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위조된 경찰 신분증이 여러모로 꽤 쓸모가 있었다. 그녀는 그 흥신소 놈들을 사무실이 아닌 근처의 모 카페에서 만나 그들에게 도둑을 찾아달란 의뢰를 했다고 했다. 일단 조사 범위를 너무 크게 잡지 않고 카페가 있는 동네 내의 모든 부동산을 방문했다. 흥신소 놈들을 지난달 말에 만났다고 했으니, 그들이 사무실을 차려 사업을 크게 벌였더라면 분명 부동산에 사무실 퇴거 및 입주자 구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 이 동 하나에 총 여섯 군데의 부동산이 있었고, 석 달 전부터 퇴거나 자리를 내놓은 사무실의 개수는 모든 부동산을 합쳐 서른네 곳이었다. 이 동네가 특별히 금융가도 아니고 회사가 많은 곳도 아닌데 뭘 그렇게나 방을 내놓았나 싶었다. 아무렇게나 접은 하얀 메모지를 다시 펼쳤다. 부동산 업자들을 닦달해서 비교적 손쉽게 얻어낸 퇴거자 명단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갈겨 쓴 이 이름들 중에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놈이 있기를 바란다. 차량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아 대포폰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슬슬 짜증도 나고 몇 날 며칠을 이러고 있나 하는 회의감도 잔뜩 드는 그런 오후다. 오늘로써 닷새째, 나는 되지도 않는 강력반 형사 놀이를 하고 있다.
“젠장, 왜 이렇게 안 받아! 당장 때려치우고 만다.”
라며 괜한 핸들을 구타하다가 앞유리 너머의 인도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녀의 모습이 두 눈에 확대되어 와 또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포기와 번복이 백 번은 족히 넘었을 듯.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 몸이 손수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려고 말이다. 그녀가 먼발치에서 손가락으로만 알려 준 직각으로 세워진 회색 건물을 더 가까이에서 보자 맨 꼭대기 벽에 리빙텔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폐허처럼 벽 이곳저곳이 마모된 건물 내부는 아니나 다를까 더욱 충격적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기에는 발에 매우 미안할 정도로 복도 바닥이 온갖 먼지들로 수북하다. 총무실이라는 딱지가 붙은 방문을 노크하자 얼굴에 칙칙하고 덥수룩한 수염을 단 남자가 뭐냐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이 자식이 초면부터 혀가 짧다? 욕을 쏟아부으려다 그보다 더 큰 무기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자 남자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런 것에만 써먹기엔 아까운 수첩, 그 위대한 위조 신분증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는 입실자 명단에서 '순징메이'를 찾으라고 했다. 입실자 정보는 비공개라고 투덜대면서도 내가 눈을 부라리자 꼼짝 못하고 소심한 목소리로 호수를 알려준다.
“옥탑이요, 위에.”
이런 빌어먹을, 5층까지 있으면서 승강기가 없다니.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입주하면 퍽 좋겠다. 식욕을 버리게 하는 실내 청결 상태며 계단만 있는 웰빙식 구조라, 가관이다. 층계 끄트머리마다 붙은 미끄럼 방지 고무 턱도 군데군데가 너덜너덜해 그렇지 않아도 오르느라 짜증이 난 내 마음을 욱하게 했다. 연철 재질의 검정 문짝을 열어젖히니 옥상이 나왔다. 바로 앞에서부터 멀리까지 기다랗게 이어진 빨랫줄 위에 겉옷과 속옷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때 구정물 가득 묻은 단층 구조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본디 흰색인데 지붕이 없어 온몸이 누렇고 검게 변한 듯싶다. 역시 문짝이 연철로 되어 있다. 그것을 마구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불러대자 안에서 아주 희미하게 앓는 목소리가 대답한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머리칼과 위의 티가 흠뻑 젖은 그녀가 오셨냐면서 반긴다. 저것은 땀이다. 그냥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파 보이는 데도 손님이 왔다고 깔아놓은 이불을 걷으려 해서 관두라고 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요? 연락한다고 했으면 항상 전화기를 보고 있어야죠.”
“죄송해요, 좀 아파서…….”
“쩝, 일단 누워 있어요. 배도 고프고 하니 밥이나 차려 먹자고요.”
“아, 저…….”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더듬는다. 그냥 누워 있으라고 말해 놓고는 방금 들어온 문 반대편 벽에 붙은 문짝을 열었다. 보일러실과 화장실이 같이 붙은 구조다. 하아, 그녀의 세간살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방안을 둘러보았을 땐 드라이 기며 청소기가 없더니 부엌에 와서는 세탁기가 없다. 게다가 말이 보일러지 값비싼 연료를 먹고사는 석유 벌레다, 벌레. 변변찮은 공간을 제법 깔끔하게 사용해왔던 모양이다. 가스레인지 밑의 서랍을 여기저기 열어보니 쌀이 없다. 분명, 조선족이 대한민국에서 받는 돈이 쥐꼬리만 하리라. 붓고 있던 적금도 해약하고 그것마저도 몽땅 못된 놈들에게 빼앗겼으니 집구석에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소용량 냉장고의 속도 텅 비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그녀한테 장 좀 봐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던져놓고 마트를 찾아 리빙텔 건물에서 나왔다.
요리사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나 오랜 자취 경력 탓에 내가 끓인 된장찌개가 제법 맛있다. 공치사가 심한 내 앞에 그녀는 힘겹게 한 숟가락씩 제 입에 넣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밥상머리 앞에서 왜 우는지 원.
“청승맞게 왜 울어요?”
“밥이, 밥이 아주 맛있어서요.”
“누가 한 건데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오, 오해하지 마요. 이것도 의뢰비에 추가할 테니까, 음.”
비교적 손쉬운 의뢰를 맡아오며 물건이나 애완용 동물을 되찾은 사람들에게 받았던 감사도 분명, 진심일 것이다. 헌데 그녀의 감사는 느낌이 좀 다르다. 몸도 마음도 생채기가 가득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녀의 감사, 그것은 내 가슴에 못을 마구 박아댄다. 내게 의지한다는 신뢰의 못과 의뢰가 실패하면 살아갈 자신이 없을 거라고 추정되는 못의 크기는 엄청나다. 나는 연민인지 그 외의 이성적인 호기심인지에 대한 내 감정 때문에 밥 먹는 내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밥상을 물린 뒤, 여길 찾아온 목적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목구멍 끝에서 쉬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본인 당사자에게 놈들과 관계를 맺었던 장소를 얼굴 앞에 대놓고 물어볼 수 있을까. 아무리 거칠 것 없고 투박한 성격을 가졌다고 하나 그녀의 치부를 되새기는 짓은 왠지 껄끄럽다. 그래도 매우 중요한 정보를 빠트리면 조사에 차질이 있겠다 싶어 재킷 안주머니에서 위조 신분증을 꺼내 방바닥에 놓았다.
“징메이 씨, 이건 경찰 신분으로 묻는 겁니다. 힘들겠지만, 꼭 대답을 해주세요.”
“아 네, 말씀하세요.”
앉은 자세가 힘에 겨운지 벽을 등받이 삼아 기대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돌려서 말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이래저래 상처받는 건 똑같을 것 같다.
“흥신소 놈들이 징메이 씨를 데려간 곳이 어딥니까?”
“데려, 간 곳이요?”
“네. 과, 관계를 맺은…….”
“……!”
학창 시절, 돈 많다고 잘난 체를 하는 급우를 흠씬 두들겨 패고 나서 불려 간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이 왜 때렸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어차피 대학 진학 못할 거 반항심에 학교 모의고사 전 과목 시험을 백지로 작성했을 때는 교장 선생님의 호출도 있었다. 그 밖에 나이 먹어서도 이런저런 자잘한 잘못들을 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해 딱히 변명 같은 건 하고 살지 않았다. 그녀가 눈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쏟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생에 거의 처음으로 내가 뱉은 말에 변명이라는 것을 보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닷새 동안 조사를 벌인 일을 간략히 말해준 뒤 뒷말은 발음을 최대한 정중히 했다. 속을 후벼 파는 나는 버러지다, 곪아있는 상처에 들러붙어 더 아프라고 흉측한 혓바닥을 나불거리는 그런. 젠장!
“미안해요, 꼭 물어야 했어요. 그곳에 혹시나 공용 CCTV가 있으면 그걸로 놈들의 신변 파악에 도움이 될 것 같고, 또 주민의 증언도 따라올 것 같아서 에요. 난 지금은 경찰입니다.”
어리바리하게 꼬인 문장을 털어놓고 소꿉놀이하듯 장난감 신분증으로 경찰이라고 하는 꼬락서니를 비웃으며 내 삭막했던 눈은 굵다란 물줄기를 내었고, 두 물줄기는 볼을 타고 흘렀다. 이를 앙다물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며 억누른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짠 내 나는 콧물까지 죄다 드러내며 꺼억 꺼억거리는 그녀에게 멋지게 손수건이라도 건네야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소매로만 온갖 것들을 다 해결했던 나라서 그런 멋진 장면은 연출할 수 없다. 아니, 연출이고 뭐고 그런 멋들어진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아 좀 울지 말라고요, 젠장. 괜히 나까지 후…….”
“꺼억, 꺼억. 죄송해요, 죄송…… 합니다.”
“나는 뭐 이렇게 묻는 게 좋은 줄 알아요? 당신이 그렇게 울어대면 내 마음이 아프…… 아니, 아닙니다. 그만 징징대요, 젠장.”
차오르는 가슴께의 먹먹함을 추스르고자 그녀를 등지고 일어났다. 방구석이 코딱지만 해서 이 아리송하고 개같은 감정을 숨기고 있을 수가 없다. 마침 물린 상이 보인다.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일부러 부엌문을‘쾅’닫고는 내 마음의 동요도 닫았다. 설거지하는 내내 입에서‘뭐야, 젠장’소리가 반복되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느낌은 싫다고, 머리칼이 바람 없이도 쭈뼛거리거나 손가락 열 개의 끝이 간질거리는 이 오묘한 감정 선상에서 혼란이 가중된다. 그래, 연민이고 동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며 마지막 남은 숟가락에서 세제를 씻어냈다. 싱크대에서 몸을 돌렸을 때 오돌토돌한 시멘트 벽면에 붙은 자그마한 사각 거울 속에 퉁퉁 부은 눈매가 비친다. 사내자식이 질질 짠 건가? 충혈된 그 꼴이 보기 싫어 뺨을 한 대 갈기고는 시원하게 세수를 해버렸다. 나를 낳자마자 죽어버린 어미니 때문에 가족도 친가며 외가, 심지어 주변인들까지도 나를 패륜아라 불렀었다. 얼굴도 모르는 어미를 내가 죽였다는 그 꼬리표는 십 대 말까지 계속 따라와 그때부터 내게 슬픔이나 기쁨, 눈물이나 웃음처럼 소박하고 일상적인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 암묵적 금기사항이었다. 견딜 수 없이 깊은 나락에 빠져 십 대를 살았는데, 그래서 인제야 겨우 평온할 만큼 덤덤하고 정지된 삶을 사는데 고작 저딴 그녀 하나로 내 안위를 깨트리고 싶진 않았다.
“뭐가, 뭐가 고맙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젠장.”
옥탑의 저녁은 우리의 울음으로 더 없이 차가워져 갔고 그것을 부추기듯 하늘은 검푸른 융단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아프게 하고 눈물이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는 퉁명한 그런 저녁이었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찾아온 곳은 시설 좋고 때깔 좋은 모 모텔이다. 속전속결로 주인장을 만나 '그날'의 CCTV 녹화 본을 달라고 했다. 헌데 이 주인장이라는 놈이 백발의 노인이라 의심이 많은지 수색영장을 가지고 오란다. 계산대 안에 감시를 할 수 있는 모니터가 여러 대 있고, 그 밑으로 투명한 입구를 가진 기계가 있는데 그 안을 보니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 모텔 입구에서부터 계산대, 계산대에서 승강기까지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 이 노인네 되게 까다롭네. 이건 뭐죠?”
손가락으로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서랍장을 가리켰다. 일부러 큰 목소리와 동작을 취하며 주인장의 시선을 내 손끝으로 돌렸다. 주인장은 몸을 수그려 서랍장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있는 파일이며 공구세트 등을 꺼내 설명을 해댔다. 그 틈을 이용해 도청기의 뒷면 스티커를 떼어낸 뒤 접착 부위를 테이블 밑에 재빨리 붙였다, 될 수 있으면 수화기를 들었을 때 가장 잘 들릴만한 지점에다가. 주인장이 서랍을 다시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다. 나는 최대한 능청을 떨며,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원래 그 도청기, 놈들의 신변이 확실해지면 물증을 위해 쓰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녹화 본이 꽤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동석 형님한테 하나 더 달라고 떼를 쓴 끝에 어렵사리 하나 더 얻었지만 그날 나는 꼴통에 '병신'이란 별칭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도청기의 성능이 형편없어 하루를 꼬박 근처 24시간 개방하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 주인장이 근무를 교대하기만을 기다렸다. 교대는 다음날 아침이 한참 지나서야 이루어졌고, 교대 자는 젊은 여자인 것 같다. 도청기에 들리는 바로는 주인장이 모텔에 상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곧바로 모텔로 다시 가 여자를 반강제 협박을 해서 결국 얻고자 하는 녹화 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 겁을 잔뜩 줘서 그런지 여자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알았어요.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그래주세요, 아가씨.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수고해요!”
협박하는 경찰을 믿다니, 세상 물정을 저리도 모를까 싶다. 여자에게 놈들과 모텔로 왔던 시각을 묻자, 상세한 기억이 없단다. 다만 기억이 나는 건 모텔 옆의 대형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어떤 용달차가 거둬 가고 있었다고 한다. 시계도 안 보고 다니느냐고 면박을 주니 그녀가 또 미안하단다. 그놈의 미안 소리 듣기 싫어서 알았다고 하고는 통화를 짧게 끝냈다. 그리고 곧장 대형 식당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무적의 수첩을 빼들고는 업체가 음식물 쓰레기를 거둬 가는 시각을 알아냈다. 마땅히 테이프를 돌려볼 곳을 찾지 못한 나는 병신 취급을 해대는 동석 형님의 거처로 갔다. 다시금 귀찮게 좀 하지 말라는 형님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오후 4시부터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그 도청기가 작디작아 보여도 엄연히 녹음 기능이 있다는 것.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 혀를 차는 형님은 그래서 나를 병신이라고 했나 보다. 테이프에서 모텔 계산대를 찾은 남자 둘과 그녀를 발견했다. 화질은 아주 떨어지지만, CCTV 카메라가 계산대 근처에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징메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얼굴이 가까이 찍혀 있다. 혹시나 해서 그 부분만 복사본으로 떠 경찰서로 택배를 보냈다. 물론 그녀의 신분과 내 신분은 감추고서 그저 화면 속 남자들이 지랄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범죄자라고 쓴 메모와 함께. 며칠 뒤, 도청기를 회수하기 위해 찾은 모텔 계산대에서 교대 자로 있는 여자를 다시 만났다. 복사본 테이프를 계산대 안 VCR에 재생시켜 남자들의 얼굴을 보여줬다.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여자도 이 남자들을 안다고 한다, 아니 엄밀히 말해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센 듯 보이는 남자가 주인장과 막역한 사이라고. 게다가 허구한 날 상대를 바꿔 데려와서는 늘 같은 방만 고집한다고 한다. 빌어먹을, 한패였다. 화면 속의 다른 남자는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주인장이 자주 가는 일식집의 아르바이트생이란다. 개새끼들, 늙은 놈 젊은 놈 가릴 것 없이 깡그리 미쳤군. 여자한테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하고 전해 들은 일식집으로 달려가 아르바이트생을 찾았다. 일식집 특성상 밤늦게나 문을 열어 그 시각에 찾아갔지만, 아르바이트생이 휴무란다. 다행히 경찰한테 순순히 그 녀석 집 주소를 알려주는 고분고분한 직원이다. 여기까지는 운이 겹쳐 조사가 잘 진행되는 것 같다. 나보고 일을 잘 해결하라고 주는 그런 행운인 것 같아 괜스레 머쓱해진다, 딱히 세상에 잘하고 산 것도 아닌데.
아르바이트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는 알아낸 화면 속 중년의 남자가 운영한다는 갤러리 앞에 그녀와 서 있다. 고고하신 그림쟁이 놈이 색마의 탈을 썼구나. 등쳐먹을 게 없어서 타국에 돈 벌러 온 그녀를 가지고 놀다니, 피가 거꾸로 솟아 미칠 것 같다. 고가의 통짜 유리 너머로 갤러리 내부가 훤히 비친다. 그 덕에 성이 잔뜩 난 그녀를 달래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회색 머리에 금테 안경을 두르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 중인 중년의 남자를 보고는 그녀가 펑펑 눈물을 쏟으며 다짜고짜 실내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잡으며 몸을 돌려세웠다.
“당신, 미쳤어!”
“저, 저 사람이에요. 흑흑, 저 사람이 내게 관…….”
“그래서 저길 들어가겠다고요, 무턱대고? 들어가서 날 덮쳤으니 책임지라고, 경찰서 가자고, 죽여버리겠다고 항의라도 할 건가요, 네?”
‘짜악’그녀가 내게 날린 따귀다. 희끄무레하고 얇디얇은 그 손이 나를 증오한다는 세기로 날아든 것이다. 밝진 않았지만, 줄곧 상냥함만은 잃지 않고 나를 바라봐주던 눈망울이 경멸로 차 있다. 명확한 내 실언이다. 자꾸만 내려앉으려는 그녀의 어깨를 계속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절로 내려진 창피한 손으로 재킷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가 또 울까 봐서 달래주려고 산 건데, 내가 그녀를 울려 놓고 뒷북을 치며 약을 주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이번엔 정말 진심이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그녀가 꼬깃꼬깃한 손수건을 받아 든다. 애초에 가지고 다녀본 적이 없어 다림질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볼품 꽤 없어 보인다. 그녀가 느릿한 손길로 제 눈물을 훔친다. 다시금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대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미안함을 가슴에 품고 사는 걸까. 죄도 딱히 없으면서, 아니 불법 체류가 죄라면 죄겠지. 하아…….
“나쁜 말 해서 미안해요, 징메이 씨. 울지 말고 저 새끼 옆에 있는 남자를 봐요.”
“……?”
중년의 남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덩치 큰 남자는 동석 형님이다. 내 집념은 기어이 저 조폭 같은 사내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손이 너덜너덜 휴짓조각이 되도록 빈 후에야 도움을 주겠단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동석 형님은 하나 더 있는 도청기 한쪽을 지닌 채 전시품 구매업자로 분해 중년의 남자에게 접근하여 이것저것을 캐내는 역할을 맡았다. 이틀 동안 친해진 뒤, 사흘째 되었을 때야 비로소 중년의 남자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한 후 내게 전화를 줘서 이렇게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더불어 이미 모텔 CCTV 복사본과 간단한 신고 목적을 메모에 적어 경찰서에 보냈다는 것과 중년 남자의 사무실에 있을 도청기를 회수하여 그것도 넘길 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상, 닥치는 대로 뭐든 수집해야 했기에 복사본과 도청기는 뜻밖에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었다. 혹시나 몰라서 대포폰으로 경찰서에 연락한 뒤, 모텔의 교대 자와 일식집 아르바이트생의 존재를 알려 수사해보라고 말해두기도 했으니 이번 의뢰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내 일은 이제 끝났다고 본다. 그녀와의 인연도 일단락되는 듯 보이고 경찰에서만 신속히 일을 처리해준다면 의뢰는 마무리다. 박식하고 신사다운 면모의 탈을 뒤집어 쓴 중년 남자의 이름은 주재현이다. 모텔의 여자도 그의 이름이 그렇다고 했고 부동산을 돌며 알아낸 퇴거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경찰서로 보낸 메모지에 이 사항도 함께 포함시켰다. 그녀의 눈으로 놈임을 확신하고 나서부터는 재킷 주머니에 갈무리해두었던 이 메모지를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추악한 새끼의 이름이 내 왼쪽 가슴께에 들러붙어 시궁창 내음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재킷을 열어젖히니 코끝이 비리다. 나는 메모지를 길가의 일반 쓰레기통이 아닌 하수구에 내던졌다. 그 이름은 평생 그렇게 썩어야 한다. 그녀가 더 울 것 같아 중년의 남자가 보이지 않게 다른 곳으로 억지로 데려갔다. 갤러리의 내부가 보이지만 않도록 한 블록 옆에 있는 카페로 가 따듯한 핫 초콜릿을 주문해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와 그녀가 집에서 처음 만나 마셨던 게 이 핫 초콜릿이구나. 어느덧 그때로부터 스무날이 지나 있었다. 참 다난한 시간이었고, 콩닥거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괜찮았던' 날들은 쏜살같이 흘렀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다섯에 고아원에서 나와 강북의 폭력 조직에 들어간 뒤 이십 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조직 생활을 시작했고 모 기업을 상대로 보안 정보를 유출하다 적발되어 3년 간 방 살이를 한 내력이 있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또 구치되리라고는 솔직히 상상도 못했다. 물론 심부름 일ㅡ흥신소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일ㅡ이 불법이라 단속에 걸릴까 노심초사하고 지냈지만 워낙이 소규모로 벌이고 있는 일이라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고는. 조서를 꾸미느라 손이 바쁜 담당 형사의 어투가 매섭다.
“이름은요?”
‘징메이.’
“주소는요?”
‘중국 흑룡강 성.’
“전과 기록이 있군요.”
‘불법 체류.’
“범행 동기가 뭐죠?”
‘판다를 찾기 위해.’
“그게 답니까, 여자를 돕기 위해서요?”
‘유리관은, 판다는 되찾았을까?’
“똑바로 대답 안 해요!”
담당 형사가 잔뜩 성이 났다.‘텅’약간 낡은 듯한 책상에다 주먹질을 하고는 나를 노려본다. 마음에다 내것이 아닌 그녀의 조서를 쓰느라 대답을 건성으로 한 모양이다. 실제로 내 입에서 내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마음에다 내 것이 아닌 그녀의 조서를 쓰느라 대답을 건성으로 한 모양이다. 실제로 내 입에서 내는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한쪽 귀로는 담당 형사의 채근을, 다른 한쪽으로는 마음이 하는 의문을 듣느라 그랬다. 내 행동이 비협조적이라고 느낀 담당 형사가 버릇인지 아랫입술을 윗니로 잘근잘근 씹는 것과 동시에 조소를 지으며 중요한 사실을 하나 일러준다. 단순히 사칭만 했다면 관명 사칭죄로 경범죄처벌법 1조 8호에 의해 10만 원 이하의 벌금에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사칭 후에 직권을 행사해 여러 증거물을 수집해 공무원 자격 사칭죄에 해당해 형법 118조에 의하여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의 형으로 처벌된다고. 산술적인 게 들리긴 하지만 그게 뭐, 젠장. 돈을 좇다 돈에 쫓기게 된 이 상황은 말 그대로 아이러니다. 게다가 어찌 된 놈이 이때에 이런 게 생각이 나는 걸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됐나요?”
“뭐요?”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담당 형사에게 통쾌감을 안기겠지만, 이 이상야릇한 오지랖은 눈치 없이 융통성이 없다. 내내 구경 못한 담배 한 개비를 빌려 태우고 나서 아주 상냥한 시종이 되어 조서 작성을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서야 전해 들은 그녀의 소식은 이랬다. 내가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와 시기를 같이 하여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조사를 받다가 직후에 외국인보호소로 옮겨져 출국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배웅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만, 재판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라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있는 판다는 레서판다라고 한다. 너구리 과에 속하는 이 판다는 그녀가 보고 싶다는 자이언트 판다 즉, 대왕판다─판다라고 통칭하는 유일한 종으로 판다 과로 분류한다─다.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떠올린 뉴스 속의 판다도 역시 레서판다였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녀를 데리고 놀이공원의 동물원에 가서 그 판다를 보여준 댔어도 의뢰 내용과는 부합이 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출국하는 그녀를 배웅하러 이곳 인천 공항에 온 것은, 나 역시도 의외다. 이미 모든 걸 다 주고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공항 내부 로비 가운데에 자리한 벤치에서 그녀를 찾았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그녀를 찾은 지 십여 분, 다행히 평일인지 아니면 오늘만큼인지는 몰라도 인파가 그렇게 붐비지 않아서 짧은 시간 안에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벤치에 앉아 있는 원피스 차림의 그녀 앞에 섰다. 포도주색의 원피스 맨 아래 주름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녀가 그늘진 손등을 보고 흠칫 놀라 고개를 치켜든다. 나는 옅게 웃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하는 그녀도 곧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반갑게 웃는다.
“감사드린다는 말씀 못하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잘 지냈어요?”
“네 덕분예요, 한수 씨는요?”
“나야 뭐, 보시다시피.”
CCTV 녹화 본을 얻어내려고 했던 경찰 사칭은 분명 중죄에 속했지만, 내가 찾아낸 그놈들이 생각보다 악질이었기에 경찰서장의 탄원서가 큰 힘이 돼 법원 판결이 '삭감된 벌금형으로' 마무리되었다. 출국 시간이 아직 남았다기에 청사 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근 한 달만의 재회다.
“집으로 의뢰비를 보낼 줄은 몰랐어요.”
“고생많으셨잖아요.”
“하지만, 징메이 씨가 준 의뢰비는 한 푼도 없어요, 하하하, 하마터면 감방 갈 뻔했고요.”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뭘요, 아, 사천 성으로 가나요?”
“네, 곧장 아버지 뵈러 가려고요.”
“고인의, 명복을 빌게요.”
“감사해요. 아, 좋은 소식이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쾌활하다. 하늘이 마른 꽃잎 대신 눈 잎을 날리는 계절에 접어들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그날 중 가장 밝은 빛깔을 만면에 띠고 있다. 진 갈색 캐리어 위에 올려놓은 손가방 안에서 하양의 갑을 꺼낸다. 이어 갑의 뚜껑을 열어 그 안의 것을 내게 보여준다.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판다다, 눈발이 날리는 성 곁에 자리한 터럭 그리고 아버지의 추억이다. 매끄럽게 굴곡진 투명한 몸매 안에서 순수한 천국의 전경이 펼쳐지고 있다. 어른 아이가 값비싼 조립식 장난감을 대하듯 한참을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찾았네요?”
“이게 다 한수 씨 덕분이에요.”
“와아, 무척 아름답네요. 이게 그 골칫덩이군요.”
“헤헤, 골칫덩이.”
“흠, 뭘 그리 실실 웃고 그래요. 만날 질질 짜더니…….”
“걱정 마요, 엉덩이에 털 나는 일 없을 테니까.”
“그, 그 말 어떻게 알았어요?”
“줄곧 궁금해서 내가 일하던 식당 분께 물어봤어요, 치잇.”
“하하하.”
“헤헤.”
익숙하지 않던 감사를 매번 받다가 근 한 달 동안 듣지 않고 살아 본디 사막 같은 가슴으로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감사도 받고 그녀의 해맑은 모습을 보게 되니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활짝 웃었다. 이건, 절대 가식이 아니다.
“그거 이제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마요.”
“네, 다신 안 잃어버려요.”
“탑승시간은요?”
“아, 가야겠어요. 한수 씨 이거.”
손가방 안에 유리관이 든 갑을 갈무리한 뒤 잘 다림질 된 손수건을 꺼내준다. 그리고 그것과 같이 자그마한 갑 하나를 더 주는 그녀다. 받아든 나는 갑의 뚜껑을 열어보니 지포 라이터다. 내가 골초인 걸 단 스무날 만에 알아차린 거다. 원래 내 것이었던 손수건은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려다 그녀에게 다시 건넸다.
“이것만 잘 받을게요. 아, 저도 선물 하나 줄게요.”
“……?”
“자요.”
배낭을 어깨에서 내려 그 안에서 선이 돌돌 말린 드라이 기 하나를 꺼냈다. 송풍구가 둥근 아담하고 하얀 물건이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그쪽한테 없는 것 같아 샀습니다.’라고 덧붙이려다 만다. 제 집으로 돌아가면 이것 하나 없을까 싶다. 유독 하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 멋대로 고른 거지만, 사실 마트에 가서 점원에게 어떤 게 여자들이 좋아할 만 하냐고 물어서 산 것이다. 과거에 동석 형님을 따라 고리대금업을 잠깐 하면서 연령대 상관없이 여자한테 등이나 처먹고 살 줄 알았지 이렇게 선물이라는 걸 해보긴 처음이다. 기분이 매우 좋다는 걸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분홍색 줄이 달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그녀다. 출국장 앞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녀가 내게 허리를 숙여 다시 한 번 정중히 인사를 건네려 한다. 나는 이를 제지했다.
“내 식으로 하죠, 자.”
나는 악수를 건넸다. 그녀가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며 눈가에 무언가를 감추려 애썼다. 또 고맙단 말을 할까 봐, 내가 선수를 쳤다.
“잘 살아요, 징메이 씨.”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흐뭇함을 느끼고 있다.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생각에 없던 자존감도 발견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왼손을 치켜들고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친다.
“잘 살아요, 한수 씨!”
불법 체류자로 쫓겨나는 주제에 너무 밝은 거 아닌가 싶다. 게다가 왼손잡이잖아? 내 인사법이 어쩌면 그녀에게 불쾌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쓸데없는 생각이 스친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와 시시각각 다른 색을 내며 불어대는 바람을 맞는다. 한켠에 마련된 간이 흡연소에 서 있는 나는 빈털터리다. 고작 남은 거라고는 이 맛난 담배. 필터의 절반을 이로‘뚝’끊어냈다. 독하게 태우는 담배는 인생과 닮았다. 손에 쥐면 쓰고, 맵고, 달다. 집착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것 또한 이 둘의 공통점이 아닐까, 하는 썩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빠져든다. 입술로 담배를 문 다음‘치익’지포 라이터를 켰다. 마니아적인 성향이 짙은 그녀가 준 이것의 빛깔도 하양이다. 한 모금 깊게 빨고는 시원섭섭한 연기를 허공에 날렸다. 뚜껑을 닫은 지포 라이터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하양 바탕에 빨강 무늬가 든 여객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
오래 전, 내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비록 나는 폭력 조직 두목의 양자고 그녀는 의붓딸로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런 관계였지만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징메이처럼 눈이 크고 체구도 아담했다. 딱 하나 다른 점이라면 징메이가 훨씬 더 피부가 까맣다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징메이의 나이쯤 되었을 텐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두 사람이 꽤 닮은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돈과 저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내가 의뢰비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선뜻 나선 건 신기한 일이었다.
판다는 추억할 것이다. 매년 한번 저를 기다리고 잊지 못해 목숨보다 더 사랑했을 아버지를 말이다. 그리고 얼음 알갱이를 머금은 눈 속에 뒤덮인 광활한 숲 속의 판다는 울고 웃고를 반복하며 치열하게 살 것이다. 유리관 속에서는 사천 성과 어울리지 않는 눈보라가 일고, 아버지처럼 견고히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새하얀 성이 그 추위를 막아줄 테고, 여러 다발로 뭉친 터럭은 판다가 죽을 때까지 죽지 않고 함께 하리라. 판다, 순징메이는 그렇게 살 것이다. 내 성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릴지, 아직은 내 마음대로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방세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고, 어느 곳보다 싼 마트를 찾아다니며 '원 플러스 원'이 붙은 상품만 사고 있으며, 더욱 추워진 겨울에 춘추용 재킷 몇 벌로 살고 있다. 나는 그녀가 그랬듯이 찾으려 한다, 나의 파라디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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