁금한것도 많네, 저어기 산 중턱에 큰 나무 아래에 있으니 행여라도 그쪽으로 갈 생각 마시오 호랑이 밥 되기 싫으면”

“산 중턱 큰 나무 아래, 이런” “왜 그래요?” “아니, 아닙니다 주모 여기 있소”

국밥값을 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뜨는 사내

사내의 등뒤로 사냥꾼의 목소리, “혹시라도 그 산에는 얼씬도 말아요”

아낙의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다 아마도 죽어있는 남자는 아낙의 오래비일것이다.


남자는 그제서야 아낙에게 한 약속이 떠오른다. 오래비의 소식을 물어봐주겠다던 약속,

남자는 서둘러 산을 넘는다. 하지만 품 안에 댕기를 만지작거리며, 아낙의 오래비가 죽어있는 큰 나무 아래가 아닌, 다른 쪽 길로 달린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낙의 집이 보인다.

사내는 아낙의 집 앞에서 잠시 멈칫하다 그대로 지나친다.

‘앞도 못보는 아낙이 오래비의 죽음을 알면, 어찌 살아? 오래비라도 기다리며 살아야 아낙이 살 수 있을테니, 그냥 모른척하자 오래비의 죽음을 알려주지 말자’

사내는 아낙의 집에서 멀어지려 바쁘게 달린다.


어느새 산을 내려왔다. 어둑 어둑해진 길가, 사내는 분이를 찾아간다.

분이의 집 대문은 굳게 닫혀있다.

사내는 한시라도 빨리 분이를 보고 싶지만, 날이 밝을때까지 미루고, 비워뒀던 집에 들어가 피곤한 몸을 누인다.

혼자 사는 사내의 집은 앞 못보는 아낙의 집처럼 옹색하기 그지없다.

잠시 누웠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사내는 날이 밝자마자 분이를 찾아나선다.

이 시간쯤이면 항상 큰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분이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분이의 집으로 향한다.

대문이 활짝 열린채로 웅성거리는 분이의 집안, 분이는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들이 마당에 서있다.

“분이야” 부르며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뒷덜미를 낚아챈다.

돌아보는 사내, “어, 형님 분이는?” 분이의 오래비가 건들거리며 서있다.

“누가 자네 형님이야?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마”

“얼씬도 하지말라구요? 왜요? 형님? 분이는요?”

“우리 분이 오늘 혼인해 그러니까 얼씬도 하지 말라고, 괜히 자네 얼쩡거렸다가 윤부자댁에 들키기라도 하면, 우리 분이 그날로 쫒겨나니까..”

“분이가 혼인을 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잘 들어, 우리 분이 윤부자댁 막내 아들과 오늘 혼인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댁 셋째 도련님과 내가 워낙 막역한 사이지 않는가? 내가 어렵게 성사시킨 혼인이네 그러니까 자네는

우리 분이 근처에 얼씬도 해서는 안돼, 이제 분이랑 자네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형님, 안됩니다 그럴수는 없어요 분이랑 저랑 혼인하기로 한거 우리 둘이 좋아하는거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근데 저 몰래 분이를 시집보내다니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이가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혼인을 해요?”

“우리 분이도 몰랐다네, 분이한테 말했다가 자네랑 야반도주라도 하면 안되니까, 내 신중을 기했지, 자네도 한번 생각해보게 자네랑 살면, 우리 분이 나무꾼 색시밖에 더 되겠나?

막내 아들이라도 윤부자댁은 밥술 꽤나 뜨는 집이니, 우리 분이 거기로 시집가면 호강하고 살지 않겠나? 그덕에 나도 좋고, 우리 분이도 좋고, 우리 부모도 좋고, 자네만 우리 분이 근처에 얼씬도 안 하면, 우리 분이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다네 자네도 우리 분이 호강하길 바라지?”

“분이 호강은 제가 시켜요” “자네가? 우리 분이 지참금으로 뭐 받았는지 아나?”

“지참금이라니요?” “그 귀하다는 호랑이 가죽을 받았다네 요 앞산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얘기가 있었지? 얼마전에 요 앞산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네 윤부자댁에 딸린 식솔 중에 사냥하는 이가 있다네 사냥으로 이름난 사람인데, 윤부자댁 식솔이야 아참, 자네도 그 산을 넘어갔다지? 혹시 못들었나? 호랑이 울음소리? 그 호랑이가 심심찮게 산을 오고가는 사람을 헤쳐서 윤부자댁에서 이번에 작심하고 나섰다네 덕분에 호랑이를 잡았으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 안심하고 산을 넘어가도 되네 고맙지 않은가?

우리 마을 사람도 좋고, 덕분에 우리 집에는 그 귀하다는 호랑이 가죽이 들어왔으니 우리 집도 좋고, 우리 분이 고게 명물은 명물이야, 어찌 그댁 막내 아드님 마음을 사로잡아서는,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분이가 인물이 좀 되잖은가? 우리 분이 인물 아니었으면, 내가 아무리 애써도 혼인이 성사 됐겠나? 누이 하나 잘 둬서 호강하게 생겼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닌데, 나 들어가네 자네도 이제 분수껏 살아 자네한테 우리 분이가 언감생심 가당키나 한가? 자네 짝은 따로 있을거네 우리 분이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자네 짝 찾아”


사내를 멀찌감치 밀어내고 대문을 닫는 분이 오래비, 사내는 털썩 주저앉는다.

품 안에 댕기를 꺼내서 만지작 거리다 다시 넣는다.


사내는 분이와 만났던 큰 나무 위에 올라가 분이네 집을 바라본다.

높은 나무라 분이네 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당에서는 분이 혼인 잔치가 한창이고 곱게 단장한 분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신방으로 향한다. 그 옆에 윤부자댁 막내 아들이 우쭐거리며 분이를 따라 들어간다.

사내는 힘없이 나무를 내려온다.


사내는 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자신은 분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수도 없고, 야반도주를 한다한들 분이를 호강시켜줄 수도 없다.

분이는, 사랑하는 분이는, 아마 내 짝이 아니었나보다 사내는 분이 오래비의 말을 되새기며,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이내 체념한다.

큰 나무 아래 누워서 하늘을 본다. ‘분이와의 보금자리였던 여기서 죽어버릴까? 아낙의 오래비도 큰 나무 아래에 이렇게 나처럼 죽어있는걸까? 산에서 아낙의 오래비처럼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분이는 산중에 사는 아낙처럼 혼인 따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렸을까? 호랑이를 잡으러온 윤부자댁 사냥꾼에게 내 시체가 발견됐으면 분이는 나를 가엾게 여기며, 혼인 따위 안 한다 할 수 있었을까?’

사내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해질녘까지 큰 나무 아래에 누워있다.

어둠이 내려와 큰 나무를 감싼다. 사내는 어둠과 한 몸이 된듯 가만히 누워있다.

“나쁜 년, 사랑하는 나를 버리고, 밥술 꽤나 뜬다는 집으로 시집가니 좋으냐? 나쁜 년,

분이 너는 나쁜 년이다 그래 잘 가라 나쁜 년아 가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사내는 일어나서 집을 향해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신방 바깥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도 멈추고,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분이 곁으로 윤부자댁 막내아들이 다가온다. 분이의 족두리를 벗겨주고 혼례복을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벗겨내린다.

떨리는 손길로 단숨에 삼켜버릴듯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이부자리 위로 분이를 뉘인다.

분이가 손을 뻗어서 촛불을 가리킨다. 윤부자댁 막내 아들은 서둘러 촛불을 끈다.

촛불을 끄려고 등을 돌린 찰나, 분이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 한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분이는 신랑이 돌아보기전에 서둘러 눈물을 훔쳐낸다.

분이는 안다 사내는 자신을 데리고 야반도주할 용기가 없는 남자라는 것을,

자신을 데리고 야반 도주를 한다고 해도, 이내 자신의 오래비에게 잡혀오고 말거라는걸

분이는 알고 있다 사내는 자신의 오래비를 이기지 못한다.

자신의 오래비는 자신을 집안의 재산으로 생각해왔다 빼어난 미모의 누이를 시집 잘 보내서

한밑천 단단히 챙길 결심으로 윤부자댁 아들에게 줄을 댔다.

윤부자댁 막내 아들은 허우대는 말끔하지만 형들에 비해 똑똑하지는 못하다는 평판이다.

윤부자가 다른 여자한테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소문과 함께 형들은 좋은 가문에 줄을 대어

장가를 보냈으나, 막내 아들은 그저 아들 녀석 말 고분 고분 잘 들어줄 여자로 골랐다.

분이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내와는 혼인까지 가지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집안을 위해서

팔려가야 한다는 것을, 분이는 철이 들 무렵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오래비는 장사꾼이다 멀리 있는 장터에서 물건을 사서, 여기다 비싼 값에 되판다.

오래비한테 자신은 비싸게 되팔 물건일뿐이라는 것을 분이는 철이 들 무렵부터 알았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슬금 슬금 다가오는 남자, 분이는 낯선 남자의 손길에

체념하듯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사내는 분이의 설움이 된다 이제는 자신의 신랑이 된 낯선 남자의 품 안에서도

내려놓지못할 자신만의 설움이 된다.

분이는 체념하며, 묵묵히 낯선 남자의 품 안으로 뛰어든다.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품 안의 댕기를 꺼내서 방바닥에 내팽개친다.

깊숙이 넣어뒀던 술병을 꺼내서 병나발을 분다.

마시고 또 마셔도 사내의 설움을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없이 홀로 남은 설움, 나무꾼을 하며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설움, 가난해서 사랑하는 분이를 보내야했던 설움, 술 한 모금을 들이킬때마다 비어가는 술병은 사내의 설움을 담아내어 어느새 비어버린 술병이 사내의 설움으로 가득 채워진다.

사내는 술병을 팽개치고 널부러져서 손을 뻗다가 뭔가 손 끝에 걸려서 움켜쥔다.

새 댕기다 사내가 분이에게 주며 청혼하려 했던 댕기, “제 탓이에요 오래비가 돌아오지 않는건, 내가 혼인만 했더라면 오래비가 장에 갈 일 따위 없었을텐데”

그 순간 왜 앞 못보는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는지, 사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사내는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을 댕기를 움켜쥔채로 정신없이 달린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져도 손에 쥔 댕기를 놓지 않는 사내, 다시 일어나서 달린다.

어둠이 감싸안은 산길을 달리며 사내는 여전히 어둠과 한몸이다.

어둠 속에서 저멀리 작은 점처럼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사내는 불빛을 향해서 내달린다.

희미한 불빛에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의 작은 점은 점점더 커지고, 커져버린 그 점이

사내를 감싸고 있는 어둠을 조금씩 밀어낸다. 아낙의 집에 다다랐을때 사내의 어둠은

손에 쥐고 있는 댕기만큼 남아있을뿐이다.


대문을 걸어놓지 않은 아낙, 사내는 소란스럽게 대문을 열고, 아낙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놀라며 일어나는 아낙의 눈이 커진다. 사내는 아낙의 손에 댕기를 쥐어준다.

아낙은 한 손으로 더듬 더듬 만져보며 댕기임을 알자, 통곡하며 주저앉는다.

사내도 아낙을 따라 털썩 주저앉는다. 아낙의 손에 꼭 쥐고 있는 댕기, 사내는 자신의 손으로 아낙의 손을 감싸며 눈물을 흘린다.

사내는 아낙을 으스러져라 끌어안는다.

댕기를 꼭 쥔채로, 사내의 품 안에서 흐느끼는 아낙의 눈물이 불빛이 되어,

사내의 남아있던 마지막 어둠을 밀어낸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이 흘리는 눈물에 사내의 설움도 아낙의 설움도 녹아내린다.


다음 날 아침, 아낙의 손을 잡고, 큰 나무 아래로 향한다.

큰 나무 아래에 누워있는 오래비의 시체, 사내는 구슬땀을 흘리며 구덩이를 판다.

아낙은 앞 못보는 눈으로 사내를 거들며, 사내가 말리자, 새 댕기로 사내의 구슬 땀을 닦아준다.

사내는 구덩이에 오래비의 시체를 묻는다. 아낙은 품 안에 고이 두었던 낡은 댕기를 오래비의 가슴에 얹어놓고 흙을 덮는다.


‘호랑이가 오래비를 앗아갔지만, 그 호랑이가 또 지아비를 찾아줬어 오래비의 맘을 아프게 했던 낡은 댕기가 내 마음에 설움으로 얼룩져있지만, 새 댕기가 그 설움을 닦아줬어.

오라버니가 내 눈을 멀게 해서 그 죄값으로 평생 내 눈이 되어주겠다며, 혼인도 하지 않고

긴 시간을 내 곁에서 함께 하면서, 내 낡은 댕기에 마음 아파했지만, 나는 낡은 댕기를 오래비가 바꿔주길 바라지 않았어. 왜 오라버니가 바꿔줘야할 낡은 댕기를 멘 여인을 찾으러 가지 않는지, 왜 누이 곁에서 누이의 낡은 댕기만 보며 마음 아파하는지, 그게 더 나를

힘들게 했을뿐, 오래비가 치러야할 죄값이라 여기던 내 낡은 댕기가 실은 오래비만의 죄값이 아니라는걸, 먼저간 오라버니는 알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여기서 앞 못보는 눈으로 살았던 것도, 내 낡은 댕기를 죄값이라 여기며 마음 아파했던 오래비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에게 주려고 한달음에 새 댕기를 사러 달려가던 사내도, 여전히 낡은 댕기를 품에 간직하고 있을 분이라는 여인도, 모두 자신의 업으로 인해서, 설움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오래비는 새 댕기를 사서 내게 주며 자신의 설움을 씻어보려 했어, 오래비의 설움을 닦아줄 사람은 누이인 내가 아닌데도, 내게 새 댕기를 사주려했어. 그래서 그 댓가로 오래비는 자신의 목숨을 잃었지, 나는 또 낡은 댕기를, 설움을 떨쳐내려,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내 스스로 벗어버려서, 다른 이의 설움이 녹아있는 새 댕기를 얻게 됐어,

오래비를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이 사내는 자신의 낡은 댕기를 한 손에 쥔채로 다른 한 손에 다른 낡은 댕기를 쥐어버렸지,

다른 이의 낡은 댕기가 서러워보였다는 이유로 그밤 그렇게 같이 울어버렸어. 그래서 자신이 애써 구한 새 댕기를 다른 손으로 옮겨쥐어야만 했어, 분이라는 여인은 오래비처럼 호랑이한테 잡혀버렸어. 자신의 낡은 댕기를 새 댕기로 바꿔줄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쉬운 길을 택해버렸거든, 새 댕기 따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쉬운 길을 택해버려서, 어디서도 위로받지 못할 설움을 품고, 낡은 댕기를 멘 순수했던 자신을 송두리째 스스로 호랑이한테 바쳐버린거야. 오래비도 나도 사내도 분이라는 여인도, 몰랐던 거야. 자신의 설움을 떨쳐버릴 때를 몰랐어.


살아가는건 어쩌면 때를 기다리는 일일거야. 자신의 업을 풀어야할 때, 그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설움을 가슴에 품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거야. 빨리 벗어버리려 때를 앞당기려 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돼, 오래비도 나도 사내도 분이라는 여인도 모두 자신을 잃어버렸어.

한세상 살아가는게 업을 풀어내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과정이라면,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 아는 수행을 하려고 사람들은 마음 안에 자신만의 호랑이를 만들어놓는지도 몰라.

자신의 마음 안에 두려움을 만들어놓는거야. 호랑이라는 두려움을..

적당한 때가 올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 그리고 또 적당한 때를 놓쳐버리면 다시는 호랑이를 벗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자신 안의 호랑이라는 두려움을 벗어나는 방법은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 알고,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면서 그때가 왔을때 용기없이 주저하지 않는거야.

두려움을 물리쳐야 설움을 씻어내며, 업을 풀어버릴 수 있으니..


오래비, 이제 낡은 댕기는 돌려줄게. 다음 생에서 오래비의 낡은 댕기를 새 댕기로 바꿔줄 다른 이를 만나서 오래비의 남은 설움일랑 깨끗이 씻어버려.

나는 더 이상 새 댕기가 필요하지 않을거 같아. 내 설움은 이미 씻어지고 없으니까..

나는 더 이상 낡은 댕기를 갖고 있지 않거든, 오라버니 잘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


아낙이 한 줌을 덮고 다시 사내가 한 줌을 덮는다.


아낙의 오래비 가슴에 있는 낡은 댕기가 마치 분이의 낡은 댕기처럼 사내의 가슴 안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분이야 니 낡은 댕기도 여기다 묻어라, 낡은 댕기 품에 품고 있어봤자, 새 댕기로 바꿔줄 사람은 이제 없어,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너는 새 댕기 따위 필요하지 않잖아.

새 댕기 따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거야.

니가 선물 받은 호랑이만 잘 길들일 수 있다면, 분이야 사람은 말이야 순간인거 같아.

너를 그렇게 사랑했던 나도, 지금은 다른 여인을 마음에 담아가고 있어.

분이, 너와 나의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어. 네가 내 허락없이 낡은 댕기를 벗어버린 그날, 나는 너의 낡은 댕기를 새 댕기로 바꿔줘야할 순간을 버렸어. 그 순간을 지나가버렸다고,

나도 네 허락없이 내 새 댕기를 다른 여인에게 안겨줬어.

그런데 이상하지, 지금은 그게 꼭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일같아. 마치 너와 나는 거기까지만, 나와 지금 내 곁에 있는 여인은 마지막까지 함께 해야할 업 같이 여겨져.

나는 내 새 댕기를 받은 여인의 눈이 되어줄거야. 그녀의 오래비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의 눈이 되어서 내 업을 풀어갈거야.

분이야 잘 가, 낡은 댕기 따위는 묻어버리고 부디 잘 살아.’


사내는 흙을 다 덮고,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아낙은 새 댕기로 사내의 흐르는 땀을 다시 닦아준다.


오래비의 무덤 가에 앉아서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분이가 있는 마을도, 장터가 있는 마을도,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사내는 아낙에게 자신이 보는 풍광을 얘기해준다. 아낙은 자신이 본것처럼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와 아낙은 천천히 걸어서 그들의 집에 다다른다.


언제 매었는지 모르지만, 아낙의 머리에 새 댕기가 햇빛을 받아 수줍게 반짝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내와 아낙의 뒷모습이 평화롭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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