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응모 - 불완전한 고독

by 시궁창속한줄기빛 posted Oct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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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고독

 

 따돌림을 당했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귀찮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무렵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었다. 그 후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고난과 성장에 공감했다. 하찮은 고민을 구시렁거리는 또래 친구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은 시간을 조금도 자신에게 붙잡아 두지 못했다. 나는 소설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진리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헤세, 카뮈, 쿤데라, 하루키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소설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그냥 운이자 인연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읽고 책의 마지막쯤에 실린 작가 연보를 살펴봤다. 카뮈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을 희곡으로 각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악령>을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악령>은 상당히 긴 소설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 늦게까지 공부를 하여야만 했기에 소설을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 점심, 저녁 시간에 가만히 책상에 앉아 소설을 읽었다. 새 학기였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나는 사람을 사귀는 걸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소설을 읽는 게 더 좋았을 뿐이다.

 따돌림의 시발점이 된 그날, 나는 쉬는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책을 펼쳤다. 도시가 불에 타고 폭동이 일어나는 <악령>의 결말 부분을 읽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서술한 거대한 서사 속에 완전히 갇혀 그 어느 때보다 소설에 몰입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통수에 고통이 느껴졌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왔다. 맞은 것 보다 소설 속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더 짜증났다. 찌푸린 얼굴로 뒤돌았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얼핏 보아도 몸이 굉장히 단단해 보였다. 나와 같은 반 학생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나의 뺨을 쌔게 쳤다.

 나를 때린 놈의 이름은 진우연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복싱을 했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을 그만 두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서열이 정해진다. 싸움에서 이기거나 잘 싸우는 아이와 친해지면 어깨를 펴고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나는 학교생활에 흥미가 없어 잘 몰랐지만, 우연은 싸움으로 이미 아이들의 입에 여러 번 오르내린 상태였다. 그는 몇 번의 싸움 끝에 단번에 1학년 우두머리가 되었다.

 우연은 체육복을 빌리기 위해 우리 반에 들어왔다. 나의 짝에게 먼저 체육복을 빌려달라고 말했지만, 짝은 이미 체육복을 빌려준 상태였다. 그래서 우연은 옆에 앉아있던 나를 불렀다. 하지만 소설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몇 번을 불러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난 그가 나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만약 뒤통수를 맞은 뒤 바로 그에게 사과를 했다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찌푸린 얼굴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는 피로 쟁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두가 당연하게 인정하는 우연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반항이었다.

 반항에 대한 대가는 확실했다. 나는 원래 친구가 없었으니 더 외로워질 건 없었다. 다만, 자유를 조금씩 뺏겼다. 처음에는 같은 반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타인의 시선은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나에게는 소설이라는 나만의 세계가 있었고, 그 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상상과 창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벼운 행위다. 아무런 제한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점차 육체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괜히 뒤통수를 때렸고, 읽고 있던 책을 뺐었다. 그들에게 하루 종일 소설 속에 빠져 있는 나는 우연에게 감히 반항한 나만큼 괴짜였다. 나와 그들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들의 괴롭힘은 더 집요해졌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싸움이라고는 해보지 않았다. 운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에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에게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그 어떤 위대한 개별성도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나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거창한 공간은 바라지도 않았다. 조금 시끄러워도 방해받지 않고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나는 따돌림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저 요새 따돌림 당하고 있어요.” 결심이 선 날,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의 말을 들었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무슨 행동을 하여도 별 관심이 없었다. 나 또한 그런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부자지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를 원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세계가 철저하게 구분된 것이 홀가분하여 좋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아버지가 물었다. “도와주세요.” “어떻게? 아는 검사나 경찰을 소개해줄까? 아니면 내가 학교에 집적 말해줘?” “아니요. 동영상 몇 개만 찍어줘요. 한 시간만 투자하시면 돼요.” “나 변호사야.” “제보자는 익명으로 처리 할게요.”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밥이나 먹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따돌림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학교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학교 이미지를 생각해서 사건을 유아무야 덮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냥 알리는 건 재미없어 보였다. 법적 처벌만으로는 부족했다. 따돌림을 당하면서 버린 시간이 아까웠다. 나를 따돌린 아이들은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며 날뛰는 멍청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은 남을 짓 밞고 지배하면서 인정을 얻고 자기만족을 느낀다. 스스로 설 수 없기에 남들이 떠받들어 줘야 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두려워한다. 물론 앞뒤 안보고 날뛰는 놈들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맞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로 했다. 일종의 여론 재판을 계획한 것이다. 현대의 사회체제를 움직이는 것은 여론이다. 여론으로 공직자를 선출하고, 법을 제정하며, 정책을 시행한다. 법을 집행할 때도 여론의 눈치를 보기 십상이다. 집행자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여론에 부담을 느낀 집행자는 자신이 가진 재량 안에서 가능한 높은 형량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는 내 계획의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한 인간을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그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거세하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 앞에 서게 되기에 추억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 기억할 추억이 없는 자는 과거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과거의 망령은 현재를 계속해서 옥죄며 지나간 시간을 돌려달라고 목을 조른다.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이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를 앗아간다. 과거를 후회하다가 현재를 놓치고, 조금 전 놓친 현재는 또 다른 후회스러운 과거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조금씩 과거라는 늪에 빠진다.

 타인의 따가운 시선, 내가 우연에게 선사하고 싶은 벌은 이것이었다. 가장 민감하고 섬세할 나이인 17살의 우연에게 말이다. 그가 평생을 이 시선 속에서 허우적거리길 바랐다. 나는 모든 동급생들에게 추앙 받던 그가 전 국민에게 범법자로 낙인찍히는 극적인 전락을 상상했다. 그는 때때로 타인의 인정이 목말라 침을 튀기며 구걸하거나, 저주받은 인생을 한탄하며 목이 찢어져라 흐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타인의 시선은 더 따가워 질 것이다. 낙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허물과 고통을 보며 또 하루를 버틸 힘을 얻는다. 그 누구도 행복해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보잘 것 없는 권력과 자기도취로 나의 시간을 뺐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기나긴 벌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헤어 나오기 힘든 깊은 함정으로 그를 조금씩 유인했다. 우연 앞에서 적당히 복종하고 공포를 느끼는 척 연기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반항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더 세게 때렸다. 폭력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눈에서 다 잡은 먹이를 바로 앞에서 놓친 맹수의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맞을 때마다 휴대전화 녹음기를 켰고, 다친 신체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따돌림과 폭력을 당해 자아가 무너지고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었을 때 느낄법한 감정을 상상하여 글로 기록했다. 여론은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나는 여론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증거를 모았다.

 어느덧 우연에게 맞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일상은 반복이고 습관이다. 그는 학교 정문 왼쪽에 위치한 빌라 뒤편으로 나를 불러내 때렸다. 빌라와 담장 사이에 좁은 공간이 있다. 그는 그곳을 아지트처럼 사용했다. 그는 그와 친한 친구 세 명과 항상 함께 다녔다. 나를 때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한껏 성이 난 우연이 나를 때린다. 얼굴은 맞은 티가 나기에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가급적 주먹을 쥐지 않은 채 최대한 급소를 피한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오랫동안 괴롭힐 수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리면 친구들이 나선다. 마지막은 담배를 입에 문 그의 일장 연설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휴가 일정이 잡히면서 동영상을 촬영할 계획도 정해졌다. 휴가 첫 날, 나는 저녁 6시까지 학교로 와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등교를 했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평소처럼 행동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욕을 먹었고, 빵을 사러 매점에 갔다. 그 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었다. 지하 생활자가 동료를 경멸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6교시 수업이 끝나고 우연이 교실로 찾아왔다. 그는 친구와 얼마간 이야기하다가 나의 뒤통수를 쳤다.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3분 전이었다. 그는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뒤통수를 한 대 더 쳤다. 나는 웃으며 뒤로 돌아봤다. 그리고 굽실거리며 그의 기분을 맞춰주는 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렸다. 그는 나의 뺨을 두어 번 툭툭 치고 출입문으로 향해 걸어갔다. 나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윤리 교과서를 돌돌 말아 들고 우연을 뒤쫓았다. 그리고 교과서로 그의 뒤통수를 냅다 후렸다. 그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시끄럽던 교실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급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우연은 험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가 나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나의 뺨을 때리려던 순간, 그의 친구가 , 꼰대 오고 있어.”라고 말했다. “저녁 시간에 보자.” 우연은 화가 꾹꾹 담긴 목소리로 나에게 이 말을 남기고 교실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조금 전 목격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해 수군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연의 친구도 멀리서 나를 지켜만 볼 뿐이었다. 고양이에 대든 쥐에게 놀란 것일까? 아니면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사형수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촬영계획을 문자로 보냈다. 그리고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펼쳤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저녁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제자리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 채 우연이 오길 기다렸다. “가자.”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친구가 나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가 앞장섰고, 그의 친구들은 나를 둘러싼 채 뒤따랐다. 예상대로 빌라 뒤편으로 향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담뱃불이 꺼지고 구타가 시작되었다.

 꽤나 아팠다. 우연은 주먹을 쥐었다.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여론의 공분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의 주먹이 보다 사나워졌다. 타인에 대한 정복감이 그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맞으면서 빌라를 힐끔 올려다봤다. 2층과 3층 사이 층계참에 위치한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뒤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거친 신음을 토해냈다. 그의 발이 배를 강타했다. 나는 컥컥 거리며 한 모금의 숨이라도 더 마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약속한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다. 혹여 구타를 참을 수 없으면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내 던지기로 약속한 터였다. 나는 극적인 장면을 위해서 더 맞았다. 머릿속에는 유튜브에 올릴 동영상 생각밖에 없었다. 우연의 일장 연설을 끝으로 구타가 끝났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나를 남겨둔 채 떠났다.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나는 병원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맞을 때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폭력은 나쁜 거야.”라고 대답했다. 나는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배가 쓰라렸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나는 나와 아버지는 어떤 사이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운전을 계속 했다.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자동차가 멈춰 섰다. 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낯설지만 따뜻한 시선이었다. “나는 변호사야. 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그러니까 너 때문에 쓸데없는 수고를 조금 한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그 후, 아버지도 나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않았다.

 나는 한 달 간 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학교에 으름장을 놓았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 졌다. 경찰이 학교와 병실을 왔다 갔다 하며 수사를 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째 되는 날, 나는 유튜브에 아버지가 찍은 동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각종 사이트와 SNS에 동영상 링크 글을 게시하고, 정부 청원 사이트에 호소문을 작성했다. 여론은 금세 반응을 보였다. 동영상을 올린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 우연과 그의 친구들의 신상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병실로 찾아왔다.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인터뷰를 모조리 거부했다. 아버지는 나의 휴대전화와 방에서 우연히 찾은 것인 마냥 내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녹음 파일, 사진, 글 등을 기자들에게 보여줬다. 여론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어느 날, 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병실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검찰에 있을 때 함께 일하던 후배였다. 검사는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해 수사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후로 우연에 대한 나의 관심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나중에 그가 소년원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흘러들었을 뿐이다. 나는 미친 듯이 소설을 읽었다. 병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 <웃는 남자> 등을 읽었다. 학교에 다시 돌아갔을 때, 아무도 나를 건들지 않았다. 그렇게 자유를 다시 얻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고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세계를 유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당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를 읽고 있었는데, 나 역시 소설의 주인공인 스트릭랜드처럼 무한한 삶의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한 모험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버리고 싶었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색적인 문화를 경험하면서 글쓰기 소재를 찾을 계획이었다. 위대한 소설은 작가의 극적인 경험을 먹고 자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 집행 직전에 기사회생했고,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오랫동안 지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음울함과 인간 및 죽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의 원천이다. 카뮈 역시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지하신문 <콩바>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나치에 저항했다. 그의 작품세계 중심을 관통 하는 반항 정신을 실제 삶에서 몸소 구현한 것이다.

 나는 처절하게 고립되어 보다 고독해지고 싶었다. 좋은 소설가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은 믿음과 계획이 아닌 무수히 많은 우연과 좌절로 점철된 불확실성이다. 삶이 그러할진대, 삶을 그리는 소설가가 무엇에 기댈 수 있을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 형식적인 만남과 원하지 않은 호의에 대한 보답을 고민할 필요 없이, 부족하지만 내 능력이 닿는 한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그래서 오로지 내가 중심이 되는 그런 풍요로운 삶을 나는 원했다. 그 당시, 소설은 내가 던질 주사위의 모든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떠나는 것을 망설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영어를 배우면서 돈을 벌 심산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영어만큼은 꾸준히 공부했다. 영미 소설을 원문으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웬만한 영미 소설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회화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출국하기 전에 6개월 정도 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클래식 바에서 일을 했다. 4년 정도 외국을 떠돌 계획이었다. 단순한 아르바이트보다는 전문성을 기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칵테일 주조 기술을 제대로 배운다면 어느 나라에 가서든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예전부터 바텐더를 은근히 동경해왔었다. 화려한 조명과 대비되는 짙은 밤공기를 마시며 마른 수건으로 술잔을 스윽 닦는 바텐더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고독해 보였다. 새의 지저귐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 하루를 뒤로하고 단풍물이 스며들 듯 단잠에 빠지는 바텐더는 정말이지 이 세상에 홀로 서있지 않는가? 나는 바텐더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스스로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그래서 누군가가 기댈만한 버팀목이 되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그래서 어느 깊은 밤 망설임 없이 홀연히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의 계획을 듣고 알았다.”고 답했다.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동영상 촬영을 부탁했을 때도,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도 아버지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 선택들은 아버지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것들이지만, 적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각자의 자유에 선택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며 나를 나무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나는 놀이터 벤치 아래서 홀로 서럽게 울고 있는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내가 주운 고양이니 멋대로 다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굵은 수성 사인펜으로 고양이의 머리에 내꺼라고 큼지막하게 적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고양이를 보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발기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다. 아버지는 머리를 다 밀고 난 뒤, 울고 있는 나를 보며 고양이의 심정이 돼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런다고 아버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감정을 가진 생명체라면 절대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는 강조했다. 덧붙여 사람은 당연하고, 동물일지라도 가능하면 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훈계를 마친 아버지는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 꼼꼼히 씻겼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주웠던 곳에 그대로 방생했다.

 어학원의 도움을 받아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 받았다. 호주로 가기에 앞서 필리핀에서 두 달 동안 영어 공부를 했다. 나는 모든 일상을 영어로 채웠다. 수업을 듣고, 영미 소설을 읽으며, 일부로 한국인 학생들을 멀리했다. 반대로 선생님과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 영어 실력을 늘리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믿었다.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셨고, 클럽과 휴양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허했다. 빨리 영어 실력을 늘려 호주에서 일을 구하고 다시 소설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한없이 길었지만 되돌아보면 순식간에 사라진 두 달이 지나고, 나는 호주 멜버른에 방을 얻었다. 한국에서 일할 때 찍어둔 칵테일 제조 영상과 필리핀에서 선생님과 함께 작성한 이력서를 바탕으로 멜버른에 있는 바에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계속해서 떨어졌다. 영어를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지만, 막상 현지인과 이야기하니 많이 부족했다. 말이 너무 빨랐고, 호주 발음이 생소했다. 곧 돈이 거의 바닥났다.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다행히 조그만 호텔에서 청소하는 일을 구했다. 일을 시작한 뒤, 나는 밤마다 바에 가서 바텐더나 다른 손님들과 무슨 말이든 나눴다. 그렇게 5달 정도 흐르자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무난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찮은 기회로 자주 가던 바에서 바텐더 자리를 얻었다. 그 무렵 소설 읽기와 습작을 다시 시작했다.

 나의 외국 생활은 꽤나 순탄했다. 호주에서 1년을 보내고 영국으로 넘어갔다. 역시나 낮에는 소설을 읽고 썼고, 밤에는 바텐더로 일했다. 이때부터 단편소설을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취미로 요가를 배웠다. 낮에는 가만히 읽거나 쓰고 밤에는 온종일 서서 일하니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요가를 배우면서 자세가 발라졌고 집중력이 향상 되었다. 덕분에 글쓰기에 보다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요가에 깊게 매료되었다. 영국에서 2년을 산 뒤, 인도로 갔다. 마이소르와 리시케쉬에서 요가를 배웠다. 지도자 과정도 수료했다. 인도에서 7달을 지냈다. 그 뒤, 인도네시아, 베트남, 홍콩, 태국, 대만을 3달 동안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렇게 4년간의 긴 여행이 끝났다.

 대만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나는 공항 근처 숙소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계획했던 4년 동안 충실히 세계를 읽고 쓴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 있어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 씁쓸했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감정에 충실한 조르바를 보며 위안을 삼아보았다. 그럼에도 많은 기회 중 결국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삶의 유한함이 세계가 보여준 무한한 가능성과 대비되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날은 결국 펜을 들지 못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펜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누웠을 때, ‘결국은 이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거리를 설명한 글이 떠올랐다. 나는 물리적으로만 이곳과 멀어졌을 뿐, 존재론적으로는 항상 이곳에 있었다. 처절하게 혼자가 되고 싶었지만, 나와 타인을 완전하게 경계 지을 수 있는 칸막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화적 차이, 언어, 의식적 회피, 침묵 등도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 찾아갔고, 삼겹살이 생각나 먹었으며, 익숙한 침대에 누워 네모난 베개를 베고 둥근 베개는 품에 안았다. 아버지는 마치 4년 전 어느 날에 그러했을 것처럼 나를 대했다.

 호주로 떠나기 전, 나는 나와 이곳을 이어주는 끈은 아버지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곳과 연결돼 있었다. 하찮은 베개마저 나름의 방식으로 나와 함께 존재했다. 네모난 베개를 품에 안고 둥근 베개를 베는 나는 멜버른 중심가에 위치한 클래식 바에서 진토닉을 제조하는 나보다 훨씬 어색해 보였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이지, 내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불리며, 어떤 지위를 획득하느냐가 아니었다. 4년 만에 이곳에 돌아왔을 때, 나는 나와 아버지를 이어주던 희미한 끈이 오히려 더 진해졌음을 눈치 챘다. 아니, 어쩌면 희미한 끈은 더는 희미해질 수 없기에 진한지도 모른다.

 한국에 도착한 후로 한 달 동안 집에서 빈둥거렸다. 나를 소설가의 길로 이끈 <데미안>을 다시 펼쳤다. 알을 깨고 나와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지만, 결국 날개가 꺾여 이곳에 추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글은 한 자도 쓰지 못했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매일매일 지난 4년간의 일들을 정리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무언가를 찾는다면 바로 펜을 들어 기록할 심산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곳을 완전히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은 돌아가야만 할 곳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다. 이곳을 완전히 잊은 채 4년을 지냈지만,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행하는 나와 일상 속의 나 사이를 쳇바퀴 돌 듯 왔다 갔다 했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머뭇거리면서도 그렇다고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나는 이곳을 떠나고자 했고, 이곳은 나를 잡아당겼다. 전자의 이유는 명확했다. 나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후자의 이유는 흐릿했다. 나는 나와 이곳 사이를 이어주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자주 이야기했고, 동네 주변을 배회했다. 아이들과 쉬는 시간마다 뛰어놀던 초등학교 뒤편 우유 배급소, 웃긴 이름 때문에 자주 놀린 원장 선생님이 운영한 종합학원, 종종 싸움 구경을 하던 중학교 태권도 연습장 옆 공터, 좋아하는 여자와 처음으로 단 둘이 간 영화관, 하굣길에 자주 들러 물을 얻어먹은 친구 집, 그리고 단골 서점을 들렸다. 그런데 서점에서 나오자 추억을 떠올린 만한 장소가 더는 없었다. <데미안>을 읽은 이후로는 온통 소설을 읽고 쓴 기억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등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시작한 일에 찍을 마침표가 필요했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섰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3년이나 지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작은 책상과 그 위에 펼쳐진 소설 책, 그리고 고개를 들면 보이는 칠판과 교탁, 가끔 선선한 바람을 느끼고 싶어 고개를 내밀던 창문이 내가 기억하는 3년의 전부였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교실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반장, 짝 등 그 누구의 얼굴도 나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펼쳤다. <악령>이었다. 도시가 불에 타고 사람들이 미친 듯 대피하는 장면을 읽었다. 그때, 뒤통수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우연이 보였다.

 그렇다! 나는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별 힘을 들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교문을 나와 그에게 종종 맞았던 빌라 뒤편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걸 보니 여전히 누군가 이곳을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버지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던 창문을 바라봤다. 예전에 봤던 것만큼 멀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연의 근황을 찾기 위해 페이스북을 뒤졌다. 그가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지 않아서 계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업로드된 사진이 많았다. 그는 여전히 이곳에 사는 듯했다. 중국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봤다. 그는 일본식 덮밥과 라멘을 파는 식당에서 일했다. 댓글을 보니 그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인 듯했다. 그는 여느 20대 남성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적어도 사진과 글로 보기에는 그랬다.

 나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가 일한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두 눈으로 직접 그를 마주보고 싶었다. 그는 나와 이곳을 이어주는 몇 안 되는 연결고리 중 하나였다. 내가 그를 밀쳐냈음에도 말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우연은 주문을 받기 위해 내가 앉은 곳으로 다가왔다. 나는 규동을 하나 주문하면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살이 조금 빠졌고, 안 쓰던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본 그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우연히 마주쳤다면 그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지도 몰랐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요가를 시작한 후로 살도 꽤 쪘고 근육도 상당히 붙었다. 그리고 더벅머리를 하고 다니던 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짧고 단정한 포마드 스타일을 했으며, 우연처럼 안 쓰던 안경을 썼다. 그는 주문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과 장국, 밑반찬 등을 들고 왔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를 알아보길 바랐다. 그가 어떤 감정을 보일지 궁금했다. 당혹감, 분노, 두려움, 혹은 미안함?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쭈뼛쭈뼛했다. 나는 그가 규동을 가지고 올 때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애써 나를 외면했다. 음식을 다 먹고 계산을 하면서,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낯이 익네요.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그는 손사래를 치며 모르겠다고 답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헛웃음이 나왔다. 우연이 내 고등학교 추억의 전부라니. 고독을 원해 애써 쫓아낸 그는 망령처럼 내 옆을 떠돌고 있었다. 대로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이 다니는 길 아래로 난 굴다리가 보였다. 호주로 떠나기 전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벽을 가득 채웠던 낙서와 그래피티 위에 아크릴판이 덧대졌다. 천장에는 반짝이는 조명이 보였다. 훨씬 깔끔했다. 하지만 특유의 예술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사라져 아쉬웠다. “저기요.” 굴다리의 중간쯤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헐떡이는 우연이었다. 나는 그가 나의 정체를 알아채서 쫓아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화를 내며 욕을 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벌을 받은 것에 분노할 만한 인간이다. 나를 때릴 가능성도 있었다. 마침 굴다리에는 나와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놓고 가신 물건이 있어서요.” 우연이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갑은 바지 호주머니에 있었고, 휴대전화는 손에 든 상태였다. 그 외에 챙겨온 물건은 없었다. 나는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라고 말하며 그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는 주먹으로 나의 뺨을 쳤다. 나는 휘청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우연은 쪼그려 앉아 나의 얼굴을 노려봤다. “, 손님이면 다냐? 기분 더럽게 왜 사람을 그따위로 쳐다봐?” 나는 뺨을 문지르며 우연에게 물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몰라, 시발, 너 모른다고.” 그가 소리쳤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순간 당황하며 몸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거친 욕을 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나의 하관을 움켜잡았다. “시발, 방금 내가 말했지? 눈깔 똑바로 뜨라고, 개새끼야!” 그가 왼쪽 손바닥으로 나의 뺨을 때렸다.

 나는 아픔보다는 희열을 느꼈다. 그는 내가 찍은 낙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욕을 할 거라는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시선에 흥분하여 발작하는 그가 하찮았다. 우연은 그런 나를 보더니 더 흥분하여 나의 뺨을 마구잡이로 갈겼다. 그럼에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내가 의도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때리는 것은 내가 스스로를 때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마치 지휘자가 지휘를 하 듯 양손을 흔들었다. 그의 흥분한 얼굴에는 점차 당혹감이 서렸다. 나는 입을 오물오물 거려 입안에 고인 피를 모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뱉었다. 끈적이는 시뻘건 피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양팔을 더 거세게 흔들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껄껄거렸다. 우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었다. “, 미친놈 아냐?”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나는 눈을 감고 얼마간 그대로 누워있었다. 여전히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집에 가자마자 억지로라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쓰지 않으면 평생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배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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