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린

by JKIH posted Jan 16,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편린

 

1

    

  잊지 마.”

 

  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면 나는 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만다. 뭘 말이야? 하고 되물으면 말없이 웃는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앉아 있는 네 모습은 예뻤다.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손을 뻗을라치면 단번에 알아채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날씨 좋다.”

 

 그러고선 또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네가 걷는 길을 따라 흐르는 달큰한 향기가 내 코를 스친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뒤를 따라 걷는 지금이 왜 이렇게 간지러운지.

처음 너에게 화를 내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지금은 가슴 저 아래에서부터 아지랑이가 피어날 뿐이었다.

 

  같이 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돈다. 나를 기다리는지 그 자리에 서서 빨리 와-하고 말한다. 걸음을 빨리 했다.

너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아려올 만큼 쿵쿵 뛴다. 이상했다. 왜 자꾸 너는 나를 울고 싶게 만들어?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걸었다.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너도 같이 흐려진다.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너의 긴 머리와 긴 치마가 바람에 나부낀다.

눈부신 바다와 너는 눈물 나게 아름답다.

 

2

 

  나를 죄여오는 삶을 등지려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나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나를 구해 준 너에게.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도 못 할 정도로.

그럼에도 너는 나를 향해 웃었다.

 

  “살아줘서 고마워.”

 

  눈을 뜬 나를 보며 네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살아있음에 화가 났다. 그래서 울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너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다 큰 성인 남자를 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품에 안아 달래주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내가 다 울기를. 내 스스로 눈물을 닦아 내기를.

 

부끄러움도 잊은 채 울던 내가 점점 너의 존재를 다시 인식해 갈 때 즈음 너는 알아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꼬박 반나절이 지났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고맙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 앞에 서 있는 네 뒷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열려있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리에 네가 뒤를 돌았다. 멀뚱멀뚱 서있는 나를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한다.

신발을 고쳐 신고 네 옆으로 걸어갔다. 내가 옆으로 오니 그제야 다시 노을을 향해 선다. 예쁘다, 노을이. 한참이나 조용하던 네가 말했다. 그러게. 처음으로 네 말에 대꾸를 했다. 네가 또 나를 보면서 예쁘게 웃는다. 노을보다 더.

 

  . 예쁠 거야, 네 기억도. 그러니까, 잊지 마.”

 

  너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너를, 잊지 않을게.

 

3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쏴아-하는 파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잔디가 무성한 땅에 아무렇게나 앉은 우리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너는 나를 보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두운 밤에도 네 웃음은 어쩐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이번엔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네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온다.

 

  내 첫사랑.”

 

  시종일관 웃음을 보이던 네 얼굴에 옅은 슬픔이 서린다. 잠시 멈칫한 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4

 

  9반 벙어리. 남의 아픔을 놀림거리로 여기던 열일곱의 아이들이 그 애를 칭하던 말이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내심 같은 반이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3반이었고 그 애는 9반이었다. 자꾸만 아른거리는 얼굴이 그리워 그 애와 같은 반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그랬다.

 

  벙어리. 그저 조용한 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애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열어 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 애의 머리칼을 스치고 갈 때면, 그 바람이 내 마음까지 스치고 가는 것 같았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뭣 모르던 내 열일곱의 첫사랑이.

 

5

 

  “도서부?”

  “. 그러게 일어나랄 때 일어났어야지. 밤에 이상한 거 그만 보고 일찍 좀 자라. ?”

  “야 그렇다고 도서부에 넣는 게 어딨냐?”

 

  담임이랑 같이 하는 등산부에 네 이름 적기 전에 그만 토 달아라. 반장은 나긋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당장 토요일부터 자치활동이 시작된다. 취미도 없던 독서를 강제로 해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팍 올라온다.

내가 읽은 책이라곤 기껏해야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 정도가 다인데. , 피곤해. 나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평소엔 그렇게 느리던 시간이 빨리도 흘렀다. 각자 부서로 이동하라는 반장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끼익-. 도서관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린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적막을 깬 불청객이 된 것 같다. 1학년? 도서부장으로 보이는 선배가 말을 건다.

 

  .”

 

  나랑 여기 둘은 2학년이고 나머지는 다 1학년이야. 할 일은 별로 없어. 잘 지내보자.”

 

  어색하게 악수를 마치고 선배들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체 말이 많고 시끄러운 성격이라 이런 조용한 곳은 딱 질색이었다. 도대체 이런 데는 어떤 애들이 오나 싶어 아까 선배들이 말한 나머지를 찾았다. 누가 봐도 나 공부 좀 해요- 라고 얼굴에 써 붙인 애들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그 애가 있었다.

 

6

 

  나는 처음으로 나를 도서부에 강제로 집어넣은 반장이 고마웠고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이 싫어졌다. 왜 자치활동은 토요일, 그것도 한 시간 밖에 안 하는 건지. 그 애를 내 눈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도서부에 처음 간 그 날, 나는 쉬는 시간 종이 칠 때까지 그 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그 애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너 미쳤어?!”

 

  그 애 생각을 하며 걷는데 복도 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달려가니 바닥이 쏟아진 초코 우유로 흥건했다. 씩씩대는 여학생 앞에는 쭈그려 앉아 책을 줍는 그 애가 있었다. 그 애의 하얀 블라우스에는 갈색 얼룩이 퍼져가고 있었다. 화를 내던 여학생은 그 애의 앞에 똑같이 쭈그려 앉아 비아냥거렸다.

 

  너 사과 안 해? 아 맞다. 너 말 못하지? 말을 못하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기라도 해. 손은 뒀다 어디 써먹어?”

 

  그 애는 책을 품에 안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우는 것 같았다. 여학생은 목표를 이룬 사람처럼 웃더니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벙어리가 울 줄도 알아? 비아냥거림은 끝이 없었다. 이제는 여학생의 친구들까지 가세해 그 애를 몰아갔다. 그 때 나에게는 웃기지도 않은 정의감이 불타올랐었다.

 

  그만 하지?”

 

  갑작스런 내 목소리에 시끄럽던 복도가 조용해졌다. 그 애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 모습에 속이 아팠다. 작은 몸을 품에 안아 말 해주고 싶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네 잘못이 아니야.

 

  ?”

  “너 때문에 얘 옷 다 버렸잖아. 사과는 네가 얘한테 해야지.”

  “넌 뭔데 참견이야?”

  “친구.”

 

  그제야 그 애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한 눈에 내가 담겼다. 나는 그 애를 보며 웃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그 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일으켜 세웠다. 가자. 덜덜 떨리는 몸을 단단히 잡고 아이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는 욕지기가 들려왔다. 아무렴 어때. 그 애랑 같이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7

 

  ... 그 애는 작은 손으로 내 손바닥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움이 심장까지 간지럽혔다. 그 애가 처음으로 날 보며 웃었다. 언젠가 그 애가 웃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예쁘겠단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예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는 웃음이었다.

 

  희원아

 

  내내 땅에 박혀있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막상 불러놓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 예쁜 이름을 한 번 불러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9반 맞지?”

 

  끄덕끄덕.

 

 3. 이현우야, 내 이름.”

 

  네가 불러주면 좋겠다. 뒷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자연스레 그 애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너랑 친해지고 싶다. 그래도 돼?”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 그 애는 옅게 미소 지으며 내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심장이 아렸다. 그 애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슬픔이 서린 눈이 잊혀 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 내 손을 잡아도 된다고.

 

8

 

  야 너 벙어리 좋아하냐?”

  “정희원.”

  “?”

  “정희원이라고. 벙어리가 아니라.”

 

 뭐야, 이 새끼. 놀리듯 다가온 친구는 되레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매일매일 도서관에 갔다. 그 애도 늘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도서관에서 만났다. 나는 그 애에게 어떤 책이 재밌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그 애는 입술을 물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계속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한참을 고민하더니 골라온 책이었다. 그 애는 책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 건네기를 망설였다. 나는 그 애가 모르게 살짝 웃고 책을 뺏어 들었다. 그 애의 시선이 나를 따라온다. 제목 맘에 든다. 너도 이거 읽었어? 내 반응에 기분이 좋은지 그 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잘 읽을게.”

 

  그 애의 머리를 헝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 애도 책을 골라와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해줘. 그 애가 읽는 책의 제목이었다. 나는 책을 덮고 그 애가 책을 읽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예쁘다. 예쁘단 말로는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았다.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지만 그 애를 향한 내 마음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드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새는 없었다. 그 애는 왜 책을 안 읽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제야 그 애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나는 또 넋을 놓고 그 애를 봤다. 그 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읽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 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으니까.

 

9

 

  벌써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 둘은 꽤나 가까워졌다. 얼마 전에는 그 애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갔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애에게 원래부터 말을 못 했던 거야? 라고 물었다. 말을 하고도 아차 싶어 그 애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 애는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 애는 태어났을 때부터 말을 못 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알아듣지도 못 할 옹알이로 쉴 새 없이 조잘거렸을 정도였다고 했으니까. 유치원에 다닐 때는 대표로 동요를 부르기도 했고 워낙 왈가닥한 성격 탓에 선생님의 특별 감시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 그 애의 말문을 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애의 아버지였다.

 

  그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한 우울증을 앓았고 매일을 술에 의존해 지냈다. 그 애의 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왔고 그 때마다 그 애의 아버지는 그 애와 어머니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아버지는 작은 울음소리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그 애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그 애는 매일을 불안 속에 살았다.

 

  자연히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날이 늘었고 가끔씩 나가는 학교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애를 따돌렸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그 애는 혼자였다. 어디에도 그 애를 안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 누구도 그 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를 내는 게 어색해진 그 애는 결국 마음을 닫았다. 이제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지금은 혼자 사는 거야? 궁금한 얼굴로 물으면 그 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얼마 전에 그 애의 아버지는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겨둔 채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 애의 예쁜 글씨로 가득한 노트를 몇 번이고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혼자였을 그 애가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자꾸만 아렸다.

 

  “듣고 싶다, 네 목소리.”

 

  글씨 하나하나가 살아 나 네 목소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들으나 마나 예쁠 네 목소리로 현우야, 하고 불러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손바닥으로 노트를 쓸었다. 힘든 건 그 애였을 텐데 괜히 내 눈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떤 말이 그 애의 상처를 안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머릿속엔 그저 그 애가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10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어느새 우리는 고3, 열아홉이 되어 있었다. 성적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던 나도 수험생이라는 타이틀은 벗을 수 없었다. 3학년이 되어서야 공부에 맛을 들인 탓에 우리가 도서관에서 만나는 횟수도 점점 줄어갔다. 그 애는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다가갈 때마다 웃어주는 것에 만족했다.

 

 오랜만에 시간이 남아 도서관에 왔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씁쓸하게 돌아서려는데 언제부터였는지 내 뒤에 서있던 그 애와 마주쳤다. 우리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가 엉켜들 만큼 가까웠다. .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그 애와 조금 떨어졌다. 그 애도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귀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언제 왔어?”

 

 돌아올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나는 물었다. 역시나 그 애는 말이 없었다. 나 여기 온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떠들어댔다.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어?”

 

 끄덕끄덕. ‘너는?’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그 애의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잘 지냈어.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그 애는 나보다 더 예쁘게 웃어줬다.

 

  “수능 끝나면 뭐할 거야?”

 

  잠시 생각하던 그 애는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랑 바다 갈래? 내 말에 그 애의 눈이 커진다. 나는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그 애에게 갈 거지? 하고 되물었다. 다섯 번 쯤 물었을까, 그제야 그 애는 못 이기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지? 약속한 거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그 애도 나를 따라 웃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우리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그 애는 소리 소문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고 나는 한동안 패닉이었다. 그 애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애의 집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 애의 반 담임 선생님에게 물어 겨우 알아 낸 주소에 이미 그 애는 없었다.

 

  말도 없이 떠난 그 애가 원망스러웠다. 유난히 길고 아팠던 그 해 가을의 일이었다.

 

11

 

  수능이 끝났고 고등학교 시절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수능이 끝난 교실 풍경은 자유로웠고 시끄러웠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놀았지만 이따금씩 나를 건드는 그 애의 기억은 내 하루를 통째로 잡아먹었다. 그 애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사무치게 아팠다.

 

  “이현우, 교무실로 와.”

 

  한참 그 애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교무실로 올라갔다. 담임은 자리에 앉아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봉투 하나를 꺼냈다.

 

  “넌 인마, 친구한테 주소도 안 가르쳐주고 뭐했냐?”

  “?”

  “너한테 온 편지다. 것도 학교 주소로.”

 

  나는 담임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보내는 사람 정희원. 잔소리를 늘어놓는 담임의 목소리는 이미 안 들린 지 오래였다.

 

  “어쨌든, 가 봐. 종례 끝날 때 까지 딴 데로 새기만 해라.”

 

  흰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고 또 봐도 그 애의 이름이었다. 벅찬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현우!”

  “?”

  “교실로 가라고. 편지 온 게 뭐가 그렇게 좋냐.”

  “....”

 

  그 애에게서 온 편지를 품에 꼭 안고 교실로 왔다. 교실에 와서도 들뜬 감정은 감출 수 없었다. 수능 끝나더니 정신 놨냐? 비아냥거리는 친구의 말에도 실없이 웃었다. 다시 그 애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어떤 말을 들어도 좋았다. 나는 종이를 뚫을 기세로 그 애의 주소를 외우고 또 외웠다. 곧 우리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12

 

  “?”

 

  내 얘기가 너무 길었나. 너는 어느새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파도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이따금씩 바람이 세게 불었다. 세상모르게 잠든 너를 흔들어 깨웠다. 추워, 들어가서 자. 그제야 네가 눈을 떴다. 너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고 샐쭉 웃었다. 가벼워진 어깨로 바람이 불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미안, 안 자려고 했는데

  “괜찮아. 뭐 어때. 춥다, 들어가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너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언젠가 그 때의 그 애와 나 같았다. 더 듣고 싶어, 네 얘기. 네가 말했다. 그렇게 자 놓고 뭘 더 들어? 놀리는 내 말투에 네가 밉지 않게 흘겼다.

 

  “나머지는 내일. 너 지금도 엄청 졸려 보여.”

  “내일? 진짜지?”

  “그래, 내일.”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너는 연신 웃고 있었다. 여전히 손은 맞잡은 채였다.

 

13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됐을 뿐인데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차고 설렜다. 섣불리 찾아가는 것 보다 그 애의 목소리를 담은 편지를 주고받는 게 어쩌면 그 애에게는 더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애와 어울리는 분홍색 편지지를 샀다. 초등학교 이후로 편지를 쓴 적이 없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왜 말도 없이 가버린 건지, 거기서는 누구랑 지내고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리고.

 

  “나 보고 싶지도 않냐...”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편지지를 꺼내 내 마음을 옮겨 적었다. 그 애도 나에게 편지를 쓸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보다 글의 힘은 대단했다. 꾹꾹 눌러 쓴 동그란 글씨에서는 그 애가 느껴졌고, 들어보지도 못 한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막힘없이 편지를 써내려가다가 마지막 줄에서 망설였다. 보고 싶다. 고작 네 글자를 쓰는 게 힘들었다.

 

  펜의 잉크가 종이에 번질 정도로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친구 사이에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게 대수냐 하겠지만 그 애를 보는 내 마음이 친구 이상의 감정인 탓에 괜히 찔렸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편지의 마지막 줄을 채웠다. 보고 싶다, 많이. 그 애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엔 꼭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14

 

  이름도 모르는 너를 만나 신세를 진 것도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머무르는 건 민폐인 것 같아 내일이 되면 가야겠다고 말했다. 너는 그저 말없이 웃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하루 온종일 너와 바닷가를 거닐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밤이 왔고 우리는 평소처럼 이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웠다.

 

  “?”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네가 물었다. 나는 아니, 하고 대답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네가 나를 향해 누운 모양이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이 없기에 이번엔 내가 할 말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너는 웃으며 말했다. 할 말 완전 많지.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가 귀여웠다. 뭔데, 말 해봐. 밤을 새서라도 들어줄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조금은 엉뚱한 물음이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너는 그사이에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네가 날 안 잊었으면 좋겠어.”

  “안 잊어. 못 잊지, 생명의 은인인데.”

  “정말?”

  “, 절대 못 잊지.”

 

  너는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잠에 든 것 같았다. 네가 깨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잘 자, 하고 말하고 눈을 감았다. 새근거리는 네 숨소리와 파도소리가 섞여든다. 엄마 품만큼이나 포근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주변의 소리가 작아지고 완전히 잠에 들 때 즈음 현우야, 하고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름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궁금함이 잠기운을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잘못 들은 건가. 자면서도 내일 아침이 되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치듯 들었던 네 목소리가 유난히 예쁘다고 생각했던 너와의 마지막 밤이었다.

 

15

 

  눈을 떴다. 어딘가 모르게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느리게 숨을 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눈부신 바다와 시원한 바람은 온데간데없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라며 밉지 않게 나를 흔들어 깨울 네가 나타날 것만 같은데, 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언젠가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것 같은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있었고 내 몸엔 영화에서나 보던 이상한 의료기구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아무것도 정리 되지 않는 머릿속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갔다. 정말로 너와 보낸 시간들이 전부 꿈이었을까? 네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인위적인 형광등 불빛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현우야! 내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실 문 앞에서 엄마가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돌아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의사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내 의식을 잡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나는 내가 사흘 만에 의식을 찾았다는 것에 놀랐고 너와 함께였던 시간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에 힘이 빠졌다.

 

 내가 다시 눈을 감으려하자 엄마와 의사는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마도 내가 다시 의식을 잃을까봐서겠지만, 나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결국 다시 눈을 뜨고 괜찮으니 죄송하지만 나가달라 부탁했다. 의사는 내 말에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으니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엄마는 연신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우리의 시간이 꿈이라면, 네가 다시 내 꿈에 찾아와 주진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하지만 야속하게도 너는 나오지 않았다. 낯선 여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너는 아니었다. 웃는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내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이겠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던 네 목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것 같다.

 

16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사는 원룸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완강했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엄마는 원룸을 정리하고 완전히 집으로 돌아올 것을 부탁했다.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네 생각으로 뒤엉켜있었다.

 

  그렇게 큰 방도 아니었지만 짐을 정리하고 나니 휑한 것이 꼭 내 모습 같았다. 그래도 3년 가까이 살았던 곳이라 정이 들었는지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시트가 벗겨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아마 밤새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두고 가시는 물건 없죠?”

 

  이삿짐센터 직원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 없어요. 간단하게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원룸 촌을 막 빠져나올 때 쯤 기사가 전화를 받고는 차를 세웠다. 왜 그러세요? 의아해 물으니 두고 온 거 있으세요? 한다. 없다고 말하니 침대 밑에서 상자 하나가 나왔다고 한다. 침대 밑에 상자? 그런 걸 둔 기억이 없는데.

 

  상자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아까 그 이삿짐센터 직원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상자를 받았다. 크지 않은 상자에 꽤 무게가 나간다.

 

  “침대 밑에 있더라구요. 한 번 확인 해 보세요.”

 

 직원의 말에 상자를 열었다. 편지가 한가득 있었다. 제일 위에 놓인 편지를 꺼내 들었다. 보내는 사람 이현우 받는 사람 정희원.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정희원, 정희원. 나는 작은 소리로 이름 세 글자를 되뇌었다. 지잉-하고 머리가 울렸다. 갑작스런 두통에 상자를 놓쳤다. 편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직원은 괜찮으냐고 물으며 상자를 다시 정리해 내게 건넸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자를 받아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정희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편지 속의 나는 부정할 수 없는 나였는데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그 부분만 드러낸 것처럼 조금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편지에 적힌 날짜를 보면 1년도 채 되지 않는 몇 달 새 우리는 참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속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이름.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한 부분일까. 아무리 기억해내려 애써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머릿속이 원망스러웠다.

 

17

 

  부분 기억상실증. 스무 살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생긴 후유증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만 모조리 사라져버려 한동안은 성인이 아닌 중학교 졸업반에 머물러 있었다. 다행히 친구들과 엄마의 도움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일부였다. 내 기억은 미완성이었다. 항상 어딘가 텅 빈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3년을 지내왔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불완전한 형태의 기억에 미칠 듯이 괴로웠다. 단순한 기억이 아닌 내 삶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렸고 이는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나는 힘없이 내몰렸고 거대한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리고 다시 얻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기회를.

 

  어쩌면, 아주 어쩌면 편지의 주인공이 내 기억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녀가 바로 내 기억을, 내 삶을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대충 풀어 놓고 내내 편지만 읽었다. 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풋풋했고, 딱 그 나이 대 아이들다웠다.

 

  희원이라는 여자는 아마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 이었나보다. 글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나의 애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편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내 애틋하고 소중한 고백이 담긴 편지였다. 내가 직접 전해주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 보니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하루 종일 이삿짐을 나르고 많은 편지를 읽어서 그런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꿈에서 오랜만에 너를 만났다. 너는 전보다 더 눈부시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희원이에게 전해주지 못한 편지를 너에게 건넸다. 너는 그 편지를 받아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너의 모습이 흐릿해 지는 걸 보니 꿈에서 깰 때가 온 것 같았다.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꿈에서 깼다. 약속? 무슨 약속? 너를 만나 기분이 좋은 꿈이었는데 두통은 심해졌다.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려 앉았다. 너와 닮은 여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흐릿한 초점이 마침내 선명해졌다. 네 얼굴을 한 교복을 입은 소녀. 그리고 명찰에 박힌 정희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

 

  그제야 모든 기억이 선명해졌다.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매던 기억의 편린. 다시 눈을 감으니 우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나는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울음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토해냈다. 기억을 찾은 것 보다 그때의 우리와 너를 찾은 것이 몇 곱절은 더 기뻤다.

 

  너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렸을까.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 커지고 커져 마침내 내 꿈에까지 닿은 걸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인 너를 지워버린 나를 미워해도 좋고, 밀어내도 좋다. 다시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내가 너를 찾아갔을 때 어린 날의 너처럼 환하게 웃어주기만 한다면.

 

  수능이 끝나면 바다에 가자던 우리의 첫 약속과 전해지지 못한 마지막 편지, 그리고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던 꿈의 약속이 곧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너를 처음 만났던 차가운 봄의 입학식이 떠오른다. 단 한 번뿐인 열일곱, 그 시절의 첫사랑. 조금 진정 됐던 가슴이 다시 쿵쿵 뛰었다. 나는 오랫동안 닫아둔 너만을 위한 마음의 문을 열었다.

 

  너를 다시 만나는 날, 찬란한 봄이 또 시작되는 날에, 그때는 너에게 말 할 수 있을까?

 

18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믿는 건 편지에 적힌 주소 하나가 다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네가 말없이 사라졌던 열아홉의 어느 날처럼 또 다시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긴장 때문에 네 시간이 훌쩍 넘는 여정에도 잠 한숨 못 자고 지나가는 풍경만 꼼짝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차창 밖으로 눈부신 바닷길이 펼쳐져 있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비록 꿈속이라지만 그렇게 많은 여지를 던졌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던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슬아슬 눈가에 걸쳐진 눈물을 닦았다. 버스는 어느새 터미널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다. 너만큼이나 싱그럽고 눈부신 곳에 살고 있었구나. 나는 편지에 적힌 주소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서울 말씨를 쓰는 나를 신기하게 보다가도 이내 어디로 가라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가르침대로 찾아가니 다닥다닥 그림 같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번지수를 확인해가며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문 하나만 열면 끝일 것을 우리의 시간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벌써부터 목 끝까지 설렘이 차올랐다. 대문 역할을 하는 울타리를 지나 집의 마당으로 들어갔다.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문을 두드렸다.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에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는 급히 뒤를 돌았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오던 너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우리의 시간만 멈춘 듯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너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온 몸이 떨려왔다. 긴장한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바지춤에 손을 슥슥 닦아냈다.

 

  “잘 지냈어?”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난 첫사랑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잘 지냈어. ?”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네 목소리. 예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나도 잘 지냈지,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내가 너를 안아버린 건.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너를 내 품에 꼭 안았다. 흠칫 떨리는 몸이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너를 안은 채로 말했다. 너는 손에서 조심스레 자전거를 놓았다. 볼품없이 쓰러진 자전거는 헛바퀴만 돌리고 있었다. 너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들어 내 허리를 감쌌다. 더 깊게, 더 소중하게 너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고마워. 거의 반은 내 품에 파묻힌 네가 말했다.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내 귓가엔 선명하게만 들렸다.

 

  물기가 어린 목소리에 품에서 너를 떼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깜빡였고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투박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시 너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이 시간이 눈물겹게 행복하다. 맞닿은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고 있다. 그게 그렇게나 좋아서, 벅차서 나는 또 눈물이 났다.

 

19

 

  내가 너를 잃었던 스무 살에 너는 목소리를 찾았다.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었던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속상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네가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꿈속에서처럼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소식이 없어서, 직접 찾아가볼까 생각도 했었어.”

  “근데 왜 안 왔어?”

  “... 네가 온다고 했으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곧 갈게, 한 마디에 너는 단 한 번도 보채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나를 기다렸다. 조금 더 빨리 찾아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어쩌면 아주 늦었을지도 모르는 나날을 기다려 준 고마움을 담아 작은 손에 깍지를 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이 예뻤다. 무엇보다 나를 보며 웃어주는 네가 제일 예뻤다.

 

  “늦어서 미안해. 나도 몰랐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일부러 늦은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지금이라도 왔으니까. 다 괜찮아.”

 

  새 교복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등교했던 초봄의 어느 날. 기적처럼 다가온 너를 내 마음에 담고서 너를 만날 다음날만을 기다리며 잠들었던 나를 알까. 뛰어 놀기 좋아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너보다 먼저 도서관 앞을 서성이고, 사각사각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던 도서관 안에서 너만 바라보던 나날들.

 

  추위를 잘 타는 너를 위해 봄가을 그리고 겨우내 너 몰래 얇은 가디건을 가지고 다니며 춥다던 너에게 모른 척 가디건을 건네고, 네가 남긴 작은 쪽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던 어린 날의 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 안의 우리는 예뻤고 싱그러웠으며 누구보다 빛났다.

 

  길고 긴 어둠 끝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20 Epilogue

 

  “선생님! 서울 형아 또 왔어요!”

 

  아, 또 실패다. 창밖으로 그림자가 진 걸 알아 챈 녀석이 책을 읽어주던 너를 불렀다. 제발 이번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쉿-하는 손짓까지 보였는데, . 나는 아쉬움에 발을 한번 굴렀다. 아이의 말에 시선을 돌린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이내 예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아쉬움이 한방에 가셨다. 나는 입모양으로 기다릴게하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까지 확인을 하고서 분교 안의 작은 나무 벤치에 앉았다. 목소리를 찾았음에도 딱히 대화를 할 상대가 없었던 너는 어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고, 외로움을 이기려 시작한 일이 지금은 습관이 되어 버린 너였다. 아이보다 더 순수한 웃음을 가진 너는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동화를 다 읽었는지 !’하는 아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열린 창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러면 너는 책 정리를 시작하고, 아이들은 너보다 먼저 나와서 나를 둘러싸겠지. 3,2,1. 서울 형아! 나이스 타이밍. 나는 달려 나오는 아이들을 일어서서 맞이했다. 내 다리 길이보다 작은 아이들이 내 주위를 에워싸는 모양이 퍽이나 귀여웠다.

 

  “형아 우리 선생님이랑 결혼해요?”

 

  그 중 제일 똘똘한 아이가 말했다. 이름은 창우였다. 결혼?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우리 선생님 예뻐요! 여기서 제일! 하고 말한다. 나도 알아 인마.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다 고개를 드니 저 앞에 웃으며 네가 서 있었다. 나는 창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창우는 내 말에 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꾸밈없이 순수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서울 형아랑 우리 선생님이랑 결혼한다! 창우의 말에 다른 아이들까지 덩달아 쫑알쫑알 소리를 질러댄다. 그 덕에 너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선생님! 결혼해요! 소리를 치는 아이들을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선생님! 서울 형아랑 결혼해요! ?”

 

  아이의 순수함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선생님은 공주님이고 서울 형아는 왕자님이에요! 공주님은 왕자님이랑 사랑해요! 그러다 창우가 꽤나 근엄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창우는 희고 고운 네 손을 잡으며 말했다. 꼭 자기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서울 형아는 선생님만 보면 웃어요. 우리 할머니도 나만 보면 웃어요. 나도 우리 집 백구를 보면 웃음이 나요. 그거는 사랑이라고 했어요! 우리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나만 보면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해요! 서울 형아도 선생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며 작은 눈으로 윙크를 찡긋 한다. 나도 창우를 따라 윙크를 날렸다. 창우는 쉬지 않고 말했다.

 

  “선생님도 서울 형아 보면 웃잖아요! 사랑하니까! 그쵸?”

 

  너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또 와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서울 형아랑 선생님이랑 결혼해요! 창우의 말에 너는 환하게 웃으며 그래,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그 웃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언제나 그렇게 예쁘기만 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너를 따라 웃었다.

 

  너는 내 행복이며 사랑이다. 아마 말하지 않아도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생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난다. 우리사이로 부는 바람에서 봄기운이 느껴졌다. 허공에서 맞닿은 두 개의 시선은 오롯이 서로를 향해 있다. 그 예쁜 눈에서 행복이 느껴진다는 걸 너는 알까. 지금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갈 너에게 질리도록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다.

 

  나의 봄, 생각만 해도 시리도록 아름다운 너에게.

 

---------------------------------------------------------

 

응모자 : 박지현

010-7322-7508

backkyoung2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