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판다가 보고 싶어요.”
그녀의 까무잡잡한 손등이 구부러진다. 이내 그것에 붙은 손가락이 사진 한 장을 들어 올린다. 사진을 응시하다가 볼펜을 굴리는 내게 그녀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건넸다. 나는 받아든 꼬깃꼬깃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색이 바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3명의 소녀─쯤으로 보인다─가 커다란 솜사탕 하나씩을 들고 웃으며 서 있다. 내 시선은, 유난히 작은 체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녀에게로 가 고정이 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입술을 앙다문 그녀를 쳐다보았다. 닮은 걸 보니 어릴 적 그녀 같다. 이번엔 내가 말을 이었다.
“흑룡강 성…… 그곳엔 판다가 많은가 봐요?”
“아니요.”
“그런데 당신이 조금 전에 판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요. 여기…….”
그녀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사진 속의 두 지점을 손가락질하며 천천히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좀 더 숙여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3명의 소녀 옆에 세워진 깃발 형태의 하얀색 배너가 보이고, 바탕색과 대조되는 붉은색으로 'PANDA PARK'라고 페인팅 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소녀들만 보일 만큼 별것 아닌 조형물이었다. 그리고 그 글귀 밑에는'四川'이라는 글자가 있다. 중국의 행정 도시 중에 사천 성이 있다고 중화권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하나는 알겠는데, 나머지 하나는 무엇을 가리킨 거예요?”
“여기, 부스.”
“응, 부스?”
나는 역시 시야가 좁다. 사진의 오른쪽에 이렇게나 큼지막하게 찍힌 은색 공중전화 부스도 못 보다니. 이 부스는 좀 특이하다. 철제 구조물 위에 사람 상체 위로만 밖을 볼 수 있는 유리벽이 붙어 있는데, 그 색이 검정이다. 그런데, 아주 어둡지 않고 주변이 반사돼서 비치…… 어, 누가 카메라를?
“이 사람이 이 세 명을 찍고 있네, 그렇죠?”
“아버지예요.”
“그렇군요.”
조선족이 의뢰인으로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에 전화로 문의해올 땐 억양도 세고, 조선족이라는 말에 무조건 상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막연한 편견, 그것이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나는 10평 남짓, 간판 없는 사무실─이라기에도 창피한─을 가진 불법업자였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홍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이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는 가난한 사장이다. 그녀도 아마 길바닥에 흩뿌려진 파란색의 내 명함을 줍고서 전화를 하고, 또 찾아왔으리라. 방세가 밀린 것도 있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정해놓은 의뢰비가 그렇게까지 고가는 아니었기에 지금은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의뢰는 닥치는 대로 받아야 했다. 단, 살인·방화·납치 같은 건 빼고 말이다. 그나저나 이 여자의 의뢰 내용이 뭐지?
“그쪽은, 그러니까 이름이…….”
표 그림과 각 항목이 적힌 하얀색 인쇄용지를 식탁─원룸 겸용 사무실이라 접대용 테이블이 없다─에 올려놓고 '이름'이란 항목에 볼펜으로 적으려고 하니 여태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서 다시 받아든 사진을 수수한 검정 중형 가방 안에 조심스레 넣고는 입을 연다.
“순징메이예요.”
“징메요?”
“아뇨, 징메이.”
“아, 미안해요. 징메이, 특이한 이름이군요.”
말해놓고도 우습다. 당연하지 않나, 그녀는 조선족이니까. 한자음으로는 손경매(孫京梅)라고 재차 알려주었지만 나는 '징메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김한수인 내가 미국에 갔다고 '한수 킴'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습관처럼 담배 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빙그르르’돌려 필터 부분을 입술로 가져갔다. 필터의 상당수를 앞니로 잘근 씹어 끊어내고는 그것을 재떨이에‘툭’하고 뱉었다. 난 담배를 독하게 피운다.
“한 대 피워도 되죠?”
“아, 네.”
형식적인 물음이다. 질문과 동시에 나는 몸을 일으켜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중앙을 가로질러 식탁과 반대편에 나 있는 낡고 오래된 투명 여닫이 창문을‘드르륵’하고 열어젖혔다. 겨울, 그 특유의 한기가 담배 개비가 뿜는 연기를 앗아간다. 다시 식탁 의자로 돌아와 앉아 볼펜을 손에 쥐었다.
“판다가 보고 싶다는 게 의뢰하는 내용인가요?”
“반반이에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징메이 씨.”
우리나라에도 판다가 있던가? 아, 있다. 놀이공원 내의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다고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난다. 판다가 보고 싶다면 그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의뢰 내용이 반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더 있다는 건데……. 내가 뉴스에서 보았던 판다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그녀는 새까만 단발머리를 위로 한번 크게 쓸어 올린 뒤 왼쪽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쥐어 귀 뒤로 넘겨 고정한다. 그리고 크고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골랐다. 눈매가 더욱 시원스레 보일 만큼 커졌지만, 눈동자는 오히려 위축되듯‘파르르’떨리는 게 앞에 있는 내게도 확연히 보인다. 조금 튼 입술에 마른 침을 두어 번 묻히고 나서 그녀가 운을 뗀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아, 꼭 찾아야 한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 사람, 도통 연락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어요.”
치정에 얽힌 사연, 복수? 이것과 판다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그 찾고 싶은 사람이 혹 중국이고 중국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의뢰는 그 자체가 황당하다. 난 중국에 가본 적도 없고, 그 나라가 구멍가게는 아니질 않나. 인쇄용지 비고 사항에 그녀가 하는 말을 빠트림 없이 적고 있던 내 손이 멈추었다.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볼이 발그레 해졌다거나 양손을 움켜쥐는 등의 행동은 하고 있지 않다. 눈빛은 떨리고 있으나 그것은 한때 한 남자를 사랑한 그녀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헷갈려서 많은 궁금증을 억누르고 이렇게 물었다.
“그 사람이 판다입니까?”
“네? 아……니요, 후후.”
그녀가 내 사무실에 오고 나서 반나절이 지났다. 처음 보는 미소다. 아니, 실소지 아마. 사무실이 주택단지들 틈에 끼어 있기 때문에 한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형광등을 켰다 하더라도 온전히 밝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둘 사이의 분위기가 오래도록 침울해 있어서 내심 나는 불편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물을 겸 반 농담을 한 것이다. 한 개비를 다 피우고 나자 또 하나가 피고 싶어졌지만, 난 생각을 고쳐먹고 담배 갑을 저만 치로 밀었다. 다시 볼펜을 고쳐 쥐고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제 듣고 쓸 겁니다, 말해주세요. 보고 싶은 판다, 사진 속의 아버지, 찾으려는 그 사람에 대해서 모두 말이에요.”
배가‘꼬르륵’하고 신호를 보낸다. 어제 전화로 2시쯤 온다던 그녀였다. 그런데 정오에 오는 바람에 막 일어난 나는 공복이었다. 머리가 묵직한 게 회전이 잘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열어 놓았던 창문을 닫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닫고서 냉장고 안을 뒤적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공복이라 점심을 좀 먹어야겠어요. 같이 먹어요, 안 먹었죠?”
“네, 뭐 그렇긴 하지만 저는 저…….”
“어디 보자, 훔.”
쌀통을 뒤적여봤자 소용없다. 짧은 탄식이 절로 나온다. 거추장스러운 치레는 싫어해도 밥은 꼭 직접 해먹곤 하는데 하필 오늘, 쌀통의 바닥이 보인다. 멀뚱멀뚱 앉아 있는 그녀한테 마실 거라도 줘야지. 주방 집기를 넣어둔 서랍을 열어보니 핫 초콜릿 분말 티백 상자가 들어 있다.
“그렇지, 이거다.”
우선 워터 포트에 물을 넣고 플러그를 꽂아 전원을 켰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손님 대접이 소홀했다. 뭐 돈이 우선인 나한테는 좋은 손님일 건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찬장에서 새 컵을 찾으려니 없어 급한대로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텀블러 두 개를 씻었다. 언제부터 여기 들어 있었는지 수세미로 문질러도 찌든 때가 쉬이 지지 않는다. 겨우 물기까지 말끔히 닦아내고 분말을 텀블러 안에 탈탈 털어 넣었다. 커피나 차를 섞을 때 티스푼 따윈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게 없어 티백 봉지로 휘휘 젓고는 텀블러를 그녀에게 주었다.
“뭘 드실지 몰라 핫 초콜릿 준비했어요, 괜찮죠?”
“감사합니다.”
나는 평소대로 내용물에 얼음을 넣었다. 내가 내려놓은 텀블러의 '탁' 소리가 유난히 크다. 입안에 남은 핫 초콜릿의 잔향을 재차 음미한 후 식탁 위에서 놀고 있는 볼펜을 다시 잡았다. 마주 앉은 그녀는 제 앞에 놓인 텀블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무색할 만큼 반듯한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뭐, 그건 됐고.
“자세한 의뢰 내용을 듣고 싶네요, 메모하겠습니다.”
“네, 우선 저는 아까 말한 것처럼 흑룡강 성에서 이곳 한국에 5년 전에 왔어요.”
녹음기라도 사든지 해야지 원, 받아 적기도 귀찮다니까. 돈이 생기면 살 것 중에 포함해야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되고 있다. 다행스러운 건 그녀가 조선족이라 알아듣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제 비자는 비전문 취업용 사증으로 e-9이라고 해요.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그 체류 기간이 3년이고요. 또 그것을 연장할 시에는 1년 10개월의 체류 기간이 더해져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라면 아는 거지, 정작 한국인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그렇겠죠, 저도 e-9이라는 용어는 처음 듣습니다.”
그녀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해야만 메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다행히 메모는 비교적 수월하다.
“그런데 제가 연장한 기간까지 다 쓴 상태예요.”
“그럼, 불법체류자입니까?”
“네…….”
“음…… 그래서요?”
그녀는 이제야 목이 타는지 다 식어 빠진 핫 초콜릿을 반이나 들이켰다. 입술에 묻은 액체를 수줍게 혀로‘쓱’하고 닦은 뒤 말을 잇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받아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최근까지도 식당에서 새벽일을 했는데 퇴근 후에 집에 와보니 도둑이 든 거예요. 그런데 차마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불법 체류한 게 들통 날까 봐서군요.”
“맞아요. 한국에 올 때 참 무척이나 어렵게 왔거든요. 다시 귀국할 수는 없었어요.”
“그 비자, 사증이라는 거 말이에요. 연장 신청하고 나면 재신청이 안 되나요?”
“네. 3년짜리를 재신청하면 1년 10개월만 연장되고, 다시 체류하려면 자국으로 돌아가 6개월 동안 지내고 와야 해요.”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녀가 남은 핫 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텀블러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테이블 위에 텀블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깊은 한숨을 쉬는 그녀의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인다.
“아, 그게요. 오가는 비행기 값도 만만치가 않을뿐더러 그 비자의 재승인이 상당히 힘들어요. 워낙 대기자가 많다 보니 또 언제 한국에 들어올지 기약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불법으로……?”
“네, 어쩔 수가…….”
“그럼, 그 도둑을 찾아달라는 게 의뢰인가요?”
“아니요.”
“그럼?”
“도둑이 뒤지고 난장판을 벌인 방을 청소하다가 휴대전화기 고리를 발견했어요. 그 휴대 전화기용 장식 고리에 사진이 새겨진 펜던트가 달려 있었는데, 남녀가 웃고 있는 사진이었어요.”
“아, 그럼 그 남자가 범인일 수도 있겠네요.”
“확신이 들었죠.”
이번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담배 개비를 갑에서 꺼냈다. 그리고 아까처럼 필터를 끊어낸 뒤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배가 고파 집중이 안 된다고 할까,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니코틴을 찾는 습성이랄까. 그녀는 별 말없이 말을 잇는다.
“집에 두었던 통장이랑 도장, 카드가 없어졌지만 제가 빨리 대처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는 몰랐거든요, 전화 한 통이면 늦은 새벽에도 분실신고가 된다는 것을요.”
“저런…….”
안타까웠던 나머지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뒤늦게 분실신고를 해봤자, 어떤 식으로든 그 도둑이 통장에 있는 돈을 다 빼버린 후라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식당에 출근하고 한국인 직원들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안 저는 부랴부랴 은행으로 갔지만…… 이미 모든 돈이 출금된 뒤였어요. 방세로 두었던 따로 내어 두었던 돈만 남고 다 잃어버렸죠, 뭐…….”
“그리고 나서요.”
“네, 그래서 주변 분들께 물어보니 심부름센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흥신소라고 하는…… 그곳을 찾아가서 의뢰했죠, 남자의 사진이 있는 펜던트를 보여주면서 그 사람을 찾아달라고 말이죠.”
“흥신소요?”
여기 오기 전에 이미 흥신소를 찾아갔었구나. 근데, 거기서는 그 도둑을 못 찾았나 보다. 더 들어봐야겠다.
“네, 거기서는 터무니없이 많은 의뢰비를 요구했어요. 지금 이곳보다 2배 이상…….”
“미친 놈들.”
욕할 건 없다. 부르는 게 값이기에…….
“저한테는 방세밖에 없었어요. 돈을 찾게 되면 남은 의뢰비를 마저 충당하겠다고 말했더니 관계를 요구하더라고요.”
“젠장……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
“하아…….”
무섭게 어두워진 그녀의 낯빛이 대답을 대신한다. 개새끼들, 버러지 같은 놈들…… 물고 있던 담배에 내 격한 감정이 옮았는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 몸체가 불이 붙은 채로‘툭’하고 끊어졌다. 식탁에 고스란히 떨어진 재를 치울 만큼 나라는 놈은 냉정하지 않다.
“그깟 돈 다시 벌면 되잖아요! 그 돈이 얼마나 되길래, 뭐 대단하기에 그렇게까지…….”
“돈…….”
윽박지르듯 말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그녀는 나를 볼 수 있다. 겁을 먹었는지 멈칫하다가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고는 어렵게 다시 말을 이었다.
“돈 때문이 아니에요.”
“……?”
“내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 때문이에요!”
그녀도 격앙된 어투로 바뀌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 때문에 그런 좋지 않은 선택을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돈이 걸려 있고, 의뢰 내용을 다 들어야 할 의무도 있어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을 한번 삼켰다. 다시 내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오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옆의 의자에 있던 가방에서 아까와는 다른 크기의 사진을 한 장 꺼냈다.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내 쪽으로 주욱 내밀었다. 그리고는 변명처럼 말을 한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에요.”
건네진 사진을 다시 보기 좋게 돌린 뒤 유심히 보았다. 세 명의 소녀가 있던 사진보다 가로 세로의 길이가 더 긴 사진이다. 원목의 탁자 위에 원통형 유리관이 검정 받침에 붙어 있다. 그 받침의 재질은 알 수 없지만, 유리관의 지름보다는 크고 굵어서 튼튼해 보인다. 신기한 것은 유리관 외벽에는 두 눈에 멍이 든 판다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는 하얀 무언가가 흩날리는 듯 수많은 점을 이루고 있었는데 내겐 그것이 눈으로 보였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이렇게 아름답다 느끼는데, 실제로 보았다면 더 그랬을 것 같다. 그 눈이 닿는 바닥엔 하얀 성 두 채가 있고, 그 옆에는 그 성보다 두 배는 큰 하얀색의 기다란 무엇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다란 것은 뭐죠?”
“판다의 터럭이에요.”
“네?”
생각지도 못했는데, 판다의 터럭이 들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마도 터럭 다발을 뭉쳐서 만들었을 듯싶다. 그녀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아홉 살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셨어요. 매년 비슷한 시기에 항상 작은아버지께서 우리 세 자매를 아버지가 계시는 사천 성으로 데려다 주곤 하셨죠. 부모님께서 이혼하신 이유는, 아버지가 판다 사육사였기 때문이에요.”
“그게 왜요?”
“판다는 내가 사는 흑룡강 성에서는 볼 수 없어요. 너무 추워 사육할 수도 없고, 서식지로서 적합하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지치신 거죠. 흑룡강 성에서 사천 성까지는 그리 간단한 거리가 아니거든요.”
본 적이 있다. 나는 워낙 홍콩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고, 성룡 마니아이기 때문에 대충 중국의 지리를 기억하고 있다. 흑룡강 성은 북동단으로 러시아와 가장 인접해 있을 만큼 변방이고, 사천 성은 남서부에 있기 때문에 굳이 거리를 재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럼, 처음 보았던 그 사진이 그런 연유로 찍은 사진이군요?”
“네, 맞아요. 그때 제 나이가 열네 살이었어요. 그날, 아버지가 저한테 그 유리관을 주셨어요. 제가 태어나던 해에 태어난 판다를 자연으로 방생한다면서 그 터럭을 그것에 넣어 저한테 준 거예요.”
“소중…… 하겠네요.”
“네…… 흑흑…….”
그녀가 운다. 갑작스레 흐르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입술에 닿아 잠시 주춤하다가 턱과 목을 타고 떨어진다. 방울질 만큼 우는 그녀를 나는 기다렸다. 지금은 그래야 했다. 우는 것을 멈추게 도와주려 내 것과 그녀의 텀블러를 들고 싱크대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휴지가 담긴 갑을 들고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가 고개를 꾸벅이며 휴지를 두어 장 뽑아 눈물을 훔친다.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재혼하셨지만, 아버지는 혼자셨어요. 돌봐드릴 사람이 곁에 없었어요, 두 언니는 가정이 있고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제가 목표했던 것보다는 아주 적은 액수지만 해약을 해서라도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 돈을 도둑맞은 거군요.”
“네…… 그것 때문에 비행기 삯조차 없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그 흥신소 사람을 찾으려는 진짜 이유는요……. 부족한 의뢰비를 몸과 귀중품으로 받아갔기 때문이에요.”
“아, 그럼 그 유리관을?”
“다른 여러 가지도 포함되어 있지만,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 유리관만 있으면 돼요, 저한테는…….”
그래서 그녀는 판다가 보고 싶다고 했었던 거다. 사천 성 공원 내의 판다든,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나 아버지의 손에 의해 자연에 방목된 판다든, 유리관 속의 판다든 그녀는 그렇게나 판다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흥신소 사람에게 그렇게 당하고서도 같은 흥신소를 하는 나를 아니, 그런 흥신소 자체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그들과 똑같은 놈들한테 똑같은 짓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런 것을 각오하고라도 그 유리관을 꼭 찾아야만 하는 걸까,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개를 가로젓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대답하려 한다.
“그쪽 명함에 적힌 문구 때문이에요.”
“문구요, 어떤?”
“의뢰를 해결하지 못하면 수수료는 받지 않고, 의뢰비를 후지급으로도 받습니다.”
“아…….”
그랬다. 의뢰를 받고 그 일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하더라도 난 그에 따른 수고비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후지급도 받긴 받는 거니까 별생각 없이 명함에 판 문구였다. 단지, 그것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구나. 아니다,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는 더없이 좋은 조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집을 나간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게 아니질 않나. 공권력도 없는 민간인인데다가 어깨들과 붙어 육박전을 치를 만한 주먹도 없고, 결과적으로 놀고먹으면서 시장을 봐주거나 아픈 애완견 병원 데려다 주는 일만 대신해주던 내가 맡기에는 버거운 의뢰다.
“유리관만…… 유리관만 찾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돈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마냥 약하디약한 그녀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이번엔 더욱 자세히 보았다. 단호한 각오에 가득 찬 슬픈 눈망울에 가슴이 동요한다. 젠장! 김한수,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지셨나 그래. 이놈의 주둥이가 근거 없는 호언장담을 내뱉고 만다.
“그럼 안 되죠.”
“네?”
“내 의뢰비를 지급해야 하니까요.”
“그…… 그렇죠.”
그녀가 고개를 떨군다. 나 역시 흥신소 사람임을 깨닫는 듯 보인다. 체념하는 작은 어깨는 그녀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나는 속으로 내게 욕을 퍼부었다. 이래서 목돈을 만져보기는커녕, 방세나 나올는지 모르겠다. 젠장!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와 알아볼 게 있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네?”
“9시까지 와요, 늦으면 이 개같은 생각 고쳐먹을 테니까.”
그녀의 얼굴이 밝아진다. 까무잡잡한 피부라 그것에 가려져 몰랐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덩달아 웃는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까? 그녀가 울먹임과 반색하는 두 가지의 목소리를 내며 내게 크게 외친다.
“감사드립니다.”
9시에 오랬더니 1시간이나 일찍 와놓고는 내 단잠을 깨워 버렸다. 아무리 빈둥대는 놈이라도 제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힘들다고. 돈만 생겨봐 두드려도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문이 달린 집으로 이사를 하고 말 테다. 까치 둥치를 튼 머리를 감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온 사이 방바닥에 뭔가 변화가 생겨 있다. 훑어보니 현관문 앞에 빈 소주병 2개가 나란히 서 있고 밤새 펼쳐져 있던 상은 다리를 곱게 접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상 위에 먹다 남은 국물을 담은 냄비가 있었는데 그것도 어느 순간 깨끗이 세척된 상태로 싱크대 위 거치대에 올라가 있다. 그녀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다 하네. 그런다고 일찍 깨운 죄를 사해 줄 내가 아니다. 목이라도 축이라며 텀블러에 봉지 커피를 붓고는 그것을 미니 주전자와 함께 그녀에게 건넸다.
“자요, 이거. 머리 좀 말릴게요.”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들을 건네받는다. 축축한 머리로 물까지 끓여주기에는 이 방이 좀 춥다. 방세도 밀렸는데 난방비는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탁상 거울 안이 비좁지만 내 얼굴을 넣기에는 그냥저냥 괜찮다.‘윙, 윙’드라이 기 도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율동적이다. 그 소리가 익숙한 나는 흥얼거렸지만, 싱크대로 가 물을 끓이고 있는 그녀는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닌가 보다. 등지고 앉아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 너머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2단에서 1단으로 바람의 세기를 줄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에 드라이 기 안 써요?”
“네?”
물음이 뜬금없는지 놀란 토끼 눈을 뜨며 뒤를 돌아보는 그녀다.
“귀는 왜 막아요?”
“아, 저는 드라이 기 안 써서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미안할 거까지야.”
요즘 세상에 드라이 기 안 쓰는 사람도 있나 싶다. 그건 그렇고, 젠장. 왁스 통도 휑하니 비었고 에센스도 바닥을 보인다. 통의 구멍 부분을 손바닥에 여러 번 쳐대자 겨우 바를 수 있는 양이 모였다. 머리 손질을 마무리하고 그녀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지금 보니 그녀, 옷이 무척 얇다. 분홍색 니트에 주름지고 무릎까지 내려와 나풀대는 하얀 치마가 그녀가 몸에 걸친 전부였다. 그 흔한 클러치 백도 없다. 별걱정을 다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휴대 전화기가 울린다, 동석 형님이다.
“아, 형님. 준비 다 되셨어요? 아, 금방 찾아뵐게요.”
나는 차가 없다. 길고 뱅뱅 꼬인 골목을 벗어나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대로변으로 나온 나는 내 걸음 속도를 못 맞추고 뒤처지는 그녀를 채근하며 한참을 걸어갔다.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묻는다.
“저기, 어디 가고 있어요?”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니까 머리카락이 무척 검다. 위를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 두 개가 껌뻑거린다. 이 여자, 묘한 매력이 있네. 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길 건너편의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녀가 순간,‘아’하는 탄식을 내뱉는다. 왜 그러나 싶어 보니 그녀의 두 발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손을 다시 거두고는 내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
도리질을 친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그러면서‘안 돼요, 안 돼요.’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녀, 사람 미치게 한다. 녹색 불임에도 건너지 못하게 하고는 왜 그러냐고 물어도‘꺼억, 꺼억’만 대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기가 막혀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데 저만치에서 경찰서가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다.
“하아, 이봐요. 경찰서 가는 거 아니니까 그만 질질 짜요!”
“꺼억, 꺼억.”
“계속 그러면 의뢰고 나발이고 그거 안 할 겁니다!”
“읍!”
내 공갈 엄포에 울음을 뚝 그치는 그녀를 보고는 웃겨서 사방이 울리도록 웃었다. 우는 것을 그친 그녀의 표정이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와 닮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면 눈에 물기가 잔뜩 고인 거랄까. 화도 못 내겠고, 성질을 꾹 눌러 담고 안심을 시켜줘야겠다.
“내가 파렴치범으로 보여요? 당신 경찰서에 넘겨도 나한테 득 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알겠어요? 그러니 허튼 생각 말아요.”
“훌쩍, 훌쩍.”
나 분명,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 거라고. 졸지에 그녀 팔아먹은 놈 돼서 울어야 할 사람은 정작 나라고 이 여자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그랬다가는 저놈의 짠 내 나는 눈물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녹색불이 들어와서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건널목을 건넜다. 내가 들어간 곳은 경찰서 옆에 있는 여성 의류 가게다. 그곳에서 두툼한 밤색 카디건 하나를 사서 그녀한테 입게 했다. 가을의 초입을 한참 지나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내가 뭔 돈이 있나 싶어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 따지고 있는데 옆에서 그녀가 전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고는 활짝 웃는다. 여자들이란, 어휴.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뭐 나요.”
“네? 어, 엉덩이에 뭐, 뭐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제 엉덩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엉뚱한 그녀를 질책하듯 큰 소리로 소리쳤다. 중국 그녀한테 국내에서나 통하는 속설을 말하다니, 아뿔싸!
“뭘 또 봐요. 갑시다, 가!”
“감사합니다, 옷.”
“착각하지 마요, 의뢰비에 추가하는 거니까.”
“아 네, 그래도…….”
퉁명스럽게 대하려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잘 대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단지 춥다고 징징댈까 봐서 그런다. 그나저나 저 느린 발은 어찌 안 되는가. 뒤를 한 번씩 돌아다보는데 그때마다 총총대는 그녀가 보인다. 어제 첫 만남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표정과 지금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한 저 미진한 미소가 슬픔보다 더 절박해 보인다.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릴 때마다 한숨을 공기 중으로 내던지는 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대충대충 하고자 했던 마음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줄어든다. 점심은 일단 생략하고 근처 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탔다. 네 정거장을 간 뒤 내린 곳은 동석 형님이 늘 상주하고 있는 사무실 겸 집 앞이다. 특유의 비린 곰팡냄새가 가득한 지하 계단을 여러 개 내려가자 쾨쾨하고 어둑한 복도가 나왔다. 한동안 빚을 져 사채업자들한테 쫓겨 다니다가 숨을만한 곳을 찾았다고 전화가 와서 때마침 도움을 청할 것도 있고 해서 오게 된 것이다. 108호, 108호, 아 여기구나. 지하 위층이 2로 시작하는 호수고 이곳 아래층이 1로 시작하는 호수다. 낡아빠진 철제 문짝에 초인종이라니, 아이러니다.‘찌이잉, 찌이잉’골동품 가게에서나 있을 법한 80년대식 아날로그 소리가 빛을 잃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가 움찔거린다. 쌍욕이나 세상 온갖 잡음에도 강한 내성을 가진 나지만, 이 소리만큼은 나 또한 참기 어려웠다. 집구석에 있다면서 왜 이렇게 인기척이 없냐며 문짝을 발로 걷어차려는데, 복도 끝과 맞물린 바닥에서‘드르릉’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체를 살피려 내 눈매가 반사적으로 가늘어진다. 근육이 수축하는 느낌으로 봤을 때 난 분명 겁을 먹은 거다. 무서웠던지 내 팔뚝을 움켜쥔 그녀의 팔에 힘이 줄어들 줄 몰랐다. 무언가가 질질 긁히는 둔탁한 소리가 멎자 구멍이라고 보이는 새카만 곳에서 좀 덜 새카만 물체가 슬그머니 튀어나왔다.‘달칵’소리와 함께 인공적인 빛이 나와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어느 정도 눈부신 게 가시는 것과 동시에 동석 형님이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샌님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여, 꼴통.”
동석 형님을 따라 들어간 곳은 코딱지만 한 공간의 원룸이다. 말이 원룸이지 벽지도 군데군데 찢어진 남루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게도 부르면 안 되는 게, 벽면의 어느 한 부분을 손바닥으로 밀어젖히자 모니터 달린 VCR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동석 형님은 적외선 카메라를 108호 문 주변쯤에 설치해 놓고 초인종 소리가 전달되면 누구인 줄 판별하는 뭐 그런 식이라고 건성 대며 대답했다. 이 형님, 사채업자한테 엄청나게 쫓기더니 바닥을 파고 벽을 파서 숨어 있구나. 미션 임파서블급 인간이다. 여느 고시텔의 방과 다름없이 7평 남짓한 곳에 취사도구만 없을 뿐 침대며 화장실, 샤워기까지 다 갖추고 있다. 침대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 그녀를 대놓고 쳐다보며 동석 형님이 내게 묻는다.
“네 깔이냐? 꼴통 새끼 능력 죽이네.”
“아 진짜, 형님도. 그녀 있는 데서 꼴통이 뭐요, 꼴통이. 그리고 내 의뢰인이에요, 통화로 말했잖아요.”
“의뢰인이 여자라고는 안 했잖아, 인마.”
“아, 그랬나?”
“그러니까 네가 꼴통 소릴 못 면하는 거다.”
“미치겠네. 그건 그렇고 부탁한 건요?”
동석 형님이 VCR이 든 벽면을 밀어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고는 장롱 서랍에서 등에 메는 검정 가방 하나를 꺼내어 그것을 내게 줬다. 이 형님은 근육도 좋고 덩치도 있는데 목소리가 모깃소리라 에러다.
“자, 그 안에 다 있다. 주의해, 그 신분증 요즘엔 잘 안 쓴다더라. 그러니까 뭘 하든 간에 남용하지 말고. 검정 갑 속에 있는 거는 만능열쇠야, 서툰 실력대로 쓰면 나름 유용할 거다. 그거는 손전등, 그거는 밧줄.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동석 형님이 내 얼굴로 까끌스러운 큰 바위 얼굴을 들이밀며 소곤댔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다. 무척 진지하다.
“내 정보통에 의하면 말이다, 세간에 빠르게 확산 되고 있는 범죄 유형이라고 하더라. 규모는 누구도 짐작할 순 없다는데 그래도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니 적은 편은 아닌가 보다. 보아하니 돈도 없어 보이는 변변찮은 조선족 같은데 대충 조사하는 척만 하다 말아, 괜히 그놈들하고 얽히면 너만 손해야.”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알아서 내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형님, 가장 중요한 거 주셔야죠.”
모르겠다는 그런 의사를 이마에 주름을 새기며 나타내는 동석 형님을 째려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정보원 생활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선지급 없이 정보와 물품들을 제공해주는 이 사람의 심리를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난 정말 지급할 돈이 없다. 손톱과 손톱을 부딪치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저 그녀도 마찬가지고. 나는 악마 같은 웃음을 흘리며 동석 형님을 협박했다.
“형님, 선지급의 신화는 깨졌지만 그건 내가 비밀로 해드리면 되는 거고요. 헌데 말이죠, 형님의 거처까지 비밀로 해드리기엔 제 입이 풍선보다 가볍거든요.”
“이 새끼, 이 바닥의 생리를 너무 잘 알아서 내가 아주 흡족한데.”
동석 형님은 내 협박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 만다. 아군의 피와 살도 기꺼이 물어뜯어 제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남 뒤를 캐는 인간들의 '세상사는 법'이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 안에서 차량 키와 새끼손톱만 한 크기로 된 납작 둥근 모양의 물건 두 개를 내게 줬다. 이 두 개는 고가의 초소형 도청기다. 송신기와 수신기를 구분하기 위해 겉면이 파랑과 빨강으로 도금되어 있다. 그것을 건네면서 동석 형님이 내 정수리를 흉기 같은 주먹으로 냅다 후려갈겼다.
“아 쓰읍, 젠장.”
“야, 꼴통. 너같이 제 신변의 안전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남 꼬지를 수 있다고 봐? 사채한테 쫓긴다 한들 밀고한 네 녀석 하나 처리 못 할 내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죠, 하하.”
“쳐 웃지 마, 새끼야. 친구 동생 놈 아니었으면 네가 한 협박이 네놈 대가리에 드릴 구멍을 냈을 거다.”
“오, 대포폰도 있네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아부 떨지 마, 광대뼈를 그 매끈한 얼굴에 우뚝 솟게 해 버릴 테니. 암튼, 이번 일은 조심해.”
플립 형태의 구식 대포폰 2개를 마지막으로 물품 준비를 마쳤다. 말투는 살벌해도 동석 형님은 늘 이런 식으로 격려하기에 나는 개의치 않는다. 단, 웃으면서 이를 바득가는 저 표정은 장난이 아님을 깊이 명심하면서 말이다. 내가 가방을 등에 메고 있는데 동석 형님이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로 가 추파를 던진다. 아, 저 인간. 내 입에서 요사스런 앙탈이 튀어나오고 손목은 교태를 부렸다. 호색을 즐기는 저 짐승을 재빨리 저지해야 했기에 나온 일종의 비기였다.
“아하하, 에이 형님. 맞다, 징메이 씨 애가 이번에 유치원 들어간다고 했죠?”
“유, 유치원이요?”
젠장, 손발이 맞아야 사기를 치지. 지금 저 근육 짐승으로부터 당신을 구하고 있는 거라고! 그녀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연신 중얼거리자 동석 형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투덜댄다.
“개새끼, 어디서 개 뻥을 쳐. 야 얼른 꺼져, 의뢰비의 절반 잊지 말라고.”
“아이 그럼요. 전화할게요, 형님. 가요, 징메이 씨.”
얼마가 지나서 그녀와 나는 그곳을 나왔다. 물품비와 경찰 신분증을 위조해준 대가는 의뢰 건이 끝나는 대로 갚겠다고 했다. 1시간 남짓, 지하에 있었더니 온몸이 눅눅하다. 다행히 가을바람이 살랑여 그 찝찝함을 앗아가 주었다. 둘의 뱃속이 동시에 꼬르륵대 근처 분식집에 가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나름 비싼 것을 사겠다는데도 그녀는 굳이 라면을 주문했다. 생전에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특별한 라면을 끓여주셨다고 한다. 매콤한 라면을 국물이 거의 없이 끓여 달걀을 두 개 풀고, 참깨를 고명으로 쓰는 특이한 먹거리란다. 집에서도 종종 끓여는 먹는데 아버지의 그 라면 맛이 아니라 아쉽다고.‘후르룩’배가 고팠는지 재빨리 면을 흡수하는 그녀를 보며 괜스레 미안해진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챙겨 먹을 것을 그랬다. 나는 보통 늦잠을 자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늦은 시각에 밥을 먹기에 미처 그녀를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김밥 한 줄을 더 주문해 먹고 난 뒤 그녀의 집이 있는 동네의 지리 사정과 주변에 흥신소가 있는지 등을 발품 팔아 조사한 뒤 해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시각에서야 오늘 할 일을 마무리를 지었다. 그녀의 집 위치도 알았겠다, 주변 지리도 눈에 익혔겠다 싶어 대포폰 하나를 그녀에게 주고는 전화할 테니 받으란 말을 전하고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샤워하고 나서 소형 냉장고 안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 식탁 의자에 앉았다. 맥주 한 모금에 정신을 번뜩 차린 나의 뇌가 식탁 위에 놓인 휴대 전화기용 장식 고리를 응시했다. 필요가 있을 듯싶어 그것을 달라고 했더니 그녀가 의아해했지만 나는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펜던트 위에 새겨진 이 사진, 그리고 이 남자. 억측에 가까운 가설이긴 하나 왠지 이 남자와 흥신소 놈들이 한 패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폭력 및 절도 전과 5범으로 교도소에 복역 중인 형이 있어 어깨너머로 온갖 더러운 짓을 자주 봐온 나지만, 이번 일은 보통 역겨운 일이 아닌 듯싶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흥신소 놈들의 범죄 시나리오가 심증도 아닌 가설 속에서만 짜이고 있기에 더욱 가슴팍이 답답하다. 분식집을 갖다 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새삼 트릿하다. 유아독존이라 불리는 나 김한수가 한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보는 환상의 저녁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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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자 : 장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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