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과 이면

by 복실이 posted Jan 19,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표면과 이면




새벽 예불을 스님들 뒤에서 같이 올리고 객방에서 명상에 잠겼다가 나와 보니 암자는 적군처럼 몰려온 운무에 포위되어 있었다. 마치 분무기에 우유를 넣어 뿌린 듯한 젖빛 운무였다. 운무는 천장산 밑에서 올라온 아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오전 시간이 다 끝날 무렵에야 사라질 것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운무는 그렇게 물러났다. 꽃이 한창 피는 봄이다 보니 운무가 잦았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은지는 이곳 천진암에 온 이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공양 후에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백팔 배를 하고 나서 천장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산행을 즐기고 있었다. 지난 열흘 동안 은지 혼자서 아침 산행을 했는데 오늘은 동행자가 있었다. 은지가 묵고 있는 객방의 바로 옆방에서 두 달째 지내고 있는 경미라는 여자였다. 경미씨가 두 달씩이나 천진암의 객방에 묵고 있는 것은  시험 준비 때문이었다. 경미씨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산사나 암자의 객방에 머물며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경쟁률이 백대 일이 넘으니 산사나 암자에서 공부를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미씨는 은지보다 두 살 어렸다. 하지만 은지는 경미씨와 서로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천진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깔딱 고개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가 험한 코스였다. 오늘 은지는 경미씨와 깔딱 고개를 올라 정상으로 갈 계획이었다. 이른 아침 산행은 제법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은지는 경미씨와 코트를 든든히 입고 천진암을 나섰다. 깔딱 고개를 오르는 코스에는 봄을 알리는 붉은 진달래가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숨을 금방 차오르고 다리도 무겁게 느껴졌다. 은지는 경미씨보다 두세 걸음 먼저 앞서 갔다. 한숨 돌릴까 싶어 은지는 경미씨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그런데 경미씨는 은지보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은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경미씨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산 정상에는 한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다는 거죠?”

경미씨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네.”

“공무원 시험 준비 때문에 그런 것이겠군요.”

그러자 경미씨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 핑계고 제가 워낙 게을러서요.”

은지는 경미씨와 몇 마디 말을 더 하고 나서 다시 깔딱 고개를 올랐다. 난코스를 지나고 나니 정상까지 인공으로 설치된 나무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무계단을 오르는 것이 깔딱 고개를 오르는 것보다 더 숨이 차고 힘이 들었다. 어쨌거나 은지는 경미씨와 힘겹게 정상에 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은지는 경미씨와 산 아래를 둘러보았다. 운무는 바람을 타고 소용돌이를 치듯 거세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호흡이 안정되자 은지는 경미씨에게 물었다.

“좋죠?”

“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몰랐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신 아빠를 따라 천진암에 가끔 왔었지만 산 정상은 처음이에요.”

“그럼 혹시 이 산 근처가 가 고향인가요?”

“네.” 

“그렇군요.”

은지는 경미씨와 십여 분쯤 머물다가 계단을 따라 정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암컷 고라니들 마냥 능숙하게 깔딱 고개도 총총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천진암으로 돌아오자 은지는 경미씨와 이백여년 전에 어느 석공이 절벽에 조각을 한 마애불 바로 아래에 있는 옹달샘에서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갈증을 사악 녹여주는 얼음 같은 물이었다. 그리고 은지는 경미씨와 각자 객방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이곳 천진암으로 올 때 가지고 온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라는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을 펼치고 몇 장 읽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졸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었다. 은지는 별 수 없이 책을 덮고 방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혼침에 빠져들었다. 빨강 노랑 파랑이 마구 뒤섞인 요란한 꿈을 꾸고 있는데 누군가 은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은지야?”

“......”

“은지야?”

은지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덕진 스님이 방문을 열고 은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덕진 스님이 양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곤한 모양이구나.”

은지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책을 읽다가 그만.”

“나 장보러 읍내에 가는데 같이 안 갈래?”

“읍내에?”

“그래.”

은지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자 그럼.”

은지는 일어나서 객방을 나왔다. 천진암에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산을 다 내려오자 덕진 스님과 은지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조금 더 걸어갔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오 분도 되지 않아 읍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왔다. 덕진 스님과 은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뒤쪽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열흘 만에 천진암에서 내려와 보는 풍경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천진암에서 신문도 TV도 보지 않았으니 열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읍내에 도착하자 덕진 스님과 은지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시장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어 보이는 장터로 갔다. 덕진 스님이 장을 보기 시작했다. 덕진 스님은 오이, 당근, 호박, 연근, 시금지, 두부 등을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걸망에 넣었다. 장을 다 보고 나서 덕진 스님은 앞서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커피 한잔 마실래?”

“좋아.”

덕진 스님과 은지는 읍내에 있는 커피 전문점을 찾아 들어갔다. 이곳 읍내에도 커피 전문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피 전문점 전성시대 같았다. 오전인지라 커피 전문점에는 손님이 덕진 스님과 은지 둘 뿐이었다. 덕진 스님과 은지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창쪽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를 한두 모금씩 마셨다. 은지는 덕진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십년 전에 출가를 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덕진 스님의 얼굴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덕진 스님은 은지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덕진 스님과 은지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덕진 스님의 속명은 한채영 이었다. 이곳 천진암으로 출가를 한 덕진 스님은 운문사에 있는 승가대학에서 사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비구니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천진암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지가 덕진 스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자 덕진 스님이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은지는 웃으며 말했다.

“너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보이니?”

“어.”

“내가 보기에 너도 마찬가지야.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아.”

“아니지. 수행을 한 얼굴과 세속의 풍파에 찌든 얼굴을 비교할 수는 없지.”

덕진 스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런데 은지야?”

“왜?”

“너 무슨 일 있지?”

“무슨 일이라니?”

“전에는 천진암에서 짧게는 하룻밤 길어야 일주일 정도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고는 하더니 이번에는 열흘이나 지났잖아.”

덕진 스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은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지는 변명을 하듯 말했다.

“나야 프리랜서 작가잖아. 말이 프리랜서지 반 백조나 다름없는데 열흘이 뭐 긴 시간이니. 천진암에서 한달도 묵을 수 있는 게 내 직업이잖아. 그리고 천진암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자주 다니던 마음의 고향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시나리오 작업 끝나고 나니까 시간이 넉넉해서 천진암에 머무는 것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고.”

은지는 침이 마른 느낌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서울을 떠나 천진암에 올 때 마음의 정리를 하려고 한 것 때문이었다. 덕진 스님과 은지는 커피를 다 마시고 커피 전문점을 나왔다. 그리고 읍내 버스 정류장에서 천장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점심 공양 시간에 늦지 않게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이십 여분을 달려 천장산으로 들어가는 버스 정류장에 멈추어 섰다. 덕진 스님과 은지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한 남자도 내리는 것이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덕진 스님과 은지가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뒤따라오던 한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서 묻는 것이었다.

“이 길이 천진암으로 올라가는 길인가요?”

덕진 스님이 대답했다.

“네. 천진암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스님도 천진암으로 가는 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네. 그럼 스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군요.”

덕진 스님이 궁금한 듯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천진암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것인가요?”

남자가 말했다.

“네.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덕진 스님이 잠깐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또 물었다.

“혹시 여자분 이름이 신경미씨 인가요?”

“네. 맞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세 사람은 묵묵히 천진암으로 올라갔다. 주말이기는 하지만 산이 외진 곳에 있어서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점심 공양을 할 무렵에 세 사람은 천진암에 도착했다. 덕진 스님은 장을 본 걸망을 내려놓고 남자와 함께 경미씨가 있는 객방으로 갔다. 그리고 경미씨를 불렀다. 방문이 열리고 경미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경미야.”

남자가 경미씨의 이름을 불렀지만 경미씨는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경미씨와 남자는 객방에서 따로 점심 공양을 했다. 남자가 경미씨의 객방에서 나와 천진암을 떠날 때는 늦은 오후였다. 하지만 경미씨는 남자가 떠나는 것을 나와 보지 않았다. 은지로서는 이상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 남자가 생각이 났다. 경미씨를 찾아왔던 남자는 한 남자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날 은지는 대학 선배와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대학 선배와 은지는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격이 없이 지내고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대학 선배와 후배 사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 선배와 은지가 가까이 지내게 된 계기는 대학 선배가 단편영화 감독으로 데뷔를 할 때 은지와 시나리오를 같이 작업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선배와 은지는 취향이 비슷해서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호흡도 잘 맞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후로 대학 선배는 단편영화를 두 편 더 만들었고 그때마다 은지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대학 선배가 만든 단편영화는 관객과 영화관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장편 독립영화 감독으로 데뷔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대학 선배와 은지는 같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초고를 완성했다. 그런데 대학 선배는 시나리오 초고에 무엇인가 아쉽고 빠진 듯한 구석이 있다며 만족을 못했다. 그래서 대학 선배의 말대로 취향이 전혀 다른 한 남자를 시나리오 작업에 합류시킨 것이었다. 그래야 시나리오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한 남자를 커피전문점에서 처음 보았을 때 일 때문에 만난 사이라 그런지 특별한 호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한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첫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백 팔배를 한 후에 은지는 경미씨와 또 산 정상으로 산행을 갔다. 정상에 도착해서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내려다본 산 풍경은 운무도 없고 화창한 날씨 덕분에 절경이다 싶을 만큼 탄성이 절로 났다. 호흡이 진정되자 은지는 경미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온 분이 혹시 애인인가요?”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경미씨의 의외의 말에 은지는 놀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지금은 애인이 아닌 남자가 왜 찾아 온 거죠?”

“.......”

경미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지도 경미씨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경미씨의 표정이 우울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천진암으로 돌아와 은지는 경미씨와 읍내로 나가 목욕을 하러 준비물을 챙겨가지고 천진암을 내려갔다. 오랜 만에 목욕탕의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 신경 이완되면서 기분도 좋았다. 목욕을 하고 나서 은지는 경미씨와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어제 덕진 스님과 함께 들어갔던 커피 전문점이었다. 은지는 경미씨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자리에 앉았다. 경미씨로서는 공무원 시험서적만 보다가 한달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정상에서의 우울한 기분은 사라져 보였다. 그런데 경미씨가 은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말을 않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래서 은지는 물었다.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그러자 경미씨가 뜸을 들이다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어제 저를 찾아온 그 남자는 유부남이에요. 그 남자는 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사실을 숨겼죠. 저는 그 남자를 사랑했고 임신까지 했죠. 그러자 그때서야 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거예요. 저는 분노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거였죠. 저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미혼모가 되더라도 아이는 낳고 싶었지만 유산되고 말았죠. 어제 그 남자가 저를 찾아온 이유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저를 임신까지 시킨 미안함 때문이었죠. 저는 천진암에 머물다보니 그 남자와의 지난날들이  모든 게 제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내려 보낸 거예요.”

경미씨의 말을 듣고 나니 은지는 문득 한 남자가 떠올랐다. 경미씨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다 후련해지네요.”

그리고 경미씨가 또 말했다.

“애인 있죠? 설마 애인이 없는 것은 아니죠?”

경미씨의 물음에 은지는 가슴에 화살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덕진 스님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은지는 웃으며 말했다.

“애인이요? 없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은지는 남은 커피를 숭늉 마시듯 비우고 나서 말했다.

“우리 점심 공양을 하러 서둘러 올라갈게 아니라 이 근처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칼국수 먹고 올라갈래요? 칼국수 잘하는 집을 알고 있는데.”

“그러죠. 오랜만에 외식하게 생겼네요.”

은지는 경미씨와 커피 전문점을 나와 근처에 있는 칼국수 집을 찾아 걸어갔다. 덕진 스님을 보고 싶을 때나 시나리오 작업이 잘 안 될 때 노트북만 달랑 들고 와서 천진암 객방에 묵으며 작업을 여러 번 해본 적이 있어서 읍내 거리는 은지에게 낯설지 않았고 칼국수 집도 두세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칼국수 집을 찾아 들어가자 점심 식사 시간으로는 이른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여럿 보였다. 은지는 경미씨와 그곳에서 바지락을 듬뿍 넣은 칼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배부른 오리 마냥 뒤뚱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천진암으로 올라갔다.

천진암에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정상으로 가는 산행을 하지 못했다. 천진암에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 남자가 생각났다. 대학 선배와 은지와 한 남자는 오피스텔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대학 선배와 은지는 시나리오의 초고를 썼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바꿀 새롭고 특별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선배의 말대로 취향이 전혀 다른 한 남자는 낚싯대로 막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때마다 대학 선배와 은지는 탄성이 절로 날 정도였다. 그러자 은지는 한 남자에게 호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남자에게 느껴진 호감은 점점 더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천진암에 내리던 비는 점심 무렵에야 그쳤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은지는 혼자서 천장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산 아래를 빙 두르고 있는 둘레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혼자서 트래킹을 하다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은지가 중학교 삼학년 때의 기억들이었다. 

중학교 삼학년이 될 때까지 은지는 아버지가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원양어선의 항해사였는데 폭풍으로 배가 침몰해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은지는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중학교 삼학년 때 까지 가족은 엄마와 은지 둘 뿐이었다. 엄마에게 일가친척이 없는 것인지 은지는 엄마만을 보며 자랐다. 엄마는 은지가 어릴 때부터 전통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서는 늘 생선 비린내가 났다.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른 새벽에 직접 트럭을 몰고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가서 싱싱한 생선을 받아 왔다. 그리고 엄마는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은지를 학교에 보냈다. 엄마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은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생선 가게에 가방을 던져두고 시장 통에서 놀았다. 그러다 학원에 갈 시간이 되면 가방을 다시 매고 학원으로 갔다. 그렇게 은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중학교 삼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엄마가 더 이상 생선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엄마가 위암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생선 장사를 하느라 늘 식사 시간이 불규칙했다. 그래서 소화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위암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었고 엄마는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엄마는 은지의 손을 꼭 잡고 메모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놀랍게도 아버지에 대한 메모였다. 메모지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엄마는 그 메모지를 은지에게 주며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 은지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장례식은 전통시장 상인들이 도와주어서 별 탈 없이 치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은지에게 남은 것은 메모지 한 장 뿐이었다. 은지는 그 메모지에 적힌 아버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볼 때 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마도 분노의 감정이 머리끝까지 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은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은지가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지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은지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 것은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쯤 후였다. 아버지. 처음에 은지는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아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어 삼켰다. 원양어선의 항해사로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 아버지가 이 사람이라니. 은지는 도저히 믿을 수도 납득 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를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은지는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미혼모로 만든 남자가 이 사람이라니 은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은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당신은 제 아버지가 아니에요! 제 아버지는 원양어선의 항해사였고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 남자란 말이에요!”

“은지야!”

“저는 당신 같은 아버지를 둔 적이 없어요!”

“은지야! 진정하고 아버지 말을 들어라!”

그 말을 듣고 은지는 양쪽 귀를 두 손으로 꼭 막았다. 은지가 간신히 진정을 한 것은 한 시간쯤 후였다. 그리고 은지의 귀에 들려온 것은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아니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다시는 볼 일이 없기 때문이죠.”

항해사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아버지는 가정을 가진 평범한 회사원 있었다. 그리고 어쩔 수가 없었다는 변명의 말들이 벚꽃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치사해요. 이제 와서 미안하다드니 어쩔 수가 없었다드니. 그런 말은 제발 그만 하세요.”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며 은지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엄마는 아버지와 같은 보육원을 나왔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엄마가 은지를 임신 했을 때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를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또 눈물이 흘러나오면서 세상을 떠난 엄마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두 번째 만남은 아버지가 학교로 은지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은지를 기숙사가 있는 지방의 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아버지와 상담이 끝나자 담임선생님이 은지를 불렀다. 그리고 성적이 좋으니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은지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은지는 화가 나서 말했다.

“아니요. 저는 일반 고등학교에 갈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은지야. 담임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올바르고 모범 학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은지는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모범 학생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은지는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아버지와의 두 번째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은지의 마음을 읽고 학교에 있는 심리상담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아보도록 한 것은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때문에 은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심리상담 선생님과 만나 상담을 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은지는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말대로 고분고분하게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아버지를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리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기숙사가 있는 지방의 고등학교로 내려갈 때 은지는 아버지의 차를 탔다. 아버지는 은지를 다독이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했고 돈이 입금된 카드를 주었다. 하지만 은지는 아버지에게 잘 가시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일종의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은지를 보러 고등학교로 찾아왔다. 그러나 은지는 고등학교를 다닌 삼년 내내 아버지에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은지에게도 대학입시의 계절이 찾아왔고 은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영화과에 진학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로 은지를 찾아온 아버지는 영화과는 유명 영화배우나 감독이 되면 모를까 성공하기 힘든 직업이니 경영학과나 법학과에 지원하기를 원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인 강요였다. 은지는 아버지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니요. 경영학과나 법학과는 절대로 갈 수 없어요. 영화과가 아니면 대학을 가지 않겠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은지에게 말했다.

“너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문제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영화과는 이름만 그럴 듯 하지 실속이 없는 과야. 그러니 경영학과나 법학과에 가라.”

아버지의 강요에 은지도 화가 날 대로 났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언제부터 제 아버지였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저에게 더 이상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마세요. 저도 다 컸으니까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해요.”

제 말이 끝나자 아버지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쨌건 영화과는 안 된다. 아버지가 한발 물러서마. 영화과만 빼고 다른 과면 찬성을 하마.”

“아니요. 저는 죽어도 영화과를 갈 거예요.”

“은지야. 영화과는 안돼!”

“저에게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그리고 은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기숙사로 가서 지금은 덕진 스님이 된 채영의 방으로 갔다. 채영은 방에 혼자 있었다. 은지는 채영에게 말했다.

“채영아. 떠나자!”

체영은 은지의 떠나자는 말에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다니. 어디로?”

“천진암으로 가는 거야.”

“천진암으로?”

“그래. 천진암으로 가서 너도 나도 머리를 깎아 버리자.”

채영은 일반대학을 가지 않고 천진암으로 출가해서 승가대학에 진학해 스님의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은지는 채영의 손을 잡았다.

“지금 천진암으로 가지 않으면 너도 나도 인생이 망가지는 거야. 어서 일어나. 천진암으로 가서 머리를 깎아 버리자.”

채영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좋아. 그 방법 밖에 없겠어.”

결국 채영과 은지는 학교를 나와 천진암이 있는 천장산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천진암에 도착한 것은 저녁 기운이 감돌 무렵이었다. 채영과 은지는 천진암에 계시는 지선 스님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 머리를 깎아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지선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머리를 깎아 주지 않았다. 채영과 은지는 머리를 깎아주지 않으면 절대로 천진암을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지선 스님은 부모님이 동의하지 않으면 머리를 깎아줄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면 강제로 천진암에서 내려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채영과 은지는 어쩔 수 없이 지선 스님에게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일요일 오전에 채영의 부모님과 은지의 아버지가 천진암으로 오셨다. 지선 스님은 채영과 은지를 제쳐두고 채영의 부모님과 은지의 아버지와 방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채영과 저를 방으로 불렀다.

“다 너희들 뜻대로 되었다.”

그리고 웃으시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에 은지는 아버지와 또 채영은 부모님과 함께 천진암을 내려갔다. 그리고 스무 살의 봄이 되자 은지는 대학의 영화과에 입학했고 채영은 천진암에서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서울로 올라온 은지는 아버지가 마련해준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지내며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아버지에 대한 은지의 묵비권은 계속 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은지는 남자혐오증에 시달려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로 몇 년 뒤에 아버지는 눈에 띄게 마르고 얼굴 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은지를 불렀다. 은지는 아버지의 말대로 종합병원을 찾아 아버지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은지와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병색이 짙어 보이는 아버지는 은지가 묻기도 전에 자신의 병명을 말했다. 아버지는 이년 전에 간암 수술을 받았으나 또 재발한 것이었다. 은지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은지야.”

은지는 그때서야 묵비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네.”

“내가 죄를 지은 것이 많아 세상을 일찍 뜨려나 보다.”

“그런 말씀 마세요.”

“미안하다. 은지야.”

아버지의 말에 은지는 마음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네 엄마에게 죄를 짓고 또 너에게도 죄를 짓고......”

깡마른 아버지의 얼굴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은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못되게 군것을 용서하세요.”

“아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은 나지 네가 아니야.”

“그럼 같이 용서하기로 해요.”

은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달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삼 개월 동안 한 남자와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 하면서 은지는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남자 혐오증에 시달리던 은지는 삼십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한 남자를 좋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은지는 한 남자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남자는 없다며 좋은 여자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이 다 끝냈을 때 은지는 날아갈 듯 기뻐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로 만난 한 남자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은지는 한 남자를 놓치기 싫었다. 그래서 은지는 한 남자를 단 둘이서 만났다. 그날 한 남자와 은지는 영화를 보았고 저녁도 같이 먹었고 와인 바에서 와인도 몇 잔 했다. 그리고 은지는 술기운에 발그스레한 얼굴로 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가슴이 뛰었다. 은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남자에게 고백을 했다. 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런데 은지의 고백을 들은 한 남자는 무척 놀라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은지는 뛰던 가슴이 철렁했다. 한 남자는 은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은지는 한 남자와 잔을 부딪치지 않고 혼자서 와인을 마셨다. 그런데 달콤하기만 하던 와인이 쓰디 쓴 독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은지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 한 남자가 은지의 손을 잡았다. 은지는 고개를 들어 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남자는 은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은지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라며 이해를 요청했다. 은지는 한 남자의 말을 잘못들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사랑하는 한 남자가 게이라니. 은지는 사실이냐고 물었다. 한 남자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은지는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둘레길 트래킹을 마치고 은지는 천진암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은지는 몇 배를 할 것인지 기약 없는 절을 올리며 부처님에게 말했다.

‘부처님. 언제쯤이면 한 남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 남자를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처음으로 남자혐오증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한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남자의 행복을 빌고 싶어요.’

은지는 계속해서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