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은둔자

by 경은 posted Feb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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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무취 은둔자












콧잔등에 차가운 물방울이 와 닿았다.30분 전부터 천장의 작은 공간을 비집고 내려오는 조심스러운 빗줄기의 방문은 내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일 뿐이다.나는 왼쪽 눈으로 흘깃 누런 블라인드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새벽의 색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깔아놓은 얇은 이불의 양 옆의 끝을 잡아 몸을 휘감았다.그러나 얼마 안 가 코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기운에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앉아 어느 때의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썩은 물망초가 물 위를 떠다니는 바가지를 집어 물과 물이 만나는 지점을 만들었다.나는 방 한가운데서 맨 구석으로 한 다름에 간 뒤 일정하게 들리는 물들의 교류 소리를 들으며 불을 켰다.작은 단칸방의 아침은 3번의 깜빡임 후에 찾아왔다.







새벽의 공기에 취했는가, 정신이 찌뿌둥하다.붉은 바가지에 차오름과 동시에 넓어지는 물망초의  영역에서 초점을 흐트렸다.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몽롱한 상태는 바가지 끝에 물이 아슬하게 걸터앉아서야 모든 회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빈 페트병에 물을 조금 담아낸다.그리곤 옆에 페트병을 두고 책상에 놓인 낡은 노트북을 가지고 다시 바닥에 엉덩이를 맞대어 앉는다.노트북은 초라한 외관과는 다르게 아직까지는 쓸만하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나는 전원을 눌러서 키고 화면이 암흑에서 환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금방 생기를 찾은 노트북의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서 인터넷에 들어갔다.홈 화면은 '난만'이라는 유명 향수가게의 홈페이지이다.나는익숙하게 홈페이지 안에서 커서를 움직여댔다.그리고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난만'의 공고문에 들어갔다.


"향의 주인을 찾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며칠째 봐온 자극적인 제목은 몇 번이고 나를 흥분시켰다.나는 조금 더 높아진 목소리로 밑의 짧은 글귀를 읽었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고유의 향기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세요."


향수가게다운 멘트다.뻔하면서 매력적인, 마치 향수처럼.나는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옮겨서 공고문 맨 아래에 있는 신청하기를 눌렀다.그러자 몽환적이던 공고문의 배경이 바뀌고 하얀 바탕이 나온다.그 순간 아까까지의 고조된 흥분은 원래의 침착함으로 온 몸의 열기를 부옇게 동결시켰다.첫날 이후 감히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그나마 여유로웠던 지난 5년 동안의 내 인생은 놀랍도록 단조로웠고, 열손가락으로 그 모든 일을 설명 가능했기 때문에 흰 바탕은 내게 말한다.‘니가? 괜찮겠어?’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아니..”


나는 그대로 노트북을 닫았다.그리고 허공에 시선을 돌렸고,  벽면에 흩뿌려진 곰팡이로 눈을 맞췄다.원랜 저 벽지도 하얬으나 재작년 몰아친 장마 덕에 습기가 차서 지금까지 제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생존을 매번 내게 각인시킨다.꾸덕꾸덕한 벽면에서 진득이 물들여가는 저들을 보면 언제나 모든 것이 무력하게 느껴진다.아마 내가 곰팡이를 볼 때의 눈빛과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시작된 병일 것이다.이 병은 악착같이 쫓으며 나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것에 성공했다.한 달에 딱 한번 빼고는.









나는 얼룩진 벽에 어색하게 걸린 달력을 올려다보았다.4월 면의 달력은 1일부터 시작해서 29일까지의 숫자가 차근차근 빨간 색연필로 인한 엑스표로 꾹꾹 눌려있다.언뜻보면 괴기한 느낌마저 드는 달력의 맨 끝자락은 유일하게 짙은 검정색의 숫자가 자신의 공간을 반듯하게 차지하고30을 뽐낸다.오늘로 벌써 밖에 나가본 지 딱 한 달째다.한 달 전의 여파가 상당했는지 요센 잠만 자면 그 날이 꿈에 나온다.


“똑”


아직도 금이 간 천장 사이에서의 명확한 조준은 바구니를 향한다.그리고 매연이 들어서기엔 이른 시간이다.나는 엉덩이를 끌다시피해서 각진 구석의 공간에 밀어 넣었다.그리고 깍지 낀 손 사이에 들어 찬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방안의 습기는 환각제인가 보다.기분이 싱숭생숭한 것이, 그 날의 어지럼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하”


묵직한 한숨을 한 숨 뱉었다.차가운 공기가 털 끝을 건드린다.다닥다닥 올라온 닭살의 느낌을 맹맹한 손의 온도로 쓸어 내렸다.서서히 눈이 감겨오고, 일순간의 서늘한 침묵은 깊은 고요로 바뀌어 수면 위의 잔잔한 일렁임처럼 부드럽게 잠의 나락으로 나를 침닉시킨다.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괜찮을 거야"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를 수십 번 되뇌었다.


"전 괜찮아요."


"그거야 아가씨 생각이고."


엄마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우울증 전문의는 조소하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언제 부터죠?"


"뭘요?"


나는 시답지  않게 되받아쳤다.그러자 남자는 무언갈 끄적이려던 손을 멈추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손 마디마다 하나같이 밉상스레 돌출돼있다.특히나 검지에 끼고 있는 해골 모양 반지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괴짜."


나는 한마디를 던지고 곧장 이 지독히 을씨년스러운 병원 문을 밀고 나갔다.그리고 서둘러 골목 어귀를 찾아 들어갔다.골목마다 나는 특유의 고리타분한 냄새가 진동한다.여기저기 액정이 흠간 휴대폰을 들고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정말 괜찮은 거 같아요, 엄마."


나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정말이다.난 너무 괜찮고, 지금 생활에 꽤나 만족하는 중이다.가끔 들리는 괴소문의 주인공이 나인 걸 알아도 그게 진짜가 아니면 된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은둔형 외톨이란다.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그러면 그들은 사회형 외톨이가 아닌가?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다는 기대는 부담과 함께 날로 늘어갔고, 이내 하나 둘 취직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질투가 뒤섞인 갈급을 가지고 면접장을 드나들었다.그러다 겨우 취직한 회사에서 작은 중소기업의 물류창고 관련 일을 했다.그 뒤부터 였을 것이다.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된 것이.나는 나를 놓았고, 하나 둘 친구들과의 연은 흐지부지 끊어졌다.원래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뭔가를 사서 꾸미고, 바르고 나에 대한 투자를 즐기던 성격이였지만 점점 안 먹고, 안 써서 모으는 돈을 통해 나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했다.그건 나는 일이 바빠 쓸 시간이 없는 것이고,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여자라는 뭐 그런 정도의 자기 위로방식이었던 것이다.아무튼 나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 했고 나 조차도 속으로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 속 사람이라 하며 선을 그었다.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짓은 사회에 대한 철없는 투정이라는 걸 깨달았다.나는 외롭고, 많이 지쳐있었다.그리고 버렸다고 생각한 자신에 대한 희구를 견디기 힘들었다.결국 정확히 9개월 만에 사직서를 썼다.그 뒤로 줄곧 집순이가 되었고, 말이 좋아야 집순이지 사람들에겐 겨우 들어간 회사를 제 발로 걸어 나온 모자란 아가씨 정도였다.밖에서 잘 보지 못하게 되자 나중엔 이상한 아가씨, 은둔형 외톨이니 뭐니 하며 종종 말하기 좋아하는 아줌마들 사이서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그리고 그 입방아는 타지역으로 출장가게 되어 아주 가끔 엄마가 집에 찾아 오는 방식이 유일한 만남의 길이 된지 1년째가 된 엄마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오늘 아침엔 엄마의 강력한 등쌀에 밀려 정신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나온 것이었다.엄마도 딸에게 정신병원을 권유하는 게 맘에 걸리고 미안했는지, 아침에 수백 번도 더 괜찮다고 말해준 것같다.물론 전화상으로도 그랬고.








나는 골목 어귀에서 나왔다.그래도 나온 김에 번화가에 한 번 들려볼 생각이다.


'딸, 요즘에 밖에 얼마나 볼 게 많은 줄 알아?너도 번화가에 좀 나가고 그래'


틈만 나면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20분을 걷자 점점 불량한 뒷골목의 수는 줄어 들었고, 곧게 잘 빠진 거리는 사람들의 끈적거리는 말소리로 장식돼있다.주말 점심이라 그런지 번화가는 복잡하다.여기저기서 떵떵거리는 스피커 볼륨과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귀를 쳤다.나는 양 귀에서 더 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자주 방향을 옮겨 훑어보면서 그냥 무작정 걸었다.가끔 다른 사람과 부딪히려 하면 몸을 움츠리고 곧장 골목이나 그나마 한산한, 미처 사람들이 채우지 못한 거리의 허점을 향해 움직였다.


"딱 딱 딱"


언제부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각 잡힌 선명한 음이 시멘트와 운동화 사이에서 올라왔다.안 봐도 뻔한 익숙한 느낌이다.발 밑엔 침과 얽힌 잿빛의 껌 덩어리가 있으리라.빠른 인파의 급류에 휩쓸릴세라 엉성하게 피해다닌 게 화근인 듯하다.발 빝의 껌딱지는 자꾸만 발걸음을 늘어뜨렸다.엄마의 사주를 받고 온 게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상상의 나래도 펼쳐보았다.어쩌다 신발과 하나가 된 그것은 바닥까지 신경쓰이게 만들었다.그리고 어쩌다 본 바닥엔 끊이지 않는 기막힌 발길질에도 그 모진 발에 엉겨 구원의 손을 내미는 껌들의 형태가 적나라 했다.그들은 정갈한 비명을 쏟아냄과 동시에 딱딱한 발판이 되어갔다. 그리고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으로 딱딱한 발판을 만들어 간다. 그 모습에 괜히 씁쓸하다.








점심시간을 조금 넘자, 멈췄던 줄로 알았던 공기의 흐름이 서서히 흐트러진다.그래도 여전히 거리는 총망하다.그 속의 나는 순식간에 다른 종족과 어울리지 못하는 집시처럼 보인다. 집시의 눈에 비친 봄 거리는 참, 황량하다.거리는 봄기운의 설렘과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5년 전 싱겁게 지나간 내 청춘적 봄은 정서의 잔내가 벚꽃과 개나리 사이에 뒤엉겨 떨어지는 것이다.그러나 이 거리는 머리를 멀끔히 손질한 나무의 그것 뿐이었다.  나는 지금이 봄이라는 것 초자 헷갈려서 검지를 들어 가게 속 달력을 찾아 헤맸다.그 행동은 갑자기 머리를 옥죄는  집적한 꽃향에 끝이 났고, 그제야 손가락을 본연의 모양으로 내렸다.농후한 향이 강타한 봄의 무게에 놀란 신경들은 뜬금없는 모로반사가 일어나, 두 팔 벌려 그 근원지를 향해 몸을 틀게 만들었다.돌아본 그 곳엔 실로 놀라운 양의 향기를 뿜고 있는 생물이 있다.높이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그리고 머리 위의 털은 길기도, 짧기도 했으며, 그것의 색도 다양하다.더 놀라운 건 모든 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그대로가 아니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졌다는 것이다.그들은 몸매가 훤한 원피스나, 딱 붙는 스키니 또는, 흰 와이셔츠에 독특한 넥타이 를 메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 중 대부분이 오른쪽으로 뻗은 줄기엔 루이비통 가방이, 왼쪽으로 뻗은 줄기엔 스타벅스 커피가 걸려있다.이 모습에서 나만 언발란스(Unbalance)를 느끼고 있는 것인가? 킁킁, 그래도 냄새는 참 좋다.근데 냄새가 다 비슷하다.순간, 주변 어딘가의 봄바람을 타고 라벤더 향이 코에 들어와앉는다.라벤더가 본래 봄과 동행친구였던가. 그리고 그 생각은 현란한 춤사위에 의해 끊어진다.


"어머, 언니 한번 들어가서 시향 좀 해보고 가요. 이번에 새로 나온 향수 냄새 되게 좋아요"


여자는 짧아서 배꼽이 훤히 들어난 옷을 입고 간혹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흥겨운 노래에 맞춰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배꼽에 박힌 피어싱이 반짝인다.여자에게선 짙은 장미향이 난다.유혹적인 향과 그녀의 몸 짓은 상당히 모순돼 보인다.장미향의 그녀는 나를 훑어보더니 가까운 거리에서 똑같은 복장을 하고 팸플릿을 나눠주는 여자에게 다가가 몇 장 받아들고 총총거리며 되돌아왔다. 그리고 내게 그것을 건넨다.나는 장미향의 그녀 손에서 너풀대는 팸플릿을 받아들었다.바로 앞에 위치한 향수가게의 팸플릿이었다. 팸플릿은 할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을 바탕으로 고급스러운 글귀가 찍혀있었는데 그것에 사연이 있는지 사진 옆에 16px 크기로 조금 긴 글이 나열돼있다.장미향의 그녀는 손에서 팸플릿이 사라지자 다시금 왼손에 팸플릿을 한 장 쥐고는 내게서 멀어진다. 나도 그녀에게서 멀어진다.나는 30분 동안 길을 걸으면서 팸플릿을 3장이나 더 받았고, 그동안 샤넬이나 루이비통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여자들을 수십명 마주쳤다.대부분 그사람들의 눈은 내 사지육체를 찬찬히 살펴지나간다.그들이 그럴만한 것이 내  운동복 바지는 무릎이 다 헤지고, 짙은 감색이 연한 물색으로 둔갑된 지 오래였기에 이해도 된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달콤한 채취를 사방으로 뽐낸다.그 달달한 내음은 코가 제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까지 콧속을 누빈다.이제는 코가 얼얼하고 머리가 아플 정도다. 30분 동안 내가 본 거리를 짧은 단어들로 표현한다면 루이비통, 샤넬, 상표, 로고, 킁킁이다.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무색의 액체가 든 공병을 꺼냈고, 수시로 자신에게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린다.그러다 성에 차지 않는 경우엔 뚜껑을 열고 옅은 소리를 내며, 덕지덕지 향으로 치장한다.칙칙, 그 소리는 여러번 공중에 퍼졌다.사실, 그 작은 소리가 들릴 만큼 거리는 한가하지 않았지만 어쩌다가 코를 막는 냄새가 나면 동시에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오랜만의 나들이는 어지럽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움의 연속이다.5년 전 사회생활을 포기할 것을 선언한 뒤로 처음 겪는 난해한 감정이 한 형상으로 그려져 눈 앞에 흔들린다.


"아, 머리 아파"


번화가에 와서 나온 첫말이었다.그리고 두 번째 말은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거 였다.택시에서는 아까 그 거리에 눈과 귀를 두고 온 냥, 여자들의 꽃향과 비누향이 혼합된 냄새와 남자들의 시원한 시트러스향이 번갈아 코를 삼켰고, 향이 바뀔 때마다 칙칙 거리는 소리도 수차레 귀를 파고든다.나도 몸에 코를 박고 킁킁 거렸지만, 냄새가 없다.어쩌면 내가 사회속에 섞이지 못하는 이유가 연약한 살냄새를 풍기기 때문은 아닐까.왜 나는 짙은 여운을 남기지 못하나.











"문자 왔숑.문자 왔숑"


다리 사이에 묻은 얼굴을 들고 휴대폰을 집었다.쪼그려서 잔 덕에 척추를 세우자 군데군데서 아우성판이 벌어진다.엄마다.부재중만 4통이나 와있었다.'딸, 아직도 자는 거야? 엄마랑 약속한 건 안 잊었지? 얼른 나갔다와.화이팅'문자 내용을 보자 한숨이 나온다.시간은 벌써 점심을 훌쩍 넘겨 3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다.자는 동안 비는 오랫동안 천장사이로 내렸는지  바가지는 또 한 번 물을 꽉 채우고  있었고, 그 위를 휘젖던 물망초는 바가지에서 넘친 빗물과 함께 바닥을 장식한다.나는 알겠어 하고 답장을 하고 화장실로 들어간다.머리를 감은지 일주일 된 머리는 덥수룩하게 까치집을 짓고있었고, 얼굴은 추하게 부어있다.당연히 무릎이 불거진 운동복의 모양새는 한 달 전처럼 여전하고 말이다.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뒤, 머리를 감았다.그리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바닥에 물을 쭉쭉 짰다.나는 수건을 한 장 꺼내 머리를 댓 번 털고 목에다가 걸었다.그 다음 냉장고에 가득한 엄마표 밑반찬 중에서 봄동겉절이와 비름나물을 꺼내서 늦은 끼니를 해결한다.엄마는 매달 다 먹지도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바쁜 와중에 꼬박꼬박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신다.사람사는 집은 직접만든 음식이 냉장고에 한가득해야 진짜 사는 집인거다.잘 좀 챙겨먹어라.하는 포스트잇도 잊지않고 반찬통마다 기간이나 보관법까지 꼼꼼하게 적어다 붙여서 보내주신다.분명 엄마 친구들은 그런 엄말 보면서 쯧쯧 하고 혀를 차고 속으로 옴팡지게 나를 다 커서 허리 굽은 엄마 등꼴빼먹는 년이라 하고 있을 거다.그래도 사실 나는 할 말이 없다.아빠없어 어디가서 기 죽진 않을까, 놀림받진 않을까,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가끔씩 엄마가 집에 찾아오면 또 손에 나물이며, 장조림이며 이것저것 3명이서 한 달치 먹을 만큼 넉넉히 밑반찬을 가져오신다.그럼 난 아이고.엄마 이리줘요.뭐가 이렇게 많아, 나 아직 엄마가 준 거 다 먹지도 못 했는데.자꾸 이런거 가져오지마.엄마 집에도 한 번 안 가는 못난 딸래미 뭐 예쁘다고.이러면 그런소리 말라며 내 딸래미가 뭐가 안 예뻐? 하고 오히려 역정이다.그러면 못된 나는 그렇게 미안한 마음을 합리화시킨다.




나는 아직 많이 남은 봄동겉절이와 비름나물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블라인드를 올렸다.그리고 3주전에 인터넷으로 주문시킨 노란색 원피스를 꺼내든다.바람 한번 훅 불면 거꾸로 뒤집어 질 것처럼 손에 잡힌 면이 부드럽게 흩날린다.뻑뻑한 운동복에서 원피스를 입으려니 기분이 이상하다.그래도 오늘은 나를 위해서도, 손 습진을 달고사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꼭 입고 싶다.고작 동네 한 바퀴 도는 거라지만 이건 엄마와의 약속이니까.무엇보다 바뀌어야 숨이 트일 것 같다.5년 만의 외출을 했던 날 집에 도착해서야 휴대폰을 켜고 엄마에게 전화로 그날을 이야기 했었다.'그래.우리 딸 고생했네.그래도 우리 한 달에 한번은 산책이라도 하기로 하자.이건 엄마랑 약속이야.사랑해.화이팅'그때 엄마는 나를 질책하지도 왜 노력도 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그냥 잘하자, 행복하자, 화이팅, 사랑해.그뿐이다. 매번 주는 이 위로와 사랑이 내 노력에 비하면 너무 받기 버겁다.나는 한 달 전 가장 처음으로 받은 향수가게 팸플릿을 곱게 접어 원피스 주머니에 넣었다.다른 팸플릿들은 다 버리고, 그 날 집에 와서 읽어 본 팸플릿은 '난만'의 팸플릿 뿐이었다.그냥 단순히 표지의 할아버지에 사연이 있을 것같았고 사회 약자라는 데서 이상한 동질감이 스물스물 올라왔기 때문이다.역시나 그 16px크기의 글자들은 할아버지의 실화였다.일단, 그 할아버지는 평범한 분이 아니셨다.그 분은 유명 향수가게 난만을 만들어낸 장본인의 할아버지이고, 난만이라는 회사를 만드는 데 가장 기여한 분이기도 하다고 쓰여있었다.즉, 할아버지와 손자인 자신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시점으로 이야기한 것이다.나는 처음으로 연애소설을 접한 소녀처럼 가슴 설레며 그것들을 읽었다.어린 손자가 냄새때문에 다가오지 않는 기분을 아는가? 하고 물어 오면 홀린 듯 아뇨 했다.글자도 모르는, 걷기도 힘든 노친네가 향수가게에 혼자 가서 젊은 것들의 혀 차는 소리를  들어가며 손자가 좋아하는 바닐라 향을 뒤집어 썼을 때, 그건 젊을 적 할망구를 꼬셔보겠다고 대신 뾰족구두를 신고 시내를 활보했을 때보다 더 창피했다 하면 내가 번화가에 나갔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밟혀지던 껌딱지나, 어울리지 못하는 집시가 된 것같은 절망감이였겠거니 어렴풋이 짐작했다.끝끝내 찾아 낸 손자를 위한 할아버지의 향기에 대한 언급은 자세하지 않았다.어쨋든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를 안아주며, 그들은 가장 사랑스러운 향을 시향했다는 해피엔딩이라는 것은 안다.그 작은 이야기들은 일주일 동안 내 생활의 원동력이라 해도 무방했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향기가 뭘까 하루 종일궁금증에 끙끙 앓았다.어쩌면 오늘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나가는 건지도 모른다.그래, 나는 오늘 하루만 이 할아버지가 되어 밖을 나가보기로 한 것이다.나는 운동복을 훌렁 벗어 던지고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다.창문으로 흘러온 기분 좋은 바람이 치맛자락의 보폭을 확산시켰다가 금세 원래의 상태로 만들었다.



3층이라 내려가야 할 계단 수가 꽤 된다.오늘은 팸플릿에 나오는 것처럼 향기를 찾으러 첫 발을 내딛는 할아버지처럼 긴장하며 층마다 하나하나 떠듬거리며 밟아 내려간다.건물을 나오자 넓은 바람이 몸을 휘감아 안아준다.그것이 꼭 어서와, 잘했어 하는 것같다.나는 눈을 감고 그것을 느낀다.그리고 바람이 잠잠하게 잦아들어서야 눈을 뜨고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생각보다 쉽다.우리 동네를 한 바퀴 돌 동안 사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눈을 감고 향을 찾아 코를 킁킁거릴 뿐이다.오늘만은 내가 가장 봄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닐까라는 여유도 부릴만큼 나는 지금 집시도, 벽지의 곰팡이도, 거뭇한 껌딱지도 아니다.방안에서 블라인드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게 오늘 하늘은 잠잠한 풀냄새와 조그만 춘화의 그것들이 한데 뒤엉킨 내음과 환상의 조화를 이루어 더욱 깊고 파랗다.




"아이고! 302호 아가씨 여기있었네?"

경비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가워하더니 아참, 내 정신 좀 봐.여기.이거 아가씨 댁에 온 택밴데 아가씨가 집에 없다고 나한테 맡기고 갔어.그런데 무슨 좋은 일 있나? 왠일이야.이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넨다.나는 침묵을 유지하며 웃어보였고 경비 아저씨는 짧게 형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흠,흠 하는 탁한 헛기침과 함께 뒷짐을 지고 사라진다.

"어?"

나는 너무 놀라 순간 주저 앉을 뻔 했다.상자는 난만에서 보낸 것이었고, 받는 이에는 분명 김 란화라고 쓰여있다.혹시나 주소도 살펴보았지만 분명 우리집이 맞다.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진 듯이, 그렇게 오분가량 서있었다. 아마, 노란색 원피스만 봄바람에 나부끼지 않았더라면 석고상으로 오해받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박스를 손으로 가볍게 쓸고 박스를 둘러싸고 있는 분홍색 리본을 풀어서 상자를 열었다.난만의 로고가 박힌 카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향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며칠째 봐온 자극적인 제목은 조금 바뀌어 나를 더 큰 흥분의 강으로 미끄러지듯 빠르게 결을 따라 흘려보내다가 내처 격정적인 감격의 구렁텅이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나는 조금 더 높아진 목소리로 밑의 짧은 글귀를 읽었다.

"당신이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고유의 향기에 대한 사연은 잘 들었습니다."

어리벙벙했다.나는 분명 신청한 적이 없다.사연을 들었다니?

카드를 들어 무심코 살펴 본 뒷면엔 사진 한 장이 칼라로 인쇄돼있었다.그건 공고문에서 신청하기를 누르면 나오는 화면이어서 내겐 익숙한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곳엔 사연이 쓰여있다.그 이야기는 정말 내 이야기다.사회의 쓴 맛을 보았던 나, 집에 꽁꽁 숨어서 지내는 나, 그리고 몇 주 전 5년만에 바깥에 나간 이야기까지. 내게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누굴까하는 생각이 들때 쯤 벨소리가 울린다.

"Lucky i'm in love wiht my best friend"

엄마다.전화를 받으려 하자 끊어진다.순간, 기분좋은 엄마향이 코를 덮친다.뒤를 돌았을 땐 엄마가 서있다.나는 이제 알 것같다.할아버지와 손자가 찾은 향은 분명 인조적인 냄새는 아니였을 것이라는 걸.엄마는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더니 말한다.향기를 가진 걸 축하해, 우리 딸.나는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말한다.사실은 그동안 엄마가 열심히 빚어준 연약한 살냄새야 말로 하나뿐인 향기라고.너무 감사하고, 사랑해요.우리 화이팅하자 엄마.












이름:김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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