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터
종소리가 들립니다.
내 육신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를 멈추면, 나는 정신이 창공과 같이 맑아지는것을 느낍니다. 창공과 같은 정신을 가지게 되면, 나는 부유하는 온갖 망념들에 혼을 팔아 버리지요. 이것은 과거로의 회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에는 빗방울과 당목과 종소리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빗방울과 당목과 종소리가 내 과거의 전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비로소 땅에 닿으며 우울한 빗소리를 창조해 냅니다. 그 우울한 소음 사이로 종소리가 들려오며, 종소리가 들려오면 당목의 이미지가 밀물처럼 나의 내면으로 밀려옵니다. 내 육신은 쳇바퀴 돌듯 지겹게 반복되던 일상을 잠시 멈추었고, 나의 정신은 창공같이 맑아졌습니다. 일상의 공든 탑이 무너질 때, 빗방울이 우울한 소음을 빚어낼 때, 사위가 어두울 때. 아, 종소리는 들려옵니다. 나에게만 들리는 것일 테지요. 내 과거와 현재의 일부인 듯, 전부인 종소리는 나를 과거로 회기하게 끔 인도하며, 사색하게 만듭니다.
과거로의 도약은 빗소리만큼이나 우울하고, 사위가 어두울 때만큼이나 공포스럽습니다. 아, 종소리는 들려오고 나는 막을 수 없습니다.
뎅...뎅...뎅...
영원할 것만 같은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종소리가... 종소리가...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소. 곧 괜찮아 질거요”
종소리 같은 환청이 자꾸 들리고,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큰 특이점은 없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그랬다. 요 근래, 아니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 올해 초봄부터였으니, 근 6개월 정도. 아마 그 정도 동안 나는 정말 힘들었다. 아마도 그 비극의 시작은 나의 오른팔이 부러짐으로부터였을 것이다.
올 봄. 샤워를 할 때마다 벽면 거울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좀 흉했다. 늘어진 가슴살, 툭 불거진 아랫배, 팔과 어깨를 뒤덮고 있는 우둘투둘한 성인여드름. 겨우내 묵혀두었던 내 모습은 그게 다였다. 나는 그런 나의 모습에 스스로 일견 진저리가 나서 운동을 시작했다. 헬스장에 다니거나, 조깅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선택한 운동법이 자전거 타기였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며 큰 맘 먹고 거의 50만원이 되는 돈을 주고 새 자전거까지 구입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기를 시작하고부터 2주도 채우지 못하고 팔을, 그것도 글 쓰는 사람의 생명과 같은 오른팔을 부러트리고 만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전기충격을 받은 듯 지릿하고, 부러진 부위의 통증은 참기 힘들 정도로 극심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골절되어 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그 때의 통증은 생생히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나는 벌벌 떠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 엠뷸런스로 옮겨진 나는 참으려고 해도 자꾸 새어 나오는 이상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근처 응급실로 향했다.
내 상태를 반증하듯 병원에서는 나에게 수술을 권유했다. 아 새순이 돋아나고, 하얀 하늘 아래로 분홍구름이 떠다니던 봄. 나는 결국 오른팔에 석고덩이를 매단 채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는 대표작이라고 내세울 만한 작품도 없고, 내세울 만한 이력이나 수상경력도 없는 소위 무명작가였다. 그러나 집필에 들어가면 철저히 정해진 일상의 시간표에 맞추어 생활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원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나는 쓰고있는 작품에 내 일상을 맞추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이 있었다. 이것은 작가인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이 작가를 만드는 격이었다. 이렇듯 집필중인 소설의 리듬에 맞게 쳇바퀴 돌듯이 재깍재깍 반복되며 돌아가던 내 일상의 공든탑은, 입원을 하게 되면서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팔 하나 부러진 것으로 수술까지 해야 되나 싶었지만, 멀리 호주에서 나의 소식을 들은 아내의 성화와 의사의 계속되는 회유로 결국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을 마치고 이틀 째 되던 날 밤. 아마도 처음 종소리 같은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던 때가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뎅... 뎅... 뎅...
처음으로 종소리가 들리던 날. 그 때는 그냥 수술 후 몸의 기력이 많이 떨어진 탓에, 환청이 들리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들려오는 환청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오른팔의 뼈가 붙어 아물고, 석고덩이를 내 몸에서 떼어낸 뒤 퇴원을 하게 되었을 때, 퇴원 후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종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집에 홀로 앉아서 마감일이 다가오는 장편소설을 마무리 하려고, 원고를 붙들고서 서재에 앉기만 하면, 처연한 종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도저히 순탄한 일상을 보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환청이 심한 날에는 만사 다 제쳐두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 날 수도 없었다. 정신과에 찾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신과가 문을 열 시간에 맞추어서 집을 나섰다. 정신과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2층에 정신과가 진료를 보고 있었다. 계단으로 2층까지 올라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정신과의 유리미닫이 문을 열었다. 카운터에는 30대 중반의 간호사가 컴퓨터 모니터를 맹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의사는 진료대기석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기... 선생님. 환청이 좀 들리는데. 종소리 같은.”
“따라 들어오시게” 나는 의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환청이오? 환청이 들린다라...”
늙은 의사가 진단지에 영어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면서 빈칸을 채워 나갔다. 나는 의사에게 나에게 들리는 종소리 같은 환청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비가 오는 날이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종소리 같은 환청이 끊임없이 들려와서 나를 힘들게 하노라고 말했다. 의사는 진단지 위에 계속 무언가를 적으며 나의 일상생활에 대해 물었다. 나의 직업, 나의 소설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스트레스 지수 검사용 테스트지를 책상위로 내밀었다.
“흔히들 있는 일이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곧 괜찮아질 거요.”
그게 전부였다. 간호사가 신경 안정제 비슷한 일주일 치의 약봉투를 챙겨주고 진료비를 청구했다. 약봉투를 챙겨들고 정신과 밖으로 나갔다. 마치 집중관리대상인 중증의 정신병 환자가 감시를 피해서 정신병동을 탈출 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과 건물을 나와서 집으로 걸었다. 간호사가 챙겨 준 일주일 치의 약 봉투는 횡단보도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별 일 아니라는 의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들리는 내 환청을 정신병이라고 스스로 믿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과에 정신병을 치료하러 갔다가, 정신병을 얻어온 것 같았다. 혼자 터덜터덜 발을 끌며 집을 향해 걸었다. 나는 문득 이 환청 같은 것이 근대문학에서 흔히들 말하곤 하는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의 증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침실로 가서 자주색 극세사 이불을 챙긴 다음, 소파에 가서 누웠다. 피로감이 몹시 밀려와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커풀이 닫히면서 시야는 사라졌지만, 자꾸만 잡스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에 부유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저녁때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바코드 리더기의 앞대가리를 똑 떼어 놓은듯한 거실 탁자위의 전자시계는 어둠속에서 붉은 LED 빛을 통해 나에게 지금 시간이 저녁 9시임을 알렸다. 어둠 속에서 눈을 몇 번 꿈뻑이고 있으니, 홍채가 금새 어둠에 적응하여 거실의 것들과 내 꼴이 대강 보이기 시작했다. 눈 밑까지 끌어올려 덮었던 두툼한 자주색의 극세사 이불은 편치 못한 잠을 잔 나의 잠꼬대에 마구 구겨진 채 소파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전자시계 옆에 있는 몇 모금 피지 않은 담배를 서너개 지져놓은 재떨이와 다 비우고 찌그러트려 놓은 맥주 한 캔, 그리고 근대 단편문학 모음집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얼굴을 가득 찌푸리고 소파에 모로 누웠다. 머릿속에 휴지뭉치를 끼워 넣은 듯 개운치 못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개운치 못함도 종소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일어나서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채로 목과 어깨를 돌려 간단히 스트레칭을 했다. 자녀교육을 뭐 엄청난 것이라도 되는 듯 여기고 있는 아내는 두 딸을 데리고 호주로 훌쩍 떠나버렸다. 아내와 내 두 딸이 호주로 떠나던 날, 나는 내 가족이 내 딸들이 잘 되는 길이 내가 기러기아빠가 되는 것 이라면 기꺼이 몇 년 참을 수 있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 그것은 나와 같은 보통의 중년의 남성에게 상상이상으로 힘든 일 이었다. 나라는 기러기는 니코틴과 알코올과 미흡한 지성이 끼어있는 날개를 푸드덕 거리면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식탁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저녁메뉴를 생각했지만, 딱히 허기진 기분이 들지가 않았다. 나는 앉아있던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의자를 빼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 안에는 생선냄새 같은 비릿한 냄새가 났다. 샤시창너머를 봤더니, 이슬비가 안개처럼 가로등의 주황불빛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 작은 물의 입자 하나하나에 주황불빛이 매달려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처연하게 느껴졌다. 10여분이 깜빡 지나고 나서야 나는 창밖으로부터 순식간에 침입한 여러 감각들에 홀연 정신을 팔아버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다리를 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꼭 나만 힘들다는 생각.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게 되는 것 이라고 애써 핑계를 대 보지만, 그런 생각은 애석하게도 별로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설마 나만 힘들지는 않겠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겠지. 나 때문에 힘든 사람도 아마... 있겠지.
아, 해는 도심의 빌딩들 뒤 서쪽으로 넘어가 버렸고, 빗방울들은 밤의 햇볕을 받으며 아래로 흩날리듯 떨어져서 딱딱한 아스팔트와 조우하고 있다. 이런 때에, 나는 나 혼자만 힘들다는 나 혼자만의 착각에 멍해진다. 뎅...뎅...뎅... 내면의 진혼곡이 마치 자신이 정신병 환자에게나 들리는 환청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서 내 귓가에 들려온다.
뎅...뎅...뎅...나의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저 레퀴엠. 내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저 레퀴엠은 나의 에고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하지만 나도 호승심이 강한 성격이다. 순순히 너의 장단에 맞춰 놀아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힘껏 뻗대어 주겠다고, 이번에는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종소리가, 아니 내 귀에 가득 찬 환청 같은 진혼곡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말하고자 이리도 나를 향해 울어대는지 알아야겠다. 너의 카타르시스를 내가, 나의 힘으로 눌러주겠다. 또 다짐한다.
언제나 그랬듯 얼마간 귓가에 맴돌던 무의식의 환청은 곧 잠잠해 졌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의 분노에 찬 다짐도 다시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몇 십분 만에 조용함을 느끼게 된 나는 스스로가 아무 감정도 촉각도 없는 나무토막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직 내 눈만이 꿈뻑대며 자신의 존재이유를 소리없이 브리핑하고 있었다. 입에 물었다가, 손가락에 끼워놓은 담배는 이미 재로 연소되어 나의 무릎에 떨어져 있었다. 꼬았던 다리를 슬며시 풀었다. 그 때 거실 소파위에 두고 잠들었었던 핸드폰의 벨소리가 베란다 창 너머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무릎에 떨어진 담뱃재를 훅 불어서 날려버리고, 소파로 가서 앉아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둠에 적응되었던 눈이 파아란 LED 불빛에 조금 아렸다. 액정에 비친 내 얼굴이 마치 때가 되어 저승사자와 대면한 도인의 모습처럼 푸르게 떠 있었다. 발신자는 연중 한 번 국민학교 동창회에서나 만나곤 하는 친구였다. 몇 해 전에 동창회에서 처음 만나 번호를 교환 할 때 성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름 두글자만 저장해 두었던 것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경식’ 이라는 두 글자가 성을 잃고 초라하게 액정위로 등장해 있었다. 나는 액정의 통화버튼을 가로로 길게 잡아 당겼다. 전화를 받은 경식은 통화예절 상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머뭇머뭇 말을 더듬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 그게 말이다. 득이 있잖아 득이. 녀석이 한 이년정도 동창회에도 안 나오고, 연락도 통 안 된다 싶었는데, 그런데 글쎄 죽었다네. 자살이라던데. 나도 방금 동창회에서 문자 받고 알았거든. 벌써 이틀째 랜다. 혹시 너 문자 못 받았나 해서 전화했다. 너 득이네랑 격장지린이었잖아”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온 몸의 맥이 탁 하고 풀려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내 주변에는 자살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 이라고 확신을 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득이는 자살을 할 친구가 아니었다. 자살이라니 득이가 왜.
“자살이라니...?”
“자세한건 나도 잘 모르겠다. S대학병원 3영안실 이라고 하더라. 득이 어머니 거기 계실 테니까 문상이래두 꼭 가라. 안타깝지 참.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 전하는 것도 아닌데 이만 끊자.”
전화가 끊어졌다. 액정의 파아란 LED 때문에 눈이 아릴뿐이었다. 통화를 마쳤을 때 이미 밤이 깊어있었다. 그러나 침대까지 가기는 싫었다. 나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언제 다시 종소리가 들려올까 혹시 그것이 또 지금인가 싶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득이가 자살을 했다’라는 명제가 계속 떠올라서 나는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내 혈액에는 미련, 후회, 회상, 걱정 이런 도움 안 되는 부유물들이 너무 많이 껴있었다. 그래서 내 심장은 다른 이들의 그것보다 더 열심히 노동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이 부유물조차도 속 시원히 놓지 못하는 나였다. 아니다 나는 부유물이 존재하는 원인을 모를 뿐이고, 혈액을 정화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아니다 아니지. 혹시나...
다음 날 새벽 일찍부터 나는 차를 몰고 달렸다. S대학병원 3영안실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밤 내리던 이슬비는 새벽이 되면서 점점 더 진하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와 섞인 비릿한 비 냄새가 차안을 가득 메웠다. 어릴 적 나는 정말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와 풀, 논과 밭 밖에 없었던 말 그대로 산골에서 살았었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부모님과 함께 경기도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간 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고향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 거리가 워낙에 멀기도 하거니와, 친척도 이웃도 몇 없었던 고향에 자주 갈 수는 없었기에, 부모님도 기껏해야 서너번 내려가신 것이 전부였다. 거의 30년 만에 홀로 처음 내려가는 고향 길은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갑작스런 충동이 일어서 내가 지금 이 도로를 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은 이미 충분한 예고를 거친 상태인 듯 차분했다.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서 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릴 적 득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고향의 마을에는 대나무가 참 많았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아마도 ‘죽암’ 이라고 불렀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당시 죽암은 열 가구가 조금 넘는 아주 소규모의 마을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될 때 까지도 집안에 전구가 흔하지 않아, 화로불이나 호롱불을 켜고 지냈으니 그 사정을 알 만한 마을이었다. 죽암은 정말 산골마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등산로의 입구 같은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 언덕길을 따라 15분여를 걸어 올라가면, 마을회관을 겸한 이장집이 맨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진 좌우 곡로를 따라 계속해서 오르면, 한 채 한 채씩 나머지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우리 집이 여섯 번째였나, 일곱 번째였나, 그 즈음 이었을 것이다.
마을에는 지천으로 대나무가 있었다. 겨울밤에, 캄캄한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그런 밤에는 대나무 잎이 부는 바람에 서로 부대끼는 청명한 소리가 특히나 듣기 좋았다. 그래서 어릴 적의 나는 거의 매일같이 어스륵한 저녁이 되면 날씨야 어떻든 마루로 나와 앉아서 그것들을 즐기며 신선놀음을 하곤 했었다. 나는 서울의 빌딩처럼 키가 크고 곧은 대나무를 좋아했다. 물론 죽암에 가장 많은 나무는 대나무였고, 내가 좋아했던 나무 역시 대나무였지만, 죽암을 대표하는 나무는 따로 있었다. 이장 집을 지나면 곧바로 보이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 대나무 숲 사이에는 좁은 오솔길이 한 길 틔워져 있었다. 오솔길을 지나가면 동화 같은 언덕배기 풀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묫자리 마냥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또 넓었다. 그 언덕배기 풀밭 한 가운데에 바로 죽암마을을 대표하는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나이는 많아보였지만, 굵고 실한 당목이었다. 그 당목은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마을 어른들에게 마치 마을의 수호신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당목은 나에게도 마을의 대표하는 나무로써, 마을의 수호신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몇 안 되는 마을의 내 또래들과 언덕배기 풀밭 그 당목에서 참 많이 놀았었다. 나이 지긋하신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몇 분은 당목근처에서 아이들이 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대신해 어른들에게 자주 호통을 치시곤 했다. 그러나 이장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어른들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 아마 죽암같은 산골마을에 그 언덕배기 풀밭이 아니면 동네 아이들의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곳이 마을 아이들의 집합장소로 쓰이는 것을 묵인해 주셨던 것 같다.
나와 득이는 기억이 안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다녔다. 열 살 때쯤이었나... 나와 득이가 대나무를 세로로 반 토막 낸 고추나무 꼬챙이 두 개를 서로 하나씩 쥐고서, 칼싸움을 한답시고 득이네 할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는 자두나무를 못 쓰게 만들어 놓았던 일이 있었다. 나와 득이는 그 일의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었다. 그 때 서로 신경전을 벌이느라 얼마간 데면데면 했었던 적을 제외하고, 나와 득이는 딱히 다투는 일도 없이 친한 친구사이로 둥글게 잘 지냈었다.
열 네 살 되던 해. 고추와 겨드랑이에 조금씩 까만 털이 자라나고, 잿물을 들이킨 듯이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날 적에도 나와 득이는 함께 다녔다. 득이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 무렵부터 책을 읽고, 무언가를 글로 써보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군 단위에서 열리는 규모가 꽤나 큰 글짓기 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학교의 대표로 대회에 참가한 나는, 운이 좋게도 그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로 입상을 했다. 담임선생님께 입상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나는 목이 빠져라 상장을 받을 날 만을 기다렸다. 나는 군수님의 이름이 적힌 글짓기 상장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상장을 받은 날 아마 득이 에게도 그 상장을 수십 번은 자랑했었을 것이다. 나는 상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교과서 사이에 잘 끼워 넣은 다음, 어깨춤에 책보를 평소보다 더 꽉 동여 묶었다. 상장을 받은 날 나와 득이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당목이 있는 언덕배기 풀밭으로 갔다.
내가 꽁꽁 싸매어 뒀던 상장을 다시 꺼내 득이에게 자랑하면 득이는 이제 고만해라, 고만해라 하면서 비시시 웃었다. 햇살이 지긋이 따듯한 봄날이었다. 날씨 덕을 제법 본 언덕배기의 풀들이 제 주제넘게 무던히 자라나 있었다. 득이와 나는 발로 풀섶을 문질러 헤쳐 놓고, 풀들이 누운 자리위로 함께 누웠다. 득이가 그랬었다. 니는 낸주에 작가가 될끼가 라고. 나는 얼른 응 그래 낸주 커서 작가할끼다 라고 답했던 것 같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나와 득이의 위로는 햇살이 있지만, 묵직한 뭉게구름이 끼어있는 그런 하늘이 있었다. 뭉게구름들이 떨어지는 오후의 햇살을 붙잡아, 지상에 너른 차양막을 만들어 내었다. 나와 득이는 함께 그 보살핌 아래서 미라사탕같이 달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때 나는 두루미 한 마리가 퍼덕퍼덕, 큰 날개짓 소리를 내며 날아와서 벌겋게 드러난 당목의 뿌리 근처에 빼꼼히 자라있는 노란 민들레 한 송이를 쪼아대는 꿈을 꾸었다. 몽환적인 꿈속에서 회색의 시멘트 소리가 났다.
“일나라. 일어나라. 비가 억시 올라카는 모양이다.”
득이가 소리치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투두둑. 봄비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잠에서 깬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의 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비는 곧 바가지로 내다 붓듯 세차게 내릴 것이 틀림없었다. 간헐적으로 빗방울이 눈으로 날려 와서 눈이 매웠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불었다.
“득아 날씨를 보니깐은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빨리가자”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득이에게 말했다.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던 글짓기 상장이 퍼뜩 떠올랐다. 비가 오면 상장이 젖을까봐 상장을 책보에 싸서 가져가려고, 다시금 책보위에 책을 바르게 쌓고 있었을 때, 나의 글짓기 상장은 갑작스런 돌풍에 날려서 슬쩍 젖은 풀들의 머리끝을 스치며 비행했다. 그 때 나는 두루미의 날개짓 소리를 다시 들었던 것 같다. 퍼덕퍼덕.
빗방울이 갈수록 거세 지는듯한 느낌이었다. 와이퍼를 2단으로 작동시켜 놓았는데도 앞 유리창이 울렁거릴 정도의 비였다. 울렁이는 유리창과 울렁이는 회상 속에서 과거로 가는 주행은 나에게 메스꺼움을 유발시켰다. 차체를 강하게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엑셀레이터를 밟을수록,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종소리가 더 크게, 더 명확하게 내 귓가로 울리는 것 같았다. 죽암까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열 네 살의 나는 득이에게 사과를 했었던가. 미안하다고, 다 내 탓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때의 득이는 나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밉지 않았을까? 내가 많이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득이가 나를 평생 죽도록 미워하고, 한없이 원망했었다면,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 종소리는 나에게 들리지 않았을까. 열네 살에 멈춰버린 핏덩이 같은 오른손과 30년을 지내면서 나를 많이 기억 해 냈을까. 그 때마다 득이는 어땠을까.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까? 그 힘들다는 것이 그를 자살하게 만든 것 이었을까. 당목에서 득이가 떨어졌던 순간의 기억. 그 때 나의 상장이 당목에 걸리지 않고, 차라리 날아가 버리지 하고 늦은 바람을 했던 기억.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같은 기억의 편린을 함께 쥐고 있었으면서, 나는 왜 꽤나 오랜 시간동안 일방적으로 그 기억을 잊고 살았던 것일까.
득이의 오른손이 30년 전 그때의 오른손으로 영원히 멈추었듯, 지금의 당목도 화석이 되어 30년 전 그 모습처럼 서서 남아있을까. 득이의 눈을 피하기만 했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용기를 내지 못했던 나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까. 득이를 대신해서 언덕배기 풀밭에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종소리처럼 문득 솟구치는 나의 후회와 죄책감을, 이기적인 생각을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을까. 비가 되어 내렸을까. 지금은 더 깊게 뿌리 내렸을까. 더 높이 솟았을까.
내가 열일곱 되던 해. 우리가족은 경기도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가 멀리 이사를 가기되면, 나와 득이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내심 득이의 눈동자를 마주 볼일이 없다는 생각에 조금 기뻐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내 내면의 총상에는 총탄이 된 득이가 깊게 박혀서 빠지지를 않았다. 단지, 통증이 사라지고 흉터만 남은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족이 이사를 가기 전날 밤. 득이가 나를 찾아왔다. 사고에서 헤어 나와, 일상으로 돌아온 득이는 오른손목 아래가 둥글게 잘려나가 있었다. 월광이 밝지 않아서, 득이의 얼굴도 손목도 그늘진 실루엣으로 보였다. 그래도 득이의 둥근 손목을, 얼굴을 봐야한다는 것은 여전히 괴로웠다. 득이는 나를 언덕배기 풀밭의 당목으로 데려갔다.
“앉아봐라.” 득이의 말이 아버지의 언어처럼 위엄있게 들려왔다.
“니 내일 이사 간다고?” 득이의 질문에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이사를 가서도 편지하면서 지내자. 짐은 잘 꾸렸느냐. 경기도 까지는 무얼 타고 가느냐. 이사를 갈 집에 가본 적이 있느냐. 득이의 질문에 나는 계속해서 응. 아니. 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의 계속되는 단답으로 대화의 주제가 금방 동나버렸다. 나와 득이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득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신과 마주보도록 내 어깨를 잡고 획 틀었다.
“니 안즉도 글쓰는 작가가 꿈인거 맞제? 내가 이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니 글쓰는데에 참 소질이 있는 것 같드라. 담임선생님도 안 카드나 니 작가 함 해보라고. 야야 니 군수님이 준 글짓기 상장 아직 가지고 있는거제. 그거는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된데이. 어디 잘 모셔놔라. 그거는 우째보면 내가 준거이기도 하다아이가.” 득이가 참 슬프게 웃었다.
“내 손하고 바꾼거다 맞제...?” 나는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상장 보면서 낸중에 꼭 유명한 작가가 되야한다. 실은 내가 손 이래 다치고 나서 참 많이 힘들었거든. 근데 이게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까는 별게 아닌기라. 힘들다카는거 그게 한순간이더라. 니도 유명한 작가가 될라카면 힘들지 않겠나. 그까짓거 그냥 한번 참고 넘겨보라고... 왜 우리 여기 올라카면 대나무 숲길 지나와야 하잖아 그 오솔길. 우리 여름에 거 한번 지나 갈라카면 모기에 수도없이 뜯겨야 지나갈 수 있다아이가. 또 겨울에는 뭐 지나가기 쉽나 눈오면 가지도 못하잖아. 근데 갈라고 마음먹으면, 쪼매 참고 지나가면 지금처럼 항시 언덕배기로 가게 되드라. 내가 겪어보니까 알겠드라... 그런거 같드라 힘들다카는게. 아, 그리고... 내 손 이래된거 절대 니 탓 아이다.”
열일곱의 젊은 날.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할 만큼 성숙하다고 스스로가 믿었던, 아니 스스로만 믿고 있었던 그런 젊은 날. 튼튼한 줄로만 알았던 나의 내면은 외부의 못질 한 번으로 금이 가고, 망치질 한 번에 바스라지곤 했다. 그렇게 쉽게 망가진 나의 내면을 보수할 때면 나는 말수를 줄이고, 사람들의 눈을 피했었다. ‘보수중’ 이라는 푯말이 내 내면의 대문 앞에 박혀있을 때, 나는 피보호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날에 문득 떠오르곤 하는 꼭 나만 힘들다는 생각. 나의 젊은 날은 마치 태풍의 눈에 들어가 있는 듯 항상 비바람과 추위와 혼란으로 가득했었다. 생각해보면 나를 태풍의 눈에 있게 했던 것도 젊음이었고, 비바람과 추위와 혼란을 막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차단책 또한 젊음이었다. 그러나 태풍의 눈, 그 속에 있었던 나는, 예고없는 못질에 대비하여 내 내면의 집에 미리 철근을 심어두거나, 시멘트를 덧칠 해 놓는 방법과, 세찬 비바람의 막아줄 벽돌담을 세우는 방법을 몰랐었다. 그리하여 나의 내면에 고난이라는 철거 계고장은 자연스럽고 서늘하게 내 우편함으로 스며들어왔다. 그 때의 나는 몰랐었다. 당목에서 득이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보수중’ 이라는 푯말을 세워놓은 나의 내면을 뒤엎으려는 철거 계고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득이는 이미 태풍의 눈 속에서 벗어 나 그곳에 없었다는 것을. 열 일곱의 나는 몰랐었다.
그날 밤. 득이가 말을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나는 한참동안 당목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앉아서 어둑하게 펼쳐진 월광사이로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을 보았고, 대나무 잎이 부는 바람에 서로 부대끼는 청명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가만히 울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득이를 볼 수 없었다. 그때. 어린 나는 그것을 참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우리 집은 경기도 외곽지역 그 중에서도 이름난 달동네 중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수도권 지역의 생활에 대해서 큰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그러나 새로 이사한 곳에 대해 적지 않은 실망을 했었던 것 같다. 새로 전학을 가게 된 학교는 집에서 내 걸음으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고향에서 등하교를 할 때 친구들과 함께 타고 다니던 낡은 자전거가 있었지만, 나는 굳이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 자전거를 자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향의 흙냄새가 묻어있는 낡은 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달동네에서 내려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발바닥이 아팠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가파른 오르막길에서는 종아리에 힘이 바싹바싹 들어갔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내가 이전에 살았던 죽암마을에 비해 딱히 나은 점도 없는 것 같았는데, 주소도 복잡하고 쓸데없이 가로등도 참 많았다.
사람들이 달동네라고 부르는 내 동네를 내려오면 커다란 교각이 있었는데, 그 다리를 지나면 달동네가 어디에 있었나 하고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높은 건물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 학교도 그 다리 건너에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나는 낮에는 검정색, 회색 정장을 입고 진청의 넥타이를 한 어른들을 구경하며 등교했고, 밤에는 건물 외벽 통 유리창으로 새어나오는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과 현란한 네온사인 간판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눈을 돌리며 하교했다. 그렇게 학교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코딱지가 새카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죽암마을에서 이사를 하기 전의 나는 도시생활에 상당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교과서든 텔레비전이든 모든 책과 대중매체들이 우리나라의 발전과 서울의 성장을 기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겪어본 도시의 생활은 내 동경을 깨트렸다고 하기에도, 내가 더 높은 목표와 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하기에도 무언가 찝찝했다.
나는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 본격적으로 내 꿈인 작가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나도 부모님도 갑작스럽게 많이 달라진 생활환경과 교육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곳에 동화되고자 어지간히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렇게 인위적인 노력으로 나는 도시 학교 친구들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나갔고, 그들의 생활방식과 유행을 조금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일 년, 이 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도시로 스며들었다. 이제는 흙바닥 보다 아스팔트가 더 익숙한 것이 되었고, 마루에 나가 앉아있는 것을 대신해 베란다로 나갔다. 어느덧 죽암마을은 그리고 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그 자리를 잃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무사히 서울소재 대학의 국문학과로 진학을 했다. 부모님은 거의 평생 모은 돈을 내 학비에 보태주셨다. 나는 대학을 2학년까지 마치고 군에 입대했고, 전역 후 별 탈 없이 대학 졸업장을 따냈다. 여느 도시의 내 또래와 다를 것이 없는 삶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난을 겪는 것도 그랬고, 어렵게 취직한 직장의 직장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며 이직을 고민했던 것도, 어느정도 마음에 드는 직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후에는 지난 생활을 돌이켜 보며 슬쩍 비웃어 보았던 것도,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결혼을 걱정하게 되었던 것도. 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대나무가 아니라 대나무같이 높은 빌딩에 더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어느 덧 사회에서 어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생의 세 번째 줄을 모두 긋고, 내가 마흔에 가까워 진 때. 고향의 친구와 어렵게 연락이 닿아서, 국민학교 동창회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매년 동창회에 참석을 한지 5년 쯤 지났을 때, 뜻밖의 인물이 동창회에 나타났다. 분명히 득이였다. 거의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득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내면의 총상은 금방 덧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것이 열 일곱 때였다. 그때보다 조금 더 마르고 머리카락이 조금 더 빠진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비시시 웃는 미소도, 아직 고쳐지지 않은 촌스러운 사투리도 그리고 둥글게 잘려나간 오른손도. 내가 단번에 득이를 알아봤듯이 득이도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너 많이 좋아졌다. 하나도 안변했다. 뭐하고 지내냐 와 같은 시시콜콜한 안부인사가 나와 득이사이에서 오고 갔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득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히 다시 봤을 때 나는 어렸을 적 내가 가졌던 감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나의 진짜 속마음을 대신해서 멋들어진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법에 능숙해져 있었다. 열 네살에 사고가 난 이후로 그의 눈을 쳐다보고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던 나는 이미 없었다.
어쩌면 득이는 나에게 사과를 바랬을 수도 있었다.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나에게, 가면을 쓴 거짓얼굴에서라도 사과를 해 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혹은 나에게 여태까지 오른손 없이 살아온 자신의 힘든 삶에 대한 위로를 바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득이의 얼굴에서 그의 힘든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내 가면이 벗겨질까 두려움에 떨며 그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그의 힘든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득이는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천진하게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겠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득이는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정확히 얼마나 오fot동안 서울에 살았는지는 득이가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득이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할 나이가 되면서부터 서울에서 살지 않았겠나 하고 추측했다. 나는 득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득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있다면 몇 살인지 어른으로써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그러나 나는 득이가 동창회에 참석한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양복을 입고 이렇게 멀끔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말 남아있는 내 죄책감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30년 만에 득이를 처음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음이 뜬구름처럼 둥실했다. 득이의 말대로 득이의 손이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니었다. 글짓기 상장이 바람에 날려 당목의 가지에 걸렸을 때, 득이는 나를 대신해 당목으로 올라갔다. 내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절대로. 거의 당목의 꼭대기 까지 올라간 득이는 당목의 가지위로 기어가서 내 상장을 집었다. 득이가 올라가 있는 나뭇가지가 큰소리로 부러지고, 그대로 득이는 당목에서 추락했다. 득이의 오른손목이 바닥에 처참하게 짓이겨 지는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질 때의 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났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득이의 옆에 떨어진 글짓기 상장을 주워서 또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책으로 잘 덮어 두었다. 그리고 얼른 이장 집으로 달려가서 이장님에게 득이가 다쳤다는 것을 알렸다. 득이는 어른들이 곧장 병원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 나는 득이가 손목을 절단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쳤네 하는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 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면 득이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원망으로 하루하루 득이를 피해가며 힘겹게 지냈었다. 마흔에 가까운 지금도 그런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득이는 멀쩡히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참 다행인 일이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오른손이 없기는 했지만, 득이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 밥을 먹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까지 그렇게 잘 버텨준 득이가 한편으로는 고맙기까지 했다.
동창회에서 30년 만에 득이를 처음 본 날의 내 감정들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에 빠져있었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 때의 나에게 어쩌면 지금과 같은 종소리가 들렸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단지 내가 그 울림을 듣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꽤나 오랜 시간동안 운전을 했는데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나는 목적지인 죽암에 이제 거의 다다랐다. 죽암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산길은 더 이상 비포장의 흙길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아스팔트길이 떨어지는 빗물을 흡수시키지 못하고 모조리 토해내고 있었다. 흙길이 아스팔트길로 포장되어 있었고, 몇몇 집들의 흙벽이 벽돌담으로 바뀌었고, 조악한 기와지붕이 쓰레타지붕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 이외에 죽암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산골마을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래도 고향이라는 곳이 모조리 바뀌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언덕길을 차를 타고 올라갔다. 걸어가면 그리도 멀고 힘들었던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길을 따라서 어느정도 올라가자, 이장집이 맨 처음으로 보였다. 전에 없던 마당이 생겼고, 그 안에 작은 텃밭도 일궈져 있었다. 새로 깔끔하게 도색된 이장집의 대문 앞에는 구식 SUV가 정승처럼 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장집이 보이는 언덕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근래에 보기 힘든 비였다. 차에서 내린 다음 트렁크로 뛰어갔다. 트렁크에 항상 구비되어 있는 검정색의 신사우산을 꺼내 펼쳤다. 우산을 펼쳤는데도 이따금 불어오는 비바람에 바짓단이 금세 젖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비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는 우산의 저항을 함께 도우며 느리게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죽암이 원래 사람이 많은 마을은 아니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는 탓에 집 밖으로 나와있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짓단이 홀랑 다 젖을 때 즈음 이장 집 바로 앞길까지 도착했다. 그곳에 서자 이장 집 뒤편에 있는 대나무 숲이 보였다. 대나무 숲에는 30년 전의 대나무들 보다 더 키가 큰 대나무들이 같은 곳에 자라나서, 30년 전의 대나무 숲 모습을 보전하고 있었다. 나는 이전의 걸음보다 더 느리게 대나무 숲을 향해 걸었다.
대나무 숲은 비를 머금어서인지 그 진녹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저 숲을 이루고 있는 대나무들은 내가 지켜본 대한민국의 성장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자라났을 것이다.
나로 인해 힘들어졌을 득이가 살아남지 못했던 높디 높은 서울의 빌딩들.
이곳에 빌딩처럼 높이 자라난 진녹의 대나무들.
어쩌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면서 힘든 날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끊임없이 인내하고 있었을 득이를 힘든 나날에서 버티지 못하게 했던, 더 힘들게 했던 진청의 넥타이들.
혀를 빼물게 하는 더위가 기승이던 여름날. 대나무 숲 사이에 숨어있다가, 득이와 내가 지나갈 때면 그렇게도 달려들었던 모기들 그리고 티끌같은 풀벌레들.
젊었던 날에도, 마흔이 넘어 갑자기 동창회에 참석했을 때에도 나에게 힘들어 하지 말라고 되려 나를 위로해 주었던, 조금 더 참고 견뎌내 보자던 득이가 왜 자살을 했던 것인지. 어쩌면 나는 알 것만 같다.
나는 대나무 숲 앞의 오솔길 까지 다다랐다. 어른이 된 나는 진흙에 발이 빠지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성큼걸음으로 대나무 숲 속 오솔길을 걸어 나갔다. 빗방울들은 키가 큰 대나무들의 잎에 먼저 떨어져서 모였다가, 하나의 굵은 빗방울이 되어 내 검정우산 위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키 큰 대나무 숲에 숨어 오솔길에 누군가 지나가기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던 이름 모를 풀벌레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았다. 걷다가 뜬금없이 인중에 거미줄이 걸리게 되었을 때에도 어릴 적의 나처럼 기겁하며 넘어지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박혀있는 대나무들 사이의 깊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해도, 더 이상 소름이 돋거나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다.
저기 오솔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 서자, 그 너머 언덕배기 풀밭이 그대로 보였다. 예전의 풀들이 아니고, 공기도 다르고, 흙의 냄새도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 넓은 터가 30년 전과 같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당목 한 그루가 있었다. 14살의 득이가 나의 글짓기 상장을, 작가라는 지금의 내 직업을 당목위로 올라가서 건져주었던 그 당목. 그곳에는 득이의 오른손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언덕배기의 풀을 다시 밟았다. 오솔길에서 벗어나자, 대나무 잎에 걸려 지면으로 바로 떨어지지 못했던 빗방울들이 다시 세차게 내렸다.
나는 지금 언덕배기 풀밭 이 빈 터에 홀로 서 있다. 대나무 숲속에서, 아니 서울에 무섭게 자라난 대나무들 그 숲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매던 득이. 득이가 애타게 부르짖으며 찾고 있었을 이 빈 터에 나만 홀로 서 있다. 이 빈 터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들 한 가운데의 당목. 그 발치의 한없이 외소하고 낮아 보이는 풀들은 지금 이 비바람에도 하늘대며 서 있는데, 비를 맞고 벌건 살갗을 드러낸 당목도 여전히 굳건한데. 득이는 어디로 갔을까. 함께 서기에 충분히 넓은 이 빈터에 나 홀로 서있는 것. 그것이 너무 서러웠다.
득이가, 당목에서, 추락했던 그 때, 그 날로부터, 한 줌의 흙이 되어, 지난 30년 동안, 지층속에 묻혀있었던, 과거가, 종소리가 되어, 나의 귓가로, 들려온다.
뎅...뎅...뎅...
이 종소리는 과거에 머무른 종소리가 아니고, 지금의 종소리다. 지금의 종소리가 힘 있게 울려 퍼진다. 지금 이 순간에 비로소 나는 이 종소리가 나를 더 힘들게 하려는 환청이 아니었음을, 내 내면의 진혼곡이 아니었음을 확신한다.
내가 서 있는 이 빈 터의 빈자리가 너무도 많아서 나는 그 자리를 채울 방법을 홀로 상상해 본다. 나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숨을 들이쉬자, 담배연기가 뭉텅지게 내 목구멍을 따라 넘어갔다.
우산이 굳이 필요한가?
우산을 내 던지고 흠뻑 비를 맞아본다. 내 육체는 머리카락부터 빗물에 젖어가기 시작한다. 힘찬 울림으로 내 귓가에 들리는 종소리가 태초의 하느님처럼 나를 재창조하고 있다. 그 종소리는 점점 비어있는 것이 되어 내 귓가에서 희미해지며, 귓가에서 희미해지는 종의 음파는 뜨겁게 녹아서 나의 육체에 빗물인 듯 용암이 되어서 흘러 내렸다.
삼켰던 담배연기가 나의 혈액 속으로 스며든다. 다시 담배연기를 내 뱉을 때 나는 나의 과거와, 나의 우울과, 나의 영혼과, 나의 것인 종소리를 담아서 이 빈터에 토해낸다. 담배연기는 흩어지지 않고 이 빈터를 메우고, 나는 계속해서 담배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힘들다는 착각 그 일시적인 것도 함께 담배연기에 섞어 빈터로 뱉어냈다.
아 아, 요의가 느껴진다. 누군가가 나의 요도를 잡고 쥐어짜는 듯 요도가 매웠다. 비를 맞고 서 있는 탓에 체온이 조금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콧물도 흐르는 것 같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참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 새벽에 집에서 차를 몰고 나왔을 때부터 나는 밥도 굶고 있었다. 끼니때를 놓쳐서 그런 것 일테지. 허기가 몰려왔다. 아니 그런데 내가 밥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던 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먹은 것이 없는데 나의 대장에서 구르르륵. 비둘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 이었다. 열 손가락의 끝마디들의 말초신경들이 일부러 나를 간질이는 것 같다. 몸을 비틀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었다. 온 몸이 일시에 요동치는 탓에 피가 아래쪽으로 몰린다. 나의 성기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안절부절 하긴 해도 무엇인지 모르게 몸에 생기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싫지는 않다. 간만에 머릿속도 참말 매끈해 지는 느낌이다.
담배연기를 마시고, 내 뱉을수록 나의 육체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내 육체와 정신이 조금 가벼워 진 것 같았는데 웬걸?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나는 그만 빈 터에 누워버린다.
그리고, 운다.
--------------------------------------------------
이름 : 김규관
이메일 : fnffn0617@naver.com